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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23:09:57

원조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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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문체4. 줄거리5. 가계도6. 사료적 가치

1. 개요

몽골 제국역사서. 《원조비사》(元朝秘史), 즉 원나라 황실의 비밀스러운 역사라는 뜻이다. 《몽골비사》라고도 불린다.

2. 상세

저자가 누군지는 전해지지 않고, 딱히 누구라고 확정할 만한 증거도 없지만 내용을 보면 칭기즈칸을 굉장히 가까이에서 직접 목격했던 인물임은 분명해 보인다. 칭기즈칸의 어머니 호엘룬이 주워다 키운 칭기즈칸의 의제들 중 한 명인 시키 후투후가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시키 후투후는 칭기즈칸 일족 중에 가장 먼저 문자를 익힌 인물이었고, 칭기즈칸에 의해 몽골 법률 《야삭》의 집필 및 관리자로 임명되었으며, 《원조비사》에 그와 관련된 일화가 여러 번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확정할 만한 증거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유력 후보의 하나일 뿐이다.

《원조비사》는 처음 기록될 때는 위구르 또는 파스파 문자 등으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나라의 멸망 등으로 인해 위구르 또는 파스파 문자로 적혔을 원본은 이미 산일(散逸)되었으며, 황당하게도 대에 몽골어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한자로 된 음차 표기+대역+총역본이 현재로서는 유일하게 유통되는 버전이다. 다행인 점은 단순 번역본이 아니라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자료이기 때문에, 발음에 대한 표기나 의미 대응이 대단히 엄밀하여[1] 이것을 고전 몽골어로 환원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2]

또한 비슷한 내용이 《황금사》에도 전하고 있어, 비교 및 대조가 가능한 것 또한 특징이다. 현재 사부총간본(四部叢刊本), 엽덕휘본(葉德輝本), 영락대전 15권본(永樂大典十五卷本) 등의 판본이 전해지고 있으며 판본들 사이에 내용은 거의 차이가 없어 원전이 충실히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다.

중반부에 다룬 자무카와의 13익 전투(1190년)와 금나라의 타타르 정벌(1194년) 동안 테무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원조비사》에도 없기 때문에, 대략 4년간의 공백 동안 칭기즈 칸의 행적은 불분명하다.[3]

3. 문체

하루는 테무진, 카사르, 벡테르, 벨구테이가 함께 앉아 낚시를 하고 있는데 빛나는 물고기가 한마리 걸려들었다. 그 고기를 벡테르와 벨구테이가 테무진과 카사르에게서 빼앗았다. 테무진과 카사르는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우리가 낚은 물고기를 벡테르, 벨구테이 형제가 빼앗았습니다.”라고 하자 어머니가 타이르기를,

“그만들 두거라! 너희들은 형제간에 왜들 그러느냐? 우리에게는 그림자 말고는 동무도 없고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다. 타이치우드 형제들과의 한은 어떻게 풀려고 하느냐? 너희들은 왜 옛날 알란 어머니의 우애 없는 다섯 아들 같이 굴고들 있느냐? 그러지들 마라!”고 했다.
《원조비사》 76절 출처
그러자 테무진과 카사르가 안 좋아하며,

“어제도 고도리살로 잡은 작은 새를 그렇게 빼앗아 갔습니다. 이제 또 그렇게 빼앗았습니다. 어떻게 함께 살겠습니까?”하고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버렸다. 벡테르가 둔덕 위에서 거세 샤르가말 아홉 마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때, 테무진은 뒤에서, 카사르는 앞에서, 살을 시위에 매긴 채 몰래 접근하는 것을 벡테르가 보고,

“타이치우드 형제들과의 한을 풀지 못한 판에, 누구를 해코지 할 수 있느냐? 너희들은 왜 나를 눈에 빠진 속눈썹, 입에든 가시로만 여기느냐? 그림자 밖에는 다른 동무가 없고, 꼬리 밖에는 다른 채찍도 없을 때 너희들은 왜 그렇게들 생각하느냐? 나의 가계를 단절시키지 말아다오! 벨구테이는 죽이지 말아다오!”라고 말하고 나서 다리를 틀고 앉아 기다렸다.

테무진과 카사르는 앞, 뒤에서 접근하여 쏘고 가버렸다.
《원조비사》 77절 출처
"내 형을
보고도
그의 모습을 놓쳤습니다.
찾아보아도
그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외쳐도
내 목소리는 그에게 안 들렸습니다.
저는 별을 바라보며,
나무 뿌리를 베개 삼아 눕습니다.
《원조비사》183절
이제 형제는 주위의 나라를 평정했다. 외방을 모두 합병했다. 칸의 자리난 그대에게 향했다. 천하가 이제 준비되어 있는데, 동무하여 무슨 도움이 될까? 오히려 검은 밤에 형제의 꿈에나 보일 것이다. 밝은 날, 그대의 마음이나 괴롭힐 것이다.

