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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0 16:24:09

흥왕사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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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창건2.2. 소실과 복원2.3. 몰락
3. 흥왕사의 변4. 고려 왕실과의 관계5. 규모6. 가람7. 흥왕사 금탑8. 교장과 초조대장경9. 기타10. 같이 보기

1. 개요

興王寺

고려시대개경 근처에 있던 거대 사찰. 고려 최대의 사찰로 추정되며, 정치적인 집합소로 이용되어 왕실과 관련된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삼국의 정릉사, 미륵사, 황룡사에 상응하는 국가대표 사찰이었다. 현재는 폐찰이 되었으며 개풍군 봉동면 흥왕리에 흥왕사지를 둘러싼 성터가 남아있다. 광통보제사와 함께 고려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공교롭게도 백제의 왕실 원찰이었던 왕흥사와 이름의 순서만 다르다.

아쉽게도 개성북한 영토이기 때문에 발굴조사나 세밀한 측량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해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다. 현 흥왕사지에는 석탑의 옥개석과 갑석이 무너진 채 남아있다.

2. 역사

2.1. 창건

고려 문종 10년(1056년)부터 12년간 공사한 끝에 창건하였다.[1] 위치는 고려 개경 개성부 덕수현이었다.[2]

당시는 최충으로 대표되는 유학이 막 고려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리던 시점으로, 최초의 사립학교인 12학도가 설립되던 시기였으며 고려시대의 유학자들 중에서도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3] 불교의 교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최유선을 위시한 신하들이 흥왕사 건설을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4] 그러나 불교는 고려의 국교이기도 하고, 문종의 뜻이 강력해서 공사를 강행하였다. 문종 21년(1067년)에 낙성연등회(落成燃燈會)[5]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어, 이 즈음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2.2. 소실과 복원

여몽전쟁의 시기 고려 왕실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전국토는 전화에 휩싸였다. 이때 수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되었는데[6] 흥왕사도 불타서 없어졌다. 그러나 흥왕사가 왕실의 원찰이므로 원 간섭기 무렵에 권위 진작 차원에서 재건했다. 하지만 원나라의 과도한 공납 요구에 허리가 휘는 판이었으므로 문종 시절 규모에는 훨씬 못 미쳤다.

2.3. 몰락

고려가 망하면서 흥왕사도 결국 좋았던 시절에 막을 내렸다. 흥왕사는 조선 초까지는 존속한 듯 보이는데 어느 순간 부터는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3. 흥왕사의 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흥왕사의 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363년김용공민왕을 시해하려고 한 사건.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바람.

4. 고려 왕실과의 관계

의천이 제1대 주지이며, 제2대 주지는 숙종의 3남으로서 승려가 된 징엄. 의천과 징엄의 묘지는 모두 흥왕사 터에서 발견되었다.

송나라에 가서 천태종을 배워 고려에 도입하고 교선통합에 나섰던 인물이기도 한 의천이 흥왕사의 초대 주지였다는 점은 문종이 흥왕사 건립을 밀어붙인 이유를 시사해 주는데, 고려 중기 불교계의 주류이자 현종 이래로 왕실과 사돈을 맺은 경원 이씨[7] 가문과 커넥션이 있었던 법상종에 맞서 왕자 출신의 승려 의천과 천태종을 내세워서 고려 왕실이 직접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인 의도도 흥왕사 건립의 한 동인이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어쨌든 흥왕사는 그렇게 고려 왕실의 원찰로 번성하였다.

