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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직전쟁 安直戰爭 Zhili–Anhui War | ||
1920년 7월 시점의 중화민국 세력도 | ||
시기 | 1920년 7월 14일 ~ 7월 23일 | |
장소 | 중화민국 직례성 | |
교전세력 | 안휘군벌 | 직계군벌 봉천군벌 |
지휘관 | 돤치루이 쉬수정 취퉁펑 돤즈구이 푸량쭤 니쓰충 루융샹 허펑린 리허우지 | 차오쿤 우페이푸 치셰위안 펑위샹 자오티 리춘 장쭤린 양위팅 장덩쉬안 궈쑹링 장쉐량 |
결과 | 직계-봉천 연합의 승리 |
1. 개요
1920년 7월 14일부터 7월 23일까지[1] 차오쿤, 우페이푸의 직계(직계군벌)와 돤치루이의 환계(안휘군벌)가 중국 천하의 패권을 잡기 위해 벌인 내전을 말한다. 직계군벌의 직과 안휘군벌의 안을 따서 안직전쟁이라 하며 직환전쟁, 환직전쟁이라고도 한다.2. 배경
2.1. 호법전쟁
1915년 12월 12일, 북양군벌의 수장 위안스카이는 황제병에 걸려 홍헌제제를 단행, 중화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이 일어나자 3월 23일 제제 취소 후 6월 6일 사망했다. 위안스카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북양군벌은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를 중심으로 하는 안휘파, 즉 환계와 부총통 펑궈장을 중심으로 하는 직례파, 즉 직계로 갈라져 대립했다.돤치루이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호국전쟁 이후 남방의 독립적인 세력으로 자리잡은 서남군벌들을 토벌하기 위해 1917년 연합국의 세계대전 참전 요구를 구실로 삼았다. 돤치루이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국의 차관과 무기를 얻어 무력을 강화하고 싶었고 이 때문에 <대독절교안>과 산동반도의 독일군의 동진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대독선전안>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국회가 말을 듣지 않자 장쉰과 결탁하여 대총통 리위안훙과 국회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이 계획은 장쉰이 장훈복벽이라는 막나가는 왕정복고를 단행하면서 틀어졌으나 어쨌거나 돤치루이는 장쉰을 진압하고 다시 국무총리에 올라 최고권력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최고권력자로 등극한 돤치루이는 장쉰이 해체한 국회와 약법의 부활을 거부하며 안복구락부를 이용해 어용국회를 만들었으며 매국적인 니시하라 차관을 들이는 등 일본에 영합하여 독재와 무력을 강화했다.
이에 반발한 쑨원과 중화혁명당은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연합하여 1917년 9월 1차 광동정부를 수립하고 1차 호법운동을 주도하며 돤치루이의 독재를 비판했다. 돤치루이는 남방의 독립적인 상태를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남북분열은 지방군인들로 하여금 투기적인 방법으로 이익을 얻게 만들고 독립을 선포하여 국정을 좌우하도록 만들었다'라는 것이 돤치루이의 생각이었는데, 즉 군벌들이 할거하고 군인들이 정치에 간섭하는 당시 중국의 상황은 남방과 북방이 통일되지 않고 따로 놀아서 그런 것이며 이러한 상황을 종식시키고 중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선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돤치루이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돤치루이는 쑨원 체포령을 하달하여 1917년 9월 호법전쟁을 일으켰다.
