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십국시대 남한의 전신 월나라에 대한 내용은 남한(오대십국시대) 문서 참고하십시오.
베트남의 전신 대월국에 대한 내용은 대월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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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越[1] | ||
존속기간 | 기원전 6세기 이전 ~ 기원전 306년 | |
이칭 | 어월(於越) | |
위치 | 저장성, 장쑤성 | |
수도 | 회계 → 낭야[2] | |
국성 | 사(姒) 또는 미(羋) | |
국가원수 | 자작 → 왕 | |
주요 군주 | 구천 | |
언어 | 고대 월어, 상고 중국어(?) | |
종족 | 월족 | |
멸망 후 | 초나라 | |
현재 국가 | 중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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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의 나라. 춘추시대의 장강 하류에 존재하던 나라로 오(吳)나라보다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3] 주 왕조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물론 말이 작위를 하사한 것이지 실질적으로 비하하는 것에 가까운데, 이 시기의 자작은 제후가 아니라, 제후의 신하에게 주는 작위였다.[4] 수도는 회계(지금의 저장성 사오싱시).왕성(王姓)은 사(姒)[5]였는데 33대 왕인 부담(夫譚) 이후는 확실히 미(羋姓)[6]이다. 하나라 제6대 소강왕의 서자 무여(無餘)가 봉해진 나라였다.
1대 왕인 무여, 무여의 10여 대 후손인 무임(無壬), 무임의 아들인 무심(無瞫) 이후 33대 왕인 부담까지 기록이 없고, 왕성이 바뀐 것으로 보아 무심과 부담 사이에서 왕실 혈통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2. 역사
2.1. 춘추시대
《사기》 〈월구천세가〉에 의하면 하나라 제6대 왕이었던 소강의 서자 무여(無餘)가 회계에 있던 하나라 시조 우의 왕릉 제사를 맡기 위하여 봉해졌다고 한다. 물론 근거는 없으며 기록의 결손으로 그들이 춘추시대에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7], 오나라(吳)처럼 왕호를 사용하였으며 춘추시대 후기의 윤상 대에 이르러부터 그 기록이 남아있다. 북진 정책을 펼쳐 인접국인 오나라에게 대항하지만 크게 대패하여 해마다 조공을 바칠 정도였다.윤상의 아들 구천 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초나라의 지원을 받아[8] 부국 강병을 시행하며 오나라가 북진 정책을 한 틈을 노려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낭야[9]로 옮겼다. 이로 인해 월나라는 산동 반도 일대[10]를 제압하여 그곳에 있던 등(鄧), 담(郯)과 같은 약소국들을 멸망시키고 본거지인 소흥[11][12]과의 해상 교통로를 확보함으로써, 상업과 수공업을 기반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월나라는 월왕 구천의 노력으로 춘추시대의 마지막 패자로서 위엄을 떨치게 된다.
2.2. 전국시대
그러나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면서 패자로서 위엄을 떨치는 동안 점차 세력을 회복한 초(楚)나라의 압박을 받게 된다. 초나라 입장에서는 원수같은 강국인 오나라가 멸망하자 월나라를 지원해 줄 가치가 떨어져 지원을 끊었다. 뿐만 아니라 오나라보다도 부족국가에 가까운 한계를 지닌 월나라가 오나라와 흥망을 건 전쟁을 하는 동안 초나라는 국력을 다질 수 있었다. 월나라는 구천 이후 그를 능가하는 군주는 커녕 버금가는 군주조차 나오지 못했으며, 부족국가의 한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해 인재풀이 초나라는 커녕 오나라에도 미치지 못했으므로 서서히 멸망해가는 시한부 국가로 전락한다.이로 인해 수도를 장강 이북인 낭야에서 장강 남쪽에 있는 고소 땅으로 옮기면서[13] 해상 교통로를 포기하게 되고, 그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제후들이 각자 자립하는 형태로 지내게 된다. 거기에 왕족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면서 그나마도 초나라에게 뒤지는 국력을 까먹으며 점점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 37대 월왕 불수가 아들인 38대 월왕 주구에게 죽은 일이나 39대 월왕 예가 그 아들 40대 월왕 제구에게 죽은 일, 또 제구의 아들 착지가 제구를 죽이고 41대 왕위에 올랐다가 대부 사구의 추대를 받은 친척 무여에게 내쫓기거나 그 무여(42대)도 대부 사구의 동생의 손에 죽어 그 아들 월왕 무전이 43대 왕위에 오르는 등 지극히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다. 이는 왕권이 불안정해서 생긴 일이다. 기록에는 하도 골육상쟁을 벌인 탓에 나중에는 오히려 아무도 왕에 오르려 하지 않을 지경까지 갔다고 한다.
