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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5:22:00

한(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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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일:중국전국시대.png
존속기간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
별칭 건(乾)
위치 중국 허난
수도 평양, 의양, 양책, 신정
국성 (姬)[2]
국가원수 후작[3]
주요 군주 소후 한무
주요 재상 신불해
언어 상고 중국어
문자 전서 (대전체)
종교 중국 토속 종교[4]
종족 화하족
통화 포폐
성립 전 진(晉)나라
멸망 후 진(秦)나라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역사3. 기타4. 한반도 관련 유사역사학5. 역대군주
5.1. 삼진 분립 이전(희진의 신하)5.2. 삼진 분립 이후5.3. 초한쟁패기

[clearfix]

1. 개요

중국 전국시대에 존재했던 전국칠웅 중의 하나로, 수도는 평양[5] · 의양[6] · 양책[7] · 신정[8]이었다.

2. 역사

본디 천자국인 동주 왕실의 동성 제후국이자 북방의 맹주였던 진(晉)나라의 신하였으나 제1대 국군 한경후 한건의 치세때인 기원전 403년, 영성 조씨(趙氏), 희성 위씨(魏氏)와 함께 동주위열왕으로부터 제후로 인정받으면서 건국되었다(삼가분진). 희성 한씨의 시조는 희진 초기, 곡옥을 분봉받아 익에 위치한 본가와 대립했던(곡옥대진) 곡옥환숙의 아들이자 곡옥장백의 동생이었던 한만(韓萬)이었다.[9] 사실 진나라 희성 진씨 공실이 만들어 낸 수많은 분가들 중에서 한씨는 가세가 막강한 집안은 아니었으나, 호씨(狐氏), 극씨(郤氏), 난씨(欒氏) 등 원래는 한씨보다 강력했던 집안이나 양설씨(羊舌氏), 기씨(祁氏) 등 한씨보다는 약했던 집안이 거의 전부 귀족들간의 권력투쟁에서 몰락하는 와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마침내 본가를 몰아내기까지에 이른 것이었다.

제4대 국군이었던 애후 한둔몽의 치세때인 기원전 375년, 희성 정씨의 정나라(鄭)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정나라의 서울인 신정(新鄭)으로 옮겼다. 제6대 국군인 소후 한무의 치세때인 기원전 355년에는 신불해를 기용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변법을 실행하는 등 건국 초기에는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나, 진(秦)나라초(楚)나라압박으로 급격히 세력이 미약해졌다. 가장 큰 분기점은 제9대 국군이자 제3대 왕이었던 희왕 한구의 치세때인 기원전 293년에 벌어진 이궐대전으로 이 전투에서 위나라, 한나라의 연합군 240,000명이 진나라의 레전드급 명장인 백기에게 대패해 참수당했다. 이궐대전은 위혜왕때 일어난 마릉 전투 이래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던 위나라와 한나라의 국력을 일시에 소모시켜버린 대사건이었다. 이 이래로 위, 한 2국이 의미있을 만한 군사행동을 벌인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설상가상으로 한나라는 환혜왕 11년(기원전 262년) 상당 일대가 조나라에게 넘어가면서 영토가 더욱 쪼그라들어 멸망할 때까지 열국을 상대할 때 수세로 일관했다.

이후 한나라는 사실상 진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시로 기원전 251년 진소양왕이 승하했을 때 그 장례식에 초, 제, 조, 연, 위 5개국은 모두 장군이나 승상 등의 대신을 조문사로 보냈지만 한나라만큼은 환혜왕(제10대 국군, 제4대 왕) 한연이 상복을 입고 직접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가 조문했다. 강대국인 진나라한테 한나라가 땅을 뜯기는 기록이 많지만 또 유난히 협력하여 진나라와 함께 다른 나라를 친 기록도 많다. 명목상으로나마 동급이었던 왕의 체면보다 당장 사는 것이 급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진나라의 비위를 맞추었던 노력도 헛수고가 되어 진왕 영정의 즉위 이후 벌어진 6국 통일 전쟁의 첫 번째 제물이 되고 말았다.

