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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7:33:37

돤치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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돤치루이
안휘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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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페이푸*
직계군벌
육해군대원수

장쭤린
봉천군벌

* 대총통 차오쿤이 우페이푸의 상관 겸 같은 직계군벌로서 실권을 행사했지만 영향력은 우페이푸가 더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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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단기서.jpg
<colbgcolor=#de2119> 중화민국 초대 임시 집정
본명 돤치루이(段祺瑞)
한문 段祺瑞
한국식 독음 단기서
영문 Duan Qirui
정도노인(正道老人), 정도거사
지천(芝泉)
출생 1865년 3월 6일
청나라 안후이성 허페이시
사망 1936년 11월 2일 (향년 71세)
중화민국 상하이시
학력 독일제국 육군대학
직업 정치가, 군인
종교 불교
임시집정
재임 기간
초대 1924년 11월 24일 ~ 1926년 4월 20일
국무총리
재임 기간
대행 1913년 5월 1일 ~ 1913년 7월 31일
8대 1916년 4월 23일 ~ 1916년 6월 29일
9대 1916년 6월 29일 ~ 1917년 5월 23일
11대 1917년 7월 14일 ~ 1917년 11월 22일
13대 1918년 3월 23일 ~ 1918년 10월 10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홍헌제제호국전쟁2.3. 부원지쟁장훈복벽2.4. 호법전쟁안직전쟁2.5. 임시 집정으로 재기2.6. 말년
3. 기타4. 매체에서5. 참고 문헌6. 관련 문서
6.1. 인물6.2. 사건
7. 둘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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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조 말의 군인, 중화민국군벌, 정치인.

안휘군벌의 수령으로 수차례 중화민국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중화민국 임시집정으로 재임했다. 올곧은 성격과 담백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존경을 받았지만, 비타협적이고 완고한 성격 때문에 다른 군벌들과 마찰을 빚다 몰락했다.

2. 생애

2.1. 초기

1865년 안후이성 허페이(合肥)의 루안(六安) 태평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단패는 원래 장시성(江西省) 포양(鄱阳)현 사람으로 유명전과 사염을 거래하고 단련을 만들었으며 회군 통령에 이르렀다. 이런 배경 덕분에 집안이 부유하여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숙천병영글방에서 6~7년간 공부하며 유복한 생활을 하였으나 1879년, 15세에 할아버지가 급서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1881년, 돤치루이는 은전 한잎을 가지고 루안을 떠나 2천리나 떨어진 산둥성 웨이하이웨이(威海卫)의 관대인 친척 단종덕을 찾아갔고 그의 도움으로 군대의 잡역부를 거쳐 사서로 일하게 되었다. 1883년에는 부친 단종문이 그를 면회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도적을 만나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는데 상을 치르기 위해 휴가를 신청했으나 반려당했다.

1885년, 20세가 되었을 때 천진무비학당이 설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포병과 1기로 입학했다. 천진무비학당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이후 뤼순의 독건포대에 배속되었다가 1888년 독일 제국 육군대학에서 1년 6개월 간 군사교육을, 독일군 병공창에서 6개월간 실습을 받아 총 2년간 독일에서 유학했다. 이 때문에 당대 중국에서 근대적 군사학의 1인자로 인정받았다. 귀국 후 위해위에서 5년 간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청일전쟁에 참전했으며 1896년, 천진 소참의 신분으로 위안스카이의 신건육군 건설에 참여하여 각종 교범의 작성을 담당했다. 북양군이 만들어질 때 군정처의 요직인 참모처총판에 임명되었으며 북양군의 교육 분야를 실질적으로 모두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위안스카이가 북양군의 실력있는 장교의 반은 돤치루이가 길러낸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1903년 총리연병대신 경친왕 밑에서 연병처 군정처정사를 지냈고 1905년과 1906년에 북군 총통관을 맡아 대규모 군사훈련을 지휘했다. 성공적으로 추계 군사훈련을 실시한 돤치루이는 1906년 복건총병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위안스카이가 그를 대신하여 장교를 교육할 인물이 없으니 취임을 늦춰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이후 3,4,6진 통제를 거쳐 1911년에 2군 군통 겸 호광총독에 임명되었다. 우수한 실력과 요직의 역임으로 위안스카이의 핵심적인 심복 중 한 사람이 되어 왕스전, 펑궈장과 함께 북양삼걸, 북양의 호랑이로 불렸다. 그리고 검소한 성품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관한 소신 덕분에 중국 내 뿐만 아니라 중국 외에서도 의지가 굳고 매력적인 인물로 평가가 높았고 이러한 점 때문에 북양삼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위안스카이의 지시에 따라 혁명 진압에 나섰으나 강경진압을 주장한 펑궈장과 달리 남쪽과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남북 평화협상을 주도하여 남방 측에 혁명에 우호적인 인물로 인식되었다. 위안스카이가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된 후 북양군 제2군 총통 겸 호광총독 대행, 북양 1군 사령관을 맡아 리위안훙의 호북군정부와 대치했다. 1912년 위안스카이와 혁명군의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북양군 장교 46명과 연명으로 선통제 퇴위를 강요하고 2월 5일, 1군 협통 이상 장령 8명과 연명으로 공화국 수립을 다시금 촉구했다.

