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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15:22:17

직봉풍전쟁

직봉풍전쟁
直奉馮戰爭
Zhili–Fengtian-FengYuxiang War
파일:봉천군벌순승왕부회의.jpg
직봉풍전쟁 중 장쭤린과 우페이푸 사이에 열린 순승왕부 회의
(1번이 장쭤린, 2번이 장쭝창, 3번이 우페이푸, 4번이 장쉐량)
시기 1926년 1월 ~ 8월
장소 직례성, 하남성, 섬서성
교전세력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국민군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봉천군벌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직계군벌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염계군벌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안휘군벌
지휘관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펑위샹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후징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손악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위익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녹종린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쑹저위안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스여우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장쭤린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장쉐량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양위팅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장쭝창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저옥박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돤치루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우페이푸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위익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옌시산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상진
결과 국민군의 패배
* 위익삼은 전쟁 중 직계군벌에 투항.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펑위샹과 궈쑹링의 동맹3.2. 남구대전3.3. 신정부의 조직3.4. 옌시산의 가세
4. 참고문헌

1. 개요

1926년, 펑위샹의 국민군과 장쭤린, 우페이푸, 옌시산 연합군 사이의 전쟁. 이 전쟁에서 패한 펑위샹은 소련으로 외유를 떠났으나 불과 수개월 후 벌어진 국민당의 1차 북벌에 힘입어 국민혁명군 2집단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재기하게 된다.

풍봉전쟁 혹은 봉풍전쟁이라고도 한다.

2. 배경

펑위샹은 원래 우페이푸 휘하의 육군검열사였으나 우페이푸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이에 봉천군벌의 수령인 장쭤린과 내통, 1924년 2차 직봉전쟁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하고 대총통 차오쿤을 하야시킴으로 우페이푸 밑에서 나와 대군벌로 성장하게 되었다. 펑위샹은 베이징에서 국민군을 조직, 1924년 10월 25일 국민군 총사령관 겸 제1군 군장에 취임하였다. 그 산하에는 후징이의 2군, 손악의 3군이 있었다. 하지만 장쭤린은 산해관 이남으로 진출하지 않겠다는 펑위샹과의 밀약을 무시하고 대군을 거느려 베이징에 입성하였으며 리징린이 직예독군 왕승빈이 편성한 23사단을 무장해제하고 왕승빈을 톈진 조계지로 내쫓아 하야를 강요했으며 손직부의 20사단 역시 무장해제시킴으로 펑위샹을 강압적으로 직예성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이에 분노한 펑위샹은 장쭤린이 마적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고 욕설을 퍼부었으나 전력상 열세라서 참을 수밖에 없었다. 국민군 2군 사령관 호경익은 아예 선수를 쳐서 장쭤린과 장쉐량을 체포해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펑위샹은 이 역시 거부했다.

장쭤린 역시 펑위샹을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며 우광신은 국민군 3군 사령관 손악을 공산주의자로 몰기도 했다. 장쭤린은 펑위샹이 베이징에 초청한 쑨원도 무시하고 돤치루이를 집정으로 추대했으며 강남으로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결국 1925년, 쑨촨팡직계군벌의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손봉전쟁을 일으켰고 장쭤린은 크게 패해서 황하 이북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펑위샹은 쑨촨팡과 비밀리에 내통하면서 자신의 지배영역으로 봉천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한편, 우페이푸의 세력이 남아있던 하남성에서는 국민군 2군 사령관 후징이와 섬서군벌 유진화가 힘을 합쳐 우페이푸의 잔여세력을 몰아냈다. 후징이는 그 공으로 하남독군에 임명되고 유진화의 부하 감옥곤은 예섬감초비부사령관에 임명됐는데 감옥곤은 하남독군이 되기 위해 후징이를 상대로 호감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후징이는 승리했으나 국민군은 하남성에서 우페이푸 세력과도 더욱 척을 지게 되었다.

3. 전개

3.1. 펑위샹과 궈쑹링의 동맹

봉천군벌 육대파의 수장 궈쑹링은 일본 방문 중 도쿄 제국호텔에서 펑위샹의 부하 한푸쥐를 만나게 되었다. 궈쑹링은 장쭤린을 매국노로 비난하면서 자신이 장쭤린을 몰아낼 준비를 하고 있다고 귀뜸하였다.

