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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09:42:19

왕권신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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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은 누구나 위에서 다스리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권위란 있을 수 없고, 현재의 권위들도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권위에 맞서는 자는 하느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게 거스르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불러오게 됩니다. 3 사실 지배자들이란 악행을 할 때에나 두렵지 선행을 할 때에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대는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까? 선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권위로부터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4 지배자는 그대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악을 행할 경우에는 두려워하십시오. 그들은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자에게 하느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그분의 일꾼입니다. 5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노 때문만이 아니라 양심 때문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6 여러분이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일에 정성을 다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7 여러분은 모든 이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조세를 내고 관세를 내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내며,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
로마서 13,1-7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새번역 성경』)
1022...통치자가 거룩한 정의의 계명을 지키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는 경우처럼, 지상의 권력은 때때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내 도움으로 임금들이 통치하고 군주들이 의로운 명령을 내린다."(잠언 8,15) 그러나 통치자가 거룩한 정의에 반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는 경우처럼, 지상의 권력은 때때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 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음모를 꾸미는구나."(시편 2:2)[1]

1028...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통치자와 권세에 대항했으나 영벌에 처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을 받았다. 사도(바오로)는 지금 하위 권력에 대항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거룩한 질서는 상위 권력에 반하여 하위 권력에 복종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인간적 업무에서조차도, 황제를 거슬러 총독에 복종하거나, 왕을 거슬러 국왕대리에게 복종하진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모든 권력은 거룩한 권력의 하위 권력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반하여 지상의 권력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말하는 대로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2]
토마스 아퀴나스, 『로마서 주석』Super Epistolam ad Romanos Lectura (로마 13,1-7 주석)[3]

1. 개요2. 역사적 전개3. 왕권신수설과 저항론4. 당시의 반론5. 동아시아에서

1. 개요

프랑스어: Droit divin
영어: Divine right of kings/Divine right[4]
한자: 王權神授說

제왕신권설(帝王神權說)이라고도 한다. 군주는 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라는 의미로, 근대 이전 왕권의 근거다. 선사시대부터 신정설에 따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주장이 있었으나 17세기 영국 스튜어트 왕조 시절 청교도들과 왕권 갈등으로 많이 알려졌다. 청교도왕권 제한 주장[5]에 맞서 제임스 1세가 친히 책을 편찬하여 주장할 정도였다.

하지만 유럽의 왕가들은 17세기 뿐만 아니라, 왕권신수설을 근거로 빈 회의의 정통복고주의의 근거로 삼았고 시민계층의 1848년 혁명을 제압했으며, 프랑스에선 공화주의보나파르트주의에 맞서 부르봉 왕당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20세기 군주인 빌헬름 2세니콜라이 2세조차도 왕권신수설에 심취했다.

2. 역사적 전개

4세기경 기독교로마 제국에 허용되어 널리 퍼졌으나 곧 로마는 4세기 후반(395년) 동로마 제국서로마 제국으로 분할되었고 80여년 후인 476년에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사실 서로마가 멸망하기 이전부터 로마 제국 국경선은 이미 숭숭 뚫려 있어서 잡다한 민족들이 서로마 제국에 똬리를 틀고 왕국을 세웠는데, 이들이 현재 완전 야만인이라는 주장은 깨졌지만 로마 제국보다 행정수준이 낮고 법체계가 미비해 국가 체제가 연속성을 갖추지 못하고 흥망성쇠와 부침이 많았다. 왕이나 부족장들은 그중에서 좀 세력이 크거나 명망이 있는 추장들을 선호해서 뽑힌 것이라 죽고 나면 게르만족 관습에 따라 분할상속하여 무리들이 흩어지거나, 후계자가 별로라서 망하거나 다른 부족으로 흡수되었다. 이민족들이 로마 경내에 거주하면서 기존 로마화된 주민들과 이민족간의 교류가 시작되었는데, 이민족들이 로마화된 문명을 받아들이며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자 교회에선 답례로 정통성을 보완하는 대관식이나 도유식 의식이 치러진다.