2.2. 참전군 문제
호법전쟁 과정에서 결국 환계, 직계, 봉계가 모두 서로 적대하며 으르렁거리는 험악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1918년 11월 호법전쟁은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렸고 1919년 2월 직계의 수장인 펑궈장이 사망하면서 차오쿤과 우페이푸가 직계의 수장이 되었다. 1919년 5.4운동으로 첸넝쉰 내각도 사직하고 궁신잔 내각이 뒤를 이었는데 9월에 궁신잔 내각도 재정문제로 사퇴하면서 육군총장 진윈펑이 국무총리를 대행했다. 진윈펑은 안휘군벌의 인물이지만 장쭤린의 사돈이며 쉬수정과 사이가 나빠 안복계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외무총장, 내무총장, 재무총장 대리, 교육총장, 사법총장, 교통총장 등은 모두 안복계가 차지한 상태였다.돤치루이는 1918년 9월 일본과 차관계약을 체결한 다음, 1918년 11월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12월부터 참전군을 모집하기 시작하여 1919년 2월 완전히 편성했다.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한 군대라면서 정작 완성된 것은 세계대전이 끝난 후였으니 국내외의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일본의 차관으로 유지되는 군대라는 점에서 중국 내부에서는 반일감정이 치솟았다. 1919년 상하이 평화회의에서 참전군 해체가 요구되었고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 명분 없는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차관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국내외의 참전군 반대 여론에 힘입은 대총통 쉬스창도 돤치루이에게 참전군을 육군부 관할로 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이를 듣지 않고 1919년 6월 24일, 외몽골의 독립운동을 진압한다는 이유로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개칭하고 섬서독군 쉬수정을 서북 주변사 겸 서북 변방군 총사령관 겸 외몽고 독판으로 임명하였다. 서북 주변사는 쉬수정에게 주기 위해 신설한 관직으로 섬서, 감숙, 내몽골, 감숙, 신장 등 서북지역의 민정대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서북주변사에게는 7월 18일 대총통령에 따라 군대 훈련, 군수물자 구입, 은행 설립, 공채발행까지도 가능한 권한이 주어졌다. 사실 몽골과 서북의 안정은 핑계고 중앙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참전군을 유지한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었다. 1919년 11월, 쉬수정은 외몽골 출병을 단행해 외몽골의 자치를 취소했다.
환계의 권력욕에 직계가 불쾌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봉천의 장쭤린도 분노했는데 장쭤린은 쉬수정이 주변사가 되어 변방군을 지휘하는 것을 자신의 동삼성순열사 자리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가뜩이나 호법전쟁으로 쉬수정과 감정이 나빠졌던 장쭤린은 더욱 쉬수정을 싫어하게 되었다. 결국 1920년 7월 직계와 환계의 갈등이 폭발하면 안직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3. 전개
3.1. 8성 동맹과 우페이푸의 북상
1919년 가을, 환계의 행패에 참다 못한 직례독군 차오쿤을 중심으로 돤치루이를 아니꼽게 여기고 있던 직례독군 차오쿤, 강소독군 리춘, 호북독군 왕잔위안, 강서독군 진광원 등 직계 4개 성의 독군들과 봉천독군 장쭤린, 흑룡강독군 손열신, 길림독군 포귀경 등 봉계 3개 성의 독군들이 모여 돤치루이에 대항하기 위한 7성 동맹을 결성하였다. 반직동맹의 비밀회동 직후 호남에 주둔하던 우페이푸는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량미가 부족하며 병사들이 고향에 가고싶어한단 이유로 왕승빈, 소요남 여단 등과 함께 북쪽으로 철수하려 했다. 여기에 광동의 군정부가 우페이푸에게 6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하여 철수를 부추겼다. 돤치루이는 우페이푸의 북상을 막기 위해 경한철도를 봉쇄하여 우페이푸를 막으려 했고 2월 23일 충성심과 실력이 의심스러운 하남독군 자오티를 축출하고 자신의 처남이며 안휘파 4대금강 중 하나인 환계의 우광신을 하남독군에 임명하여 제지하려 함으로 하남독군 교체 파동을 일으켰다. 또한 자오티가 겸임하고 있던 하남성장 자리도 빼앗아 안복계 왕인천을 임명하려 했다. 이에 자오티가 군대를 배치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로 나서고 직계군벌이 자오티를 응원하면서 하남독군 교체는 좌절되었다.이로 인하여 환계와 직계의 싸움을 관망하던 입장인 하남독군 자오티는 하남성 혼자 환계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7성동맹에 가입하여 7성동맹은 8성동맹이 되었고 8성동맹은 권력자 옆을 청소한다는 의미의 청군측이라는 구호를 걸었다. 1920년 3월, 봉천에서 장쭤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이유로 8성 대표들이 회동했고 이어 4월 9일 바오딩에서 내전의 전몰자들을 추모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8성 대표들이 다시 회동했다.