한편 손봉전쟁 중 펑위샹이 쑨촨팡과 결탁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장쭤린은 펑위샹과 쑨촨팡의 결탁을 막기 위해 11월, 베이징으로 병력을 파견해서 펑위샹을 압박하는 한편 허란주 등을 파견하여 펑위샹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펑위샹은 베이징에 주둔하고 있던 녹종린, 정금세 부대의 일부만 베이징에 잔류시키고 나머지는 남구로 철수시켰다. 또한 장지강과 쑹저위안에게 찰동의 방어를 증강하게 하였다. 하지만 펑위샹은 우페이푸와도 적대관계라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일단은 장쭤린과의 화평교섭에 나섰다. 허나 장쭤린은 펑위샹의 통수를 날리기 위해서 리징린궈쑹링에게 국민군을 공격하라는 밀령을 내렸으나 리징린과 궈쑹린 모두 보경안민을 구실로 이를 거부하였다. 11월 7일, 펑위샹은 일본에서 갓 귀국한 한푸쥐에게 톈진에서 궈쑹링과 만날 것을 지시하고 곧이어 궈쑹링의 육군대학 동창인 참모장 웅빈을 파견하여 비밀회담을 하게 했다. 궈쑹링의 반봉의사가 진짜인지 알아보려 했다. 11월 12일, 장쉐량이 톈진으로 내려와 국민군을 공격하라는 장쭤린의 지시를 전달하고 군사회의를 소집하였다. 궈쑹링과 리징린은 장쉐량을 설득하여 펑위샹과 화평교섭을 할 것을 청했고 11월 15일, 장쉐량이 응함에 따라 봉천측이 보대지구를 펑위샹 측에 양보하는 것으로 양측의 군사적 대치는 일단락되었다.

허나 11월 17일, 국민군 2군이 바오딩을 접수하기 위해 서둘러 진입하다가 잔류한 봉천군과 교전을 벌였고 이로 인하여 11월 15일의 합의는 무효로 돌아갔다. 궈쑹링은 펑위샹과의 전쟁은 양위팅의 선동이며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장쭤린은 듣지 않고 리징린에게 보대를 즉시 탈환할 것을 지시하고 궈쑹링에게는 부대를 란주(灤州)에 집중시키고 봉천으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병원에 드러누워 있던 궈쑹링은 11월 19일, 그의 고문 이견백과 동생 곽대명(郭大鳴)을 포두에 파견하여 펑위샹과 긴급상의하게 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해 합의했다.

11월 20일, 펑위샹이 합의서에 서명하고 22일, 궈쑹링이 서명하면서 정식으로 동맹이 체결되었다. 궈쑹링은 22일에 즉각 반봉사건을 일으켜 장쭤린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켰지만 펑위샹 산하의 2군과 3군은 펑위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거 리징린과의 원한을 잊지 못하고 리징린을 공격하면서 삼각동맹은 붕괴되었고 궈쑹링이 관동군의 개입으로 패배하면서 총살될 때 아무것도 못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궈쑹링과 펑위샹의 동맹이 폭로되면서 펑위샹은 신의 없는 놈으로 전국 각지에서 욕을 먹게 되었다.

3.2. 남구대전

전술한 바와 같이 국민군 1군 산하의 장지강 부대가 펑위샹의 명령을 무시하고 톈진을 공격하여 리징린 군대를 축출하였고 손악의 3군도 바오딩을 공격해 리징린을 몰아내었다. 다급해진 리징린은 장쭝창에게 직예성을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쭝창은 직노연군을 조직, 직노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저옥박을 부사령관으로, 리징린을 참모장에 임명하고 직예성으로 진입하였다. 한편 궈쑹링의 잔여세력을 수습한 위익삼은 1926년 1월 3일, 펑위샹에게 투항했고 펑위샹은 이들을 국민군 4군으로 조직하고 위익삼을 국민군 4군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장쭤린은 이 조치에 격분하였고 국민군 4군에 대한 토벌을 선언했다. 또한 펑위샹은 중국국민당에 파견된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과 접촉하여 소련으로부터 30~40명의 군사 고문단을 받고 소련의 군사지원을 받았다.

한편 우페이푸는 펑위샹이 자신을 배반한 것에 악감정을 품고 있었으며 반봉사건에 펑위샹이 개입하여 장쭤린까지 배신하려한 것에 대해 공분하며 장쭤린에게 동조하는 전문을 보냈다.
"이전에 펑위샹이 배반하여 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현재 궈쑹링이 배반하여 귀하의 마음이 매우 아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평생에 가장 통탄스러운 것은 이렇게 변절하는 소인배들입니다. 현재 귀하를 돕고 싶습니다."

