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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06:20:54

육식금지령


1. 개요2. 역사3. 영향
3.1. 식문화에 미친 영향3.2. 과장된 영향
4. 메이지 유신 이후5. 비슷한 사례6. 매체에서의 묘사

1. 개요

675년 덴무 천황이 육식을 금하도록 선포한 명령으로, 1872년 메이지 천황이 해제할 때까지 약 1200년 동안 유지되었다. 육식 금지령의 영향으로 인해 일본의 육식 문화는 어패류와 가금류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소고기와 돼지고기 요리는 상대적으로 잘 취급되지 않는 등 기형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1]

2. 역사

庚寅. 詔諸國曰. 自今以後. 制諸漁獵者. 莫造檻穽及施機槍等之類. 亦四月朔以後. 九月卅日以前. 莫置比滿沙伎理梁. 且莫食牛馬犬猿鷄之完. 以外不在禁例. 若有犯者罪之.
경인(17일)에 제국(諸國)에 조를 내려 “금후 각종 어업, 수렵에 종사하는 자에게 금하노니 올무를 놓거나 함정을 파는 일, 기계를 이용한 창 놓기 등의 행위를 하지 말라. 또 4월 1일부터 9월 30일 이전까지 어린 고기를 잡는 것을 하지 마라. 또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고기를 먹는 것을 삼가라. 이 이외에는 금례에 들지 않는다. 만약 이를 어기는 일이 있으면 벌을 내린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29, 덴무 4년(675년) 4월 17일 # 영인 페이지[2]

당나라 · 백제를 통해 일본불교가 유입되어 신토와 함께 자리잡자,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의 영향이 강해져 675년 덴무 천황이 농경 기간 동안 , · · 원숭이 · 의 섭취와 사냥, 어업을 금지했다. 식재료로 거의 쓰지 않는 원숭이가 기재되어 있는 반면에 가장 대표적인 가축 중 하나인 돼지는 없다는 점이 다소 특이한데, 멧돼지와 사슴을 사냥하던 무사들의 사냥 문화를 배려했기 때문이다.[3] 후대에는 원숭이를 빼고 돼지, 을 더해 육축(六畜. 소 · 말 · 양 · 돼지 · 개 · 닭)을 금지한다고 바뀌었다.[4]

오래도록 불교를 숭배한 일본의 정권들은 지속적으로 육식 금지령을 내렸다. 사냥 문화를 향유하고 육식을 하던 무사들이 권력을 차지한 시기에도 육식 금지령은 여러 차례 내려졌으며 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도살 금지령을 포고했다. 이는 기근을 신의 징벌로 인식한 조정과 막부가 살생이라는 업보를 쌓아 신과 부처의 진노를 사서 기근이 더 오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내린 조치였다. [5]

허나, 무가 정권 시기부터 육식 금지령의 강도는 이전에 비해 약화되어서 무로마치 시대에는 어패류와 가금류 요리가 인기를 끌었다. 조정과 막부가 영락한 전국 시대에는 육식 금지령의 영향이 대폭 약화되서 서양 상인들로부터 유럽의 육류 요리가 소개되고 이전 시대보다 더 많은 육류를 섭취했다. 이후, 칸분 연간부터 육식 금지령이 다시 강화되어 육식 문화가 다시 침체되었고 본격적인 성장은 메이지 유신을 기다려야 했다.

