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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06:15:00

포르투갈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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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
국가 애국의 찬가
(Hymno Patriótico, 1808-1826)
헌장의 찬가
(Hymno da Carta,[2] 1826-1910)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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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9년 ~ 1910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포르투갈 백작령 포르투갈 제1공화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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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9년 왕조 성립
1581년 필리프 1세 즉위
1640년 ~ 1668년 포르투갈 독립 전쟁
1815년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으로 체제 변경
1822년 브라질 독립독립전쟁 발발
1825년 연합 해체
1828년 ~ 1838년 포르투갈 내전
1910년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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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e3061> 정치체제 전제군주제(1139~1822/1823~1826/1828~1834)
입헌군주제(1822~1823/1826~1828/1834~1910)
국가원수
주요 국왕 아폰수 1세(1139~1185)
디니스 1세(1279~1325)
주앙 1세(1385~1433)
아폰수 5세(1438~1481)
주앙 2세(1481~1495)
마누엘 1세(1495~1521)
주앙 4세(1640~1656)
주앙 5세(1706~1750)
마누엘 2세(1908~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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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무역4. 인구5. 대중매체에서6. 역대 군주7. 역대 국기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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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포르투갈어 Reino de Portugal
라틴어 Regnum Portugalliae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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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시아어 Portugal
스페인어 Portugal
프랑스어 Portugal
영어 Portugal
이탈리아어 Portogallo
네덜란드어 Portugal
아랍어 برتغال (Burtughāl)
과라니어 Poytug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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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어 پرتغال (Portoğâ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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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어 Portugis, Portug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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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佛郎機, 波爾杜葛爾 (명대)
博都雅 (청대 초기)
한국어 포르투갈
일본어 葡萄牙 (Porutogaru) }}}

1. 개요

포르투갈에 존재했던 왕국. 대항해시대를 연 국가 중 하나로 1430년대부터 해외 영토를 가져 15세기~16세기에 브라질모잠비크 등 많은 식민지를 두었다. 일본조총, 카스텔라, 담배, 덴푸라 등을 전해준 국가이기도 하다.

2. 역사

2.1. 건국 배경

1096년, 카스티야 - 레온 연합왕국의 국왕 알폰소 6세는 딸 테레사 데 레온과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를 포르투갈 공동 백작으로 선임했다. 엔히크와 테레사 부부는 이베리아 반도 서북부의 작은 영지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영토와 이권을 챙기고자 노력했다. 1109년 알폰소 6세 사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공동으로 칭한 알폰소 1세우라카 부부가 서로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내전을 벌이자, 엔히크는 상황을 관전하다가 1111년 군대를 일으켜 레온으로 진군했다.

엔히크는 처음에는 우라카를 도우려 했지만, 알폰소 1세가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그 제안에 혹하여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결정 했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카스티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인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아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사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시아로 진군하다가 사아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테레사가 막내아들 아폰수 1세를 포르투갈 공동 백작으로 옹립하고 백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1116년, 테레사는 코임브라를 무슬림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 뒤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용감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를 근거삼아 자신을 "알폰소의 딸이자 하느님에게 선택된 자"라고 명시한 문서를 발간했으며, 1117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여왕이라고 내세웠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그녀를 포르투갈의 첫번째 군주로 보기도 한다. 우라카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테레사를 응징하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 헬미레스와 산티아고 시의회가 세금 수취 문제로 갈등을 벌이자, 우라카는 이를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불리한 처우를 받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대성당의 탑에서 우라카 일행을 포위했다. 그녀는 폭도들 앞으로 끌려간 뒤 옷이 찢겨지고 돌에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다 군대가 투입되어 폭도들을 해산시키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테레사의 추종자들에 의해 소브로소 성에서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철수했다. 다만 이 원정에서 토로와 사모라가 우라카의 수중에 넘어갔다.

1121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의 추종자들을 헬미레스 주교와 함께 탄압했다. 그녀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미뇨 강을 건너 테레사의 영지로 진입했다. 테레사는 레온-카스티야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브라가의 북동쪽에 있는 라뇨주(Lanhoso)성에서 포위되었고, 우라카의 군대는 도루 강 일대까지 평정했다. 하지만 우라카가 자신의 심복이었던 디에고 헬미레스를 숙청하려 했다가 디에고의 추종자들의 거센 반발을 산 덕분에, 테레사는 패망 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여기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도루 강 남쪽의 레온 왕국 영토인 올메도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라카와 알폰소 7세는 테레사와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테레사는 레온 왕국의 가신으로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포르투갈 백작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124년 여름, 테레사는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우라카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테레사는 1126년 3월 8일에 우라카가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갈리시아 일대를 석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우라카의 뒤를 이어 레온 왕위에 오른 알폰소 7세가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해 포르투갈 백국 각지를 파괴하고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테레사는 알폰소 7세에게 항복했고, 이후로는 레온 국왕의 충실한 봉신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테레사는 갈리시아 귀족이자 트라스타마라 백작인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를 애인으로 삼고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테레사의 아들 아폰수는 자신이 성년으로 인정받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브라가 대주교 파이오 멘데스, 가정교사 에가스 모니스와 아들 로렌수 비에가스와 함께 갈리시아 귀족이 권세를 행사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포르투갈 귀족들을 규합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백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알폰소 7세는 테레사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 백국에 진입해 아폰수가 있던 기마랑이스를 포위했다. 하지만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와 카스티야 일대를 놓고 심각한 정쟁을 벌이고 있던 그는 포르투갈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기에, 아폰수와 에가스 모니스 등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공물을 납부하는 대가로 기마랑이스 공략을 포기하고 귀환했다.

하지만 아폰수는 봉기를 중단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대 야고보의 유물이 브라가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하느님께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원하는 징표라고 주장해 귀족들을 끌여들이고 어머니에게 노골적으로 도전했다. 이에 테레사는 1128년 6월 24일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레온 왕국 장성들과 함께 진압에 나섰다가 상 마메데 전투에서 아들에게 참패했다. 이후 그녀는 두 딸 우라카, 산차와 함께 페드로 페르난데스를 따라 갈리시아로 망명했고, 1130년 11월 11일 몬테데라모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이리하여 아폰수는 포르투갈 백국의 유일한 군주로 등극했다.

아폰수는 집권 직후인 1131년 포르투갈 백국의 수도를 기마랑이스에서 코임브라로 이전했다. 이곳으로 이전한 이유는 도루 강 북쪽의 친 레온 왕국 성향 귀족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백작의 권력을 강화하고, 코임브라를 백국 남쪽의 무슬림 영토를 지속적으로 공략할 발판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곳에 자리를 잡은 뒤 산타 크루스 수도원의 설립을 후원했으며, 브라가 주교구를 레온 왕국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교구로부터 독립시켰다.

