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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산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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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3.1. 재병론의 대두와 장제스의 북상3.2. 군벌들의 반응3.3. 탕산회의3.4. 군사선후의견서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28년 7월 6일부터 7월 12일까지 베이징 인근 탕산에서 개최된 국민혁명군 최고 지도자들의 회의. 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등이 참여했으며 편견회의의 개최가 결정되었다. 장쉐량봉천군벌도 이 회의를 통해 국민정부에 대한 합류 의사를 타진하여 동북역치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2. 배경

1928년,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국민혁명군장쭤린북양군벌 연합을 격파하고 1928년 6월 8일 베이징을 점령했다. 장쭤린은 봉천으로 퇴각하여 후일을 도모하다가 고모토 다이사쿠를 비롯한 관동군 장교들의 음모로 황고둔 사건을 맞이하여 기차 째로 폭살당했다. 봉천군벌의 수장 자리는 장쭤린의 젊은 아들인 장쉐량이 승계했고 장쉐량은 더 이상 국민정부를 상대할 수 없음을 알고 남방에 대해 화친의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한편 베이징의 함락으로 북벌이 거의 완수되자 장제스는 이제 통일된 중국을 정리하기 위한 군사선후회의를 제안하며 각 집단군의 영수들을 베이징으로 초청하였다.

3. 전개

3.1. 재병론의 대두와 장제스의 북상

1928년 6월 20일 상하이에서 전국경제회의가 개최되었으며 7월 1일 난징에서 전국재정회의가 열렸다. 두 회의 모두 재정부장 쑹쯔원의 주도로 개최되었는데 경제회의는 전국 금융계의 중요인물과 군정 각 중요기관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재정회의는 각성과 각 집단군 재정책임자들이 참석하였다. 6월 27일에 개최된 전국경제회의 2차 회의에 참석한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경리처장 유기문(劉紀文)이 <재병건의안>을 제출하였고 7월 1일의 전국재정회의에는 장제스의 명의로 <재병안>이 제출되었다.

재병건의안은 군대총수가 84개군 휘하 272개 사단, 18개 독립여단, 21개 독립단의 규모로 1년에 5억 4600만에 달하는데 이는 1년 총수입이 5억 밖에 되지 않는 중화민국의 입장에서 말도 안되는 부담이므로[1] 군대총수를 50개 사단으로, 해군 1만명 규모로 감축하여 군사지출을 임시비와 군사교육비를 합쳐 1억 9200만원 이내로 제한하자고 주장하였다. 또 유기문은 자신의 재병건의안이 장제스의 기본계획과 일치하는 것이며 장차 베이핑에서 개최될 군사회의를 거쳐 실행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재병안은 재병건의안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다만 단번에 감축하지 말고 1단계로 80개 사단, 해군 1만 4천명으로 감축한 다음에 2단계로 80개 사단에 해군 1만명, 3단계에 50개 사단에 해군 1만명 규모로 점진적으로 감축하자는 구체적이면서도 점진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퇴직하는 장교와 사병들을 위해 공채를 발행해 편견경비를 마련하자고 했다.

이후 장제스는 자신이 제안한 군사선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6월 26일 난징을 출발, 6월 27일에 우한에 도착하여 리쭝런이 베푸는 성대한 연회에 참석한 후 리쭝런과 회담하였고[2] 7월 1일 정저우에 도착하여 펑위샹과 회담하여 북상을 독려했다. 그리고 7월 2일 오후에 베이핑[3]에 도착했다. 베이핑의 명사들은 장제스를 환영하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차역에서 기다렸는데 장제스는 그들에게 모자를 흔들며 간단히 인사했을 뿐 기념사진을 촬영하자는 제안은 거절하면서 수도 난징의 권위를 과시했다. 이날 장쉐량장제스, 펑위샹, 옌시산, 탄옌카이, 리례쥔 앞으로 화평통전을 보내어 화평 의사를 타진하는 한편 연주에 주둔한 봉천군을 철수시킬 것을 지시했다. 7월 4일, 장제스는 쑹메이링과 함께 벽운사에 안치된 쑨원의 영구를 배알했다.[4]