11대 조선 통신사(1763년)의 일행 중 한 명이었던 원중거(元重擧, 1719∼1790)는 츠나요시의 치세부터 육식 금지령이 강화된 에도시대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여섯 가지 가축(소, 말, 양, 닭, 개, 돼지)을 먹지 않으며 집안에서도 키우는 마축이 드물다. 풍속에서 도살을 기피하는데 개나 말이 가장 심하다. 가축이 죽으면 모두 땅에 묻는다. 소가 만약 병들어 죽으면 태워서 기름을 취하여 등(燈)을 태우는 데 쓴다. 이런 일은 천한 자들로 하여금 맡아 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꺼려서 나가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즉시 그 나머지 살과 남은 뼈를 땅에 묻는다. 혹 병자의 약으로 쓸 경우에는, 소를 낭떠러지 위에 세워 놓고 밧줄로 끌어서 거꾸러뜨려 추락사하면 적당히 약용을 취하고 그친다. 나머지도 죽은 소의 예와 같다.
집돼지는 가정에서 키우는 것이 전혀 없다. 우리 사행을 위하여 멧돼지를 산 채로 잡아서 보내주었기에 잡게 하여 음식으로 하였다. 닭 또한 드물게 키우는데 그 키우는 자들은 단지 때를 알려주는 것만 취할 뿐이요 음식으로 먹기 위한 것은 아니다.
화국지(和國志, 1763?) - 음식(飮食) 편[6]

3. 영향

일본은 오래도록 불교 문화가 융성하고 헤이안 초기부터 케가레(부정)에 대한 관념이 확산된 탓에 살생을 하면 부정타고 업보가 쌓인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살생을 할 수 밖에 없는 육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확대되었고 이는 지속적인 육식 금지령의 반포와 통제 강화로 이어졌다. [7]

또한 쌀 문화와 채식 문화의 확산이 케가레 관념에 영향을 받아 육식에 대한 지배층의 인식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본의 지배층들은 쌀은 고귀한 음식, 고기는 부정한 하품 음식으로 간주했고 이러한 풍조는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나 교토의 귀족들은 채식하는 것을 마치 특권처럼 여기고, 육식을 하는 이들을 부정하고 하찮은 자들로 무시했다. 이런 뒤틀린 공가 문화가 퍼진 탓에 교토의 식문화는 상당 기간 동안 채식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이는 백제와도 유사한 편인데, 불교의 영향을 받은 백제 귀족들은 주로 채식을 하고 도리어 하층민들이 더 많은 육류를 섭취했다.

사냥 문화를 영위하던 일본의 무가 정권들조차 공가와 불교 문화에 영향을 받아 사냥 금지령이나 육식 금지령을 내리는 등 계급 배반적인 일을 저질렀다. 가마쿠라 막부의 막후 실력자 중 하나였던 호조 마사코가 반포한 사냥 금지령과 개쇼군이란 멸칭을 듣는 츠나요시의 생류연령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다만, 막부의 금령은 쇼군가에 근심거리가 있거나 자연 재해, 환난이 일어났을 때에 시행하는 일이 많았다. 신의 벌을 받아 재해가 일어났는데, 괜히 살생을 해서 부정타고 업보를 쌓는다면 사태가 더 안 좋아질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츠나요시의 생류연령도 실은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던 게 영향을 미쳤다. 쇼군가에 후계자가 없는 일을 신불의 진노 때문이라 생각하여 이를 가라앉히고 부정을 떨쳐내려 한 것이다.

일본에 채식 문화를 퍼뜨리고 육식에 대한 나쁜 관념을 주입한 불교계의 입장은 늘 한결 같았으나, 가마쿠라 시대 이후로 육식 문제를 놓고 교단 간의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 성장한 신불교(선종, 정토종, 법화종) 세력 중, 정토종과 일부 법화종 교단이 악인정기(惡人正機)를 강조하며 고기를 먹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자, 구불교(화엄종, 천태종, 진언종) 교단들이 격렬하게 비판한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선 통신사 일행의 기록에서 보듯 외국인인 조선인들도 일본인의 식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8], 비슷하게 18세기에 출간된 일본의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에서도 "우리나라(일본) 사람들은 고기를 피한다"라는 내용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신량역천이나 천민 취급을 받던 에타와 히닌들 같은 경우, 기존에는 무두질, 가죽 세공, 도축업에 종사하던 이들이 육식 금지령과 일본의 불교 국가화로 인해 하층민 취급받게 된 것으로 파악했지만, 70년대 이후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빈곤에 시달리던 빈민층과 천민 취급받던 이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평민들이 기피하던 무두질, 가죽 세공, 도축업에 종사한 것이라고 한다. 정부의 조치와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무두질, 가죽 세공, 도축업 등이 천하고 부정한 업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유목민 출신으로서 도축업에 종사한 고려의 양수척과 조선의 백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천민 취급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9]

