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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소조정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大淸
대청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遜淸皇室小朝廷
청황실 소조정
파일:청나라 국기.svg
국기
파일:472皇城3.jpg
영토[1]
1912. 2. 12. ~ 1924. 11. 15.
(12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중화민국
자금성
상징
국호 청(淸)[2]
국가 공금구
위치
자금성 내조(內朝)
역사
1912년 신해혁명 발생 및 청 멸망, 소조정 성립
1917년 장훈복벽 실패
1924년 황실 우대조건 수정, 소조정 소멸
인문 환경
민족 만주족(청 황족)
공용어 만주어, 한어
공용 문자 만주 문자, 한자
법정연호
법정역법
선통(宣統) 연호
태음태양력
정치
정치 체제 중화민국하의 비주권군주제
황제
(황제 연호 년도)
선통제 ,(1912 – 1924),
1. 개요2. 우대조건3. 생활4. 역사

[clearfix]

1. 개요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내전을 회피하고 통치권을 이양하는 조건으로 자금성에서 1924년까지 12년 동안 유지된 옛 청나라 황실을 의미한다. 청나라 황실은 자금성의 일부[3]이화원, 승덕피서산장, 심양선양고궁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2. 우대조건

통치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새로 건국된 중화민국과 청실우대조건을 체결하였기에 청나라 황실은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명목상 자금성에서 외국 군주의 예로 대우받고 신해혁명 이전 수준으로 생활하면서 자금성의 소유자로서 성 내부에서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다. 비주권군주제의 한 사례였다.

청실우대조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실 우대 조건>
1.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 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2.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세금 4백만 냥을 사용하며, 이후 신 화폐가 주조되면 4백만 원이 중화민국에 의해 지급된다.
3.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자금성에 잠정적으로 계속 거주하며, 이후 이화원으로 옮긴다. 시위(侍衛)하는 사람 등은 계속 쓸 수 있다.
4.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그 종묘와 능침에 대해 영구히 제사를 받들며, 중화민국은 적절히 호위하는 병사를 두어 그것을 신중히 보호한다.
5. 덕종(광서제)의 능이 아직 완성이 안 되었으므로, 제도에 맞게 수리하며 옛 예법에 맞게 한다. 그 경비는 중화민국이 지출한다.
6. 궁중에서 고용하는 집사 인원은 계속 유지되나, 이후에는 환관은 더 고용할 수 없다.
7. 대청 황제는 물러난 이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은 중화민국이 특별 보호한다.
8. 현재 보유한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에 편제되며, 그 수 및 녹봉은 예전과 같이 한다.

<청 황족 대우 조건>
1. 청나라 왕공 작위는 예전과 같이 유지된다.
2. 청 황족은 중화민국 국가의 공권과 사권에 대해서는 보통 국민과 같다.
3. 청 황족의 사유 재산 일체는 보호된다.
4. 청 황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

<(滿蒙回蔵)[4] 각족 대우조건>
1. 한족과 평등하다.
2. 그 사유재산은 보호된다.
3. 왕공 작위는 예전과 같이 유지된다.
4. 왕공 중 생계가 곤란한 자가 있다면, 법을 제정해 생계를 돕는다.
5. 팔기(八旗)의 생계를 조사하고, 아직 조사 전인 자는 봉급을 예전과 같이 지급한다.
6. 종전 영업 및 거주지의 제한은 일률적으로 폐지하며, 각 주현(州縣)에 자유롭게 입적할 수 있다.
7. 만, 몽, 회, 장 각민족의 원래 종교는 그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

3. 생활

청나라 소조정 내의 생활은 부의의 제사(帝師)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5]의 <자금성의 황혼>에 잘 묘사되어 있다. 소조정 내에서는 여전히 선통(宣統) 연호와 함께 음력이 사용되었으며, 비록 손글씨로 간략하게 소량 간행되기는 하지만, 자체적 관보도 발행하였다.

4. 역사

1912(선통 4)년 2월 12일, 효정경황후는 청실우대조건(淸室優待條件)을 받아들이고 퇴위조서(退位詔書)를 반포하여, 이로써 청나라는 종언을 맞았다. 위 우대 조건 문단에도 나와있지만,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어도 청나라의 황제는 자금성 내에서 황제였고, 이 12년의 기간을 청황실 소조정, 혹은 청나라 소조정이라고 일컬었다.

선통제는 퇴위했지만, 선통제 등 일부 황실 종친과 소속 직원들은 원 황실 대신 등과 같이 황궁 내에서 거주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자금성 내 천안문, 태화전, 보화전, 무영전, 문화전 등의 외조는 중화민국의 영토였으나, 내조(內朝)는 여전히 청나라 황실의 소유였다. 황실은 황궁인 자금성 내에서도 생활하는 동안, 이전처럼 "상유(上諭)"를 반포했고, 연호를 음력과 같이 사용하였으며, 궁 내에는 청나라 시절처럼 내무부(内務府), 종인부(宗人府)와 신형사(愼刑司) 등의 기구를 두었다. 이외에도 시호를 내리기도 했으며 청 시절의 의복을 유지했다. 결정적으로 청나라의 법을 범한 자는 신형사에서 처리하는 등, 자금성 안은 나라 안의 나라였다.

