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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18:30:04

당계전쟁

당계전쟁
唐桂戰爭
파일:당계전쟁.jpg
진격하는 국민혁명군
시기 1927년 10월 20일 ~ 1928년 1월 25일
장소 중화민국 국민정부 호남, 호북성
교전세력 파일:대만 국기.svg 우한 정치분회 파일:대만 국기.svg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svg 탕성즈
파일:대만 국기.svg 왕징웨이[1]
파일:대만 국기.svg 허젠
파일:대만 국기.svg 천궁보
파일:대만 국기.svg 구멍위
파일:대만 국기.svg 이품선
파일:대만 국기.svg 유흥
파일:대만 국기.svg 리쭝런
파일:대만 국기.svg 청첸
파일:대만 국기.svg 바이충시
파일:대만 국기.svg 펑위샹
파일:대만 국기.svg 리지선
파일:대만 국기.svg 주페이더
파일:대만 국기.svg 리례쥔
파일:대만 국기.svg 후한민
파일:대만 국기.svg 쑨커
결과 중앙특별위원회의 승리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탕성즈의 동진3.2. 왕징웨이의 조정3.3. 토벌령 발표3.4. 탕성즈의 몰락
4. 결말5. 참고문헌
5.1. 저서5.2. 논문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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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7년 10월 20일부터 1928년 1월 25일까지 이어진 상계군벌 탕성즈와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사이의 전쟁. 토벌의 주력을 리쭝런, 바이충시 등의 계계군벌이 맡았기 때문에 탕성즈계계군벌 사이의 전쟁이라 하여 당계전쟁으로 부른다.

2. 배경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중화민국 국민정부가 난징과 우한으로 분열된 이후, 우한 국민정부에 속한 탕성즈, 장파쿠이의 동정과 중화민국 북양정부 장쭝창의 남하에 동시에 노출되어 큰 군사적 위기에 처하게 된 난징 국민정부의 장제스리쭝런바이충시를 비롯한 계계군벌의 압력 속에서 8월 12일에 공직에서 사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명목으로 외유를 떠났다. 우한 국민정부에서 목표로 삼던 장제스가 사라지자 우한과 난징이 더 이상 분열될 이유는 없어 보였고 9월 초부터 탄옌카이 등이 난징과 접촉하여 9월 15일 난징과 우한의 위원들이 중앙집행-감찰위원회 임시회의를 소집, 9월 21일 서산회의파까지 망라하여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가 성립, 영한합작이 이루어져 세개로 나누어졌던 중국국민당은 하나로 합쳐졌다.

하지만 당중앙은 합쳐졌지만 시작부터 난황이 있었다. 우선 왕징웨이서산회의파의 맹렬한 비난 속에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명목상의 직위에 불과한 국민정부위원 자리만 부여받자 실망하여 사직을 선언하고 추종자들과 함께 다시 우한으로 떠나버렸고[2] 각 지방의 당부들도 삐딱한 반응을 보였다. 9월 25일 <항주민국일보>는 절강성당부, 강소성당부, 난징특별시당부의 명의로 특위 반대 성명을 내놓았고 광저우 정치분회는 특위가 내린 취소명령을 거부하고 도리어 군사위원회 광저우 분회 증설을 요구하여 10월 11일 끝내 설치했다. 특위의 정치분회 취소 명령에 호응한 곳은 오로지 9월 30일 해산한 절강성 정치분회 뿐이었다. 여기에 각 지방마다 군벌들이 당원들을 추방하며 당무를 보지 못하게 방해했다.

여기에 우한의 탕성즈는 난징으로의 합류를 거부하고 8월 우한 정치위원회 주석단 결의안에 의거, 9월 21일 천궁보, 구멍위왕징웨이 계열의 개조파를 규합하여 우한 정치분회를 발족한 후 "특위는 국민당 당장(黨章)에 전혀 성립의 근거가 없는 불법기관"이라고 비난하며 반 특위 활동을 전개했다. 탕성즈, 구멍위, 천궁보 등이 상무위원으로 추대되어 호북, 호남, 안휘 3개 성을 관할하고 특별위원회와 대립했다. 특별위원회는 우한 정치분회의 취소를 결의했지만 우한 정치분회 역시 다른 정치분회들 처럼 특위의 요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쥐정, 쉬충즈 등 서산파의 일원들이 직접 우한으로 찾아와 왕징웨이와 탕성즈를 설득하려 했으나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3. 전개

3.1. 탕성즈의 동진

국민당의 여러 당파가 합작을 위해 논의하고 있는 사이, 탕성즈는 휘하의 병력들을 유지하기 위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진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9월 6일, 탕성즈의 군대가 무호(蕪湖)를 점령하고 9월 8일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한 안휘성 정부와 안휘성 성당부의 무효를 선언, 250여명의 당원을 난징으로 추방하였고 당원들은 특별위원회에 중앙의 구제를 요청하였다.