아폰수는 집권 이래로 포르투갈의 '프린스'를 칭하면서 알폰소 7세의 인정을 받고자 사절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러나 알폰소 7세가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조금도 인정하려 들자 않자, 아폰수는 그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매듭지은 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137년, 그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시아로 진격해 어머니의 옛 연인이었던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갈리시아 귀족들을 상대로 체르네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뒤 투이 등 일부 요새를 공략했다. 포르투갈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알폰소 7세는 어쩔 수 없이 투이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에 따르면, 아폰수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알폰소 7세의 충실한 친구가 될 것을 맹세했으며, 이번 전쟁에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고, 무슬림 및 기독교 통치자와의 전쟁을 치르는 황제에게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편 알폰소 7세는 그를 포르투갈 백작으로 인정하고 포르투갈을 다시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39년,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알리 이븐 유수프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포르투갈로 쳐들어왔다. 아폰수는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을 이끌고 그들에 맞섰고, 그해 7월 25일 오리크(Ourique)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 왕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군대와 성직자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초대 국왕 아폰수 1세로 즉위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2. 보르고냐 왕조

2.2.1. 아폰수 1세

아폰수 1세가 포르투갈 국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레온 국왕 알폰소 7세는 그를 반역자로 간주하며 조금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에 아폰수는 그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매듭지은 후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 예상하고 선제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폰수는 투이 협약을 깨고 갈리시아를 침공해 미뉴강을 건너 발데베스 계곡의 여러 성채를 공략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7세는 카스티야 백작들에게 나바라 국왕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방어하게 한 뒤 1140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포르투갈로 출진해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고 여러 성채를 함락했다.

아폰수는 즉시 역습을 가하여 적군 선봉장 라미루 프로일라스 백작을 격파하고 포로로 잡은뒤 발데베스 계곡에서 알폰소 7세의 본대와 대치했다. <황제 알폰소의 연대기>에 따르면, 양자는 펜하 다 레이하 성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는데, 포르투갈 진영이 좀더 높고 거친 지형에 자리잡았다. 이후 전투가 쉽게 결판나지 않고 양측의 여러 기사들이 생포되자, 포르투갈의 늙은 귀족들이 "기독교인끼리 무익한 전쟁을 이어간다면 무슬림들이 우리나라를 페허로 만들 것이니 이쯤에서 황제에게서 빼앗은 성들을 돌려주고 화친을 맺자"고 제안했다. 아폰수는 그들의 진언에 따라 알폰소 7세에게 휴전을 제안했고, 알폰소 7세 역시 희생이 갈수록 커지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에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1143년, 알폰소 7세와 아폰수는 사모라 대성당에서 교황 대표 귀도 데 비코 추기경이 치켜보는 가운데 조약을 체결했다. 알폰소 7세는 아폰수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양자는 그동안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다. 아폰수는 귀도 데 비코에게 라틴어로 적힌 서신을 전달해 교황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서신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성 베드로의 기사라고 선언하고 포르투갈 왕국을 교황청에 봉헌하겠으며, 매년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고 레콩키스타를 이행할 테니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1146년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3세의 딸 마틸드(마팔다)[4]와 결혼해, 십자군 원정에 적극적이었던 아메데오 3세의 지원을 받고자 노력했다.

1147년, 아폰수는 코임브라에서 250명의 최정예 병사들과 함께 비밀리에 출진해 코임브라 인근의 무슬림 도시인 산타렝을 기습 공격해 단숨에 공략했다. 이리하여 코임브라와 레이리아에 대한 무슬림군의 끊임없는 습격을 가능케 했던 무슬림들의 거점이 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그는 여세를 이어가 리스본을 포위하기 위해 타구스 강 북쪽의 무슬림 거점인 사카벰으로 진군해 무슬림들을 또다시 격파했다. 이후 리스본을 포위한 포르투갈군은 때마침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 원정에 착수해 대서양을 항해 중이던 잉글랜드군과 연합해 리스본을 몇 달간 포위 공격한 끝에 그해 10월 20일에 공략에 성공했다. 일부 십자군은 성지로의 여행을 계속했지만, 대부분은 새로 점령된 리스본에 정착했다. 아폰수는 십자군의 일원인 헤이스팅스의 길버트를 리스본의 주교로 선출했다.

그 후 아폰수는 정복 전쟁을 잠시 중단하고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농업진흥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새로 정복한 지역에 정착할 이주민들을 모집했고, 지방 귀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면서도 그들을 통제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세금 수취 및 재정 관리를 위해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는데, 특히 야히야 벤 야히야는 포르투갈 왕국 세무장관으로 선임되어 왕국의 재정을 책임졌다. 이후 포르투갈 왕국은 재정을 유대인에게 맡기고 유대인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정책을 이어갔다.

1160년, 아폰수는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왕국 여왕 페트로닐라의 남편으로서 아라곤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라몬 베렝게르 4세와 산타 마리아 델 팔로에서 만나서 자신의 딸 마팔다와 아라곤 왕자 알폰소 2세의 결혼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1162년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사망한 뒤, 페트로닐라는 마음을 돌려 아들 알폰소 2세를 레온 공주 산차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1165년, 레온 왕국의 새 국왕 페르난두 2세는 아폰수의 딸 우라카와 결혼하고 평화협약을 맺음으로써 선대 때부터 이어졌던 양국의 갈등을 종식하려 했다. 또한 이 시기에 라데스마와 사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고 주민들을 거주시키고 총독을 선임했다.

그러나 아폰수는 자국의 국경 인근에 있는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재건하는 것은 장차 그곳을 요새화해 포르투갈을 공격하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그는 그 전에 선제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1166년 아들 산슈 1세에게 군대를 맡겨 갈리시아를 침공하게 했다. 산슈 1세는 곧바로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1168년, 페르난두 2세는 갈리시아로 출진해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포위 공격하던 포르투갈군을 급습해 격파했다. 아폰수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갈리시아를 침공해 투이 등 여러 성채를 공략하고 1169년에는 카세레스 시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바꿔 일부 병력을 갈리시아에 남겨두고 무슬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바다호스 공략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군의 전력이 분산되자, 페르난두 2세는 이 때를 틈타 군대를 끌어모아 갈리시아에 침투한 포르투갈군을 격파한 뒤 바다호스 공방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아폰수를 습격했다. 아폰수는 급히 피신하려 했지만 도중에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진 채 사로잡혔다.

그 후 페르난두 2세는 바다호스를 마저 공략한 뒤 레온 왕국의 봉신 노릇을 하는 무슬림들에게 바다호스 성채를 맡겼다. 1070년, 페르난두 2세는 장인 아폰수를 석방시키는 대가로 지난날 아폰수 1세가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으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를 돌려받고 카세레스, 바다호스, 트루히요, 산타 크루스 데 라 시에라, 몬탄체스 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중 트루히요, 몬탄체스, 산타 크루즈 데 라 시에라 등지는 페르난도 로드리게스의 영지가 되었다.

