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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5:36:10

에드거 앨런 포

<colbgcolor=#000><colcolor=#fff> 에드거 앨런 포[1]
Edgar Allan Poe
출생 1809년 1월 19일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사망 1849년 10월 7일 (향년 40세)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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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3cm[3]
가족 아내 버지니아 엘리자 클렘 포 (1836년 ~ 1847년, 사별)
학력 버지니아 대학교 (중퇴)
미국육군사관학교 (퇴학)
직업 시인, 단편소설가, 편집자, 문학 비평가
장르 고딕물, 미스터리, SF, 시문학
사조 암흑낭만주의
서명
파일:Edgar_Allan_Poe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2.2. 군인 생활2.3. 작가로서2.4. 말년2.5. 포와 2.6. 사망에 관한 의혹
3. 작품 특징
3.1. 시3.2. 소설
4. 대표작
4.1. 시4.2. 소설4.3. 유레카(Eureka)
5. 한국 번역6. 여담7. 매체에서의 모습
7.1. 문학7.2. 영화7.3. 뮤지컬7.4. 만화
8.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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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작가, 시인. "공포와 환상"을 다룬 작품들로 유명하다.

데뷔작은 시집이었으나 많은 인기를 끌지는 못했고, 이후 시집을 두 편 더 냈으나 마찬가지로 인기를 끌지 못했으며, 그 즈음부터 시보다 소설을 주로 쓰기 시작한다. 소설의 경우에는 단편 소설을 즐겨 써서 장편은 단 하나밖에 없다. 포가 단편을 즐겨 쓴 이유는 평상시 소설을 창작하는 것 이외에 잡지를 편집하는 일로 바빴던 탓도 있지만, 포 스스로도 단편이 장편보다 미학적인 가치가 높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셜록 홈즈보다 반 세기 앞서서 안락의자 탐정이 활약하는 미스터리 단편인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이라든지, 《한스 팔의 전대미문의 모험》같은 프로토 SF 소설, 《어셔가의 몰락》이나 《검은 고양이》 같은 공포 소설을 쓴 장르문학의 선구자로서의 면이 종종 부각되는 반면, 그의 고향인 미국을 위시한 영어권에서는 영문학적 관점에서 근대 미국 문학의 뿌리를 이루는 위대한 시인이자 작가로서의 평가 쪽이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다.

포는 19세기와 20세기의 근현대 문학에서 현대의 SF, 미스터리, 호러 장르에 이르기까지 깊고 넓은 영향을 끼쳤다. 문학사적으로는 영어권 고딕 문학의 적통을 잇는 작가로 간주되며, 20세기 SF미스터리 소설의 선구자로도 존경받고 있다. 장르를 불문하고 시적이며 미학적인 문장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예를 들어 그의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대표작 《갈가마귀(The Raven)》는 영문학사에 길이 남는 유명한 시이자 문학적 으로도 자리잡았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이 시에 등장하는 "Quoth the raven", "Nevermore" 등 어구는 미국의 유치원생들도 안다.[4]

2. 생애

후술하겠지만, 포의 인생은 불운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모난 성격과 그로 인한 가난 때문이었다. 19세기는 작가들이 출판 계약을 따내도 금액이 100달러 선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시기란 걸 감안해도, 포가 쓴 글들 중에서 그나마 제일 성공했던 《The Raven》도 쓰고 나서 달랑 9달러 받았다.[5] 또한 당시 개판이었던 미국의 저작권 상황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다른 잡지나 매체에 실려도 돈 한 푼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편집자로 일할 당시에도 겨우 10달러의 주급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동시기 미국의 노동자들이 받은 주급이 7~10달러 정도였으므로 당시 기준으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급여는 아니었지만, 사후 포가 얻은 명성에 비하면 역시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결국 생전에 포는 편집자 혹은 비평가로만 조금 알려졌을 뿐[6] 작가로는 알려지지 못했고, 포의 사후(死後)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그의 글을 우연히 보고[7] 포의 소설을 프랑스어번역하여 전집을 출판, 이 전집이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게 된다.[8]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의 재발견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과 다른 유럽으로 퍼졌고, 비로소 미국이 작가로서의 에드거 앨런 포를 다시 보게 되면서 미국 내에서도 유명해졌다.

2.1. 유년

불쌍하게도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는 포가 1살 때 집을 나가고, 어머니는 포가 2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서 포는 어릴 적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부유한 담배 상인인[9] 존 앨런 아래에서 자랐다.[10]

14살에 수양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하였고 기숙학교입학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성적이 좋아 미래가 기대되나 동시에 항상 공상에 잠겨있는 학생이었다고 되어 있다. 포는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는데, 그의 멀리뛰기 기록이 21피트 6인치(약 6.5~6m)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시를 좋아하는 윌리엄 헨리와 오랫동안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으며[11] 다른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게 보내는 연애 편지를 대필해서 누이동생인 로잘리를 통해 전달하기도 하는 등, 글쓰기에 소질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즈음 포는 타국에서 사춘기를 보내던 자신을 유일하게 친절히 대해주었던 친구의 어머니 제인 스태넛 부인을 연모하지만, 이듬해 스태넛 부인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크게 상심하고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다. 이때 포는 부인을 간호하던 소녀 중 한 명이었으며 동향 리치먼드 출신이었던 사라 엘미러 로이스터와 친해지고, 두 사람이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정식으로 약혼까지 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17살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포는 당시 부유한 상인 자녀들이 들어갔던 버지니아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입학 당시에는 성격이 굉장히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대학 동기들과 잘 지내보기 위해 당시 버지니아 대학교 내에서 유행했던 도박을 접하고부터는 에 빠지고 까지 지게 되어 1년 만에 퇴학당한다. 다만 포의 대학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여성인 루이자 패터슨과 바람을 피던 중이라[12] 집안일에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던 포의 수양아버지인 존 앨런은 포가 술과 도박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접하고 당장 그만두라고 충고하며 포를 질책했지만 포는 충고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존 앨런과의 사이가 크게 벌어져 화가 난 존 앨런이 포의 학비를 끊어버렸고, 이를 벌기 위해 도박을 했으나 오히려 2천 달러(현재 가치로 3만 4천달러) 의 빚을 지는 바람에 퇴학당했던 것이다. 양부는 포의 빚을 갚아주는 것을 거절했다.

대학에서 퇴학당한 직후 설상가상으로 약혼녀 엘미라 로이스터가 양가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좌절하여, 포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 버리자 포는 완전히 절망에 빠진다. 그녀와의 연애는 포의 첫 시집 《태멀레인(Tamerlane)》과 두 번째 시집 《알 아라프(Al Aaraaf)》의 소재가 된다.

