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20:32:52

아스카 시대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시대
{{{#!wiki style="" }}}

{{{#!wiki style=""
}}}
{{{#!wiki style="" }}}
가마쿠라 시대 {{{#!wiki style="" }}}
무로마치 시대 {{{#!wiki style=""
}}}
{{{#!wiki style="" }}}
}}}}}}}}}

1. 개요2. 시대 상황

1. 개요

[ruby(飛鳥時代, ruby=あすかじだい)]

일본의 시대 구분 중 하나. 기간은 아스카쿄가 세워진 592년(양력 593년)부터 헤이조쿄(나라) 천도인 710년까지이다. 더 넓게 잡으면 일본에 불교가 유입된 538년부터 시작으로 볼 수 있으며, 이 경우 고훈 시대와 겹친다. 한국사삼국시대 후반부 및 남북국시대 전반기와 겹친다. 국내에서는 아스카 시대의 한자를 그대로 읽어 비조시대라고 일컫기도 한다.

아스카(飛鳥)라는 명칭은 그 당시 정치의 중심지가 지금의 아스카 지방이었기 때문에 붙은 것인데, 왜 飛鳥를 아스카라고 읽는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주변 자연 경관이나 새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설부터[1], 고대 한국어산스크리트어에서 전래된 말이라는 설까지 다양하다. 왜(倭)라는 국호를 지금의 일본으로 바꾼 것 또한 이 시대 후반이다. 아스카 시대는 일본이 아시아 대륙의 문화를 적극 받아들여 발전하던 때로, 쇼토쿠 태자가 활약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시작 시점을 잡는 기준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아스카 시대는 일본에서 불교를 필두로 하여 바다 너머의 동아시아 문화 요소가 수용되면서 토착 문화와 겨루는 시대였다. 특히 친불교파인 소가 씨가 정권을 잡은 후 불교문화가 매우 융성하여, 가히 불교 문화의 전성기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위-진-남·북조, 수-당, 삼국과 가야의 외래문화와 일본 토착 문화는 충돌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융합될 기미를 보이며[2], 헤이안 시대에 일본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2. 시대 상황

파일:asuka_cloth.png
아스카 시대의 조정 관복

일본에서 불교가 융성해지는 시기가 이 시기며[3] 천황[4]의 불교 귀의를 놓고 불교를 배척하는 모노노베씨와 불교의 공인을 요구한 소가씨가 격렬하게 대립했는데, 결국 587년 소가 씨의 군사쿠데타로 인해 모노노베 씨족은 멸망하고 소가 씨족이 대권을 쥐게 된다. 소가 씨는 한반도에서 온 백제 도래인 계열로 추정하는 설이 있다. 목만치 참고. 이들은 관료세력을 형성하고 왕실의 외척이 되어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대신이었던 소가노 우마코를 중심으로 한 숭불파는 모노노베노 모리야 등 배불파를 숙청하고 스슌 덴노를 옹립하기에 이른다. 이후 우마코는 그를 숙청하려는 스슌 덴노를 역관광시켜 살해하고 다시 쇼토쿠 태자의 고모를 최초의 여자 천황인 스이코 덴노로 옹립했다. 이후 외손자인 쇼토쿠 태자를 섭정으로 즉위시켰고, 그 치세 아래 아스카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파일:external/ysaino11.blog.so-net.ne.jp/asukadera-22-de1e4.jpg

일본은 당시 선진국인 중국(동진, , , , )과 발전된 고구려·백제·신라·가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드리며, 크게 발전한 시대이다. 백제에서 설계도를 가져와 만든 사찰아스카데라가 대표적인 예인데, 건축 자체도 고구려-백제 계열의 모습을 보여주며, 출토된 기와 등은 부여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같다. 그리고 아스카 시대 최강의 군인이자 가장 강력한 세력인 소가 일족의 우미코 소가노 우마코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갈 때마다 무조건 자신뿐만 아니라 군인들에게 가야, 백제식 갑옷과 환두대도를 장착하도록 명령했던 장군이었다. 참고로 당대 아스카에서 소가 바로 북쪽의 명칭은 다름아닌 백제(百濟)였다고 하며, 소가천도 백제천(百濟川)이라고 불렸다. 또한 절의 목탑 심주를 세우는 날에는 당시 일본의 신료들이 백제 옷을 입고 행사에 참석했다고 한다.[5] 백제 말고도 고구려로부터 영향 받았으며 대표적으로 나라의 다카마쓰 고분, 돗토리의 널판그림(板繪·이타에).#

일본 최초의 절인 아스카데라 이후에는 호류지·시텐노지·호키지·고류지 등이 건설되는데, 이 시대의 주요한 가람배치인 1탑 1금당식은 구다라요가란(백제양식 가람百濟樣伽藍)으로 불리고 있다.

이 중 고류지(廣隆寺)는 교토에 위치해 있으며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당시 교토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호족 하타노 가와카쓰(秦河勝)에 의해 세워졌는데, 하타씨는 신라계 도래인이라는 설이 있다. 이곳에 있는 일본 국보 반가사유상이 한국의 국보 반가사유상와 매우 닮아있어 한국에서 보내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었으며 신라 진평왕이 보냈다는 설이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매우 흡사하지만 묘하게 다른 점도 없지는 않기에,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에서 보내지 않았다는 추측도 있기는 하지만 주류적인 해석은 아니다.

그리고 신라는 조선술·축제술을 전해 주었으며, 가야는 토기·철기·갑옷 제작기술을 전해 주었다.
[1] 카스가의 사례처럼, 와카에서 '나는 새의(飛ぶ鳥の)'라는 마쿠라코토바가 아스카에 붙기 때문에 아스카의 한자가 飛鳥가 됐다는 설이 있다.[2] 아직은 신불습합이 진행되기 한참 이전 단계였기 때문이다.[3] 불교가 융성해지면서 그 유명한 육식금지령메이지 유신 전까지 선포되었다.[4] 사실 이 시기에는 천황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다. 후대에 소급된 것.[5] 부상략기(扶桑略記)의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