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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총통 위안스카이 북양군벌 | 국무총리 돤치루이 안휘군벌 | 양호순열사 우페이푸* 직계군벌 | 육해군대원수 장쭤린 봉천군벌 | |
* 대총통 차오쿤이 우페이푸의 상관 겸 같은 직계군벌로서 실권을 행사했지만 영향력은 우페이푸가 더 강했다. | }}}}}}}}} |
<colbgcolor=#de2119> 중화민국 3대 대총통 | ||
한문 | 曹錕 | |
한국식 독음 | 조곤 | |
영문 | Cao Kun | |
자 | 중산(仲珊) | |
출생 | 1862년 12월 12일 | |
청나라 직예성 톈진시 | ||
사망 | 1938년 5월 15일[1] (향년 75세) | |
중화민국 톈진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천진무비학당 | |
직업 | 정치가, 군인 | |
종교 | 유교 | |
총통 재임 기간 | 3대[2] 1923년 10월 10일 ~ 1924년 11월 2일 |
1. 개요
청말의 군인, 중화민국의 군벌. 직계군벌의 수령이었으며 회선 사건을 통해 중화민국 6대 대총통에 당선되었으나 1년만에 펑위샹의 북경정변으로 하야했다.2. 생애
2.1. 초기 이력
1862년 12월 12일, 직예성 톈진 대고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목선 조선공의 아들로 잠시 사숙을 다녀 문자를 배웠으나 집안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곧 그만두고 조선공, 포목상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가난을 면치 못하여 20세가 되던 1882년, 회군(淮軍)에 들어갔다. 위안스카이가 톈진소참(天津小站)에서 신건육군을 육성하기 시작했을 때 위안스카이 휘하로 들어가 천진무비학당에 입학, 1890년 천진무비학당을 졸업하고 의군초관(毅軍哨官)이 되었고 1894년 청일전쟁에 참전했었다. 1895년 육군우익보대(陸軍右翼步隊) 제1영(營) 방대(幫帶)에 임명되었으며 북양상비군(北洋常備軍) 보대(步隊) 제11영 관대(管帶)를 역임했다. 1904년 돤치루이의 뒤를 이어 순경영 3진의 2대 통제를 지냈다. 위안스카이의 권세를 두려워한 청나라 조정이 위안스카이를 파면하자 돤치루이, 펑궈장, 왕스전, 장쉰, 돤즈구이, 뇌진춘, 장사옥, 육건장, 강계제 등 북양군벌의 실력자들과 함께 위안스카이를 연일 문안하면서 위안스카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1911년 무창봉기가 터지자 전국적으로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산서성에서 옌시산이 산서도독에 추대되어 혁명군을 이끌자 산서로 파견되어 옌시산의 혁명군을 진압했다. 이후 북양육군(北洋陸軍) 제1진(鎮) 제1협(協) 통령(統領), 제3진(鎮) 통제(統制)에 임명되었고 위안스카이가 혁명군과 협상하여 임시 대총통이 되려 하자 북상하여 1912년 휘하의 3진을 이끌고 청나라 조정을 위협하여 선통제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후 3진은 3사단으로 개편되었고 그의 휘하 연대장으로 우페이푸가 들어왔다.
1912년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후 계축전쟁을 진압하고 1913년 정식대총통에 당선된 이후 1914년 장강상류 경비총사령관(長江上遊警備總司令官)에 임명되었다. 1915년 12월 12일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에 즉위하였고 그해 12월 말, 차오쿤은 1등 백작에 책봉되었다. 위안스카이의 제제에 반발한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 등이 12월 25일 운남에서 거병하여 호국전쟁을 일으켰는데 이에 위안스카이는 차오쿤을 사천군무회판(四川軍務會辦)에 임명하여 운남원정군을 이끌어 호국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하지만 각성이 호국군에 가담하고 잇달아 독립을 선포하자 위안스카이는 굴복하여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했다. 이후 리위안훙이 총통에 계임하여 국회와 임시 약법 체제의 복구를 선언하면서 호국전쟁이 종결되었으며 9월에 직예독군에 임명되어 7년간 직예성을 다스렸다.