중화민국 초대 육군총장 겸 포병사령에 임명되어 군대편성, 배치, 장교 승진, 임면권 등 모든 군사적 업무를 주관하였다. 또한 그의 측근인 쉬수정, 우광신[1], 진윈펑, 푸량쭤 등 안휘파 4대 금강이라 불리는 여러 인물들과 취퉁펑 등의 부하들도 내각의 요직에 중용되어 그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고 이 시점에서 의심할 바 없이 북양군벌의 2인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일본의 21개조 요구 때는 전쟁불사를 외치며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친독반일파로 여겨져 일본에서는 그를 경계하였다.

2.2. 홍헌제제호국전쟁

1912년 6월 15일 탕사오이 내각이 사퇴한 후에도 루정샹 내각, 자오빙쥔 내각에서도 육군총장에 유임되었으며 1913년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총리 자오빙쥔이 사퇴하자 총리 대행을 맡았다가 9월 슝시링에게 자리를 내주고 육군총장에 유임되었다. 이후 통솔판사처 설치, 모범단 편성 등의 문제로 위안스카이와 불화했고 이 시기에는 돤치루이의 권한이 너무 막강해져서 위안스카이가 그의 영향력을 제어하려고 할 정도였다. 1913년 계축전쟁에서 혁명군 진압을 맡았으나 실제로 교전하진 않아 여전히 혁명세력에게 우호적인 인물로 인식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가 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위안커딩을 통해 반대의 의사를 전했다.
"나는 일찍이 공화를 채택하라는 전(電)을 발표하였는데 지금 또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즉위하는 것을 옹호한다면 나라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 또 24史 중에서도 역시 이러한 인물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펑궈장과 전보를 주고받으며 제제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이 때문에 육군총장에서 경질되었지만 호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도로 중용되어 쉬스창이 국무경에서 사직한 이후 1916년 4월 국무경에 임명되었다.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가 사망하고 리위안훙이 대리총통이 되어 약법과 국회의 회복을 선언했다. 이후 돤치루이는 국내외적인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쑨원, 량치차오, 차이어 등은 모두 입을 모아 시국수습을 위해 돤치루이를 총리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량치차오는 즉각 리위안훙에게 "돤치루이와 더불어 중앙질서를 유지하도록 힘을 다할 것"을 요청했고 독립을 선포한 각성의 도독들에게 북방의 수습을 돤치루이에게 맡기자고 호소했다. 차이어도 6월 22일 전보를 보내 "시사가 몹시 어려우니 돤치루이가 아니면 총리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국무원에 통전했다. 이어 탕지야오, 루룽팅, 용제광 등도 모두 돤치루이 지지 통전을 보냈다. 쑨원도 돤치루이가 공화를 옹호할지 여부를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6월 23일 돤치루이에게 서한을 보내 신해혁명 때 공화를 찬성하여 대국을 안정시켰고 제제 시에도 대의를 견지하여 시국을 구했다고 돤치루이를 높이 평가하며 오늘날 혼란을 바로잡는 것은 오로지 돤치루이에게 달렸으니 나쁜 말에 현혹되어 천하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편지를 보냈다. 각국 공사단도 6월 8일 돤치루이가 총리가 되어 치안을 담당하는 데 만족을 표하고 일치해서 돕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으며 특히 일본 제국이 돤치루이를 적극 지지했다.

아마 여기서 조금 무리를 했다면 돤치루이 스스로 대총통에 취임할 수도 있었겠지만 리위안훙이 대총통에 계임하는 것에 대한 법적인 하자가 없었고 펑궈장 등의 반발을 우려하여 쉬스창의 조언에 따라 리위안훙의 총통 취임을 지지하고 총리 자리에 만족하는 절제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연유로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지만 곧 대총통 리위안훙과 충돌을 빚게 되면서 중화민국엔 혼란이 찾아들었다.

