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淸敎徒Puritans
개신교 교파 중 하나이다. 오늘날 성공회의 전신인 잉글랜드 국교회의 종교개혁이 다소 불충분하다고 여겨 보다 개신교적, 특히 칼뱅주의적인 방향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잉글랜드 개신교도들을 가리킨다.
청교도는 다소 포괄적인 개념인데, 본래 잉글랜드 국교회에 소속되어 국가교회를 받아들이면서도 잉글랜드 교회를 보다 칼뱅주의 및 개신교적 원칙에 충실한 교회로 개혁하고자 했던 이들과, 강경한 개혁주의 및 회중교회 성향의 비국교도(Non-Conformist) 개신교도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17세기 청교도인 중소 지주 젠트리, 시민 계층이 영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역사
근세 영국의 청교도를 묘사한 삽화. 금욕주의자인 청교도들은 흰색과 검은색 옷만 입었다. |
잉글랜드 국교회는 국왕을 중심으로 전 국민을 통합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개신교를 근본으로 하되 가톨릭과 개혁교회 교리가 섞여있는 중립 노선이다.[1]
청교도는 비국교도 개신교인 뿐 아니라 잉글랜드 국교회 교인으로서 국가교회를 추구하되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 전통을 줄이고 개혁교회에 가까워지길 바라는 사람들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성경 중심, 금욕주의, 칼뱅주의, 반가톨릭 성향을 가지고 있다.
"성공회 수장인 영국 국왕의 탄압으로 일부 청교도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미국을 세웠다."라고 말하면 정확한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청교도들 중에는 잉글랜드 국교회 교인이자 국가교회주의자로서 잉글랜드 국교회가 개혁교회로 변하길 바랐던 사람들이 적지않았다. 이들 부류는 영국을 떠나고자 한 사람들이 아니다.
북아메리카로 떠난 사람들은 청교도 중에서 국가교회를 부정한 비국교도 및 자유교회를 주장한 소수파이다. 이들은 국가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영국에서 탄압 받았다. 분리파 중 일부가 잉글랜드에서 개혁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아예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이 미국의 시초이다. 분리파는 국가교회, 자유교회 차이만 있을 뿐 청교도와 교리가 똑같았기 때문에 1세대 미국인들은 금욕주의자였다. 자신의 자녀들도 대대손손 금욕주의, 미국을 비국교도적 자유교회 및 청교도 정신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청교도 분리파에서 회중교회와 침례교회가 나왔다. 그래서 미국 초창기에는 회중교회 교인이 가장 많았다가, 회중교회 상당수가 침례교회로 흡수된 후 현재 침례교회 교인수가 가장 많다.
성공회를 만든 헨리 8세는 영국에서 교황 수위권을 부정하고, 영국 교회를 독립시켜, 국왕이 영국 교회 수장 직위를 차지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신교 진영으로 이동하되 가톨릭의 교리, 전통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과거 가톨릭 신자였던 국민들을 자극할 마음이 없었다. 성공회 안에는 가톨릭 성향이 강한 교인과 개혁교회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
가톨릭 성향이 강한 왕이 즉위하면 성공회 내에서 개혁주의 교인을 탄압했다. 루터주의에 영향을 받은 윌리엄 틴들 영어 성경을 소지하면 화형에 처하고, 가톨릭 교리 화체설을 부인한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교수들을 토머스 모어를 대법관으로 기용하여 40명을 고문하고 6명을 화형에 처할 정도였다.
개혁교회 성향이 강한 성공회 신자들은 성공회 내에서 가톨릭 미사, 복장, 7성사 등을 수정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몇 시간씩 걸리는 예배 시간을 줄이고, 복장도 가톨릭 복장을 입지 않을 것을 주장했다.
헨리 8세 사망 후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치하에서 존중과 박해를 한 번씩 겪으면서 잉글랜드에 국교회 안에서 종교적 갈등이 격화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개혁주의 성향 신도들 손을 들어주지 않고 당시 강대국인 스페인의 눈치와 가톨릭 성향 신자들을 배려하여 중도적인 노선을 취했다. 잉글랜드 국교회 내 가톨릭 전통에도 그다지 손을 대지 않았다. 개혁주의 교인들은 엘리자베스 1세 시기 왕권이 강력한데다가 메리 1세 시기 탄압받던 처지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제임스 1세 때였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국왕 시절 스코틀랜드 국교가 된 칼뱅주의 교육을 받았고, 지지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국왕이 된 후 입장이 조금 미묘해졌다. 영국 국가교회에서 왕이 주교를 임명하는 권한이 좋았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처럼 국교회가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 청교도인들은 매우 실망했다.