1917년 장쉰이 장훈복벽을 일으키자 이에 일시적으로 가담했으나 국무총리에 복직한 돤치루이가 토역군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복벽을 토벌하려 하자 토역군에 가담하여 토역군서로군총사령(討逆軍西路軍總司令)에 취임하여 복벽을 토벌했다.
2.2. 호법전쟁
돤치루이는 량치차오의 <민국 재조설>을 구실로 국회와 약법 복구를 거부했는데 이에 반발한 쑨원이 국회의원들과 함께 광저우로 남하하여 서남의 전계군벌 탕지야오, 계계군벌 루룽팅과 연계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하고 자신은 대원수가 되어 호법정부를 조직하다 돤치루이는 이를 무력으로 토벌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1917년 호법전쟁이 일어났는데 차오쿤은 육군상장으로 승진, 원상군(援湘軍) 1,2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북양군벌의 내분으로 인하여 사천, 호남 전선에서 북양군이 패배했다. 이에 차오쿤은 정전을 요구했으나 돤치루이는 차오쿤에게 만약 호법정부를 진압하면 부총통 자리를 주겠다고 구슬렀다. 이에 차오쿤은 쉬수정, 장희지, 니쓰충 등과 함께 1차 톈진회의를 열어 대총통 펑궈장을 압박했고 패배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에서 하야했던 돤치루이는 참전독판에 임명되어 다시 군권을 쥐게 되었다.이후 3월 옌시산 등 여러 독군들의 요구로 다시 토벌령이 내려졌으나 돤치루이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차오쿤은 주전 노선에서 이탈하여 직계군벌의 회군을 주장했다. 돤치루이는 차오쿤에게 양호순열사라는 명예직을 주며 달래려 했으나 그야말로 명예직이라 차오쿤은 오히려 분노했고 우페이푸 등 불만을 품은 직계군벌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전선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돤치루이는 이번에는 사성순열사 자리를 주었으나 사성순열사가 관리하는 사천, 광동, 호남, 강서 중에서 강서성만이 북양군벌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그나마도 사성순열사의 직권이 무엇인지 규정되어 있지도 않아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차오쿤은 텐진으로 돌아가 2차 톈진회의를 열어 돤치루이를 압박했다. 이에 쉬수정이 직계군벌의 대타로 봉천군벌을 끌어들여 안휘군벌과 봉천군벌의 동맹을 체결하였으나 역시나 군비 문제로 인해 틀어져버려 봉천군벌도 회군해버렸다.
1918년 5월 천춘쉬안 등 정학회 정객들과 서남군벌들의 음모로 쑨원이 축출되고 남방정부에서 화의를 요청했는데 당시 북양군벌 내부에서는 차기 부총통 자리를 두고 장쭤린과 차오쿤이 대립하고 있었다. 돤치루이는 7월 28일의 3차 톈진 회의를 통해 남하하여 공을 세워 부총통이 되라고 차오쿤에게 권유했으나 차오쿤은 일부러 무리한 요구를 내세워 응하지 않았다. 1918년 8월 12일 안복국회가 성립되고 9월 4일 쉬스창이 총통에 당선되었다. 9월 5일 부총통 선거가 있었는데 돤치루이는 차오쿤에게 부총통 자리를 주어 직계와 환계의 화해를 성사시키고자 했는데 연구계는 펑궈장을 부총통으로 지지했고 쉬스창과 교통계는 남방 정객 천춘쉬안이나 루룽팅에게 부총통 자리를 주어 남북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돤치루이의 심복인 안복계는 차오쿤을 당선시키기 위해 돈을 쓰고 싶어하지 않아했다.[3] 이러한 사정 때문에 9월 5일 부총통 선거에는 불과 88명만이 모여 부총통 선거는 정족수 부족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화난 차오쿤은 병원에 입원해버렸다. 이후 1918년 10월 10일 새로운 대총통 쉬스창이 취임하면서 쉬스창은 남방정부와의 정전령을 선포하였다. 남방정부도 이에 응하면서 호법전쟁은 종결되었다.