먼저 한나라는 진나라의 국력 소모를 유도하기 위해 대규모의 수거(水渠) 공사를 진행하도록 꼬드기는 피진계[10]를 구사했지만, 도중에 들통이 났는데 정작 간첩으로 진나라에 들어가서 공사를 책임졌던 정국(鄭國)은 "니들 엿먹일라고 시작한 건 맞지만 이게 제대로 되면 니들도 득 볼 거임"이라고 해서 목숨을 건졌고, 공사도 중지되지 않았다. 결국 이 일로 한나라는 어그로를 잔뜩 끌었음은 물론이요, 정국거(鄭國渠)라는 이름이 붙은 이 수로로 인해 진나라가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정국의 말대로 국력이 크게 늘어나는 결과만 초래했다. [11] 다시 진나라의 위협을 막기 위해 한왕 한안(제11대 국군, 제5대 왕)이 한비자를 사신으로 보내어 진나라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이사의 계략으로 한비자는 진나라에서 죽고 말았다.[12] 결국 기원전 230년, 수도 신정이 진나라 장수 내사 에게 함락되어 한나라는 전국칠웅 중에 첫 번째로 진왕 영정에게 멸망당했다.

진말 초한쟁패기때 다시 자립했으나 한왕 성항우에게 거슬려 살해당했고, 비워진 한나라의 왕위를 항우의 부하였던 정창이 대신했으나 한왕 신이 한고조 유방에게 투신하여 정창을 내치고, 전한의 제후국이 되었다. 이후 삭번책에 거슬려 모반을 꾸미다가 흉노로 망명함에 따라 폐국되어 한나라는 멸망했다. 그래도 한왕 신의 자손들이었던 한퇴당과 한영 등이 다시 전한에 귀순하고 공을 세워 희성 한(韓)씨 가문은 한(漢)나라 시대에 명문귀족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전국칠웅의 왕실 직계 후손 중 함양성 방화와 더불어 씨도 남지 않은 진나라의 영성 조씨 등과는 달리[13] 압도적으로 결말이 좋은 편이었다.

3. 기타

위의 내용만 읽어보면 한나라는 전국칠웅 중 이렇다할 족적을 남기기 못한 최약소국같아 보이고, 이는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애초에 시작부터 삼진 중 가장 밀리는 세력이었고, 삼가분진 이후로도 춘추시대 동안 희진과 초나라 사이에 끼여서 빵셔틀을 하며 쇠락해가던 정나라조차 쉽게 제압을 못하고 일진일퇴 끝에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나라의 영역을 차지한 후 그 일대의 풍부한 물류와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신불해를 위시한 변법을 시행한 결과 한애후부터 한소후까지는 부흥하여 일시적으로는 서방의 영진과 버금가는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 전성기때의 한나라는 300,000명 규모의 대군과 최고 수준의 무기를 보유했고, 말 9,000필과 전차 500대를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전국책》(戰國策)에는
"천하의 강력한 궁과 노, 보검은 모두 한나라에서 나왔다."
라는 언급도 있다. 이때문에 전국칠웅 중 최약체이면서도 약해질대로 약해진 동주보다는 당연히 강력했기에 주나라 앞에선 여러 번 갑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체력과 전략•전술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냉병기 전쟁의 특성상[14] 무기와 장비만으로는 전국칠웅 중 가장 작은 인적 자원과 작은 영역으로 인한 국력의 부족,[15] 유능한 장수의 부재 등 치명적인 약점을 커버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한나라의 기록을 보면 단독으로는 전국칠웅을 상대로 이긴 기록이 거의 없으며, 그나마의 승리 기록도 다른 국가들과의 합종으로 이뤄낸 것으로 한나라군이 주도적으로 활동한 적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들 때문에 전국칠웅 중 힘이 가장 약한 나라로서 별 활약도 없이 멸망했던 것이다.

소설 《초한지》에 나오는 유방의 모사 장량한왕 신(韓王 信)이 한나라 사람이었다. 특히 장량은 그 조부가 한나라의 재상을 역임했었던 명문가 출신이었다. 한왕 한신과 제왕 한신(韓信)을 혼동한 나머지 제왕 한신이 한나라 출신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제왕(회음후) 한신은 이쪽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제왕(회음후) 한신이 천하통일 직후 처음 받은 작위가 초왕(楚王)이었음을 떠올리면 간단히 알 수 있다.