프랑크 왕국클로비스 1세는 개종하자마자 기름 부음[도유식]으로 교회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았는데 이 같은 전통은 프랑크 왕국의 다음 왕조 카롤링거 왕조피핀메로빙거 왕조를 찬탈하며 교황에게 도유식을 받았고, 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프랑스 왕국의 후대왕들은 랭스에서 대주교에게 대관식을 받아야만 정통성을 인정받는 전통이 되었다.[7] 한편 독일에서는 새 왕이 등극하면 카롤루스 대제의 도시 아헨에서 쾰른 대주교에게[8] 이런 의식을 치르는 전통이 있었고, 그와 더불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교황이나 그의 대리인에게 대관을 받아야만[9] 정통성을 인정받은것이 그 예이다. 헝가리 왕국에서도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슈트반 1세부터 헝가리 왕위는 '성 이슈트반 왕관'이며 사도왕으로 불렸으며 프랑스의 경우 루이 9세가 시성되면서[10] 프랑스 왕위는 성 루이의 왕관이 되었다. 또한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의 로마 황제들이 그리스도인의 보호자로 여겨진 것도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세속적인 보호를 필요로 하던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타협으로 교회와 종교의 권위를 빌려 왕권 강화의 수단이 되었지만 서유럽이 안정되고 나선 조금 다른 양상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8세기 시절부터 등장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 '가짜 이시도르 교령집(pseudo-Isidorian)'을 근거로 교권이 속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 문서들은 출현 당시에조차도 출처를 알 수 없었고 문헌학적으로 수준이 낮았기에 당시 학자들이 보기에 의심스럽고 당연히 세속 군주들에게 인정받지 못 했지만 세속권력에 공백이 생기고 교회권력 교황권의 전성시대가 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교회법 학자들은 이 두 문서를 근거로 비슷한 수준의 연구 업적(?)들을 내놓으며 왕의 세속 지상권(至上權)조차도 교회의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자 세속군주들은 이 문서들이 조작임을 증명하고,[11] 더불어 왕권의 고유함을 주장할 이론적 근거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른바 왕권신수설이다.

세속 군주들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성경에서 비롯된 성직과 세속 지위의 우선 순위를 반박하는데 모세, 아론[12]의 경우와 구약 이스라엘 왕국 시절에도 왕이 제사장보다 높았다며 교회의 이론을 반박했고, 교회에선 다윗 왕이 잘못했을 땐 하느님이 예언자 나단을 보내서 책망한 것처럼 왕이 잘못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여전히 교회에서 왕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맞섰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세속에 대한 교회의 권위는 재차 타격을 받게 된다.[13] 이미 그 이전에 세속 왕국의 규모가 교회권력을 압도하자 교황청은 15세기 세속 스페인 왕국레콩키스타를 명분으로, 1516년 프랑스 왕국에 볼로냐 화약으로 세속권을 인정하며 더불어 교회 관리권과 주교 서임권과 과세권 등을 거의 모두 양보하는데 종교개혁이 일어난 북유럽에선 루터교의 영향으로 세속 제후와 왕국들은[14] 국가교회가 되어 세속 군주가 교회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런데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유럽의 가톨릭 국가도 아니요, 북유럽의 국가교회화도 아닌 다른 정체성을 가진 종교개혁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는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의 전신)가 그 결과인데 명목상으론 로마 교회에서 독립하여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를 독립시킨 것이지만[15] 기존 가톨릭 전통이 전반적으로 뿌리깊게 남아있었기에 헨리 8세의 잉글랜드 종교개혁 전후 대륙의 개혁신학을 적극 받아들인 청교도들이 기존 가톨릭 요소들의 일소를 주장했기에, 16세기부터 한 세기간 종교적이고 사상적 갈등이 생겨난 것이다.[16]

구체적으로 청교도들이 모범으로 보는 칼뱅주의의 본산 제네바는 공화국이었고[17] 제네바는 세속군주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 겸 대립교황 펠릭스 5세가 자신의 12살 난 아들을 제네바 주교로 임명하자 제네바 시 참사회에서 이를 거부하며 사실상 독립한게 시초이며 칼뱅 사망 후 가톨릭 교회와 세속 왕국의 종교탄압에 맞서서 이들의 정치관은 모든 권위는 성서에 두었기 때문에 주님의 법(성서)을 어긴 왕은 폭군이며 왕이 폭군이면 하위 통치자가 퇴출시켜야 한다로 변모했기 때문이다.[18] 이를 이어받은 장로회가 국교가 된 스코틀랜드 왕국은 왕 1인 권력이 아니라 여러 유력 클랜들로 권력이 분산되었고, 교회마저도 장로들이 주도하여 운영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 1세라도 잉글랜드 교회의 주교 계서제와 중앙집권적 조직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제임스 1세는 오히려 자신의 고향인 스코틀랜드까지 잉글랜드와 합쳐 중앙집권적 조직을 만들기 위해 더 강한 왕권을 주창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칼뱅주의에 물든 잉글랜드 법학자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들은 왕권은 주님의 법(성경) 아래 있다며 왕에 맞섰다.

