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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3 17:41:29

고려도경

1. 개요2. 역사3. 아쉬운 점4. 구성5. 여담6. 외부 링크7. 같이 보기

1. 개요


고려, 북송 시절 쓰여진 서적. 원 제목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줄여서 《고려도경》이라고 한다. 원 제목의 '선화'(宣和)는 북송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였던 휘종의 마지막 연호이다.[1] 선화 연간에 휘종 황제의 명을 받들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온 것을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라는 뜻이다.

고려시대 생활 풍속을 비교적 알기 쉽게 설명하여 오늘날 고려사 연구자들이 필히 참고하는 주요 서적 중 하나이다.

2. 역사

북송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이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1달여간 방문하여 보고 들은 것을 귀국 후 보충하여 1124년 송휘종에게 제출한 보고서이다.

선화 5년인 1123년은 고려 제16대 예종이 붕어하고 제17대 인종이 즉위한 다음해인데 북송은 예종을 조문하고, 인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이 사신단은 벽란도를 통해 고려의 도성 개경사신 숙소인 순천관에 1개월 가량 머물렀다.

이때 보고 들은 것들 중에서 중국과 다른 특이한 풍속을 기록해서 300여 조가 되었고, 이를 정리하여 40권으로 만들었는데, 물건은 그 형상을, 사건은 설명을 달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 명명했다.

3. 아쉬운 점

'도경'이라는 말 답게 원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헌데 이 책 간행 2년 만에 한족 역사상 최대의 치욕이자 북송의 멸망을 불러온 정강의 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림을 날려먹었다. 만약 그림이 남아 있었다면 고려의 사찰 및 궁궐같은 고려 건축과 회화는 물론 고려시대 복식사와 생활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아래에도 언급하지만, 《고려도경》 자체는 그 한계 때문에 정확도도 의심받는 책이라서, 시간이 없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타국인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질 사신의 생각을 서술한 글보다는, 눈으로 본 경험이라 할 그림이 더 중요한데, 그 그림이 날아갔다.

서긍은 이 책의 원본을 2부 만들어 1부는 황제에게 바치고, 나머지 1부는 본인이 가지고 있었는데, 황실에 바친 1부는 송 사회에 제대로 퍼지기도 전에 정강의 변으로 날려먹었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한부도 1127년 봄 동네 사람에게 빌려줬다 미처 반납하기도 전에 마찬가지로 정강의 변 와중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뜬금없이 1137년 강서성 남창현 홍주에서 그림이 분실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때 다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지만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기억이 잘 안나서인지[2] 결국 안했다고 한다.

이후 서긍이 사망하고 14년이 지난 1167년 서긍의 조카 서천이 그림이 없는 버전으로 재간행한 것이 오늘날에 이른다. 서긍은 본업이 화가였지만 조카인 서천은 그림 일과는 연이 없었다. 이 간행본을 흔히 '징강본'이라 이르는데, 고려도경 판본 중에선 가장 권위있는 판본이라 할 수 있지만, 사실 이 책조차 서천의 발문을 보면 1137년 발견 당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을 서긍의 기억으로 복구했고, 서천이 간행하는 과정에서 임의로 첨삭했을 가능성도 있기에 원본과는 내용 차이가 있을 수 있어 아쉬운 부분이다. 때문인지 그 외 판본들과 내용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다.#

4. 구성

1, 2권은 건국 과정과 고려 왕 계보 등에 대해 서술하고, 3권부터 7권까지는 고려의 영역과 형세, 개경의 성곽 그리고 궁전과 관복 등을, 8권에서는 당시 고려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였다. 9권부터 15권까지는 의례 용품과 의장 호위대의 복장·칼 등의 무기·다양한 깃발 그리고 수레 등을, 16권은 고려의 관부에 관한 내용을, 17권부터 18권까지는 도교와 불교 등의 종교에 관한 사항을, 19권부터 23권까지는 사회계층과 생활풍속 등을 서술하였다. 24권부터 32권까지는 사절단에 대한 여러 가지 예우와 의례 절차 그리고 숙소에 마련되어 있는 그릇 등의 비품을, 33권부터 39권까지는 고려의 각종 배와 바닷길에 관한 내용을, 마지막 40권에는 중국과 같은 고려의 문물을 기록하였다.