또한 펑위샹이 소련과 접촉하자 그를 적화장군으로 비난하며 중국의 적화를 막기 위해서 북양군벌이 연합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에 장쭤린과 우페이푸는 중국반적대동맹을 결성, 연합을 타진하였다. 우선 양위팅이 다롄에서 우페이푸의 대표 장백리와 회담을 가졌으며 1926년 1월 10일, 한커우에서 장징후이와 장지담이 직봉합작을 협의했다. 회의 결과, 봉천군벌은 우페이푸의 장강일대 기반을 옹호하고 우페이푸는 장쭤린이 화북에서 국민군을 섬멸하는 것에 대해 상호 승인하였다. 한편 펑위샹, 장쭤린에게 포위되어 있던 옌시산도 펑위샹 세력의 약화를 위해서 장쭤린에게 합세함으로 봉풍전쟁은 직봉풍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펑위샹은 전쟁 종식과 하야를 선전하고 소련으로 도주하였지만 이미 봉천과 직예 군벌 모두 그 정도 가지고 펑위샹을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우페이푸는 2월 2일, 소요남, 치셰위안과 연명으로 펑위샹 토벌을 선언, 산동으로 출병시키려던 늑운악의 3개 사단 병력을 하남성으로 회군시키고 하남성 신양을 공격하고 있던 비적 영걸과 합세시켜 국민군 2군 11사단 장세걸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2월 6일, 국민군이 이에 대응하여 국민군 1군 장지강, 국민군 3군 손악의 명의로 우페이푸 토벌의 통전을 보냈다. 48일 간의 공성 끝에 신양은 우페이푸에게 함락되고 장세걸은 포로가 되었다. 늑운악은 장세걸의 부하들을 재편성하여 3개 사단, 21개 여단, 12만명의 공격군을 확보하여 스자좡, 바오딩, 대명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베이징으로 진군했다. 장쭤린도 호응하여 난현, 톈진, 통현을 점령하고 베이징을 포위하였다. 한편 국민군은 3월 18일의 대고구 사건을 구실로 돤치루이를 핍박하여 집정에서 내쫓아버렸다. 4월 1일, 장쭝창이 전적 총지휘에 임명됨으로 봉군의 베이징 공격 준비가 완료되었다. 여기에 봉군은 공군을 동원, 베이징을 폭격하여 국민군을 크게 동요시켰다. 이 상황에서 위익삼은 3월, 국민군 4군에서 정의군으로 개칭하여 바오딩을 떠나 고비점으로 철수해버렸고 4월 1일 혁내소를 파견하여 한커우에서 우페이푸를 만나 우페이푸에 대한 충성을 선언하였다. 이에 우페이푸는 위익삼을 토적연합군 3로군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4월 6일, 봉천, 직예, 산서의 연합군이 베이징을 포위하여 총공격을 감행했다. 펑위샹은 중과부적의 전세를 반전시킬 수 없다고 여겨 병력을 수원성 오원으로 퇴각시키고 녹종린을 동로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최고 정예부대인 국민군 1군을 지휘하게 했다. 녹종린은 주력부대가 수원으로 퇴각하는 것을 엄호하는 한편 거용관에서 적의 추격을 저지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받았다. 이후 우페이푸가 베이징에 입성, 차오쿤의 하야를 무효화하고 왕회경을 베이징 위수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봉천군은 남구에 병력을 집결하고 유익비, 궁부괴 부대를 동원하여 거용관을 공격했으나 녹종린의 단단한 방어로 인하여 사상자만 내고 성과를 보지 못했다. 공격을 지휘하던 장쭝창은 장쭤린에게 협공을 요청했으나 여유병력이 없어서 불가능했다. 이에 장쭝창은 쑨뎬잉에게 남구의 펑위샹 부대를 타격하라고 지시했고 쑨뎬잉은 산동성에서 철로를 타고 급히 이동, 남구의 펑위샹 부대를 강타하여 완전히 붕괴시켰다. 장쭤린은 쑨뎬잉을 크게 칭찬하며 그를 14군 군장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산동성 제녕으로 이동시켰다.

3.3. 신정부의 조직

한편 장쭤린은 우페이푸에게 베이징의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우페이푸에게 맡기겠다고 약조한 바가 있었다. 이에 우페이푸는 옌후이칭을 국무총리에 복직시키고 차오쿤 헌정을 복고하려 했다. 쑨촨팡도 갑자기 우페이푸를 옹호하면서 4월 20일, 전문을 보내 옌후이칭 내각의 복직을 청하였다. 허나 장쭤린은 2차 직봉전쟁 당시 봉천군 토벌 명령을 내린 바가 있는 옌후이칭 내각에 불만이 많았고 대신에 약법을 부활시키고 자신의 인척인 진윈펑을 국무총리에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우페이푸가 치셰위안, 왕회경을 파견하여 장쭤린이 장쉐량, 리징린, 장쭝창을 파견하여 4월 25일 베이징 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어떤 결론도 도출하지 못했다. 4월 26일, 장쉐량은 심양으로 돌아와 장쭤린에게 남구의 국민군을 격파한 후에 정치문제를 논하자고 건의함으로 논의는 잠시 미뤄졌다.