2.3. 부원지쟁장훈복벽

하지만 초기부터 돤치루이와 국회는 삐긋대는 경향이 있었다. 우선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리위안훙이 계임하였을 때 돤치루이는 강경하게 1914년 중화민국 신약법 체제의 고수를 주장하였다. 이는 국회는 신약법 체제 하에서 그저 자문기관에 불과하지만 임시 약법 체제 하에서는 권한이 막강한데 국회에서 국민당의 세력이 강성하여 그의 권력을 크게 침해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방의 호국군이 일치하여 임시 약법 복구를 요구하고 펑궈장 등 다른 북양군벌들이 동조했으며 해군까지 독립을 선포하여 임시 약법 복구를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돤치루이는 6월 29일 국회와 임시약법 복구에 동의하면서도 미국 공사 라인쉬와의 대화에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는 국회회복이 많은 이득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국회는 끊임없이 당파정쟁이 있을 것이고 행정간섭이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국회와 자신이 충돌하게 되자 돤치루이는 "국회의 반대는 국가이익을 무시하는 것이다. 국회는 다만 당파의 이익만을 얻으려 한다."고 반감을 드러냈다. 여기에 약법 상의 대총통과 국무총리의 권한 해석 문제라거나, 너무도 강성해진 돤치루이의 세력에 대한 리위안훙과 국회의 견제, 리위안훙과 돤치루이의 성향 차이로 인하여 돤치루이와 리위안훙 사이에는 부원지쟁이라 불리는 정쟁이 벌어졌다. 돤치루이는 리위안훙을 그저 결재기관 정도로 보고 무시했으며 그의 비서장 쉬수정도 리위안훙을 볼때마다 오만불손한 태도로 굴어 리위안훙을 분격하게 했다. 리위안훙도 이에 맞서 돤치루이의 권력 회수를 시도하고 계속 거부권을 발동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던 중 1917년 협상국이 중화민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종용하자 이를 환계의 세력확장과 남방 군벌 토벌의 기회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참전을 주장하여 대독절교안을 가결시켰다. 하지만 국회가 대독선전안을 부결하고 리위안훙도 참전에 반대하자 리위안훙에게 국회 해산을 요구했다가 5월 23일 해직당했고 국회는 외교총장 우팅팡을 국무총리에, 장사옥을 육군총장에 임명하였다. 이에 분노한 돤치루이는 장쉰과 손을 잡고 톈진에 임시정부와 임시국회를 소집, 안휘의 니쓰충, 하남의 자오티, 직예의 차오쿤, 봉천의 장쭤린, 섬서의 진수번, 절강의 양선덕, 복건의 리허우지 등에게 독립을 선포하게 하여 리위안훙을 타도하려 했지만 장쉰은 리위안훙의 부름을 받고 베이징에 가더니 1917년 7월 1일 난데없이 선통제를 복벽하는 장훈복벽을 일으켰다. 이에 리위안훙과 손을 잡고 7월 2일, 국무총리에 복귀, 토역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장쉰을 토벌하고 장훈복벽을 취소했다.