2.2. 군인 생활

이후 포는 생활고 때문에[13] 양부 이름과 나이를 속여 미합중국 육군에 들어간다. 입대한 지 5개월 만에 설리반 섬으로 배치받은 포는 맡은 임무를 잘 처리하여, 1829년 1월 사병으로서는 최고 지위인 특무상사에 올라간다. 포는 설리반 섬의 생태를 관찰하면서 자연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설리반 섬의 경험은 황금충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포는 이왕 군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육군 장교가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양부의 추천장으로[14] 뉴욕 주에 위치한 웨스트포인트미국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하지만 독서조차 할 수 없는 강압적인 사관학교분위기, 예민한 성격으로 인하여 발생한 상관 및 동료들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포는 근무를 소홀히 하기 시작하고, 장교로서의 삶에 대한 전망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다시 술에 빠져든다.

결국 포는 육사에서 제대로 찍혀 퇴학당하고 불명예 전역하게 된다.[15] 이 때문에 양부와의 관계는 완벽하게 파탄나서 포한테 크게 실망하며 빡칠 대로 빡친 양부 존 앨런은 포와 의절을 선언하고 호적에서 파버렸고 포를 에서 완전히 내쫓았다.

2.3. 작가로서

이미 군복무 중 2권의 시집을 자비 출판한 경력이 있었던 포는 군에서 쫓겨난 직후인 1831년, 육사 친구들의 출자로 3번째 시집을 출판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집에서 나온 포는 형의 소개로 알게 된 고모, 마리아 클램의 집에서 살게 된다. 여기에서 그의 평생의 사랑이었던 버지니아 클램을 만나게 된다. 포가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냐면, 안 그래도 가난한 고모의 집에 포까지 얹혀 살다보니 부담이 되어서 고모가 다른 사촌[16]에 버지니아를 보내려 했더니 포가 식겁했기 때문에 끝까지 같이 살았다. 소녀 버지니아 클램 역시 빛나는 문학청년인 포를 가슴 깊이 숭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1833년 단편소설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가 볼티모어 지역의 신문사가 주최한 공모전에 당선되어 상금을 받자, 에드거 앨런 포는 돈을 벌기 위해 본격적으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유명하지 않다 보니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포는 이에 절망해서 또 술을 가까이 하게 된다.

1836년, 27세의 포는 13세의 사촌동생 버지니아 클램과 결혼한다. 결혼 문서에는 버지니아의 나이를 21세로 허위 신고했다. 다만 포가 페도필리아 였던 것은 아니고 당시 미국 남부 사회에서는 집안 내 결혼은 흔한 것이었다. 사춘기에 막 접어든 소녀들의 결혼도 결코 드물지 않았다. 실제로 마리아 클램의 집은 할머니, 고모, 버지니아로 구성된 대가족이었는데, 이것은 19세기 남부의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였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마리아 클램의 숙박업과 포의 할머니가 독립유공자 배우자로서 받고 있는 작은 연금에 의존하여 살고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포와 버지니아가 결혼한 1836년은 포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가족의 생계가 곤란해진 시기였고, 포는 경제적 압박 때문에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친혈육인 클램의 가문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며 무척 불안해했다고 한다. 포가 처음으로 편집 일을 했던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의 잡지의 편집장 화이트도 포와 버지니아는 부부라기보다 남매 같은 사이였다고 증언했고, 갈까마귀가 성공하여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포는 다른 여성들과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손님이 집에 들렀다 목격한 증언에 의하면, 아파 누워 있는 버지니아는 고양이를 껴안고 이불을 덮고 누워서 자고 있고, 곁에는 포와 장모인 고모가 각각 버지니아의 차가운 을 잡아줘야 체온이 유지될 정도였으며, 겨울에는 난로를 땔 이 없어 원고지연료 삼아 을 지펴야 했다고 한다.

31살이 된 1839년에는 어셔가의 몰락을 쓴다.

한편 10대 시절부터 '북부의 뉴잉글랜드 문단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남부에도 문학적인 기반이 탄탄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부러워하면서, 당시 미국 문학계의 주류인 뉴잉글랜드 보스턴 중심의 문학계[17]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포는 편집자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이후, 이러한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서 미국의 국민 문학에 기반이 되어 줄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하는 수준 높은 문학 잡지를 만들기로 결심했고[18] 마침내 32살이 된 1840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잡지 《Pen Magazine》을 창간하려 한다.[19] 이 시기에 포의 역량은 절정기에 접어드는데, 훗날 포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여러 작품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33살이 된 1841년에는,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을 썼고, 34살이 된 1842년에는, 함정과 진자, 붉은 죽음의 가면, 마리 로제의 비밀을, 35살이 된 1843년에는, 검은 고양이, 황금충, 고자질하는 심장을, 36살이 된 1844년에는, 도둑맞은 편지를 집필한다.

그러나 포는 특유의 예민하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기존 문학 잡지의 사주들과 끊임없이 충돌하여, 직장 내에서도 대인관계가 좋지 않아 나중에는 아예 편집자 직을 그만두고 새로 구직하는 과정 - '이브닝 미러'에서 '브로드웨이 저널'로 등 - 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특히 직설적인 면모 때문에, 귀족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여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글을 쓰고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출판 기회마저 독차지하던 기존의 뉴잉글랜드 문인들과도 관계가 편치 못했다. 특히 뉴잉글랜드 기성문단의 대표격인 롱펠로를 심하게 공격해서, 북부 뉴잉글랜드 문단은 포를 작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문단들과의 불화는 포의 잡지사업이 실패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그는 1845년부터 편집장으로 일하던 '브로드웨이 저널'이라는 잡지를 마침내 소유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 재정적으로 실패하여 1846년 폐간되고 만다. 포는 잡지 폐간에 대한 충격과 그동안의 과로가 겹쳐 실신하여, 7주 동안 침대에 드러눕게 된다.

38살이 된 이 해, 아몬틸라도 술통(1846년)을 집필한다.

39살이 된 다음 해, 설상가상으로 건강이 좋아졌다 악화되었다를 반복하던 아내 버지니아가 1847년 24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20] 포 생전에 어찌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평생 그리워했다고 하며, '애너벨 리'라는 명시(名詩)를 남겼다.

'갈까마귀'에서도 주인공이 레노어라는 죽은 연인에 대해서 그리워하는 대목이 나오며, 이 시의 레노어가 실제 포의 아내 버지니아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반대로 두 인물이 서로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시 '갈까마귀'가 버지니아의 죽음 2년 전인 1845년에 공개된 시이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묘사된 레노어가 당시 살아있었던 버지니아를 묘사한 것일 수 없다"라는 것.