1603년 4월 제임스 1세는 청교도 성향 영국 교회 목사 1000명이 서명한 천인청원(Millenary Petition)을 받게 되는데 일단 청교도들은 왕과 국가에 충성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영국 국교회의 관습에 대한 개혁을 촉구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교리상 칼뱅주의에 기울긴 했지만 급격한 개혁으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외국 출신 왕이 즉위하자마자 상당한 세력이 있는 영국교회를 개혁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청교도들의 정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2] 구체적으로 보면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 신봉자였지만 청교도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같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칼뱅 사후[3] 8년이 지나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이후 칼뱅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이 탄압하고 국왕이 폭군이라면 퇴출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4] 그리고 칼뱅주의의 본산인 제네바는 공화국이었다. 그래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제임스에겐 청교도들이 왕권에 대적하는 세력이었다.
그러던 시기에 때마침 가톨릭 극단주의자였던 가이 포크스 등이 저지른 영국 국회의사당 화약 폭파 음모로 영국 내 가톨릭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청교도들은 이 기회에 대대적인 가톨릭 탄압을 통해 영국 내에서 가톨릭과 교황의 영향력을 뿌리뽑길 바랐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선대 메리 1세 시대의 막장극을 자기 대에 되풀이해서 좋을 게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음모에 직접 가담한 자들의 처벌과 성공회의 입지 확대만을 꾀하는 정도로 마무리지으려 했다. 제임스 입장에선 가톨릭을 때려잡아봤자 이미 정치적으로 가톨릭 세력은 많이 남지 않았고 과격해진 청교도들의 입장만 대변하다간 왕이 바지저고리 신세로 전락할 여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왕의 행동이 그동안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대한 불만과 함께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가 대륙의 30년 전쟁을 강건너 불구경했고, 특히 사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패망하는데도 소극적인데다가[5] 왕세자의 결혼을 프랑스와 스페인 등 가톨릭 국가와 하려 했고 실제로 왕세자였던 찰스 1세를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키자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에 반발했다.
그때부터 청교도식 예배를 금하는 탄압이 시작되었다. 물론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만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가톨릭과 청교도들 사이에서 중용을 지킨다고 선언했고, "교황 추종자와 광신적 청교도들은 양극단의 멍청이들"이라 훈계하며 배격하는 양비론을 취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소망과는 달리 당시 영국의 나랏일은 청교도의 협조 없이는 진행하기 어려웠는데, 헨리 8세 시기 상공업을 기반으로 힘을 쌓아 납세자 중 상당수가 대륙에서 전래된 개혁신학을 받아들였고 이들이 법조계와 학계 정계에 많이 진출한 결과 이 분야에서 청교도들의 세력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청교도 법학자들이 주장하는 왕권은 주님의 법 아래에서만 효력이 있다[6]는 생각이 왕권신수설을 침해한다고 여긴 제임스 1세에겐 심히 불쾌했으나 청교도 법률가나 신학자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었다.
반면 제임스 1세의 바람대로 중용을 지키는 충실한 신하인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전신)에 충성을 바치는 신도들은 많지 않았다. 통계적으로 영국 국교회(성공회) 신도 수가 적은 것이 아니라, 국교회와 왕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종교에 관심이 없던 현실주의자였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개혁신학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청교도가 숫자는 적었지만 제임스 1세와 그후 스튜어트 왕가 시절까지 왕당파에 대한 강력한 반대 세력이 되었다.이러한 배경 속에 청교도 신분으로 박해를 피해 미국에 건너간 메이플라워 호의 사람들 역시 근왕적인 태도를 취했다.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영어가 귀찮다면 여기로)에서 "제임스 폐하의 충성스런 신하들..." 이런 식으로 자신들은 왕권에 반대하는 반란 세력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왕권은 주님의 법 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 왕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상 역시도 당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스튜어트 왕가 군주들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청교도들은 찰스 1세 시절에도 탄압을 받았다. 국교회 켄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종교 정책을 비판하면 종교재판소에 끌려가 코와 귀를 자르는 형벌을 받아서 원성이 높았다. 또한 1660년 왕정복고 시기 크롬웰 편을 든 청교도 독립파(회중파)들은 정치적 보복을 피해 네덜란드 등 대륙으로 망명했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개혁을 포기하고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여 독립하려는 취지였다. 하지만 찰스 2세의 가톨릭 용인정책은 단순한 불만으로 머무르지 않고 심각한 위협으로 느꼈다. 왜냐하면 찰스 2세는 모후가 프랑스 공주이며 루이 14세가 사촌이고, 처가마저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이었기 때문이었다.
