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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1 17:12:32

영왕운동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초기의 영왕운동3.2. 장제스의 반응3.3. 천도논쟁과 영왕운동3.4. 왕징웨이의 귀국3.5. 왕징웨이와 우한의 합작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 문서

1. 개요

1926~1927년 중국 국민당 내부에서 중산함 사건으로 실각하여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던 전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를 다시 중국으로 불러올 것을 요구한 운동이다. 중산함 사건 이후로 국민당의 최고 실력자로 자리잡은 장제스를 견제하기 위함이 제일 큰 목적이었다.

2. 배경

1925년 7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가 출범한 후 말년의 쑨원의 비서로 활동했던 왕징웨이미하일 보로딘을 비롯한 소련 고문들과 쉬충즈, 장제스 등 군부의 지지를 얻어 국민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왕징웨이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빌미로 외교부장 후한민, 군정부장 쉬충즈 등 위협적인 실력자들을 제거하였고 이 과정에서 왕징웨이에게 군사력을 제공한 장제스는 광저우 위수사령관 겸 1군 사령관이 되어 국민정부 최고의 군사실력자가 되어 장왕합작의 체제를 열게 되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탄옌카이, 주페이더, 리지선 등 다른 군사 실력자들과 연대하며 군사적 권위를 강화하려 하고 여기에 장제스의 북벌 주장을 중국 공산당이 비현실적이라고 반대하면서 장제스와 왕징웨이 사이에 균열이 가게 되었다. 이러한 균열은 1926년 3월 20일 중산함 사건으로 폭발했고 주석으로서의 권위를 실추당한 왕징웨이는 공직에서 하야하여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다. 이후 국민당 상무위원회 주석 겸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당정대권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했다.

이 와중에 북벌 시작 직전인 6월부터 장제스의 권위를 경계하고 있던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를 중심으로 외유를 떠난 왕징웨이를 복직시켜 장제스를 견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영왕운동이다. 그 목적이 장제스의 권력에 대한 견제에 있으니만큼 영왕운동은 자연스레 대표적인 반당파의 주장이요, 행동이 되게 되었다.

3. 전개

3.1. 초기의 영왕운동

최초로 왕징웨이 복직 주장이 나온 것은 1926년 5월 25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회의에서였다. 이때 국민당 좌파 지도자 팽택민이 왕징웨이 위문과 조기 복직을 제안했고 회의 결과 비서처에서 상무위원회 명의의 편지를 써서 보내기로 했다. 이어 1926년 6월 18일 국민당 강소성 당부가 왕징웨이 귀국을 촉구하며 주지북벌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고 6월 29일에도 왕징웨이 복구를 요청하는 2건의 전문이 접수되었다. 7월에도 여러 지방당부가 차례로 왕징웨이 복직을 청했다. 이때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의 요인들을 우파, 중파, 좌파로 분류하여 좌파와 연합하고 중파를 이용하여 우파를 공격한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왕징웨이는 대표적인 좌파의 인물로 분류되고 있었고 왕징웨이 복직에서 타격을 입을 장제스, 다이지타오, 쑨커 등은 우파나 중파로 분류되고 있었으므로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영왕운동이란 우파, 중파 견제에 매우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따라서 6월부터 중국 공산당은 각 지방 당부를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영왕을 청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왕징웨이는 7월 하순, "정무와 군무는 사임하고 당무에만 전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공직 복귀 의사를 드러냈다.

1926년 8월 10일,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47차 회의에서 허샹닝의 발의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영왕운동에 대해 논하기로 했다. 회의 결과 각지에서 접수한 전문들을 왕징웨이가 볼 수 있도록 전달하자는 원론적인 결론이 도출되었는데 이는 중앙이 영왕운동을 승인하겠다는 뜻에 다름 아니었다.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장런제는 즉각 장제스에게 47차 회의에 제출된 왕징웨이의 복직 의사가 담긴 편지를 보내면서 영왕운동은 곧 도장운동이라고 보고했다. 장런제는 8월 28일의 52차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왕징웨이가 중앙에 답장을 보내 정치, 군사 직무를 사퇴하겠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장제스와 상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왕징웨이의 편지를 장제스에게 복사해서 보냈으니 장제스의 답장이 오는대로 논의하겠다고 보고했다.