물론 '갈까마귀'가 1845년에 세상에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의 연인이었던 레노어가 버지니아라는 주장은 학계에서 꾸준히 타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몇 가지 근거를 대자면, 버지니아는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병치레하는 일이 잦았으며, 포 자신 또한 '엘레오노라(Eleonora)' (1842), '직사각형 상자(The Oblong Box)' (1842), '레노어(Lenore)' (1843) 등 이전 작품에서도 버지니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그녀와 흡사한 인물을 아프거나 죽은 것으로 그리는 등, 버지니아의 완연한 병색에 대한 본인의 슬픔을 꾸준히 작품 속에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2.4. 말년

잡지의 폐간과 버지니아의 죽음 후 포는 절망에 빠져 아편으로 자살 시도를 하고, 자살 시도 직후 여류 시인 세라 휘트먼이 보낸 발렌타인 카드[21]를 보고 우발적으로 프러포즈를 하는 등 정신적으로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라 휘트먼에게 차인 후에는[22] 예전의 약혼자였으며 당시 과부가 되어있었던 '사라 엘머러 로이스터'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재결합을 하려 했고 1849년 9월 17일 사라가 사는 리치먼드로 가서 사라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그리고 사라도 포를 잊지 않고 사랑하여 포와 결혼을 약속했으나 포가 생활고와 지독한 음주에 피폐해진 모습을 보고는 안타까워하며 결혼하기 전에 먼저 포에게 술을 끊고 의사를 만나 건강을 회복하여 새사람이 되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포는 그녀의 뜻대로 금주회에 가입하고 의사를 만나기 위해 다시 살던 뉴욕으로 돌아간다.(필라델피아로 가려 했다는 말도 있다.)

다만 사라가 포를 사랑하였고 서로 결혼 얘기가 오간 것까지는 확실하지만, 사라가 포와 정말로 재결합을 할 마음이 있었는지는 현재까지도 불분명하다고 한다. 우선 사라는 포의 사후 포와 결혼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하여, 죽기 전에서야 인정했고, 생전 자신과 포의 관계에 대해서도 일체 함구했다고 한다. 또한 사라의 자녀들도 결혼에 반대하였고, 죽은 전남편도 재혼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사라에게 전 재산을 준다고 유언장에 남긴데다 포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간 것도 사라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서였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포가 죽지 않고 살았더라도 사라와 재결합을 했을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아무튼 포는 1849년 9월 27일 다시 뉴욕으로 가기 위해 에 몸을 실었고 그대로 행방불명되었다. 그리고 9월 28일 볼티모어[23]에 도착한 이후의 행적은 의문에 싸인 채 10월 3일 볼티모어의 한 술집 앞(또는 길바닥, 또는 바닷가 근처라는 기록 및 글도 있다고 한다)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된다.

당시 포는 혼수상태와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절규하면서 "누구든 나를 생각하면 제발 내 머리으로 쏴 다오!" 라고 외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죽기 전날 레이놀즈라는 이름을 몇 시간 동안 외쳤다고 한다. 레이놀즈의 정체는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포는 발견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몸 상태가 너무나도 허약해진 상태라 이미 늦었다는 진단이 내려져, 입원 상태에서 10월 7일 일요일, 새벽 다섯 시에 40세로 숨을 거뒀다. 유언은 "모든 것이 끝났다. 에디는 더 이상 없다[24]라고 묘비에 적어주게. 신이시여, 내 불쌍한 영혼을 돌보소서!"라고 한다. 덧붙이자면 이때는 버지니아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의 장례는 사망 다음 날인 10월 8일 오후 4시 친척들과 주치의에 의해 치러졌다. 하지만 무연고 병자로 쓸쓸히 숨을 거둔 포는 당시 유일한 유족이었던 사촌이 대중들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아 몇 명의 추모객만 참여한 채 서둘러 장례식을 마쳤고 볼티모어의 공동묘지에 비석도 없이 매장했다. 그리고 이후에 그의 작품을 알게 된 들의 도움으로 26년이 지난 1875년, 볼티모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묘지에 묻혀 제대로 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포의 죽음에는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 당시 해당 병원에 남겨진 포에 대한 의료 진단서나 자료들이 모조리 사라져서, 포가 유명해진 다음에 이걸 분석하려던 이들은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2.5. 포와

주당을 넘어서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술 때문에 망가진 문학인으로서도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대학교와 사관학교 시절부터 늘 술을 곁에 두고 다니다가 들켜서 퇴학당했고, 양부와도 알코올 중독 때문에 다투다가 결국 양부에 의해 집안에서 제명되고 쫓겨나고 만다. 취업해도 일을 소홀히 하고 늘 술만 마시고 있으니 직장에서 좋아할 리가 없어 번번이 쫓겨나기 일쑤였다. 아내 버지니아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다가[25] 버지니아가 갑자기 각혈을 하며 결핵의 증상을 보였을 때도 정신 못 차리고 술을 마셨다. 이런 포를 두고 같은 시대의 작가이자 라이벌인 롱펠로는[26] '술로 인생이 몰락한다면 그대의 이름은 에드거'라는 비아냥까지 했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기록에 의하면 포는 한 잔을 마시면 온몸이 붉어지고, 석 잔을 넘기면 말이 많아지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하다, 채 한 병을 다 마시기 전에 그 자리에서 뻗었을 정도로 술에 약한 체질이었다고 한다. 혹은 알코올에 알러지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술을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연속해서 마시는 버릇이 있었다고.[27] 평소 포는 다른 사람들과 편하게 말을 섞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상대방이 술을 권하면 거절하지 않고 술을 마시거나, 때때로는 스스로 술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의 불행 대부분이 주벽과 모난 성격에 의한 것이므로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하나, 또 그만큼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절망적인 상황들이 계속되었다. 또한 그럴 때마다 병에 걸리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등 매우 예민하고 섬세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키게 하였고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포가 평생 빈곤에 시달리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여담으로 일본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에서 에드거 앨런 포를 언급하면서 술 몇 잔에 시 백 편을 줄줄이 써냈던 이백 같은 시인을 기억하는 동양에서는 문인이 술 밝히는 게 희한하기는 해도 그렇게까지 흠 잡힐 것까지는 아닌데 이마저도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인가 보다 하고 평했다.

아쿠타가와의 말대로 술에 대한 당시 동서양의 인식 차이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동양은 농사를 짓던 중 쉴 때에 로 빚은 술 등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에, 술은 빠르게 먹고 쉬는 유흥이나 휴식을 상징하였고 동시에 제사에서도 사용될 정도로 긍정적으로 보여졌다.

