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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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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후 소하 (酇侯 蕭何) 유후 장량 (留侯 張良) 회음후 한신 (淮陰侯 韓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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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소당화전(晩笑堂畵傳, 상관주 作)
작위 제왕(齊王)
(재위: 기원전 203년 ~ 기원전 202년)
초왕(楚王)
(재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201년)
회음후(淮陰侯)
(재위: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96년)
한(韓)
신(信)
최종 직위 대장군(大將軍) 겸 좌승상(左丞相)
고향 강소성 회음(淮陰)
생몰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196년

1. 개요2. 생애3. 평가
3.1. 뛰어난 용병술3.2. 부족한 정치력
4. 역사서의 평가5. 기타6. 대중문화에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국사무쌍(國士無雙)

초한쟁패기 시절 한나라의 초대 대장군이다. 당대의 군사적 상식을 파격적으로 뒤집고 연전연승한 중국사 최고의 천재 병법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젊었을 적엔 무능력한 인물로 취급받았다. 반진전쟁기에 항가군에 입대했지만 중용받지 못했다. 그러다 한왕 유방(劉邦)에게 귀부한 뒤 기재를 인정받아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무수한 군공을 세워 유방에게 천하를 안겨주고 자신은 제(齊)왕과 초(楚)왕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진(秦)나라 멸망 이후 항우의 분봉(分封) 당시 파촉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한군을 한중에서 암도진창(暗度陳倉)으로 몰래 이끌고 나와 장한을 비롯한 삼진(三秦)을 멸하고 관중 땅을 평정하여 한나라의 기반을 마련했다. 팽성대전 이후 한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3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 6국을 멸망시켜 유방항우를 꺾고 천하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 그 공으로 전한 건국 이후 최초에 봉해진 7명의 이성왕(異姓王)[2] 중에 한 명이 되었다.

괴철의 의견처럼 한신이 점령한 조나라와 제나라는 유방에게서 독립하여 천하삼분을 노려볼 법한 큰 나라였다. 유방과 여후가 한신을 견제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하를 삼분하거나 유방에게 절대 충성하거나 둘 중 하나를 정확하게 해야 했는데 애매모호하게 있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3][4]

현대에는 유방의 손을 들어 한신의 행동을 유방이 어떻게 더 참을 수 있느냐는 의견이 많다. 평가 항목에서 볼 수 있듯 고대와 중세에는 한신이 반역을 저지른 죄와 별개로, 유방이 한신을 토사구팽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가장 큰 죄인 반역죄에 엮여서 죽은 인물치고는 특이한 일인데 그만큼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한신의 활약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신을 통해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널리 퍼졌다. 한신이 처음 만든 단어는 아니지만 토사구팽이라는 사자성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5] 영포노관이 한신과 팽월이 죽은 것을 보고 자신들도 죽을 거라고 걱정하여 반란을 계획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한신이 토사구팽당했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신은 많은 표현을 만들어냈다.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치욕을 참아 목숨을 부지하고, 초나라 왕이 된 후 그 자를 불러 돈을 내리고 용서하여 과하지욕(胯下之辱)이란 고사를 만들었다. 한신을 불쌍하게 여겨 밥을 주고 "당신에게 돌려받을 것은 기대도 안 한다."라고 말했던 동네 아낙네에게 왕이 된 후 크게 보답하여 일반천금(一飯千金)이란 고사를 만들었다. 소하가 유방에게 한신을 천거할 때에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을 받았다. 유방과 대화에서 지금도 자주 쓰이는 고사인 다다익선(多多益善)을 만들었다. 전략으로 적을 속이는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이란 말을 만들었다. 병법 최악의 수이자 금기인 배수진(背水陣)을 성공시켜 배수진을 전략적 전술 또는 결사적 각오라는 의미로 재탄생시켰다. 항우와 마지막 결전인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사지로 몰아넣어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나오게 하였다.

한신의 생년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B.C. 247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고제와 그 비슷한 세대인 소하, 장량, 조참 같은 제장 그룹보다는 어린 게 확실해 보인다. 천하통일 이후 시황제 치세 속(B.C. 221~B.C. 210)에서 각종 찌질한 일화를 남긴 회음 시절의 정황을 보면 그 시점 한신의 나이는 대략 20대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B.C. 209년 발발한 진승·오광의 난에 호응한 항량의 군대에 합류했을 때 나이는 대략 이립(30대)쯤에 접어들었지 않냐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B.C. 232년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항우보다 약간 연상이거나 또래일 가능성이 높다. 한신의 몰년인 B.C. 196년쯤엔 30대 후반~40대 전반 정도로 여겨진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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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3.1. 뛰어난 용병술

지금 장군께서는 서하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았고, 하열을 연여에서 사로잡았습니다. 단번에 정형을 내려와 하루 아침에 조군 20만을 깨뜨리고, 성안군을 베어 죽임으로써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이 천하에 떨쳤습니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용병술로는 한신을 따라갈 이가 없소.
유방(劉邦)

기록상 전공(戰功)과 초한전쟁에서의 한신의 활약상을 보면 한신은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도 흔히 찾을 수 없는 전설적인 명장이다. 위대한 군사 지휘관[6]으로서 수많은 병사를 자신의 손발처럼 지휘하는 화려한 군사적 재능으로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항우를 무너뜨리고 유방에게 천하통일의 위업을 안겨주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세간에서도 장자방이 있어도 한신이 없었다면 고제의 천하통일이 늦어졌거나 이루지 못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다.

한신은 팽성대전의 참패 이후, 열악한 한나라의 상황 속에서 고작 3만의 오합지졸로 군세를 시작하였는데, 수 년만에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의 여섯 개의 나라(六國)를 무너뜨렸으며, 두 명의 왕을 사로잡았고, 한 명의 왕을 참살했다. 그 과정에서 기동전, 배수진, 우회 공격, 전면전 등 온갖 방식의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고, 모든 전투에서 이겼다. 또한 당시 중국의 지배자[7]이자 군사적 능력으로는 역시 역대 최고의 장군 중 하나로 꼽히는 항우를 참살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군사와 전투에 관련해서는 같은 시대의 그 어떤 인물도 따라오지 못할 업적을 세웠기에, 그의 군사적 능력과 전공에 관해서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다. 당대에도 마찬가지 평가를 받았는데, 사기에서는 그가 제나라를 정벌하여 제왕(齊王)이 되었을 때는 고작 3만의 오합지졸로 시작했던 군세가 유방과 항우의 세력을 능가할 정도로 강성해졌고,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고 서술한다. 용저[8]를 참살한 이후에는 그 이전까지 회유라는 개념을 가지지 못했던 항우조차도 사신으로 무섭을 보내 한신을 회유하려 했을 정도이니, 한신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한신의 진가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모든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는 점에 있는데, 그 예로 적장 진여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보고 상황에 맞는 전술을 사용해 배수진(背水陣)이라는 금기를 오히려 대전략으로 승화시켜 '전략적 배수진'의 정의를 만들어 낸 정형 전투, 정보 수집을 통해 적군의 동향을 읽고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를 멸망시키고 적 군주를 사로잡은 안읍 전투, 지형지물과 부하 지휘관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해 제(齊)와 초(楚) 두 나라의 연합군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초한대전의 향방을 결정지은 유수 전투 등이 있다.