그대 옷깃의 이,
그대 안깃의 가시가 될 것이다.
내게는 많은 노파들이 있었다.
형제를
넘어설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잘못이었다.

이제 이 생애에, 형제와 나의 떠오르는 태양에서부터 지는 해에 이르기까지, 나의 이름이 닿았다.
《원조비사》201절
별이 있는 하늘은 돌고 있었다.

여러 나라가 싸우고 있었다.

자리에 들지 아니하고 서로 빼앗고 있었다.

흙이 있는 대지는 뒤집히고 있었다.
《원조비사》 254절

읽어보면 문체사서라기보다는 서사시에 가깝다. 이는 당시 몽골에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글로 기록된 것이 아닌 몽골인들 사이에서 구전되어오던 전승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칭기즈 칸'의 이야기가 원조비사 책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튀어보이는 것이지, 아마 칭기즈 칸 이전의 다른 몽골 지역 여러 '초원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도 다 이런 식으로 구전되었을 것이다.

파일:external/pds18.egloos.com/b0138797_4dba3ec560d50.jpg

이러한 이유로 대화를 보면 인물들의 대사도 비유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많이 나오며 시적 표현도 상당히 많이 나오는 편이다. 허영만 화백의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에서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보면 체감해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사계절 출판본의 《원조비사》의 표현이 그대로 인용된다.

4. 줄거리

각 절별로 내용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회에서 120회까지 전체 절별 구성 목록】
초반에는 몽골족과 보르지긴 씨족의 내력을 다룬 뒤, 테무진의 일생을 다룬다. 주요 내용은 대부분은 몽골 통일 과정 및 논공행상과 행정 정비를 다루며, 해외 원정 부분에서 호라즘 왕국제베, 수부타이러시아 정벌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고[10], 마지막은 오고타이 칸이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는 것으로 끝난다. 특기할 만한 점이 있다면 사서 내에서 칭기즈 칸의 활약은 별로 없고[11] 사준사구야율초재 등의 활약이 더 돋보인다.

5. 가계도

《원조비사》에서 직접 언급된 가계도 목록.

참고로 라시드 웃 딘의 《집사》에 기록된 가계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6. 사료적 가치

실위칭기즈 칸 때나 돼서야 문맹을 벗어나 통일 국가를 이뤘다. 《원조비사》는 칭기즈칸이 죽고 난 뒤에 쓰여진 사서로 칭기즈 칸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현재 몇 안되게 남아있는 몽골측 사료이다. 칭기즈 칸이 생전에 자기 초상화를 그리지 못하게 했다는 말이 있으나 근거가 부족하다. 칭기즈 칸은 피휘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이런 방면에 전혀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몽골이 중원을 정복한 이후에도 피휘 풍습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몽골 역대 대칸들의 이름도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사용되었다. 다만 피휘라기보다는 아마도 존경심 때문에 몽골 역사에서 칭기즈 칸의 이름 "테무진"과 쿠빌라이 칸의 이름 "쿠빌라이" 딱 두 개의 이름만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사료로서의 가치는 학계에 알려진 초반에는 다른 기록과 상치되는 부분이 많아서 그 진실성에 의심을 품고 신화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연구가 깊어지면서 다른 사서들과 교차 검증한 내용이 자주 등장하고, 심지어 더 깊은 내용까지 등장할 정도로 절대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다른 사서들에 기록된 칭기즈 칸의 승리가 사실은 패배였다는 점이나 칭기즈 칸 개인의 약점들인 벡테르 살해[23], 보르테의 납치, 주치의 출생 문제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서 다른 사서들과는 차원이 다른 칭기즈 칸 연구의 가장 근본이 되는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또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역사라는 점 외에도 유목민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라서 유목민의 역사 연구에도 굉장히 중요한 자료다.