5. 규모

흥왕사(興王寺)는 국성 동남쪽 한구석에 있다. 장패문을 나가 2리 가량 가면 시냇물에 닿는데 그 규모가 극히 크다.
고려도경』中

기록에 의하면 규모가 2,800여 칸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거의 왕궁 수준이다. 건물이 연속적으로 들어찬 중심구역의 면적은 너비 800 m, 길이 400 m로 32만㎡에 이르렀는데[8], 이는 고려 정궁인 만월대 본궐의 1.25배에 이르는 거대한 면적이다.[9] 자금성의 면적이 72만㎡인데, 자금성과 비교해도 거의 반절 정도 되는 크기로 정말 엄청난 크기이다. 심지어 1070년에는 사찰을 둘러싼 을 축조하였는데, 그 길이가 약 4 km 남짓이며 동서남북 성문 터 4곳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또 이 절이 창건된 뒤 주기적으로 열린 팔관회는 고려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6. 가람

가람배치는 2탑 2금당식으로, 상당히 특별한 양식이다.

7. 흥왕사 금탑

파일:032010_1032_1.jpg
고려시대 불화 중 하나로 황금탑의 모양을 짐작할 수 있다.

흥왕사 경내에는 가람을 이루는 탑 2기 외에도 매우 화려한 금탑이 있었다고 한다.[10] 기록상 흥왕사의 금탑 조성 내용은 두 차례 등장한다. 첫번째는 1078(문종 32)년에 427근으로 안을, 144근으로 겉을 장식하여 제작하였다는 서술이다. 이 금탑을 보호하기 위해 석탑을 함께 조성하였고, 후대인 숙종 대에는 석탑 안에 송나라에서 반입된 대장경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두번째는 무신정권 시기인 1223(고종 10)년에, 당대의 최고권력자였던 교정별감 최우가 황금 200근을 사용하여 13층 금탑과 화병(花甁)을 제작해 흥왕사에 헌납하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조성은 부친인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하였던 최우가 부친의 치세 동안 악화된 민심을 되돌리고, 자신의 집권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 조성을 위해 벌인 여러 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11]

이 즈음에서 생기는 의문은 흥왕사에 금탑이 2개였던 시기가 존재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문종 대에 조성된 금탑과 고종 대에 최우가 헌납한 금탑은 서술된 조성 방식에 차이를 보이는 점 등으로 보아 별개의 것으로 인식된다. 만약 문종 대에 조성된 금탑이 고종 시기까지 남아있었다고 비정한다면, 흥왕사의 금탑은 은으로 내부를 채우고 금을 덧입힌 문종 대의 것 하나, 황금 200근으로 화병과 함께 만든 고종 대의 것 하나, 따라서 총 2개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문종 대의 금탑이 고종 대에는 소실된 상태였다면, 사라진 금탑을 최우가 재조성하여 헌납한 것이 된다. 이렇게 추정하였을 때는 최우의 금탑 조성 의도가 더욱 명확해진다. 최우는 고려 문종의 원찰이자 당대 최대규모의 사찰인 흥왕사의 상징과도 같았던, 없어진 금탑을 재조성함으로써, 왕실과 자신의 권위를 동시에 신장하고 집권명분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지지하는 민심 또한 상승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몽골 침입시기, 몽골군이 개경을 점령하여 일으킨 방화로 흥왕사는 전소되었으나, 금탑은 이후에도 기록상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화마를 가까스로 피하여 흥왕사 재건시기에도 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2]

고려사고려사절요에는 충렬왕 시절, 원나라에서 시집온 제국대장공주가 흥왕사에 갔다가 금탑을 보고 탐욕이 일어 금탑을 강탈해 궁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13] 금탑을 녹여 다른 곳에 사용하려는 의도였던 모양인데[14], 갑자기 충렬왕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15][16]으로 쓰러져서 사경을 헤매자 제국대장공주는 일관(日官)[17] 오윤부에게 치료법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오윤부는 금탑을 도로 흥왕사에 돌려주게 했고, 그 뒤로 충렬왕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18]

위와 같이 금탑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금탑이 그리 크지는 않았던 듯하다. 고려 후기의 학자 목은 이색마니산 기행 도중 흥왕사 금탑을 보고 시를 한 수 짓기도 했다. 고려 후대의 인물인 이색이 금탑을 보고 시를 남기기도 한 것으로 보면, 금탑은 여말선초 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사에 따르면 흥왕사의 보물인 금탑을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올 때마다 탐냈다고 한다. 심지어 영락제까지도 "금탑을 가져올 수 없을까?" 라고 했단다. 결국 명의 요구가 귀찮았던 태종 이방원은 금탑을 명나라 사신들 손에 들려 보내줬다고 한다.