사실 한신이 무너트린 여섯 개의 나라들은 이름만 국가지, 전국시대 열국의 후예나 군벌이 항우의 후원을 받아 급조된 정권들이었다. 그래서 이후 출현하는 중앙집권형 국가들보다 국가 체제 자체가 미비했고, 국가의 동원력은 물론 군사의 질 같은 수준도 아주 높았다고 볼 수 없다. 물론 배수진의 일화에서 보듯이 병력의 질이 낮은 것은 한신의 군대도 마찬가지였으며, 거기에 더해 한신의 세력은 병력의 숫자도 밀리고, 원정군이었으므로 대체로 피로가 누적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대체로 상대보다 유리할 게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략적 불리함을 극복하고 무패의 군단이 되어 천하를 평정한 것은 한신의 능력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9][10]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재밌는 부분은 한신이라는 사람의 개성이다. 한신은 젊은 시절에는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다니고 아낙네에게 밥이나 빌어먹고 사는 무능한 사내로 평가받았고,[11] 항우의 군단에 있을 때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한의 대장군이 되기 전에는 대군은 커녕 부하를 다루는 위치도 못 됐던 사람[12]인데, 유방의 밑에서 한번 기회를 잡자 천연덕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게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내보였다. 현대의 일반기업에서도 낙하산 인사라고 손가락질받으며 조직을 운영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당연한 상황인데 병사들을 이끌고 중국 대륙의 반을 종단하는 대원정을 성공시킨 것은 조직 관리에서도 범인은 상상하기 힘든 영역이라 할 것이다.[13] 거기에다 병법으로 말하자면 타고난 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활약만 엄청난 게 아니라, 이좌거의 조언에 따라 연나라를 싸움 없이 항복시키는 등 전략적인 식견도 출중했다.

3.2. 부족한 정치력

한신이 번쾌의 집에 들렀다. 번쾌는 한신을 대왕이라 칭하고, 한신을 대접하며 종종걸음으로 나아가고 물러났다.

한신이 번쾌의 집을 나서며 혼잣말하였다.
"내가 살아서 번쾌와 같은 반열에 서는구나."
한서[14]

한신은 군대를 통솔하는 영역에서만큼은 동시대의 또다른 명장 항우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을 정도로 신들린 전략, 전술적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전투 이외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모자란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특히 왕이나 신하로서 보여준 정치력이나 행태는 부족함이 많았고 그 중에서도 사회생활에 필요한 처세술은 아예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군인 유방 입장에서 한신 이놈이 배신하는 것 아닐까 불안할 만한 일[15]을 몇 차례 해놓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유방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며 그를 배신하는 걸 꺼렸고 이같은 형편없는 처세술은 본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한신이 유방에게 붙잡힐 때 대단한 전투라도 있었을 것 같지만 한신은 이 지경까지 와서도 정치력이 빵점이었던 탓에 그렇지 않았다.유방이 자신의 성을 방문하겠다고 하자 혹시 역모를 의심하는 것 아닐까 무서워진 한신은 유방이 싫어하는 종리말의 목만 가지고 호위병 없이 유방에게 나아갔다. 유방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한신을 형틀에 묶어서 한나라 수도로 잡아갔다. 이게 상황의 전부이다.

한신은 모든 문제를 자기 생각대로 판단했다. 자기 감정에 따라 문제를 일으키고, 결정적인 순간에서도 이성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감정으로 판단했다. 항우가 보낸 무섭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다른 인물들이 그랬듯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라 "항우는 나를 형편없이 대했으나, 유방은 나를 인간적으로 잘 대해주었다." 같은 감정적인 이유였다. 그런데 정작 그런 말을 한 한신은 이전에 유방이 세운 제나라 화친책을 자기 멋대로 어그러뜨려 최측근 참모 역이기를 죽게 만들었다. 이래놓고는 자기가 제나라를 이겼으니 제나라 왕위를 달라고 하였다.결과적으로 역이기의 사망은 고제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행동이였고 더불어 불필요한 피를 흘리게 만들고 서로 원수나 다름없던 제와 초가 연합한다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용저의 삽질 덕분에 결과적으론 한신이 이겼으니 망정이지 잘못하여 패배했다면 한신 본인도 죽거나 하북이 평정되고 항우는 최후의 반전을 기대해볼 수 있게 되는 건 물론 눈엣가시 같은 팽월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게 되고 자칫하면 제후들이 또다시 유방과 항우 사이에서 간을 보는 등 유방에게 불리한 일만 생겼을 것이다. 게다가 고제가 위급할 때 무려 2년씩이나 원군은 안 보내면서 반란을 핑계삼아[16] 왕위를 요구한 것은 협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신 본인에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상사의 명령에 거래를 시도한 것부터가 문제이다. 딜을 걸더라도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걸어야 하는데도 한신은 초대형 사고를 친 직후에 유방이 한신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딜을 걺으로써 고제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애초 유방이 아무리 필요해서 그랬다고는 해도 옹치같은 놈조차 열후에 봉하였고 한신보다 못한 공적을 지닌 관영 조참 등도 다 나름대로 상을 받았고 제나라를 역이기가 회유한다고 해서 한신의 공적이 가려질리도 없었다. 오히려 이후에도 초와 한은 몇 번 전투를 더 벌였고 최후의 결전인 해하 전투까지 남아있었기에 한신이 활약할 기회도 더 남아있어서 비록 제나라를 피를 흘리지 않고 회유하게 될 역이기나 소하 등에게 공적을 뺏긴다고는 해도 공신이 되지 못할 일은 결코 없던 터라 가만히만 있어도 될 것을 괜히 유방의 심기만 건드린 꼴이 됐다.[17]