《계림지》(鷄林志) 등을 참고하여 건국부터 풍속 등까지 내용을 소개하고, 작업 과정 등을 설명했는데, 아무래도 사신이 고려를 오가는 과정과, 개경에 틀어박혀서 보고 들은 정보 위주에, 송나라인 기준으로 서술해 송휘종에게 올린 목적성이 있는 글이기 때문에 기록을 해석할 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고 교차검증도 필요한 부분이 많다.[3] 조선에 온 외국인들이 남긴 수기를 봐도 같은 내용을 보고도 다르게 서술하는 경우가 있듯, 서긍이 당대 고려 생활상을 기록한 것은 가치가 있으나, 서긍이 고려에 오래 산 것도 아니고 다 둘러본 것도 아니라[4] 주관성을 배제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고려도경에서 고려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이런 구절들이 있다.
하지만 중국과 다른 고려의 풍속을 세세하게 기록하여 남겼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고려의 세시풍속이나, 목욕을 좋아했던 고려인의 성향, 남녀가 혼욕을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등의 풍속 기록이 남은 것은 다 이 책 덕분이다.[6] 실제 고려도경에선 사실 여부를 떠나 서긍 관점에서 본 고려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두루 기술되고 있다.[7]

당대 고려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국왕 인종을 비롯해 이자겸[16], 윤언식, 김부식[17], 김인규, 이지미 등을 설명했다. 북송 기준 "동남쪽의 이적(夷狄)들 중에는 고려의 인재가 가장 왕성하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서긍 눈에는 인재들도 제법 보인 모양. 여담으로 지나가면서 이름과 직책을 언급만 하는 수준으로 척준경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번에 사자가 국경에 들어가매, 모든 신하들 중에 현명하고 민첩한 자들을 가리어 영접하는 예절을 맡겼는데, 주목(州牧) 중에는 형부시랑 지전주(刑部侍郞知全州) 오준화(吳俊和), 예부시랑 지청주(禮部侍郞知靑州) 홍약이(洪若伊)ㆍ호부시랑 지광주(戶部侍郞知廣州) 진숙(陳淑)이 맡았고, 맞아 위로하고 전송하는 일은, 은청광록대부 이부시랑(銀靑光祿大夫吏部侍郞) 박승중(朴昇中),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중서시랑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侍郞中書門下平章事) 김약온(金若溫),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事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최홍재(崔洪宰),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겸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兼中書門下平章事) 임문우(林文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척준경(拓俊京)ㆍ이자덕(李資德)이 맡았었는데, 이들은 모두 왕의 근신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8권 <인물>(人物)

5. 여담

2015학년도 역사교사 임용고시 단답형 1번 문제로 출제되었다.

고려도경은 고려사고려사절요 등에 적혀있지 않거나 분량이 적은 분야의 내용들도 있다보니, 고려의 미술사나 도자기 등 미세적인 분야의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서판교에 위치한# 아시아퓨전식당 고려도경은, '고려의 맛있는 음식에는 십여가지가 있는데 그중 을 먹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다.'라는 문헌 본문 내용을 인용하여 브랜딩 한 음식점이라고 한다.