이는 동 시기 중동에서 일어난 일과도 비슷한 현상인데, 이슬람 제국에서 도축업은 3D 업종이라 무슬림들은 이를 기피했고,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던 기독교인들이 도축업에 진출하기 시작해 상당 기간 동안 기독교인들이 도축업계를 장악하기도 했다. [10]

3.1. 식문화에 미친 영향

1200년 가까이 지속된 명령이었기에 당연히 일본 식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양갱(羊羹)이란 원래 이름대로 양고기에서 나온 선지로 만든 요리였는데[11], 일본에서 선지를 으로 대체해서 만든 것이 현재의 일본식 양갱이 되었다. 만두중국은 두꺼운 피에 여러 고기, 야채, 향신료를 넣어 주식으로 먹고 한국은 얇은 피에 고기, 야채, 두부, 당면[12]을 넣어 반찬으로 먹지만 일본은 밀가루 피 안에 팥앙금을 넣어 간식으로 먹었고, 이것이 만쥬이다. 그 외에 양갱과 유사한 과자류로 규히(求肥)라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중국에서 본래 牛脾라고 소 지라로 만든 음식이었던 것을 찹쌀가루로 대체하고 글자를 求肥로 바꾼 것이다.

일본에서 십이지돼지(ぶた)가 아닌 멧돼지(いのしし)인 것 역시 육식 금지령의 영향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 멧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것이 일본서기에는 600년대 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13] 이 시기에 육식 금지령도 이루어졌으니 가축으로서의 개량은 미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돼지는 가축이 아니라 무사들이 사냥하는 야생 동물이었던 것이다. 위 화국지 기록에서도 돼지가 아니라 멧돼지를 잡아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사츠마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 가축으로 기른 돼지를 잡아 먹는 것을 본 다른 지역의 주민들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불교 문화와 지속적으로 내려진 육식 금지령의 영향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닭고기 · 오리 고기 · 물고기 · 멧돼지 고기 · 사슴 고기 · 고래 고기 · 계란을 중심으로 단백질을 섭취했다. 괜히 일본에서 스시류가 발전한 게 아닌 것. 일본인들이 오래도록 고래고기에 집착한 것도 육식 금지령과 불교의 영향일 수 있다. 또한, 오리 고기는 물에서 나오니 생선이라거나, 멧돼지 고기는 산에서 나오니 고기가 아니라 채소라거나, 산에 사는 고래이므로 생선이라거나, 토끼를 새로 간주하고 수를 셀 때 '깃(羽)'으로 세는 것도 이러한 식문화 때문에 나온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고기 중에서 가장 금제가 강한 고기는 소고기였다. 그래서 어패류나 가금류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도 소고기는 대단히 강력하게 제한했다. 또한 시대별로, 정권별로 규제와 대중들의 인식도 상이해서 제한이 적었던 유제품 같은 경우에도 취식에 부정적인 관념이 드러나는 일화가 있고 어패류와 가금류도 이와 유사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의 식문화 발전이 두드러졌던 무로마치 시대에는 가금류 고기와 어패류는 고급 음식으로 취급하면서 야생 동물 고기는 하품으로 취급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3.2. 과장된 영향

육식 금지령 때문에 일본인들이 오랫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거나, 전근대 일본에서 제대로 된 육식 문화가 거의 전멸한 지경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하찮은 낭설이다. 애초에 행정 제도가 발전하지 못한 전근대에 법이 철저하게 지켜진다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현대인의 오판이며 교토의 천황이 칙령 하나 내렸다고 열도 전체가 즉각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육식 금지령은 일본의 육식 문화를 위축시켰을지언정, 이를 소멸시킬만큼 철저하지 않았으며 시대별로 그 영향이 제각각이었다.

