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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춘추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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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일:초나라와 주변국.jpg
기원전 260년 초나라의 영토(녹색 지역)[2]
존속기간 기원전 9세기 이전 ~ 기원전 223년[3]
별칭 형초(荊楚)
위치 후베이 성 등 남중국 일대
수도 (郢)[4] → 진(陳) →거양수춘
국성 미성 웅씨(羋姓熊氏)
국가원수 자작[5] → (황제)
주요 군주 장왕 웅려
혜왕 웅장
회왕 웅심
주요 재상 오기
언어 초어, 상고 중국어
문자 금문전서 (대전체)
종교 초나라 토속 종교[6]
종족 초족
통화 영원(郢爰),[7] 의비전(蟻鼻錢)
성립 이전 주나라
멸망 후 진(秦)나라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역사3. 역사적 평가4. 언어5. 역대 군주6. 진한교체기때의 초나라 왕

[clearfix]

1. 개요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로 춘추시대에는 희성 진씨의 진(晉)나라와 함께 양대 강대국이었으며, 전국시대에도 영성 조씨의 진(秦)나라 다음가는 강대국이었지만, 결국 진(秦)왕 영정에 의해 멸망했다.

장강 유역의 국가로 화하족이 아닌 묘족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에, 중원의 다른 국가들로부터 무시를 받았지만 국력은 중원의 열강들 중 한둘 정도는 능가했고, 문화 면에서는 초사와 같은 남방 문학을 남기는 등 국력과 문화 양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국가였다.

춘추시대에는 다른 제후들로부터 남만 오랑캐 취급을 받았지만 전국시대에 들어서 근거지를 강북에 두는 등 많이 동화된 모습을 보인다.

2. 역사

2.1. 서주시대

사기 초세가에 따르면 초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서주 제2대 성왕때 전욱의 후손인 웅역이 자남(子男)의 작위와 영토를 하사받아 제후국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웅역에 이르러 주 성왕은 주나라 건국시에 문왕무왕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의 증조부인 육웅이 세운 공로로 웅역에게 자작의 작위를 수여했고 형만(荊蠻) 땅에 봉했다. 하지만 그 봉지는 남작에 준해서 주었다. 웅역은 초나라의 도읍을 단양으로 정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원의 국가와는 다른 기원의 국가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장강 이남은 밀림으로 뒤덮인 이민족의 영역이었으며, 고고학적인 발굴로도 초기 초나라의 유적이나 유물을 보면 묘족의 나라임이 강하게 암시되고 있다. 애초에 '초'(楚)라는 글자에 숲을 뜻하는 '림'(林)이 들어가 있는 것도 당대 이 지역의 환경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도 서주 시기에는 이미 주나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제후국을 칭했기 때문에 화하족 흔적이 뚜렷하고 주나라의 권위와 힘이 급격히 쇠퇴한 춘추시대 초기에 묘족화 됐다가 전국시대 후기에 다시 화하족 성격이 짙어진다. 언어 연구도 묘족 어휘를 많이 차용했지만 그래도 상고한어 계통이 유지된것도 사실이라 어떻게 보면 중원과 강남 이남 이민족의 경계선에 위치한 나라라 할 수 있다.

이러다보니 중원에 위치한 국가들로부터 '남방의 오랑캐'로 불리며 무시를 당하여 '형만'(荊蠻, 형나라 야만인들)이라 했으며 각종 사서의 기록을 보면 이들을 멸시하는 의미로 '형(荊)나라', '형초'(荊楚) 등으로 쓰였다. 원래 중원으로부터 파생된 국가가 아니라,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화 문명이 전파됨에 따라 중화 문명권에 편입된 국가로 보인다.

서주 제4대 소왕때는 초나라를 정벌하러 가다가 배가 침몰해서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8] 이왕때에 이르러 주나라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당시 자작인 웅거는 군사를 일으켜 용(庸)과 양오(楊奧)에서 악(鄂)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그 이후 웅거는 잠시 왕으로 자칭하다가 포악한 여왕이 즉위하자 정벌당할 것이 두려워 칭왕을 그만두었다.