군주인 유방에게 단단히 밉보여 언제 토사구팽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인 만큼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자기가 살길을 찾았어야 했지만[18] 한신은 이 지경에서도 상황 파악이 전혀 안된 건지 유일한 출구 전략이 될 수 있는 항우와의 연대를 유방과의 개인적인 의리 때문에 거부했고 이는 항우의 몰락과 죽음은 물론 본인의 죽음에도 일조했다. 물론 가왕이니 제왕이니 한들 당시 한신은 한나라 소속이었으며 한신의 제나라 왕 작위와 한신의 병력은 유방에게서 받은 것이었고 유방의 충신인 조참 등이 그의 명령을 따르면서도 감시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유방을 적으로 돌리고 거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그리고 애시당초 항우가 마냥 믿을 만한 인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초 항우는 한신을 홀대해 떠나게 만들었고 유방이 먼저 관중을 점령했음에도 의제와의 약속을 어기고 멋대로 관중의 왕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홍문연서 유방을 죽이려 한 게 항우이다. 거기다 원래는 의제가 해야 했던 제후들의 분봉도 무시하고 자기가 해버린 것도 이후에 의제가 거슬린답시고 죽여버린 것도 항우였기에 항우의 악명과 더불어 항우가 믿을만한 놈이 못된다는 생각은 이미 전 중국에 퍼져 있었고 애초부터 이이제이를 노려서 유방과 한신이 둘다 자멸하거나 한신이 유방과 척을 치게 만들 속셈으로,그러니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독립을 권유한 것이니 한신 입장에서 무작정 신뢰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긴 하다.실제로 독립하라는 제안이 먹혔다면 한신도 한신이지만 항우도 그만큼 이득을 봤을 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신은 신중하게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며 저울질해 보고 항우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항우는 날 홀대했는데 유방은 날 잘해줬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거부한 것이다. 거기다가 처음 손쓰기만 어렵지 막상 실행만 하면 한신은 최적의 위치에서 우세를 점할 수 있음에도 무작정 거병조차 포기해 버렸다.물론 예양이나 고순의 사례처럼 충신은 좋은 평가를 듣기 마련이긴 하지만, 그 같은 선택이 본인이 죽는 결과를 초래한 건 물론 아군을 팀킬하고 제나라 왕위를 달라고 요구하는 등 예양이나 고순의 순수한 충성심이나 의리와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는 지라 진정한 충신으로 보기도 어렵다. 거기다 항우의 제안을 물리친 건 둘째치더라도 정작 본인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전쟁이 끝나면 유방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같은 건 전혀 고민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저 막연히 내가 이만큼 공을 세웠는데 설마 폐하가 날 죽이겠어? 같은 게 전부였고 이 같은 안일한 생각은 결국 토사구팽과 본인의 죽음으로 돌아왔다.[19]

사실 그렇다고 한신이 마냥 인정 없고 냉혹한 면모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충분한 기반과 계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방과의 의리를 이유로 괴철의 반란 제안을 거듭 거절한 것과, 자신이 밥을 빌어먹던 정장을 꾸짖은 일,자신을 찾아온 종리말을 내치지 않고 숨겨준 일, 일개 패전국의 신하에 불과한 이좌거를 스승으로 모시고 거듭 예를 표하며 자문을 구한 일 등, 한신은 형식상이나마 의리 있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그 의리와 겸손한 태도가 자신이 유리한 상황에서만 발휘되었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해지면 항상 이기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당장 처음 한나라로 들어갔을 때부터 죽을 뻔한 상황에서 하후영과 소하가 목숨도 살려주고 치속도위라는 중책을 맡겼지만[20] 길어야 3달 정도 만에 유방이 크게 쓰지 않는다며 탈영해 버렸으며,[21] 괴철의 말에 넘어가 동료인 역이기를 죽게 만들고 적국을 멋대로 늘려버린 행태나 공적이나 상하관계가 명확하긴 했어도 한때 같은 전선에서 싸웠던 전우 관영을 두고 "내가 저 따위 놈이랑 어떻게 동급이란 말이냐?" 같은 말을 서슴없이 했다.[22] 또 본인은 밥을 빌어먹었던 정장이 자신을 돌보는걸 그만두자 군자가 아니라고 꾸짖었으면서[23] 자신의 보전을 위해 의탁하던 종리말을 죽게 했고,[24][25] 죽기 직전에 괴철이 자신에게 반란을 사주했다고 불어버려서 괴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26] 이는 결국 자신에게 도움이 되거나 자신을 도우려 한 사람을 스스로 차 버린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신이 끝끝내 거병을 하지 않았고 유방이 잡으러 왔을 때도 무장조차 안 하다가 순순히 포박된 것을 근거로 충신이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이건 정치력이나 처세술의 문제라고 봐야지 정말로 한신이 충신이었을 가능성은 낮다. 물론 대우도 제대로 안 해 주는데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자신이 공을 세운만큼 대우를 받는 게 합당하긴 하지만 공을 세우려고 아군조차 팀킬하고 군주가 위기의 상황인데 왕위를 달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예 격이 다른 문제다.[27]

유방은 이성왕을 숙청하는 등 공신들을 견제하는 작업을 했고 소하, 번쾌 같은 최측근들까지 의심하여 죽이려는 면모를 보였다.[28] 그런데 이들과 한신을 동일하게 묶기 어려운 게 한신 숙청에 관련된 인선만 봐도 고제가 견제했고, 소하가 협력했고, 여후가 제거했고, 장량소하에게 상을 줄 것을 청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신을 변호하거나 소하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대로 귀띔해준 사람이 전혀 없었다.[29]
이걸 다시 보면 황제는 물론 대신들 에게도 단단히 찍혔다는 말이 된다.

한신은 사람을 모으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 부족했다. 조, 위, 연, 제 4개의 나라를 무찌를 정도의 공을 세웠으면 분명히 한신의 아래에도 여러 인재가 있었을 것이고, 그런 인재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도 능력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제대로 보여준 게 고제이다. 고제는 형식상 초나라의 밑에서 성장했지만, 원정 도중에 장량, 역이기, 관영 등을 직속 수하로 얻으며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30] 이좌거나 괴철의 사례를 보면 한신이 인재를 포섭하려는 시도를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유방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신에게는 신하로 삼을 만큼 능력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괴철과 이좌거 등 일부 참모진이 전부고, 부장급 인물들은 대부분 유방에게 충성을 바치는 데다 지휘관급들도 조참, 관영 등 유방의 최측근인 사람들 뿐이었다. 그래서 한신이 반란을 일으키면 이들이 합류할 가능성은 없었다.[31] 그 와중에 이좌거도 유방의 지시로 산둥성 일대에 둔전을 개척하는 임무로 빠진 뒤 그곳에서 천수를 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즉, 고제는 한신을 그나마 도와줄 사람까지도 빼낼 정도로 눈이 좋았고, 한신의 태도를 교정해 줄 조언자는 한 명도 없었으며, 기껏 있다 간 괴철은 바람만 넣고 갔으니 사람 복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운이 없어 주변에 훌륭한 사람이 없이 쓸데없이 아첨만 하는 사람만 붙었다고 하기도 뭐한 것이, 전 시대와 상황을 막론하고 유명한 권력자 옆에는 항상 저절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인데, 그들 중에는 당연히 능력있는 인재도 있겠지만 아첨만 해서 득만 보려는 소인배도 많다. 이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 속에서 인재를 골라내어 중용하고, 소인배는 내쳐버리는 것이야말로 권력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사람 잘 쓰기로 유명한 유방의 곁이라고 충신들만 몰려들고 소인배들이 없었겠는가? 유방은 소인배를 알아보고 쓰지 않았고, 한신은 소인배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날뛰게 놔둔 것에서 둘의 용인술의 역량 차이는 이미 천지차이였다.

