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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 제국 초대 아미르 티무르 تيمور | ||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 있는 티무르 광장의 티무르 기마상 | ||
이름 | 중세 몽골어 | 테무르(ᠲᠡᠮᠦᠷ)[1] |
현대 몽골어 | 트므르(Төмөр) | |
별칭 | 절름발이 티무르[2] | |
출생 | 1336년 4월 8일 차가다이 울루스, 케쉬 | |
사망 | 1405년 1월 19일 (향년 68세) 티무르 제국, 오트라르 | |
재위 기간 | 티무르 제국 아미르 | |
1370년 4월 9일 ~ 1405년 2월 14일 | ||
부족 | 바를라스 (ᠪᠠᠷᠣᠯᠠᠰ) | |
부모 | 아버지 : 타라가이 노얀 어머니 : 테키나 카툰 | |
자녀 | 장남: 우마르 샤이크 미르자 1세[3] 차남: 자한기르 미르자[4] 3남: 미란 샤 미르자[5] 4남: 샤 루흐 미르자[6]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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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무르 제국의 건국자이자 정복 군주.2. 상세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의 몽골계 바를라스부 출신의 인물로, 역사학계에서는 튀르크화된 몽골인을 의미하는 투르코-몽골(Turco-Mongol) 정복자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는 몽골 제국의 부활을 주창하면서 칭기즈 칸의 후예를 자처했는데,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들 중 한 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거의 구국의 영웅 취급이라 소련 치하 당시 카를 마르크스 상이 있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정작 현재의 우즈벡인들은 티무르의 후손들을 몰아내고 중앙아시아에 자리잡은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의 후손들이다. 우즈벡인들이 티무르를 숭배하는 이유는 아래 후술된 우즈베키스탄에서 문단 참조.반면 침략과 약탈, 그리고 학살을 당한 서아시아나 인도 등지에서는 악의 축 또는 마왕 취급을 받고 있다. 중근세 유럽에서도 잠시 인기가 있었는데, 이유는 당시 유럽의 적이었던 오스만 술탄국을 완파했기 때문이었다. 잠시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약탈하는 티무르군을 보고 "이 자들도 튀르크인만큼 잔인하지만 그래도 잘 모르는 자들보다 잘 아는 작자가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네치아나 제노바 등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국가들은 티무르군을 피하여 유럽으로 건너가려는 오스만인들을 실어다주기도 했다. 특히 오스만과의 일전 이후 구호기사단이 지배하고 있었던 스미르나를 말그대로 초토화시켰기에 기독교도라고 안전하지 않을 것은 뻔했기 때문이었던 것도 한 몫했다.
티무르는 문맹이었지만, 그가 활동했던 지역의 언어인 페르시아어와 튀르크어를 둘 다 유창하게 구사했고, 학자들을 불러 역사 및 과학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길 정도로 학식이 높았다. 그리고 무슬림으로서의 신앙심도 독실했다.
3. 이름
그의 이름을 페르시아어 기록에서는 티무르 이븐 타라가이 바를라스[7], 즉 '바를라스 부족의 타라가이의 아들 티무르'로 기록하고 있다. 바를라스(ᠪᠠᠷᠣᠯᠠᠰ) 씨족은 원래 몽골의 지배층에 속했던 보르지긴 씨족의 방계 중 하나였다. 바를라스 씨족은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이 아닌, 다시 말해 황금씨족이 아닌 혈통이었기 때문에 티무르는 칸으로 칭해질 수 없었다. 그의 이름인 '티무르'는 그가 당시 활동했던 지역의 언어인 페르시아어와 튀르크어의 영향으로 티무르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중세 몽골어의 원형 발음은 '테무르'에 가깝다. 이는 칭기즈 칸의 본래 이름인 테무진이 튀르크어로는 '티무친'으로 발음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또한 생전에 절름발이였다는 점에서 착안해 영미권에서는 '테멀레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4. 생애
티무르의 부계 혈통은 칭기즈 칸과 같은 보르지긴 씨족에서 갈라져 나온 바를라스 부족으로, 칭기즈 칸과 조상을 공유했다. 칭기즈 칸의 고조부인 툼비나이 세첸[8]의 장남 카불 칸의 증손이 바로 칭기즈 칸이었고, 3남 카출리의 증손이 티무르의 고조부인 카라차르(Qarachar)로, 칭기즈 칸의 사준사구 중의 한 명이었던 쿠빌라이의 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쿠빌라이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아닌 동명이인이다. 둘을 구별하기 위해 쿠빌라이 칸은 한자로 忽必烈 이라고 쓰고, 쿠빌라이는 忽必來 라고 쓴다.
그러니까 칭기즈 칸과 이들 형제는 8촌 형제 사이인 셈이었다. 카라차르의 씨족인 보르지긴 오복 바를라스(Barlas) 씨족은 칭기즈 칸과 혈통이 꽤나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의 보르지긴(Borjigin) 오복 키야트 씨족과 떨어져 살다가 칭기즈 칸이 세력을 키우자, 쿠빌라이와 카라차르의 아버지로 바를라스 씨족의 수장이었던 소쿠 세첸이 부족을 이끌고 칭기즈 칸에게 귀순했다.
칭기즈 칸의 제국이 세워지자 카라차르는 영토를 받고 "노얀"(Noyan)[9]의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카라차르 노얀은 칭기즈 칸의 차남 차가타이의 신임을 받고, 그의 영지(領地)인 차가타이 칸국(汗國)에서 살게 되었다. 그 후로 카라차르 노얀의 후손들은 대대로 차가타이 칸국에서 살았으며, 카라차르가 아들 이린기르를 낳고, 이린기르는 부르기르를 낳았으며, 부르기르는 티무르의 아버지인 타라가이를 낳았다. 타라가이 또한 조상의 작위를 이었기 때문에 차가타이 칸국의 노얀이었으나 그의 대에 들어서는 바를라스 가문의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군사적으로 재능을 발휘하여 대제국을 세운 티무르가 등장했다.
4.1. 서차가타이 칸국 장악
티무르는 바를라스 부족의 수령 집안 출신으로, 1336년 사마르칸트 부근의 도시였던 케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실제 출생년도가 1320년대 중반이라는 학설도 있다. 1336년은 일 칸국의 아부 사이드 칸이 사망한 해였다. 티무르 제국의 역사가들이 이슬람 세계에서 칭기즈 칸 일족의 지배를 티무르가 계승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티무르의 출생 연도를 이때로 정했다는 주장이다. 차가타이 칸국은 1347년 카잔 칸이 피살되면서 동부와 서부로 분열되었다.서부 차가타이 칸국에서는 카라우나스(Qara`unas)부의 수령이었던 아미르 카자간(Qazaghan)이 실권을 장악하고 칭기즈 칸 일족을 허수아비 칸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1358년 아미르 카자간이 살해당하고 서차가타이 칸국이 혼란에 휩싸이자 동부 차가타이 칸국의 칸이었던 투글룩 테무르[10](Tughluq Temur)가 1360년과 1361년, 두 차례 트란스옥시아나를 침공했다. 티무르는 이때 투글룩 테무르에게 귀속해 바를라스부의 수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투글룩 테무르 칸이 자신의 아들 일리야스 호자를 서차가타이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동차가타이 칸국으로 돌아간 후, 티무르는 그에 대항하며 점차 세력을 키웠다. 티무르는 그의 매부이자 카라우나스부의 수령이었던 아미르 후세인과 함께 동차가타이 칸국에 반기를 들었다. 1365년 일리야스 호자는 아미르 후세인과 티무르를 격파했으나 진중에 역병이 돌아 사마르칸트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동차가타이 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 티무르는 서차가타이 진영의 맹주가 된 아미르 후세인과 불화를 빚어 결별했다. 티무르는 약탈 집단을 이끌며 보여준 리더십으로 휘하 유목민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지도자로 부상했다. 특히 약탈물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370년에는 발흐를 근거지로 삼은 숙적 아미르 후세인을 격파하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유목집단들을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칭기즈 칸의 후예가 아니었던 티무르는 '칸'을 칭하지 못하고 '부마'[11]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다.[12] 그러나 그는 무슬림들의 지도자를 뜻하는 아미르(amir)라고 불리며 사실상 군주로 군림했고, 칭기즈 칸의 후손을 허수아비 칸으로 추대했다.