이렇게 풀려난 아폰수는 다리가 부러진 중상을 입은 여파로 건강이 약해져서 국정을 돌보기 어렵게 되자 아들 산슈 1세와 딸 테레사에게 섭정을 맡겼다. 1174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시골 지역에서 요양했고, 산슈는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 활동을 담당하고 테레사는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또한 그 해에 산슈 1세와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의 누이인 돌세가 결혼하면서, 포르투갈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결혼 동맹이 성사되었다. 1178년, 산슈 1세는 페르난두 2세가 다수의 병력을 거느리고 카스티야 방면으로 진군해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를 공격한 틈을 타 갈리시아를 공격하여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또한 세비야과달키비르 강 인근에서 무와히드 왕조를 공격해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교령 <명백히 입증하는(Manifestis Probatum)>을 포르투갈 궁정에 보냈다. 그는 이 교령에서 아폰수 1세를 공식적으로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하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교도들을 온전히 꺾을 때까지 끝까지 싸워달라고 당부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왕국은 교황청의 공인을 얻은 유럽의 왕국들 중 하나가 되었다.

산슈 1세와 테레사 남매의 통치는 1184년 플랑드르 백작 필립이 테레사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하면서 막을 내렸다. 아버지와 산슈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아낸 테레사는 왕국을 떠나기 전에 산슈에게 모든 국정을 맡겼다. 테레사가 떠난 지 몇 달 후,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유수프 1세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포르투갈을 침공해 아폰수가 머물고 있던 산타렝을 포위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몸소 성벽 위를 거닐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포르투갈군은 이에 용기를 얻어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붙이는 적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해 6월 산티아고 기사단이 출격해 무슬림군을 격파하고 유수프 1세가 철수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위기를 모면했다.

2.2.2. 산슈 1세

1185년 12월 6일, 아폰수 1세가 76세의 나이로 코임브라에서 사망했다. 이후 포르투갈 왕위에 오른 산슈 1세는 1188년 1월 말 페르난두 2세가 사망하고 알폰수 9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어수선해진 레온 왕국을 공격해 갈리시아의 일부 영토를 공략했다. 당시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알폰수 9세는 포르투갈 왕국과 화해하기로 하고, 산슈 1세와 만나 평화 협약을 맺고 산슈 1세의 딸 테레사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레온 왕국과의 전쟁을 끝낸 산슈 1세는 레콩키스타에 몰두했다. 1189년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의 함대의 도움을 받아 포르투갈 남부의 행정 및 경제 중심지인 실베스(Silves) 공략에 성공했다. 그러나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반격을 가해와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습격해 여자, 아이 3천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아쿱 알 만수르는 1190년 포르투갈 남부를 공격해 토마르를 포위했다가 성전 기사단에게 후미를 격파당한 데다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인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산슈 1세와 평화협약을 맺고 물러났다. 1191년, 무와히드 왕조의 별동대가 포르투갈 왕국에 침입해 산슈 1세가 확보했던 실베스를 도로 공략했다.

한편,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는 알폰소 8세가 당초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과 함께 분할하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에 사신을 보내 반 카스티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산슈 1세, 그리고 나바라 왕국의 안초 6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의 팽창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들은 1191년 5월 12일 우에스카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나바라-레온-아라곤-포르투갈 4개국은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고, 한 국가가 공격당하면 다른 국가들이 즉시 원조하기로 했다.

우에스카 협정이 체결된 후, 나바라-아라곤 연합군이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여 소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1192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가 다른 연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아라곤 왕국은 우에스카 협정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1194년 나바라 국왕 안초 6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안초 7세는 카스티야와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협정을 파기했다.

여기에 알폰수 9세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무와히드 왕조의 침공을 우려해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은 것이 역효과를 초래했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알폰수 9세가 근친상간을 범하여 교회법을 위반하더니 이제는 이교도와 손잡기까지 했다며 레온 왕국에 파문과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은총을 레온 왕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부여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산슈 1세는 레온 왕국과 동맹을 끊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투이와 폰테베드라를 공략했다.

산슈 1세는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새 왕국의 정치 및 행정 조직에 쏟아부었다. 그는 국고를 축적하고 중산층 상인들을 지원해 상업을 키우고자 했으며, 고베이아(1186년), 비제우(1187년), 브라간사(1187년), 상 비센트 드 베이라(1195년), 벨몬트(1199년) 등 여러 신도시를 포르투갈 남부 지역에 짓고 포르투갈 북부의 외딴 지역에 살던 기독교인들과 부르고뉴, 가스코뉴 등 프랑스 이주민들을 모집해 이곳에 정착시켰다. 또한 예술과 문학을 후원했으며,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포르투갈 학생들에게 국비를 지원해주는 등 포르투갈 유학생들이 유럽 대학에서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줬다.

산슈 1세는 1188/1189년경에 둘세 왕비가 알렌케르(Alenquer), 보가(Vouga), 산타마리아다페이라(Santa Maria da Feira), 포르투 일대의 수입을 가질 수 있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후 죽기 2년 전인 1209년 10월에 2번째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딸 마팔다, 테레사, 산샤는 여왕의 칭호를 받고 몬트모르우벨류(Montemor-o-Velho), 세이아(Seia), 알렌케르 등 포르투갈 왕국 중부의 일부 성과 마을들을 다스릴 수 있었고, 그의 아들 아폰수 2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2.2.3. 아폰수 2세

1211년 3월 26일 산슈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아폰수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가 세 누이에게 중심부 일대를 나눠준 것 때문에 왕권이 제약받을 것을 우려해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으려 했다. 이에 누이들과 그녀들을 따르는 귀족들이 반발하면서 1211년부터 1216년까지 포르투갈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아폰수 2세의 남동생인 페드루와 페르난두, 산슈 1세의 사생아인 마르팀 산체스, 로드리구 산체스는 형의 숙청을 피해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개입해 양자의 갈등을 중재하고 나서야 포르투갈의 내란이 수그러들었다. 아폰수 2세는 누이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는 대가로 그녀들이 물려받은 성과 마을들을 회수했으며, 성의 수비는 기사단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기사단은 왕의 통제에 제대로 따르지 않았고,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때 왕의 허락 없이 전투에 뛰어들었다. 결국 그가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정예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폰수 2세는 조부와 부친과는 달리 확장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갈리시아 국경을 놓고 레온 왕국과 분쟁을 벌인 데 비해, 그는 레온 왕국에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또한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카스티야 왕국알폰소 8세, 페르난도 3세레콩키스타를 적극적으로 단행한 데 비해, 그는 무슬림의 영역을 탈취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귀족과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무슬림들의 거점을 공략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국가의 경제와 사회 구조를 개편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211년 성직자와 귀족 대표로 구성된 코르테스에서 포르투갈 최초의 성문법을 반포했다. 이 법률은 주로 사유재산, 민법 및 주화와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1220년에는 재산의 법적 지위와 소유자의 특권 및 면제가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조사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는 할아버지 아폰수 1세와 아버지 산슈 1세가 귀족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기부금과 특권을 부여받아서 왕권이 제약받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그리고 여러 유럽 국가에 대사를 파견해 무역 조약을 체결했다.