돤치루이의 방해가 좌절되자 우페이푸는 뤄양에 주둔한 변방군을 견제하기 위해 하남, 직례의 요충지로 이동하였고 6월 10일 봉천군이 독류진에 주둔하던 4개 부대를 란방으로 이동시키며 '공위경사'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우페이푸와 함께 북상한 왕승빈과 소요남은 바오딩으로 이동해 6월 15일 차오쿤에게 합류했다. 6월 17일 몽골의 수도 후레[2]에 주둔하던 쉬수정이 위기를 느끼고 급히 베이징에 돌아와 직계와 환계의 대립은 심각한 수준이 되었다. 대총통 쉬스창은 차오쿤, 리춘, 장쭤린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베이징에 와서 난국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차오쿤과 리춘은 중재에 응하지 않았으나 장쭤린은 대외적으로 중립을 표방하며 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왔다.
3.2. 장쭤린의 마지막 중재
1920년 6월 19일 장쭤린이 전용열차 베이징에 도착, 쉬수정과 군, 경 ,정 각계 장관들의 영접을 받았다. 안복계의 교통총장 증육준이 봉천회관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장쭤린을 위한 관저를 마련했다. 하지만 장쭤린은 봉천회관에 머물지 않고 봉군사령부에 숙소를 정한 후 쉬스창, 진윈펑, 돤치루이를 차례로 만나 상호 양보하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뜻을 전했다. 6월 20일, 쉬수정이 장쭤린을 찾았으나 장쭤린은 핑계를 대며 쉬수정의 면담을 거절했다. 장쭤린은 환계의 등쌀에 못 이겨 사퇴하려는 진윈펑 총리의 사퇴를 만류하는 한편 6월 21일 돤치루이를 찾아가 진윈펑을 복직시키고 쉬수정을 더 이상 비호하지 않음으로 명망을 유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돤치루이는 자신이 쉬스창을 반대하지 않으며 진윈펑에겐 복직을 권하겠다고 동의를 표했다.6월 22일 장쭤린은 왕내빈, 장징후이 등의 심복을 거느리고 8개 성의 대표와 함께 바오딩에서 차오쿤, 우페이푸와 회담했다. 차오쿤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장쭤린을 크게 환대했고 장쭤린은 시국 해결을 위한 5개 방안을 제시했다.
1. 진윈펑의 복직 2. 내각의 국부적 개조(즉 안복계가 장악한 재정, 교통, 사법 총장의 교체와 농상, 외교, 교육총장의 교체) 3. 상해화의 대표의 해임과 화평회의 취소 4. 안복계 해산 5. 쉬수정의 병권 박탈, 주변사관제 취소. 변방군은 개편 후 육군부 직할로 둠. |
6월 23일, 바오딩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온 장쭤린은 회의 결과를 쉬스창에게 보고하고 쉬스창과 장쭤린은 이를 채택하기로 잠정 결정, 다시 돤치루이와 회담했다. 돤치루이는 장쭤린과 술을 마시며 자신은 아무런 정치적 야심이 없으니 장쭤린에게 부총통 자리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장쭤린을 구슬리려는 시도였으며 돤치루이는 쉬수정의 병권 해제 부분은 어렵다고 밝히며 재정과 교통계는 안복계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쌍방의 입장 차가 커서 조정은 진전이 없었다. 6월 25일과 6월 27일 바오딩에서 직계 장령들이 진윈펑 복직, 안복 3총장 퇴진, 쉬수정 주변사 면직, 변방군의 육군부 소속 등을 요구하는 통전을 올려보냈다. 이 통전에서는 돤치루이엔 악감정이 없지만 쉬수정만은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돤치루이에게 쉬수정은 수족과도 같은 심복이었기 때문에 돤치루이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6월 29일 쉬스창, 돤치루이, 장쭤린이 모여 회의를 했다. 쉬스창은 안복계 3총장은 사퇴하되 내무와 해군총장은 유지하며 외교,농상,교육총장을 유임시키고 진윈펑을 해임시켜 육군총장에 임명하며 주수모를 총리에 임명하는 한편 쉬수정을 면직하고 변방군과 서북군을 돤치루이의 휘하에 두는 대신에 쉬수정의 주변사 직책은 유임시키는 타협안을 도출했다. 돤치루이는 일부러 반대 표시를 하지 않았으나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총리가 누가 되는지는 상관이 없으나 쉬수정의 병권 박탈과 안복 3총장의 해임을 재차 요구했다. 6월 30일 돤치루이는 환계 회의를 열었으나 쉬수정 등은 직계의 요구에 강력히 반발했다. 장쭤린이 다시 돤치루이를 설득하려 했으나 돤치루이는 일개 사단장에 불과한 우페이푸가 주제 넘게 간섭하는 일 때문에 중앙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며 우페이푸를 비방함으로 강경한 반대의 뜻을 전달했다. 이 시점에서 중재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셈이었다.