티무르의 아버지였던 타라가이(Taraqai)는 소지주에 불과했지만, 바를라스 가문 자체가 칭기즈 칸과 같은 불운은 겪지 않았다.[13] 그러나 생애에 비슷한 부분은 있는데, 초기에는 동지였지만 후에 대립하여 티무르에게 참수당한 아미르 후세인이 칭기즈 칸과 의형제였지만 결국엔 갈라선 자무카와 비슷하다.
4.2. 35년 동안의 대정복
티무르의 원정은 1370년부터 1405년까지 35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초기 10년 가량은 동부의 동차가타이 칸국, 서부의 호라즘, 북부의 킵차크 칸국에 대해 이루어졌다. 당시 동차가타이 칸국의 카마르 앗 딘은 칭기즈 칸의 혈족인 황금씨족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칸을 참칭[15]했고, 이를 빌미로 삼은 티무르는 1370년 동차가타이 원정을 감행하여 이를 성공리에 마무리지었다. 이어 1372년부터 1373년까지는 호라즘 지방을 공략했다. 이때 킵차크 칸국 동부(청장 칸국)의 군주였던 우루스 칸에게 반발하던 토크타미쉬라는 인물이 도망쳐 와 도움을 청하자, 티무르는 이를 빌미로 1375년부터 1377년까지 킵차크 초원 원정을 단행, 우루스 칸을 패퇴시켰다. 1379년 호라즘의 쿵그라트 왕조와 다시 전쟁을 벌인 티무르는 수도 우르겐치를 함락하여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다.
1380년 이후 티무르의 관심은 남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들인 미란샤를 호라산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1381년에는 아프간 지방의 헤라트를, 1383~84년에는 칸다하르를 점령했다. 이어서 이란 서부로 진출하여 마잔다란, 라이, 술타니야 등을 함락한 뒤 1386년에 귀환했다. 그 사이에 티무르의 후원으로 킵차크 칸국의 군주가 되었던 토크타미쉬가 타브리즈를 점령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자, 티무르는 배신한 그를 응징하기 위해 이란과 킵차크 등지에 대한 원정을 진행했다. 마침내 테레크 강 전투에서 티무르는 토크타미쉬를 격파했고, 1395년 킵차크 칸국의 수도였던 사라이를 파괴했다.
티무르의 북인도 진격로 | 델리 전투를 묘사한 16세기 무굴 제국의 삽화 |
그 후 인도 아대륙으로 관심을 돌린 티무르는 1398년 말, 북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투글루크 술탄국의 수도였던 델리를 약탈한 뒤 귀환했다. 그에게 있어 인도는 우상 숭배의 나라이자 재화의 나라였다. 이슬람에서 경멸하는 이교도의 나라였기에 이를 빌미로 지하드를 표방하여 쳐들어 간 다음 합법적으로(?) 약탈할 수 있었다. 이른바 티무르식 성전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시 북인도를 지배하고 있었던 나라는 델리를 수도로 삼은 이슬람 국가인 델리 술탄국이었다.
1392년[16]부터는 서아시아를 목표로 소위 7년 원정을 단행했다.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에 근거지를 둔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 세력을 격파한 뒤, 시리아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던 맘루크 세력을 몰아내고,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1402년에는 오스만 술탄국과 전쟁을 벌여 앙카라 전투에서 술탄 바예지트 1세를 생포하고, 1404년에 사마르칸트로 귀환했다.
티무르에게 대패한 뒤 감금된 바예지트 1세를 그린 회화.[17] |
오스만 술탄국을 쓰러뜨리고 난 다음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점령하여 유럽 정벌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지만 바이바르스가 이끌던 때와는 달라진 맘루크 왕조가 잔뜩 쫄아 사정을 하자, 같은 무슬림으로서 쳐들어가기 뭐해져 방향을 동쪽으로 돌렸다.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신흥 강국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명나라로 가는 도중이었던 1405년 2월, 시르다리야 하반의 도시 오트라르에서 병사하여 중국 원정은 무산되었다.
4.3. 급사, 그 이후
티무르가 앙카라 전투를 치를 무렵인 1402년, 동쪽의 중국 대륙에서는 성조 영락제와 혜종 건문제 사이의 대규모 내전인 정난의 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기회를 틈타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후손으로서의(원나라를 장성 이북으로 몰아낸 명나라에 대한) 복수심과 중국 대륙에 이슬람 국가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생각이 들게 되어 동진을 개시하게 되었다. 상대는 당시 정난의 변을 승리로 이끌고 난징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훗날 '영락성세'라고 불리는 명나라의 전성기를 이끌게 될 영락제 주체였다. 허나 동정을 준비하고 있었던 티무르가 행군 도중에 붕어하면서 끝내 이 세기의 대전은 벌어지지 않게 되었는데, 때문에 소소한 if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18] 티무르의 사인은 한겨울에 무리한 원정을 한 탓에 병을 얻은 것이었다. 그것도 경솔하게 한겨울에 얼음물을 마셔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그가 죽고 난 뒤 티무르 제국은 혼란기에 빠져들게 되었지만, 그래도 바로 붕괴하진 않고 100년 이상을 지탱했다. 사실상 티무르 개인의 탁월한 재능 하나로 세워진 제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존속기간도 사실 긴 편이다. 제국의 영토가 축소된 건 그 많은 원정을 치르면서도 뒷감당을 제대로 못한 티무르 탓이었고, 그나마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후손들의 능력 덕분이었다. 사마르칸트가 발전한 건 티무르가 보물들과 기술자들을 끌어 모은 것도 있었지만 후손들이 이들을 적절하게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후손들의 시대에는 주변 상대국들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가능하지만, 티무르의 시대도 그건 그리 다르지 않았다.
티무르의 시대에도 주변국이 마냥 약체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먼저 킵차크 칸국의 토크타미쉬 칸은 처음에 티무르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청장 칸국의 칸으로 시작해 백장 칸국을 병합하여 킵차크 칸국을 통일했으며, 러시아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던 류리크 왕조의 모스크바 공국을 털어버리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침공도 막아내며, 남쪽의 중동 지역까지 영토를 넓힌 킵차크 칸국의 중흥 군주였다. 그리고 오스만 술탄국의 바예지드 1세도 아나톨리아 반도의 상당수와 발칸 반도의 강국 불가리아를 정복한 정복군주였다.
티무르의 아들인 샤 루흐 미르자(Shahrukh Mirza)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티무르 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그의 아들인 울루그 베그(Ulug Beg) 또한 술탄인 동시에 뛰어난 수학자 겸 천문학자였다. 다만 티무르 제국은 티무르 사후부터 후계 문제로 불안정했고, 샤루흐 미르자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각지의 반란들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울루그 베그에겐 군사적 재능이 없었다. 그 때문에 재위 2년 만에 끔살당하고 말았다. 티무르 제국은 샤루흐의 손자이자 티무르의 증손이었던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1469년 백양 왕조의 우준 하산에게 패배하고 전사한 이후에 분열되어 쇠락하게 되었다. 그나마 동쪽의 호라산 지역은 다른 증손자였던 후세인 바이카라가 통합시켰으나 그마저 1506년에 사망한 후, 우즈베크 칸국의 샤이바니 칸이 침공하여 트란스옥시아나와 호라산을 장악해 티무르 왕조는 멸망했다. 다만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 남아있었던 티무르의 내손[19] 바부르가 남진하여 제1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로디 술탄국을 격파하고, 훗날 인도 아대륙의 패자가 되는 무굴 제국을 세웠다.
5. 칭기즈 칸과의 차이
5.1. 원정 방식의 차이
티무르와 칭기즈 칸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바로 원정 방식이었다. 티무르는 대부분의 원정에서 어느 한 곳을 확실하게 정복하지 않고 돌아갔다. 이 부분은 원정이라기보다 국가 규모의 노략질이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티무르는 중앙아시아~중동 지방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연결점이 있는 몽골보다 존재감이 작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위의 혹평과는 반대로 사마르칸트가 중심지인 티무르 제국의 수입만으로는 정복한 지역을 완전히 통제하에 두기 버거워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또 다른 의견으로 티무르가 원정을 행한 목적에 대해 유의할 필요성을 환기하는 것이 있다. 이에 따르면 티무르의 초기 원정은 외부 세력을 절멸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당시 트란스옥시아나 내부에는 티무르 외에도 여러 부족 세력들이 존재했다. 칭기즈 칸의 시대에 몽골 고원은 자무카 덕분에 적을 절멸시키는 것이 이미 등장했었다. 그나마도 《원조비사》 등에 기록이 남을 만큼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반면 티무르의 시대에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부족장을 죽이는 것은 엄청나게 위험한 짓이었다. 티무르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이들 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부하들을 키우려고 했다. 그 결과 티무르는 치세 중반에 차가타이 칸국의 대부족 2개를 해산시켰고, 그의 사후에는 나머지 부족들도 힘을 못 써 역사에 이름만 겨우 올릴 정도였다.