일본의 육식 문화는 지속적으로 금지령이 반포되고 불교 문화가 강해지면서 위축된 것이지, 675년의 육식 금지령만으로 일본이 비건 국가가 된 것은 아니다. 애초에 금지령을 지속적으로 반포했던 것 자체가 일본에 육식 문화가 유지되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675년 금지령만으로 일본이 비건화되었다면, 굳이 수십, 수백 번에 걸쳐 육식 금지령을 내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 일부 신불교 교단들이 육식을 한 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일 또한, 육식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수백 년 동안 이를 지키지 않고 육식을 하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천무천황이 내린 육식 금지령도 육식 그 자체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4월부터 9월까지 육식 취식을 막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로 육식 문화가 위축될 수는 있을지언정, 소멸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천무천황의 금령은 육식 그 자체를 금지하는 조치였다는 말로 와전되었고, 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천황과 공가들을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한 무사들이 공가 문화와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조정의 육식 금지령을 계승하긴 했지만, 실질강건을 중시하고 활동량이 엄청난 무사들이 채식만으로 열량을 확보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막부 시기부터 일본의 육식 금지령은 점차 완화되고 육식도 허용되기 시작했으며 사냥 문화도 부활했다. 특히나 한반도에서 전래된 매사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에미츠를 위시한 다수의 무사들이 환장할 정도로 좋아한 야외 활동이어서 에도 막부는 오래도록 조선에서 매를 수입했고, 환경의 변화에 민감한 매들이 이송 과정에서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매 관리사인 응장(鷹匠)을 파견할 정도였다.

그래서 무사들이 육식을 하는 것은 편법으로 남의 눈을 피해 몰래 하는 짓도 아니고, 육식이 고위층들의 식단에 전면적으로 오르지 못한다거나 고기 요리에 능한 이들이 욕 먹는 일도 없었으며 일본에 제대로 된 전통 고기 요리는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한 지경이 아니었다. 사냥 금지령이나 강력한 육식 금지령이 내려진 시기가 아닌 이상, 무사들의 식단에는 언제나 사슴 고기와 멧돼지 고기가 올라왔고 공가와 불교계가 사냥에 대해 지적하면 약으로 쓸 고기를 구하기 위한 ‘약렵(藥獵)’이나 ‘군사 훈련’이란 명분을 내세워 사냥에 나섰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무사와 영주들도 육식을 하거나,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많다. 전국 시대, 오다 노부나가는 매사냥을 좋아했고 엔랴쿠지를 공격할 때도 "승려들이 매일 고기를 먹으면서 비단옷을 입고 여자를 끼고 살 정도로 타락이 극에 달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치천의 군주마저 못 건드린 엔랴쿠지를 불살랐다. 승려로 출가한 다케다 신겐도 죽기 몇 년 전부터 으로 매일 을 잡아서 삶아 먹었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록도 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느 날부터 다케다 신겐의 전속 요리사가 닭을 잡지 않고 있다는 간자의 보고를 듣고 신겐이 죽었음을 눈치챘다고 한다.

매사냥을 좋아한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성곽이 아닌 야외에서 외박하는 일이 많자, 막부 중신들의 부탁을 받은 마사무네가 과거에 매사냥을 하던 이에야스를 급습할 계획을 세웠던 일을 거론하며 이에미츠를 성으로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있으며 나카가와 히데마사처럼 전시에 매사냥을 하다 조선군의 급습을 당해 죽는 이도 있었다.

지역적으로는 육식 금지령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류큐 왕국, 도호쿠, 홋카이도 일대의 아이누인들은 목축과 수렵으로 육류를 섭취했고, 조정이나 막부의 령이 제대로 미치질 못하는 산간 지역과 규슈의 일부 지역에서도 육식을 했다.