5월 1일, 우페이푸는 병이 있어 사직한다고 선포하는 한편 국무원이 회복되었으며 법에 따라 대총통이 직무를 수행한다는 기습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차오쿤 헌정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장쭤린은 크게 분노하였다. 5월 2일, 장쉐량이 베이징으로 내려왔고 5월 3일, 치셰위안에게 각성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그 의견을 우페이푸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또한 다음 내각의 적임자로는 진윈펑이 적격이라는 언론전을 벌이게 하였다. 5월 3일, 쑨촨팡은 자신이 지배하는 5성의 군벌들과 연명으로 우페이푸에게 북상을 촉구하며 대권을 주재해달라고 청했다. 5월 5일, 봉천군벌의 원로 왕스전과 조이손이 옌후이칭을 일단 복직시키고 그 다음에 대총통을 뽑자는 절충안을 내놓았고 장쭤린은 이에 마지못해 동의하고 우페이푸에게 자신은 이견이 없으니 우페이푸가 알아서 주관하라고 하였다. 우페이푸는 장쭤린의 립서비스를 진담으로 알아듣고 옌후이칭을 복직시켰고 5월 9일, 옌후이칭은 복직을 수락하였다. 5월 12일, 옌후이칭의 복직이 정식으로 선포되었고 5월 13일 내각을 조직하였다. 옌후이칭 내각에서 육군총장 장징후이, 내무총장 정겸을 제외하고는 모두 직계의 인물이었다.

5월 14일, 장쉐량, 장쭝창이 심양에서 고급 장령회의에 참석했다. 장쭤린은 이 회의에서 옌후이칭 내각을 보이콧할 것을 지시했다. 6월 4일, 장쭤린이 산해관을 넘어 6월 5일 톈진에 도착하여 봉계 장령회의를 개최하였다. 6월 8일, 우페이푸의 대표 장기황, 장지담이 톈진에서 장쭤린의 대표 정겸, 장징후이와 만나서 회담을 가졌다. 봉천 측은 옌후이칭 내각에 반대하며 풍군 토벌 비용 4천만원과 직노연군의 군비 3천만원을 정부에서 마련해줄 것을 청하였다. 6월 9일, 양위팅이 회담에 합류했고 양위팅은 위익삼의 국민군 4군 장비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6월 22일, 옌후이칭 내각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국무회의가 개최되었고 이 회의는 옌후이칭의 사직을 결정하고 두시구이를 내각총리 대리로 선출하였다. 또한 두시구이의 대리내각은 우페이푸와 장쭤린의 입경을 환영한다는 선언을 발표했다.

6월 26일, 장쭤린과 우페이푸 사이의 순승왕부 회의를 위해 장쭤린이 입경하였다. 헌병, 보안대, 보병 3단이 직봉 양측의 측근들을 호위하기 위해 배치되었으며 봉군 여단장 부쌍영이 동부역에 임시 계엄사령관에 취임, 장쭤린 경호를 맡았다. 장쭤린은 기차에서 내린 후 50여대의 차량에 수행원들과 나눠타고 순승왕부로 향했다. 6월 27일, 우페이푸가 44량의 특별차량을 타고 바오딩을 출발, 28일이 길일이라는 장지황의 주장에 따라 장신점에서 하루 묵고 6월 28일 입경하였다. 6월 28일 오전 9시 30분, 장쭤린이 우페이푸를 예방하여 20여분 대화한 후 12시에 우페이푸가 순승왕부에 답방을 왔다. 두 사람은 일단 두시구이 내각을 승인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어 우페이푸와 장쭤린은 거인당에서 두시구이 총리가 개최한 축하연에 참여했다. 이때 큰 소리가 나서 잠시 소동이 벌어졌으나 알고보니 구웨이쥔이 옷걸이에 걸어놓은 대례모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이날 밤 우페이푸는 바로 장신점으로 돌아갔고 6월 29일, 장쭤린도 톈진으로 돌아갔다.

3.4. 옌시산의 가세

전술한 바와 같이 옌시산은 펑위샹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 직군, 봉군과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다. 직군과 봉군의 공격을 받은 국민군은 시구보로 퇴각하여 풍진 일대에 진을 치고 있었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5월 18일, 산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5월 21일, 옌시산이 직접 대동으로 나와 독전했으나 직군과 봉군이 돕지 않아서 적잖은 사상자를 냈다. 허나 펑위샹 역시 산서 전선과 직예 전선은 물론이고 섬서성에서 유진화와 서안 쟁탈전을 벌이고 있어서 무려 전선이 3개에 달했기 때문에 한쪽에 병력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