또한, 제후왕 자리, 그것도 특별한 위상과 의미를 가진 제왕과 초왕의 작위를 한신은 겉으로 내세울 명분이나 혈통도 없이 손에 넣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도 당시의 가치관으로 보면 부적절하기 짝이 없었고 단순히 가치관 문제 이전에 한신의 무리한 제나라 정벌로 초한전쟁이 1~2년은 더 연장되어 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희생된 인명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32] 이러니 한신에 대해 단순한 질투 이상의 악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데, 번쾌의 일화에서 보듯이 한신은 시종일관 공신들을 무시하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자신의 공훈을 믿고 교만해진 탓에 자신에게 독이 되는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른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보전을 위해서 종리말에게 죽어달라고 말한 것부터가 상황 판단도 문제지만, 인망이 없을 만하다는 예시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종리말을 어설프게 껴안은 탓에 본인의 왕 자리까지 뺏긴 것을 보면 더더욱. 차라리 처음부터 고제에게 종리말을 붙잡아 가든가, 의리가 문제라면 끝까지 껴안든지 차라리 모른 척하고 풀어주는 것이 상책이었음에도 기껏 보호할 때는 언제고 고제가 종리말을 잡으려 들자 뒤통수를 친 것이다. 종리말이 격분해서 자살할 정도로 이기적인 짓이었으니 욕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33]

한신의 행보를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어중간함'이라는 부분이다. 한신은 열렬한 충신[34]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극단적으로 냉혹하고 철두철미한 모략가가 되지도 못했다. 제나라 왕을 탐한 것처럼 야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막상 지금이 최적의 기회니 거병을 하라는 괴철의 제안을 거부하는 등 본인이 살 길을 찾아봐야 함에도 손을 쓰는 건 거부했고, 종리말을 숨겨주듯 자잘한 인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하후영처럼 막상 그를 끝까지 보호해준 것도 아니라서 자신에게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자 종리말을 죽게 만든 것처럼 인정을 위해 한몸을 바친 것도 아니었다. 생각은 있는 듯 하며 여러 사람들에게 도발적인 행보를 보이면서도 막상 실행은 안 하고 꾸물거리며 여러 사람들의 부아만 돋구고 말았다. 즉 열렬한 충신도, 극단적인 모략가도, 대단한 선인도, 지독한 악인도 되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것이 어중간했다.일단 정말로 반역을 저지른 건 아니라지만 또 반역자로 몰려도 할 말이 없을만한 짓들을 했기에 팽월처럼 마냥 억울하다고 보기도 어렵다.[35][36] 어떻게 보면 지나칠 정도로 인간적이었는데, 그의 능력을 보면 천하를 뒤흔든 천하대장군이자 영웅적인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람됨은 묘한 소인배스러움이 느껴지는 신기한 경우다.

이런 점 때문에 간혹 한신에 대해 "영웅의 모습과 소인배의 모습이 섞였다."라는 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시바 료타로는 자신의 소설 항우와 유방에서 한신의 이런 이중성을 부각시켰는데, 작중 괴철이 한신에 대해 "무인으로서는 걸출한 재능의 소유자지만 다른 면에서는 백치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37]

결론적으로 한신은 능력 자체는 뛰어나지만, 군공이 쌓여갈수록 자신의 능력을 믿고 교만해졌으며, 군사적 재능에 비해 정치적으로 사람부릴 줄 모르며, 처세술의 부재로 인해 서서히 주변 사람들의 인망을 잃어갔다. 군사적 재능 하나만으로 한의 대장군이 되어 왕의 자리까지 오른 그가 그 능력 때문에 토사구팽당해 비참하게 죽어갔다는 점은 항우와 매우 비슷하다.

4. 역사서의 평가

진평이 말하였다. "폐하의 제장들 중 용병술이 한신을 뛰어넘는 인물이 있습니까?"

황상(유방)이 말하였다. "용병술은 한신을 따라갈 사람이 없소."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우고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자기를 공을 과시하지 않고, 자기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그가 세운 공은 아마도 주나라 천 년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 등이 세운 공훈에 비견되어 후세들로부터 혈식(血食)을 받아먹으며 받들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의 정세가 이미 정해진 뒤에야 반역을 꾀했으니, 일족이 멸망한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사마천,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한신이 첫째로 큰 계책을 세웠다고 하니, 고조와 더불어 한중(漢中)에서 군사를 일으켜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가지고 북쪽으로 가서 위표(魏豹)를 사로잡고, (代)를 빼앗았으며, 조나라(趙)를 무너뜨렸고, 연(燕)을 위협하였으며, 동쪽으로 가서 제나라(齊)를 공격하여 이를 소유하고 남쪽으로는 초를 해하(垓下)에서 멸망시켰으니, 한나라(漢) 왕조가 천하를 소유할 수 있던 것은 대개 한신의 공로입니다.

그가 괴철(蒯徹)의 유세를 거절하고 고조를 진구(陳丘)에서 환영한 것을 보면, 어찌 반란한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오랫동안 직책을 잃어 앙앙불락(怏怏不樂)하다가 드디어 패역의 구렁텅이로 빠진 것입니다. 무릇 노관(盧綰) 같은 자는 고조와 같은 고향이라는 옛날의 정리(情理)를 가지고 연나라에서 왕 노릇을 했는데, 한신은 열후가 되어 조회에나 참석하니 이것은 고조가 한신에게 잘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 사마광은 그런 한신을 고조가 속이는 꾀를 써서 진구에서 사로잡았으니, 이것은 고조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신 역시도 죄를 받을만한 일을 했습니다.