4. 한반도 관련 유사역사학

한국의 민족주의 계열 역사왜곡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한()나라의 '한'자가 과거 삼한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에 이르는 의 표기 한자로 쓰인다며, "사실 삼한은 대륙에 있었던 것이다."라는 거짓말을 하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고대 한반도 남부의 삼한과 비슷한 발음의 지명 또는 종족명이 있었고, 이를 글로 표기할 때 유사한 발음을 가진 중국의 이라는 한자를 가져다 쓴 것이었다.[16] 애초에 전국시대의 한나라는 한반도와 많이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내륙국이었기 때문에 관계가 제대로 형성될 이유가 없었고, 이때는 오히려 연나라(燕)[17], 제나라(齊)[18], 오나라(吳), 월나라(越)[19], 초나라[20], 그리고 이후 연나라를 무너뜨리고 고조선과 맞닿는 진나라(秦)[21]가 당시 한반도와 관련이 좀 더 있었다.

환빠 소설가김진명이 《시경》(詩經)에 기록된 한후(韓侯)가 한국의 한(韓)이라 주장하지만, 《시경》에 나온 한후는 서주 말기의 선왕 때 분봉된 희성 제후로, 약 50여 년 정도 존속했다가 춘추시대 초기에 멸망한 국가였다. 그래서 대한민국과 큰 관련이 없지만, 《시경》 <한혁>편의 내용 중 한후가 맥족(貊族)을 거느렸다는 언급이 있어서 이에 관련된 떡밥이 나오기도 한다.[22] 하지만 바로 이때 멸망한 한후의 영지를 차지한 것이 바로 이 항목의 한(韓)나라의 시조인 한만이었다. 즉, 《시경》의 한후는 오히려 전국시대 한나라의 어원이었다.그럼 전국시대는 맞네

이때문에 한국기원설을 위장한 언어유희형 낚시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순자(荀子)는 한국인이다, 장량은 한국인의 후손이다[23], 한신[24]은 한국인이다, 중국 문명의 발원지는 한국이다[25], 시황제가 한국을 멸망시켰다 등등 역덕후들이 환장할만한 명품 드립들이 무궁무진하게 나올 수 있다. 중국어에서는 당연히 '나라'와 '국'을 모두 한자 "國"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한나라도 똑같이 한국으로 쓰인다.

다른 전국칠웅의 이름이 전국시대 이후에도 계속 국명이나 지역명으로 남은 것과는 달리, 이 '한'(韓)은 초한쟁패기에 부활했다가 멸망한 이후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다. 사실 이 '한'이란 글자를 우리나라를 뜻하는 한자로 차용한 한국 입장에서는 다행인 것이 혼동이 없기 때문이다. '한'이란 이름이 같아서 한국과 한나라로 따로 구별하고 있고, 한문이 다른 '한'(漢)조차 한족한민족으로 서로 구분해야 하는 판인데 한자까지 같은 한나라 명칭이 쭉 이어졌다간 그야말로 한•중의 역사가 혼돈의 카오스가 되었을 것이다.[26]

비슷한 사례로 베트남(월남)도 월나라(越)와 차용한 한자가 같은데, 이 경우에도 전국시대 월나라와 현재의 베트남 지역과는 거리가 멀다. 언어적으로 볼 때 현 베트남처럼 고대 월나라도 동남아시아에서 쓰는 계통의 언어를 썼다는 것이 통설이기는 하고, 또한 인종적으로도 동남아시아에 가까웠다고 보는 편이니 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해도 어느정도는 관련이 있다 수준에 그친다.[27] 애초에 역사적으로 봤을 때 베트남과 저장성-푸젠성 일대는 한무제 이전 시기에 같은 나라로 엮인 적이 없었으며 거리도 멀었다. 월나라의 고도였던 샤오싱[28]이 당대 중국의 중앙이었던 낙양에서 직선거리로 900km 정도의 거리였는데 하노이에서는 그 2배인 1800km 였다. 또한 월나라의 경우, 전국시대 이후로는 크게 흥한 왕조가 없어서 혼동의 여지는 없는 편이다. 다만 이 경우는 두 개 월(越)의 어원이 중원에서 장강 이남의 민족들을 부르던 통칭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냥 순수한 동음이의어인 두 개의 한(韓)과 달리 서로 관련이 없지는 않다.