기원전 841년에 여왕이 국인폭동으로 쫓겨나고 공화시대가 도래하며 서주는 제후들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였다. 초나라는 그 혼란을 틈타 조금씩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822년에 웅순이 국군이 되고 내부의 권력 분쟁은 가라앉았고, 이 힘을 외부로 돌려 초는 빠르게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2.2. 춘추시대

기원전 704년 초의 제17대 국군인 무왕 웅철의 치세때부터 왕을 칭하고[9]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키면서 초의 세력은 강성해졌으며, 서서히 북진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690년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은 도성을 단양에서 영으로 옮겼고, 기원전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제4대 성왕 웅군의 시대에는 제(齊)나라(강제)환공 강소백, 진(晉)나라문공 희중이가 이끄는 중원의 연합군과 대립했으나 끝내 성복 전투에서 진(晉)문공을 이기지는 못했다, 성왕은 기원전 626년 태자 상신(商臣)을 폐하려다가 역으로 아들에게 역습을 당해죽었고 상신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목왕이다. 기원전 614년 려(旅)가 목왕의 뒤를 이어 초의 6대왕으로 올랐으니 이가 바로 장왕이다. 장왕 웅려의 치세때 초는 진(晉)나라를 기원전 597년 필 전투에서 꺾고 전성기를 누렸다. 이 덕에 초장왕은 춘추오패의 하나로 취듭된다. 춘추시대는 대체로 중원의 맹주인 진(晉)나라와 북진하는 남방의 강국 초나라의 대립으로 압축된다.[10]

그러나 장왕의 아들인 제7대 공왕 웅심의 치세때 진(晉)나라와 다시 맞붙은 기원전 575년 언릉 전투에서의 패배로 패권이 기울기 시작하더니[11] 제10대 영왕 웅건의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이 기울고, 공왕의 막내 아들인 제12대 (경)평왕 웅기질의 치세때는 오(吳)나라의 공격을 받아 불안불안하다가[12] 경평왕의 아들인 제13대 소왕 웅진의 치세때는 (吳)나라 왕 합려의 공격을 받아 수도 영이 점령당할 정도로 쇠퇴했다.[13]

기사회생한 소왕은 약(若)으로 천도해 나라를 재건해나갔으며, 제14대 (헌)혜왕 웅장은 채나라진(陳)나라를 합병하고, 제15대 간왕 웅중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거나라를 점령하여 초나라가 건재함을 천하에 과시했다.

2.3. 전국시대

총력전이 펼쳐진 전국시대난세에 접어든 제17대 도(절)왕 웅의의 치세때 '삼진'의 하나인 위나라에서 망명해 온 오기(吳起)를 영윤으로 임명하여 부국강병을 위한 변법을 실행했으나 오기의 든든한 지원자인 도왕이 승하하고, 개혁 때문에 손해를 입은 초나라의 귀족들에게 오기가 처참한 죽임을 당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오기가 밀어붙인 부국강병책의 성과는 있었는지 제20대 위왕 웅상의 시대에 (越)나라를 멸망시키고 세력을 회복했지만 이것이 초나라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이후 제21대 회왕 웅괴의 참담한 외교 실책으로 초나라의 국력이 쇠락하기 시작했는데 무려 30년이나 재위했지만 그 30년 동안 진나라의 연횡가인 장의 등에게 농락당하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진(秦)나라, 제(齊)나라(전제)의 국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진(秦) 소양왕 영직의 압박을 받아 제22대 경양왕 웅횡의 재위 21년(기원전 278년), 진나라의 명장인 백기에게 4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수도 영과 부수도인 언을 빼앗기고 이릉에 있는 초왕들의 능들이 불타버린 뒤 수도를 진(陳)으로 옮겼다가 그후에는 거양으로 천도하고 또다시 고열왕 재위 22년(기원전 241년) 수춘으로 천도했다.

이처럼 형주 서쪽(단양 일대)에서 시작한 초나라는 나라가 멸망할 때쯤에는 수도가 동쪽(수춘 일대)으로 옮겨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도 제23대 고열왕 웅완이 노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초나라가 최강국인 진나라와 더불어 강대국이라는 것을 천하에 보여주었다. 그러나 춘신군 황헐이 제24대 유왕 웅한의 외숙부인 이원에게 암살당한 이후 유왕과 그의 뒤를 이은 제25대 애왕 웅유의 혈통과 정통성이 의심받아 고열왕의 아들인 웅부추가 이복동생인 애왕을 시해하고 이원의 일족을 멸했다. 국내의 내분과 숙청, 장강 상류 일대의 상실, '삼진'을 멸망시킨 진나라 왕 영정의 군사적•외교적 위협으로 쇠약한 초나라는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14] 기원전 223년에 진(秦)나라의 노장 왕전의 대규모 공격으로 제26대 초왕 부추가 생포당하면서 멸망했다. 그후에 항연 등이 난릉성에서 대항했지만 이 또한 진(秦)나라군에게 격파되었다.