월왕 무전대에 이르러 그나마도 고소 땅에서 월나라의 원래 근거지인 회계 땅으로 천도한다.
월왕 무전의 동생인 월왕 무강은 초나라와 싸우기 위해 국력을 회복하려 했지만 초나라 위왕의 원정으로 점차 복속되다가 기원전 300년대에 멸망한다.[14]
2.3. 멸망 이후
월나라의 왕족들은 초나라에 복속해 신하가 되거나, 왕이나 군을 자처하면서 강남의 바닷가 일대(오늘날 저장성, 복건성 지역)에서 살면서 민월을 형성했다.진시황이 전국통일을 이룬 후, 민월 지역에 민중군을 설치하면서 민월왕(閩越王) 무제(無諸)와 민군(閩君) 요(搖)는 왕위를 잃고 군장이 되었다. 이들은 반진전쟁에서 오예에게 합류해 진나라와 맞섰고, 초한전쟁 때는 항우의 18제후 분봉에서 소외된 탓에 유방의 편을 들었다. 유방이 항우를 쓰러트리고 무제와 요는 각각 기원전 201년과 기원전 193년 각각 민월왕과 동해왕으로 임명되면서 민월과 동구국이 세워졌다. 이들은 전한의 제후국으로 한무제 시기까지 존속했다.[15] 민월이 멸망한 후 후예들인 산월족이 삼국시대까지 존속했으나[16], 오나라의 산월 토벌로 한족과 동화되었다.
3. 역대 군주
월 국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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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2대 미상 | ||||
33대 국군 부담 | 초대 왕 월왕 윤상 | 2대 왕 월왕 구천 | 3대 왕 월왕 녹영 | |
4대 왕 월왕 불수 | 5대 왕 월왕 주구 | 6대 왕 월왕 예 | 7대 왕 월왕 제구 | |
8대 왕 월왕 착지 | 9대 왕 월왕 무여 | 10대 왕 월왕 무전 | 11대 왕 월왕 무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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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대 : 월자 무여(越子無餘)
- (군주 미상)
- 11대 : 월자 무임(越子無壬)
- 12대 : 월자 무심(越子無瞫)
- (군주 미상)
- 33대 : 월자 부담(越子夫譚): 기원전 564년 ~ 기원전 538년
- 34대 : 월자 윤상(越子允常): 기원전 537년 ~ 기원전 497년, 부담의 아들. 월나라에서 최초로 칭왕하였다.
- 35대 : 월왕 구천(越王勾踐): 기원전 496년 ~ 기원전 464년, 윤상의 아들. 월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다.
- 36대 : 월왕 녹영(越王鹿郢): 기원전 463년 ~ 기원전 458년, 구천의 아들.
- 37대 : 월왕 불수(越王不壽): 기원전 457년 ~ 기원전 448년, 녹영의 아들. 주구에게 시해당했다.
- 38대 : 월왕 주구(越王朱勾): 기원전 447년 ~ 기원전 411년, 불수의 아들. 묵자를 만났으나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39대 : 월왕 예(越王翳): 기원전 410년 ~ 기원전 375년, 주구의 아들. 예왕 말엽에 국력이 쇠약해져 천도해야 했으며 제구에게 시해당하며 이후로 월나라 정치는 불안정해진다.
- 40대 : 월왕 제구(越王諸咎): 기원전 375년, 예의 아들. 월나라 사람들에게 살해당했다.
- 41대 : 월왕 착지(越王錯枝):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73년, 제구의 아들. 대부 사구에게 쫓겨났다.
- 42대 : 월왕 무여(越王無余):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1년, 착지의 친척. 사구의 아우에게 살해당했다.
- 43대 : 월왕 무전(越王無顓): 기원전 360년 ~ 기원전 343년. 국력이 더 약해져 월나라의 본거지로 천도했다.
- 44대 : 월왕 무강(越王無彊):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06년, 무전의 동생.