반면 서양에서는 술을 철학적, 긍정적으로도 고찰되기도 했지만 이나 등은 싸구려 술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방탕함, 퇴폐함의 상징이기도 했기에, 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선호하지 않았다. 동양에서도 술주정은 싫어했으나 대개 술을 잘 먹는 이들을 호탕하게 놀거나 담대함을 좋아하는 이들[28]로 취급했지만 서양에서는 이를 방탕한 이로 생각한 것이라 보면 된다.[29]

2.6. 사망에 관한 의혹

사실 포의 사망 경위는 아직도 정확하지 않다. 그가 죽은 원인 및 죽기 며칠 전의 행적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발견된 날이 미국 하원의원 선거[30]가 있던 시기라서, 정치판에 연루된 조폭들이 흔히 저지르던 일에 휘말렸으리라는 주장도 꽤 설득력이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시 정치판에서는 술주정뱅이들에게 여러 가지 을 입히고 분장을 대충 시켜, 다른 사람처럼 꾸미고 여러 선거장에 가서 특정 후보에 몰표를 행사하는, '쿠핑(couping)'이라는 선거부정이 있었다. 이때 주정뱅이가 이걸 문제 삼는 일을 막거나 뒷말을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주정뱅이를 구타하거나 약물을 먹여 죽게 하는 일도 번번했다고 한다. 약물까진 몰라도, 싸구려 술에 온갖 첨가물을 넣고 마시게 하여 길바닥에서 얼어 죽게 하는 일도 꽤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포가 다시 발견되었을 때 포가 입고 있었던 옷이 포의 평소 옷차림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과,[31] 발견되었다는 술집이 투표소이기도 했다는 점이 있고, 레이놀즈라는 이름 역시 당시 투표를 감독하던 판사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포가 죽기 전에 보인 증상은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콜레라의 증상과 유사하다고 한다. 즉 포는 고모를 결혼식에 초대하기 위해 볼티모어로 가는 여행길에서 갑자기 행방불명되어 길가를 떠돌아다니다가, 안 그래도 쇠약해져 있던 몸에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 이렇다고 해도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왜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나타났는지(당시 탔던 배에 문제가 있었다면 관련 기사 등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왜 사망 후 의료기록은 사라진 것인지.

그 외에도 뉴욕으로 돌아가기 전날 열병 때문에 리치몬드에서 의사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어, 이것이 사망의 원인 아니었나 하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2012년에 제임스 맥티그 감독에 의해 에드거 앨런 포의 사망 직전 일주일을 다룬 영화가 제작되었다. 제목더 레이븐. 에드거 앨런 포 역은 존 쿠삭이 맡았다. 후반으로 갈수록 몰입감이 떨어지긴 하지만 어느 정도 어두운 분위기연출하는 데에는 성공한 평작으로 평가받는다. 배우들의 연기도 볼 만하다.

평소 포를 좋게 보지 않았던 언론(다른 언론들은 좋게 보았다)인 매거진 필라델피아의 편집 기자이자 시인인 루퍼스 윌모트 그리스월드(Rufus Wilmot Griswold/1815~1857)는 포가 과거에 자신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포를 증오하게 되었고, 그가 죽어서도 그를 미치광이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식으로 폄하했다. 불행하게도 포의 전집을 처음 편집한 사람이 그리스월드였으며, 포가 이상성애자이며 알코올 중독자라는 소문 역시 그가 편찬한 전집에서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리스월드도 그다지 행복한 삶을 살아오지 못했으며, 3번의 이혼 및 경제적 문제, 포에 대한 비난으로 인한 문학계 인사들의 반발과 그에 대한 비난으로 고생하다가, 역시 42살 나이로 갑자기 병으로 죽는다. 그리고 참 특이한 점은 그리스월드가 죽어서 공개된 그의 방에는 포의 초상화가 그대로, 전혀 상처 없이 걸려있어서, 그리스월드가 포를 동족혐오와 동질감이 교차하는 애증(愛憎)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일생과 갑작스런 죽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그의 모든 작품과 비평[32]들은 문학적으로 아주 높은 작품성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포에게 '최고의 서정시인', '전설적인 비평가'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은 당연하다.

3. 작품 특징

3.1.

에드거 앨런 포의 시들이 갖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감성적(感性的)인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시의 운율이 가진 음악성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소월의 《진달래 꽃》을 영어로 완벽하게 번역할 수 없는 것처럼 포의 시를 한국어효과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포가 자신의 시인 《갈가마귀(The Raven)》의 집필 과정을 묘사하면서 음악과 운문 문학의 관계와, 음악적인 요소가 어떻게 시의 운율(rhyme)을 형성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한 《시작(詩作)의 철학(The Philosophy of Composition, 1846)》과, 죽기 직전 시에 대해 강연한 강의록을 모아 동료 문학가들이 포 사후에 출판한 《시의 원리(The Poetic Principle, 1850)》에 잘 나타나 있다. 포의 시는 유럽의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현대에 와서도 높은 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

3.2. 소설

반면, 소설가로서의 포는 비현실적인 환상을 이성적(理性的)이면서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문체로 묘사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소설들은 과학에 바탕을 둔 SF의 방법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그는 허버트 조지 웰스쥘 베른보다 반 세기 이상 앞서 SF 문학의 초석을 쌓은 위대한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33]

미스터리 장르 역시 마찬가지라서, 셜록 홈즈의 원형이자 안락의자 탐정의 효시인 오귀스트 뒤팽의 창시자로서 불멸의 족적을 남겼다.

포는 뛰어난 문학 비평가이자 이론가이기도 했는데, "단편 소설은 한 가지의 테마로 작성되어야 하며, 모든 문장들은 소설의 전체 테마와 일맥상통해야 한다. 그러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 작가는 소설의 정서와 사건을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글을 써야 한다." 는 나름대로의 단편 소설 작법을 체계화하고 자신의 소설을 통해 그 효과를 증명한 최초의 작가였다.

특히 추리소설 분야에서는 현대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꼽히며[34], 19세기 이후 추리소설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서술 방식이나 트릭, 규칙 등의 상당수가 포로부터 나왔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몽상적이고 어두운 문체 때문에 호러 문학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기도 한데, 특히 때이른 생매장이라던가 까마귀, 원혼에 서린 검은 고양이 같은 소재들을 워낙 인상깊게 써서 지금도 그만의 인장으로 남게 되었다.

에드거 앨런 포 탄생 200주년을 맞아 에드거상 수상자들이 함께한 에세이 『더 레이븐 :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2009)』의 편집을 맡은 마이클 코넬리가 남긴 말은 미스터리 장르에서 에드거 앨런 포와 그의 작품들이 차지하는 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현재 접하는 모든 미스터리 캐릭터, 무대, 사건 등은 전부 에드거 앨런 포가 만들어냈다. 그러므로 현대의 작가들은 그저 그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일종의 ‘도둑’인 셈이다.”