이렇게 보면 돤치루이가 과욕으로 억지를 부린 것도 같지만 호법전쟁으로 남북 무력통일이라는 환계의 목표가 좌절된 상황에서 안복계와 변방군이라는 군사,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는 것이 환계 입장에서는 최소목표였다. 문제는 이 '최소목표'부터가 다른 군벌들 눈에는 심각한 무리수였다는 거지만.
3.3. 장쭤린 암살 시도
7월 1일 <직계군이 서북변방군에 고하는 글>이라는 글이 발표되었다.이번 직계군 철수는 원래 국가와 인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안복계 및 매국적 행위를 하는 쉬수정을 숙청하기 위함이었다. 진보적 지도자, 우군 동지들에게 악감정 같은 것은 추호도 없다. |
7월 2일, 쉬스창의 명령에 따라 진윈펑의 사직안과 주수모의 국무총리 임명안이 중의원에 송부되었다. 하지만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안복계 해산과 쉬수정 파면을 줄기차게 요구하였고 서북군의 통솔권도 돤치루이에게 맡길 수 없다고 반발했다. 7월 3일 차오쿤, 이순이 쉬수정이 나라를 해치고 정권을 장악하여 통일을 방해하는 죄악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는 통전을 보내며 쉬수정의 파면을 요청했다. 이에 장쭤린도 호응하여 쉬수정의 여섯가지 죄를 물어 통전을 보냈다. 즉 장쭤린이 직계의 편에 있음이 공식화된 것이다.
이에 고무된 쉬스창은 7월 4일 쉬수정의 서북 주변군 총사령관 직을 회수하고 서북 주변사의 중요 권한을 회수했으며 위원 장군으로 삼았다. 또한 변방군을 육군부 소속으로 귀속시켰다. 이에 돤치루이는 격노하여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꼈다고 쉬스창에게 항의하며 7월 5일 변방군의 동원을 명령했다. 이날 쉬수정이 장쭤린을 방문하여 친한 척 한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며 자신이 장쭤린에게 아무런 악감정이 없는 것처럼 가장했다. 이에 장쭤린은 쉬수정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쉬수정은 이를 노려 7월 7일 돤치루이가 머무는 단하에서 직계의 토벌 문제 검토를 위한 회의를 청했다. 장쭤린은 흔쾌히 응하여 단하로 도착했다. 쉬수정이 즉각 돤치루이에게 전화했다.
"지금 바로 그를 체포합시다."
하지만 돤치루이는 호의로 온 장쭤린을 음모를 통해 제거한다는 방식을 꺼려서 장쭤린 앞에서 무척이나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장쭤린은 돤치루이의 표정에서 큰 일이 있음을 직감하고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회의장을 빠져나가 하수도를 통해 밤 11시, 기차역으로 달아났다. 진윈펑은 쉬수정이 철로를 추격하고 있는 듯 하다고 몰래 알려왔고 이에 장쭤린은 평복을 하고 화물 열차에 타서 텐진으로 도주했다. 결국 모든 화해 시도는 파국으로 돌아갔다.