이러한 해석은 제임스 1세와 충돌을 일으켰다. 특히 영국 내전으로 처형된 찰스 1세의 사례가 중요하다. Blair Worden은 영국 내전을 '국교회는 어떠한 형태의 개신교가 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벌어진 개신교 간의 종교적 내전이라고 본다.

영국 내전 이후 찰스 1세는 처형당했는데 이것이 청교도들의 공통된 의견은 아니었다. 영국 내전의 주역들은 젠트리 계층으로 시골 지주, 치안 판사, 교수, 상공인 들이 주류였는데 하위 통치자가 상위 통치자를 퇴출할 수 있다는 데는 동감해도 왕을 처형한다는 의견에 일치한 건 아니다.[19] 오히려 처형을 주장하는 청교도 독립파(올리버 크롬웰)는 소수였고, 대부분의 의회 장로파들은 오히려 정치적으론 보수적이라서 처형에 반대했다. 그러나 군을 장악한 크롬웰이 강경하게 처형을 주장해서 관철시켰다. 대부분의 의회파 젠트리들은 폭군을 퇴출시키더라도 역성 혁명이 아닌 다음 순위 계승자, 적어도 왕의 혈통이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나 찰스 1세의 왕세자 찰스 2세는 찰스 1세가 살아 있는 한 적법한 군주를 신하가 퇴위 시켰으니 이를 거부할 것이고, 찰스 1세도 당시 셋째 아들이던 글로스터 공작 헨리에게 의회에서 "너를 추대하더라도 절대로 형의 자리를 찬탈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의회파는 폭군 퇴출 명분으로 내전에서 왕당파를 제압했으나 이런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결국 다수 의회파인 장로파가 크롬웰에 찬성하여 근소한 차이로 찰스 1세 처형 후 잉글랜드는 크롬웰이 죽을 때까지 공화국이 된다.

한편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저항론(폭군은 왕이 아니다)은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에도 퍼져있었다. 1534년에 헨리 8세에게 맞서서 아일랜드의 젊은 백작 킬데어가 이러한 논리로 봉기하였으며, 1569년에 엘리자베스 1세에 맞선 가톨릭 봉기 역시도 이러하였다. 이러한 가톨릭측 저항론은 서구의 전통적인 폭군 살해론에 기반해있는데, 이미 헨리 8세는 가톨릭 교회의 파문을 받은 상태였고, 당시 수장령과 반역법으로 완전히 몰락한 가톨릭 세력은 불법화되어 지하로 숨어들었다.[20] 교회에서 파문된 왕(헨리 8세)이 합법적인 조강지처를 내치고 이세벨급 마녀의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아합 왕 취급을 했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고 본 것이고, 킬데어 가문은 대대로 아일랜드 총독을 세습하다가 헨리 8세가 직접 통치에 나서며 숙청한 것이기라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 그리고 이들 입장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역시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파문을 받은 이단자의 사생아이고, 메리 스튜어트가 합법적인 잉글랜드 국왕이며 가짜 군주(엘리자베스 1세)를 몰아내는 것이 하느님이 뜻이었다. 이러한 면은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왕권신수설을 이해하는 데 신앙이 있고 그 내부에는 저항의 근거를 내재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 저항에 타 종파에 대한 적개심이 없지는 않으나(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군주에 대한 반감, 혹은 영국 내전의 반가톨릭 수사법) 그 의의를 무시할 수는 없다.

절대군주권의 지지자였던 토마스 홉스도 이 주장을 폈다고 하나, 여기서 말하는 왕권신수설이라는 것이 단순히 자연스러운 제도인 군주제는 자연의 창조주에게 축복받았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대에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유행한 극단적인 왕권신수설로 이해하면 오산이다.