또한 포는 암호학에도 높은 관심을 가져서, 암호학에 대한 소설 《황금충(The Gold-Bug)》을 쓰기도 하였다. 이 소설의 창작 배경을 보면 에드거 앨런 포의 대단한 분석력을 알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는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 미국의 여러 신문에 독자들이 보낸 암호문들을 모두 풀어서 해당 신문들에 보냈고 예상대로 그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이를 못마땅해한 당시 미국의 유명한 암호학자들은 ‘이거 독자들이랑 짜고 치는 거 아냐?’ 라고 포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고, '당신들이 못 믿겠으면 내가 암호문들을 푼 방법을 직접 내 신작 소설 안에 제시하겠습니다"해서 나온 소설이 바로 황금충이다. 황금충은 《Philadelphia Dollar Newspaper》가 주최한 공모전에서 당선되어 100달러의 상금을 받았다. 이 금액은 포가 받은 원고료 중 가장 많은 원고료였다고 한다.

말년에는 당시 아직 미개척 분야였던 우주에도 관심을 보여, 1848년 천문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론을 설명하고자 《유레카》라는 강의록을 출판하기도 한다. 여기서 그는 당대 천문학자들이 풀 수 없는 난제라고 여겼던 올베르스의 역설의 해를 제시하였고, 블랙홀의 존재를 예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중들의 반응은 '이 사람 정말 미친 거 아냐?' 실제로 현대 학자들은 유레카의 내용 중 에드거 앨런 포가 평소 존경하던 철학자들을 비꼬는 듯한 어조로 묘사하고, '과학과 문학은 동일한 방법론, 즉 치밀한 사고의 흐름으로 만들어진다' 라는 평소의 주장을 뒤바꿔서, ‘문학은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다른 학문들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 것, 해당 강연이 (유레카는 강연 원고를 목적으로 쓰인 이다) 버지니아의 사망 1주기 직후 작성되었다는 점 등을 들어, 말년에 포가 정신착란을 일으킨 증거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렇듯 에드거 앨런 포는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인물이지만, 독립한 지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신생국이었던 미국에서는 미국인의 진취적인 정신,[36] 혹은 청교도적 도덕관념이 내용에 들어있지 않은 작품은 다 불쏘시개 취급했기에,[37] 에드거 앨런 포는 생전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소수의 동료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작가 취급조차 받지 못하였다. 한 마디로 나라와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

4. 대표작

4.1.

4.2. 소설

4.3. 유레카(Eureka)

《유레카》는 1847년, 겨울에 포가 신들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몰두하여 집필했다고 한다. 완성하고 출판사에 넘기면서, 포는 이 책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역설하면서, 초판을 5만 부나 찍으라고 권했다. 현대적으로 보면 초판을 50~100만 부 찍으라는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포는 《유레카》가 그 자신에게 부(富)는 물론, 당대 최고의 사상가라는 명예를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레카》는 1848년 3월에 5백 부만 출판되었고, 이 책에 대한 부정적인 비평은, 당시 《리터러리 월드(Literary World)》 지(誌)에 실린 익명의 비평이 대표적인데 "우주의 기원을 해명했다는 포의 주장은 ‘증거가 조금도 없는 뻔뻔스러운 독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뿌리도 잎도 없는 헛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라플라스의 이론을 도용한 것일 뿐이라는 비난도 이어졌는데, 이에 대해 포의 항변은 다음과 같았다. "내 이론에 비하면, 그 프랑스 천문학자의 이론은 한낱 대양(大洋)의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유레카》를 포의 최고 걸작이라고 보는 비평가도 소수 있다. 하지만 위에 서술한, 놀라운 통찰력과 시대를 앞선 이론은 《유레카》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다. 포는 《유레카》가 물리학적‧형이상학적‧수학적‧물질적‧정신적 우주를 설명하려는 웅대한 시도로 시작되었다고 했지만,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너무 과장되어 있다. 무엇보다 탁월한 문학가의 저서라는 게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문체나 글의 흐름이 어지럽다. 더러 추론(推論)을 정리하거나 공리(公理)를 설정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의 훌륭한 업적을 전지전능한 신에게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나의 이 천재적인 업적이 신의 은총 덕분이라고? 아니야, 내가 잘나서 그래는 것을 과장되고 유치한 방식으로 거듭 강조하고 있다.

포는 《유레카》의 서문에서, "내가 이 책에 쓴 것은 진실이다"라고 강조했는데, 저서 전체에서 그는 과대망상이라고 할 정도의 고집과 집념으로 이 확신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포는 그렇게 믿었다.

상술(上述)된 《유레카》를 기이(奇異)한 책 정도로 보는 것은, 포의 문학가, 작가로서의 천재성이 뛰어난 탓에 이 책이 거의 주목받지 못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유심히 살펴보면, 포의 불가사의한 직관을 엿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1840년대의 미국에 있다고 가정할 필요가 있다. 당시는 존 돌턴(John Dalton)의 원자론이 나온 지 50년도 채 되지 않았고, 원자란 작고 딱딱한 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포는 《유레카》에서, 물질은 인력과 반발력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위대한 학자로 인정받는 피에르시몽 라플라스(P. S. Laplace)[42]는 태양계가 상자 속에 들어있는 큰 시계처럼, 아주 안정되어 있다고 강조했었다. 그리고 포의 사상에 영향을 줬다는 알렉산더 훔볼트(Alexander Humboldt: 1769~1859)도 저서 《우주(Kosmos)》에서 라플라스와 같은 견해를 피력했었다.

그러나 《유레카》에서 포의 견해는 이러했다. "우주는 하나의 공과 같은 물체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이 폭발해 퍼짐으로써 들이 생겼다. 그리고 언젠가 우주는 다시 중심을 향해 붕괴되어 결국엔 소멸된다."

포는 상술했듯이, 블랙홀의 존재 역시 서술했다. 폭발과 수축, 바로 빅뱅(Big Bang) 이론이다. 포의 주장은, 빌헬름 드 지터(Wilhelm de Sitter)의 팽창 우주론이 발표된 1917년보다 70년이나 앞선, 놀라운 일이다.

포는 또한 공간과 시간을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는 포가 미쳤다는 인식을 부채질한 셈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개념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생소한 것이기도 했고, 과학자도 아닌 문학가가 이런 소리를 하니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포는 우리가 보는 은하계(銀河系)는 수많은 은하계들 중 하나에 불과하고, 그것은 단순히 별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섬 우주’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역시 20세기에 와서야 확립된 견해이다. 안드로메다 같은 나선은하가 우리 은하수 은하 내의 성운이냐 우리은하와는 별도의 외부의 천체이냐 하는 것이 1920년대의 천문학의 대논쟁이었다.

밤이 어두운 이유를 짤막하게 적어놓았다. 올베르스의 역설 참조. 항성이 무한하니 밤하늘은 눈부시게 환할 것이 틀림없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은 곧 항성으로부터의 빛이 아직 지구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뜻이고, 따라서 우주는 무한할 수가 없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문학가로서의 포의 천재성은 인정해도, 《유레카》에서 보여준, 문학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인 포의 천재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학자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이는 포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포의 전기를 쓴 작가들이나 비평가들 중 대다수는 《유레카》를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천재가 절망 끝에 시도한 자기 기만적 작품"이라고 평한다고 한다. 그런 결론이나 확신을 뒷밤침할 근거나 증거자료 등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5. 한국 번역

한국에서 최초로 출간된 포 소설집은 원응서가 1955년 번역한 중앙출판사 《황금충》이다. 참고로 이 소설집의 표지는 이중섭이 그려주었다. 원응서와 이중섭은 1933년 동아일보 주최 제4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 입선했던 인연이 있다.