아폰수 1세는 생전에 교황청이 포르투갈 왕국이 레온 왕국에서 독립하는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 포르투갈 전체를 봉헌한다고 맹세하고 교회를 위한 다양한 특권을 입법화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가 되어버려서 왕의 통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고 상당수의 세수입이 교회에 넘어가서 국가 운영을 원활히 하기 힘들어졌다. 아폰수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직자들의 권한을 악화시키고 교회 수입 일부를 국가 공익 목적에 사용하려 했다. 이에 따라 교회가 누리던 여러 특권이 폐지되고 수도원에 들어가던 재원 일부가 국고로 넘어가자, 성직자들은 강한 불만을 품고 교황청에 이 사실을 알렸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아폰수 2세에게 조부가 교황청에 맹세한 대로 따르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그는 교황청에 사절을 파견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테니 파문을 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실제로는 정책을 바꾸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1223년 3월 25일에 파문당한 채 사망했다.

2.2.4. 산슈 2세

1223년 아폰수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산슈 2세는 상당한 곤경에 처했다. 아폰수 2세의 누이 테레사, 산샤, 마팔다는 부친 산슈 1세가 자신들에게 물려준 몬트모르우벨류, 세이아, 알렌케르 등 포르투갈 왕국 중심부의 일부 성과 마을들을 가로채고 보상으로 주기로 했던 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아폰수 2세의 행위에 불만을 품었다. 특히 레온 왕국의 국왕 알폰수 9세의 왕비였던 테레사는 남편의 후원에 힘입어 상당수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삼아 포르투갈 왕실을 압박했다.

산슈 2세는 이모들과의 분쟁을 조속히 해결하기로 하고, 산슈 1세가 그녀들에게 물려줬지만 아폰수 2세가 가로챘던 모든 영지를 돌려줬다. 여기에 산슈 1세가 유언장에서 영지를 물려주라고 언급하지 않았던 또다른 왕녀 브랑카 역시 몬트모르우벨류와 에스게이라(Esgueira) 일대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또한 이들은 연간 4,000모라비타에 달하는 연금을 받을 수 있었고, 토레스 베드라스 일대에 대한 지분을 일정 부분 소유했다.

산슈 2세는 아버지 아폰수 2세가 교회와 심각한 갈등을 벌인 후유증 역시 수습해야 했다. 아폰수 2세는 생전에 너무 많은 특권이 교회에 넘어가서 나라를 운영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성직자들의 권한을 악화시키고 교회 수입 일부를 국가 공익 목적에 사용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성직자들이 교황청에 직소했고,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아폰수 2세에게 조부가 교황청에 맹세한 대로 따르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아폰수 2세는 교황에게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다가 파문당한 채 사망하여 한동안 가매장되었다.

산슈 2세는 아버지의 교회 규제 정책을 중단하고 다시는 성직자들에게 제약을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포르투갈 사제들은 왕의 요청에 따라 아폰수 2세를 알코비사 수도원에 안장하기로 했다. 그 후 산슈 2세는 교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버지가 등한시했던 레콩키스타를 직접 이끌었다. 그 결과 그의 치세에 베자, 알가르브, 알렌테주 등 남부의 여러 도시와 마을들을 무슬림으로부터 공략했다. 그는 이 영토를 산티아고 기사단 등 여러 기사단에게 맡겨서 무슬림과의 전쟁을 자발적으로 치르게 했다.

그러나 산슈 2세가 1226 ~ 1228년 엘바스 공략전에서 실패한 뒤 내륙 진출을 포기하고 해안도시 포르투로 관심을 돌리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포르투는 테레사 데 레온으로부터 자유시로 인정받은 이래 포르투갈 왕국에서 왕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유일한 도시로서 상업 활동을 자유롭게 수행했다. 하지만 잦은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을 만회하고 싶었던 산슈 2세는 관례를 무시하고 포르투를 국왕의 직할도시로 삼고 세금 징수원들을 잇따라 파견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 대상인들의 왕에 대한 반감이 심화되었다.

또한 산슈 2세는 재위 첫해에 성직자들과 맺었던 약속과는 달리 특권을 보장하지 않고 십일조 역시 납부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폰수 2세의 교회 규제 정책을 재개해 교회 수입 일부를 국고로 돌리고 상당수의 특권을 회수했다. 성직자들이 이에 반발해 교황청에 잇따라 직소하자,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와 협상해 1232년 교황으로부터 무슬림과의 전쟁을 지속한다면 성좌를 모욕하지 않는 한 파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그는 성직자들과 노골적으로 대립했다. 급기야 1232년 6월 산슈 2세가 성직자들을 "손과 몽둥이"로 폭행했다는 보고가 교황청에 전해지자, 교황청은 교황 특사를 포르투갈로 파견했다. 1234년 8월 16일, 교황 특사가 주관한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의 종교재판에서. 산슈 2세는 파문당했고 포르투갈에서의 성무 금지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산슈 2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책을 이어갔다.

1140년, 산슈 2세는 아로의 로페 디아즈 2세와 알폰수 9세사생아인 우라카의 딸인 멘시아 로페스 데 아로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성직자들은 멘시아의 외할아버지 알폰수 9세가 포르투갈 왕비 우라카의 아들인 점을 근거로 "근친 관계이니 교회법에 위반된다"고 비판했고, 포르투갈 귀족들은 "카스티야 귀족의 미망인인 그녀가 왕비가 되는 것은 격에 맞지 않고, 그녀의 친족들이 요직을 차지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불만을 품었다.

1245년 7월 24일과 8월 1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리옹 공의회에서 2개의 교령을 발표했다. 하나는 포르투갈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위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했다. 교황은 이 교령에서 "성직자들과 교회를 부당하게 대하고 그릇된 결혼을 감행한 산슈 2세는 기독교 군주로 인정할 수 없으니, 폐위하고 새 왕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이에 다수의 포르투갈 귀족과 성직자들은 당시 볼로뉴 백작을 맡고 있던 산슈 2세의 동생 아폰수 3세를 새 국왕으로 받들기로 결의했다.

아폰수 3세는 파리에서 포르투갈 귀족, 성직자 대표들과 접견한 뒤 그들의 특권과 관습을 보장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자신의 영지를 프랑스 왕국에 반납하고 포르투갈로 진격해 1245년 연말에 리스본에 도착했다. 산타렝, 알렌케르, 토레스노바스, 토마르, 알코바사, 레이리아 등지가 아폰수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고, 산슈 2세는 오직 코임브라와 코빌량, 구아르다 등지에서만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다. 산슈 2세는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고,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의 장남 알폰소가 1246년 초 포르투갈 왕국으로 진군해 레이리아 일대를 파괴하고 1247년 1월 13일 아폰수 3세와 레이리아 인근에서 맞붙어 승리했다.