초기에 장제스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진 않았으나 "영왕이 도장 주장보다 나쁘다."라고 발언하면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그리고 9월 우창에서 천궁보를 만나 "당정군에 두명의 지도자가 있을 순 없으니 만일 왕징웨이가 귀국한다면 모든 것을 사직하고 떠날 것"이라고 말하며 강경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3.2. 장제스의 반응

1926년 9월, 장제스는 자신의 대표인 후궁몐을 상하이의 천두슈에게 보내 "왕징웨이가 귀국한다면 소군벌들에게 이용당하게 되고 소란만 일으켜 국민혁명의 세력을 분사시킬 것"이라고 반대의 의사를 전달하며 중국 공산당으로 하여금 영왕에 찬성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천두슈는 "왕징웨이의 복직으로 국민정부의 역량이 강화될 것이고 새로 가담해오는 소군벌들과 장제스 간의 충돌을 왕징웨이가 완화해줄 수 있을 것이며 광동의 부패정치를 청산하는 데에도 왕징웨이가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 영왕이 왕장합작이지 영왕도장이 아니며 오히려 장제스의 군사적 지도권을 유지시키고 확대시키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주페이더를 비롯하여 왕징웨이와 친분이 없던 군벌들까지 왕징웨이 복귀를 찬성할 것을 장제스에게 요구하게 되자 놀란 장제스는 영왕에 찬성하는 것이 정치적인 이득이 될 것이라 판단, 9월 29일 왕징웨이의 편지에 대한 답장의 형식으로 자신이 왕징웨이의 귀국에 대해 찬성한다는 의사를 장런제에게 표명하는 한편 10월 3일 탄옌카이, 장런제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의 왕징웨이 귀국 환영 의사를 당중앙과 왕징웨이에게 전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3.3. 천도논쟁과 영왕운동

1926년 9월 8일, 장런제가 북벌 진전에 따른 시국방침을 논의하기 위해 중앙집행위원과 각성시당부 집행위원의 연석회의를 제의하면서 1926년 10월 15일부터 28일까지 광저우에서 중앙집행위원-각성시당부 집행위원 연석회의가 개최되어 새롭게 국민정부의 지배 영역에 편입된 호남, 호북의 지배력 강화를 논하게 되었다. 이 10월 연석회의는 주로 장제스가 주장하고 있던 우한 천도를 논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였으나 우한 천도론이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의 반대로 부결된 이후 당시 국민당 내부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던 영왕운동이 자연스레 회의의 화제로 대두했다. 이 10월 연석회의는 10월 16일, 국민정부를 일단 광저우에 두기로 결의하였고 10월 17일 장런제가 장제스가 왕징웨이 복직을 청한 편지를 공개하여 왕징웨히 휴가 취소를 결의했다.

10월 18일에는 구멍위, 우수덕 두 사람에게 왕징웨이에게 보내는 복직 요청 전보의 초안을 쓰게 했고 10월 20일 그간 왕징웨이 복직을 요청하던 각급 당부에 연석회의에서 왕징웨이가 귀국하여 장제스와 함께 당무와 정치를 책임져야 한다는 결의를 내놓았다고 알렸다. 장제스가 영왕운동에 대해 기존의 노골적인 반발에서 일단 영왕운동을 수용하기로 입장을 선회한 상태라 영왕에 대한 합의는 일단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나 천도논쟁을 두고 장제스와 국민당 좌파의 갈등은 계속 깊어지고 있었다.

3.4. 왕징웨이의 귀국

"왕징웨이 동지와 중정의 관계는 수족과 같아서, 우리는 가장 친애하는 동지 사이라고 할 수 있다. (...) (왕징웨이의 복직의) 유일한 장애는 현재 많은 사람들이 고의로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 그가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 만약에 왕징웨이 동지를 구실로 나 중정을 배척하려하거나, 나 중정을 타도하는 무기로 삼으려 한다면, 이는 결코 왕징웨이 동지의 복귀에 좋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두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여 우리들 국민당 영수가 단결하지 못하게 이용하는데 불과하다."
2월 21일 연설, 장제스의 영왕운동에 대한 입장.

한편 중산함 사건 이후 영국령 홍콩으로 떠났던 왕징웨이는 1926년 5월 11일 홍콩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고 6월 중순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 교외에서 신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8월 말 왕징웨이가 중앙집행위원회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당시 왕징웨이는 당뇨병, 간염, 만성위장병을 앓아 병세가 심각하였으며 당뇨병과 간염이 호전되면 바로 맹장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배경한 교수는 왕징웨이가 외유를 떠난 점이 어디까지나 장제스의 득세로 인한 정치적 이유인 점, 왕징웨이가 5월 말에 당무에만 전념하겠다며 복직 의사를 천명했던 점을 지적하며 왕징웨이의 병세가 귀국을 하지 않은 결정적 원인은 아니며 왕징웨이의 칭병은 다분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고 분석하고 있다.

