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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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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삼경
서경 (평양부)
西京 (平壤府)
전신 평양성 (고구려)[1]
패강진[2]
설치 921년
폐지 1369년
후신 평양부
현재 평양시

1. 개요2. 명칭3. 운영4. 역사5. 기타

[clearfix]

1. 개요

서경은 고려 삼경(三京)[3]의 하나로서 현재 평양의 고려시대 명칭이다.

2. 명칭

평양이 개성의 서북쪽이라지만 서쪽보단 북쪽에 더 가까운데도 북경이 아닌 서경이라 이름지은 이유에 대해 주보돈 교수는 이미 신라 때부터 경주를 동경이라는 별칭으로 불렀기 때문에[4][5] 고려에서도 경주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고, 이렇게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를 동경이라 부르는만큼 엄연히 고구려와 신라를 모두 통합했다는 입장인 고려 정부가 신라의 옛 수도인 동경과 대등하게 대비하기 위해서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을 서경으로 이름붙였다고 주보돈 교수는 추정하였다.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의 땅에는 3경(京)이 있으니, 송악(松嶽)이 중경(中京)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남경이 되며, 평양(平壤)이 서경(西京)이 된다. 11월·12월·정월·2월에는 중경에 거주하고, 3월·4월·5월·6월에는 남경에 거주하며, 7월·8월·9월·10월에는 서경에 거주하면 36개 나라가 와서 조공을 바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개국하고 160여 년 뒤에 목멱양에 도읍을 정한다.’라고 하였으니, 신(臣)은 지금이 바로 새 도읍을 돌아보시고 거기에 거주하실 때라고 생각합니다.
- 김위제가 『도선비기』를 근거로 남경 천도를 건의하다 (고려사 > 列傳 卷第三十五 > 方技 > 김위제 > 김위제가 『도선비기』를 근거로 남경 천도를 건의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시대 당시 큰 영향력을 발휘한 도선대사가 쓴 '도선비기(道詵秘記)'의 내용에서 그 연유를 추정 할 수 있는데 숙종(肅宗) 원년인 1096년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가 천도를 주장할 때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도선기(道詵記)」에는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고려시대 때 평양을 서경이라 칭한것은 '도선비기(道詵秘記)'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태조삼국통일전쟁 이래로 황폐해진 평양에 지금의 황해도 지방 백성을 옮겨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처음에는 평양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삼았다가 이어 서경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분사제도를 시행해 조정의 일부를 서경에 놓기 시작한다. 서경은 그 후 줄곧 중요 시설과 기관이 설치되고 풍수지리, 도참설에 따라 역대 임금이 장락궁에 행차했다.

3. 운영

고려 건국 이후 고려 태조는 황폐화되었던 평양을 재건하고 평양대도호부, 이어 서경으로 개칭했다. 호칭을 정한 정확한 연대는 파악되지 않고 천수(天授) 4년(921)에 처음으로 서경이라는 명칭이 파악된다. 건국 초기 군사적 목적으로 재건되었던 서경은 시간이 지나면서 호족세력의 견제와 왕권의 안정화를 위한 새로운 세력기반을 구축할 목적으로 재건되었다.

이에 따라 천수 5년(922) 서경에 '낭관'이라는 독립적인 행정기구와 관제를 갖는, 개경과 행정 및 정치적으로 분리된 조직을 설치하여 서경에 힘을 싣게 된다. 낭관의 장관은 심지어 시중이었다. 개경 정부 광평성의 장관과 동급이었다. 이와 같은 서경에 대한 독립적인 기구와 관제를 설치한 것은 고려 분사제도의 시초로 파악된다. 천수 15년(932)에는 신료들과 평양 천도에 관해 논했으나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고려 정종의 서경 천도도 불발되었다.