4. 민족
"월(越)"은 월나라 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에서 장강 이남의 여러 남방 민족들을 뭉뚱그려 지칭했던 말이기도 하다.[17]종족과 분포가 다양해 '백월'(百越)이라고도 불렸는데,[18] 그만큼 각 종족들끼리 언어도 달랐다. 2022년 현재도 대만에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열의 언어를 쓰는 원주민들이 현존해 있고,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나 크라다이어족, 몽몐어족계 언어를 쓰는 민족들이 현존해있는데, 한족으로 동화되지 않은 이들이 많았던 당시야 어떻겠는가.
대표적인 예로 춘추시대의 이 월나라를 다르게 일컫는 말이기도 했던 우월(于越), 전국시대의 양월(揚越), 한나라 때의 구월(瓯越) · 민월(闽越) · 남월(南越) · 낙월(駱越), 삼국시대의 산월(山越) 등이 있으며, 지금의 베트남인 · 좡족(壯族) · 다이족(傣族) · 리족(黎族) · 둥족(侗族) · 수이족(水族) · 무로족(仫佬族)과 일부 대만 원주민들이 그 후예로 여겨진다. 이들 대다수는 현재 한족으로 동화되었다. 남송 이후 한족이 강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베트남(월남)과 관련된 기록 및 중국의 지방을 나타내는 명칭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민족명으로서의 "월(越)"이란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사기》를 비롯한 중국 역사서를 보면 월인들은 피부색이 상당히 검고 키도 작으며 얼굴은 짧고 코는 낮고 널찍하며 눈이 큼직하다는 등의 서술이 있다. 때문에 당시 월인들은 지금의 한족보다는 동남아시아인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며, 학계에서는 그 동남아시아계 민족들 중 어떤 민족에 해당하는가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언어학적인 측면에서는 월인의 정체를 베트남인과 크라다이어족의 조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유전학이나 인류학, 풍습에 대한 기록에선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인 것처럼 보이는 단서들이 많아 두 가설이 대립중이다. 기록된 월어 관련 기록이나, 오어에 남아 있는 기저언어에 대한 분석에서는 크라다이어족의 요소가 눈에 띄게 많이 보인다. 하지만 몸에 문신을 했다는 점,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이 있다는 점, 머리를 짧게 깎는 풍습, 항해에 능한 점 등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문화적 특성들이 뚜렷한데다가,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본향인 대만에 바로 접해 있다는 점 등의 비언어학적 기록은 후자의 학설을 지지하는 증거로 보인다.
최근에는 둘 다 맞는 소리라는 주장도 등장했는데, 크라다이어족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의 기초 어휘 유사성에 주목해서 둘의 조상이 같다는 학설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오스트로타이어족 가설이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크라다이어족이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학설을 채택하면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된다. 다만 오스트로타이어족 학설은 비판도 꽤 받는다. 우선 크라다이어족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사이에 유전적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비판이 있다[19]. 또 기초 어휘 사이의 유사성이 엄청 크지는 않기 때문에 과거에 언어동조대가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다 2022년 최근 남중국~동남아시아 지역 유전체를 분석한 연구[20]에 따르면 오나라가 세워진 양쯔강 하류 지방의 사람들은 초나라로 대표되는 양쯔강 중류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이들로서 크라다이어족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오나라를 구성한 이들과 동계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유전학계의 연구 결과만 본다면,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 크라다이어족이 같은 복건성-양쯔강 하류 유역의 집단에서 기원했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서 오스트로타이어족 가설을 뒷받힘하는 유전학계의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할 수 있겠다.
5. 문화와 언어
중원의 한족과 매우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고한다. 고대 문헌에서 월나라는 컬쳐쇼크를 일으키는 곳으로 주로 등장한다.- 장자에는 중원의 모자 상인이 월나라에 관을 팔러갔는데, 월나라 사람들은 그런 것을 쓰지 않아서 낭패를 보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러한 문화로 인해, 월나라의 문화는 대체로 대만 원주민과 가깝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이는 후술하겠지만 월나라 주민들이 근본적으로는 오스트로네시아계나 크라다이계 민족[21]의 조상이라는 설로 이어진다.