여하튼 왕징웨이는 10월 연석회의에서 귀국이 합의되어 귀국 독촉 전보를 받았음에도 신병치료 때문에 파리를 떠나지 못하다가 11월 하순이 되어서야 파리를 떠났는데 베를린에 도착하였을 때 다시 병이 도져 파리로 돌아갔다. 소련에서는 1927년 5월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장제스가 왕징웨이에게 전보를 보내 귀국하지 말라고 요구하였고 이 전보를 받은 왕징웨이가 귀국해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련의 주장이 얼마나 신뢰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나 배경한 교수는 장제스의 비밀전보설이 어쨌거나 병을 제외하면 왕징웨이의 귀국 연기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사이 중국의 정세는 급변하여 좌파와 공산당이 우한 천도를 주장하여 11월 26일 우한 천도를 결정하고 그간 우한 천도를 주장하던 장제스가 입장을 선회하여 난창 천도를 주장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미 미하일 보로딘 등은 공개석상에서 장제스를 타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등 우한과 장제스의 관계는 최악의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우한 측은 장제스를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혁명을 배반하고 있는 군벌이요 독재자이며 그가 영왕운동에도 반대하고 있다고 비난했는데 장제스는 이에 맞서 자신이 왕징웨이 귀국에 적극 찬성하고 있다고 주장, 2월 말에 허샹닝을 시켜 왕징웨이에게 귀국 독촉 전보를 보냈다. 문제의 전보는 천밍수를 거쳐, 선전부장 구멍위가 왕징웨이에게 발송했다.

이어 2월 21일 우한의 확대연석회의가 왕징웨이에게 귀국 독촉 전보를 보내기로 결의, 왕징웨이에게 3월 중순 개최가 예정된 국민당 2전 3중전회의 참석해달라는 명목으로 귀국을 촉구했다. 이쯤되자 왕징웨이는 더 이상 귀국을 미룰 수가 없어 2월 말에 파리를 출발, 독일, 폴란드를 거쳐 3월 8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왕징웨이는 모스크바에서 수일간 체류할 계획이었으나 우한에 수립된 연석회의와 장제스의 귀국 독촉 전보를 받게 되어 체류 5일만인 3월 12일 모스크바를 떠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왕징웨이가 중국에 돌아온 것은 4월 1일 심야의 일로, 배를 타고 상하이의 오송구에 도착하였다.

왕징웨이가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쑹쯔원이 마중을 나왔고 왕징웨이는 중앙의 지시가 있냐고 물었으나 쑹쯔원이 별도의 지시가 없었다고 대답하자 상하이에 체류하게 되었다. 이후 다수의 정황을 볼때 왕징웨이의 귀국은 명백히 우한 중앙의 계획과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3.5. 왕징웨이와 우한의 합작

4월 1일 저녁,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총사령부를 방문하여 오랜만에 장제스와 회담을 가졌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에게 우한이 자신을 면직시키려 하며 상하이에서 규찰대가 조계지에 난입하여 국민혁명이 일대 위기에 처해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보로딘의 추방과 분공의 실시를 요구하면서 만약에 왕징웨이가 이를 수용한다면 자신은 정치에 손을 떼고 군사에만 전념할 테니 정무와 당무는 모두 왕징웨이가 맡아달라고 부탁, 이상의 요구를 4월 3일에 통전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입장표명을 유보하며 자신은 국공합작의 지속을 원하고 양측의 대립을 조정하고 싶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리고 장제스의 4월 3일자 <군무 전념 통전>에 대해서도 자신은 병이 다 낫지 않았으니 일방 당원의 자격으로 일에 종사할 뿐이라고 하며 장제스의 제안에 확답을 주지 않았다. 이어 4월 5일 왕징웨이는 천두슈와의 연합성명을 통해 국공합작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다시금 표명, 장제스의 제안에 대한 거절을 드러냈다. 왕징웨이-천두슈 연합성명은 우징헝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의 반발을 샀고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왕징웨이는 4월 6일 밤 오송에서 배를 타고 우한으로 떠났다.

4. 결과

왕징웨이가 우한으로 떠난 직후, 장제스는 바이충시를 상하이 계엄사령관에 임명, 난징에 주둔한 청첸의 병력을 무장해제시키고 이어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5. 참고문헌

6.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