한편 사직 선언을 내놓고 잠적했던 왕징웨이는 구강에 머물던 중 탕성즈가 보낸 특사를 만나 군사적 동맹을 얻기 위해 우한으로 이동했다. 왕징웨이와 탕성즈는 의논 끝에 상술한 대로 9월 21일 우한에 정치분회를 설치하고 구멍위, 천궁보, 공경(孔庚), 등수전(鄧壽荃), 그리고 탕성즈 자신을 상무위원으로 추대하여 상무위원회를 구성하고 9월 28일 난징의 특별위원회가 중앙당의 직권을 대행하는 것은 당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으며 비록 당의 합법적인 기관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특위를 기초로 한 정부를 사실상의 정부로 인정할 수는 있으나 특위의 당무와 정치에 관한 결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통전했다.

또한 탕성즈는 공경, 등수전, 왕지(王岐)로 구성된 재정위원회를 조직하여 호남, 호북, 안휘에 대한 재정 확보에 나서는 한편 9월 27일 35군 군장 허젠을 대리주석에 임명하여 안휘성 정부를 발족시키고 35군 주력을 안경에 배치, 합비외 화현으로 병력을 전진배치하였다. 또한 유흥의 36군을 무호로 배치하고 유흥을 강소성 정부주석에 임명하였다. 이는 특별위원회의 권위에 공공연히 도전을 한 것은 물론이요 아예 군사적인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탕성즈의 군벌적 행태에 우한 내부에서조차 불만이 표출되었으나 탕성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난징을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표출했다.

3.2. 왕징웨이의 조정

참다 못한 특위 내부에서 탕성즈를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탕성즈 토벌에 대해서 결정을 하지 못하던 난징 국민정부도 탕성즈 무력토벌 쪽으로 방침을 굳히게 되었다. 이에 왕징웨이가 중재자를 자처하여 자신의 거중조정으로 우한 방면 동지들의 의혹이 모두 해소되었으며 이후 군사상의 합작정신이 완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보를 난징에 보내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자 했다. 이는 자신의 군사적 동맹자인 탕성즈의 무력기반이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교육책이었다.

이에 난징 측에서도 왕징웨이 회유에 나섰다. 난징 국민정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구강에서 왕징웨이와 회담하였으나 성과가 없자 다시 우한까지 찾아가 우한 측 위원들과 탕성즈 회유에 대해 논의했다. 10월 11일, 난징측 대표들과 왕징웨이, 탕성즈, 리지선의 대표들이 장시간 회담하여 왕징웨이의 주장에 따라 난징에서 4중전회를 개최하자고 합의하였다.[3] 이에 대한 보고를 받은 탄옌카이, 리쭝런, 허잉친, 청첸이 모두 동의를 표하고 11월 1일 난징에서 4중전회를 개최하자는 구체적 일정을 발표했다.

하지만 탕성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군사적 확장에 집중하고 있었고 장파쿠이, 주페이더와 접촉하면서 난징을 전복할 음모를 꾸몄다. 이 소식이 난징에 전해지자 난징 국민정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무력 토벌을 결의하게 되었다. 1927년 10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탕성즈를 토벌하기 위한 서정군 편성방침을 하달하였다.

3.3. 토벌령 발표

10월 20일, 난징에서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장계와 쑨커가 탕성즈가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난징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각 방면과 합작을 추진 중이라고 설명하며 무력 토벌을 주장했다. 이에 리쭝런, 리례쥔도 출사를 청했고 회의는 만장일치로 탕성즈 토벌을 결의, 당일 저녁에 국민정부의 명의로 탕성즈 토벌령과 탕성즈의 모든 본직과 겸직을 박탈한다는 명령을 발표했다. 또한 특별위원회는 탕성즈와 그 배후의 왕징웨이를 견제하기 위해 장제스의 복귀가 필요하다는 것에 합의, 장제스 복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토벌령이 발표되자 탕성즈는 왕징웨이와 회합하여 대책을 강구했다. 회의 결과 탕성즈가 군사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왕징웨이가 반 특위 세력과 연대를 위해 우한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우한을 떠난 것은 탕성즈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탕성즈를 옹호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기 전에 어차피 패배할 것이 분명해보이는 탕성즈를 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이미 왕징웨이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합작을 선택한 탕성즈가 도움은 커녕 깽판만 치면서 훼방 놓는 현실에 질색하고 있었고 그를 제어할 자신도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다음날인 10월 21일, 왕징웨이는 서둘러 우한을 떠났다.