그러나 알폰소 왕자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산슈 2세의 입지는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급기야 멘시아 왕비가 라이문도 비에가스 데 포르토카레이루라는 귀족에게 납치되어 오렝(Ourém)으로 이송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산슈 2세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오렝으로 달려가 성문을 열라고 명령했지만, 수비대는 그를 조롱하며 화살 몇 발을 날렸다. 그는 며칠간 오랭을 포위했지만 공략할 가망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멘시아가 오렝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치안판사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납치'는 산슈 2세에게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멘시아가 산슈 2세와의 관계를 끊기 위해 벌인 자작극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듯 아내마저 빼앗기자 절망에 빠진 산슈 2세는 1247년 12월 4일 알폰소 왕자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의 호위를 받으며 카스티야 왕국으로 망명했고, 1248년 1월 4일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2.2.5. 아폰수 3세

산슈 2세를 몰아내고 포르투갈 왕국의 새 국왕이 된 아폰수 3세는 내치에 전념했다. 1254년 레이리아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특권층의 횡포로부터 중산층 상인과 중소 지주들을 보호하는 법안을 반포했으며, 교회에 많은 특권을 부여해 성직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애썼다. 또한 내전으로 흐트러진 행정 체계를 빠르게 재조직하고 도시 개발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특히 1255년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를 코임브라에서 리스본으로 이전시켰다.

아폰수 3세는 왕국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뒤 레콩키스타를 재개해 1249년 파루를 공략하고 알가르브 일대를 왕국에 편입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가 알가르브 일대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이 촉발되었다. 1253년, 알폰소 10세는 포르투갈 왕국으로 친정해 알가르브 일대를 공략했다. 압도적인 전력을 갖춘 카스티야 왕국군을 상대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아폰수 3세는 알폰소 10세와 협상한 끝에 알폰소 10세의 딸 베아트리스와 결혼하고 알가르브를 베아트리스에게 줄 지참금으로 삼겠다는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그 후 마틸다와의 혼인을 무효로 처리하고 교황청의 허락을 받으려 했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이를 거부하고 베아트리스와 헤어지라고 요구했다. 아폰수 3세는 이에 불복해 교황청과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1259년 마틸다가 사망하면서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지만, 베아트리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디니스 1세는 1263년까지 합법적인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다음 교황인 우르바노 4세에 의해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1267년, 아폰수 3세는 알폰소 10세와 바다호스에서 만나서 새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카스티야 왕국은 알가르브 일대를 포르투갈에 돌려주고 포르투갈과 상호방위협약을 맺는 데가로 아라세나, 모라, 세르파, 아로체 등 과디아나 강 동쪽의 포르투갈 영토를 가지기로 했다. 이 협약은 카스티야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의 경계를 최초로 정한 것이기도 했다.

1268년, 브라가 대주교, 코임브라 대주교, 포르투 대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아폰수 3세가 십일조 금지, 사원 건축을 위한 자금을 유용, 성벽 공사에 성직자들을 동원한 것, 주교의 승인 없이 성직자를 투옥 및 처형한 것, 대주교와 주교에 대한 살인 위협을 가한 것, 유대인을 고위직에 임명시킨 것 등 43가지의 죄목을 저질렀다고 교황청에 고발했다. 교황 클레멘스 4세는 죄질이 중하다고 보고 아폰수 3세를 파문했다. 포르투갈 성직자들이 힘을 합쳐 왕을 고발한 것은 아폰수 3세가 초기와는 달리 성직자들을 통제하려 든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탁발 수도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등 외국에서 온 수도자들을 우대한 것에 깊은 반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아폰수 3세는 이에 맞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해달라고 요청했고, 성, 궁전, 성벽, 해자 및 기타 군사시설의 건설, 수리에 무상으로 일할 의무를 폐지한 것에 호감을 품고 있었던 평민들은 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274년 1월, 산타렝에서 왕에 대한 비난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소집되어 몇 달간의 조사 기간을 거친 끝에 왕의 정당성을 공인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위원회의 결의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폰수 3세에 대한 파문을 재차 선고했다.

1279년 2월 16일, 아폰수 3세가 알코바사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교회에 대한 순명을 맹세하고 자신에게 영지를 빼앗긴 성직자들에게 사과하고 영지를 되돌려주겠다고 밝혔다. 이에 알카코사 수도원장은 파문을 해제하고 그를 그곳에 안장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2.2.6. 디니스 1세

아폰수 3세 사후 왕위에 오른 디니스 1세는 당시 17세로 미성년자였기에 어머니 베아트리스가 주재하고 궁재 주앙 페르스 드 아보잉 등이 참여한 섭정평의회가 통치를 대행했다. 그녀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우호관계를 굳건히 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얼마 안 가서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어머니의 간섭을 배제하고 친정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베아트리스는 이에 반발했고, 카스티야 국왕이자 베아트리스의 아버지인 알폰소 10세도 그녀를 지지하면서 디니스 1세에게 바다호스에서 대면하자고 권고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이를 거부하고 베아트리스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1282년 카스티야 왕자 산초가 알폰소 10세를 상대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몇 년간 포르투갈 왕국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못했다.

1281년, 동생 아폰수가 형의 즉위는 부당하다며 반기를 들었다. 그는 형이 교회로부터 사생아로 간주되었다가 1263년에서야 합법적인 아이로 인정받은 데 비해 자신은 처음부터 교회의 축복을 받았으니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고, 디니스 1세가 군대를 동원해 동생이 영주로 군림하던 라메구, 비제우, 세이아를 회수한 뒤 아폰수가 머물고 있던 비드(Vide)로 진군하자 아폰수는 카스티야 왕국으로 달아났다.

디니스 1세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우호관계를 단절한 뒤 아라곤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하고,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에게 그의 딸 이사벨과 결혼하고 싶다고 알렸다. 당시 페드로 3세는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을 이용해 카를루 1세를 밀어내고 시칠리아 왕국을 장악한 뒤 나폴리 왕국을 세운 카를루 1세, 그의 조카인 프랑스 왕국필리프 3세와 대규모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 포르투갈 왕국의 이같은 제안에 반색했다.

1282년 2월 11일에 바르셀로나의 산타 아가타 예배당에서 디니스 1세의 대리인의 주재하에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1달 후에 결혼 조약이 비준되었다. 이에 따르면, 이사벨은 12개의 성과 3개의 별장, 토레스베드라스 농장 등 여러 영지를 지참금으로 받을 것이었다. 이후 이사벨은 카스티야 왕국의 훼방을 피할 수 있는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1282년 6월 26일 포르투갈에 입국한 뒤 트란코수에서 디니스 1세와 만나 결혼식을 거행했다.

한편, 디니스 1세는 아버지가 치세 말기에 성직자들의 특권을 회수하고 교회에 돌아가는 수입 일부를 국고로 돌린 일 때문에 교황청과 심각한 갈등을 벌이다가 파문당하고 나라 전체에 성무 금지령이 내려진 상황을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288년에 즉위한 교황 니콜라오 4세에게 "포르투갈에 대한 교황과 교회의 이익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고, 교황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포르투갈 왕국에 대한 성무 금지령을 해제하고 아폰수 3세에게 내린 파문을 취소했다.