2.4. 호법전쟁안직전쟁

복벽진압 이후 량치차오 등은 장훈복벽으로 중화민국은 한번 멸망한 것이니 새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민국 재조설을 내세워 신해혁명의 전례에 따라 임시참의원을 소집하고 국회조직법과 선거법을 다시 제정할 것을 요구했다. 돤치루이는 이를 수용하여 1917년 11월 10일 임시참의원을 구성하고 구국회도 약법도 옛총통도 필요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장쉰이 해산한 국회와 약법의 회복을 거부했다. 이어 세계대전 참전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니시하라 차관을 들여 재정을 농단했다. 이 때문에 쑨원탕지야오, 루룽팅을 비롯한 서남군벌들이 1917년 1차 호법운동을 열어 호법정부를 수립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호법전쟁을 일으켰다. 돤치루이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지만 우페이푸 등 직계의 반대로 쉽지 않았고 사천 전선에서 패배한 이후 차오쿤, 리춘, 진광원, 왕잔위안 등이 무력토벌 반대를 통전하자 패전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에서 퇴임하여 왕스전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왕스전 내각이 출범한 틈을 타서 대총통 펑궈장은 정전령을 내려 내전을 중단하고자 했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주전파들이 펑궈장을 압박한 끝에 참전독판의 자리에 올라 군권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으며 1918년 3월 장쭤린의 지지를 받아 다시 국무총리가 되어 독재를 하였다. 또한 1918년 2월 국회조직법과 의원선거법을 제정, 공표하였다. 이때 환계의 왕이탕(王揖唐) 등은 직계에 대항하여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1918년 3월 8일 안복구락부를 만들었고 1918년 8월 12일 선거에서 470석의 의석 중 342석을 이들 안복계가 차지하였다. 안복계 왕이탕과 유은격이 중의원 의장과 부의장에 임명되고 참의원 의장과 부의장에도 친 안복계인 구 교통계의 량스이와 주치첸(朱啓鈐)이 각각 임명되었다.[2] 국회가 돤치루이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한편 리위안훙을 계임한 펑궈장의 임기가 끝나서 새로운 대총통을 뽑아야 했는데 돤치루이와 펑궈장의 대립이 심하여 둘은 자연스레 총통 후보에서 제외되었고 돤치루이는 군사기반이 없는 쉬스창을 추천했다. 돤치루이는 펑궈장이 원한다면 자신이 부총통까지 양보하겠다고 했고 만약 펑궈장이 부총통에 나오지 않는다면 하야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톈진의 독군단 회의가 이에 동의하면서 쉬스창이 어부지리로 9월 4일 436표 중 425표를 얻어 대총통에 당선되었다. 10월 10일에 취임한 쉬스창은 돤치루이를 국무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후임으로 내무총장 첸넝쉰을 임명하고 11일에 각부 총장을 임명했으나 참전독판이 된 돤치루이가 여전히 북양정부의 실세였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는 구실로 참전군을 조직하여 쉬수정을 참전군 사령관에 앉혔고 5.4운동 이후 참전군 조직에 대한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자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개칭하여 1919년 외몽골 출병을 단행, 외몽골과 투바를 복속시켰다. 이때 변방군 사령관 겸 서북주변사 쉬수정을 비호하여 직계와 봉계의 큰 불만을 샀고 쉬수정과 변방군을 제거하라는 직계의 요구와 장쭤린의 중재에도 요지부동으로 나왔으며 우페이푸의 북상을 막기 위해 무리하게 하남독군 자오티 축출을 시도하여 전국적인 반발을 샀고 오히려 국무총리 진윈펑하남독군 교체 파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며 압박하여 하야를 강요했다. 결국 쉬수정이 주도한 장쭤린 암살 시도가 실패하면서 1920년 7월 안직전쟁이 일어났다. 전투경험이 없던 참전군은 쉬수정이 도주하면서 황당하게 패배하였고 우페이푸가 취퉁펑 등 안휘계 지휘관들을 사로잡으면서 안휘군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쉬수정, 돤즈구이 등은 도주했다. 7월 19일 돤치루이는 쉬스창에게 정전을 청한 후 사직서를 제출하고 하야하면서 권력을 상실했다. 직계는 돤치루이에게 보복을 하고 싶어 했으나 대총통 쉬스창과 봉계가 관용을 베풀면서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다만 안복구락부는 해체되었으며 환계의 주요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2.5. 임시 집정으로 재기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장쭤린,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던 쑨원과 연합하여 다시 권좌 복귀를 꾀하며 반직삼각동맹을 체결했지만 여지없이 패배했다. 이후 강절전쟁으로 재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했으나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나자 북경정변으로 펑위샹차오쿤을 축출하고 베이징을 장악했으며 1924년 11월 15일 장쭤린펑위샹의 초청으로 임시 집정에 임명되어 다시 중국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실권은 장쭤린에게 있었다.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베이징에 올라온 쑨원을 괄시하여 서산회의파, 궈쑹링 등의 비판을 받았고 쑨원의 국민회의에 대항하여 선후회의를 개최했다.

1926년의 대고구 사건, 3.18 시위로 입지가 좁아졌고 1926년 3월 27일 광저우 국민정부는 돤치루이 축출 선언을 발표했다. 여기에 펑위샹이 그의 하야를 독촉하자 돤치루이는 4월 11일 동교민항으로 잠적하여 4월 20일 하야함으로 사실상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남은 생애 동안 불경 공부로 소일을 보냈다. 사실 권력욕은 대단했으나 그 외에는 술, 담배, 도박 등을 좋아하지 않아 사생활은 깨끗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여섯가지를 하지 않는다 하여 육불총리라 불리기도 했다. 퇴임 후 칭다오의 담산사 건립에 많은 기부금을 냈으며 장남 단굉업을 티베트로 보내 판첸 라마 9세와 만나게 하고 황금도장을 바쳤다.