분사제도는 성종 14년(995)에 이루어진 전국적인 관제개편으로 '서경유수관'이 설치되며 서경 행정기구의 외형적인 개편이 이루어졌으나 서경과 개경을 분리하여 운영한다는 내적인 면에는 변화가 없었다. 현종 대에 황성(皇城)이 지어지고 문종 대에 서경을 중심으로 경기4도(京畿四道)가 설치됐다. 경기는 수도 주위에 있는 군현을 수도에 예속되게 한 것으로 현종 대에 처음 개경에 설치하고 문종 대에 서경에도 동등하게 하였다. 또한 평양에는 장락궁이라는 개경 본궐과 동급으로 취급되어진 궁궐이 있었으며 장락궁에는 태조 진전이 특별히 설치되어 있었다. 숙종 대에는 분사제도를 심화해 상서성의 5부를 따로 설치한다. 이후 예종(1105 ∼ 1122)대까지 분사제도가 강화되어 개경과 그 체계가 같게 되어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이 경(京)이라는 단위에 독립적인 행정기구와 관제가 주어지는 것은 서경뿐만이 아니었는데, 동경(현 경주)[6]남경(현 서울)에도 이러한 것들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서경에 비해 동경, 남경의 대우는 낮았으며, 이에 대한 사실은 후술할 인종(仁宗) 대 묘청의 난 이후 '서경은 반역의 땅이니 서경의 기구와 관제를 동경의 것과 같게 하라'는 대신들의 건의에서 파악된다. 또한 동경, 남경엔 황성 및 분사기관, 경기의 설치는 보이지 않고 파견 유수의 녹봉이나 관제의 규모 등으로 미루어 보아도 서경과 동경/남경의 위상 차는 확연하다. 이러한 이유로 1308년 고려가 동경과 남경을 격하했을 때조차 서경을 격하하진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경의 지위가 개경과 비슷했던 것 역시 아니고 개경에 대한 열위 관계 역시 엄연히 존재했다.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한 것도 그렇고 고려왕릉 역시 단 1기도 평양에 있지 않고 모조리 개성/강화 일대에 있다. 명시적으로 왕이 기거하는 기간도 개경이 9달, 서경은 고작 3달이기도 했고 그마저도 인종대 이전부터 제대로 지켜지지도 않았다. 고려사에서도 개경의 언급이 당연히 서경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고려시대 서경의 위상을 정리하자면 본수도 개경에는 확실히 밀리지만 지방 3경인 동경과 남경보다는 확실히 앞서는 명실상부한 제 2 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예종 때 이루어진 서경의 전성기는 인종 13년(1135)에 발생한 서경 천도의 실패로 일어난 묘청의 난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고려는 묘청의 난을 제압한 즉시 서경의 치안과 기초적인 행정업무에 필요한 기구 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구들을 전부 폐지한다. 서경 행정기구의 대대적인 폐지 이후 중앙 개경 세력은 자신들과 행정, 정치적으로 분리된 세력의 존재에 큰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 독립성을 어느 수준까지 인정하고, 박탈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여 '서경은 근본이 되는 땅이고, 태조께서 일찍이 그 제도를 정한 바 있으니 예전대로 하자'는 쪽과 '서경은 반역의 땅이니 모든 제도를 강등해 동경과 같게 하자'는 쪽으로 나뉘게 된다.

이 논의는 약 2년 동안 논의되어 인종 16년(1138) 양측의 의견을 절충한 방향으로 서경의 관제를 개편하게 된다. 이로써 서경이 지니고 있던 독립적인 지위는 사라지게 된다. 이 때 개편된 관제는 수도와 동등한 형태와 지위를 가졌던 분사제도에서 완전히 중앙에 예속되어 중앙의 인사권, 행정권 등에 대한 간섭을 받는 토관제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형태를 보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고 해도 개경과 서경의 지위 차이가 벌어진 것이지 서경이 남경, 동경과 동급이 된 것은 아니다. 동경은 단 한 번도 서경의 위상을 따라잡은 적이 없다. 남경 역시 고려 극후반부인 공민왕 대에 이르러서야 서경을 제치는데 원간섭기가 끝나고 공민왕 이후의 마지막 20~30여 년 정도는 남경이 서경보다 확실히 위상이 우위였다. 공민왕은 원의 영향력에 벗어난 직후인 1356년 남경을 다시 부수도로 삼기 시작했으며 우왕과 공양왕 시기에는 아예 5개월씩 수도를 남경으로 일시 천도까지 했다.