후기 원정은 애초에 티무르가 정복할 의지가 없었던 땅과 정복하려 한 땅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티무르가 여러 차례 원정을 행했던 킵차크 칸국과 이란 동부는 여러 부족 연합체의 지배하에 있었다. 티무르는 초기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부족 세력을 해체하거나 약화시키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알았기 때문에 굳이 이 땅을 세력화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란 동부는 두 번, 이란 서부는 최소 세 번, 러시아에도 두 번의 원정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무너진 국가는 의외로 적었다. 오스만 술탄국, 킵차크 칸국, 차카타이 칸국 등 다른 칸국들, 투글루크 왕조 델리 술탄국, 중앙아시아 일대의 여러 국가들은 전면전에서는 티무르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그가 휩쓸고 지나가자마자 연거푸 다시 일어서곤 했다.
점령해야 할, 또는 점령한 도시에 대한 태도도 달랐다. 칭기즈 칸은 살아 생전, 도시는 몇 번 본 적도 없고 방해되는 도시는 초토화시키는 유목민 생활에 익숙했다. 부하라가 칭기즈 칸이 발을 들여놓은 유일한 도시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티무르는 사마르칸트 인근의 케슈(Kesh)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어떤 기록에서는 케슈 인근에서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케슈 인근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은, 티무르의 바를라스 가문이 아주 쇠락하여 케슈와 같은 도시에도 거주하지 못했다는 근거로 보는 학자도 있다. 티무르도 사마르칸트 안에서 지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으며, 전쟁 중이 아니라도 사마르칸트와 케슈를 오가며 지냈다. 어쨌거나 티무르는 도시 생활에 익숙했던 도시인이었다.
또 칭기즈 칸은 일부 페르시아 측 사서에 보면 항복한 튀르크군을 죽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대체로 항복하거나 투항하는 적은 살려준 반면 티무르는 항복한 자들도 모조리 학살했다. 종교에 대해서는 관대했던 칭기즈 칸과 달리 티무르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자들 역시 죽였다.[20] 하지만 칭기즈 칸을 따라 티무르도 공예인이나 학자 등은 살려주었다. 그러나 정통성이 부족한 티무르는 학살을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했다. 칭기즈 칸을 연상시키는 학살을 통해 몽골족 부하들의 신임을 얻으려 한 것이다. 티무르의 정벌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슬람 문화로의 도시 건설을 제외하면 약탈과 파괴에 집중되어 있다. 티무르의 군대는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수입은 약탈에 의존해야 했다. 칭기즈 칸의 후예[21]답게 티무르 또한 엄청나게 잔인한 학살과 약탈의 명수였다. 칭기즈 칸처럼 해골로 탑을 쌓고 어린아이들을 말로 밟아죽였다.
사마르칸트의 건설은 그 잔혹함에 비해 이란과 무슬림 부하들의 신임을 얻기 위한 행동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수도 사마르칸트의 역사도 칭기즈 칸은 파괴하고 티무르는 건설했다.로 요약할 수 있을 정도이다. 티무르에 대한 책을 쓴 저널리스트 저스틴 마로치(Justin Marozzi)는 저서인 《티무르, 이슬람의 칼이자 세계의 정복자》[22]에서 사마르칸트를 티무르의 애인처럼 묘사했다. 무슨 보물을 가져다줘도 만족하지 못하는 여인으로...
5.2. 정치적 역량
칭기즈 칸과 대비되는 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이 티무르는 정복한 지역에 믿을 만한 대리인을 남기지 않았고, 그리하여 반란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자의 권력에는 손을 안 댄 적도 있었다. 그 외의 수많은 정복 사업들은 사마르칸트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재력을 모으는 방도였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23][24]확실히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의 발전에 많은 힘을 쏟았다. 하지만 정작 사마르칸트에 계속해서 오래 머무른 적은 없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 머문 기간이 2년 정도였고, 나머지 기간은 정복사업에 집중했다고 한다. 또한 사마르칸트에 돌아오면 사마르칸트에 지어놓은 정원들에서 지냈는데 이는 유목민들인 몽골족의 풍습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즉 사마르칸트의 정원은 도시민인 이슬람계의 문화를 따름과 동시에 정원에서 막사를 치고 지냄으로써 유목민인 몽골계의 문화도 따른 것이었다.
티무르는 국정 지도는 지도자에게, 종교 지도는 종교 지도자에게 맡겼다. 예언자 무함마드 이후의 이슬람 세계에서 관례처럼 종교와 국정을 지도자 한 명이 통치했다는 걸 생각한다면 나름 파격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칭기즈 칸은 기반이 잡히고 난 다음에는 진두에서 지휘하기보단 부하들에게 맡긴 편으로 호라즘 정벌 때 부하가 고생하자 직접 가서 부하를 도와준 정도는 있었다. 반면 티무르는 평생 선두에서 싸웠다. 한 번은 포위전 중 적이 "우리 둘 때문에 백성들이 고생하니 슬프다. 우리 둘의 결투로 끝장을 내도록 하자"고 말하자 진짜로 결투하러 갔다. 이때 부하들이 말렸지만 뿌리치고 적병들이 활로 쏴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문 앞에 서서 적에게 성에서 나오라고 요구했고, 적은 겁에 질려서 나오지 못했다. 그러자 티무르는 "자기 말도 못 지키는 놈은 살 가치가 없다"며 적과 그의 성을 갈아버렸다. 르네 그루세의 명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 따르면 우르겐치 성 공략전에서 발생했던 일화라고 한다.
6. 평가
이런 정복자형 역사 인물들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리기 쉽지만, 티무르는 좀 다른 의미로 평가가 엇갈린다. 한편에선 "그냥 인간백정일 뿐"으로 치부하지만, 한편으론 "역사를 바꾼 인물인데 다른 인간들이 철저히 묻어버렸다"는 식으로 평가한다.35년 동안 대원정을 벌인 티무르의 목적은 몽골 제국과 이슬람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으로, 평생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중동을 돌며 정복사업을 단행했다. 그가 무너뜨리거나 전쟁에서 이긴 세력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군사 강국이었다. 하지만 상대국이 대부분 몽골 제국 계열이나 이슬람 국가들이라서 이걸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예지트 1세에게 처음으로 보낸 친서에는 "넌 같은 무슬림이라 지금까지 봐줬는데 왜 지금 와서 덤비니?"라는 식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25]
칭기즈 칸이 그의 적들의 몰락을 그들의 단점으로 돌린 것처럼, 티무르도 비슷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알레포의 카디(이슬람 법관)에게 티무르는
"과인은 결코 잔학한 자가 아니오. 알라께서 과인이 치른 모든 전쟁에 대해 알고 계시오. 과인은 학살자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 과인의 적들이 겪는 고난은 결국 그들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는 것을 알라 앞에 맹세하오."
정도의 말을 했다는 소리가 있다.하지만 이것과 별개로 이라크, 이란, 튀르키예, 인도처럼 티무르에게 직접 갈려나간 나라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매우 나쁜 편이다. 그래도 러시아의 경우, 자신들의 철천지 원수였던 킵차크 칸국을 박살내서 평가가 나쁘지 않다. 안 그래도 킵차크 칸국은 비틀거리던 신세였다가 그나마 토크타미쉬 칸의 등장으로 되살아나는 시점이었는데 티무르와 싸우느라 엉망진창이 되었다. 물론 러시아 내에서도 타타르인,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부랴트인, 칼미크인 등 킵차크 칸국을 조상의 나라로 여기는 튀르크계·몽골계 민족들은 티무르에 대한 평가가 영 좋지 않다.
오스만 술탄국 정벌 당시 술탄인 바예지트 1세를 잡은 뒤 그의 앞에서 그의 아내와 딸들을 벌거벗기고 접대를 하게 했으며 그가 보는 앞에서 겁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다만 이건 세르비아 쪽의 얘기이고 이슬람 쪽에선 잘 접대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바예지트 1세의 아내와 딸을 면사포를 씌우지 않은 채 하녀들과 함께 있게 해서 바예지트 1세가 열이 뻗쳤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이런 악명높은 이미지가 나중엔 티무르의 조상인 칭기즈 칸에까지 번져서 칭기즈 칸의 악인화에 한 몫 했다는 것이 잭 웨더퍼드의 주장이다.
