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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83년 9월 4일 | ||
사보이아 백국 샹베리 | |||
사망 | 1451년 1월 7일 (향년 67세) | ||
사보이아 공국 토농레뱅 리파유 성 | |||
묘소 | 토리노 대성당[1] | ||
재위기간 | 사보이아 백국의 백작 | ||
1391년 11월 1일 ~ 1416년 2월 20일 | |||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 |||
1416년 2월 20일 ~ 1440년 1월 6일 | |||
가톨릭 대립교황 | |||
1439년 11월 5일 ~ 1449년 4월 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아메데오 7세 어머니 베리의 본 | |
배우자 | 부르고뉴의 마리 | ||
자녀 | 마르게리타, 안토니오, 안토니오, 마리아[2], 아메데오, 루도비코, 보나, 필리포, 마르게리타[3] | ||
가문 | 사보이아 가문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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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보이아 백국의 마지막 백작이자 사보이아 공국의 초대 공작. 1439년부터 1449년까지는 대립교황 펠릭스 5세(Antipapa Felix V)이기도 했다.세계사에서는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마지막[4] 대립교황으로 유명하지만, 사보이아 공작으로 쌓은 업적이 압도적인 유능한 군주였다.
2. 생애
사보이아 가문은 대대로 사부아와 발레다오스타에서 백작을 지내왔고 토리노도 상속받아 피에몬테까지 아우르며 프랑스와 이탈리아 지역에 걸친 신성 로마 제국 제후국의 군주였다. 본인은 니차를 정복한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7세와 베리의 본느의 유일한 아들로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8세였으나, 1416년 독일왕 지기스문트로부터 공작으로 승격되면서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가 되었다. 1418년 사보이아 가문의 마지막 방계인 피에몬테의 루도비코[5]가 사망하자 사보이아 가문의 유일한 남자 계승자로서 가문의 모든 영토를 통합하였다. 1424년 피에몬테 공(Principe di Piemonte)위를 창설하여 향후 사보이아 가문의 후계자에게 수여하도록 만들었다. 1428년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딸 마리아를 결혼시키며 베르첼리를 손에 넣었다.아메데오 8세는 당연히 평신도였으나, 1422년 아내 부르고뉴의 마리(Marie de Bourgogne 1386~1422)[6]가 사망하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1431년 후계자였던 3남 아메데오마저 사망하자 행정 업무는 4남 루도비코에게 위임하고 본인은 외교 업무만 맡은 채 종교생활에 몰입하였으며 기사수도회를 설립했다.
바젤 공의회가 자신을 교황으로 추대하자 오랜 고민 끝에 1439년 11월 5일, 펠릭스 5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을 받아들이고[7] 성직자로 서품되었으며 이듬해 사보이아 공국을 루도비코에게 물려주고 퇴위했다. 그러나 본인의 영지였던 사보이아 공국을 포함한 일부에서만 교황으로 인정받았을 뿐, 가톨릭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는 인정받지 못하였다. 정치적으로나 현실에서나 점점 위협이 다가오자, 1449년에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중재를 받아 교황 니콜라오 5세와 협상하여 스스로 퇴위하였다. 그 대신 니콜라오 5세는 펠릭스 5세를 주교급 추기경, 사보이아 공국과 인근 지방의 교황 대리/특사로 임명하였다. 이후 제네바와 토농레뱅, 토리노를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1451년에 67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펠릭스 5세는 가톨릭 교회 역사에 등장한 "마지막" 대립교황이다. 그 이후로도 엄격하게는 대립교황이라고 분류해야 할 인물들이 없지 않았으나, 워낙에 듣보잡이라 대립교황은 고사하고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신자 수가 백 명 남짓한 '자칭 가톨릭 교단'에서 자칭 교황을 선출한 정도라, 실제 가톨릭 신자들이 어느 쪽이 정통인지 고민할 이유가 없으므로 무시한다. 역사에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립교황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펠릭스 5세가 마지막이다.
[1] 정확히는 토리노 대성당의 일부인 수의 예배당(Cappella della Sindone)이라는 곳으로 관광객은 토리노 왕궁 유료 입장을 통해서만 둘러볼 수 있다.[2]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와 결혼.[3] 팔츠 선제후 필리프의 어머니.[4] 당연히 이 이후에도 교황을 자처하는 이들이 있긴 했으나 이들은 정식 교황은 물론 정식 대립교황으로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지금도 가톨릭의 일부 계파에는 자칭 대립교황이 존재한다.[5] 토리노 대학교를 설립한 인물로 아메데오 8세의 매부였다.[6]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와 플란데런의 마르그리트의 딸.[7]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원칙상으론 가톨릭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남성 누구에게나 교황으로 선출될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