10월 9일과 10월 16일 두차례 부총통 선거가 더 개최되었으나 법정 정족수 부족으로 부총통은 선출되지 못했고 부총통 선거는 무기한 연기되었다. 1919년 12월 12일, 직계군벌의 수령인 펑궈장이 사망하면서 차오쿤은 직계군벌의 수령이 되었다.
2.3. 안직전쟁
이후 돤치루이는 세계대전 참전을 구실로 쉬수정을 책임자로 하는 참전군을 조직했는데 이는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일이었다. 이 때문에 국내외 적인 비난 여론이 일자 돤치루이는 참전군을 변방군으로 개칭하고 외몽골 출병을 단행하여 변방군의 존재를 정당화하였다. 하지만 서북지역의 국가방위라는 허울좋은 구실과는 달리 안휘군벌의 군사력 확보가 목적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직계군벌과 봉천군벌이 모두 격렬히 반발했다. 이에 차오쿤은 장쭤린과 회동, 환계에 대항하기 위한 8성 동맹을 체결했다.1920년 3월, 호남에 주둔하고 있던 우페이푸가 변방군 견제를 위해 북상했다. 돤치루이는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하남독군 자오티를 파직하고 측근인 우광신으로 교체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하남독군 자오티와 돤치루이를 견제하려는 대총통 쉬스창의 공작으로 실패했다. 변방군과 직계군이 직접적으로 대치하여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자 쉬스창은 리춘, 차오쿤, 장쭤린에게 정치적 중재를 요청했는데 장쭤린만이 응하여 장쭤린이 베이징으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입장 차가 확연하여 중재는 결렬되었고 쉬수정은 급기야 장쭤린 암살을 시도했다. 장쭤린은 급히 도주하여 봉천으로 돌아갔고 사태가 돌이킬 수 없음을 안 돤치루이는 7월 8일 베이징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우페이푸와 차오쿤을 탄핵했다. 돤치루이의 강압에 쉬스창은 7월 9일 이 요구를 수용했다. 이에 차오쿤은 궐기대회를 열고 환계에 대항하여 거병했다. 이에 호응하여 봉천군벌이 관내로 진군했다.
안휘군벌은 병력은 많았으나 실전경험이 없는 오합지졸이 대다수였고 반면 직계군벌은 우페이푸를 비롯한 우수한 군재들이 많았다. 우페이푸는 안휘군벌의 주력부대를 궤멸시키고 취퉁펑 등 주요 장령들을 사로잡았다. 취퉁펑은 차오쿤에게 헌도의식을 하며 항복했다. 변방군이 맡은 북방전선에서도 쉬수정은 봉천군벌에게 패하여 도주했고 변방군도 와해되었다. 궁지에 몰린 돤치루이는 7월 19일 정국군 해체와 하야를 통전했고 7월 23일 봉군과 직군이 베이징에 입성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돤치루이가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만들었던 안복구락부를 해체하고 쉬스창에게 새로운 법통을 위한 신신국회 선거를 요구했다. 신신국회에서 선거를 통해서 대총통에 당선되려는 것이 차오쿤의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차오쿤은 대대적인 의원선거 운동을 전개했으나 환계의 잔여세력의 사보타주와 더불어 직계에서도 1917년의 구국회 회복을 주장하는 독군들이 있었기 때문에 11개 구에서 중의원 선거는 개최되었으되 참의원 선거는 끝내 하지 못했다.