개편은 명종대에도 이어졌다. 이는 무신정변(1234)에 반발한 서경인들이 일으킨 난인 조위총의 난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이 개편은 이전의 분사제와 토관제를 절충한 개편과 달리 완전히 중앙에 예속시키는 토관제로의 완전한 이행이라고 볼 수 있다.

서경이라는 형식만 유지한 채 토관제로 유지되던 서경은 홍복원, 필현보의 난, 1269년(원종 10) 서북면병마사영 기관(西北面兵馬使營 記官) 최탄(崔坦), 한신, 삼화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의 난으로 서경유수가 죽고, 난의 주동세력들은 서경 부근의 땅을 몽골 제국에 바쳤다. 이후 서경은 몽골이 동녕총관부를 두어 직접 지배하게 된다.

이후 1290년(충렬왕 16) 동녕총관부를 몽골에게서 돌려받아, 서경의 행정체제를 격상하여 서경유수관을 설치하였으나 이미 서경은 크게 쇠퇴하고 난 후였다. 공민왕 대에는 막대한 쇠퇴의 영향으로 경(京)이라는 행정적 지위마저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공민왕 18년(1369) 만호부, 이후 평양부로 개편하게 된다.

고려사 병지 주현군에는 서경에 배치된 주진군 수를 알 수 있다. 서경은 혼자서 압도적인 주진군 수를 자랑했는데, 장교와 군사의 수를 합쳐 총 11,556명이 서경을 지키고 있었다. 이는 남경의 1,526명, 동경의 2,562명과 대비되는 숫자다. 서경이 군사적 전방이자 군사 요충지라는 사실은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서경은 고려시대 내내 숱한 전란을 겪었다. 고려 태조의 유조를 봐도 고려 왕조는 처음에는 아무래도 북진하여 요동까지 차지할 것을 염두에 두고 서경을 개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개경은 고려시대 내내 제기되었듯이 지리적으로 대도시에 적합하지 않은 반면 서경은 대도시로서도 물론이고 요동까지 점유하게 되었을 때 한반도와 요동을 잇는 중심지의 역할을 가장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고구려는 요동을 완전히 점유하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요동의 복잡한 산지 및 요하 유역의 거대한 늪지대인 요택을 이용해 유기적으로 연계된 강력한 산성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예속되어 있던 말갈병을 통해 농경민만으로는 얻기 힘든 전문화된 기병전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를 합쳐서 활용한 게 침략군을 수도 없이 괴롭힌 고구려 특유의 '산성기병'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고구려는 고려보다 훨씬 적은 농경지와 인구의 백업만으로도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반면 고려의 경우 요동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구려 입장에서 제1방어선이던 요동 방어선을 활용하지 못하고 제2방어선 역할이던 압록강 방어선을 제1방어선으로 활용해야 했다. 물론 강동 6주로 대표되는 압록강 방어선은 고려의 대북방 방어에 큰 기여을 했으나 아무래도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에 비해서는 방어력이 못 미쳤다. 그리고 압록강 방어선의 남쪽 경계라고 할 수 있는 청천강까지 건너면 그 이남부터는 낮은 구릉지 및 평야지대만이 이어지기 때문에 이렇다 할 자연적 방어선이 없다. 때문에 압록강 방어선을 돌파하면 서해안을 따라 제2수도 서경과 수도 개경까지 쉽게 공략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이 지역은 많은 인구를 채워넣어서 방어할 수밖에 없는데 고려가 아무리 삼국 그 어느 나라보다 인구가 많았다고 해도 오로지 인구만으로 이 지역을 방어하는건 항상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의 북진은 실패했고 언젠가 고구려처럼 한반도와 요동을 아우르는 제국의 수도 역할을 맡을거라 여겨졌던 제2수도 서경은 북방민족의 침략을 방어하는 전방의 거점도시로 활용될 수 밖에 없었다. 북방민족의 침략 때마다 서경은 수도 없이 털렸고 심지어 몽골의 침략 때는 서경 일대가 아예 동녕총관부로 떨어져 나갔다가 겨우 반환되기도 했다. 이런 냉정한 현실 속에서 조선대에 들어서는 서경으로의 북천은 커녕 오히려 남경(한성부)으로 남천할 수밖에 없게 된다.