포의 전집으로는 하늘연못에서 출판한 <우울과 몽상>과 코너스톤판, 시공사판 총 3가지이다.

하늘연못판은 1부 환상, 2부 풍자, 3부 추리, 4부 공포로 구성되어있고, 코너스톤판은 1부 미스터리, 2부 공포, 3부 환상, 4부 풍자, 5부 모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늘연못판은 프랑스판 중역(重譯)인데다가[43][44] 번역자가 원문에 없는 문장을 만들면서까지 모든 소설의 문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등 번역이 엉망이라 책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특히 앞부분에 실린 환상이나 풍자 쪽이 발번역이 심하다. 1부 환상 부분에서 가장 처음으로 수록되어 있는 《The Thousand-and-Second Tale of Scheherazade 》[45]에서는 소설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세라자드가 19세기 과학 기술을 묘사하는 부분을 완전히 엉망으로 번역하였고 두번째로 수록된 《The Unparalleled Adventure of One Hans Pfaall》에서는 중간 에피소드 하나를 통째로 빼먹었다. 이 밖에도 《Some Words with a Mummy》에서 주인공의 가난을 암시하는 토스트 요리인 Welsh rabbit을 토끼 고기 요리로 번역하는 등 세세한 오역도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자 후기에 의하면 자신이 포 전집을 번역한 의도는 그 동안 일반 대중들에게 추리나 공포 소설작가로만 알려진 포가 안타까워서였다고 한다.

코너스톤 판본은 원전 번역이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역시 오역이 발견된다고 한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하늘연못판보단 낫고 전집인데도 가격이 웬만한 소설책 2권 가격으로 굉장히 저렴하다는 메리트가 있다.

사실 한국에 나온 번역본 중 가장 뛰어나단 평을 받는 건 문학과지성사에서 내놓은 김진경 번역인데 "문지 스펙트럼"이란 문고 시리즈에 들어있는 단편집이다. 도둑맞은 편지를 포함해 단편 5개가 전부라 아쉬운 부분.

2019년, 포의 사후 170주년임을 기념해 시공사에서 특별 전집을 출간한다고 밝혀 한국의 포 전집은 총 세 개가 되었다. 권진아, 손나리 두 역자가 맡은 완전한 신판 번역으로 소설외에 포의 작법 에세이까지 포함하고 있다. 시와 에세이를 맡은 손나리는 첫 작업이지만 소설쪽 번역을 맡은 권진아는 이미 조지 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 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빼어난 번역으로 검증되었기에 믿고 볼 만한 전집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포는 생전 자신의 작품을 끊임없이 개고(改稿)하고 다듬은 것으로 유명하고, 그의 문체나 서술방식은 각 작품에 가장 알맞는 방식으로 현란하게 변한다고 한다. 번역자 역시 여러 한국어 문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야만 원작의 맛을 살릴 수 있다. 즉 번역자에겐 상당히 까다로운 작품.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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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매체에서의 모습

7.1. 문학

상술했듯 문학계에 있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광기의 산맥》에서 나오는 쇼거스의 울음소리인 테켈리 리는 일찍이 포의 작품에 나왔던 것이며, 이 울음소리는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아서 고든 핌의 모험(The Narrative of Arthur Gordon Pym of Nantucket)》에서 나온다. 덧붙여서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은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이 열린 결말이었기 때문에, 현대 SF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작가 쥘 베른도 작가 생활 극 초기에 그 작품의 후속작 성격을 띈 《빙원의 스핑크스》를 썼다. 다만 이 작품은 쥘 베른의 작품 중 지뢰 취급을 받는 작품이다. 원작의 설정을 뒤바꾼 건 예사고, 플롯도 완벽하게 구성되어있지 않다.

일본의 유명한 추리 소설가인 에도가와 란포의 필명은 앨런 포에게서 따온 것이다.

7.2. 영화

7.2.1. 더 레이븐

2012년에 제임스 맥티그 감독에 의해 에드거 앨런 포의 사망 직전 일주일을 다룬 영화. 에드거 앨런 포 역은 존 쿠삭이, 두번째 주인공인 경감역은 루크 에반스가 맡았다. 후반으로 갈수록 몰입감이 떨어지긴 하지만 어느정도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하는데에는 성공한 평작으로 평가받는다. 배우들의 연기도 볼만하다.

줄거리는 이렇다. 1849년 볼티모어, 자신을 미워하는 해밀턴 대령의 딸, 에밀리와 밀애를 즐기던 에드거 앨런 포는 필즈 경감에게 자신의 창작물에 나온 그대로 일어나는 연쇄살인들의 자문을 요청받게된다. 첫 번째 사건의 희생자는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에 나온 것과 똑같이 어머니와 딸이, 두번째 사건은 포와 사이가 안좋던 비평가가 함정과 진자에 나온 것처럼 칼날 진자에 의해 살해되었던 것이다.

자문을 허락한 포는 2번째 사건의 피해자의 얼굴에 씌어져있던 붉은 가면을 통해, 다음 사건이 붉은 죽음의 가면의 내용을 따라할 것을 예상하게되고, 바로 다음날 찰스 해밀턴 대령이 박물관에서 열 무도회를 기억해낸다. 이 무도회에서 범인이 무슨 일을 벌일 것으로 판단한 필즈 경감은 찰스 해밀턴 대령에게 가서 부하들을 무도회에 배치하도록 제안한다. 하지만 이미 예고된 것임에도 세번째 사건에서 가면무도회가 열리던 중에 에밀리가 범인에게 납치당한다.

에밀리의 목숨을 담보로 범인은 포에게 저널을 통해 새로운 소설을 써내려가라고 협박한다.

네번째 사건은 해부학 수업 도중 열은 관에서 발견되고, 포는 마리 로제의 비밀에서 나온대로 여성에 대한 살인이 일어났음을 직감한다. 이후, 필즈 경감에 의해 여성의 손에 묻어있던 피는 후에 연극용 소품이었음이 밝혀지고, 둘은 함께 용의자를 체포하려 극장으로 향한다. 안타깝게 범인을 놓치고, 그가 남긴 잘려진 혀를 발견한 포는 '발데마 사건의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눈치챈다.