직업적으로는 사냥꾼과 무사들이 사냥 활동을 통해 야생 짐승 고기를 취했다. 도축업자들의 경우, 사회적 인식이 심각하게 나빠서 이들을 천민으로 취급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무가 정권 시기부터 도축업자와 가죽 세공업자들은 무사들의 식단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의복과 갑옷 제작에 필요한 가죽을 다루었기 때문에 영주나 호족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천민 취급받을지언정 무사들의 시종이 되어 나름대로 그 지위를 인정받고 생계를 영위할 수 있었다.

일본의 비건 국가화를 도모하고 육식을 부정한 일로 취급한 공가들도 겉으로는 고기를 멀리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육식을 했다. 이들은 고기를 하품이나 부정한 식자재로 간주하면서도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보양식으로 인식했다. 원래 소고기는 가장 강력한 규제가 걸린 육류였지만, 몸이 아플 때 먹는 보양식으로 먹는 고기 중에서 최상품으로 치는 것이 소고기였다. 그래서 공가들이 아프단 핑계로 소고기를 먹는 일이 많았다.

육포의 형태로 말린 것을 환약처럼 만들어서 조선의 비법이라면서 '조선우육환'(朝鮮牛肉丸)이라고 만들어 파는 일도 있었다.#

상술했듯이 무로마치 시대에는 어패류와 가금류를 고급 식자재로 취급했고 조정과 막부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진 전국 시대에는 서양의 식문화가 유입되고 육류 취식도 늘어나 육식 문화가 성장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에도 시대 초기까지 이어져서 시장에서 육류를 취급할 정도였다. 다만, 이에츠나의 집권 후반기인 칸분 연간에 육식 금지령을 내리면서 다시 규제가 강화되었다.[14]

허나, 에도 막부가 규제 일변도의 정책만 실시한 것은 아니다. 상술했듯이 일본의 육식 금지령은 규제와 완화를 오가는 것이었다. 에도 막부 시기에 하코네 번은 소 사육을 허가받아 쇼군에게 소고기를 진상하는 업무를 담당했고 사츠마 번에서는 번주가 류큐에서 돼지를 수입해 사육했다. 특히 에도막부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츠마의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부타이치도노'(豚一殿돼지전하)라고 불릴정도로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다.[15] 바로 전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탄수화물 중독과 당분 과섭치로 인해 거의 모든 이빨이 다 썩고, 각기병에 시달리며, 20세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과 달리, 요시노부는 상당한 미식가였으며 76세의 나이로 숨지면서 에도막부 최장수 쇼군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에서 동물을 키워도 잡아먹을 용도로 키우지 않았다거나, 소는 농경, 말은 교통 수단, 닭은 시계, 계란 생산용으로 썼다는 이야기, 가축이 죽으면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고 시체에서는 기름을 짜냈지만, 절대 살은 먹지 않고 묻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일본의 전근대 역사 전체에서 볼 수 있는 보편화된 모습이 아니라 특정 기록에 드러나는 특정 시기의 일이다.

소고기에 대한 금령은 강했을지언정, 가금류에 대한 규제는 약해서 일본 역사를 통틀어 가금류의 취식까지 막은 금지령은 드문 편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농가에서는 닭과 오리를 키워 도축했고, 몰래 밀렵을 해서 멧돼지 · 토끼 · 사슴 고기를 구하기도 했다. 게다가 수명이 다해 죽은 동물의 고기는 오정육(五淨肉)에 속해 승려들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다. 이조차 먹지 못하게 하는 승려가 있다면, 그는 데바닷타 같은 근본주의 이단이다.

일본 고유의 고기 요리라 할 만한 스키야키마저도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두부 · 곤약 · 버섯 등만 넣어 만든 채식 요리였다가 나중에 고기가 추가된 요리가 아니다. 해유록 같은 기록에 나타나듯이 스키야키는 원래 ‘어육’이 들어가는 요리였다.