6. 외부 링크

7. 같이 보기


[1] 1119년 ~ 1125년 사용. 선화 다음 연호가 '정강의 변'으로 유명한 정강(靖康)이다.[2] 자기가 그렸더라도 10년만에 발견한 책이라면 기억이 잘 안나는게 어찌보면 당연하다.[3] 심지어 고려도경 내에서도 서로 말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4] 공식 일정 외 숙소 밖 외유는 5~6차례가 전부였다고 한다. 게다가 서긍은 군읍편에서 지방도시 중 서경을 가장 번성하다고 썼는데, 당연히 가봤을리는 없으니 들은 기록일 것이다.[5] 정작 개경 중심부는 바닷가랑 멀긴 하다.[6] 참고로 조선 시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온 사람들이 일본의 혼욕(혼탕) 풍속을 글로 전하면서 조선인들 사이에 '일본은 남녀가 같이 목욕하는 야만국'이라고 경멸하는 풍조가 생겼고 일부는 지금까지 그런 인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고려도경》에 따르면 이미 고려도 혼욕하던 풍습이 있었다고 하니, 시대에 따라 풍습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7] 고려도경에서 서긍은 기본적으로 고려를 오랑캐라고 낮잡아 보는 시선이 있지만, 한편으론 기자조선에서 고려가 이어졌다고 생각해 유목 생활을 주로 하는 다른 오랑캐들과 달리, 종묘사직을 모시고 식사시 그릇을 쓰고 한자도 해서, 예서 다 잘 쓴다는 둥 오랑캐 중에선 그래도 낫다 식으로 나름의 친근감도 표시했는데, 이는 당시 가 지고 이 떠오르면서 고려와 가까워져야 될 필요성이 생긴 송의 외교 상황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8] 고려의 개방적인 성 문화를 문란하다고 유교선비 입장에서 디스한 흔적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고려 사람 몇명이나 만나봤다고 이런 경솔한 소릴 하나 싶은 고려도경의 신뢰도 문제로 볼 수도 있으나, 한편으론 다른 편에서 부자집에서 3~4명씩 첩 들였다가도[18]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이혼한다고 깐거 보면 실제 비판받을만한 사례도 있었던 것 같다.[9] 지역 출신의 학덕이 있는 인물.[10] 후술된 한국고전종합DB와 국사편찬위원회 두 버전의 해석이 좀 다른데 한쪽은 보석금 개념에 가깝게 해석했고, 한쪽은 그냥 돈 내면 처벌이 면제되는 면죄부 개념으로 해석했다.[11] 실제 고려 시대 교통로는 해상로 위주로 발달했다.[12] 실제 이후 개경은 상층민들이 몰리면서 하층민의 달동네민가를 헐거나 내쫓고 그 자리에 귀족들의 주택이나 사찰을 꾸미는 형태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여몽전쟁이 한번 휩쓸고 간 충선왕 시기엔 왕이 직접 명령해서 아예 개경을 죄다 기와집으로만 도배했다고 한다.#[13] 성읍(城邑) 무역[貿易] 한편 산지가 많고 평탄한 데가 적어 농민은 장인(匠人)에 미치지 못하고 토산물은 모두 관아에 들어가므로 상인은 멀리 돌아다니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19][14] 다만 세계로 확대해보면 중국인은 그나마 깨끗한 축에 들었던지 명 말에 활동한 선교사 마테오 리치는 자신의 책에서 중국인을 가리켜 목욕을 자주 한다고 서술하였다. 물론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이때와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다.[15] 실제 『위서(魏書)』에도 "귀천(貴賤)의 구분 없이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無貴賤之節, 然潔淨自喜. : 『魏書』 卷100, 列傳 第88, 高句麗)."고 표기되어있다.[16] 서긍도 이자겸이 권신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못 왕씨(王氏)를 높일 줄 아는 현신이라고 평하면서도, 이득을 즐겨 전답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웠으며, 사방에서 궤유(선물)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라 주변인들이 까더라고 적어놨다. 고려도경이 작성되고 얼마 안가 이자겸이 이자겸의 난으로 인종에게 숙청된걸 생각하면 평이 묘하다.[17] 평하길, 고려에서 김씨는 박씨와 함께 큰 씨족으로 이전부터 명성이 있어, 김부식 역시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 일을 잘 알아 학사들에게 존경받는다고 썼다. 그래서인지 이후 김부식이 북송 멸망 직전 고려 사신으로 갔을 때, 일부 사람들이 고려도경을 봤는지 그를 알아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