역사비교언어학 및 인류학적 측면에서 보면 상당한 관심을 끄는 곳인데, 월나라의 언어가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 크라다이어족의 공통조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에 중국 남부에서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유전체 연구의 결과[22]에 의하면, 오스트로네시아계 민족 및 크라다이계 민족들은 고대 오나라와 월나라 사람들과 매우 가까운 민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결과를 두고 언어학계는 두 어족이 오스트로타이어족이라는 하나의 언어군을 이룬다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일단 재구된 크라다이조어는 오스트로네시아조어와는 기초어휘 간의 유사성이 그리 크지않아서 언뜻 보기엔 서로 상관이 없어보이지만,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하위 어파인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Malayo-Polynesian languages, MP)[23]의 조어와 비교해보면 음운론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유사성이 나타난다. 우선, 크라어파 언어들의 성조와 오스트로네시아조어의 어근 말 자음 사이의 대응[24], 혹은 양 어족간 어근 간 모음대응이[25]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져있으며, 이런 유사성은 특히 MP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관하여, 고대 월인은 대체로 오스트로네시아족과 크라다이계 민족의 공통조상이거나, 혹여는 말레이폴리네시아계 민족들의 공통조상[26]이 중국 남부로 이주하면서 형성된 민족이라고 추정되며, 좡족이나 태국인, 샨족 등의 크라다이계 민족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주류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한편으로 베트남의 역사학계에서는 월(越)이라는 국명이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어우락의 국명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서 고대 월인이 베트남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데, 주류 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 많다.
6. 기타
- 오나라와는 역사적인 라이벌 관계로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가 유명하다. 서로 원수지간이면서도 어떤 목적을 위하여는 부득이 협력을 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
- 중국 4대 미녀 서시가 월나라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 천몇백년 뒤에 금나라 금태조의 왕자이자 금의 명장인 완안종필이 월나라의 월자를 가미하여 만든 월국왕(越國王)과 시호 충렬(忠烈)을 합친 월국충렬왕(越國忠烈王)이라는 제왕 칭호를 받아 월나라의 추존왕급에 버금갈 정도로 사후 종필의 후손들이 그이상의 예우를 받았다 한다.
-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 월나라 지역이 눈이 오지 않는 기후였는지, 이를 반영한 사자성어인 월견폐설(越犬吠雪)이 있다. 대략 월나라의 개가 평소 안 내리던 눈(雪)이 내리면 수상쩍게 여겨 짖는다는 의미.[27]
- 중원 국가들과는 달리 멸망할 때까지 시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역대 월나라 군주들 전부 시호가 없어서 본명 그대로 불린다. 이는 옆의 오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오월동주의 두 나라 모두 멸망할 때까지 시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7. 관련 문서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ɢʷat/. 현대 발음은 yuè. 원래는 나라·민족 이름 한정으로 越(넘을 월) 대신 粤(어조사 월)로 써도 됐었지만, 지금은 용법이 구분되고 있다. 오늘날 춘추 시대 월나라는 越로 고정해서 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또 베트남을 뜻하는 남월(南越) / 대구월(大瞿越) / 대월(大越) / 월남(越南) 등에 있는 '월'은 越로 고정해서 쓴다. 오늘날의 광동성을 가리킬 때는 粤로 고정해서 쓴다. 예를 들면 광동어는 粤語(월어)라고 쓴다.[2] 위키백과에는 장쑤성 롄윈강시라고 나온다. 사실 춘추전국시대의 낭야와 현재의 린이시는 위치가 다르디는 하다.[3] 오나라는 오늘날의 장쑤성 일대에 위치했고 월나라는 그보다 더 아래인 오늘날의 저장성 일대에 위치했다.[4] 하지만, 이 나라는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다보니 대놓고 푸대접을 받은 거고, 월나라같은 이민족계의 강대국들이 당대의 중화권 정세에 개입해서 내정간섭을 하려면 이런 불이익은 울며 겨자먹기로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구정의 무게를 묻는다'(=천하의 패권을 탐낸다)는 말을 해서 주나라와 여러 제후국들을 패닉에 빠뜨렸던 초나라도 똑같이 자작을 칭했던 것이 그 예다.