그리고 진나라에서 상국을 지낸 창평군이 진나라의 젋은 명장 이신의 뒤통수를 쳐 오월 지방에서 초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맞섰으나 결국 패배하여 초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이로써 전국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2.4. 진승·오광의 난(장초)

진승오광진나라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선포한 나라를 초나라라고 했다.

장초(張楚)라고도 하는데, '장대한 초나라'(張大楚國)라는 뜻이었다.

2.5. 초한쟁패기(후초 및 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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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나라 부흥 세력인 후초와 항씨 일족의 서초는 엄혹한 난세였던 진한교체기때 세워진 나라들이었다.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의 마지막 명장이었던 항연의 자손인 항량항우가 초나라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며 세운 나라가 후초(後楚)로 책사 범증의 진언에 따라 초나라 왕의 후손인 웅심을 찾아내 황제로 옹립했다. 이 황제가 바로 초나라의 의제였다. 일단 진(秦)나라의 폭정에 대항해서 일어난 6국 부흥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으며, 실제 이를 바탕으로 거록대전에서 대승하여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애초에 항씨 일족이 세운 허수아비 정권에 불과했다. 이후 유방을 옹호했다는 이유만으로 항우가 의제를 살해함으로써[15] 붕괴되었다. 후초 정권의 수도는 원래 우이(盱眙)에 있었으나,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의제를 소외시킨 항우가 침(郴)으로 몰아냈다. 의제가 항우에게 살해당한 뒤에는 항우가 건국한 서초가 명실상부한 초나라로 행세했다.

의제를 추대한 항씨 세력을 이끈 항우는 명목상의 황제인 의제를 주군으로 모시면서 자신은 명목상의 제후국인 서초(西楚)[16]를 건국하고 패왕을 맡는 형식을 취했다. 서초의 수도는 팽성(彭城)이었다. 멸망한 진나라의 항장들이 관중에 분봉되어 성립된 '삼진'(三秦)을 기습 공격하여 정복한 한왕 유방이 의제 시해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560,000명에 달하는 반항우 제후연합군을 결성해 동진하여 팽성을 점거했으나 제나라에서 급히 돌아온 항우 휘하의 최정예 병력 30,000명에게 기습당하여 참패하고 연합군은 궤멸되었다. 이 전투가 팽성대전이었다.

항우는 서초를 건국하고 패왕이 되어 자립하고(서초 또는 항초) 중국 동부에서 고군분투했으나 초한전쟁 말기, 전한 태조 고황제 유방 및 명장 한신에게 맞서 싸운 해하 전투에서 참패하고, 오강의 나루에서 자결하여 서초는 완전히 멸망했다.

3. 역사적 평가

천하통일을 달성한 진나라에 가려 그저 멸망당한 6국의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한족"이라는 정체성의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원래 출발은 남방 이민족국가일 것이라고 추정되지만, 춘추시대에 남진하는 주나라의 제후국들과 치고받으며 서서히 중원문명에 동화되어 갔고 전국시대가 되면 그냥 중원국가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최종적으로는 진나라에 멸망당했지만 이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반란을 일으킨 것은 모두 초나라 출신들 (진승, 오광, 항우, 유방)임을 감안하면 한나라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한족이라는 정체성에는 초나라의 기여도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영토 자체는 넓었으나 당시 장강 이남 지역은 이민족이 많았으며, 밀림코뿔소, 코끼리 등이 공존하던 미개척지임을 유의해야 한다.[17] 제나라, 한(韓)나라 같은 국가들이 영토는 작았지만 대부분이 농토로 개발되고 인구가 거주할 수 있는, 당시 중국 대륙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반면,[18] 초나라는 (陳), 영(郢), 오월을 포함한 넓은 영토를 살리지 못하고 몇몇 대도시 위주의 거점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당장 수백년 후인 후한 말~삼국시대때 장강 동부의 오나라는 강남이 미개척지라 이민족과 싸우고 늪지를 메웠다는 기록이 있다.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삼국시대의 혼란으로 중원의 인구가 남하하고, 삼국 중 하나인 손오가 본격적으로 이 지역들을 개발하며 이후 서진 말기 5호의 남하에 다시 떠밀려 남하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오대십국시대부터 송나라 시기에 접어든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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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년경 전한의 인구 밀도