2.4. 제1차 직봉전쟁과 회선 사건
이후 천하는 직예독군 겸 직노예순열사 차오쿤과 3사단장 우페이푸의 손에 있었다. 차오쿤의 동생 조예도 직예성장이 되었다. 하지만 각 지역에는 아직 제거되지 않은 환계의 여러 군벌들이 존재했고 장쭤린의 봉천군벌은 직계군벌의 독주를 불만스러워했다. 직계군벌은 직계군벌대로 마적단 출신 주제에 거들먹거리며 탐욕스럽게 전리품을 챙기는 장쭤린을 고깝게 보았으며 안직전쟁 이후 재출범한 진윈펑 내각이 봉천군벌에게 너무 편향적으로 군다고 생각했다. 장쭤린은 장쭤린대로 우페이푸를 일개 사단장으로 깔보았는데 호북독군 왕잔위안이 변란으로 사직한 이후 자신이 장쉰을 추천하였음에도 진윈펑이 차오쿤이 추천한 우페이푸를 양호순열사로 임명하여 자신과 대등한 지위에 놓자 불만을 품었다. 결국 1921년 경제위기로 인하여 진윈펑 내각이 퇴진하였고 장쭤린은 그 후임으로 교통계의 수령 량스이를 추천했는데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량스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량스이는 자신이 총리가 되면 직계군벌에게 군비를 신속히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걸어 1921년 12월 25일 총리가 되었으나 경제난 때문에 공약을 지키지 못했다. 이어 환계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자 직계군벌은 크게 분노했다.결국 우페이푸가 먼저 량스이 내각을 토벌하겠다는 격문을 보내 28일만에 량스이 내각은 퇴진했다. 4월에 이르러 봉계와 직계의 충돌이 폭발하면서 1차 직봉전쟁이 시작되었다. 장쭤린은 돤치루이, 쑨원과 함께 반직삼각동맹을 체결하여 직계에게 대항하려 했으나 마적단 출신이 대부분인 봉천군벌은 직계군벌에게 1주일도 안되어 참패했고 장쭤린은 산해관을 넘어 만주로 도주했다. 더 이상 거릴낄 것이 없게 된 차오쿤과 우페이푸는 그동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총통 쉬스창이 정통성이 없다는 구실로 맹공을 퍼부어 하야하게 하고 1922년 6월 리위안훙을 대총통으로 추대, 8월 1일 구국회를 복구시켰다. 이어 자신이 총통이 되는데 방해가 되는 왕충후이 내각을 뤄원간 사건으로 뒤흔들어 붕괴시켰으며 1923년 리위안훙도 압박하여 쫓아내고 회선 사건을 일으켜 마침내 차오쿤이 대총통이 되었다. 그리고 1923년 10월 10일 13장 141개조로 구성된 차오쿤 헌법을 발표하여 중화민국 역사상 첫 헌법을 제정하였으나 시행하진 않았다.
2.5. 제2차 직봉전쟁
차오쿤이 대총통이 된 이후, 우페이푸는 직노예순열사에 임명되었고 조예는 직노예순열부사가 되었다. 하지만 군비 문제와 논공행상으로 인하여 휘하의 펑위샹 등은 우페이푸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하남독군이었던 펑위샹은 베이징의 육군검열사로 좌천되어 쫓겨나게 되었고 군비 지급도 받지 못했다. 북방에서 군 현대화와 정예 장교진을 육성하며 권토중래를 도모하던 장쭤린은 펑위샹을 회유했다. 1924년 9월 3일, 상하이를 다스리던 환계의 절강독군 루융샹이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중앙과 왕래를 중단하자 차오쿤은 치셰위안, 쑨촨팡 등을 동원하여 루융샹을 토벌하게 함으로 강절전쟁을 일어났다. 이에 쉬수정 등 안휘군벌들이 흥기를 위해 가담했다. 이에 쑨원이 남방에서 호응했고 장쭤린이 차오쿤과 우페이푸 토벌을 선포하면서 2차 직봉전쟁이 일어났다. 북방 전선에서 우페이푸가 직접 독전했지만 궈쑹링, 장덩쉬안 등 봉천군벌의 명장들이 현대화된 부대를 바탕으로 직예군을 잇달아 격파했다.여기에 펑위샹이 2로군 1사단장 호경익, 연합경기경비수사령관 손악과 연합하여 10월 23일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장악하고 총통부를 포위했다. 차오쿤은 펑위샹의 위협에 우페이푸의 모든 공직을 물러나게 하고 청해성 독판으로 멀리 보내게 했다. 이어 옌후이칭 내각을 사퇴하게 하고 황부를 국무총리 겸 교통총장에 임명하였다. 펑위샹은 차오쿤의 대총통 직위를 유지시킨 다음에 쑨원, 돤치루이 등을 초청하여 과두정을 수립할 계획을 세웠으나 장쭤린, 돤치루이 등은 강경하게 직계군벌과 차오쿤에 대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었고 우페이푸가 차오쿤의 명의로 발표된 정전령을 무시하고 톈진을 공격하면서 펑위샹은 차오쿤을 하야시키기로 결정했다.