3.4. 전쟁의 시작
7월 8일 새벽 1시에 톈진에 도착한 장쭤린은 달려가 차오쿤, 우페이푸와 긴급회의를 가졌고 다시 봉천으로 돌아갔다. 봉천역에 돌아온 장쭤린은 "다시 돌아왔구나!"라고 외쳤고 일단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표명일 뿐이었다.한편 7월 8일 돤치루이는 단하에서 베이징으로 들어와 장군부에서 주요장관, 국무원, 참모총장, 위수사령, 경찰총감 등 100여명의 정부요인을 모아회의를 개최, 차오쿤과 우페이푸를 탄핵하고 직계를 토벌하자고 결의했다. 회의 직후 돤치루이는 강경한 어조의 공문을 올려 차오쿤과 우페이푸의 죄상을 비난하고 대총통 명의로 차오쿤, 우페이푸, 조영 등 3인의 관직을 박탈하고 체포하여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7월 9일, 돤치루이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던 쉬스창에게 우페이푸의 사단장직을 면직하고 육군부에서 징계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우페이푸는 육군 중장직과 훈장을 박탈하고 육군부에 넘겨 법에 따라 처벌하며 제3사단은 육군부에서 접수한다. 차오쿤은 면직시킨다. |
돤치루이는 변방군 3사단을 란방으로, 변방군 1사단과 육군 9사단, 13사단, 15사단을 장신점, 루거우차오, 고비점으로 파견하여 단하에 정국군 총사령부를 설치, 스스로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쉬수정을 참모장에 임명했다.
당연히 직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7월 9일 오전, 톈진에서 차오쿤이 궐기대회를 열고 오페이푸를 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우페이푸가 선언했다.
"삼군을 몰고 가 신경으로 진격하여 돤치루이를 몰아내고 쉬수정을 주살하자! 우리 군의 이름으로 적을 토벌하자!"
바오딩에 직계군 대본영이 설치되고 고비점에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직계군은 우페이푸의 3사단, 소요남의 3혼성여단, 염상문의 2혼성여단, 조예의 3혼성여단, 왕승빈의 직계1혼성여단 등 3만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했다. 우페이푸는 <돤치루이의 죄상 폭로>, <직군이 변방 서북군에게>, <직군 병사가 돤치루이군에게 충고하는 글> 등을 발표하여 자신들의 거병 이유를 선전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국은 자고이래 외국의 방비에 엄격했다. 매국보다 더 큰 죄가 없고 외세에 아첨하는 것처럼 추한 일은 없다. 간신들의 흉악함이 극에 달했는데 돤치루이는 국정을 농단하고 적을 어버이로 여기고 있다. 일본에 크게 차관을 일으킨 매국노이며 동포에게 가혹했다. 계속 전투를 일으켜 일본군의 훈련을 도와 적군을 이롭게 했으며 다른 나라 사람들을 불러오고 다른 나라 돈을 쓰고 다른 나라 물자를 들여왔다. 이것은 우리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신황 자손의 맥을 끊는 것이다. 적국에 충성하는 것은 우리 민국에 반역 행위다! |
우페이푸 등은 머리 땋고 글을 배울 무렵부터 대의를 말해 왔다. 우리는 군사를 일으켜 몸을 나라에 바치려 한다. 맹세코 장방창, 석경당, 유예, 오삼계와 같은 무리들과는 한 하늘 아래에 있을 수 없다. 적이 살면 내가 죽고 적이 죽으면 내가 산다. |
금일의 전투는 적을 토벌하여 나라를 구하는 전투며 중국 민족을 위한 전투다. |
7월 9일 장쭤린 역시 자신이 산해관을 넘어 직계군을 도울 이유에 대해 <장쭤린의 파병 입관>, <돤치루이는 쉬수정을 비호하지 말 것>, <장쭤린의 거병>, <돤치루이의 음모를 폭로함> 등의 전보를 보내 선전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쭤린은 백성을 보호하고 노선을 지키고 정의의 군대를 구원해야 한다. 지금 실제의 상황이 이러므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의분에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우리 군이 파병하여 입관하므로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한다. |
7월 10일에도 다시 입장을 발표했다.
