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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초(楚)나라 14대 왕 혜왕 惠王 | ||
성 | 미(羋) | |
씨 | 웅(熊) | |
휘 | 장(章) | |
아버지 | 초소왕(楚昭王) 웅진(熊珍, 熊軫) | |
어머니 | 월희(越姬)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432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488년 ~ 기원전 4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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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30대 군주, 14대 왕. 초나라에서 출토된 문헌과 《묵자》(墨子) <귀의>(貴義)편에서는 시호가 '헌혜왕'(獻惠王)으로 되어 있다. 초소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월왕 구천의 딸인 월희(越姬)이다.초 혜왕은 즉위 이후 자서(子西)[1], 자기(子期), 자려(子閭) 등으로 하여금 개혁 정치를 펼쳐 백성들을 쉬게 하고 생산력을 늘려 초나라를 중흥시킨다. 그의 치세에 백공 승이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하고, 진(陳), 채, 기(杞)나라를 합병하여 회수와 사수 일대까지 세력을 넓힘으로서 초나라는 과거의 힘을 되찾는다.
2. 왕위 계승과 백공 승의 난
초 혜왕 2년(기원전 487년), 영윤 자서는 초나라 태자 건(太子建)의 아들 웅승(熊勝)을 받아들여 백읍의 공으로 임명하고 이때부터 그는 백공 승(白公勝)으로 불린다. 백공 승은 적극적으로 민심을 사며 병사를 기른다.초 혜왕 6년(기원전 483년), 백공 승은 영윤 자서에게 정나라를 치자고 권했다. 그 이유는 부친인 태자 건이 정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켜 정정공을 몰아내고, 초나라를 치려는 기반으로 삼으려다가 발각되어 죽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오자서가 힘들게 백공 승을 데리고 오나라로 달아나게 된다. 오자서 밑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탓인지 이 왕손 웅승도 대단히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서의 대답은 차가웠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당연히 이 처사에 백공 승이 분노하여 자서에게 원한을 품었다. 일설에는 산책하던 중에 초나라 왕실에 어떻게 복수할지 골몰하다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거꾸로 쥐어서, 뾰족한 끝에 턱이 찔려 피를 줄줄 흐르는데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초 혜왕 8년(기원전 481년), 정나라 정벌을 준비하던 중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치자 정나라가 급히 구원을 청했다. 초 혜왕은 자서를 보내 정나라를 구원하고 자서는 정나라와 결맹한 후 돌아온다.
초 혜왕 9년(기원전 480년) 여름, 자서와 자기를 보내 오나라를 공격한다.
초 혜왕 10년(기원전 479년) 7월, 백공 승은 석걸 등 용사를 모아 영윤 자서와 사마 자기를 죽이고 혜왕을 협박한다. 석걸이 혜왕을 죽여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백공은 따르지 않는다. 백공은 자려를 왕으로 세우려 하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자려를 죽인 후 혜왕을 데리고 고부(高府)로 간다. 석걸이 고부의 문을 지키는데 어공양(圉公陽)이 땅굴을 파 혜왕을 업고 소부인[2]의 궁으로 도망간다.
한편 채나라에 있던 섭공(葉公) 심제량(沈諸梁)이 백공의 모반 소식을 듣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온다. 섭공이 길에서 잠윤 고를 만났는데 그는 백공과 합류하기 위해 사병을 이끌고 가는 중이었다. 섭공이 그를 꾸짖자 잠윤은 섭공을 따른다. 섭공은 잠윤을 보내 국인들과 함께 백공을 공격하도록 하고 백공은 산으로 도망쳐 목을 매 자결한다. 백공을 따른 석걸 등은 처형되고 백공의 아우 왕손연(王孫燕)은 오나라로 도망간다.
난이 진압되고 초 혜왕은 조정에 복귀한다. 심제량은 영윤과 사마를 겸직하다가[3] 나라가 안정되자 자서의 아들 녕(寧)을 영윤으로, 자신의 아들 관(寬)을 사마로 삼은 후 섭 땅으로 은퇴한다. 여담이지만 이때 진(陳)나라가 이 혼란을 틈타 백공을 지원했다가 실패했고 이는 진나라의 멸망을 초래한다.
3. 영토 확장
백공 승의 난을 진압하여 초나라의 국내 사정이 안정되자 초 혜왕은 영토 확장을 시작한다.초 혜왕 11년(기원전 478년), 진(陳)나라가 백공 승의 난을 틈타 초나라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공손조[4]를 보내 진나라를 치게 하고 도성을 포위했다. 초군은 진민공을 죽인 후 진(陳)나라를 멸하고 그곳에 현을 설치했다. 장왕 대에 하징서를 벌하고 나라를 멸했으나 복국되었고, 영왕 대에 다시 멸하고 현을 설치했으나 평왕이 즉위하고 다시 복국되었지만, 이번에는 복국되는 일이 없었고 제순의 후예가 분봉받은 진(陳)은 이렇게 멸망한다.[5]
초 혜왕 12년(기원전 477년), 파나라가 초나라를 침공하여 우鄾를 포위한다. 같은 해 3월 초나라는 우사마 공손녕을 장수로 삼고 침윤(寢尹) 오유우(吳由于)와 공윤(工尹) 원고(薳固)를 부장으로 삼아 파군을 격파한다.
초 혜왕 13년(기원전 476년) 봄, 월나라가 오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초나라를 공격한다. 같은 해 여름, 초 혜왕은 공자 경, 공손 관으로 하여금 월군을 추격토록 했으나 월군이 없어 회군하였다.
같은 해 가을, 초 혜왕은 월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심제량을 파견해 동이를 치고, 삼이와는 오(敖) 땅에서 회맹해 초나라의 세력 범위를 동중국해, 회해 일대로 확장하였다.
초 혜왕 42년(기원전 447년), 혜왕은 병사를 보내 채나라를 멸했고 채후 제는 다른 나라로 망명했다.
초 혜왕 44년(기원전 445년), 초 혜왕이 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월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켜 패자를 당당히 칭하는 등 강성해졌으나 강회와 회북 일대에 세력을 뻗을 수는 없었다.[6] 초나라가 대신해서 세력을 뻗어 사수 일대까지 영역을 확장했고, 송나라를 쳤다.
초 혜왕 50년(기원전 439년), 혜왕은 노나라의 유명한 장인 공수반으로 하여금 사다리차를 만들어 송을 치려 했으나 묵자가 그것을 막았다. 이것은 영화 묵공의 기반이 된 사실이다.
초 혜왕 57년(기원전 432년), 혜왕이 죽고 아들인 웅중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초간왕이다.
[1] 오자서와는 다른 인물이다. 평왕의 서장자로 초 혜왕에게는 서백부가 된다.[2] 소왕의 아내이자 혜왕의 어머니인 월희를 뜻한다.[3] 영윤 자서와 사마 자기가 둘 다 죽었기 때문이다.[4] 영윤 자서의 아들이다.[5] 다만 진나라가 쇠하자 과거 진나라에서 망명한 제나라의 전씨가 번성하게 된다.[6] 원래 오나라의 세력권이었다. 다만 산둥반도 일부를 포함한 오나라 영토였던 동부 해안 지역을 월나라가 차지한 것은 확실한데, 수도를 산둥반도에 위치한 낭야로 옮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