《원조비사》라는 사서의 존재가 몽골중국을 넘어 서양에도 소개된 것은 19세기 무렵에 들어와서의 일이었으며, 그 이전에는 그 존재가 서양 학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이러한 경위가 있기 때문인지 세간에는 《원조비사》가 1980년대에 와서야 영문 등으로 번역되어 '비밀스러운 역사'라는 이름의 "비사"라는 말이 붙었다는 설도 돌았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문 번역도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고, "비사"라는 제목도 책 제목에서부터 내부 항목에까지 떡하니 《원조비사》(元朝秘史)라고 한문으로 적혀 있다.[24]


[1] 중국어에는 없는 몽골어의 /q/, /r/의 표기를 위해 /h~x/ 발음을 지닌 한자에 '中'을, /l/ 발음을 지닌 한자에 '舌'과 같은 소첨자를 넣었을 정도.[2] 여기(영어)에서 몽골비사 첫 장의 예시를 볼 수 있다.[3] 테무진은 이 전투에서 패하고 나서 어떤 기록에서도 등장하지 않다가 , 4년이 지나서야 다시 사서에 이름을 드러낸다. 일설에는 노예로 팔려가 고초를 겪었다는 설도 있는 모양이다. 사실 기록이 없기 때문에 상상의 영역이 될 수밖에 없는데 확실한 점은 자무카와의 일전에 패배한 후 재기할때 까지, 테무진에게는 고난의 시간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4] 사실 이런 일화는 《원조비사》에만 있지 않고 춘추시대 고사나 몇세기 뒤 일본에서 모리 가 3형제 전설처럼 비슷한 이야기가 여럿 있다.[5] 그의 아들인 침바이와 티라운 형제는 훗날 테무진의 부하가 되었으며, 딸인 카다안은 양털 속에 테무진을 숨겼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6] 같이 잡혀간 소치겔은 구하지 못했고,[25] 벨구테이는 어머니를 잃은 분풀이로 이 날 메르키트족을 보이는 대로 죽였다,[26][7] 이때 합류한 주요 인물: 쿠일다르, 주르치다이(몽골 통일 후 칭기즈칸에게 첩을 하사받음), 바를라스 씨족의 쿠빌라이, 우량카이 씨족의 젤메, 수부타이 형제, 무당 코르치, 주르킨 씨족의 사차 베키 형제, 알탄, 쿠차르(백부 네쿤 타이시의 아들), 숙부 다리타이 옷치긴 . 알탄&쿠차르&다리타이는 훗날 테무진에 의해 숙청된다.[8] 치노스족 남성들을 삶아 죽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 시체를 말애 매달고 끌고다녔다. 이런 당대로서는 경악할만한[27] 처우에 자무카에 대한 민심이 엄청나게 악화되었다.[9] 잘한 일: 자코드 정벌 성공, 역참 정비, 행정 정비, 우물 파기
잘못한 일:음주 습관, 숙부 테무게 옷치긴의 영지에서 무단으로 처녀 징발, 신하 도콜코를 음해함, 사냥터 욕심을 부림.
[10] 수부타이와 제베는 호라즘의 무함마드 2세 샤를 잡으러 가다 보니 러시아 애들이랑 마주치게 된 상황이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긴 원정이 아니었다.[11] 오히려 칭기즈 칸이 두려워하거나 분노를 참지 못해 주변 사람들이 진정시키는 장면이 많다.[12] 보르지긴이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13] 또는 도부. 형과 함께 부르칸 산으로 이주하다가 알란 코아와 만나서 결혼함.[14] 《원조비사》에서는 보돈차르 문카그의 손자 메넨 토돈의 3남 카치우의 아들 바룰라타이를 바를라스 씨족의 조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라시드 웃 딘의 《집사》에서는 카이두의 손자 툼비나이 세첸의 아들이자 카불 칸의 형제인 카출리를 바를라스 씨족의 조상으로 언급하고 있다.《집사》에 따른다면 티무르 제국을 세운 중앙아시아의 영웅 바를라스 티무르는 카출리의 후손이다.[15] 예수게이 사후에 부족의 제사에 참석하려던 호엘룬을 문전박대했다.[16] 훗날 테무진의 동생 벨구테이와 다투어 보르지긴 씨족과 주르킨 씨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계기를 제공했다.[17] 아들 바투 등 다수.[18] 아들 구육 등 다수.[19] 부인 케레이트 소르칵타니(옹 칸의 조카), 아들 쿠빌라이, 훌레구, 아리크부카[20] 메르키트 부족 우와스 씨족장 다이르 우순의 딸.[21] 타타르족 예케 체렌의 딸.[22] 금나라 7대 황제 폐제 위소왕의 딸.[23] 벡테르가 테무진의 (예수게이의 적자로서 가진)권위를 위협한 건 사실이지만 호엘룬이 꾸짖었듯이 어쨌든 테무진은 형제를 죽였다.[24] 물론 이 제목은 명나라 때 붙여진 제목이라 볼 수 있으므로 원래 제목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현대에 붙여진 제목은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