전근대 이후에도 일본인들의 평균 키가 한국인들보다 작은 점, 일본인이 한국인과 중국인에 비해 이 갸름하고 덧니가 많은 점을 육식 금지령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나, 이는 과학적 근거가 없으며 사실무근이다. 육류 섭취가 많은 남미나 몽골 지역 등에서도 평균 키가 작은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애초에 인간의 신장은 육식 외에도 환경이나 민족간 혼혈[16]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용하는 복합적인 사안이며 상술했듯이 일본의 육식 금지령은 시대별로 그 영향이 오락가락하는 편이었기에 육식 금지령만으로 일본인의 평균 신장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지극히 부적절하다. 2024년 기준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평균 신장은 약 2 ~ 3cm 정도 차이나는 수준으로 그 격차가 적은 편이다.

4.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메이지 유신을 선포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육식 금지령도 1197년만에 완전히 해제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자신이 직접 공개적으로 고기를 먹었음을 전하는 것으로 금제가 풀렸음을 알렸다. 허나, 오랜 기간 동안 고기를 먹지 않다 보니 도축 기술이 부족하고 고기 특유의 누린내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신정부는 육식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서 스키야키[17], 돈까스[18]경양식이나 일본식으로 개량한 고기 요리를 전파해 서서히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나갔다. 소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과장광고가 나왔을 정도로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육식을 문명인의 상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될 정도였다. 이후, 성장을 거듭하던 일본의 육식 문화는 한반도와 대만, 중국의 고기 요리가 유입되고 보편화되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다채로워졌고 일본인들의 식탁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비건 국가화를 추진하고 피지배층에게 채식을 강요하던 일본의 지배층들이 메이지 유신 시기부터 일종의 ‘육식 역코스 정책’을 실시해 육식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고 육식을 장려하자, 지배층의 탄압에 저항하며 육류를 먹던 일본의 대중들이 역으로 육식 문화 장려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육식을 문명인의 상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대중적으로 “인성에 문제가 있는 인간이나 고기를 먹고 ‘문명인’이 되었다고 허세를 부린다.”는 분위기도 존재했으며 소고기 식당이 개업했다는 소식만 들리면 식당에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고 영업을 방해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래서 신정부는 대중들의 정서에 변화를 일으키고 육식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1880 ~ 90년대까지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5. 비슷한 사례

고려불교의 영향으로 육식 문화와 도축 기술이 크게 쇠퇴했다. 송(宋)의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따르면, 도축할 때는 동물을 두들겨 패거나 절벽에 떨어 뜨리거나 산 채로 불태우고 핏물도 제대로 안 뺀 것을 대충 구워서 내놓아 접대용으로 내놓은 고기에 악취가 심해 먹기가 곤란했다고 한다.

허나, 동 시기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육류를 아예 취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려도경에는 왕공 대신들의 식탁에는 고기가 오르고, 양고기와 돼지고기는 왕공 대신과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한다는 기록, 백성들은 어패류를 많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사에는 권신 이자겸이 세도를 부릴 때, 뇌물로 받은 고기가 너무 많아 썩을 지경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개고기와 관련된 유물, 고려 시대에 제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육포와 어포가 발견된 일도 있다.

이후, 원 간섭기부터 몽골 문화의 영향을 받아 육식 문화가 다시 부흥했으며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의 지배층들은 육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불교 문화를 탄압했기 때문에 육식 문화는 계속 성장해 나갔다. [19]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 조선 침공을 위해 전국에서 군사들을 징발해 시모노세키 군항으로 집결시켰는데, 당시 시모노세키는 복어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징병된 군인들은 당연히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이들이었기에 바다를 접해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고, 이때문에 제독 기술이 부족한 군인들이 복어의 독을 완벽히 제거하지 못하고(...) 요리해먹다가 조선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죽어나가자 복어금식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에도 막부에서도 유지됐다가 근대화 이후 이토 히로부미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해제했다고 한다. 복어 관련 영상.