이렇듯 초나라는 인구 밀도가 너무 낮았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예를 들어 전국칠웅 중 가장 작은 영토를 가졌던 한나라는 면적 자체만 놓고 보면 초나라에 훨씬 못 미쳤지만, 동원이 가능한 병력의 숫자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

물론 단점만 있었던 건 아니었고, 장점도 있었다. 장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육조시대 이후라고 하지만 그 전에도 사람은 꾸준히 살고 있었으며, 특히 벼농사를 지어 쌀을 생산하기에 유리했다. 특히 장강 하류인 양주 일대는 비옥한 삼각지가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촘촘한 국경을 서로 맞대고 끊임없는 전란에 시달리던 중원의 다른 나라보다는 전란이 적어 좀 더 안정적으로 나라를 운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인구밀도는 매우 낮았지만 병력 동원 숫자는 많았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진왕 영정이 통일전쟁을 치를 때도 초나라의 역량을 알 수 있는데, 경험이 많은 노장 왕전은 초나라를 정벌하려면 600,000명의 대규모 병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신몽염은 200,000명이면 충분하다고 하여 왕전의 의견은 기각되었지만 초나라의 명장 항연의 역공에 털리고 말았고, 결국 600,000명, 즉 사실상 진나라의 전 병력을 총동원하고 그마저도 우주방어로 초나라군의 오른 사기를 저하시킨 후 기습작전을 벌인 후에야 겨우 멸망시킬 수 있었다. 즉, 군사적 역량으로 치자면 전국시대 최강국이었던 진나라도 함부로 하기는 어려운 상대가 초나라였다는 것이다. 모수가 말했듯 한때 왕호를 빠르게 사용할 정도로 강했으나 맨날 진나라에게 털리는 신세가 된데다가 진소양왕 영직이 천하를 굴복시킨 그 시점에서조차 난적이었다.[19]

이런 면면을 살펴보면 초나라의 저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힘을 바탕으로 해서 독자적으로 주변 이민족들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지역과 그 밑의 운남 지역이 중국의 문화권에 최초로 들어갔다. 특히 운남 지역의 경우, 정벌을 위해 쳐들어간 초나라의 병력과 장군 '장교'(莊蹻)가 진나라의 촉 지역 점령에 따라 돌아갈 길이 막히자 현지에서 자립해 전(滇)나라를 수립하여 사실상 운남 지역에서 최초로 국가를 세운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전나라는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세종 무황제 유철의 치세때까지 독립왕국으로 존속했다.