야사답게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 조선열전 및 명실록에서 흥왕사나 금탑으로 검색을 해보아도 영락제가 금탑을 달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명사나 명실록에서 興王寺로 검색을 하면 아무런 기사도 안 뜬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흥왕사나 금탑으로 검색을 해봐도 태종 이방원 시기에는 관련 기사가 전혀 없다.

현재 금탑의 행방은 묘연하다. 만일 남아있다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국보가 될 가치가 충분한 귀중한 문화재였을 것이다.

8. 교장과 초조대장경

대각국사 의천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교장을 간행한 곳으로 유명하다. 교장은 훗날 완성된 팔만대장경프로토타입이나 마찬가지로 교장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은 지금까지도 불서 목록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에 속한다. 또한 동양 최대의 분량이었던 초조대장경의 경판이 바로 이 흥왕사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여몽전쟁 때 사찰이 타면서 같이 전소되었다.

9. 기타

10. 같이 보기



[1] 1055년부터 13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2] 현재는 북한의 개성시 개풍구역이다.[3] 조선과 달리 고려 이전에는 삼교의 조화를 이상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4] 훈요십조에서도 "신라처럼 아무 데나 절 함부로 지어서 지기(地氣)를 흐트러뜨리지 마라"라고 무턱대고 절을 짓는 행위를 왕건이 제재시킨 내용이 있기는 한데, 고려 후대왕들이 훈요십조의 내용을 안 지킨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5] 낙성식을 겸하는 연등회.[6] 신라의 왕실사찰이자 고려시대에도 남아있던 경주시황룡사도 이 때 없어졌다.[7] 인주 이씨라고도 함.오늘날의 인천 이씨.[8] 이는 현재도 위성사진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9] 참고로 후원 부분을 제외한 고종 시기 경복궁 면적에는 70% 크기. 참고로 과거 이 문서에는 경복궁의 면적이 34만㎡라고 기술되어 있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에서 잘려져나간 조선총독부 부지나 도로 개설등으로 줄어든 면적 등이 제외되고 3/4가량으로 크게 축소된 궁역만을 사적으로 지정하였던 시기의 면적이 무비판적으로 복붙되어 알려졌던 면적으로 오류이나 현재까지 이 면적으로 기술된 웹문서들이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있는 상황이다.[10] 참고로 이렇게 건물에 금칠하는건 한국사에도 몇몇 사례가 보이는데, 신라 시절 금입택이나 고려 시절 정함의 저택 등이 있다.[11] 종전까지 이 문서에는 문종 대의 조성 기록이 누락된 채, 최우가 은 427근과 금 144근으로 금탑을 조성했다는 식으로만 서술되어 있었다.[12] 이는 이후에도 서술되듯, 금탑의 크기가 크지 않아 옮기기가 용이하여 흥왕사가 불타기 직전에 안전한 곳으로 미리 이설한 덕분일 수도 있다.[13] 금탑이 두 개였을 경우에 기초하면, 여기서의 금탑은 금은(金銀) 도합 571근의 문종 대 금탑보다 가벼웠을, 황금 200근 중 화병에 들어간 만큼을 제하고 만들어진 고종 대의 금탑일 것이다. 문종 대의 금탑이 소실되었다는 경우나 재조성설을 따르면 그냥 고종 대의 것이다.[14] 고려사절요의 관련 기록 말미에 이에 대한 내용이 있다. ≪初, 公主取興王寺金塔, 入于內, 將毀之. 王禁之, 不得, 但涕出而已./ 애초 공주가 흥왕사의 금탑을 가져다 궁궐 안에 들여놓은 뒤 장차 이것을 훼손하려 하였다. 