6. 매체에서의 묘사


[1] 근대 이후 일본의 고기 요리는 대부분 한식(야키니쿠, 호루몬 등), 중식(징기스칸 요리, 교자, 라멘 등), 양식(돈가스, 니쿠자가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2] 왼쪽 페이지, 오른쪽에서 2번째 줄부터이다.[3] 정확히는 당시 일본에는 고기를 먹기 위해 가축으로 개량된 돼지가 없었다. 그래서 보통 돼지를 가리키는 말이 일본에서는 멧돼지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대표적으로 12간지의 돼지가 일본에서는 멧돼지를 가리키는 식이다.[4] 여기서 양은 천무천황의 치세에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5] 737년 텐표 대기근 시기에 내린 도살 금지령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6] 번역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박재금 역, 소명출판, 2006"을 그대로 옮겼다. 번역서 기준 308쪽에 해당 내용이 실려 있다.[7] 대승 불교에서 육식을 금하게 된 것은 보통 양무제가 517년 내린 단주육문(斷酒肉文)으로부터인 것으로 본다.[8] 위의 기록에서도 보이듯이 외국 사신에게는 고기 요리를 대접했는데, 고기 요리법이 발달하지 못했다보니 누린내와 같은 잡내를 전혀 잡지 않아 먹는게 고역이었다고 한다.[9] 에타와 히닌은 양수척과 백정들처럼 원래부터 도축업에 종사한 게 아니라, 형편이 어렵고 생계 수단이 막막해서 남들이 기피하는 도축과 무두질을 하게 된 것이다.[10] 이슬람과 힌두의 교리를 혼동하여 무슬림이 도축한 고기만 할랄 취급한다는 오해가 있는데, 칼을 든 사람의 종교와는 상관 없이 이슬람 교리에 따른 방식으로 도축하면 할랄로 취급한다. 무슬림들과 이슬람 국가의 지배층들은 기독교인이 도축하고 조리한 고기 요리들을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였다.[11] 원래 갱(羹)이라는 글자의 뜻 자체가 고깃국을 의미하는 것이다.[12] 당면이 전래된 이후. 한국에 당면이 들어온 건 일제강점기 때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이전의 정통 한국 잡채는 문자 그대로 채소와 나물을 섞어 만든 것이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양을 불리기 위해 당면을 섞은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한복려 여사의 어머니 황혜성 여사의 스승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방상궁으로서 조선궁중요리 초대 기능보유자(일명 인간문화재)였던 한희순 여사는 늘 당면잡채를 '가난뱅이 잡채'라고 깎아내리면서 제자 황혜성 여사에게도 '가난뱅이 잡채'는 절대 만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 정도였다.[13] #[14] 이에츠나의 육식 규제 강화, 츠나요시의 생류연령 시행은 영향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쇼군에게 후계자가 없다는 문제도 작용했다. 결국 이에츠나는 이복 동생인 츠나요시에게, 츠나요시는 조카인 이에노부에게 천하인의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15] 이 별명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직에 오르기전 히토츠바시 가문에 있던 시절부터 하인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별명이라고 한다.[16] 현대 일본인들은 야요이인조몬인의 혼혈이 직계 조상이다.[17] 고기를 얇게 썰고 날계란물에 찍어 먹어 그나마 익숙한 비린맛인 계란 비린맛으로 육향을 가렸다.[18] 고기를 얇게 피고 튀김옷으로 완전히 덮어버려 육향을 가렸다.[19] 단, 소는 농경에 중요한 가축이었기에 소에 대한 도축은 강력하게 제한했고, 허가 없이 소를 도축한 것을 적발당했다간 중벌을 면키 어려웠다. 다만, 성균관에 고기를 공급하는 반촌의 반인들처럼 소 도축을 허가받은 이들이 소고기를 유통한다거나, 병에 걸렸단 핑계를 대고 소를 도살하는 등 편법으로 소고기를 먹는 일이 성행했다. 그러다 조선 후기가 되면, 왕조 후기 특유의 체제 이완 현상이 일어나 규제가 완화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소의 도축과 소고기 소비가 크게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