홉스가 생각한 절대군주권의 근본은 신이 아니라 민중이었다. 인간이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행위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면 도리어 자기 욕구를 더 보장받을 수 없기에 이를 조율하기 위한 기본 윤리와 실정법이 요구되며 이러한 법을 행사하고 수호하기 위한 절대권력, 즉 국가를 찾게 되고, 그 국가를 다스리는 군주에게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대가로 인민이 군주에게 지배권을 넘긴다는 계약을 맺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권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계약에 의해서 발생하는 권력이라는 것이며, 군주가 인민을 보호하지 못할 경우 인민은 군주를 바꿔도 된다고 주장했다. 즉 홉스가 생각하는 군주권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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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더 간략하게 보여주는 존재로 홉스의 저서 『리바이어던』 표지에 홉스의 사상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 있는데, 엄청난 양의 사람들로 왕의 형상이 만들어져 있다. 왕과 나라를 성립시켜 주는 근본 존재를 대다수 민중으로 본 것이다. 괜히 홉스의 주장이 로크[21]와 루소의 사회계약사상으로 발전한 게 아니다.[22]

3. 왕권신수설과 저항론

의외로 왕권신수설은 폭군에 대한 저항의 근거와 이분법적으로 딱딱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12세기를 대표하는 학자, 교육자, 외교관, 사상가, 성직자인 솔즈베리의 존(John of Salisbury, 1120~1180)의 저작인 Policaticus에서 이러한 주장을 엿볼 수 있다. 존은 공동체를 지체(肢體, body)에 비유하는 서양의 전통적인 수사법에 따라, 국가를 하나의 지체로 설명한다. 존에 의하면 통치자는 머리, 조언자는 심장, 관료는 장기와 몸통, 농민과 장인은 발로 묘사된다. 곧 '정치체'이다. 그렇기에 '반역죄'는 신체에서 머리를 쳐내는 행위로서 용납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지만 존은 인간의 지체가 조화에서 건강을 얻듯, 정치체는 각 부분의 조화로 건강을 얻으며, 이 조화는 중용과 자유라고 해석한다.
정의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인류에 대한 의무로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남이 해를 끼치는 것을 막으라. 당신이 해를 끼친다면, 그것은 상처를 입히는 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남이 해를 끼치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당신의 불의의 노예가 된다.
Policraticus, 62
법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Policraticus, 7.25

그리고 이러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군주가 있음을 존은 주장한다.
The prince fights for the laws and the freedom of his people, while the tyrant's unique desire is to destroy the laws and to subject his people.
군주란 법과 인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존재다. 폭군은 오로지 법이 폐기되고, 인민이 노예가 되는 것만을 바라는 존재다.
Policraticus, 8.17

여기서 존은 prince(군주)와[23] tyrant를 대비시킨다. 물론 존은 근본적으로는 당시에 건전하다고 여겨지던 가치를 옹호하려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반역을 지체에서 머리를 자르는 행위로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존은 그의 독특한 자유론을 통해, 정치체의 각 부분에게는 비판을 할 자유도 있음을 말한다.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고, 자유인은 악덕을 자제하라고 충고할 자유도 있다.
Policraticus, 7.25

따라서 존은 군주의 이상적인 덕목으로, 비판에 귀를 열어놓는 군주를 주장한다. 이러한 자유, 곧 악덕을 비판할 자유를 침해한다면 그것은 prince가 아닌 tyrant가 되며, 이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폭군을 죽이는 것이 정당하다는게 존의 주장이다. Jeremy Black이 지적하듯[참조] 통치자가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부여받았다는 점은, 그가 법에 따라 공정하게 통치할 의무를 면제하 않는다.[25]

물론 동아시아에 맹자의 천명론이 있다고 한들, 실제로는 폭군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기에 편협한 해석들이 나왔듯이[26] 서양사에서도 이러한 가정이 나올 때 "폭군은 왕이 아니다"라는 주장과 "폐하가 폭군이라는 증거부터 가져와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27]