6.1. 군사적 재능
군사적으로 탁월한 천재였는데, 체스 애호가였던 티무르는 체스를 통해 군사적 능력을 키웠다. 그의 탁월한 군사전략과 전술로 들 수 있는 것은 기병을 활용한 기동전법과 현지의 무기 및 전술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 공포에 기반한 제압정책 등으로, 이 또한 칭기즈 칸의 그것과 유사하다. 또한 정벌을 나가기 1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고 그 동안 칭기즈 칸 못지 않게 첩보와 정보공작으로 상대방의 사기를 깎아먹는 데도 능했다. 칭기즈 칸이 몽골인들의 잔인성을 과장했던 것처럼 티무르도 출전하기 전에 그의 군대의 잔학함을 과장시킨 소문을 퍼뜨려 상대의 사기를 꺾었다. 티무르는 휘하의 군대를 아끼긴 했지만 봉급을 안 줘서 군인들의 수입은 약탈 뿐이었기 때문에 그의 군대가 잔인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또한 화약 병기, 코끼리, 기병 등 자신의, 혹은 상대방의 전술적인 요소들을 모조리 흡수하는 티무르의 탁월한 능력과 이렇듯 광대한 전선이 결합되었으니, 티무르 제국의 군대가 당대 중서부 아시아 최강이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동유럽의 공포이자 신흥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오스만 튀르크의 바예지드 1세도 티무르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이때 티무르는 전성기를 지난 노인이었다. 한미한 시작 이후로 제대로 된 세력을 갖추곤 난 뒤로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고, 오스만 튀르크와 맘루크 왕조가 복속하여 사실상 몽골 제국의 일 칸국 영토였던 서쪽 절반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
이렇듯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과 일 칸국, 킵차크 칸국 등의 잔재를 상당 부분 없앴으며, 서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여러 이슬람 세력도 줄줄이 개발살내버렸다. 게다가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에서 잘나가던 오스만 튀르크에게도 대패를 안겼다. '아직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이전'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술탄 바예지트 1세는 오스만 튀르크를 확고부동한 유럽 남동부의 패자로 만들어 오스만 제국의 제1차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티무르가 오스만군을 갈아버린 이후 오스만 제국은 공위시대를 맞이하여 10년 넘게 내전을 벌이며 잠시 영토 팽창이 저지되었으나 메흐메트 1세와 무라트 2세가 수습한 이후 다시 한 번 도약하게 된다.
6.2. 우즈베키스탄에서
본래 우즈베크인들은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의 후손으로, 티무르 제국을 몰아낸 후 그들의 국가를 세웠지만 현재 우즈베키스탄인들은 티무르를 국부로 취급하고 있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우즈베크인들은 원래 유목민족이었는데, 소련이 정권을 잡고 우즈베키스탄을 장악하면서 공산주의에 바탕을 둔 국가관을 내세웠다. 그러다보니 정착 생활에 기반을 둔 공산주의적 사고에 따르면 유목민족은 취급이 안 좋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유목민족인 본인들의 조상보다 자신들이 정복한 땅의 조상인 티무르를 우대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티무르 본인도 유목민족 출신이었지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 생활에 익숙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칭기즈 칸 같은 철저한 유목민은 아니었다.
또한 티무르 제국은 그 문화적인 역량이 극에 달했을 때 멸망해서 나라는 사라져도 예술인이나 학자들은 그대로였고, 이 문화적인 자원들은 그대로 후대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는 우즈베키스탄이 티무르 제국의 계승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주민들의 경우 우즈베크인 정복자들의 순수한 혈통만 있는 것은 아니며, 티무르 제국의 유민들 중 우즈베키스탄 땅에 그대로 잔류한 사람들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주민들의 생물학적인 조상이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우즈베키스탄이 티무르 제국의 계승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내세울 인물이 국제적으로 티무르보다 유명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인 점도 컸다. 1990년대 초 소련 붕괴 후에 우즈베키스탄은 자신들을 홍보하고 국제 사회에서 우대받기 위해 국가 홍보에 힘을 기울였는데, 티무르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티무르는 유목민과 도시민 사이의 적절한 혼합과 문화 발전에 힘을 기울인 동시에,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 정복자였던지라 정치적으로 선전하기에도 매우 유용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우즈베키스탄인들은 티무르의 후손들을 몰아냈던 역사에도 불구하고, 티무르를 국부로 취급하는 것이다. 근데 이때 홍보하면서 티무르가 몽골로부터 중앙아시아를 해방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가 사실이 아닌 걸 알았는지, 나중엔 몽골 제국을 부활시키려 했다고 은근슬쩍 말을 바꿨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대의 사마르칸트에는 소련 치하의 카를 마르크스 동상이 있었던 자리에 티무르의 동상이 들어서 있다.[26]
7. 중앙아시아에서의 계통 논쟁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4대 칸국 중 차가타이 칸국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차가타이 칸국은 본인이 티무르 제국을 건국할 때까지도 몽골 제국의 중앙아시아 정권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바를라스 부족은 보르지긴 씨족을 이루는 부족들 중 하나로 몽골에서도 알아주는 명문이었다. 칭기즈 칸의 출신 부족인 키야트 부족과 형제뻘인 혈통상의 이유와 몽골 제국의 개국공신들 중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사준사구 중 한 명인 쿠빌라이의 출신 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앞다퉈 자국의 영웅으로 경쟁하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7.1. 범투란주의의 영향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사이에서 티무르를 놓고 유튜브 등지에서 벌어지는 키배는 사실 인터넷 시대 이전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정작 두 국가는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였기 때문에 주된 논지는 티무르가 "자랑스러운 튀르크인들의 영웅"이며, 본인들이야말로 진정한 티무르의 계승자라는 맥락이다. 그러나 수많은 역사서에 기록된 티무르의 배경은 어느 방면에서 봐도 우즈벡이나 카자흐가 아닌 몽골인, 좋게 봐줘도 몽골계 중앙아시아인이다.몽골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중화인민공화국이 원나라 이전 몽골 제국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역사왜곡의 원조격인 범투란주의로 보고 있다. 헝가리에서 시작된 범투란주의는 중국의 역사왜곡에서 한발 더 나아가 태양어론과 같이 모든 언어가 튀르크어에서 왔으며, 과학적인 근거 없이 자국사인 괵튀르크를 넘어서 한민족의 고구려뿐만 아니라 만주족, 몽골족, 흉노족 등의 모든 기마민족은 모두 튀르크인의 후예거나 튀르크인 그 자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국의 역사왜곡과 같은 정치적인 목적이 매우 크며, 일종의 국뽕을 이용한 국민들의 단합과 충성심을 기르는 목적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서는 티무르가 몽골의 바를라스 부족 출신으로 몽골 제국의 부흥과 명나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는 것이 학계의 주류가 되자 그가 튀르크어를 사용했고, 스스로를 튀르크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몽골인이 아닌 튀르크인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7.1.1. 튀르크인 논쟁
7.1.1.1. 언어적 측면
몽골 제국의 영토 확장은 얼핏 엄청나게 많은 몽골 기마부대가 전 세계를 휩쓴 것으로 보여지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정복 지역에서 몽골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단 1%도 넘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이마저도 높게 쳐준 것으로, "몽골인이 없는 몽골 제국"으로도 농담이 오갈 정도의 처참한 인구 비율을 가진 나라가 바로 몽골 제국이었다.이러한 상황에서 티무르의 바를라스 가문과 같은 몽골 귀족들은 통치를 이어가고 군대를 소집하기 위해서 현지의 언어와 종교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몽골어를 할 수 없는 수많은 튀르크인들과 현지인들에게 모두 몽골어를 가르치고 교육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기 때문에 몽골 제국이 현지에서 진행한 대부분의 활동은 현지 언어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어난 티무르와 같은 2세대, 3세대 이후의 몽골 귀족들은 몽골어가 아닌 현지 언어를 모국어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티무르는 튀르크어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어에도 능통했기 때문에, 범투란주의의 논리에 따르자면 티무르는 튀르크인인 동시에 페르시아인이기도 한 것이 되니 자승자박이 따로 없다.