3.2. 군벌들의 반응

장제스의 재병론에 대해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등은 표면적으로는 찬성을 표하고 있었지만 여러 요인으로 인해 내면적으로 큰 불만과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컨대 2집단군 총사령관 펑위샹은 북벌군이 베이징과 톈진을 점령한 이후 장제스가 경진지역의 군사 재정권을 3집단군 총사령관 옌시산에게 일임하고 자신의 2집단군을 배제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장 베이징 함락의 순간에 펑위샹 휘하의 한푸쥐가 이끄는 부대가 옌시산과 함께 베이징 교외에 도착하였으나 펑위샹은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한푸쥐의 베이징 입성을 금지해야 했다. 또한 펑위샹은 개인적으로도 재병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7월 6일, 병환을 이유로 베이핑에 가는 것을 미루고 있던 펑위샹은 바오딩에서 시국통전을 발표하여 재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펑위샹은 재병을 실시하기 전에 각 집단군 총사령관, 각 군단 총지휘관 직위를 철폐하고 군사위원회에서 각군을 접수, 각 군사지도자들이 수도에 상주하며 중앙의 직무를 맡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을 제시한 후 편견의 기준으로 기율, 훈련, 전공이 있는 부대는 개편하고 그렇지 않은 부대는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당치국이란 구호는 당원이 나라를 다스리는 뜻이 아니라고 밝히며 장제스의 관직 독점에 대해 비판했다. 이날 늦게 펑위샹이 베이핑에 도착했다.

옌시산은 경진지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보장받는 등 국민혁명의 수혜자였기 때문에 표면상으로는 중앙에 복종하고 있었지만 베이핑 정치분회 주석에 자신이 요청한 장작빈이 아니라 국민당 중앙의 요인인 장쥐가 임명되자 말로는 그의 북상을 독촉하면서도 평진위수사령관 직에 대한 하야 의사를 드러내며 장제스의 베이핑 도착에 맞추어 병가를 내는 등 장제스에 대한 불만을 은근히 드러냈다. 옌시산의 눈치를 본 장쥐는 베이핑 정치분회 주석에 취임하지 않고 북방인민의 구제에만 힘쓰겠다고 북상하여 11월 2일에 베이핑에 도착했으나 옌시산이 여러차례 요청하자 11월 9일 베이핑 정치분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4집단군 총사령관 리쭝런도 쑨원의 병공 정책에 따라 재병을 실시할 것과 봉천군벌에 대한 평화적 방법에 의한 통일 및 국민회의 조속한 개최를 주장하며 장제스가 재병논의를 주도하는 것에 대해 견제하였다.

3.3. 탕산회의

1928년 7월 6일, 쑨원의 시신이 안치된 베이징 교외의 서산 벽운사에 장제스, 펑위샹, 리쭝런, 옌시산이 모였다. 이들은 쑨원의 영전에서 고제를 치르며 북벌 완성을 고했다. 추도사를 낭독한 후 장제스는 쑨원의 관에 엎드려 통곡했고 펑위샹이 직접 그를 부축하여 자리를 뜨게 했다. 훗날 리쭝런은 미국에서 집필한 회고록에서 장제스의 눈물을 과장된 연기라고 까면서도 자기도 거기서 울었어야 했는데 선수를 뺏겼다고 아쉬워하였다. 조제 직후 장제스, 옌시산, 펑위샹 간의 3자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어 7월 7일 아침에 장제스, 펑위샹, 엔시산이 다시 회의를 가졌으며 7월 8일 오후에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3인이 회담을 가지며 재병에 대해 논의했다. 장제스는 군대 총수를 50개 사단, 해군 1만 5천명을 합쳐 도합 80만 명의 규모로 축소한 후 전국을 12개 군구로 나누어 각 집단군별로 각각 관리, 처리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펑위샹은 각 집단군의 군대수에 비례하여 일률적으로 감축하자는 장제스의 주장에 강하게 반발하며 각 부대의 질에 따라 편견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북에 관해서는 봉천군벌과 원한이 많았던 펑위샹은 단호한 토벌을 주장했고 리쭝런과 옌시산은 정치적 타협을 주장, 장제스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5]