청교도 주류는 영국 내에서 소수파였음에도, 상공계급(젠트리, 젠틀맨, 요먼)에서는 상당수를 차지했기에 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고, 이에 계속 영국에 잔류하며 반국왕운동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올리버 크롬웰의 철기군. 영국 스튜어트 왕가가 성공회를 유지하면서 가톨릭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할 때 청교도는 지속적으로 내전에서 의회파를 지지했고, 청교도는 점차로 의회에서 유력해졌다. 이들은 1642년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주체가 되고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정권 접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정권을 잡고 나서 청교도 다수파인 장로회파를 숙청하고, 소수파인 독립파(회중파) 청교도들만이 크롬웰의 통치에 참여하며 매우 불안정한 통치기반에서 고압적 통치를 자행하기 이른다. 통치시기 청교도 세력은 지나친 종교적 엄숙주의 강요[7]에 답답해하는 국민적인 불만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나오는 반대를 철권독재로 찍어눌렀고, 결국 독재자 크롬웰이 죽자마자 정치적으로 대대적인 비판을 받았다. 한편 청교도 혁명 당시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현대 개혁교단(특히 영미권, 한국의 장로교)의 교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청교도의 시대는 1660년 찰스 2세의 복위로 막을 내리고, 대대적인 역공으로 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실각하고 청교도는 거의 소멸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다시 복권의 단계를 밟은 건 1688년 명예 혁명 때였으나, 이 시기부터는 이미 국교회(성공회) 우위의 상황이 유지되었기에 그 정치적 중요성은 상실되었다. 하지만 경제 및 문화적으로는 금욕, 근검, 절약 등으로 도리어 우위를 점유했다는 견해가 많은데,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장이 막스 베버가 주장한 청교도 자본주의다. 대표적으로 저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있다.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기 전 네덜란드 레이던(Leiden)에서 11년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로테르담 근교 Delfshaven이란 마을에는 이들이 떠나기 직전 머물렀던 교회가 지금도 남아있다. 당연히 네덜란드 개혁교회도 이들과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특히 청교도 신학에 자극받아 일어난 네덜란드의 경건주의 운동을 'Nadere Reformatie'(나데러 레포르마치, 2차 종교개혁)라고 부른다.
3. 교육관
- 칼뱅의 교육관
"오직 성경"을 강조하려면 모든 이가 글을 배워야 했고, 중세의 우둔한 전례와 풍습에 비판적이려면 이성을 바탕으로 인문적 지식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기 때문.
주께서 우리가 물리학, 변증법, 수학과 같은 학문에서 불경건한 사람들의 활동과 수고로 도움 받기를 바라시니, 값없이 베푸시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무시해서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마땅한 형벌을 받지 않도록 이 도움을 잘 활용합시다.
장 칼뱅의 기독교강요 2권 2장 16절
청교도 교육관은 이성과 논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래서 당대에는 이런 공격도 받았다고 한다. "저는 성경으로 더 충만할지 모르는 어떤 박식한 학자의 설교보다, 아무런 연구없이 그냥 성령의 활동으로 말하는 사람의 설교를 듣는 것이 더 좋습니다." [8] 이성과 믿음의 이분법적인 접근보다는 믿음이 이성을 우선하지만 이성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음을 역설했다. 장 칼뱅의 기독교강요 2권 2장 16절
- 교육 시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탈 없이 뉴잉글랜드로 데려다 주신 뒤로, 우리는 집을 짓고, 생필품을 마련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편한 장소를 세우고, 시민정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구한 일 가운데 하나는 배움을 증진하고, 그것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일이었습니다.
뉴잉글랜드의 첫 열매(New England's First Fruit(1643))
뉴잉글랜드의 첫 열매(New England's First Fruit(1643))
4. 정치관
아메리카에 사람들이 살게 된 것은 스튜어트 왕가의 혐오스러운 폭정과 세속적이고 영적인 폭정에 대한 투쟁 덕분이었다.
아메리카에서 정착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완수하도록 이끌었던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보편적 자유에 대한 사랑, 성직자, 위계조직, 전제적 지배자들에 대한 증오와 불안, 공포 때문이기도 했다.