[5] 하나라 우왕의 후손이 썼던 성.[6] 축융의 후손이 썼던 성.[7] 오나라는 조작인지 사실인지 불확실해도 역대 군주에 대한 기록이라도 모두 남아 있지만, 월나라는 1대 무여, 11대 무임, 12대 무역, 33대 부담을 제외하면 역사에 본격적으로 월나라가 등장하는 34대 윤상 이전의 왕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 그나마 중원에 붙어있던 초나라나 오나라도 중원의 국가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는데 야만족의 땅이라 여겨지던 월나라가 주목을 받았을 리가 없다.[8] 초나라 입장에서는 월나라를 빌어 오나라를 멸망시키거나 못해도 약화시키고 그 동안 초나라는 내실을 다지려는 속셈으로 도와준 것이었다.[9] 산동 반도에 위치한 도시로 그야말로 영토 최북단에 위치한 국경 지대였다. 수도로는 적합하지 않은 입지지만, 일부러 수도를 전방으로 옮겨 국경지역의 군권을 장악하고 팽창을 추진하는 정책은 역사상 종종 있는 일이다. 애당초 장안이라든지 베이징 또한 상당히 국경지대에 치우친 도읍이고 현대에도 파키스탄이 굳이 인구 2,300만의 대도시이자 안정적인 옛 수도인 카라치를 놔두고, 분쟁지역인 카슈미르의 턱밑인 이슬라마바드로 이전한다든지 하는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아직 개발이 덜 되고 부양력이 부족했던 월나라 본토보다는 중원 한복판이 물자의 풍부함으로나 문화적 수혜로나 유리했을지 모른다.[10] 전국시대의 제나라의 본거지[11] 오늘날의 저장성의 사오싱시[12] 당시에는 회계(會稽)라고 불렸다. 초한지에서 항량과 항우가 거병하고 《삼국지》에서 왕랑이 다스리고 손권이 태수직을 받던 그 회계가 맞다. 중국사에 나름 굵직한 사건들에 연관된 도시.[13] 월왕 예대에 고소 땅으로 옮긴다.[14] 멸망 시기는 사료마다 다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기원전 334년.[15] 민월과 동구의 왕들은 월왕 구천의 후예를 주장했다. 세운 나라가 아니라 민족 구성원이 월나라와 비슷하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 남부 지역에서 중국티베트어족계 언어는 별로 쓰이지 않았고, 몽몐어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크라다이어족,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등 동남아에서 쓰이는 계통의 언어가 널리 쓰였다고 추정된다.[16] 일본의 게임사인 코에이에서 제작한 삼국지 시리즈에 나오는 산월이 바로 이들이다. 다만, 기록에 의하면 한족계 산적들도 몽땅 산월이라고 싸잡아서 지칭한 것으로도 보이므로, 오나라 관련 기록에 등장하는 산월족이 고대 월인이 맞는지는 불분명하다.[17] 흔히 말하는 이, 융, 적, 만 등과 비슷한 쓰임새라고 보면 된다.[18] 일본에서는 이 표현을 훈독해 중국을 '모로코시'라고 부르기도 했다.[19] 다만 이것은 크라다이어족의 전파 과정을 근거로 반박할 수 있다. 크라다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들은 대리국의 멸망을 계기로 그 화자들이 오늘날의 태국과 라오스, 중국 남부 지역으로 대거 유입됐는데, 이 과정에서 말레이계나 네그리토계 선주민들을 정복해 동화시키면서 언어와 문화를 확산시켜나가는 식으로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크라다이어족 화자들이 선주민들의 영향으로 인해, 고대시대의 조상들과는 형질인류학적 구성이 크게 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20] X huang et al. (2022) - Genomic Insights Into the Demographic History of the Southern Chinese, Front Ecol Evol, 10:853391[21] 태국인과 라오스인, 좡족이 여기에 속한다.[22] X huang et al. (2022) - Genomic Insights Into the Demographic History of the Southern Chinese, Front Ecol Evol, 10:853391[23] 대만 제어를 제외한 모든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제어가 속해있는 언어군이다.[24] Sagart, Laurent. (2004). "The higher phylogeny of Austronesian and the position of Tai-Kadai". Oceanic Linguistics, 43(2), 411-444.[25] SMITH, Alexander D. "NEW EVIDENCE FOR AUSTRO-TAI AND OBSERVATIONS ON VOWEL CORRESPONDENCES." JSEALS (2022): 73.[26] 대만 원주민들 중에서 야미족이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 계통 민족들의 공통조상이거나, 이들과 가까운 민족이라고 추정된다. 마침 대만 제어 중에서는 야미족이 구사하는 야미어가 유일하게 MP에 속한다.[27] 비슷하게 촉견폐일(蜀犬吠日)이 있으며, 이쪽은 촉(蜀) 쓰촨 지방이 항상 끼어있는 짙은 안개 때문에 해가 보이는 날이 적었고, 어쩌다 해가 보이면 개들이 짖는 데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