쭤린은 노심초사하여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시대에 역행하는 무리들이 있어 나라가 걱정된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공적이다. 친히 부대를 이끌고 나라의 화근을 제거하여 장애물을 없애고 우리 민족을 위난에서 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대총통 앞에 나아가 죄를 청하고 독판 앞에 나아가 만천하에 사죄하리라. |
장쭤린은 7월 12일 길림, 흑룡강의 독군들, 봉천군 총사령관 장징후이와 우쥔성 등을 불러 관내출병과 직계와의 동맹을 결정했고 장쭤샹의 27사단과 장징후이의 28사단에서 1개 여단을 차출하여 경봉철로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입관하기로 결정하고 다시 통전했다.
봉천성의 정보에 의하면 베이징에서 요보영 등 13명을 동북으로 보냈는데, 이들의 친필 자술서에 보면 증운패에게 정국군 제3군을 맡게 하고 대양 12만원을 주어 동북으로 와 마적 등을 모집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산속이나 중동 노선 일대에서 소란을 피워 봉군으로 하여금 안의 일에 신경 쓰느라 쉴 틈이 없게 하여 봉천 병력을 견제하려 했다고 한다. 이미 환계는 간특하게도 동성을 유린하였다. 이것이 내가 출병하려는 이유다. (...) 쭤린의 이번 출사는 민국을 위해 간당을 제거하여 수도의 자유를 회복하고 국가 원수의 신변 자유를 회복하고 도탄에 빠진 근기 지역 수백만 인민들을 구하고자 함이다. 만일 국난을 당하여 악의 무리를 제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맹세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
7월 13일, 장쭤린은 총동원령을 내려 7만의 병력을 이끌고 산해관을 통과했다.
돤치루이는 7월 10일, 총공격 명령을 하달, 7월 14일 환계군이 경한철로 연선을 따라서 진격하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안직전쟁이 시작되었다. 처음 이틀 동안 환계군은 서로의 경한철로 연선을 따라 직계의 방아선을 돌파하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직계는 주요 요충지를 잇달아 상실하고 후퇴했다. 7월 15일 동로의 양촌에서도 환계군이 승리하여 직계군이 후퇴했다. 하지만 7월 16일 봉천군대가 본격적으로 가담하며 전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3.5. 환계군의 붕괴
동로에서 봉천군의 개입으로 환계군 동로군은 밀리기 시작했고 7월 17일 란방에서 동로군을 지휘하던 쉬수정은 지휘를 팽개치고 베이징으로 도주했고 변방군은 궤멸당했다. 환계가 우수하던 서로 역시 전황이 뒤집혔다. 7월 17일 우페이푸가 지휘하는 직군이 송림점의 변방군 전선 사령부를 습격, 환군 1사단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환군 1로군 15사단이 싸우지도 않고 투항하고 1사단 1여장이 전사하고 2여장이 도주하여 우페이푸는 손쉽게 2로군 전체를 포위할 수 있었다. 결국 서로군 총사령관 취퉁펑이 포로로 잡혔다. 돤즈구이는 베이징으로 달아나 환군의 서로군 3개 사단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29여단장 장국용과 30여단장 제보선이 병사를 이끌고 우페이푸에게 투항했다.7월 18일 바오딩의 차오쿤의 관저에서 취퉁펑 등 환계 고급 장령들이 차오쿤에게 군도를 풀어 바치는 헌도 의식을 하면서 항복을 선언했다.
"저희는 오늘 경략사께 투항하기를 원하며 특별히 장군도를 헌상합니다. 다시는 귀 군대를 적으로 삼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차오쿤은 칼을 받았다가 도로 돌려주었다.
"본인은 오늘 귀 사령의 투항을 접수한다. 귀 사령의 작전은 용감하여 심히 탄복했다. 장군도를 반환하니 다시 휴대하기를 바란다. 본인은 포로 우대 조약에 따라 귀 사령을 최대한 예우하겠다."
차오쿤이 취퉁펑 등의 항복을 접수했다는 내용이 전선에 있는 각군에 타전되었고 환계군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직례, 하남, 섬서, 감숙, 안휘 지역에서 환군이 잇달아 직군에게 투항하여 직군으로 재편되었고 열하, 직례, 차하얼에서도 봉군도 환군을 흡수하였다. 7월 18일, 전세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돤치루이는 쉬스창에게 정전명령을 요청하고 쉬스창이 정전령을 발표하여 각로의 장령에게 진공을 멈추고 자신의 진지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7월 19일 돤치루이는 정국군 해체와 하야를 통전했다. 쉬스창은 돤치루이의 사직서를 비준하던 중 좌우를 돌아보며 웃었다.