11월 2일 차오쿤은 대총통에서 사직했고 펑위샹은 국무총리 황부로 하여금 총통직을 대행하게 했다. 이후 차오쿤은 중난하이에 연금되었다.[4] 펑위샹과 장쭤린은 돤치루이를 초빙하여 임시집정 정부를 수립하였고 이것으로 천하는 장쭤린이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쭤린과 펑위샹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직계의 쑨촨팡이 오성연군을 조직하여 1925년 손봉전쟁을 일으켰다. 이어 대고 사건, 3.18 참안 등이 발생하면서 궁지에 몰린 돤치루이는 하야했고 펑위샹 휘하의 녹종린은 직계와 연합하기 위해 차오쿤을 석방하고 직계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으나 우페이푸는 거절했고 오히려 옌시산, 장쭤린과 연합하여 1926년 직봉풍전쟁에서 펑위샹을 격퇴했다.
2.6. 국민당의 1차 북벌과 말년
이후 우페이푸는 호북, 호남, 하남 지역을 점거하고 어느 정도 세력을 구축하였고 차오쿤은 우페이푸에게 의탁하여 바오딩에 거주하였다. 그런데 1926년 직봉풍전쟁에 이어 남방에서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국민당이 북벌을 선포하여 파죽지세로 진군했다. 직봉풍전쟁에 매달려 있다가 기습받은 우페이푸는 소련 교관들의 훈련을 받은 국민혁명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무너졌고 순식간에 양호 지역을 잃고 하남으로 밀려났다. 이후 국민당 내부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이 심해져서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함에 따라 난징 국민정부와 우한 국민정부가 대립하였으나 각각 북벌에 나서게 됨에 따라 직계군벌은 다시 위기에 처했다.설상가상으로 봉천군벌이 국민당을 막겠다는 구실로 하남에 몰려오자 직계군벌들은 앞을 다투어 장쭤린에게 투항했고 차오쿤도 1927년 2월 10일 장쭤린에게 투항했다. 이후 정치에서 완전히 은퇴하여 톈진의 외국 조계지에 은거하였으며 1928년 12월, 그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들이 쳐들어와 그의 집을 약탈하기도 했다.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터진 이후 베이징과 톈진이 함락되자 일본 제국으로부터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 정부)의 수장 자리를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 1938년 5월 15일 톈진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사후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그의 항일정신을 높이 사 포양령(褒揚令)을 발표하고 일급상장 계급을 추서했다.
3. 가족
부인이 4명이나 있었다.넷째부인 소생의 4녀 조사영은 장쭤린의 4남 장쉐쓰와 1920년 9월 약혼했으나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발발하면서 파혼당했다.
4. 주요 경력
직예성 지방장관 | |||||||
1대 직예독군 | → | 2대 직예독군 | → | 1대 직예독리 | |||
주가보 | → | 차오쿤 (1916년 9월 ~ 1923년 10월 10일) | → | 왕승빈 |
5. 참고문헌
- 군벌, 이건일, 도서출판삼화.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중국현대정차사론, 장옥법,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6. 관련문서
- 신해혁명
- 계축전쟁
- 홍헌제제
- 호국전쟁
- 부원지쟁
- 장훈복벽
- 1차 호법운동
- 호법전쟁
- 외몽골 출병
- 하남독군 교체 파동
- 안직전쟁
- 2차 호법운동
- 1차 직봉전쟁
- 영풍함 사건
- 2.7 사건
- 임성 사건
- 담조전쟁
- 회선 사건
- 강절전쟁
- 2차 직봉전쟁
- 북경정변
- 핍궁사건
- 제노전쟁
- 선후회의
- 손봉전쟁
- 반봉사건
- 직봉풍전쟁
- 국민당의 1차 북벌
- 중일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