안타깝게 용의자는 놓쳤지만, 극장단원들로부터 그가 프랑스 선원이었다가 연쇄살인 며칠 전 극장에 취직한 모리스 로비쇼우란 사실을 알게된다. 그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다가 배의 이름이 포르투나토였다는 사실에서 '아몬틸라도 술통(1846)'과 연관된 단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래서 찾아간 지하 수도공사용 터널에서 또 한구의 시체를 찾아낸다.

시체 안에는 위도와 경도가 세겨진 시계가 남겨져있었고, 지도에서 가르킨 곳은 서인도 제도의 '산타 크루즈 섬'이었다. 포와 경관, 그리고 대령의 팀은 이를 통해 추측한 '홀리 크루즈'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범인과 맞닥뜨리게되고, 이 때 범인은 필즈 경관의 부하까지 살해하고 도망치게 된다. 이를 홀로 뒤에서 쫒아가는 포, 하지만 숲속에서 놓치고 만다. 해밀턴 대령과 화해하는 포.

죄의식 속에서 소설을 써내려가는 포. 관 안에서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어떤 지하공간으로 나왔다가 다시 잡히게 되는 에밀리. 총상에서 일어나 범인의 증거를 알게된 필즈 경감. 비가 온 후인데도 비에 젖지 않은 신문을 통해 범인이 같은 건물 안에 있는 사람임을 짐작한 포. 하지만, 짐작했던 범인은 편집장이 아닌, 레이놀즈라는 이름의 식자공이었다.

이 연쇄살인범은 포의 작업들을 광적으로 좋아하던 나머지, 그 내용들을 똑같이 따라하는 살인들을 저질러 왔던 것. 그는 에밀리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대신 독약을 먹으라고 하고, 에밀리를 살리기 위해 포는 독약을 먹는다. 범인은 그녀의 위치를 알려주는 포의 소설 문구를 말하고 떠나고, 그 소설이 고자질하는 심장인 것을 기억한 그는 에밀리가 지하에 있음을 직감하고, 그녀를 무사히 찾아 데리고 나온다.

그녀를 구하고 공원에서 지나가던 행인에게 필즈에게 레이놀즈라고 말해달라고 하다가 병원에 실려가서 죽게되는 포. 이를 전해들은 필즈 경관은 무사히 범인을 유추해내고, 그를 사살한다.

7.2.2. 페일 블루 아이

루이스 바야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크리스찬 베일이 형사 아우구스투스 랜도르 역을, 해리 멜링에드거 엘런 포의 젊은 시절을 맡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다. 원작 소설은 국내 출간되었다.

7.3. 뮤지컬

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에드거 앨런 포(뮤지컬). 다만 각색이 꽤 심하니 감안하고 볼 것.

7.4. 만화

문호 스트레이독스에 이 인물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 에드거 앨런 포가 나온다. 소설을 쓰고 있으며, "모르그 가의 검은 고양이"라는 이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포가 지은 소설을 읽은 자가 그 소설의 세계 안으로 빨려들어가게 하는 이능력이다. 그런데 실제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해서는, 일본의 추리 소설가인 에도가와 란포가 그를 매우 존경한 나머지 필명도 그의 이름과 비슷하게 지었으나, 문호 스트레이독스에 나오는 에드거 앨런 포는 에도가와 란포에게 라이벌 의식이 혼합된 열등감을 느낀다.