이 시기의 초나라를 '오랑캐 나라'로 취급한 비하적 표현들이 많이 전한다. 《맹자》(孟子)에서 위(魏)나라 혜왕(惠王)[20]맹자에게 주변국에 털린 것을 거론하며 하소연을 할 때
"남쪽으로는 초나라에게 욕을 당했다."(南辱於楚)[21]
고 했다든지, 항우원숭이에 비유했다든지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22] 고사 '각주구검'의 배경이 초나라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사가 오래되면서 현실에 맞지 않는 각종 구습들이 존재했고,[23] 무엇보다 귀족의 힘이 너무 강성했다는 것이다. 강력한 중앙집권을 원하지 않았던 귀족들이 거대한 사병 집단을 거느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지역을 지배하는 등 왕국임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인 국가 운영을 방해했다. 또한 오기가 초나라의 미성 웅씨 왕실 종친과 귀족들의 전횡을 뿌리뽑고, 가산을 압류하여 군사비와 유민들의 정착비로 사용하자 단 몇 년만에 초나라가 크게 일어나 중원 전체를 위협하는 강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오기도 자신의 뒤를 봐주던 초도왕이 승하하자 바로 귀족들의 견제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상을 지내던 이가 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귀족들에게 살해당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귀족의 힘이 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관직에서 내쫓기고 결국 죽음까지 맞이한 충신 굴원의 사례 역시 초나라 귀족들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제21대 회왕의 치명적인 실수도 쇠퇴에 한몫했다. 짧은 식견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장의의 '상어 600리'라는 성어에서 드러난다. 초회왕은 진나라의 600리 땅과 진나라 공주를 초나라에 바칠테니 제나라와 연을 끊으라는 장의의 말에 그것들을 받을지 안받을지도 확인 안하고 일방적으로 제나라와의 연을 끊었으며, 장의가 차일피일 약속을 미루면서 정말 제나라와 연을 끊었는지 의심쩍다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까지 보내 제나라를 모욕하기까지 해서 제나라가 진나라와 손을 잡게 만들었고, 나중에 장의에게 땅을 줄지 안줄지 추궁하자 장의는 '그거 내 땅 6리 주겠다는 얘기였음 ㅋ' 라며 입을 싹 씻어버렸다. 귀가 얇았던 초회왕은 나중에 진나라가 땅을 줄테니 화친하자는 말에 땅은 필요없으니 장의를 내놓으라 했고, 장의는 주저없이 적지로 들어가서는 언변으로 주변을 설득해서 피 한방울 안흘리고 돌아왔다. 후에 진나라가 혼인으로 연을 맺자면서 회왕에게 진나라로 방문할 것을 요구했는데,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갔다가 인질만 되고 초나라에 다시는 돌아가지도 못한채 죽고 말았다. 이처럼 진나라와의 장기간의 소모전에서 진의 심장부로 원정을 갔다가 군대를 말아먹는 등 정예 병력의 손실이 커서 이걸 단기간에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는 곧 초나라의 국력 손실로 이어졌다.

초나라가 진나라의 연횡책에 넘어가지 않고 합종책에 보다 치중했더라면[24] 진나라가 통일하지 못했을거라는 주장도 있을 만큼 초나라의 입지는 막강했다.[25] 국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한계가 있어서 진나라의 간계에 번번히 넘어가 다른 제후국으로부터 신의없는 나라로 낙인찍혀버렸다. 춘추시대에도 신의가 없다는 평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초나라가 오나라 왕 합려의 침입을 받아서 수도 영이 함락되자 초나라의 장군 신포서가 영성 조씨의 진나라에 가서 원군을 요청할 때 7일 동안 쉬지도 않고 울어서 겨우 원군을 받아낼 정도였다. 사실 초나라가 오나라에게 수도를 관광당하는 것까지도 그 과정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어지는데 원래 서방의 강국인 진나라의 공주 맹영과 초나라의 태자 웅건이 혼인을 맺기로 되어 있었던 것을 초평왕이 날치기해서 자기 후궁으로 삼아버린 데다가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 정나라로 도망친 태자 웅건은 망명을 받아준 정나라를 통수치고 자기가 정나라를 집어삼키려다가 들통나 살해되고 태자 웅건을 따르던 오자서가 가족들을 죽인 초평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오나라로 망명해 초나라를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통수에 통수. 덤으로 이때 진애공이 한 말이 뭔고하니 "초나라는 의리가 없는데 신하가 너무 충직해서 도와주겠음"이었으니 말 다 했다.

물론 장강 이남의 개발이 미진하여 영토에 비해 국력이 낮았으나, 광활한 영토 덕분에 진나라에게 밀리기 시작할 때도 타국과 달리 수도를 계속 이전하면서 상당 기간 버틸 수 있었으며, 진나라는 국운을 걸고 주력군을 모아 초나라와 결전을 한 것도 모자라서 장기간의 토벌전 끝에 초나라를 완전히 멸하고서야 사실상 전국시대를 마감짓고 최초의 통일된 중화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때문에 진(秦)나라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내건 대의명분 중 하나가 초나라를 재건하자였을 정도로[26] 통일왕조인 진나라에 저항하는 세력의 사상적인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진 시황제 영정의 폭압이 절정에 달하던 시대에는
"단 세 가구[27]굴씨, 경씨, 소씨 세 집안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만 남더라도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사람은 반드시 초나라 사람이다."
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실제로 초나라 출신의 빈민이었던 진승과 오광이 진나라를 한바탕 뒤집었고, 이후 초나라 귀족 이었던 항우가 초나라 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거록대전에서 대승하여 진나라를 몰락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실질적으로 함양에 먼저 입성하여 진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전한 태조 고황제 유방 역시 초나라 패현 출신의 평민이었다.