다만 맹자의 천명론이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왕과 인민의 상호 의무를 말하였듯이, 왕권신수설이 서양에서는 왕과 인민의 상호 의무를 말하였음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1세는 1320년 발표한 아브로스 선언에서 자신이 가진 왕권의 근거로 (1)신의 섭리 (2)'스코틀랜드의 법과 관습'에 근거한 적법한 계승자임 (3)'왕국의 제후들과 지주들, 그리고 모든 평민들의 동의와 허락'을 들었다. 신의 섭리에 대응되는 이 '왕과 백성 간의 계약'이라는 개념은 아직 구체적인 이론이라기보다는 피상적인 개념에 가까웠지만 이미 중세 시대부터 널리 통용되었으며, 어떻게 보면 국민주권론의 초기 형태이다.
Comment que pluseur estat de gens soient maintenant,
voirs est qu’au commencement tuit furent franc et d’une meisme franchise,
car chascuns set que nous descendismes tuit d’un pere et d’une mere.
Mes quant li pueples commença a croistre et guerres et mautalent furent commencié par orgeuil et par envie, qui plus regnoit lors et fet encore que mestiers ne fust,
la communetés du pueple, cil qui avoient talent de vivre en pes, regarderent qu’il ne pourroient vivre en pes tant comme chascuns cuideroit ester aussi grans sires l’uns comme l’autres: si eslurent roi et le firent seigneur d’aus et li donnerent le pouoir d’aus justicier de leur mesfés, de fere commandemens et establissemens seur aus;
et pour ce qu’il peust le pueple garantir contre les anemis et les mauvès justiciers, il regarderent entre aus ceus qui estoit plus bel, plus fort et plus sage, et leur donnerent seignourie seur aus en tel maniere qu’il aidassent a aus tenir en pes et qu’il aideroit au roi,
et seroient si sougiet pour aus aidier a garantir.
Et de ceus sont venu cil que l'en apele gentius hommes, et des autres qui ainsi les eslurent sont venucil qui sont franc sans gentillece.
비록 현대에는 여러 신분들이 있지만,
태초에 모든 인간은 똑같은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쌍의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지나친 자만심과 질투로 인해 원한과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한다면 평화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해서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법을 만들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벌할 권력을 주었다.
또한 왕이 공동체의 적들과 사악한 관료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신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강하고, 현명한 자들을 선출해서 봉신으로서 왕을 도우며 평화를 지키는 영주들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신분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자신들 가운데서 귀족을 선출한 사람들 중 남은 이들은 비귀족 자유민이 되었다.
Beaumanoir, Coutumes de Beauvaisis (1283), 45장
et ces coustumes est li cuens tenus a garder et a fere si garder a ses sougiès que nus ne les corrompe.
Et se li cuens meismes les vouloit corrompre ou soufrir qu’eles fussent corrompues, ne le devroit pas li rois soufrir,
car il est tenus a garder et a fere garder les coustumes de son roiaume.
백작은 판례를 통해 인정된 관습법을 스스로 준수하고 신하들이 준수하게 만들 의무가 있다.
그리고 만약 백작이 스스로 법을 어기거나 신하들이 법을 어기는 것을 묵인하려 한다면, 국왕이 그것을 막아야 한다.
왜냐면 국왕은 자신의 왕국의 법을 지키고 신하들이 지키게 만들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Coutumes de Beauvaisis , 24장
La setisme vertus qui doit estre en baillif, si est qu’il obeïsse au commandement de son seigneur en tous ses commandemens,
essieutés les commandemens pour lesqueus il pourroit perdre s’ame s’il les fesoit,
car l’obeïssance qu’il doit doit estre entendue en droit fere et en loial justice maintenir.
Ne li baillis ne seroit pas escusés vers Dieu qui du commandement son seigneur feroit tort a son escient.
대법관이 가져야 할 일곱 번째 미덕은, 자신의 군주의 모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단, 수행했을 때 영혼(ame)을 잃을 수 있는 명령을 제외하고.
왜냐면 대법관에게 의무지어진 충성은 법을 적용하고 공정한 재판을 유지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군주의 명령에 따라서 의도적으로 악행을 저지른 대법관은 하느님 앞에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을 것이다.
Coutumes de Beauvaisis , 1장
중세 초기 유럽에서 왕이나 황제는 교황의 신권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심지어 세속적 법 위에 군림하는 존재도 아니었다. 왕에 대해 불만을 가진 자가 있으면 그와 왕 사이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정이 열렸으며, 법정의 판정은 왕에게도 적용되었다. 중세 서양의 왕들은 인민의 의견을 듣지 않고 법을 만들고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간주되지 않았다. 자연법 내지는 신의 법에 의해서 왕권은 제한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Plamenatz 1963, 158-159). 나중에는 의회(parliaments)가 왕권을 제한하는 기능을 맡게 된다. 13세기는 일반적으로 중세 문명의 전성기로 통하지만, 그때 이미 서양의 군주들은 ‘대의체제(a system of representation)’로의 이행을 시작하고 있었다(Morrall 1958, 60).
...속세의 왕들이 주장한 속권의 신수설(神授說)은 교회 신권에 대한 속권의 종속성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왕권이 전적으로 신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주장은 아니었다. 왕권이 관습에 의한 세습권과 함께 인민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관념도 부정하지 않고 있었다(Plamenatz 1963, 160-161).
이삼성, <동서양의 정치전통에서 성속(聖俗)의 연속과 불연속에 관한 일고>