애초에, 한이 초나라(楚)와 형양(衡陽)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한신은 제를 멸망시키고 돌아와서 보고도 하지 않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그 후에 한이 초를 추격하여 고릉(固陵)에 이르러서는 고조가 한신과 더불어 초를 공격하기로 기약했었는데 한신은 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이미 고조는 한신을 사로잡을 마음이 있었지만, 다만 힘이 부족했을 뿐입니다. 천하가 평정되고 나서는, 대체 한신을 다시 믿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릇 때를 틈타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은 시정잡배의 생각이고, 공로를 돌리고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 선비나 군자들의 마음입니다. 한신은 스스로가 시정잡배의 뜻을 가지고 그 몸을 이롭게 하면서, 정작 다른 사람에게는 선비나 군자의 마음을 기대했으니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사마광, 자치통감(資治通鑑)
한나라 고조가 천하를 얻은 것은 모두 한신의 힘인데, 만약 한신으로 하여금 괴철의 꾀를 들어 써서 제(齊)나라의 강함을 근거삼아 솥발처럼 세 곳에 할거하여 서로 대치하였다면 고조가 비록 천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형세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니, 역시 반드시 곤궁(困窮)한 뒤에야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신은 본디 배반할 마음이 없었는데 오로지 고조가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반드시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분격(憤激)하여 반모(反謀)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비록 그러나 한신의 공은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집에 살아남은 이가 없게 하였으니, 고조는 진실로 한신을 저버림이 있습니다.
이맹현, 성종실록, 5년(1474) 8월 10일(임진) 5번째 기사
한 고조가 공신을 대우함을 있어 처음에는 옳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것으로 천하를 취하려고만 했을 뿐 잘 어거하는 도는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한신(韓信)이 가왕(假王)되기를 청한 것은 참람하고 방종한 마음을 가지고 임금의 마음을 의심케 함을 면치 못하였고, 고제(高帝) 역시 마지못해 그의 청을 들어주고는 후일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면치 못하여, 상하가 서로 의심한 끝에 결국은 보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나는 새가 다 없어지니, 좋은 활도 쓸모가 없게 됐다.'는 탄식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안처성, 중종실록, 2년(1507 2월 13일(정해) 2번째 기사
한신은 이미 재능 때문에 고제가 꺼렸고 여후(呂后) 또한 총애하는 심이기(審食其)와 더불어 한신과 팽월(彭越)을 죽이려고 도모했었습니다. 그러므로 팽월에 있어서는 사인(舍人)을 시켜 무고하게 하여 죽였고 한신에 있어서도 그렇게 한 것이니, 소위 '진희(陳豨)를 시켜 모반하게 했다.'는 것은 곧 사인의 아우 사공(謝公)이란 자가 고발한 말입니다. 주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한신의 반역은 나타난 증거가 없다.'고 했고, 여조겸(呂祖謙)이 《십칠사상절(十七史詳節)》·《대사기(大事記)》를 편수할 적에 모두 한신이 모반하려다가 주벌당했다는 것으로 말하자 주자는 '사람을 잘못 죄에 빠뜨린 것이다.'고 했었습니다.

대개 진희가 대(代)의 정승으로 부임할 적에 따라간 빈객(賓客)의 수레가 1천 승(乘)이었는데 주창(周昌)이 빈객이 불법인지를 조사하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말이 진희에게까지 걸리게 되자 진희가 주벌당할까 두려워하여 모반한 것이니, 한신에게서 나온 일이 아님이 매우 분명합니다. 주자가 지극히 은미한 내용을 추찰해 보고서 《강목》에 '여후가 회음후(淮陰侯) 한신을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고 특서한 것입니다.

여후와 심이기는 평소에 제장들을 없애려고 했었기 때문에 고제가 붕(崩)했을 적에 비밀로 하고 발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에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은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노관(盧綰)에게 붙어 연(燕)에 있었고 관영(灌嬰) 또한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낙양(洛陽)에 있었는데 역상(酈商)이 심이기를 달래어 '만일 제장들을 족주(族誅)한다면 주발관영이 회군하여 그대들을 씨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므로 이에 발상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한서》 형법지(刑法志)를 고찰해보면 '한신과 팽월을 벨 적에 여후가 우선 혀를 모두 베도록 했다.' 했으니, 이는 자신의 추잡한 행실을 말할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외람하게 형벌을 쓴 것이 아니겠습니까.
유희춘(柳希春)
한신이 어찌 군신의 의리를 안 사람이겠습니까. 한왕(漢王)과 함께 초나라(楚)를 치기로 기약해놓고도 오지 않았습니다.
김우옹(金宇顒)의 반박
초래(草萊)에서 서로 의탁한 사이는 평상시의 군신 사이와는 다릅니다. 그 당시에 한나라 신하들이 한왕을 족하라고 불렀으나 이것이 어찌 평상시 군신의 예이겠습니까. 한신이 기약을 어기고 오지 않은 것은 진실로 죄가 있는 일입니다마는, 제(齊)나라 전부를 차지하여 천하를 삼분(三分)한 형세가 되었을 적에 괴철(蒯徹)이 거듭 꾀었는데도 '내 어찌 이득을 좇아 의리를 저버리겠는가.' 하고 잘라서 말했으니, 이는 그의 늠름한 대절(大節)이 드러난 부분입니다.

또, 항우를 처음 패배시켰을 때 한왕이 시급히 제왕(齊王)의 성으로 들어가 정예병을 모조리 빼앗고 다시 초왕(楚王)으로 봉했지만 조금도 불평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선유(先儒)들은 '그가 스스로 의심을 품고서 사로잡았으니 이는 진실로 한왕의 잘못이다.' 하였는데,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한나라의 신하이기 때문에 곧바로 쓰지 못한 것이고, 뒷날의 사마공과 대계(戴溪) 또한 그가 모반하였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온공(溫公: 사마광)은 성격이 순후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사리에 밝지는 못하여 평상시의 군신의 예를 고집하여 초래에서 서로 의탁한 사람을 책망한 것입니다. 한신이 죄없이 사로잡혀서 열후(列侯)로 강등되어 번쾌(樊噲)와 같은 서열에 든 것이 부끄러워서 불만스럽고 무료해 한 적은 있었겠지만, 모반했다고 한다면 심하게 무함한 것입니다.
유희춘의 재반박, 선조실록 8권, 7년(1574 2월 5일(경술) 1번째 기사
한 고조가 한신을 죽인 것은 대체로 혜제(惠帝)가 어리고 약했기 때문에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랬던 것이다. 만약 혜제도 문제(文帝)처럼 영명(英明)했다면 필시 한신 등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효종, 효종실록 4권, 1년(1650 7년) 7월 28일(기묘) 2번째 기사
한나라 고조가 운몽(雲夢)에서 거짓으로 놀다가 한신(韓信)을 사로잡은 것은 정도(正道)가 아닌 듯하다. 진평(陳平)의 계략은 진실로 정도가 아니고, 한신 또한 그르다. 경포(黥布)에 대해 말한 것과 군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보낸 일은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겠는가?