존 애덤스의 『교회법과 봉건법에 관한 논문』(1765)
아메리카에서 정착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완수하도록 이끌었던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보편적 자유에 대한 사랑, 성직자, 위계조직, 전제적 지배자들에 대한 증오와 불안, 공포 때문이기도 했다.
존 애덤스의 『교회법과 봉건법에 관한 논문』(1765)
앞서 영국의 청교도들은 스튜어트 왕가와의 정치적 이념의 차이로 100여년간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이들은 왕권신수설을 배격하고 칼뱅주의에 입각하여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할 것을 주장했고 이는 영국과 네덜란드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에게도 이어진다. 그리하여 미국은 건국 이전부터 청교도들의 이주로 인구적 특성이 생겨났으며, 이런 주민들이 영국정부의 식민지 압제에 벗어나 국가를 구성했고 독립혁명의 이론적 기반은 칼뱅주의에 영향받은 공화주의와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큰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독립헌장에서부터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자유롭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혁명이 국가교회인 가톨릭에 반감을 많이 드러냈다면 미국 독립혁명은 청교도 윤리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재 세속주의에서 주장하는대로 미국의 건국 이념은 종교와 무관하다는 주장은 건국과 독립전쟁 당시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것으로[11] 현재 종교의 자유라는 개념이 '세속화된 국가에서 어느 종교든지 믿어도 되거나 혹은 종교를 갖지 않을 자유'라면, 당시 17~18세기 청교도들에게 종교의 자유는 수정 헌법 1조에 명시된대로 영국 국교회와 같은 국교를 두지 않고, 국교와 같은 지위의 기독교 내 특정 종파를 인정하기 않겠다는 취지로 봄이 타당하다. 당시 유럽은 기독교 세계였고, 종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 특정 교파냐 아니냐가 정치적 갈등의 주 양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청교도들의 주류는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찰스 2세의 영국 국교회(성공회) 일원화 정책에 반발하여 가장 극심한 탄압을 받던 회중교회나 재세례파들[12]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청교도들의 특징이라면 오히려 현대 미국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의 원류를 엿볼 수 있는데,
- 국가교회 체제에 부정적이며 국가의 권력과 개입을 최소화한다.
- 개인의 신앙과 양심,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고[13] 개인의 성경 중심 신앙을 강조한다.
- 자유의지를 강조하기에[14] 개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엄격하게 묻고, 따라서 금욕적인 윤리관을 갖는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개인주의, 제한된 권력, 작은 정부를 주장한다.
5. 기타
건국 초기 미국으로 이주한 칼뱅주의자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들은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에서 떨어져나올 것을 주장한 분리주의자들이고, 청교도들은 성공회에 남아 개혁교회 성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과 영국 내에서 비국교도로 남은 개신교도들을 포괄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메이플라워호에 탔던 사람들의 기록에 청교도(puritan)라는 표현이 없다. 초기 미국 이주민들은 자신들을 청교도라 부르지 않았다.청교도를 잉글랜드 국교회와 뚜렷하게 구분지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국교회 안에 머물면서 국왕과 싸웠던 이들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현재 성공회에는 저교회파라는 청교도(개혁교회) 신앙의 영향을 어느정도 받은 분파가 있다.
분리주의자들이 만든 교단은 회중정치를 하면서 유아세례를 인정했고, '사보이 선언'(Savoy Declaration)이라는 타 개혁주의 교단과 호환되지 않는 독자적인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이런 교회를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로 부른다. 그런데 19세기쯤 이르면 교단의 신학적 성향이 자유주의 신학으로 크게 기울었다. 훗날 미국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ristian Church)는 '복음개혁교회'(E&R Church)라는 다른 자유주의 성향 교단과 합동하여 미국 연합기독교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중이다.
분리주의자 중 일부는 침례교회를 만들었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교단이다.
대표적인 청교도 문학으로는 존 밀턴의 <실낙원(失樂園)>, 존 번연의 <천로역정> 등이 있다.