4. 당시의 반론

왕권신수설과 상반되는 해석이 중세 초에 존재하였다. 초대교회에서는 세속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다. 일단 신국이야말로 진정한 나라요 참된 권력이라는 이유를 들어 세속의 모든 권력을 부정하는 입장이 있었다. 로마의 기록 중에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이 법정에서 이런 신념을 피력했다는 구절이 있다. 대표 저서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세속권력이 근본적으로 악하지 않다는 포용적 입장이다. 신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를 구분해서, 인간 세계의 권력을 인정함이 신의 참된 주권을 침해하거나 부정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권세는 신이 어떤 식으로든 인정한 것이므로 역시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계속 박해받던 그리스도교가 반국가적인 종교로 낙인찍히는 것을 막으려는 몸부림의 일환이다. 초대교회 호교론의 상당수는 "우리는 종교적인 면에서만 로마 제국의 방침을 따르지 않을 뿐, 다른 점에서는 로마의 선량한 신민으로서 모범적으로 삽니다"라는 식이다.

왕권신수설의 영향은 왕실의 의식이나 예법에 영향을 미쳤으며, 반대로 왕이 신민에게 신과 같은 위엄과 자비를 보이는 것이 권장되기도 했다.[28] 한편 이를 강조하기 위해 왕실에서는 하층민들에게 왕이 병든 부랑자를 어루만지니 병이 나았다는 등의 설화를 은근슬쩍 퍼뜨리기도 했는데, 당대에는 비웃음을 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혁명 시기 루이 16세가 처형될 때 그의 피를 마시려고 빈민들이 기요틴 아래로 몰려들었다는 일화도 있다.[29] 마지막까지 병자를 치료하는 구세주 흉내를 냈던 왕은 샤를 10세였다.

세속적 통치 권한을 정당화하는 왕권강화 이론은 전세계에 흔히 보인다.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가 하늘의 대리인으로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고, 동아시아에서는 전통 신화나 불교, 유교 등이 왕 중심의 이론으로 왕권을 뒷받침해 주었다.[30]

5. 동아시아에서

동아시아에서도 천자, 천조, 천황, 천명 같은 표현에서 나타나듯 왕권은 하늘이 주신 것으로 정당화되었다. 서양에서 신에게 인격을 부여한 인격신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는 자연의 법칙 그 자체를 천(天)으로 표현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사상이기에 '왕권신수설'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었다.[31] 맹자도 왕의 권한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서양의 왕권신수설이 '하느님에 의해 권한을 받은 왕만이 정당하며, 따라서 폭군은 왕이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듯, 맹자 역시도 천명이 없는 왕은 왕이 아닌 '필부'임을 주장했다. 이러한 맹자의 사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 <양혜왕 하편> 제8장이다.
賊仁者,謂之賊;賊義者,謂之殘,殘賊之人,謂之一夫。聞誅一夫紂,未聞弒君也。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하며, 이런 잔적(殘賊)한 사람을 단지 한 놈이라고 할 뿐입니다. 그 한 놈 주(紂)를 주벌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문제는 맹자의 사상이 동아시아에서 마이너했다는 것이다. 훗날 주희에 의해서 맹자가 다시 주목받기는 했으나, 재해석이 너무 심해서 맹자의 본래 주장과는 좀 멀어졌다. 그래도 맹자가 주장하는 민본(民本)은 유학자들에게 중요한 지침 중 하나였다. 물론 그것이 현실 정치에서 이루어졌는가는 다른 문제겠지만.[32]