또 무섭(武涉)을 사양하여 돌려보냈을 때를 당하여 '나를 먹여 주고 나를 입혀 주었다.'는 말은 이미 전국(戰國) 때의 여풍(餘風)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신의 재주는 과연 성질이 사납고 교만한 까닭에 반심(反心)이 이미 싹텄었으니, 그 형세가 길 수 없었다. 한나라 고조의 일은 부득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그를 성심(誠心)으로 대우하였었는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순조, 순조실록 11권, 8년(1808 11월 19일(경진) 1번째 기사
무릎을 꿇었다고 한신을 겁쟁이라고 봐선 안 된다. 무릎을 꿇을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놀라서 간이 콩알만 해지고 정신이 멍해져서 털퍼덕 하고 무릎을 꿇는 경우다. 이런 사람은 겁쟁이다. 다른 하나는 위로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경우다. 나중에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 무릎을 꿇는 사람이라면 분명 영웅이다. 화가 치민다고 덥썩 깨물고 죽어도 놓지 않는다면 개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보양(栢楊)
한신은 한 시대의 명장이자 최고의 공신이었습니다. 그는 꿋꿋하게 곤경을 버티고 일어나 전투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전백승하여 최고의 위치에 올랐다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유방을 배신할 수 있었을 때 충성을 지켰으며,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적을 때 모반을 꾀했습니다. 혹자는 한신의 모반이 (날조된 혐의라)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고, 혹자는 모반의 증거가 확실하다고 주장합니다. 또 혹자는 그가 핍박을 당해 최후의 발악으로 모반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신은 영웅 시대의 영웅으로서 치욕을 참았으며,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가끔씩 우유부단하고 이해득실에 노심초사했지만, 후세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의 일대기는 음미할수록 깊은 감동을 주는 동시에 음미하는 이를 심사숙고하게 만듭니다.
이중톈, 초한지 강의 pp.70 中

5. 기타


"장군, 장군께서 저에게 병법을 전수해 주신다면 저는 그것을 대대로 전수하여 장군의 이름을 빛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그의 부탁을 수락하지 않았으나, 그 병졸이 몇 번이나 간곡히 청하자 한신은 마침내 그에게 3일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였다. 3일 후 한신은 그 병졸과 마주앉았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있던 큰 네모 판자에 적군과 아군 진영을 나누고 거기에 각각 32개의 칸을 그려넣은 다음, 중간에 강을 경계로 삼고 그 안에 "초하(楚河), 한계(漢界)"라고 적어 넣었다.[38]

또 한편에는 16개의 붉은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수(帥), 사(仕), 상(相), 차(車), 마(馬), 포(炮), 병(兵) 등의 글자를 써넣고

다른 한편에는 16개의 푸른 종이조각을 배치한 후,

장(將), 사(士), 상(象), 차(車), 마(馬), 포(炮), 졸(卒) 등의 글자를 써넣었다.

그 모습을 본 병졸은 갸우뚱하며 "이것이 병법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신이 대답했다.

"이 72개의 작은 사각형을 우습게 보지 말거라. 여기에는 천군만마의 대전투를 모두 담을 수 있다. 이 16개의 종이조각은 각각 자기 편을 대표하는데, 용병에 있어서도 문무를 바탕으로 상하가 일치단결하여 전반적인 계획을 적절하게 운용하면 어떤 변화에도 능히 대처하여 백전백승할 수 있다. 이 방법에 정통한 후에 그것을 군사(軍事)에 응용하면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 천하에 적수가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병졸은 무릎을 꿇고 절한 뒤 한신을 스승으로 삼고 병법을 배웠다. 한신이 죽은 뒤 병졸은 공직을 사양하고 병법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편의상 그는 종이에 장기판을 그리고 종이 조각 대신 나무조각을 깎아 장기알을 만들었다. 그 후 이것은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다.||