8. 관련문서

*얼터드 카본

[1] 앨런은 양아버지 존 앨런의 을 딴 미들네임인데, 평소에 양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에드거는 자신을 앨런이라 부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포 가문은 하나뿐이라서 누군가의 성이 '포'라면 그는 에드거 앨런 포의 친척이다. 포의 직계는 없기 때문에 전부 방계 후손. 미국에서의 발음은 '포우'에 가깝지만, 외래어 표기법상으로 '포'라고 한다. 이중 모음 'ou'에 해당되는 발음인데, 'ou'를 'ㅗ'로 쓰도록 했기 때문.[2] 죽기 1년 전인 1848년에 찍은 사진으로, 포가 생전 남긴 4장의 사진 중 하나이다. 초상화까지 합하면 의외로 사진이 많이 남아있는 편. 죽기 3주 전에 찍었던 사진도 남아있으나,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포가 죽기 3주전 사진 쇼팽 또한 같은 해 사진을 1~2장 남기고 같은 해 죽었으니 우리는 운 좋게도 예술 역사상 위대한 위인 둘을 사진으로 볼 수 있게 된 셈이다.[3] 19세기 미국인 남성의 평균 키가 173.4cm 였다. 포의 키는 딱 평균.[4] 이 시가 미국 내에서 받는 평가의 정도는 대한민국 내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 아니, 어찌 보면 그 이상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대중문화에서의 갈까마귀' 항목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항목을 보면 문학,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게임, 웹 코믹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부문에서 갈까마귀가 패러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5] 물론 2023년 기준의 가치로는 360달러 가량은 되지만, 그래도 시의 가치에 비해 부족한 것은 마찬가지.[6] 포는 당시 미국의 유명 인사들을 자신의 잡지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소송에 시달리기도 하였다.[7] "포의 글에는 내가 쓰고 싶은 모든 것이 쓰여 있다"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놀라워했다고 한다.[8] 그래서 《악의 꽃》을 출판하기 전까지 보들레르는 프랑스 내에서 미술 비평가 혹은 포 전집 번역가로 인식되고 있었다.[9] 담배 외에도 밀, 의류, 묘비 장사까지 했다.[10] 존 앨런은 자식들을 엄하게 키웠기에 포에게도 많은 애정을 주면서 키우지 않았다. 특히 포는 모난 성격으로 인해 수양아버지랑 워낙 사이가 안 좋다 보니 앨런 가문에서 제명되어, 유산을 단 한 푼도 상속받지 못하였다.[11] 윌리엄 헨리는 1831년 알코올 중독으로 요절하는데, 에드거는 이후 형의 못 다한 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반드시 작가로 대성하겠다면서, 더욱 문학에 열정을 쏟게 된다.[12] 나중에 아내 프란세스가 죽고 난 뒤 루이자 패터슨과 재혼한다.[13] 왜냐면 포의 알코올 중독과 그가 지게 된 도박 빚으로 인해 포를 싫어하게 된 양부가 최소한의 생활비만 주었기 때문이다. 양부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포가 미웠던 나머지 포의 전역 허락을 무시하여 포가 육군에 몇 달 더 있게 하였고 양모의 병환과 죽음도 알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포는 양모의 임종을 보지 못했고 양모가 죽고 무덤에 묻힌 지 하루 지나고 와서야 올 수 있었다.[14] 당시 양어머니 프란세스 앨런의 유언과 포의 금주 약속으로 포와 양아버지 존 앨런은 일시적으로 화해한 상태였다고 한다.[15] 사관생도들도 계급장이 있기에 퇴학당하면 군대에서는 불명예 전역이다.[16] 닐슨 포(Nilson Poe)라는 사람이었다. 나름대로 포에게 많이 도움을 주려 했지만 포의 모난 성격 때문에 갈등을 빚어 관계가 좋지 못했고 포도 닐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포 사후 그의 묘비까지 좋은 것으로 보내주었으나 배송 중 파손되었다고 한다.[17] 주로 신생독립국인 미국에 대한 찬가와 청교도적인 내용의 문학 작품을 집필했다. 또한 이들은 모두 귀족 자제들이거나 사회높으신 분들이 많았고, 인맥으로 출판 기회도 독차지했다.[18] 당시 미국의 주류 문학 잡지는 신인 작가를 발굴하기보다 영국의 소설을 소개하는 데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19] 어처구니없게도 포는 본래 보스턴에서 태어난 뉴잉글랜드 사람이었으나,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버지니아에서 살게 된 것이었다.[20] 버지니아가 사망할 당시 그녀의 초상화 한 점 남겨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 포는 버지니아의 시신에 옮기기 직전, 화가를 불러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하게 했다. 지금 남아있는 버지니아 포의 초상화는 바로 이 초상화이다. [21] 19세기에는 사람들끼리 카드에 짤막하게 시를 적어서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22] 차였다기보다는 사라 휘트먼은 포를 좋아해서 결혼하겠다고 했지만 세라의 부모님이 포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결혼을 결사반대하여 무산된 것이다.[23] 당시 리치먼드에서 뉴욕으로 가기 위해서는 볼티모어를 경유해야 했다.[24] 에디라는 말은 영미권의 남자 이름인 '에드워드'와 '에드거'의 애칭이기도 하다.[25] 대중들에게 알려진 작품들 대다수는 음울한 분위기의 작품들이었지만 오히려 평상시의 에드거 앨런 포는 유머를 곧잘 하는 유쾌한 성격이었다고 한다.[26] 포와 롱펠로는 신문지면 상에서 공개적으로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였다.[27] 알코올 중독자들 중에서 술에 약한 사람들도 많다.[28] 대표적으로 삼국지연의관우, 장비가 있다.[29] 알코올 중독은 유전된다 생각했기에 더더욱 큰 단점이었다.[30] 당시 미국의 의원 선거일은 주마다 달랐고, 하원의원 선거는 1849년 8월 7일부터 11월 16일까지 3개월 동안 치러졌다. 1849년 10월 3일은 포가 발견된 메릴랜드 주의 하원의원 선거가 있던 날이었다.[31] 평소 입던 검은색 양복이 아닌 싸구려 양복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32] 대표적으로 찰스 디킨스에 대한 비평이 있다. 포는 디킨스가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를 만났는데, 당시 디킨스가 연재 중이던 《바나비 러지(Barnaby Rudge)》의 결말을 미리 예측해서 디킨스를 경탄시켰다고 한다.[33] 근현대 SF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스의 작가 쥘 베른도 작가 생활 극 초기에 포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아서 고든 핌의 모험》의 뒷부분을 상상해서 지은 후속작인 《빙원의 스핑크스》를 썼다. 다만 이 작품은 쥘 베른의 작품 중 지뢰 취급을 받는 작품이다. 원작의 설정을 뒤바꾼 건 예사고, 플롯도 완벽하게 구성되어있지 않다.[34] 추리소설 작가이자 애호가였던 엘러리 퀸의 저서를 보면 앨런 포를 추리소설계의 창조주 취급한다. 셜록 홈즈의 작가인 코난 도일 역시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을 자주 언급했다. 포가 만든 오귀스트 뒤팽과, 코난 도일 자신의 스승이었던 조셉 벨 박사를 모델로 하여 셜록 홈즈를 만든 건 유명한 사실. 또 주홍색 연구에서는 홈즈가 뒤팽이 친구의 생각을 추론하는 것이 느리다고 까는데, 이러한 모습을 통해 홈즈의 성격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아주 이해하기 쉽게 묘사했다.[35] 셜록 홈즈의 명대사 "불가능한 것을 제거하면 아무리 믿을 수 없을지라도 진실이다"가 생각나지 않는가?[36] 랠프 월도 에머슨 등으로 대표되는 초월주의 사조. 포는 이 초월주의를 정말 끔찍하게 싫어해서 심심하면 디스했다. 에머슨 등도 그런 포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만무한지라 그를 천박한 광대라고 깠다.[37] 특히 당시 미국의 주류 문단이었던 뉴잉글랜드 문단에서 그런 경향이 심했고, 그래서 포의 진가를 먼저 알아본 곳도 미국이 아닌 유럽이었다.[38] 많은 영어 낭송이 있지만 짐 리브스의 고전적 낭송이 유명하다.[39] 인디 싱어 어른아이가 애너벨 리의 시구들을 가사로 차용해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40] 이 시가 실린 "Tamerlane and Other Poems"의 초판본은 겨우 50부만 인쇄되었고 현존하는 것은 12부 뿐이다. 2019년 이 책의 초판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왔고 무려 12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현재까지도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시집의 기록을 갖고 있다.[41] 에드거 앨런 포의 첫 장편 소설이며 초반부는 모험담이란 이름에 걸맞게 항해모험을 담는가 싶지만 작가가 작가인지라 역시나 중반부로 갈수록 바다에서 발생하는 천재지변과 그로 인한 인간의 잔학성을 여과없이 고스란히 드러내는 묘사를 선보이며 공포 소설임을 드러낸다.[42] 《세계계도설》에서 칸트(I. Kant)의 성운설(星雲說)을 기초로 하여 태양계 기원에 대한 새로운 성운설을 주장한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그의 저서는 뉴턴의 《프린키피아》 이래, 천체 역학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43] 번역 텍스트로 불어판 Oevers Completes - Poe Edgar Allen (LA Front Robert)과 영어판 COMPLETE STORIES OF EDGAR ALLAN POE(Doubleday 출판사)을 비교 대조해서 썼다고 한다.[44] 아마 보들레르의 포 번역이 유럽의 포 정본이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리 그래도 굳이 중역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45] 1002일째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으며, 내용은 천일야화의 엔딩이후 세라자드가 마지막 이야기를 해주는 내용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신밧드의 마지막 모험으로 온갖 환상적인 생물과 기현상을 묘사하는데, 술탄이 듣다가 너무 황당무계하다며 결국 세헤라자드를 처형한다는 결말(...). 중요한건 해당 소설의 주석을 포가 직접 달았는데, 해당 주석에는 비현실적인 생물이나 기현상을 묘사한 것을 다시 실제 존재하는 생물과 현상으로 해석한 내용이다. 신화나 전설이 사실에 기반했다는 내용을 묘사하고 싶었던듯...[46] 마르텔(Martell) 사의 코냑.[47] 포 토스터가 술을 바친 세월이 거의 70~80년에 달하는 만큼 노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