4. 역사

광종 11년(960년)에 서도(西都)로 개칭되었다.[7]

성종 14년(995년)엔 지명이 서경으로 돌아오고 지서경유수사 등 관원이 설치되었다. 이후 문·무반 및 5부를 별도로 설치하여 개경과 대등한 제도와 지위를 갖추게 되었다.

목종 때엔 호경(鎬京)으로 개칭되었다.

현종 때는 장락궁황성이 설치되었다. 제2차 여요전쟁 때는 요나라가 서경을 공격해서 항복을 결정하려 했으나, 동북면에서 온 지원군이 항복 세력을 제거하고 서경을 장악해서 방어에 성공했다.

문종 때엔 서경으로 지명이 돌아왔다.

인종 때는 묘청 등이 서경 천도 운동을 일으켰고, 그 일환으로 대화궁을 건설한다. 결국 개경파에 밀려 서경파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난을 일으키는데 당시 끈질긴 항전으로 진압군에 의해 많은 타격을 받았다. 뒤에 서경의 복구 문제가 대두하여 인종 16년(1138년) 6조를 설치하고 영(令), 승(丞) 등을 두었다. 한편 서경 일대를 관장하는 서경기4도는 폐지되어 6현[8]으로 나뉘어졌다.

원종 10년(1269년) 최탄, 이연령 등이 난을 일으켜 여러 성을 바치고 원나라에 항복하였고, 원은 이곳을 동녕부로 삼았다.

충렬왕 1년(1275년) 동녕부를 동녕총관부로 승격시켰다.

충렬왕 16년(1290년) 고려에 다시 반환되어 서경이 되었다.

충선왕 대에 평양부(平壤府)로 격하되었다.[9]

공민왕 5년, 평양부에서 다시 서경 지명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18년에 평양만호부(平壤萬戶府)로 강등되었다.[10] 이후 다시 평양부로 격하되었다. 우왕위화도 회군 당시 고려군이 여기서 출발하였다.

5. 기타

서경은 서도(西都), 웅도(雄都), 호경(鎬京), 소성경(小城京)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1] 668년까지[2] 패강진이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3] 중경 개경, 서경 평양, 동경 경주 혹은 남경 한양.[4] 일반적으로 경주를 동경이라 부른 건 고려시대 한정으로 알려져 있지만,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탑비문이나 처용가 등의 사료를 보면 이미 통일신라부터 경주를 동경이라고 부르고 있었다.[5] 다만 신라 시절의 동경은 당나라 장안을 서경으로 보고, 한국(신라)을 중국(당)과 대등한 문명국이라는 의미로 경주를 동경이란 별칭으로 불렀다고 했다. 고려시대의 동경과 이름은 그대로지만 의미는 달라진 셈.[6] 이쪽은 신라의 천년 수도로서, 신라멸망 후에도 인구 규모와 인프라, 문화 수준으로 인해 그 영향력을 무시하지 못했다.[7] 동시에 개경은 황도(皇都)로 개칭되었다.[8] 강서, 강동, 중화, 순화, 삼등, 삼화.[9] 고려사 백관지 외직조 기록. 다만 부왕 충렬왕 34년에 개경, 동경, 남경, 강도가 개성부, 계림부, 한양부, 강화현으로 강등된 것을 감안하면 서경도 실제론 충렬왕 34년에 평양부로 격하된 것으로 보인다.[10] 고려사 지리지 서경유수관 평양부조 기록. 고려사 백관지 외직조엔 11년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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