왕은 이를 금지하였음에도 막을 수 없게 되자 단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高麗史節要 卷19. 1277년 7월(음) 기사.≫ 다만 그냥 너무 아름다워서 옮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애초에 녹일 거였으면 굳이 내궁까지 끌고 갈 이유가 없다.[15] 이라고는 했는데 흥왕사 금탑이 문제가 되어 발생한 화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대왕이 만든 금탑을 후손으로서 지켜야 했는데 그러자니 성깔 지랄맞은 제국대장공주나 그 뒤에 있는 원나라와 또 맞서야 하니까.[16] 앞의 각주에 대한 반박 : 왕이 공주를 막으려다 실패하자 눈물만 흘렸다는 기사에 기초한 판단인 듯하나 이는 무리한 추정에 불과하다. 기록상으로는 王暴得疾이라고만 확인된다. 그냥 갑자기 아팠다는 말이다. 애초에 화병은 정신의학상의 공식적인 질병 분류도 아니다.[17] 별로 점을 치는 관직.[18] 이 부분 서술은 상당부분이 잘못되었다. 금탑을 돌려놓자고 건의한 것은 오윤부가 아니라 재추(宰樞)들이다. 왕의 병이 나으려면 기도라도 해야 하는데, 금탑이 궁에 있으니 돌려놓자는 취지였다.(기도빨이 잘 먹히려면 최대한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의도 정도로 보인다.)≪宰樞請停營繕, 縱鷹鷂. 又曰, “凡可以禬禳者, 臣等無不盡心. 惟興王寺金塔在宮中, 請還之.” 公主皆許之./ 재추(宰樞)가 궁실 정비를 중단하고 매와 새매를 풀어주자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무릇 기도로 간구하여 재앙을 물리칠 수 있다면 신들이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흥왕사(興王寺)의 금탑(金塔)이 궁중에 있는데 청하건대 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공주가 모두 허락하였다. 高麗史節要 卷19. 1277년 7월(음) 기사.≫ 오윤부와 관후서(觀候署)는 왕의 와병 전에 궁실의 무리한 정비를 만류하는 제언을 하였을 뿐이다.≪觀候署言, “按道詵密記, 稀山爲高樓, 多山爲平屋. 我國多山, 若作高屋, 必招衰損. 故太祖以來, 非惟宮闕不高, 至於民家, 悉皆禁之. 今聞造成都監用上國規模, 欲作層樓高屋, 恐將有不測之災.” 王納其言. 伍允孚又言於公主曰, “天變屢見, 加以亢旱. 請弛營繕, 修德弭災. 後如有悔, 恐被不言之罪, 故言之."/ 관후서(觀候署)에서 말하기를, “『도선밀기(道詵密記)』에 따르면, 산이 적은 곳에서는 높은 누각을 만들고 산이 많은 곳에서는 평평한 가옥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으므로 만약 높은 집을 짓게 되면 반드시 〈기세가〉 쇠약해지고 손상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조(太祖) 이래로 궁궐이라 할지라도 높게 만들지 않았으며, 민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높이 건축하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지금 조성도감(造成都監)에서 상국(上國)의 규모를 따라 여러 층의 누각과 높은 가옥을 지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장차 예측하지 못한 재앙이 발생하게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오윤부(伍允孚) 또한 공주에게 말하기를, “천변(天變)이 누차 나타나고, 설상가상으로 오랜 기간 가뭄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청하건대 궁실 정비를 늦추시고 덕을 닦아 재앙을 누그러뜨리시기 바랍니다. 훗날 만약 후회할 일이 생긴다면, 〈신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죄를 얻게 될까 두렵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高麗史節要 卷19. 1277년 7월(음)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