6. 대중문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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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권 「악의열전(樂毅列傳)」 81권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82권 「전단열전(田單列傳)」
악의 염파 · 인상여 · 조사 · 조괄 · 이목 전단
83권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84권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85권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노중련 · 추양 굴원 · 가의 여불위
86권 「자객열전(刺客列傳)」 87권 「이사열전(李斯列傳)」 88권 「몽염열전(蒙恬列傳)」
조말 · 전저 · 예양 · 섭정 · 형가 이사 몽염
89권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90권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91권 「경포열전(鯨布列傳)」
장이 · 진여· 장오 위표 · 팽월 영포
92권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93권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94권 「전담열전(田儋列傳)」
한신 한신 · 노관 · 진희 전담 ,전영 전횡,
95권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
번쾌 · 역상 · 하후영 · 관영
96권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장창 · 주창 · 임오 · 왕릉 · 신도가 · 위현 · 병길 · 전문 · 황패 · 위현성 · 광형
97권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98권 「부근굉성열전(傅靳蒯成列傳)」 99권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역이기 · 육가· 심이기 · 주건 부관 · 근흡 · 주설 유경 · 숙손통
100권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101권 「원앙조조열전(袁盎鼂錯列傳)」 102권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계포 · 난포 원앙 · 조조 장석지 · 풍당
103권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104권 「전숙열전(田叔列傳)」 105권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석분 · 장숙 전숙 진월인 · 순우의
106권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107권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108권 「한장유전(韓長孺傳)」
유비(劉濞) 두영 · 전분 한안국
109권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이광
110권 「흉노열전(匈奴列傳)」
흉노
111권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112권 「평진후주부열전(平津侯主父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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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타 추무제 · 추요 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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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권 「혹리열전(酷吏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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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권 「대완열전(大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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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권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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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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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 대장군(大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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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前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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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유방만이 천자가 될 만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것이 아니다. 제나라의 마지막 왕 전횡이 자결하자 제나라 멸망 후 섬에 은둔해 있던 전횡의 부하 5백 명이 전부 자결하였다.[2] 한신, 팽월, 영포, 장오, 한왕 신, 연왕 장도(후에 노관), 장사왕 오예[3] 한신은 인망이 높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보니 유방에게서 독립했다고 해도 과연 잘 되었을지 의문이긴 하다. 당장 한신 휘하에 있던 병사들과 장수들도 유방이 준 것이었다.[4] 인력풀만 봐도 한고제 유방은 고향인 풍, 패로부터 그를 따르던 자들을 잔뜩 데리고 있었고(소하, 조참, 번쾌, 하후영, 주창, 주발 등) 거기다 한신 외에도 장량, 진평, 역이기 & 역상 형제, 관영 등 출사 이후 들인 인재들도 굉장히 풍부했으나 한신에게는 괴철밖에 없었다.[5] 토사구팽의 유래는 범려(范蠡)이다. 다만 범려는 토사구팽을 피해 잘 먹고 잘 살다 죽었고, 워낙 이쪽이 임팩트가 강하고 널리 알려져 한신과 유방의 일을 가리킨다.[6] 모든 지휘관들은 각자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므로 일괄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적어도 가장 뛰어난 명장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수없이 손꼽혔다.[7]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항우를 본기에 등재시키며, 그가 중국의 지배자였음을 확고히 했다.[8] 용저항우가 항상 중요한 전선을 맡겼고 훗날 자신을 죽인 공로로 이 된 여마동과 더불어 항우의 소꿉친구였을 정도로 항우가 중히 여겼던 장수다.[9] 역으로 보면 모든 세력이 공평하게 국가체제와 병력의 질이 낮았던 초한쟁패기 당시의 상황 덕분에 한신의 환상적인 활약이 가능했다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예컨데 체계적으로 훈련된 병력과 숙련된 지휘관을 갖춘 질 높은 군대가 주류이던 시대였다면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더라도 개인의 역량으로 전장 전체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훨씬 제한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천재적인 개인이 활약하기에는 공평하게 우세한 환경보다는 공평하게 열악한 환경이 더 유리하다는 것. 또한 아래에서도 거론된 내용이지만 이렇게 급조된 열악한 군대였기에 거의 경력 없는 한신 같은 이가 그저 '재능이 있어 보인다'는 짐작만으로 지휘권을 받는 것도 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10] 다만 애시당초 한신의 군대는 고제로부터 받은 것인데 고제는 이미 한참 전부터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아왔으므로 한신의 군대 자체는 꽤 숙련된 군대였을 가능성도 사실 적지 않은 편이다. 무엇보다 배수진을 걸었을 때 잠시나마 버텨준 것만 해도 급조되고 열악한 군대가 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다. 당장 강물로 뛰어들지 않고 몇 번이나 진여의 군대를 막아낸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고.[11] 이 평판은 심각할 정도로 한신을 저평가하게 만들었다.[12]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본래 다른 세력의 군대에 있었다가 탈영하여 새 군대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일개 젊은 하사가 갑자기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나라와의 전쟁들을 모조리 이기고 나라 몇개를 무너뜨린 셈인데, 경력상 정말 말도 안되는 압도적 업적이며 상상만으로도 혀를 내둘러야 할 지경이다. 더구나 그 육군참모총장이 불과 몇 년 전엔 자기 밥벌이도 못 벌어 먹고 동네방네 손가락질을 받던 한량 백수 처지였으니. 요즘 말로 소설로 이런 인생사를 써내면 현실성이 없다고 욕먹기 딱 좋은데, 한신은 이런 인생사를 현실에서 살았던 셈이다.[13] 한신에 관련된 정사의 기록 중 한신은 행군 이후 시간이 날 때 행군 중 보았던 지형들을 복기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고 한다. 초군에 입영했을 때부터 온갖 중원을 행군하고 전투를 복기했던 경험이 대장군이 되어서 6개의 나라에서 전쟁을 벌이는 동안 보여준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만개했다.[14] 한신은 주군 유방에게 초왕 자리를 빼앗기고 한나라 수도에 포로처럼 잡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신의 명성이 매우 높았다는 것과 한신이 내심 자결할 생각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신이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거나 정치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여씨 집안 사람인 번쾌에게 잘 보일 생각부터 해야 맞는데, 그러지 못했다.번쾌는 한신을 존중하며 깍듯하게 배려하고 대접했던 만큼 한신이 잘만 하면 번쾌는 한신의 구명을 위해 노력해 줄수도 있었을 것이며 다시 왕으로 복귀하는건 무리더라도 비참한 말년 만큼은 피하게 해줄수 있는 몇안되는 인물 이였는데도 이랬다. 이쯤 되면 거의 지 몸에 된장 바르고 삶아달라 시위하는 수준...[15] 초반에는 유방은 한신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근처에 있음에도 지원을 해주지 않은 일을 기점으로 조금씩 불안해했지만 제나라 침공 이전까지 큰 공을 세운 한신을 총애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최측근인 역이기가 제나라와 협상을 성사시켰음에도 전공을 탐해 역이기를 죽게 된 것으로 선을 넘었는데 후일 임시 왕으로 인정해달라는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유방은 한신을 불신하게 된다.