7.1.1.2. 유전적 측면
범투란주의자들의 또다른 주장은, 티무르의 조상들이 튀르크인들과 결혼을 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티무르는 튀르크인 반, 몽골인 반의 '투르코-몽골'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또다른 거대 민족 분류에 들어가는 페르시아인이 쑥 빠진 하나의 나사 빠진 가설에 불과하다. 과거로부터 우즈베키스탄 지역은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 수많은 교역과 인구가 오가던 지역이었는데, 그 곳에서 몽골 귀족들이 튀르크인들만 정확히 골라서[27] 결혼하고, 티무르가 몽골 반, 튀르크 반으로 맞춰서 태어날 확률은 불가능에 가깝다.이는 비단 튀르크인과 페르시아인에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닌데, 당대 수도 없이 이뤄지던 정략결혼을 비추어 봤을 때 티무르가 몽골인인가 튀르크인인가, 혹은 페르시아인인가 하는 논쟁은 아무 의미없는 논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건 동아시아인과 같은 몽골인종은 더더욱 아니며 심지어 징기스칸을 비롯한 황금씨족조차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흔히 생각하는 현대 몽골인의 외모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도 팩트이다. 실제 러시아 과학자의 복원동상이 흑백이라 오해가 있는데 동아시아인에게는 찾기 힘든 붉은머리 형질이 있다고 한다.
7.1.1.3. 결론
언어적, 유전적 분류가 의미없는 만큼 결국 남은 것은 티무르와 그의 바를라스 가문이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왔으며, 티무르가 무엇을 위해 싸워왔는가만이 그를 특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그의 가문이 통치를 위해 몽골 제국에서 차가타이 칸국으로 이주해 온 귀족 가문이었으며, 티무르는 스스로 칭기즈 칸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내전에 빠진 몽골 제국을 통합하는 동시에 제국의 부흥에 힘썼다는 것이다.실제로 티무르가 마지막으로 하고자 했던 전쟁도 명나라와의 전쟁이었다. 몽골로 돌아간 북원과 힘을 합쳐 명나라에게 복수하여 옛 몽골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당시의 튀르크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중국의 명나라에 복수를 해야 할 이유는 몽골과 관련되지 않는 한 전혀[28] 없었다.
8. 그 외
젊은 시절, 전투 도중 오른팔과 다리를 다쳐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티무르에게 부정적인 기록에서는 양을 훔치다가 양치기의 화살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반신마비가 되었다고 한다. 열전에서 티무르는 자신이 정통성이 없다는걸 알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는 걸 꺼리는 걸로 보여지며, 그의 신체적 장애에 대해선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런 절름발이로 하여금 세계를 지배하게 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절름발이 증세를 고칠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알라의 뜻이라며 치료를 거부한다. 앞에서 언급된 열전은 반쯤 판타지에 가깝지만, 원래 이런 저서들은 그 인물이 어떻게 평가받았는가 등을 알아보기 위해 이용된다.이 부상 때문에 그의 적들은 티무르를 멸시할 때 "절름발이 티무르(Tīmūr-e Lang)"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영어에서 티무르를 부르는 말인 "태멀레인(Tamerlane)"은 이것이 변형된 것이다. 어찌되었든 여기서 유래된 별명이 루스벨트 이전 세계 최강의 절름발이이다. 다만 당대의 공식 기록인 《승전기》에서는 티무르가 절름발이였다는 기록이 없어 그가 진짜 절름발이였는가에 대해 잠시 논란이 있었으나 소련에서 행한 유골 조사기록이 명백한 증거로서 기능해서 현재까지는 절름발이라는 의견이 대세이다. 《승전기》에 절름발이에 관련된 내용이 없는 것은 후손들이 티무르를 신격화하면서 조상의 단점을 감추기 위해[29] 적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8.1. 체스 매니아
티무르는 체스를 즐기는 온화한 인물로서 문화 진흥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체스를 통해 군사학을 연마했다고도 한다. 그의 치세하의 사마르칸트는 당대 최대 규모의 대도시로 성장했고, 문화 또한 발전했다. 여담으로 말로우의 희곡 《템버레인》에는"내 고향 사마르칸트는 대륙의 가장 먼 곳까지 유명해지리라. 그 곳에 나의 왕궁이 세워질 터인데, 그 빛나는 탑으로 인해 하늘이 무색해지고, 트로이의 탑이 떨치는 명성도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상당한 체스 매니아로, 왕과 룩을 동시에 공격해서 체스 한판을 이기고, 새로 점령한 마을에 샤루키아(왕: Shah+룩)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심지어 막내 아들의 이름은 아예 '샤 루흐(룩)'였다. 오죽하면 기존의 체스는 재미없다고 자신이 고안한 말 몇 가지를 더 추가한 후, 승급의 방식을 바꾼 티무르 체스라는 걸 만들었다. 다만 학자에 따라선 당시 이미 유행하던 형식이었다는 말도 있다.
8.2. 저주
티무르와 관련된 괴담이 있는데, 그의 왕묘에는whoever would dare disturb the tomb would bring demons of war onto his land
누구든지 감히 내 무덤을 건드리면 전쟁의 악마가 그 나라에 닥칠 것이다.
…라는 문구가 있었다[30]고 한다. 누구든지 감히 내 무덤을 건드리면 전쟁의 악마가 그 나라에 닥칠 것이다.
세월이 흐른 먼 훗날에 소련의 고고학자들이 유명한 시인이었던 알리셰르 나보이의 탄생 500주년을 맞아 티무르의 왕묘를 열었는데, 그 날이 하필이면 1941년 6월 22일이었고, 이에 기절초풍한 소련인들이 관뚜껑을 납으로 봉인하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이 도시전설 자체는 실화로, 티무르와 독소전쟁 발발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기묘하게 맞아 떨어지다보니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예이다.
1984년에 있었던 일본 NHK의 유명 다큐멘터리 <실크로드>의 촬영 과정 중, 1941년 6월 당시 티무르 왕묘 발굴에 참여한 촬영기사였던 영화감독 말릭 카유모프[31]를 인터뷰하면서 나온 증언이 있는데, <실크로드>에 나온 그의 증언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촬영이 시작된 당일 찻집에서 쉬고 있을 때 초라한 모습을 한 노인 3명 중 1명이 아랍어[32]로 쓰여진, 위 인용문과 비슷한 구절이 적힌 책을 들이대며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조사단의 고고학자들을 불러왔고, 그들은 노인들을 지팡이로 쫓아버렸다.[33] 그리고 (티무르의) 왕묘를 연 것이 1941년 6월 22일이었는데 아침 일찍부터 왕묘 주위에는 호기심에 이끌려 1,000명도 넘는 군중이 모여 있었다. 더운 계절이라 새벽 5시[34]부터 발굴을 시작했고, 대리석 판자를 걷어내자 절반 이상 썩은 나무 관이 나오면서 곧 티무르의 유해가 보였다. 인류학자였던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게라시모프(Mikhail Mikhaylovich Gerasimov, 1907~1970)가 관 속으로 내려가 티무르의 뼈를 하나씩 주워 위로 올렸다. (…) 왕묘의 학술조사는 그 날 하루로 끝났고,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이튿날에 들은 후 놀랐다. 발굴을 마친 뒤 나는 24일 타슈켄트로 돌아갔고, 바로 독소전쟁의 전선으로 출발했다.
