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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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나라 초대 왕 무왕 武王 | ||
성 | 미(羋) | |
씨 | 웅(熊) | |
휘 | 철(徹)[1], 통(通)[2] | |
아버지 | 초소오(楚霄敖) 웅감(熊坎) | |
아내 | 등만(鄧曼)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690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740년 ~ 기원전 6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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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나라의 17대 국군, 초대 왕. 초소오의 아들. 초 무왕 때부터 초나라는 칭왕(稱王)한다.[3] 화씨지벽 전설에서는 그 전 군주인 분모가 초여왕(楚厲王)을 칭하였다고 하나 정확히 초나라가 칭왕한 시기는 바로 초무왕 때로 초 여왕은 왕을 칭한적이 없으며 동생인 무왕이 초군 분모를 시해한 후 악시를 준 것이다.2. 치세
분모 17년(기원전 741년), 초 무왕은 형 분모를 시해한 뒤 초나라의 군주에 올랐다. 그는 등나라 후작(鄧侯)의 딸 등만(鄧曼)을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투백비(鬭伯比)를 영윤으로 임명하고, 굴하(屈瑕)를 막오(莫敖)에 봉하면서, 국력이 날로 신장되어갔다. 그런데 초나라는 강한(江漢) 지역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였지만 작위는 자작으로 매우 낮았다. 국력에 걸맞지 않는 작위로 인해 무왕의 불만은 커져갔다.주 환왕 16년이자, 초 무왕 37년(기원전 704년) 여름에 침록 부근에서 회맹을 가졌는데, 파, 용, 복, 등, 교, 나(羅), 진(軫), 신, 이, 운, 강이 참여했다. 황나라와 수나라가 오지 않자 무왕은 대부 위장을 보내 황나라를 책망하고 막오 굴하로 하여금 수나라를 치게 하여 수나라를 대파한다. 패배한 수후는 달아나고 거우인 투단은 수나라에서 포로를 잡고 전리품을 얻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웅철은 왕을 자칭하니 바로 초 무왕이다.[4]
초 무왕 41년(기원전 700년), 초군은 교나라에게 승리하고 정립성 아래서 회맹을 가졌다.
초 무왕 42년(기원전 699년), 굴하로 하여금 나나라를 치게했는데 패전하였다. 굴하는 패잔병을 거느리고 황곡으로 갔으나 초 무왕의 꾸지람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때 변화가 화씨지벽의 원석을 바쳤다가 오른쪽 다리에 월형을 당했다.
초 무왕 51년(기원전 690년), 수나라를 정벌하는데, 한수 동쪽에 이르러 갑자기 초 무왕이 병이 들어 죽었다. 초나라의 영윤 투기와 막오 굴중은 초 무왕의 발상을 비밀에 부치고 여전히 안원에서 동진할 계획을 세웠다. 초군들이 수나라의 성 근처에 이르자 수의 군신들이 굴복하였다. 초군이 회군하자 한수를 건넌 뒤 발상하고 그 뒤를 이어 아들 웅자가 즉위하니 그가 초문왕이다.
[1] 청화대학(清華大學)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화전국간》(清華戰國簡) 내용 중에 초나라의 역사를 담은 문헌인 《초거》(楚居)라는 기록에는 이름이 철(徹)로 기록되어 있다.[2] 앞의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한무제의 이름이 유철이라서 피휘를 하기 위해 기록한 이름. 참고로 이름이 같은 후대 인물인 괴철도 이와 같은 경우이다.[3] 주나라 천자만이 왕을 칭한 춘추시대임을 감안하면 대담한 일이기는 하나, 초나라가 원래부터 묘족의 국가였다가 중원에 편입된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4] 당시 한수 동쪽의 열국 중 수나라가 가장 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