5. 역대군주

파일:한(전국) 전서체.png
한(韓)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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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 분립 전
초대 종주

무자
2대 종주

구백
3대 종주

정백
4대 종주

자여
5대 종주

헌자
6대 종주

선자
7대 종주

정자
8대 종주

간자
9대 종주

장자
10대 종주

강자
11대 종주

무자
삼진 분립 후
초대 국군

경후
2대 국군

열후
3대 국군

문후
4대 국군

애후
5대 국군

의후
6대 국군

소후
초대 왕

선혜왕
2대 왕

양왕
3대 왕

희왕
4대 왕

환혜왕
5대 왕

안왕
초한쟁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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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삼진 분립 이전(희진의 신하)

대수 시호 이름 재위 기간 비고
1 무자(武子) 만(萬) ? 곡옥 환숙(曲沃 桓叔)의 아들
2 구백(賕伯) ? ? 무자의 아들
3 정백(定伯) 간(簡) ? 구백의 아들[29]
4 - 자여(子輿) ? 정백의 아들
5 헌자(獻子) 궐(厥) ? 자여의 아들
6 선자(宣子) 기(起) ? 헌자의 아들
7 정자(貞子)
평자(平子)
도자(悼子)
수(須) ? 선자의 아들
8 간자(簡子) 불신(不信)
불녕(不佞)[30]
? 정자의 아들
9 장자(莊子) 경(庚) ? 간자의 아들
10 강자(康子) 호(虎) ? ~ 기원전 425년 장자의 아들
11 무자(武子) 계장(啓章) 기원전 424년 ~ 기원전 409년 강자의 아들

5.2. 삼진 분립 이후

대수 시호 이름 재위 기간 비고
1 경후(景侯)
경자(景子)[31]
건(虔)
처(處)[32]
기원전 408년 ~ 기원전 400년
2 열후(烈侯)
무후(武侯)
취(取)
철(徹)[33]
기원전 399년 ~ 기원전 387년
3 문후(文侯) 유(猷) 기원전 386년 ~ 기원전 377년
4 애후(哀侯) 둔몽(屯蒙) 기원전 376년 ~ 기원전 374년
5 의후(懿侯)
공후(共侯)[34]
장후(莊侯)[35]
약산(若山)[36]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63년
6 소후(昭侯)
소희후(昭僖侯)[37]
무(武)[38] 기원전 362년 ~ 기원전 333년
7 선혜왕(宣惠王)[39] 강(康)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12년 기원전 323년, 왕호를 쓰기 시작했다.
8 양왕(襄王)
양애왕(襄哀王)[40]
창(倉) 기원전 311년 ~ 기원전 296년
9 희왕(釐王) 구(咎) 기원전 295년 ~ 기원전 273년
10 환혜왕(桓惠王)
도혜왕(悼惠王)[41]
연(然) 기원전 272년 ~ 기원전 239년
11 - (安) 기원전 238년 ~ 기원전 230년 진(秦)나라에 의해 멸국
기원전 226년 신정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진왕 영정에 의해 처형됨.