4. 언어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 중에서 언어학자들의 관심을 받는 곳이 바로 이 초나라이다. 초나라에서 쓰인 초어가 원시 몽몐어[28]라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런 설도 있고, 몽몐어족이 아니라 타이카다이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라는 설도 있고,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어떤 언어를 기반으로 한 크리올어라는 설도 있다.

그 밖에 소멸한 상고 중국어의 방언이라는 설과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비(非)중국어 계열 언어라는 설도 상당히 유력한 설이다. 실제로 초나라 시대에 쓰여진 한시의 종류인 초사상고한어로 된 것들만 현존하고 있다. 이게 초나라가 세월이 지나면서 중국 왕조들에게 동화된 탓인지, 단순히 중국어중화권링구아 프랑카라서 중국어로 작문을 한 것인지[29], 원래 초어가 중국어의 방언이라서였는지는 알려져있지 않은 상황이다.

5. 역대 군주

파일:초 전서체.png
초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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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 국군 2대 국군 3대 국군
웅광 웅역 웅애 웅달
4대 국군 5대 국군 6대 국군 7대 국군
웅승 웅양 웅거 웅지홍
8대 국군 9대 국군 10대 국군 11대 국군
웅연 웅용 웅엄 웅상
12대 국군 13대 국군 14대 국군 15대 국군
웅순 웅악 약오 소오
16대 국군 초대 왕 2대 왕 3대 왕
분모 무왕 문왕 장오
4대 왕 5대 왕 6대 왕 7대 왕
성왕 목왕 장왕 공왕
8대 왕 9대 왕 10대 왕 11대 왕
강왕 겹오 영왕 자오
12대 왕 13대 왕 14대 왕 15대 왕
경평왕 소왕 헌혜왕 간왕
16대 왕 17대 왕 18대 왕 19대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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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한교체기때의 초나라 왕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S-r̥a/. 현대 발음은 Chǔ. 楚는 현대의 한자이며, 진나라 시대의 전서 소전체 표기는 이렇다. 참조[2] 원래 수도였던 영을 상실한 이후.[3] 항량항우의 서초까지 합하면 기원전 202년.[4] 한자 뜻 자체가 초나라 서울이다.[5] 기원전 704년부터.[6] 태양신과 불의 신을 섬겼다.[7] 현존하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화이다. 대략 기원전 5세기경 등장한 것으로 보여진다.[8] 소왕은 재위 중에 몇번이고 초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전부 실패한 것은 물론, 국력까지 갉아먹어 주나라의 전성기인 '성강지치'는 소왕을 끝으로 기울게 되었다.[9] 춘추시대 중원의 나라들은 동주를 업신여기더라도 감히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지는 않았는데 남방의 '오랑캐' 나라인 초나라·오나라·월나라는 그에 구애받지 않아서 당당하게 왕을 칭했다. 이때 문정(問鼎)의 고사가 나오기도 했다.[10] 춘추시대 후기의 오•월의 대립도 결국 진•초의 대리전이었다.[11] 초나라가 언릉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북방의 진나라가 패권을 되찾았다.[12] (경)평왕은 비록 후계자 문제로 일을 그르치고, 오나라의 공격으로 국력을 깎아먹었지만 월나라와 결맹을 맺어 훗날을 도모할 기반을 만들었다.[13] 이때 오자서의 친구로 알려진 신포서가 서방의 강국인 진(秦)나라의 병사를 빌려 오나라 군대를 물러나게 했다. 그 덕에 초나라는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14] 진(영성)/통일 과정 참조[15] 이 일화를 가져다가 세조를 비판했다고 문제가 된 것이 바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었다. 후초의 의제를 조문한다는 뜻으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고 세조를 항우에 비유했다고 참소되어 이것이 무오사화의 단초가 되었다.[16] 회수 이북의 초나라 영토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17] 이민족의 반복되는 침략에도 항상 대비해야 했다.[18] 제나라는 연나라의 명장 악의가 이끄는 합종군에게 크게 패배한 후 국력이 급격하게 줄어들긴 했으나, 단기간에 이를 회복했다. 또한 전국시대 말기에는 한때 동제를 칭할 정도로 번영하기도 했다.