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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7:33:04

서방교회 대분열

라틴어 Magnum schisma occidentale 서방의 대분열
영어 Western Schism
Papal Schism 교황의 분열

1. 개요2. 상세 3. 영향

1. 개요

1378년 ~ 1449년까지 무려 71년 동안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로마피사, 프랑스 왕국 남부의 아비뇽, 스페인 동부의 아라곤 왕국, 스위스 북서부의 바젤 등에서 교황이 잇따라 난립해 자신들이 진정한 교황이라고 주장하면서 벌어진 가톨릭 대분열. 1378년부터 39년 동안 이어진 분열 끝에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모든 교황을 폐위시키고 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어느 정도 수습되었지만 그 여파는 32년이나 지난 1449년까지 이어졌다.

2. 상세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이전한 이래 68년 동안 이어진 아비뇽 유수는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오면서 종결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치안은 여전히 불안정했고, 그레고리오 11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비뇽으로 돌아가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러다가 1378년 3월 26일에서 27일 사이의 밤에 로마에서 선종했다. 그는 삼촌인 클레멘스 6세처럼 라셰즈듀 수도원에 안장되기를 원했지만, 로마인들은 교황의 시신을 다른 데로 옮길 수 없다며 그대로 로마에 매장하도록 했다.

그레고리오 11세의 사후, 새로운 교황의 선출을 놓고 로마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프랑스인 교황이 아비뇽에서 교회를 오랫동안 이끄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이탈리아인 추기경, 사제, 귀족, 그리고 시민들은 이번에야말로 로마 시민 또는 이탈리아인 교황이 선출되기를 바랬다. 1378년 4월 7일 로마에서 교황 선출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 로마인들은 회의장 주위를 둘러싸고 추기경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4월 8일, 16명의 추기경들은 바리의 대주교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를 새 교황 우르바노 6세로 선출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물러난 프랑스 추기경 13명은 4개월 후 아나니에서 공포 분위기에서 결정된 교황은 무효라고 선언했고, 9월 20일에 폰디에서 프랑스 출신 추기경인 제네바의 로베르(로베르트) 추기경을 선출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로 옹립했다.[1]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청을 새로 세웠고,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와 몇몇 이탈리아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도 지지를 표명했다. 이후 두 교황간의 갈등은 교회 문제에서 유럽 전체를 분열시킨 외교적 위기로 빠르게 확대되었고, 세속 군주들은 어떤 교황을 인정할 지를 결정해야 했다. 당시의 판도는 다음과 같았다.

또한, 각국의 군주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이들은 군주가 선택하지 않은 교황을 지지했다. 가령, 아라곤 왕국에서 반란을 일으킨 카탈루냐 귀족들은 우르바노 6세를 지지했고, 웨일스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 잉글랜드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Owain Glyndŵr)는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두 교황은 서로를 타도하기 위해 심지어 무력까지 행사했다. 우르바노 6세는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 지지를 천명한 나폴리의 조반나 1세를 축출하고자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를 부추겨서 여왕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지난날 헝가리로 망명했던 카를로가 러요시 1세의 지원을 받으며 나폴리로 진격해 여왕을 폐위시키고 나폴리 왕국의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클레멘스 7세는 이에 대응해 앙주 공작 루이 1세와 그 뒤를 이은 루이 2세를 부추겨 교황령을 침공하게 했고, 이로 인해 교황령에 속한 많은 도시가 파괴되고,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1389년, 나르니의 클레멘스 7세 지지자들을 토벌하기 위해 나르니로 행군하던 우르바노 6세가 타고 있던 노새에서 낙마해 큰 부상을 입고 곧 사망했다. 그 후 로마의 새 교황에 즉위한 보니파시오 9세는 교황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치적으로 움직이려고 했던 교황령 내의 도시들과 주요 궁전 및 요새들을 차례차례 압박해 재복속시켰다. 1394년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하자, 아비뇽 측은 베네딕토 13세를 새 대립교황으로 추대해 로마 교황과 계속 맞섰다. 1398년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와 독일왕 겸 보헤미아 국왕 벤첼이 만나 교회 문제를 논의하려 했으나 회담은 결렬되었고, 서방 교회 대분열은 장기화되었다.

1404년 교황 보니파시오 9세가 사망하자, 로마의 추기경 8명이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에게 교황 직에서 물러나준다면 아비뇽과 로마의 추기경들이 공동으로 모여서 새 교황을 추대하는 데 동의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베네딕토 13세의 사절단이 그를 대신해 거부하자, 로마 추기경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7세를 선출했다. 인노첸시오 7세는 강성 구엘프파(친 교황파) 지지 지역인 나폴리 왕국의 술모나 출신이었기에, 기벨린파(친 황제파)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지만, 나폴리 왕국의 라디슬라오 왕이 파견한 군대가 이들을 진압했다.