1291년, 디니스 1세는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와 대면해 자신의 딸 콘스탄사와 산초 4세의 아들 페르난도를 약혼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산초 4세는 1294년에 마음을 바꿔 포르투갈 왕국과의 약혼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5세의 딸인 블랑슈와 아들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던 1295년 4월 산초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페르난도 왕자가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로 등극했다. 그해 여름, 페르난도 4세의 모친이며 섭정을 맡은 마리아 왕비는 시우다드 로드리구에서 디니스 1세와 대면해 콘스탄스와 페르난도의 결혼을 예정대로 집행하고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를 디니스 1세의 아들 아폰수와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1296년, 카스티야 왕자 후안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에 빠졌다. 후안 왕자로부터 자신을 도와주면 상당한 영토를 넘겨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디니스 1세는 카스티야 왕국으로 쳐들어가 도루 강을 따라 진군하며 각지를 약탈했다. 이에 마리아 왕비는 디니스 1세에게 알폰소 데 라 세르다와 후안 왕자에 대한 지원을 계속한다면 전년도에 맺은 협정을 파기하겠다고 경고했다. 디니스 1세는 더 이상 반군을 돕지 않기로 하고 지금까지 점령한 영토에 관료를 임명한 뒤 본국에 돌아갔다. 포르투갈군이 끝내 오지 않자, 후안 왕자는 레온으로 철수했고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아라곤 왕국으로 돌아갔다.

1297년 9월 12일, 디니스 1세는 알카니세스(Alcañices) 마을에서 마리아 왕비와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캄푸마이오르, 올리벤사, 오겔라(Ouguela), 산 펠리세스 데 로스 갈예고스(San Felices de los Gallegos) 등 알폰소 10세가 탈취했던 포르투갈 영토를 돌려주고, 알메이다, 카스텔루 봉, 카스텔루 멜료르, 카스텔루 호드리구, 몬포르트, 사부갈, 알파이아트스, 빌라 마요르 일대도 포르투갈 국왕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영토 분쟁을 벌이는 것을 그만두고, 두 왕국의 고위 귀족과 성직자들은 서로를 지원하고 자신들의 영지와 특권을 지키는 데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약은 두 왕국의 군주뿐만 아니라 카스티야 도시 길드, 카스티야와 레온 귀족들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렇게 정해진 양국의 국경은 현대까지 거의 변경되지 않았기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국경 중 하나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페르난도 4세와 콘스탄사의 결혼이 다시 확인되었고, 포르투갈의 왕위 후계자 아폰수와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의 약혼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디니스 1세는 마리아 왕비를 돕기 위해 300명의 기사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1298년, 후안 왕자와의 전쟁이 장기전으로 치닫는 것을 우려한 마리아 왕비는 토로에서 디니스 1세와 재차 만나서 후안 왕자와의 전쟁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디니스 1세는 이를 거절하고 페르난도 4세와 후안 왕자의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후안 왕자는 점령한 영토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영토가 페르난도 4세에게 귀속되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야돌리드에 모인 카스티야 코르테스는 마리아 왕비로부터 뇌물을 받고 디니스 1세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1300년 3월, 마리아 왕비는 시우다드 로드리고에서 디니스 1세와 다시 만났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페르난도 4세와 콘스탄사의 결혼을 수행하기 위해 교황을 매수할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디니스 1세는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상당량의 자금을 보내줬다.

1303년 초, 디니스 1세는 포르투갈의 왕위 후계자 아폰수 4세와 페르난도 4세의 누이인 베아트리스의 결혼을 진행시키는 것을 논의하기 위해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와 바다호스에서 만났다. 이때 페르난도 4세는 디니스 1세가 일전에 가져간 영토 일부를 되돌려주기를 희망했지만, 디니스 1세가 단지 "그대가 위급한 상황이 되면 도와주겠다"고 할 뿐 영토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자 매우 실망했다. 그래도 결혼 계약은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하고, 1309년 아폰수 4세와 베아트리스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왕국은 카스티야 왕국과의 결혼 동맹을 재개했다.

1307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교황청을 강하게 압박한 끝에 성전 기사단을 이단으로 간주한다는 선고를 얻어내고 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 존재하던 수백 개의 성전 기사단 지부들도 프랑스 본부의 뒤를 따라 각국의 군주들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디니스 1세는 성전 기사단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1312년에 명칭을 그리스도 기사단(Ordem Militar de Cristo)으로 바꿔서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계속 활약하게 했다.

디니스 1세는 카스티야 왕국과 일시적으로 전쟁을 벌이거나 무슬림과의 소규모 전쟁을 치른 것 외에는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하층 계급을 귀족들의 횡포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일련의 법을 반포했다. 이 법들은 훗날 아폰수 5세가 정리한 <아폰수 법전(Code Afonsino)>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리스본을 왕궁이 영구적으로 머물 장소로 확정하고 포르투갈의 경제 및 상업 중심지로 키우고자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디니스 1세가 가장 힘을 기울인 사안은 바로 귀족과 성직자들의 과도한 권력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1283년, 그는 어린 나이 때 자신의 이름으로 이뤄진 모든 기부를 "미숙함으로 인해 잘 생각하지 못하고 실행했으니 취소한다"고 선언하고 여러 수도원에 바쳤던 기부금을 회수했으며, 이사벨 왕비 등 가족들이 바친 기부금 역시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행했으니 무효라며 회수했다. 이듬해인 1284년에는 귀족들이 받은 특권의 정당성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한 뒤 많은 귀족이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특권을 누리며 백성들을 억압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주장하며 부당하게 취득한 것으로 간주된 특권들을 도로 회수했다.

1285년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대귀족이었던 곤살루 가르시아 드 소자가 사망했다. 곤살루는 사망 당시 아내 레오노르 아폰수와 조카 콘스탄사 멘드스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다른 귀족들이 이에 개입해 혈연 또는 지연 관계를 들먹이며 자신들도 유산 일부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로렌코 수아르스 드 발라다레스는 콘스탄차의 여동생인 마리아 멘데스 2세 데 소사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얻은 것을 빌미삼아 상당한 유산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상속 분쟁이 조속히 해결되지 않자, 그들은 디니스 1세에게 분쟁을 중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디니스 1세는 1286년 곤살루 가르시아의 재산에 대한 조사를 명령한 뒤 1288년 기마랑이스에서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코르테스를 소집해 좀더 면밀한 조사를 벌이자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곤살루 가르시아 백작의 재산에 대한 조사는 1291년까지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백작이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 상당수가 국고로 회수되었다. 디니스 1세는 이후에도 1301년, 1303 ~ 1304년, 1307 ~ 1311년에 귀족들의 특권과 재산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이와 더불어 교회와 수도회가 토지를 매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나중에는 성직자들이 사적인 이익을 챙기기 위해 재산을 취득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디니스 1세는 국가 산업을 진흥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토지를 재분배했으며, 여러 농촌 공동체를 설립해 가능한 한 많은 농민들이 안정된 기반을 갖고 농사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특히 경작되지 않은 땅을 소유한 땅이 없던 20~30쌍의 농민 부부들에게 나눠줬다. 이 부부들은 왕, 지방의 영주 또는 토지 기증자에게 매년 수확량의 일부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경작할 수 있었다. 또한 해안 모래의 침입으로부터 농경지를 보호하고자 피냘 드 레이리아(Pinhal de Leiria: 레이리아 소나무숲)를 조성하고 이 나무들을 벌채하는 것을 금지했다.