5.3. 초한쟁패기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gar. 현대 발음은 hán.[2]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한나라의 희성은 한씨(韓氏)였다.[3] 기원전 323년부터.[4]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5] 平陽; 지금의 산시성 린펀시[6] 宜陽; 지금의 허난성 뤄양시 이양현[7] 陽翟[42]; 지금의 허난성 쉬창시 위저우시[8] 新鄭: 지금의 허난성 정저우시 신정시[9] 결국 진나라 멸망에 일익을 담당한 한나라는 어찌 보면 진나라 공실의 분가인 셈이다.[10] 疲秦計, 진나라를 피로하게 만드는 계책[11] 이에 대한 해석으로 한나라는 관개가 중요하지 않은 조가 주요 작물이라서 수거가 건설되어도 진나라에 도움이 별로 없을 것이라 판단했으나, 진나라의 주요 작물인 밀은 관개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예상못했던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12] 이사는 한비자의 재능을 몹시 시기했다고 한다.[13] 다만 각국 왕실의 일부는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 예를 들어 송태조 조광윤은 조나라의 왕실인 영성 조씨의 후손이었고, 신나라를 건국한 왕망은 제나라의 왕실인 규성 전씨의 후손이었다.[14] 고대에서 장비 업그레이드는 고작 칼이 더 날카로워지거나 활의 사정거리가 더 멀어지는 수준이었기에 한계가 있다.[15] 전쟁 지속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군대를 유지할 모든 것들이 다 돈이니, 국력이 약하면 전쟁 그 자체가 나라를 휘청이게 한다.[16] 한자는 중국에서 만들어졌다. 게다가 전국시대에는 권(權)나라도 있었는데, 왕족은 권씨를 사용했다. 하지만 한국의 안동 권씨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정작 한반도에서 권씨가 나온건 고려시대 초기 태조 왕건이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 출신의 김행에게 권씨 성을 하사하면서 부터였다.[17] 고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고조선과의 충돌이 잦았으며 기원전 3세기 초엽에는 고조선으로부터 요동을 빼앗았다.[18] 산동 반도와 요동 반도의 거리 중간에 있는 섬 등으로 인해 고조선과 가까워서 교역이 잦았다.[19] 당시 한반도와 교류가 있었으며 오나라와 월나라가 멸망했을 때 상당수의 유민들이 한반도나 일본 열도로 넘어간 것으로 추측된다.[20] 전국시대초위왕이 월나라를 멸망시킨 이후부터.[21]정사 삼국지》 등 중국 역대 사서의 삼한 관련 <열전>을 보면 진한은 진한(秦韓)이라고도 부르는데 진나라의 유민과 관련이 있다는 기록이 공통적으로 들어가며, 꽤 구체적인 언어적 근거를 댄다. 진한 문서 참조.[22] 소설가 김진명이 이 주장을 하는 계기를 추정해본다면 이전에 사학자 이병도가 《시경》과 《잠부론》을 인용하여 기자조선 대신에 한씨조선(韓氏朝鮮)이 있었다는 한씨조선설을 주장했는데, 이에 영향을 받아 환빠사관과 결합하여 이 주장을 하는 것 같다.[23] 다만 장량은 실제로 한국계로 추정되는 인물과 유대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 창해 역사 참고.[24] 명장 한신이 아닌, 일명 한왕 신이라고도 불리는 동명이인으로, 2중 낚시다.[25] 한나라의 영지가 중국 문명의 원조격인 하남성에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26] 다만 이렇게 중국에서 '한'(韓)이 자주 쓰였을 경우에는 한국 쪽에서 '한'(韓)이라는 국명을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韓)이라는 국명은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비공식적으로만 쓰이고, 공식적으로는 잊혀져 오다가 대한제국에 와서야 부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역사학적인 관점으로 왕년의 민족명 정도로만 쓰였을 확률이 높다.[27] 그리고 월나라가 썼던 고대 월어가 무슨 어족이었는지는 아직도 학계에서 논쟁 중이며 월남어와 동일한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라고는 밝혀지지 않았다.[28] 당대의 지명은 회계(會稽)였는데 《초한지》나 《삼국지연의》를 읽었다면 이 지명이 훨씬 익숙할 것이다.[29] 희진의 혜공영진의 목공과 격돌할 때 형세가 불리하고 명분이 부족하여 싸우지 않을 것을 간했으나 진혜공이 듣지 않고 목공과 격돌했다가 마침내 참패하여 사로잡힌 기록이 있다.[30] 《사기》 <조세가>에 기록된 이름.[31]죽서기년》과 《세본》(世本)에 기록된 시호.[32]죽서기년》과 《세본》(世本)에 기록된 이름.[33] 중국의 학자 곽말약(郭沫若)이 표강종(驫羌鐘)이라는 유물에 한종철(韓宗徹)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한열후의 이름이라고 주장했다.[34] 《죽서기년》에 기록된 시호.[35] 《사기》 <연표>에 기록된 시호.[36] 《죽서기년》에 기록된 이름.[37] 《여씨춘추》와 《한비자》에 기록된 시호.[38] 《죽서기년》에 기록된 이름.[39] 《죽서기년》에는 정위후(鄭威侯), 정선왕(鄭宣王), 선왕(宣王) 등으로 기록되었다.[40] 《사기》에 기록된 시호.[41] 《사기》에 기록된 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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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양적이라고 표기된 책이나 문헌이 많다. 翟을 보통 적으로 읽기 때문이다. 그러나 翟을 지명으로 읽을 때는 으로 발음해야 한다. 한단(邯鄲) 역시 감단으로 오기되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이쪽은 그나마 지명도가 있어 잘 틀리지 않는데, 유독 양책은 양적으로 오기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