이후로 독소전쟁에서 한동안 소련군이 불리한 형국에 있었는데, 발굴조사가 끝난 뒤 무슬림 전통 장례식을 거쳐 티무르를 재매장했고,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독일 제6군을 밀어붙이게 되면서 엄청난 임팩트를 남기게 되었다. 어쨌든 이 발굴조사로 티무르가 젊었을 때 낙마해서 장애를 입었다는 것과 티무르의 혈통은 페르시아계와 몽골계가 섞인 황백혼혈이라는 점, 이외에도 당대 기준으로는 꽤 키가 컸다는 점 등 여러가지 신체적인 특징이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초상화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2015년 12월 20일에 이 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
9. 점령지에 대한 공포 정치
티무르는 군사적 정복 이후 강력한 권력을 세우기 위해 공포 정치를 활용했는데, 대부분이 대규모 학살과 두개탑을 쌓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스파한을 점령했을 때 7만~10만 명을 학살(1387년)했다고 하는데, 피로 만들어진 강이 흘렀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이스파한의 인구가 15만~20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거의 절반을 전멸시킨 셈이었다. 게다가 그 희생자들의 두개골로 두개탑을 쌓아 경고를 했다고 한다. 델리 정복(1398년)에서는 북부 인도를 학살과 함께 초토화시켰다고 하며, 바그다드 학살(1401년)에서는 2만 명의 주민을 처형했다고 한다. 이때도 머리를 모아 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바그다드의 인구가 10만~15만 명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2만 명은 도시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바그다드는 애초에 몽골의 침공 이후 인구가 30만~40만 명에서 절반 이상 감소한 상태였는데, 여기에 티무르가 한 번 더 비슷한 짓을 저질러 다시 크게 인구를 잃었다. 다마스쿠스(1401년)를 약탈할 때도 학살을 자행했지만, 공예가들과 학자, 상인, 기술자들은 살려 사마르칸드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다마스쿠스는 이때부터 경제와 문화가 크게 쇠퇴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도 티크리트(Tikrit) 같은 수많은 작은 도시들에서도 학살을 자행한 후 두개탑을 쌓아 온갖 곳에 장식해 놓았다고 한다.10. 사마르칸트
티무르는 사마르칸트를 '동방의 로마'[35] 로 만들고자 했는데, 온갖 정복지에서 예술가, 공예가, 건축가들을 정착시켰다. 사마르칸트는 이후 매우 번영해서 인구 20만까지 증가하는 대도시로 성장했고, 비비하눔 모스크와 구르 아미르 등 건축물이 생겨났으며, 그 위치상 실크로드의 중요한 교역지로 부상했다. 애초에 동서양을 잇는 적절한 위치이기도 했고, 티무르가 온갖 가치 있는 사람을 잡아다가 이주시켰기 때문에 계속 인구가 증가했으며, 사마르칸트가 식량 생산이 되지 않는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앙아시아의 비옥한 계곡에 위치해 있어서 자라프샨 강(Zarafshan River)으로부터 물을 공급받아 비옥한 토양을 유지했으며, 계곡 일대에는 밀, 보리, 과일(특히 포도와 멜론), 채소 등이 자랐다. 또한, 주변 지역이 목축업에도 적합했기 때문에 다양한 가축을 키워 도시로 공급했다. 가장 큰 가치는 역시 실크로드, 즉 무역의 핵심지였고, 그 위치상 중앙아시아를 통치하기에 적합했다. 그렇게 사마르칸트는 140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고, 그의 사후에도 티무르 제국에서 번창했지만, 제국이 금방 해체 수순을 밟게 되면서 1500년대 무굴 제국의 설립으로 인구가 빠져나갔고, 마지막으로 1600년대에 무역 경로의 변화로 실크로드가 대체되며 쇠퇴하게 된다. 티무르 제국 전성기에는 지정학적으로 훌륭한 위치였으나, 막상 쇠퇴하게 되자 온갖 곳에서 (..) 공격받게 되는 허술한 위치가 되면서 숱한 전쟁과 내전, 약탈로 인해 경제가 파괴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인구가 이주하게 되었다. 결국 쇠퇴한 이후에는 인구가 1만 명까지 줄어들었다고 한다.11. 명나라에 대한 티무르의 승산
티무르는 명나라의 황제로 오른 영락제에게 도전장을 내밀며 동쪽으로 진군했지만, 예상과 달리 그의 승산은 높지 않다. 이는 티무르가 역대급 랭킹에서 맨 아래로 내려가며 나폴레옹, 한니발, 수부타이 등과 같은 천재적인 명수들에 비해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티무르는 주로 상대를 약탈하거나 소모전으로 약화시키는 전략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전술 외에는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정예 군대를 앞세워 전면전을 펼쳤지만, 창의적인 전술로 전장을 돌파해 적군을 붕괴시키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평가는 제국이라는 결과물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그의 전술은 일관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명나라는 중앙아시아의 평지와 달리 복잡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고, 영락제의 통치 아래 행정력과 중앙집권 체제가 완전히 갖추어진 매우 강력한 국가였다. 비록 티무르의 군사적 재능이 영락제보다 뛰어났을지라도, 영락제는 젊은 시절부터 유목민과의 긴 전쟁을 경험하며 전략적 이해를 쌓았고,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도 큰 소모를 겪지 않았다. 반면 티무르는 앙카라 전투에서 이미 상당한 소모를 겪고 있는 상황이었다.
티무르의 군사 전략은 유목민 특유의 기동성과 약탈을 바탕으로 적을 탈진시키고 고립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넓고 체계적인 방어망을 갖춘 명나라를 상대하기에는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티무르는 몽골처럼 철저히 파괴하고 점령하기보다는, 흉노처럼 치고 빠지는 전술에 가까웠다. 따라서 전장 상황이 어려워지면 약탈물을 챙겨 퇴각하는 형식이었고, 명나라를 함락시키는 정복전은 사실상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티무르는 다른 군사적 천재들처럼 창의적인 전술을 펼치지 못했기 때문에, 다양한 전투에서의 돌파구를 찾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유목민의 전술을 잘 알고 있는 영락제가 장기전을 유도하게 되면, 당시 이미 나이가 많았던 티무르로서는 긴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개전이 되었다 해도 그의 기민함 때문에 쉽게 손해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말한 것과는 다르게, 점령전보다는 오스만을 쳤을 때와 같이 상당한 약탈물과 노예를 챙기고 빠지는 흉노의 방식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12. 대중문화에서
훈족의 아틸라처럼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 및 동유럽에서 사람 인명으로 자주 쓰인다. 파생어인 '타메를랑'(Tamerlan)으로도 쓰이지만 원어로도 쓰이는 편이다. 예를 들면 우즈베키스탄의 축구선수 티무르 카파제가 있다. 상술한 1980년대 NHK의 <실크로드> 촬영팀은 티무르의 고향 마을에서 '티무르'라는 이름을 가진 학교 교사를 인터뷰하기도 했다.소련에서는 피오네르 산하의 봉사단체로, 티무르 소년단 운동(Тимуровское движение)이라는 것이 있었다. '티무르'라는 청소년과 그의 친구들이 선행(善行)하는 내용의, 소련 아동문학가 아르카디 가이다르의 1940년작 소설 《티무르 소년단》이 영화화도 되는 등 인기를 얻자 여기에서 따온 것이었다. 작가의 아들이었던 티무르 가이다르가 모티브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소련의 해군제독이 되었다. 그의 아들은 1990년대 초의 혼란기때 러시아 총리 권한대행이었던 예고르 가이다르였다.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에서는 시나리오 4 서역을 출발한 늑대에서 주인공급으로 등장한다. 또한 시나리오 2에서도 등장은 한다. 좀 시간이 걸려야되지만. 시나리오 설명부터가 티무르를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다. 시나리오 시작 시점의 능력치는 정치 80, 전투 98, 지모 91, 특기 건설, 문화, 등용, 전투 모든 특기를 가지고 있고, 병과 적성 보병 S, 궁병 A, 기병 S, 수군 E이다.
칭기즈 칸과 능력치 차이가 거의 없다. 아무래도 자칭 후손임을 인식한 듯 하다. 이벤트를 몇 번 보면 모든 능력치가 90 이상에 내정과 전투는 100을 찍는다. 인간이 아니다. 정확히는 정치 90 전투 100 지모 100으로 작중 인물들 중 가장 능력치가 좋다. 거의 혼자서 세계를 쓸어버릴 수 있는 수준의 능력치이다. 거기다가 처음부터 모든 전투 특기를 가지고 있고 이벤트 다 찍은 티무르는 여포의 무력과 제갈량의 지력을 갖춘 존재이다.
그렇지만 명나라가 군사력은 훨씬 더 강력하다. 거기다가 칭기즈 칸과 비교하면 부하들이 너무 부실하기 때문에 재빨리 사마르칸트를 전술의 도시로 만든 다음에 등용으로 좋은 인재들을 뽑는 것이 좋다. 근처의 오스만 술탄국을 물리치고 운이 좋게 바예지드 1세가 등용되거나 킵차크 칸국에서 토크타미쉬 칸을 물리치고 부하로 등용하면 좀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신한 토크타미쉬를 죽여야 티무르의 능력치가 더 오른다는 문제가 있다... 안 그래도 이미 강력한 인물인지라 딱히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부하들이 부실한 나머지 티무르에게 능력치를 몰빵한 모양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이 부하들이 없어도 충분히 혼자서 세계를 쓸어버릴 수 있긴 하다. 또한 티무르가 생존했던 시기 중앙아시아 지역은 적지 않은 군소국가가 난립하여 티무르에게 저항하거나 위기에도 몰아넣었던 세력이 적지 않았지만, 게임에서는 이 국가들이 전부 구현되지 않아서 의외로 쾌적한 플레이가 가능하다..