2.6. 말년

파일:단기서말년.jpg
말년의 돤치루이

이후 장제스국민당의 1차 북벌을 일으켜 북벌을 시작했고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장쭤린봉천군벌을 물리치고 동북역치로 봉천군벌을 국민정부 산하로 귀속시키면서 북양군벌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어 돤치루이가 부활할 가능성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중국의 원로로서 어느 정도 존중을 받아 1933년 열하사변이 터졌을 때 조언을 하기 위해 장제스와 회담을 가지기도 했고 그의 초청을 받아 상하이로 이주하였다. 권력자 시절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였으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는 일본과 단절했다. 일본 제국은 돤치루이를 화북 괴뢰정권의 수장으로 임명하기 위해 회유했으나 돤치루이는 거부했다.

1933년 관동군 부참모장 이타가키 세이시로우페이푸, 쑨촨팡, 돤치루이 3인을 북양군벌의 우두머리로 규정, 이들을 매수하기 위해 육군성 기밀비를 동원하여 공작을 벌였으나 돤치루이는 요지부동이었다. 돤치루이는 오히려 5월 20일, 왕이탕, 루쭝위(陸宗輿) 등 친일파들에게 전보를 보내 이들에게 일본의 회유에 넘어가지 말 것을 준열하게 경고하였다.
나는 상하이에서 요양하며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있다. 현재 화북의 정세가 엄중한데 거짓 명목을 들어 궤도 외의 행동을 하는 것은 애국의 길이 아니다. 여러 아우들이 엄격하게 조사하여 지방 당국에 알려 엄하게 제지하기 바란다.

5월 8일에 있었던 장징야오 암살 사건 등이 겹치면서 일본의 군벌 회유 공작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장제스의 배려로 상하이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이후 3차례나 장제스의 방문을 받는 등 사회 애국명사로 대접받았다. 1935년 11월, 중국 국민당 5차 전국대표대회는 돤치루이를 국민정부위원으로 선출하였으나 돤치루이는 취임하지 않고 은거 생활을 계속하였다. 1936년 11월 2일, 화북 상황에 대해서 걱정하던 중 병환이 악화되어 상하이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11월 3일, 행정원은 돤치루이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를 것을 결의하였으며 11월 5일, 전국에 조기를 게양하였다.

12월 9일, 영구가 베이핑으로 운송되었으며 와불사에 안치되었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 베이핑 서교에 매장되었다. 공산화 이후인 1963년, 돤치루이의 조카 단총강과 장사검이 돤치루이의 시신을 베이징 만안 공동묘지로 이장하면서 지금까지 그곳에 묻혀 있다.

3. 기타

3남 6녀를 두었다. 셋째 딸은 위안스카이의 형제의 손자와 결혼했다.

불교 신자여서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4. 매체에서

파일:주향공화단기서.jpg
2003년작 중국 드라마《주향공화》에 나온 돤치루이. 중국 배우 마륜이 분했다.

파일:건당위업단기서.jpg
영화《건당위업》에 나온 돤치루이. 중국 배우 조본산이 분했다.

5. 참고 문헌

6. 관련 문서

6.1. 인물

6.2. 사건

7. 둘러 보기

중화민국 역대 임시집정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장.svg
대총통 권한대행 초대 임시집정 집정 권한대행
황푸 돤치루이
(1924년 11월 24일 ~ 1926년 4월 20일)
후웨이더

중화민국 역대 국무총리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장.svg
3대 대행 4대
자오빙쥔 돤치루이
(1913년 5월 1일 ~ 1913년 7월 31일)
슝시링
7대 (국무경) 8대 (국무경) 9대
쉬스창 돤치루이
(1916년 4월 23일 ~ 1916년 6월 29일)
돤치루이
8대 9대 대행
쉬스창 돤치루이
(1916년 6월 29일 ~ 1917년 5월 23일)
우팅팡
장훈복벽 의정대신 11대 대행
장쉰 돤치루이
(1917년 7월 17일 ~ 1917년 11월 22일)
왕대섭
대행 13대 14대
첸넝쉰 돤치루이
(1918년 3월 23일 ~ 1918년 10월 10일)
첸넝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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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취퉁펑을 뽑는 경우도 있다.[2] 그나마도 곧 사퇴하여 아예 안복계로 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