고려 시대에는 '제왕신권설'(帝王神權說) 사상이 있었다고 한다. #

제국주의 시절인 일본 제국의 군주인 천황이 자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 즉 현인신(아라히토가미 現人神)으로 지칭하면서 강력한 권위와 신성성을 부여한 적이 있다.
[1] Tertio modo potest considerari quantum ad usum ipsius: et sic quandoque est a Deo, puta cum aliquis secundum praecepta divinae iustitiae utitur concessa sibi potestate, secundum illud Prov. VIII, 15: per me reges regnant, et cetera. Quandoque autem non est a Deo, puta cum aliqui potestate sibi data utuntur contra divinam iustitiam, secundum illud Ps. II, 2: astiterunt reges terrae, et principes convenerunt in unum adversus Dominum, et cetera.[2] Sed contra hoc videtur esse quod apostoli et martyres principibus et potestatibus restiterunt et ex hoc non damnationem a Deo sed praemium acquisiverunt. Sed dicendum est quod Apostolus hic loquitur de eo qui resistit potestati inferiori, secundum quod est a Deo ordinata. Habet autem hoc divina ordinatio ut potestati inferiori non obediatur contra superiorem, sicut etiam in rebus humanis ut proconsuli non obediatur contra imperatorem, nec balivo contra regem. Et omnis potestas humana sub potestate Dei ordinatur et nulli potestati humanae est contra Deum obediendum, secundum illud Act. V, 29: oportet obedire magis Deo quam hominibus.[3] 다름아닌 바로 위 로마서 구절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석이다. 오해를 해선 안 되는데, 토마스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거나 반박하는 게 아니다. 통치권의 근거가 하느님이라는 데 토마스는 기꺼이 동의를 한다. 그러나 '통치권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의 마땅하고 합리적인 논리적 귀결로서, '불의한 통치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게 아니며, 복종의 의무가 없다'가 연역되는 것이다.[4] Mandate of heaven이라 하기도 하나, 이는 중국사에서 천명을 지칭할 때 한정으로 쓰임에 유의.[5] 합법성 내에서 제한된다는 것이지 최고 권력자임을 부인한 것은 아니다. 왕권신수설의 완전한 부정은 아니고 그들의 군주가 '하나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은 적법한 군주'인가 혹은 '폭군'인가라는 해석의 차이가 갈등의 주된 원인이다.[도유식] 구약시대 선지자, 사사(판관), 왕에게 하나님이 선택한 자임을 알리기 위해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7] 잔 다르크는 랭스 대관식을 못치러서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샤를 7세를 위해 싸웠고, 샤를 7세는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렸다.[8] 16세기 최선임 선제후 마인츠 대주교의 이의 제기로 대관식 장소인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마인츠 대주교에게 받는 걸로 바뀐다.[9] 15세기 막시밀리안 1세 이후 교황 대관은 불필요해졌다. 교황의 동의 없이 선출된 로마 황제로 칭했고 카를 5세를 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 대관을 받지 않았다.[10] 당시 교황청에서 정치적으로 막나가는 필리프 4세를 달래려는 의도가 시성에 영향을 주었다. 루이 9세는 십자군 참전 등이 결정적인 시성 요인이었다. 교회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다른 유럽 군주들은 무관심했지만 7차 십자군을 단독으로 수행했고 8차 십자군 준비중에 병사. 물론 루이는 살아있을때도 성인이라 평을 받고, 스스로가 프란치스코 3회원으로 활동하며 구휼에 심혈을 기울이는 등 성인이라는 평에 어울리게 개인적으로도 무척 신실한 인물이였다는데는 이견이 거의 없으나, 시성에는 이러한 복합적 면모가 작용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평가 출처 다만 정작 필리프 4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욤 드 노가레를 파견하여 교황청에 처들어가 교황 보나파시우스 8세를 납치 폭행하고 끌고가려다 여론에 막혀 포기한다.[11] 두 조작 문서들은 훗날 14세기~15세기 로렌초 발라나 울리히 폰 후텐 같은 인문주의자들에게 더이상 거론 가치가 없는 위서로 밝혀지게 된다.[12]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대사제 아론의 동생이나 아론이 동생에 대들자 하느님의 진노를 사서 동생에게 사죄한다.[13] 반대로 트리엔트 공의회를 거치며 교황의 교권은 오히려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14] 신성 로마 제국 내 개신교도 제후 지역과, 북유럽 왕국들. 덴마크와 스웨덴은 각각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와 핀란드, 에스토니아, 쿠를란트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이 지역 모두 루터주의로 개종한다.