(제민왕이 東帝를 칭하던 때는 악의에게 공격당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리고 제-연 전쟁 이후 제나라는 전국시대 초기의 국력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일단 바다와 접해 있었기에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고, 제환공과 관중의 시대때부터 상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일찍이 부국강병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 화폐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19] 이 시기의 초나라 신세는 말이 아니라서 회왕의 실책으로 인해 이 시점부터 꾸준히 국력이 기울기 시작해 경양왕의 치세때는 본래 수도였던 영이 함락당했다. 고열왕의 시기에는 맨날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진건 덤이었다. 근데 그렇게 털릴대로 털린 초나라도 진나라가 총력전을 벌여야 멸망시킬 수 있었을 정도로 만만찮았다는 얘기다.[20] 《맹자》에서는 '양혜왕'(梁惠王)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당시 위나라의 수도가 대량(大梁)이었기 때문이다.[21] 초나라에 대한 비하적인 태도가 중원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욕을 당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고작 '오랑캐' 따위한테 지다니 정말 치욕스러워 미치겠다!" 이 정도의 뉘앙스인 셈이다.[22] 춘추전국시대 ~ 진한교체기에는 특정 국가에 대한 당대인들의 비하적인 인식들이 녹아 있는 기록들이 굉장히 많다. 당시 초나라 외에 자주 비하가 되었던 국가로는 망국 하나라의 후예였던 기(杞)나라, 역시 망국인 상(은)나라의 후예였던 송나라가 있었다. '기우'(杞憂) 같은 기나라의 고사나, '송양지인'(宋襄之仁), '수주대토'(守株待兎) 같은 송나라의 고사들은 하나같이 덤 앤 더머급 고사인데 이것은 당시 중원에서 '바보 동네' 취급을 당해 유독 저런 이야기들이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다.[23]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나라도 구습이 많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쪽은 상앙의 강력한 변법으로 퇴치했다. 귀족의 특권 역시도 변법 이후 문제가 해결되었다.[24] 물론 나머지 6국의 이해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진나라의 외교력도 감안해야 하지만.[25] 물론 또 그렇다고 나머지 5국의 입지도 약한건 아닌 것이 우선 조나라는 진나라의 공격에 대한 방패막이였고,(천하통일때도 가장 먼저 타깃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조나라를 몇번이고 공격해도 막혀서 한나라가 먼저 먹혔지만) 제나라는 한때 진나라에서 서제, 동제 칭호를 만들어 진나라는 서제, 제나라는 동제라고 하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할 정도였다. 심지어 전국칠웅 가운데 최약체였던 한나라는 그 전성기때 (아직 포텐셜이 폭발하기 전이었지만) 진나라와 맞먹는 국력을 가질 정도였으니 초나라 외에는 쩌리였던 것도 아니었다.[26] 실제로 초한전쟁의 서막을 올린 진승도 국호를 '장초'로 내걸었다.[27] 이 세 가구는 수사적으로 초나라 방계 왕족 출신의 유력한 귀족 가문들인[28] 몽몐어족조어다.[29] 이런 사례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서유럽 국가들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스트라스부르 서약[36] 같은 특수한 문서들 외에는 공문서나 학술 논문을 자국어 대신 라틴어로 작성하는 관습을 수백년 동안 유지했고, 오스만 제국시인들은 근대에 내셔널리즘이 확산되기 이전까지 자국어 대신 페르시아어로만 시를 짓는 관습이 있었다.[30] 투씨, 성씨[31] 다만 성복 전투는 성왕이 성득신(자는 자옥)한테 싸우지 말라고 했으나 성득신이 독단적으로 싸운 것이어서 성왕의 오점이라기엔 애매하다.[32] 거란족요나라가 아니다.[33] 위의 초 성왕과는 다른 인물이다. 위의 초 성왕은 시호가 成(이룰 성)이고, 이 초 성왕은 시호가 聲(소리 성)이다.[34] 역사적으로 고증하면 초 고열왕의 아들이 맞다. 진시황의 사례를 생각하면 된다.[35] 초나라는 한나라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땅이라 감시가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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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의 말을 그대로 받아적은 문서라서 라틴어로 기록할 수 없었다. 허나, 이쪽은 조약의 각 조항은 라틴어로 표기하고, 군주들 각자의 서약서만 현지어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