1913(선통 5)[6]계축전쟁으로 쑨원을 비롯한 국민당 인사들이 일본으로 추방되고 1914년(선통 6) 국회가 해산되어 정당정치가 붕괴되자, 1915년(선통 7)부터 만청의 왕공들과 복벽파들이 대대적인 청나라 복고운동을 벌였으나 위안스카이는 복벽금지령을 선포하며 탄압했다.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선포,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퇴위한 뒤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이 시기 국무총리 쉬스창이 복벽으로 국가질서를 안정하고 위안스카이에게 총리대신 자리를 주는 것을 제안했지만 청나라 소조정이 거부했다.

1917년(선통 9), 부원지쟁 중에 장강순열사 장쉰이 국회를 해산하고 복벽을 선포했지만,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1주일 만에 진압했다. 이 때문에 쑨원은 청나라 소조정을 폐지하고 푸이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북양군벌 대다수가 청나라 황실에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묵살하였다. 하지만 1924년(선통 16), 2차 직봉전쟁직예군벌 북경 육군검열사 겸 3로군 총사령관 펑위샹장쭤린과 내통하여 북경정변을 일으켰고, 그리하여 그 동안 청나라 소조정에 우호적이었던 차오쿤 정권이 붕괴했다. 펑위샹은 부하 녹종린과 베이징의 아나키스트들과 진보주의 정치가들을 규합하여 청나라 황실에게 자금성에서 나가라고 요구하며 수정청실우대조례를 체결하라 강요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실상은 청실'박대'조건
대청 황제는 공화국과 그것을 구성하는 다섯 민족의 정신에 진심으로 공감을 표하고자 하며, 공화국의 여러 제도를 더 이상 위반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만주 황실 우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제1조. 금일부터 선통황제는 황제의 존호를 영구히 폐지한다. 이후에는 법률상 공화국 시민에게 부여된 모든 권리를 향유하기로 한다.
제2조. 이 조건으로 수정한 이후부터 공화국 정부는 청조 황실에 대해 보조금 50만 달러를 지급하고, 베이징의 빈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공장 설립에 200만 달러를 지출한다. 만주 기인 출신의 빈민은 고용을 우선한다.
제3조. 청조 황실은 원 '우대 조건'의 제3조에 따라 금일 자금성을 떠나야 한다. 이후 자유롭게 주거를 선택할 수 있으나, 그들을 보호할 책임은 공화국 정부가 계속 지기로 한다.
제4조. 청조 황실의 종묘나 황릉에서 거행되어 온 재례는 영구히 유지하며, 공화국은 종묘와 황릉을 적절히 보호하기 위해 경비병을 파견하기로 한다.
제5조. 청조 황실의 사유재산은 황실에 귀속되며 황실이 전적으로 향유한다. 공화국 정부는 그 재산을 특별히 보호해야 한다. 단, 모든 공공 재산은 공화국 정부에게 귀속하기로 한다.

선통제는 이를 수락하여 자금성을 비롯한 황실의 재산을 헌납하고 생가인 순왕부로 돌아갔고, 12년 간 유지되었던 청나라 소조정이 해산되었다. 이를 핍궁사건이라 부른다. 이후 푸이는 톈진의 일본 조계지로 도주하였다. 1928년 장제스2차 북벌로 베이징을 점령하고 1931년에는 선통제에게 청나라 소조정을 복구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문단을 참조할 것. 그러나 선통제는 황릉 도굴 사건 때문에 국민당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아 이를 거절하고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여 만주국의 집정에 취임했다.

참고로 신해혁명 당시 청 황실은 존호의 세습을 요구했지만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거부당하였다. 따라서 선통제의 후손이나 후계자는 황제 작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내전을 회피하게 해준 선통제 개인에 대한 선물이었던 셈.[7][8]


[1] 중앙의 하얀 색 구역이 지금의 자금성이다. 소조정의 영토는 자금성의 내조 구역으로 자금성의 절반 정도의 구역이다.[2] 국호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편의상 청황실 소조정, 혹은 청나라 소조정으로 불린다.[3] 자금성 전체가 청나라 황실 소유는 아니었고, 외조(外朝) 부분인 태화문, 문영전, 무영전,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까지는 중화민국이 소유하고, 그 안쪽인 내정(內庭)만이 청나라 황실 소유였다.[4] 만주족, 몽골족, 위구르족, 티베트족을 말한다.[5] 후에 영국령 웨이하이웨이 최후의 총독을 역임(1927~30)[6] 청나라 소조정 내에서는 선통 연호가 계속 쓰였으니 이렇게 표기.[7] 물론 계속 소조정이 유지되었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알 수 없다.[8] 마지막 연성공이자 첫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인 쿵더청의 사례를 참고해 보면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만약 선통제가 장제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일본과는 협력하지 않았을 것이고, 중일전쟁 동안 국민당을 따라 피난했을 것이다. 이후 국부천대를 따라 선통제도 대만으로 이동하여, 적어도 선통제가 생존한 1960년대까지는 대만에서 소조정이 남았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청나라 소조정 완전 폐지 또는 대성지성선사봉사관처럼 명예직으로 대체되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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