인노첸시오 7세는 분열을 끝내기 위해 프랑스 국왕과 유명 신학자들, 그리고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초청해 대규모 협상을 벌이려고 했다. 그러나 1405년 인노첸시오 7세의 조카인 루도비코 미글리오라티가 기벨린파 인사 11명을 살해한 뒤 그 시신들을 산토스피리토 병원 앞 거리에 유기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기벨린파가 분노해 대규모 폭동을 일으켜 인노첸시오 7세를 축출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회의 개최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베네딕토 13세는 자신과 인노첸시오 7세가 동시에 퇴위해 새로운 단일 교황을 선출하자고 제안했지만, 신변의 안전을 확신하지 못한 인노첸시오 7세가 거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렇듯 두 교황이 난립하여 정쟁을 벌이는 상황을 지켜본 가톨릭 신자들은 현실에 대한 냉소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존 위클리프의 롤라드파나 얀 후스 등 아예 교황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세력들이 등장했다. 파리 대학교를 중심으로
'전체 공의회만이 교회의 일치성을 회복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
라는 주장을 펼치는 공의회수위파(Conciliarism)도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 추기경들은 인노첸시오 7세의 뒤를 이어 로마 교황에 오른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가 사보나에서 만나 협상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두 교황들이 마지막 순간에 주저해 사보나로 가지 않으면서, 수습은 또다시 이뤄지지 않았다.

1409년, 추기경들만이 투표에 참가했다는 것에 반발한 대주교 이하 신분의 사제 및 양비론적인 추기경들이 아비뇽의 베네딕토 13세와 로마의 그레고리오 12세를 모두 폐위한다는 전제하에 피사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 등에서 알렉산데르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기존 교황들이 사퇴를 하지 않았고, 결국 교황은 세 명이 되었다. 알렉산데르 5세는 1년도 안 되어 죽었고, 그 다음으로 볼로냐의 추기경이었던 요한 23세가 피사의 교황에 등극했다. 당시 세 교황에 대한 각국의 지지 현황은 다음과 같다.

독일왕 지기스문트는 세 교황 중 한 사람을 특별히 지지하지 않고, 대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1413년 5월 나폴리 국왕 라디슬라오를 피해 피렌체로 피신했던 대립교황 요한 23세와 만난 지기스문트는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황 난립 문제를 해결하자고 촉구했으며, 요한 23세는 황제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1414년 10월 30일, 역사적인 콘스탄츠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공의회는 교황에 우선한다.'[4]
라는 선언과 함께 지금까지 난립한 교황들을 전원 폐위하고 마르티노 5세를 선출했으며, 이단으로 규정된 얀 후스를 처형했다.

그러나 대립교황 요한 23세는 이에 불복해 콘스탄츠에서 탈출한 뒤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4세에게 의탁했다. 지기스문트 황제는 자신의 계획을 망친 그에게 분노해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를 시켜 프리드리히 4세에게
"당장 그를 데리고 콘스탄츠로 오지 않는다면 응징하겠다."
고 전하게 했다. 오스트리아 공작은 이 위협에 두려움을 느껴 요한 23세를 데리고 콘스탄츠로 돌아갔다. 그 후 요한 23세는 이단, 분열을 조장한 혐의, 해적질, 강간, 살인, 수간, 근친상간 혐의로 기소되었고, 하이델베르크만하임에 잇따라 투옥되었다가 1418년이 되어서야 몸값을 지불한 후 석방되어 피렌체로 돌아가 추기경에 복귀했으나 몇 달 후 사망했다.[5]

이리하여 요한 23세는 몰락했고,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사임했지만,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사임을 거부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7년 7월 27일 베네딕토 13세를 분열주의자로 낙인찍고 파문을 선고했다. 베네딕토 13세는 아라곤 왕국의 토르토사 인근 페네콜라 성으로 도주한 뒤,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5세의 보호를 받으며 마르티노 5세에게 대적했다. 베네딕토 13세는 임종을 맞이하기 전에 아비뇽 교황청에 충실한 또다른 교황의 계승을 보장하기 위해 추기경 4명을 임명했다. 1423년 5월 23일 베네딕토 13세가 선종한 뒤, 그해 6월 10일 세 명의 추기경이 만나 산체스 무뇨스를 클레멘스 8세로서 교황에 추대했다. 그러나 네 번째 추기경인 툴루즈 인근 로데즈의 부제 장 카리에는 이에 따르지 않고 베르나르 가르니에베네딕토 14세로 선출했다.