<미디블2: 토탈 워> 에서의 티무르 제국의 군대는 이벤트성이긴 하지만 탱크에 해당되는 코끼리 포병을 가지고 있어 사실상 최강의 군대이다. 덕분에 몽골과 더불어 튀르크 팩션의 난이도를 극악적으로 올려주시는 원인 중 하나다. Game FAQs의 공략 중에는 몽골은 두 번째로 끔찍한 악몽이라고 해놓고 티무르 제국을 묘사할 때 최악의 악몽이라고 써놨다. 물론 첫째 웨이브에서의 출연 순서상 칸은 아니지만 티무르 본인도 등장한다. 대신 이름도 듣지 못한 사람이 칸으로 나와서 가끔 유저가 티무르 본인을 매수하는 충공깽한 일도 일어난다.
에드거 앨런 포가 《Tamerlane》이라는 제목으로 티무르를 주인공으로 한 시를 썼다. 그 외에 크리스토퍼 말로가 《템버레인》이라는 제목의 희곡을 쓰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이란계 유목민인 스키타이족으로 나온다. 사실 유럽인들은 스키타이인과 튀르크인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페르시아 제국부터 시작해서 튀르키예와 아프리카까지 정복하고, 마침내는 자신이 신보다 위대하다며 《쿠란》을 불태우지만 결국 그것이 저주가 되어 사망한다는 내용이다. 희곡이 쓰일 당시 영국에서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했고, 티무르는 거기에 딱 맞는 인물이었다. 이 작품은 특유의 무신론적인 요소와 바예지드 1세의 아내의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과 같은 잔인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다. 티무르는 자신이 전쟁의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얘기한다.
그 외에 <타메를라노>(Tamerlano)라는 제목의 오페라도 있다. 하지만 극중 위치는 악역이다. 바예지드 1세를 전투에서 물리치고, 패배자가 된 바예지드 1세의 왕녀와 결혼하려 하자 그 왕녀와 샤바샤바하던 그리스 왕자 및 원래 티무르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던 이레네라는 여인이 끼어들어 방해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티무르의 별명을 딴 테머레인 체스라는 변종 체스도 존재한다. 기존의 체스에 낙타, 공성병기, 기린 등의 새로운 말이 추가되어 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에서 티무르를 주인공으로 한 캠페인이 나왔다. 자세한 것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캠페인 공략/티무르를 참고. 구글에서 'Age of empires 2 the last khans art'로 이미지 검색을 하면 나오는 라스트 칸의 자켓 또는 팬아트에 해당되는 아트에서 중앙에 있으며, 투구를 쓰고 어깨 위에 외투 비슷한 것을 걸치고 있는 인물이 티무르다. 티무르의 우측에 검을 든 인물은 이바일로이며, 티무르의 좌측에 활을 들고 있고 쿠만 마스크를 쓴 인물은 코티얀(쾨텐) 칸이다. 모두 결정판에서 개인 캠페인이 있다.[36]
아래는 티무르를 소재로 한 은행광고이다. 지금은 사라진 은행이지만 역사를 소재로 많은 광고를 찍었고, 아래의 동영상도 그 중 하나이다.
14세기의 티무르 제국.
티무르의 명령으로 그의 전사들은 전장에 나갈 때 길에 돌을 쌓아두어야 했다. 언덕은 점점 커져갔다.
불과 승리가 있었다. 그 후에 전사들은 돌아오며 그들의 돌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남겨진 돌들이 있었다.
티무르는 마지막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는 무거운 돌들을 들고 오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이름들을 기억하며.
티무르.
세계의 역사.
임피리얼 은행.
티무르의 명령으로 그의 전사들은 전장에 나갈 때 길에 돌을 쌓아두어야 했다. 언덕은 점점 커져갔다.
불과 승리가 있었다. 그 후에 전사들은 돌아오며 그들의 돌들을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남겨진 돌들이 있었다.
티무르는 마지막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는 무거운 돌들을 들고 오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이름들을 기억하며.
티무르.
세계의 역사.
임피리얼 은행.
《몽골 사용 설명서》를 집필한 작가 두눈뜬왕의 차기작이었던《티무르 사용 설명서》에서 주인공인, 고려의 왕족 출신이자 환생한 현대인인 왕 타르칸의 주군이자 장인어른으로 등장한다. 첫 등장은 토크타미쉬 칸의 부하를 쓰러뜨린 타르칸을 칭찬하면서 자신이 그대의 정당한 왕좌(고려 왕)를 찾아주겠다고 약속한 걸 잊지 않았다고 말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여기서는 《승전기》의 설을 따라 1327년생으로 설정되어 최신화 기준으론 이미 60대 노인인 것으로 묘사되며, 자신을 닮은 모계 황금씨족이자 전장에서 엄청난 무력을 보이는 타르칸의 모습에 감탄하여 그에게 자신의 막내딸을 주고 고려의 왕위를 되찾아 줄 것을 약속하면서까지 붙잡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주인공의 활약으로 원래 역사보다 빠른 페르시아 장악과 토크타미쉬 제거를 이뤄냈으며, 원래 역사보다 10년이 빠른 1391년부터 동방 원정을 위한 준비를 진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1398년부터 동방 원정을 시작, 섬서성과 양양성을 정복하고 명 혜종 건문제의 중앙군과 영락제를 연이어 격파했으나 전투 중 낙마로 인한 합병증으로 원래 역사보다 5년 빠른 1400년에 사망한다.
프랑스 영화 <울프 콜>에서 이슬람 테러집단이 러시아의 부패한 장성에게서 밀구입한 SSBN 함명으로 '티무르 3호'라는 함명이 나온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소설 《고양이, 문명, 행성》에서 쥐 방면의 대장 역할로 등장한다.
13. 관련 문서
[1] 몽골어로 철을 의미하며, 칭기즈 칸이 등장한 13세기 이후, 그의 본명인 테무(철)진(~는 사람) 중 '태무-'의 원형이 테무르이기 때문에 몽골의 영향권에 들어간 모든 지역에서 매우 인기있는 이름이 되었다. 몽골계 황족 계층에서도 물론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이름 중 하나였으며, 몽골 제국 대칸 중에서도 1대, 6대, 10대, 12대, 15대, 17대, 21대, 22대, 23대 대칸까지 무려 9명의 대칸의 이름에 테무르가 포함되었다. 대칸이 아닌 황족과 군인까지 따지면 당대 테무르(철)의 의미를 포함한 이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몽골에서 차고 넘쳤다. 심지어 몽골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고려의 공민왕과 몽골의 다루가치였던 태조 이성계의 조부(이춘)까지도 몽골어 이름에 테무르를 포함하여 작명했을 정도였다. 여담으로, 청나라의 건국조인 누르하치의 6대조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또한 몽골의 영향으로 지은 이름이 뭉케 테무르였다.[2] 몽골어: ᠳᠣᠭᠤᠯᠤᠩ ᠲᠡᠮᠦᠷ, 더걸렁 테무르
페르시아어: تیمور لنگ, 테무리 랑
영어: Tamerlane, 태멀레인[3] 훗날 술탄에 오르는 후세인 바이카라의 조부(1356 ~ 1394)[4] 티무르의 공식적인 후계자였던 마흐무드 술탄과 피르 무함마드의 아버지(1356 ~ 1376)[5] 티무르 제국의 제2대 군주였던 칼릴 술탄의 부친이자 무굴 제국의 창건자였던 바부르의 고조부(1366 ~ 1408)[6] (1377 ~ 1447)[7] تيمور ابن ترغيى برلس, Tāāmūūr ibn Tāraġaiyi Bārlās[8] 현명한 자[9] 몽골에서 장군을 이르는 말로, 나중에는 일종의 작위가 되었다. 현대 몽골어로는 조선의 "양반"과 같은 어감의 귀족 계급으로 인식된다.[10] 티무르와 같은 이름이 포함된다. 현대에 들어서는 다르게 표기되고 있으나, 당대에는 같은 의미였기 때문에 티무르와 테무르를 구분하는 일은 없었다.[11] 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12] 같은 보르지긴 씨족이라도 칭기즈 칸의 후손과 격에서 차이가 있었다.[13] 잭 웨더퍼드가 지은《칭기즈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라는 책의 평중에는 "칭기즈 칸만큼의 불행을 극복하고 승리한 다른 예는 거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칭기즈 칸의 젊은 시절은 암울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14] 이를 몽골 학계에서는 제국 내의 힘겨루기 내전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15] 이는 명분으로써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다.[16] 이 해에 한반도에서는 조선 왕조가 건국되었고, 무로마치 막부가 난보쿠초 시대를 종식시킨 뒤, 일본 열도의 유일무이한 주인이 되었다.[17] 지팡이를 짚은 수염 난 남자가 티무르이고, 앉아 있는 노인이 바예지트 1세이다. 실제로는 당시 티무르가 고령의 노인이었고, 바예지트 1세가 중년이어서 연령이 잘못 묘사된 그림이다.[18] 티무르 제국의 역사서인 《승전기》에는 영락제가 "너 7년 동안 나한테 한 번도 조공 안 바쳤더라? 죽을래?"라고 말하자 티무르가 "밀린 7년치 내가 직접 갖다줄게."라며 받아쳤다고 한다. #[19] 증손자의 손자[20] 심지어 티무르가 살려줄 법한 구 몽골 제국령 지역의 몽골인이나 무슬림이라 해도 티무르가 아닌 다른 군주를 끝까지 섬기는 자라면 마찬가지로 그런 학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21] 혹은 그렇게 자처하는 자[22] 《Tamerlane: Sword of Islam, Conqueror of the World》[23] #[24] 근데 이러한 비판은 티무르에게는 억울하다. 