[16] 거기다 애시당초 이 반란도 사실 한신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17] 애시당초 역이기가 제를 설득하러 갈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한신이 조와 대, 연을 평정했기 때문이었다.[18] 찍힌상태에서 왕이 좌천은 커녕 진급시켜주면 배신각을 보는게 정상이다.[19] 사실 역이기를 죽게 만든 일도 문제지만 그 이상으로 해하 전투에서 고제가 불렀을 때 오지 않은 것과 제나라 왕위를 요구한 것은 빼도박도 못할 실책이었다. 그나마 영포와 팽월이야 원래 고제의 신하는 아니었으니 보장이 필요했을지 몰라도 한신은 엄연히 고제의 신하였고 고제가 직접 대장군으로 임명했고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일개 필부로 끝났을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20] 한신의 행태 때문에 치속도위가 엄청난 한직으로 여겨지지만 도위는 당시 상당한 중책으로 장한 군대의 3인자로 적왕까지 오른 동예도 도위 직책이었으며 분봉 직후 유방 세력에서 도위직에 올랐던 인물은 따로 거병해서 활동하던 역상(농서도위)말고는 없었다. 아예 친인척이던 번쾌도 당시에는 낭중에 불과했다.[21] 흔히 한신의 행태가 제나라 정벌 전후로 지위가 올라가면서 교만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한신의 행태는 유방 진영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이 모양이었다. 사실 항우 휘하에 있을 때도 자기 꾀를 써주지 않는다고 도망쳐나온 것도 물론 항우가 한신의 가치를 못 알아본 것도 있지만 그 못잖게 한신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한 인물이었다는 방증이었다.[22] 한신이 대놓고 비하한 번쾌와 관영은 한신만큼은 아니었다고 해도 고제 휘하 중 최상위권의 장수들이였으며 고제와도 관계가 매우 좋았다.[23] 한신이 뻔뻔스러운게 아니다.당시 관념상 한번 식객으로 받았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게 도의였기에 정장이 잘못한건 맞긴 맞다.문제는 그래놓고선 한신 본인은 정장보다 더 심하게 군자의 도의를 어겼다는게 문제.[24] 하후영만 봐도 적장이었던 계포가 자신에게 몸을 의탁하자 그를 숨겨주고 고제에게 그의 사면을 청하는 의리 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고제도 계포한테 욕 한 사발 퍼붓는 정도로 용서했다. 때문에 만약 한신이 하후영처럼 종리말의 사면을 청하였다면 이미 항우도 죽었겠다 고제도 그를 죽이지 않고 벼슬을 내리거나 사면해주었을 가능성이 컸다.[25] 사기에는 이를 종리말이 유방을 곤경에 자주 처하게 만들어서 그랬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같은 이유로 체포 명령이 떨어지고 초에서 활약했던 계포는 아무리 하후영의 변호가 있었다 하더라도 항복하자마자 벼슬까지 내려줘서 중용했고 그 외에도 항백 등의 항씨 일족들도 열후에 3명을 봉했을 정도로 대접했고 그시절 유방과 적대했거나 싸워봤던 인물들이 한둘이 아닌데 전부다 잡아 죽일수도 없는 노릇이며 실제로도 정공 정도를 제외하면 항장이라도 죄없는데 무자비하게 죽인 적은 없었다.이를 보면 원한이 문제가 아니라 항우의 잔당이 모여 다시 일어날 것을 염려한 것으로 추정되며 오히려 한신에게 받아달라고 할게 아니라 빨리 유방에게 귀순했더라면 벼슬을 받거나 벼슬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면받아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26] 다만 그럼에도 괴철은 한신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빠져나오려고 하는 대신 끝까지 당당하게 행동했고 그 결과 고제에게 사면받았다.[27] 더구나 한신은 제나라 왕위들 달라고 요구할때 "제나라 사람들은 거짓과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니 번복이 심한 나라입니다."라고 언급 했는데 유방과 당시 유수구 전투에서 이미 죽은 전광이 들었다면 기가 찰 일이었다. 애초에 제가 초와 손을 잡은것은 한신이 역이기의 변설에 넘어가 항복한 제나라를 공격했기 때문이며 한신은 이를 정당화 시키려고 했는지 제나라는 신용을 못한다고 주장한듯 하나 이미 항복한 군대를 공격한 시점에서 이후 거짓과 속임수로 공격당할 명분을 가진건 한신이었다.[28] 하지만 이 둘은 나름대로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소하는 유방과 기타 신하들이 전부 항우를 상대하기 위해 수도인 관중 밖으로 나가 있는 상황이라 반란을 일으킬 경우 근거지를 잃고 인질까지 잡힐 우려가 있었다. 번쾌는 여씨와 너무 가까웠다는 게 문제였는데 특히 전쟁 중에 크게 활약한 장군이었기 때문에 여씨 집안에 부족한 준재를 채워줄 만한 인물이기도 했다. 다만 소하는 주변의 도움 덕에 자기 자신이 의심을 받을 여지가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서 자기 친척들을 군대에 보내는 등 조치를 잘 취했고 번쾌의 경우 처음부터 의심했던 것은 아니고 번쾌를 체포한 것 자체가 고제 말년에 벌어진 일이라 고제 사후에는 진평 등의 협조도 있어서 더 이상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아니며 이 같은 행동은 유방이 토사구팽의 대명사가 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29] 사실 다른 이성왕과 다르게 유방은 한신을 살려는 둘 생각을 했었다. 유방은 한신을 제왕에서 초왕으로 쫒아냈을 때,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했을 때 모두 한신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한신을 죽이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군략을 지닌 한신이기에 이성왕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이었고 팽월, 영포 등은 비슷한 상황에서 과감하게 숙청한 유방이지만 한신에겐 유독 물렀고, 심지어 한신이 죽기 직전에도 원정길에 데려가서 자기 곁에 두려고 했다. 그 마지막 동앗줄마저도 심사가 꼬인 한신이 꾀병을 이유로 기어코 걷어차지만 결국 위협 대상으로 지정한 여후와 공신들이 협력하여 숙청해버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넘어갔다.[30] 특히 장량은 원래 한나라 재상 가문 출신이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인물이 아니었고, 유방이 날건달이던 시절부터 시황제 암살을 시도한 대선배님인데, 평민에 산적 두목 출신인 유방이 이런 거물의 호감을 사 휘하로 영입한 것이다. 유방도 이전부터 장량에게 공을 들였고 그의 호감을 샀긴 했지만 한왕 성이 죽고 나서야 장량을 정식으로 수하로 들일 수 있었다.[31] 고제 주위의 인물들은 대개 세 부류인데 고향 동기면서 고제가 거병하자 따라 나선 인물들(소하, 조참, 하후영, 주발, 주창, 번쾌, 노관 등 동네 친구들)과 원래 외부 세력이었지만 고제에게 은혜를 입어서 넘어온 인물들(장이, 장오, 팽월, 영포 등 제후들), 그리고 일부러 고제의 신하가 되기 위해 찾아온 인물들(관영, 역이기, 역상, 근홉 등의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한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32] 당장 제나라의 항전 때문에 한신이 제왕에 오른 뒤에도 1년 가까이 제나라 저항세력과 전투를 벌여야 했으며, 조참을 비롯한 상당수의 한나라 군대가 해하 전투에 참전도 못하고 제나라에 묶여서 저항세력과 싸워야 했다.[33] 자신의 욕망과 보신을 위해 의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파촉에서 소하와 하후영을 버리려고 시도했던 것, 또 역이기의 사례와도 일맥상통한다. 즉, 한신은 원래 이런 자였다는 것. 종리말에게만 이런 것이 아니라 그 외에도 이런 식이라는 게 괴철에게 의리를 거론한 것의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34] 비록 여후는 공신을 숙청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 유방은 전쟁이 종결된 후 공신들을 이런저런 명분으로 제거했기에 또 모를 일이긴 한데 어쨌든 차라리 열렬한 충심이라도 보였다면 유방은 전후에도 한신을 믿고 기용하였을 테니, 어쩌면 토사구팽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고 소하처럼 적당히 압박 좀 하다가 말 수도 있었고 그러면 한신의 말년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실제로 진하 근흡등 숙청 당하지 않은 케이스도 있었으며 심지어 영포는 고변이 들어왔음에도 이전까지는 충성스러웠기 때문에 유방과 소하도 무작정 잡아 죽이려 하기 보다는 일단 덮은 다음 따로 조사해 보려 했다.그러니 한신도 정말 충성스러웠다면 토사구팽은 피할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전쟁 중 역이기 사건과 제나라 왕위 요구 사건 때문에 유방은 한신의 충성심을 의심하게 되어 한신을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는 위험분자로 보고 있었고 종리말 사건이 결정타가 되어 그를 잡으러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그 지경까지 이르렀음에도 한신은 괴철의 말대로 독립하거나 유방과 맞설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막연히 내가 공이 이렇게 큰데 죽이겠어?같은 생각을 품었고 초한전쟁이 끝난 후엔 종리말 넘겨주면 용서해 주시겠지? 같은 안일한 생각을 하였으며, 결국 토사구팽의 말로를 맞이했다.[35] 팽월도 사실 유방과 본인의 관계를 착각해 처세에서 실수를 안 한것은 아니지만, 당대 시대상을 감안하면 유방과의 관계를 착각하는 것 자체는 참작이 되는 행동이였으며, 엄연히 숙청당할만큼 선을 넘었다고 보기에는 매우 힘들다.[36] 다만 팽월도 생각보다 위험한 모습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숙청당한 것이기도 했다.(물론 직접적인 계기는 아랫사람의 참소지만 그게 먹혔다는 것 자체가 의심을 샀다는 뜻이다.) 애시당초 유방과 본인의 관계를 착각한 것 자체가 이제 천하를 평정한 시점에서는 매우 위험했던 데다가 팽월이 의심을 받은 직접적인 계기는 팽월이 중앙에 바쳐야 할 공물을 자주 빠뜨렸기 때문이었다. 현대 사람들 눈에는 이게 사소한 일로 보일지 몰라도 바쳐야 할 공물을 빼먹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역모의 의지를 갖고 있다고 의심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짓이다.[37] 특히, 이러한 모습을 보인 또다른 예시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무장으로서 뛰어난 전술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추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경계에 반란을 계획했을 때 인망이 없다보니 따르는 병사가 없어 도망친 경우다. 요시츠네와 한신은 비슷한 구석이 있었으므로 한신도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38] 중국 장기는 우리와 달리 중간에 강을 경계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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