[15] 잉글랜드 교회가 '국'교회이냐 가톨릭 산하이냐의 차이이지 지금의 성공회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잉글랜드 국교회와는 신학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16] 퓨리턴은 잉글랜드인 대다수가 아니지만 그 영향력은 강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이후의 잉글랜드인들은 국가주의와 결합한 반가톨릭 성향이 강하였다. 퓨리턴의 이상에 공감하는지의 여부야 제각각이지만, 잉글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들은 반가톨릭이라는 퓨리턴의 대의에는 대체로 공감했다. 퓨리턴이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이러한 점을 감안해야 한다.[17] 스위스 제네바 지역뿐만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 내 제국도시들 거의 대부분이 1560년대에는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세속군주가 아니라 일정 학식 재산 경력을 갖춘 원로들이 시 참사회를 기반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시기 대부분 신교로 전향한다. 독일권이 오늘날의 인식처럼 북독일=개신교 다수, 남독일=가톨릭 다수의 구도가 형성된 것은 가톨릭의 반격으로 17세기 초에 남부를 탈환한 이후이다.[18] 칼뱅은 세속권력이 핍박할 경우 "우리가 칼을 휘둘러 복음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우리가 피를 흘리고 말자"며 세속권력에 복종할 것을 주장했으나 칼뱅 사후 위그노들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겪자 칼뱅주의자들은 폭군 퇴출론으로 입장을 바꾼다.[19] 퓨리턴들 대부분은 왕권신수설자였다. 이들이 원한 것은 적법하지 않은 왕의 퇴위 정도였지, 처형, 더 나아가서 공화정은 아니었다.[20] 상대적으로 영국 가톨릭 신자들은 국교회 내부에 잔존했으며 지하로 숨어든 건 소수였다. 왜냐하면 이미 잉글랜드 교회는 수장령 이전부터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렸으며 헨리 8세의 종교정책도 수장령을 제외하면 기존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하며 대륙신학의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자들을 탄압했기 때문이었다.[21] 홉스는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었으나 기독교에 회의적이었던 반면 로크는 청교도 가문의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22] 홉스 생전에는 이 사회계약설은 주목받지 못했지만 훗날 재평가받는다.[23] prince는 영어에서 단순히 군주의 아들만을 일컫는 어휘가 아니다.[참조] Jeremy Black, <Kings, Nobles & Commoners: States & Societies in Early Modern Europe: A Revisionist History(London, 2004)>[25] 한자어로 번역하니 tyrant가 '폭군'곧 '폭정을 휘두르는 군주'로 인식되어 아무튼 군주는 군주라고 생각하게 하지만, 영어에서 tyrant는 king 혹은 prince나 lord 등과 완전히 다른 표현이다. tyrant는 적법하지 않은 통치자라는 뉘앙스를 가진다.[26] 예를 들어 정도전의 조선 건국 이데올로기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에 기반하고 있으나, 정작 공양왕은 폭군이 아니었으며 폭군이 될 기회조차 없었다.[27] 후술할 잉글랜드 내전의 사례를 보면, 의회파든 왕당파든 (올리버 크롬웰과 수평파를 제외하면) 왕권신수설을 지지했다. 다만 '지금 권좌에 있는 사람이 국왕이냐 폭군이냐'가 쟁점이 되었다.[28] 이런 왕권신수설은 그저 선전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백성에게 상당 부분 파고들었는데, 실제로 17세기 프랑스 농촌에서 세금을 걷으러 간 징세관을 상대로 농민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나온 구호가 "국왕 만세, 징세관은 꺼져라."였다. 이는 조선과 중국 같은 동아시아에서 굶주린 농민이 반란을 일으키면서도 타도할 대상을 임금 주변의 간신으로만 한정짓고, 정작 임금은 문제삼지 않는다는 충성론과도 통한다.[29] 다만 이것은 왕권신수설과의 연관성과 별개로 당시의 전통적인 정서였을 수도 있다. 중세에는 대중 앞에서 사형을 집행할 때 군중이 망나니칼에 목이 잘린 사형수의 목에서 나온 피를 수건에 적셔 마시는 행위를 병을 치료하는 주술적 의미로 해석했다.[30] 다만 유교 사상의 경우 왕이 잘못을 할 경우 간언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을 모범으로 보았고, 역성혁명을 어느 정도 긍정하기도 했다. 왕권신수설에서도 왕권을 무제한적으로 긍정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31] 굳이 있다면 천명이 이에 가깝다.[32] 다만 적어도 동아시아에서는 그러려는 노력은 많이 기울이려고 한 편이다. 당장에 조선의 경우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아예 왕을 어릴 적부터 유교식으로 교육하고 그것도 모자라 평생교육을 통해 왕이 유교적으로 통치하게 만들려고 했고 왕도 이에 따라 적어도 민생에 관심을 가지는 척이라도 했다. 반면에 유럽은 말이 좋아 왕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했지 정작 절대왕정의 표본인 루이 14세는 별 성과도 없는 전쟁을 자주 벌여서 국고를 파탄냈다. 그 뒤를 이은 루이 15세도 마찬가지였다. 되려 왕권이 약해진 편의 시대인 루이 16세가 그나마 민생에 관심을 가진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