디니스 1세의 농업 장려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포르투갈은 국내 소비량을 충분히 커버하고 막대한 잉여 생산물을 축적했다. 디니스 1세는 카탈루냐, 브르타뉴, 플랑드르, 영국의 여러 항구 도시들과 상업 관계를 수립하고 이 잉여 생산물을 팔아서 막대한 재보를 확보했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주요 수출품은 곡물 외에도 와인, 올리브 오일, 소금, 생선, 말린 과일 등이 있었다. 또한 구리, 은, 주석, 및 철 광산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졌으며, 포르투갈 상인들은 잉글랜드, 프랑스 등지에서 특권을 수여받고 무역 활동을 자유롭게 이어갔다. 또한 상품을 효과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조선소를 건립하고 우수한 선박 기술자들을 초빙해 선박들을 건조하게 했으며, 해적으로부터 해안선과 선박들을 보호하기 위한 해군도 창설되었다. 초대 해군 제독은 제노바 출신의 마누엘 페사냐였다.

디니스 1세는 문화 진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수백 곡에 달하는 노래를 작곡해 '음유시인 왕(O Rei-Trovador)'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는데, 그중 137곡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1290년에는 갈리시아어포르투갈어를 포르투갈 왕국의 공식 언어로 정하고 작가들에게 해당 언어로 문학 작품을 쓰도록 장려했으며, 문학과 과학 분야의 작품들을 포르투갈어로 번역하게 했다. 그리고 <Scientiae thesaurus mirabilis(놀라운 지식의 보물)>을 반포해 대학 설립과 주교구들의 대학 후원을 장려했다. 이에 따라 여러 대학이 설립되었는데, 그 중 1290년 리스본에 설립된 대학이 1308년 코임브라로 이전한 후 현재의 '코임브라 대학교'로 이어졌다.

디니스 1세는 이렇듯 많은 업적을 세웠지만, 남편과 아버지로서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사벨 왕비와 자식들을 홀대했고, 여러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들을 편애했다. 특히 알돈카 드 소자라는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폰수 산셰스를 매우 총애해, 왕궁에서 함께 살게 하고 알부케르크 영주로 삼았으며, 1312년 궁재에 선임했다. 일찌감치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던 아폰수 4세는 이러다 아버지가 아폰수 산셰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할까 두려워했다.

급기야 1321년, 아폰수 4세는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자신들의 특권의 정당성을 지속적으로 조사하는 디니스 1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대다수 귀족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반란군은 포르투갈 북부를 장악하고 코임브라를 거점으로 삼았다. 이사벨 왕비는 코임브라로 가서 아들에게 아버지와 화해하라고 권고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디니스 1세가 군대를 이끌고 코임브라로 진군해 아폰수 4세와 몬데구 강 다리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자, 이사벨 왕비는 나귀를 탄 채 다리를 오가며 양 진영에 찾아가 골육상쟁을 벌이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 이사벨의 간곡한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디니스 1세와 아폰수 4세는 1322년 5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 후 경미한 심장마비 또는 뇌졸중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리스본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디니스 1세는 1323년 카스티야의 왕비 마리아로부터 펠리페 왕자의 반란을 진압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아폰수 4세에게 리스본의 주둔한 정예병을 맡기고 카스티야로 출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폰수 4세는 즉각 국경으로 진격했고, 바다호스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펠리페는 포위를 풀고 세비야로 철수했다. 그 후 아폰수 4세는 "이 참에 지금 가지고 있는 군대를 이끌고 리스본으로 가서 왕이 되시라"는 측근들의 권유에 넘어가 군대를 돌려 리스본으로 진군하면서, 자신을 왕위 후계자로 확정하고 아폰수 산체스를 추방하기 위한 코르테스를 소집하지 않으면 전쟁을 재개할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디니스 1세는 아들의 요청에 따라 1323년 10월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하고 결론이 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들의 바람과는 달리 일반적인 주제를 놓고 논의하게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아폰수 왕자가 왕위를 차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코르테스는 왕자의 요구는 부당하며 왕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당시 산타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아폰수 4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해 군대를 이끌고 리스본으로의 행군을 재개했다.

파일:알발라드 평원에서 전투를 말리는 이사벨 왕비.jpg

아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디니스 1세 역시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다. 양자는 리스본 교외의 알발라드 평원에서 대치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의 전투가 임박했을 때, 이사벨 왕비가 노새를 타고 수도자와 함께 나타나 평원 한 가운데에 서서 골육상쟁을 벌이는 것을 다시 한 번 만류했다. 이에 모든 전사가 싸울 생각을 버리고 국왕과 왕자에게 화해를 강력하게 권고했고, 두 사람은 전쟁을 강행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화해하기로 했다. 그 후 디니스 1세와 아폰수 4세는 1324년에 평화 협약을 맺고 내전을 종식했다.