탕성즈는 국민정부의 토벌령에 맞서 통전을 발표하여 난징의 특별위원회의 합법성을 부인했으나 주페이더, 리지선, 펑위샹 등이 호응하여 하남, 광동, 강서에서 양호 지역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10월 24일 특별위원회는 탕성즈의 당적을 박탈하고 당내의 모든 직위에서 해직했다. 이날, 상하이에 도착했던 왕징웨이는 자신을 보호해준 탕성즈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의 의미로 난징의 서정을 반대한다는 통전을 발표하고 장제스에게 속히 귀국해 당국의 현안을 논하자는 전보를 보낸 후 장왕합작을 추진하는 리지선의 기반인 광저우로 떠났다. 이는 장파쿠이와 리지선이 왕징웨이에게 광저우에 새로운 중앙당부를 설립하는 일에 대해 논하자는 초청에 응한 것이었다.[4] 왕징웨이를 따라 구멍위, 허샹닝, 진수인, 간나이광, 왕락평 등도 뒤따랐다.

광저우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자신이 광저우에 온 것은 우한과 난징의 합작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표했으나 당계전쟁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대인관계에 불과하다면서 더 이상 탕성즈의 편을 들지 않겠다고 입장을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탕성즈는 왕징웨이는 그저 자신의 군사력만을 이용하려 했던 것 뿐이라면서 극심한 배신감을 토로했다.
"왕징웨이는 단지 내가 장악한 무력을 이용하여 그의 후순(後循)으로 삼고자 했을 뿐이었다."

3.4. 탕성즈의 몰락

탕성즈 토벌 서정군 총지휘에 청첸, 부총지휘에 리쭝런이 임명되면서 난징 국민정부는 본격적으로 탕성즈 토벌에 나섰다. 이에 하남의 펑위샹, 강서의 주페이더, 광동의 리지선이 군사적으로 호응하여 탕성즈를 토벌하기 위해 잇달아 출병했고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된 탕성즈는 더 이상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청첸이 4로군을, 리쭝런이 3로군을 맡아 우한으로 출격하여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들어갔고 탕성즈의 부하들이 앞을 다투어 토벌군에 투항하면서 탕성즈 정권은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11월 11일, 탕성즈는 이품선, 유흥(劉興), 허젠 등의 부대를 모아놓은 다음에 하야를 결정, 11월 12일 새벽에 장익붕, 안훈포(晏勳浦) 등의 측근들을 거느려 일본 기선을 타고 우한을 떠나 일본으로 망명했다. 다음날인 11월 13일 리쭝런이 우한을 점령하였고 1928년 1월 25일 창사마저 점령함으로 탕성즈의 기반은 완전히 증발했다.

11월 22일, 난징에서는 탕성즈 토벌 승리 기념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기념대회가 끝난 후 군중들이 특위에 반대하고 서산회의파를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며 시가 행진에 나서 군경들이 진압하던 중 발포가 벌어져 1명의 군인과 3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하는 소위 난징 참안(11.22 참안)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된 쩌우루, 셰츠, 쥐정 등의 서산회의파의 주요 인사들의 입지는 극히 좁아져 장제스 복귀만 돕게 되었다.[5]

4. 결말

탕성즈가 몰락하면서 양호 지역은 계계군벌이 장악하게 되었다. 1928년 1월, 쑹메이링과 결혼하여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장제스가 다시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국민당의 2차 북벌을 선포하였고 장쭤린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된 이후 뒤를 이은 장쉐량동북역치를 선언하면서 중국은 다시 한번 통일된다.

하지만 호남의 지배를 두고 장제스와 계계군벌이 알력을 벌였고 결국 편견회의와 정치분회 폐지로 불만이 누적된 리쭝런이 1929년 2월 호남성 정부 주석 루디핑을 해임하고 35군 군장 허젠을 임명하는 호남 사건이 발생, 이것이 1차 장계전쟁으로 번져 중국은 다시 반장전쟁이라는 초대형 내전의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

5. 참고문헌

5.1. 저서

5.2. 논문

6. 관련 문서



[1] 그러나 왕징웨이 등은 초반에는 탕성즈의 편이었으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이 전쟁은 가망이 없다 판단하고 우한을 떠나버렸기 때문에 직접 전쟁에 관여하였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2] 여기엔 구멍위천궁보가 특별위원회 참석은 왕징웨이 측의 법통을 말살시키는 결정이라고 반대하며 설득한 것이 주효했다.[3] 원래 기존에는 우한 국민정부가 개최한 3중전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바로 3차 전국대표대회를 열자는 것이 합의사항이었으나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싶었던 왕징웨이는 3중전회의 합법성을 전제로 하는 4중전회 개최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4] 장제스는 이 소식을 일본에서 듣고 11월 1일 "앞으로 당과 나라의 혼란이 더욱 악화될 것이다."라는 짧은 소감을 남겼다.[5] 장제스는 11월 10일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