1428년, 알리폰소 5세는 로마 교황의 측근이자 자신의 친척인 피에르 드 푸아 추기경의 설득을 받아들여 마르티노 5세를 유일한 교황으로 받들기로 했다. 알리폰소 5세로부터 마르티노 5세를 인정하고 물러나라는 권유를 받자, 이제는 대세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대립교황 클레멘스 8세는 1429년 7월 26일 퇴위를 선언하고 그동안 자신을 따랐던 추기경들에게 마르티노 5세를 받들게 했다. 그는 마르티노 5세에게 참회서를 제출한 뒤 마요르카 주교직을 하사받고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446년 12월 28일에 사망했다.

한편 대립교황 베네딕토 14세를 자처한 베르나르 가르니에는 별다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교황 직을 유지하다가 1429년 또는 1430년에 사망했다. 그 직후 장 카리에가 스스로 베네딕토 14세로 자처했지만, 곧 체포되어 푸아 성에 갇혀 지내다가 1433년에 옥사했다.

1439년, 바젤 공의회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대항하기 위해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를 대립교황 펠릭스 5세[6]로 선출했다. 그는 1440년 사보이아 공국을 아들 루도비코에게 물려주고, 1449년 4월까지 바젤에서 교황으로 재임했다. 그러나 본인의 영지였던 사보이아 공국을 포함한 일부에서만 교황으로 인정받았을 뿐, 가톨릭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1449년, 펠릭스 5세는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의 중재에 따라 교황 니콜라오 5세와 협상한 후 퇴위했다. 그 대가로, 니콜라오 5세는 펠릭스 5세를 주교급 추기경 및 사보이아 공국과 인근 지방의 교황 대리/특사로 임명했다. 이리하여 서방 교회 대분열이 종식되었다.

3. 영향

이와 같은 혼란상을 겪은 뒤, 교황의 선출은 콘클라베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 시기 교황령의 산하에 있었던 소국들은 사실상 독자적인 국가로 독립하게 되는데 페라라와 우르비노 등이 대표적이었다. 한편 이러한 현실 때문에 교권을 벗어나 페트라르카, 로렌초 발라와 같이 인문주의에 기우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탈리아인들의 대륙 문화[7]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 이탈리아만의 독자적인 문화에 대한 추구가 심화되었다.

신곡》이나 《데카메론》 등의 속어 문학이 그 전조였고, 아이러니하게도 교황의 심장부였던 이탈리아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르네상스는 그 절정이었다. 이때 교황청 산하에서 벗어났던 소국들이 큰 역할을 한 것도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반면 아비뇽은 아비뇽 유수를 계기로 프랑스 혁명때까지 교황령에 소속되었다.

한편 교황은 종교적 권위가 땅에 떨어진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세속적인 르네상스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한편으로는 교권이 아닌 세속적인 물리력으로 교황의 권위 회복을 꾀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을 불러 교회 미술을 흥하게 한 것이나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사생아인 체사레 보르자의 잦은 전쟁 참여,[8] '전사 교황' 율리오 2세의 전쟁 활동 등이 이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교황이 철저한 세속 군주로 전락했음을 보여주는 한편 정치적인 압도의 필요성을 더욱 끌어높였고, 결국 물리적으로는 사코 디 로마, 종교적으로는 마르틴 루터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황권이 더욱 처절하게 몰락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2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당하며 멸망했고, 같은 해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기나긴 백년전쟁도 끝났다(1453년). 중세를 상징하던 교황권과 봉건영주, 그리고 동로마 제국이 모두 동시대에 망했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흔히 중세근대의 분기점을 1453년으로 잡는 근거가 된다.


[1] 클레멘스 7세는 애초에 이런 13명의 프랑스 추기경들의 독자 교황 선출을 주도했던 추기경 가운데 한 명이었다.[2] 당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핀란드는 칼마르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동군연합 상태에 놓여있었다.[3] Carlo I Malatesta: 이탈리아의 용병대장이자 리미니, 파노, 체세나, 페사로의 군주였다.[4] 이때 절정이었던 공의회주의는 대분열의 종식 후 1515년, 제5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 레오 10세가 모든 공의회를 초월하는 교황이 있다라고 선포하면서 쇠퇴했다.[5] 그 후 '요한'이라는 이름을 단 교황은 20세기의 성 요한 23세가 등장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6] 가톨릭 역사에서 인정되는 마지막 대립교황이다.[7] 스콜라 철학이 대표적이다.[8] 당시 이탈리아인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교회 도덕에 맞으면 좋지만 그건 우선시할 게 아니고, 군주는 철저히 실리적으로 나가야 함. 체사레 보르자처럼만 잘 해서 우리 이탈리아도 통일 한 번 해봅시다 OK?"라고 쓴 점은, 교권의 탈피가 아이러니하게도 교황과 밀접히 연결되어 일어났던 점을 암시해준다. 정작 이후의 유럽 군주들이 왕권신수설에 의거한 것도 상당히 대비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