"오늘과 같은 결과를 일찍 알았다면 애당초 그렇게 하지 않았을텐데."
7월 23일, 봉군과 직군이 베이징에 입성했고 돤치루이는 직계와 봉계가 내민 4가지 가혹한 조건을 수용했다.
- 1. 쉬수정을 징계처분한다.
- 2. 변방군은 해산한다.
- 3. 안복부를 해산한다.
- 4. 신국회를 해산한다.
4. 결과
차오쿤과 우페이푸에게 내려진 징계 조치가 취소되었으며 진윈펑 내각이 재출범, 직계와 봉계가 천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쉬스창은 환계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처분을 내리진 않았고 장쭤린도 동의했다. 직계는 반발하며 주모자의 재산을 조사하고 안복계를 숙청하며 돤치루이를 탕산에 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 29일 쉬수정, 증육증, 돤즈구이, 정사원, 주심, 왕질융, 양홍지, 요진, 이사호, 요국정 등에 대한 징계와 체포령이 하달되었고 8월 4일 안복구락부가 해체되었으나 정작 돤치루이는 처벌을 면했다. 돤치루이를 처벌하라는 전문이 전국에서 쏟아졌으나 쉬스창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환계는 이 전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어 상해호군사 허펑린, 복건의 리허우지, 절강독군 루융샹을 제외하곤 전멸하였으며 호남의 장징야오와 호북의 우광신이 거느리던 패잔병들은 지반을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지역군벌에게 흡수되거나 토비가 되는 결말을 맞이했다. 이들 중 손미요, 손미주 형제가 이끌던 부대는 1923년 임성 사건을 일으킨다.탕위린이 지휘하는 봉천군은 군사연습을 구실로 베이징 남원의 환군 주둔지를 장악, 동직문 안의 쉬수정의 부대 창고와 서원의 추작화의 포병대, 장빈의 무선 통신 부대, 범포강의 보병 부대 등을 접수했고 전투기 12대와 기차 100량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장비와 탄약을 차지했다. 장쭤린은 전리품들 대다수를 봉천에 보내고 차오쿤에게는 공군 탐조등 2개를 생색내기로 주었다. 화난 차오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쭤린 이 자식, 정말로 마적 출신이군! 아직도 챙기지 못한 것이 많은 모양이니 이 탐조등 두개도 도로 갖다 주어라!"
결국 이번에는 직계와 봉계의 충돌이 이어졌고 1922년 1차 직봉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근현대사 2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13권 중국 근대편, 김영사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直皖戰爭과 奉天軍閥의 關內進出, 송한용, 중국사연구 28권 28호, 중국사학회
- 民國初 地域(小)軍閥의 운명 : 河南 趙倜·馮玉祥政權(1914~1922年)을 중심으로, 손승회, 중국근현대사연구 19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中國의 軍閥政治 硏究(1916-1928), 최관장, 중국연구 20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단체/국가
6.3. 사건
- 홍헌제제(1915.12.12)
- 호국전쟁(1915.12.25~1916.7.14)
- 부원지쟁(1916~1917)
- 장훈복벽(1917.7.1~1917.7.12)
- 1차 호법운동(1917.7.17~1918.5.21)
- 호법전쟁(1917.9.19~1918.11.22)
- 외몽골 출병(1919.11.7)
- 하남독군 교체 파동(1920.2.23)
- 2차 호법운동(1920.11.28~1922.8.9)
- 1차 직봉전쟁(1922.4)
- 영풍함 사건(1922.6.16)
- 임성 사건(1923.5.6)
- 회선 사건(1923.10)
- 강절전쟁(1924.9)
- 2차 직봉전쟁(1924.9~1924.11)
- 북경정변(1924.10)
- 핍궁사건(1924.11)
- 제노전쟁(1924.12)
- 선후회의(19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