왜냐하면 그가 태어났던 곳 자체가 몽골계 국가와 이슬람 국가가 자리잡은 서아시아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 칸도 자기들과 비슷한 몽골계 부족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을 멸망시키고 몽골 초원을 통일해 몽골 제국을 세웠다. 거기다가 기존의 이슬람 국가라고 해서 저희들끼리 잘 지낸건 아니라서 호라즘 왕조의 무함마드 2세는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호라즘 왕조를 크게 넓혔는데 그가 상대한 국가의 대부분은 이슬람을 믿는 국가였고 그나마 서요나 몽골 제국은 확실히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나라는 아니긴 했으나 서요의 경우 지배층만 이슬람을 믿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슬람을 믿었다.[25] 이 친서에 대해 첨언하면 오스만을 비롯해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에 할거해 있었던 여러 튀르크계 공국들은 룸 술탄국에서 갈라져 나갔는데, 각지의 지방 세력들이 독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룸 술탄국이 몽골 제국의 침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즉, 티무르의 논리는 '한때 아나톨리아 반도를 일 칸국, 즉 몽골이 통치했으니 이제 내가 통치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티무르가 주장한 전쟁 명분의 대부분은 지하드였다.[26] 또 다른 국부이자 다른 동상의 모델은 우즈베키스탄 최고의 시인이었던 알리셰르 나보이이다.[27] 그마저도 혼혈이 이뤄지지 않은 순수 튀르크인. 물론 그런 인류는 존재하지 않는다.[28] 괵튀르크, 즉 돌궐이 중국의 당나라와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에 명분이 있다고 하는 범투란주의자들도 있으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1405년을 기준으로 봐도 무려 661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29] 절름발이라는 것은 명백한 단점이니[30] 는 전승이 전해졌다.[31] Malik Kayumov, 1912~2010[32] 아랍 문자로 쓰여진 다른 언어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카유모프의 증언을 따름.[33] 이후 카유모프는 그 노인들과 책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34] 이 시각을 사마르칸트 기준이라 가정했을 때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벨라루스의 브레스트는 대략 새벽 2시경이었다. 독소전쟁은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35]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인구가 5만에서 7만 명으로, 과거 40만 명에서 이 정도까지 줄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인구 감소는 충격적이게도 대부분의 원인이 이주보다는 전염병과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라고 한다.[36] 티무르 - 타타르, 이바일로 - 불가리아, 코티얀 칸 - 쿠만
페르시아어: تیمور لنگ, 테무리 랑
영어: Tamerlane, 태멀레인[3] 훗날 술탄에 오르는 후세인 바이카라의 조부(1356 ~ 1394)[4] 티무르의 공식적인 후계자였던 마흐무드 술탄과 피르 무함마드의 아버지(1356 ~ 1376)[5] 티무르 제국의 제2대 군주였던 칼릴 술탄의 부친이자 무굴 제국의 창건자였던 바부르의 고조부(1366 ~ 1408)[6] (1377 ~ 1447)[7] تيمور ابن ترغيى برلس, Tāāmūūr ibn Tāraġaiyi Bārlās[8] 현명한 자[9] 몽골에서 장군을 이르는 말로, 나중에는 일종의 작위가 되었다. 현대 몽골어로는 조선의 "양반"과 같은 어감의 귀족 계급으로 인식된다.[10] 티무르와 같은 이름이 포함된다. 현대에 들어서는 다르게 표기되고 있으나, 당대에는 같은 의미였기 때문에 티무르와 테무르를 구분하는 일은 없었다.[11] 몽골어: 쿠르겐, 페르시아어: 귀르겐[12] 같은 보르지긴 씨족이라도 칭기즈 칸의 후손과 격에서 차이가 있었다.[13] 잭 웨더퍼드가 지은《칭기즈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라는 책의 평중에는 "칭기즈 칸만큼의 불행을 극복하고 승리한 다른 예는 거의 없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칭기즈 칸의 젊은 시절은 암울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14] 이를 몽골 학계에서는 제국 내의 힘겨루기 내전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15] 이는 명분으로써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다.[16] 이 해에 한반도에서는 조선 왕조가 건국되었고, 무로마치 막부가 난보쿠초 시대를 종식시킨 뒤, 일본 열도의 유일무이한 주인이 되었다.[17] 지팡이를 짚은 수염 난 남자가 티무르이고, 앉아 있는 노인이 바예지트 1세이다. 실제로는 당시 티무르가 고령의 노인이었고, 바예지트 1세가 중년이어서 연령이 잘못 묘사된 그림이다.[18] 티무르 제국의 역사서인 《승전기》에는 영락제가 "너 7년 동안 나한테 한 번도 조공 안 바쳤더라? 죽을래?"라고 말하자 티무르가 "밀린 7년치 내가 직접 갖다줄게."라며 받아쳤다고 한다. #[19] 증손자의 손자[20] 심지어 티무르가 살려줄 법한 구 몽골 제국령 지역의 몽골인이나 무슬림이라 해도 티무르가 아닌 다른 군주를 끝까지 섬기는 자라면 마찬가지로 그런 학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21] 혹은 그렇게 자처하는 자[22] 《Tamerlane: Sword of Islam, Conqueror of the World》[23] #[24] 근데 이러한 비판은 티무르에게는 억울하다. 왜냐하면 그가 태어났던 곳 자체가 몽골계 국가와 이슬람 국가가 자리잡은 서아시아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즈 칸도 자기들과 비슷한 몽골계 부족들과 전쟁을 하여 그들을 멸망시키고 몽골 초원을 통일해 몽골 제국을 세웠다. 거기다가 기존의 이슬람 국가라고 해서 저희들끼리 잘 지낸건 아니라서 호라즘 왕조의 무함마드 2세는 '제2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호라즘 왕조를 크게 넓혔는데 그가 상대한 국가의 대부분은 이슬람을 믿는 국가였고 그나마 서요나 몽골 제국은 확실히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나라는 아니긴 했으나 서요의 경우 지배층만 이슬람을 믿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슬람을 믿었다.[25] 이 친서에 대해 첨언하면 오스만을 비롯해 당시 아나톨리아 반도에 할거해 있었던 여러 튀르크계 공국들은 룸 술탄국에서 갈라져 나갔는데, 각지의 지방 세력들이 독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룸 술탄국이 몽골 제국의 침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즉, 티무르의 논리는 '한때 아나톨리아 반도를 일 칸국, 즉 몽골이 통치했으니 이제 내가 통치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티무르가 주장한 전쟁 명분의 대부분은 지하드였다.[26] 또 다른 국부이자 다른 동상의 모델은 우즈베키스탄 최고의 시인이었던 알리셰르 나보이이다.[27] 그마저도 혼혈이 이뤄지지 않은 순수 튀르크인. 물론 그런 인류는 존재하지 않는다.[28] 괵튀르크, 즉 돌궐이 중국의 당나라와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에 명분이 있다고 하는 범투란주의자들도 있으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1405년을 기준으로 봐도 무려 661년 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29] 절름발이라는 것은 명백한 단점이니[30] 는 전승이 전해졌다.[31] Malik Kayumov, 1912~2010[32] 아랍 문자로 쓰여진 다른 언어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카유모프의 증언을 따름.[33] 이후 카유모프는 그 노인들과 책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34] 이 시각을 사마르칸트 기준이라 가정했을 때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벨라루스의 브레스트는 대략 새벽 2시경이었다. 독소전쟁은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35]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인구가 5만에서 7만 명으로, 과거 40만 명에서 이 정도까지 줄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인구 감소는 충격적이게도 대부분의 원인이 이주보다는 전염병과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라고 한다.[36] 티무르 - 타타르, 이바일로 - 불가리아, 코티얀 칸 - 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