의견 대립이 심하여 논의의 진척이 없자 장제스는 베이징 교외의 탕산으로 회의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7월 8일에서 7월 11일 사이, 봉천군벌의 대표 왕수한, 형사렴 등 4인이 장제스의 대표 하성준과 장제스, 펑위샹, 리쭝런, 옌시산 4인에게 비공식적으로 동삼성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며 봉천은 삼민주의를 추종하지만 일본 때문에 단 시일 내에 국민정부에 복종하긴 어려우며 대신 산해관 안의 봉군을 근시일 내로 철수시키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7월 11일 정오, 4개 집단군의 영수들을 제외하고도 바이충시, 주페이더, 우징헝 등 군정의 요인들이 탕산에 모여 회의를 개최, 12일 오후 6시까지 장시간에 걸쳐 회담을 진행했다. 7월 13일 아침, 장제스가 <재병안>이라고 불리는 회의 결과를 발표했는데 이후 언론에서는 모두 <군사정리안>이라고 불러 현재까지도 군사정리안으로 불리고 있다. 이 군사정리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제스는 이 군사정리안의 내용을 회의가 끝난 후인 7월 13일, 다이지타오와 함께 베이핑에 도착한 리지선에게 사전에 전보로 알려주면서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 장제스가 쿵샹시를 펑위샹에게, 하성준을 옌시산에게 파견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장제스의 군사정리안은 탕산회의 이전에 이미 각 집단군의 총사령관들에게 회람되어 동의를 구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군사정리안은 편견위원회를 설치하여 군대를 줄이겠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합의를 하지 않았다. 군대를 어떻게 줄일 것인지, 군통수권을 어떻게 규정하고 중앙군사조직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이는 군령권과 군정권을 분리하자는 각군 영수들의 주장과 군령권과 군정권을 통합해야 한다는 장제스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려 끝내 결론이 나지 못한 탓이었다.

군사정리안 외에는 모든 군은 중앙의 지휘를 받을 것이며 동북의 문제는 중앙의 명령에 따라 해결한다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장쉐량에게 산해관 안에 잔류한 직로연군과 봉천군에 대해서 가차없이 공격하여 소멸시키겠다는 입장을 통보하며 장쉐량에게 중앙에 복종할 것을 종용하였다.

3.4. 군사선후의견서

한편 장제스는 군사정리안을 발표하던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개인적 의견이라는 전제를 달고 <군사선후의견서>라는 것을 따로 밝혔다. 그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외에는 재병회의를 오중전회와 동시에 개최하도록 하겠으며 현행의 군사위원회를 재병과 군정의 최고기구로 삼고, 군구제를 채택하여 현행의 집단군제 구조를 개편하겠다는 등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많이 들어있었다. 장제스가 군사선후의견서라는 별도의 문건을 발표했다는 것은 그만큼 군사정리안에 대한 장제스의 불만이 많았으며 재병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제기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증거라 하겠다. 장제스는 차후 다시 회의를 열것인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회의를 한 적이 없고 '상의'했을 뿐이라면서 탕산회의에 대해 큰 불만을 드러냈다.

4. 결과

이후 장제스는 7월 21일 외교 사절단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 이후 7월 25일 영국 대사 마일스 램프슨 경의 초청으로 영국 대사관을 방문하여 저녁만찬을 대접받은 후 난징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와 배상의 뜻을 밝히는 것으로 베이핑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장제스는 연회가 끝난 바로 그날 밤 오중전회에 참석하기 위해 장갑열차를 타고 베이핑을 떠나 정저우에서 잠시 장제스와 회담한 이후 8월 1일 난징으로 돌아왔다. 이어 펑위샹, 리쭝런, 리지선 등의 각군의 요인들도 난징에 도착하여 옌시산을 제외한 모든 영수들이 난징에 모이게 되었다. 옌시산은 리쭝런 등의 독촉을 받고 펑위샹, 리쭝런, 리지선과 함께 난징으로 가던 중 건강상의 이유를 대고 타이위안에 돌아갔다.

탕산회의는 중화민국의 실력자들이 재병이라는 큰 목표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으나 각 집단군 사이의 갈등과 방법론의 차이가 첨예하여 편견을 실시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국민혁명

6.2. 반장전쟁



[1] 해당 수치는 군사위원회 조사에 따른 수치.[2] 이때 리쭝런은 자신의 주요 장교들을 연회에 일부로 불참시킴으로 장제스를 망신주려고 했다. 훗날 리쭝런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연회를 좋아하지 않아서 안 간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아무도 안 믿는다.[3] 6월 20일에 베이징에서 베이핑으로 개명.[4] 이때 장쉐량이 장제스와 만나 같이 차를 마셨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공식문건에 따르면 장쉐량은 6월 17일 사병으로 변장하여 봉천으로 돌아간 후였다.[5] 1928년 7월 9일 요시자와 켄키치 공사의 보고.[6] 강소-안휘구, 복건-절강구, 양광구, 양호구, 사천-서강구, 운남-귀주구, 섬서-감숙구, 산동-하남구, 베이핑-하북구, 열하-차하얼-수원구, 동삼성구, 신강-청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