일각에서는 영국 요리를 최악으로 만든 원인 중 하나로 까기도 한다. 청교도는 철저한 금욕주의를 내세우는데, 요리를 맛있게 하는 것 자체도 금기 취급을 해버린지라 먹을 수 있는 요리 종류와 조리법이 매우 단조로워졌다는 주장. 그러나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영국을 비롯한 북유럽에도 대충 차려먹는 비슷한 식문화에 기후가 농업 생산에 유리한 지역이 아니라 다양한 재료가 자랄 수가 없다. 현대 영국 요리가 대체로 레시피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저질이거나 기묘한 재료로 인해 전반적인 맛이 하락한다고 비판받는 것과 관련이 깊다. 더군다나 영국이 세계 최강의 부국이 되면서 상류층이나 젠트리들은 외국인 특히 프랑스 요리사들을 고용해서 잘 차려 먹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개신교가 문화적 대세인 네덜란드, 독일 북부와 북유럽도 마찬가지이다. 네덜란드 요리도 칼뱅주의의 영향으로 벨기에 요리와 비교하면 단순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 요리가 특히 성의 없어 보일 정도로 단촐한 이유는 청교도뿐만이 아니라 기후, 문화, 국제관계, 산업 혁명, 연이은 전쟁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1] 성공회 안에서 가톨릭 성향이 강한 교회를 '고교회'라고 하고 개혁교회 성향이 강한 교회를 '저교회'라고 한다. 또 이 둘 사이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으려는 교회는 '광교회'라고 불리는데, 광교회는 사회적, 신학적 자유주의 성향이 강하다. 저교회 중에는 존 웨슬리처럼 고대 교부들의 영향을 받아 보편교회론을 추구하면서 복음주의적 고교회파의 요소를 어느정도 수용한 이들과 청교도들과 유사한 칼뱅주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 혼재해있다. 한국에는 가톨릭의 영향이 강한 '고교회 성공회'가 먼저 들어왔으며, 현재는 사회적, 신학적 자유주의적 성향, 에큐메니즘의 영향으로 인해 광교회적 성향도 혼재되어 있다.[2] 앞서 주교(감독)제도는 청교도들이 폐지를 주장한 바 있는데, 에드워드 6세 시절 청교도 교리에 공감한 에드워드 왕이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에게 로체스터 주교직을 제시했지만 주교제 자체를 반대했기 때문에 사양한 바가 있었다.[3] 마르틴 루터는 권력에 전적으로 복종하라 했다가 영적인 침해에 대해선 저항을 인정했고, 장 칼뱅은 일단 국가권력에 대해서는 복종하라 했다가 신앙이 탄압받을 경우에 대해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4] 현대의 민주주의 국민주권과는 거리가 있다. 상위 통치자가 잘못하면 하위 통치자가 뒤엎어야 한다 수준.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훗날 미국 독립혁명에 영향을 주었다.[5] 의회에서 당연히 개신교 세력을 돕기 위해 전쟁 대비 특별과세를 요청했으나 제임스 1세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금 내겠다는데도 왕이 거부하는 모양새를 취하자 가톨릭과 내통하는게 아니냐는 불만이 나왔다.[6] 단순 가톨릭적인 요소를 배격하는 철저한 성경주의 신앙뿐만 아니라 세속군주의 통치 지상권도 포함한다.[7] 이 시기, 크롬웰과 청교도 정권에 의해 영국의 연극 극장들은 모조리 문을 닫아야 했고, 주일에 영업하거나 취미생활하는 것조차 금지, 지나친 여흥으로 간주되는 노래나 춤 금지 등 너무 지나친 도덕주의로 영국 국민들을 찍어눌렀다.[8]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터는 없네>, 코르넬리스 프롱크, p.422[9] 영국 국교회 내부의 개혁을 포기하고, 국교회를 떠나서 새로운 교회 조직 설립을 주장했기에 분리파 또는 독립파, 교회조직으로는 회중교회를 선호했기에 회중파라고도 불린다. 청교도 혁명당시 청교도 다수는 장로파였으나 크롬웰이 속한 소수파가 여기에 속하며 왕정복고 이후 네덜란드와 신대륙으로 이민을 간다.[10]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Harvard_University[11]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이신론자들이 많음을 근거로 음모론이 많은데 미국뿐만 아니라 당시 18세기 서유럽에서도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신론이 대유행이었다. 볼테르와 루소도 이신론자였다.[12] 아미쉬와 메노나이트들만 연상할 수 있지만 현대 침례회 또한 재세례파의 후신을 자처한다.[13] 이는 가톨릭이나 성공회에 시달렸던 것에 대한 반감 내지는 방어 논리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긴 하다.[14] 자유의지는 재세례파들이 특히나 강조했는데, 재세례파는 각 개인은 자유의지에 따라서만 세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