2.2.7. 아폰수 4세페드루 1세

1325년 1월 7일 디니스 1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아폰수 4세는 아폰수 산셰스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추방하고 아폰수 산체스를 계속 도왔던 디니스 1세의 또다른 사생아인 주앙 산셰스를 처형했다. 아폰수 산셰스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카스티야 귀족들의 지원을 받고 용병을 모집한 뒤 1326년부터 1329년까지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국경지대에서 아폰수 4세의 군대와 여러차례 전쟁을 치렀다. 1329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고, 아폰수 산셰스는 아폰수 4세로부터 영지를 돌려받은 뒤 음유시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아폰수 4세는 비록 아버지와 내전을 치렀지만 아버지가 실시한 정책을 이어갔다. 1327년 귀족의 재판 간섭을 금지하고 재판관을 직접 임명했으며, 사적인 복수를 하는 자를 사형에 처했다. 또한 1331년 코르테스에 참여하는 대표들을 개편했고, 여러 영주들의 횡포로부터 평민들을 지켜주기 위한 법을 엄격히 집행했다. 또한 아버지가 신설한 포르투갈 해군의 전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했으며, 대서양 탐험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1336년 카나리아 제도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328년, 아폰수 4세는 자신의 딸 마리아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알폰소 11세는 마리아를 세비야의 산 클레멘테 수녀원에 보내버리고 정부로 삼은 레오노르 데 구즈만에게 흠뻑 빠져 사생아를 10명이나 낳았다. 아폰수 4세는 알폰소 11세에게 레오노르와의 관계를 끊고 딸을 아껴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1340년 2월 나스르 왕조의 타이파 아불 핫자즈 유수프마린 왕조 술탄 아불 하산 알리가 연합군을 결성하고 카스티야 왕국의 도시인 타리파를 포위했다. 알폰소 11세는 이에 맞서고자 진군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폰수 4세는 "내 딸 마리아를 박대하고 정부와 놀아나는데 무슨 염치가 있어서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하느냐?"라고 비난했다. 알폰소 11세는 아폰수 4세로부터 원군을 어떻게든 받아내야 했기에, 수녀원에 가 있던 마리아 왕비를 설득해 아버지에게 가서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그러면서 원군을 보내준다면 레오노르와 사생아들을 추방하고 마리아에게 왕비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폰수 4세는 이를 믿고 원군을 보내줬고, 카스티야-포르투갈 연합군은 1340년 10월 살라도 전투에서 나스르-마린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알폰소 11세는 적군을 물리친 후 앞서 맺었던 약속을 무시하고 레오노르를 계속 총애했다.

1347년 코임브라지진이 일어나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여기에 1348년 중세 흑사병이 포르투갈을 덮치면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혼란에 빠진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치안 정비, 시신 수습, 유랑민 억류, 구걸과 게으름을 억제하는 등 여러 정책을 잇따라 실시했다. 여기에 사회 계층에 따라 허용되는 의복을 규제하는 조치를 내려, 사회의 혼란으로 인해 신분제도가 붕괴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1350년 카스티야 왕국에서 페드로엔리케 2세와의 내전이 발발했다. 이 내전은 1369년까지 이어지며 카스티야 왕국 전역을 황폐화시켰고, 수많은 난민이 혼란을 피해 포르투갈로 망명했다. 정쟁에서 패배한 카스티야 귀족들도 이 시기에 포르투갈에 이주했는데, 그들은 곧 포르투갈 궁정 내에서 독자적인 파벌을 결성했다. 그러던 중 아폰수 4세의 아들이자 왕위 후계자인 페드루가 콘스탄사 왕비의 시녀인 이네스에게 홀딱 빠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페드루는 콘스탄사 왕비를 홀대하고 이네스와 깊은 사랑을 나누면서, 그녀와 가까운 카스티야 귀족들에게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아폰수 4세는 카스티야 대귀족의 딸인 며느리를 홀대하는 아들을 훈계하기도 하고 사랑이 식을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지만 아들이 이네스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하자, 1344년 이네스를 카스티야 국경 지대에 있는 알부케르크 성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페드루는 이네스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속삭였고, 그런 남편 옆에서 가슴앓이를 하던 콘스탄사는 1349년 결혼 9년 만에 출산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페드루는 콘스탄사가 죽자마자 이네스를 리스본으로 데려와서 사랑을 나누었고, 이네스의 친족들과 그녀와 관련있는 카스티야 망명 귀족들은 페드루가 베푼 특권을 토대로 포르투갈 궁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포르투갈 귀족들은 이에 반감을 품고 아폰수 4세에게 조치를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아폰수 4세는 아들을 왕족 혈통의 여인과 결혼시켜 상황을 개선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페드루는 이네스가 아니면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사생아였던 아버지의 딸이며 포르투갈 귀족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이네스를 며느리로 맞이할 수 없었던 아폰수 4세는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해야 할지 고심했다. 그러던 중 이네스의 친가인 카스트로 가문이 페드루와 이네스의 장남이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을 물려받게 하기 위해 페드루가 콘스탄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페르난두 왕자를 암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아폰수 4세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파일:Death of Inés de Castro.jpg
<이네스의 죽음>

1355년 1월 7일, 페드루 왕자가 사냥하러 가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아폰수 4세는 페드루 코엘류, 알바루 곤살베스, 티아구 로페스 파셰쿠와 함께 빌라 두 자르멜루에 머물던 이네스를 긴급 체포한 뒤 사형을 선고했다. 이네스는 어린 자식들을 왕 앞에 내밀며 아이들을 봐서라도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아폰수 4세는 이를 묵살하고 처형을 감행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네스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페드루는 격분해 카스트로 가문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2주 동안 포르투를 포위 공격하며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가 아폰수 4세가 급파한 토벌대에 패배했다.

1355년 8월 아폰수 4세의 아내이자 페드루의 어머니인 베아트리스의 중재로 양자는 평화협약을 맺었다. 그 후 페드루는 갈리시아 출신의 여인 테레사 로렌수를 정부로 두었다. 이 여인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일부 기록에서는 리스본 상인 로렌코 마르틴스가 그녀의 아버지라고 주장했고, 다른 기록에서는 이네스의 측근이 그녀의 아버지라고 기술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리스본 상인 공동체에 맡겨졌는데, 훗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포르투갈 병탄 시도를 물리치고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로 등극했다.

1357년, 아폰수 4세는 페드루에게 권력의 상당 부분을 위임하는 대가로 페드루와 화해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1357년 5월 28일에 리스본에서 사망했고, 페드루가 페드루 1세로서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 초기에 이네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용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360년 6월 12일 칸탄헤데 성당에서 이네스를 자신의 정식 부인으로 선언함과 동시에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베아트리스, 주앙, 디니스 또한 정식 자녀로 인정했다. 그리고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자들을 끝까지 추적해 주살하겠다고 발표했다.

파일:1360년 이녜스 데 카스트로의 대관식.webp
피에르 샤를 콤테, <1360년 이네스 드 카스트루의 대관식>

일설에 따르면, 페드루는 이네스의 유해를 무덤에서 꺼낸 뒤 왕비의 복장을 갖추게 해서 옥좌에 앉히고는 신하들에게 이네스의 손등에 키스하며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고 한다. 이는 스페인 극작가 헤로니모 베르무데스(Jerónimo Bermúdez)가 1577년에 발표한 비극 작품 < Nise Laureada>에서 유래한 것으로, 현재 학계에서는 후대에 꾸며진 이야기로 간주한다.

한편 이네스를 죽였던 페드로 코엘루와 알바루 곤살베스는 카스티야로 피신했다가 카스티야에서 도망친 망명자들과 교환하자는 페드루의 제안을 받아들인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에 의해 포르투갈로 송환되었다. 페르난도 로페스의 <페드루 1세의 연대기>에 따르면, 페드루 1세 본인이 직접 그들의 심장을 칼로 적출하는 방식으로 죽였다고 한다. 페드루 1세는 복수를 완수한 뒤 알코바사 수도원에 자신과 이네스가 묻힐 석관을 만들게 했다. 둘의 무덤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관에는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Até o fim do mundo...)"이란 글귀가 쓰여 있다.

그 후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 왕국을 무난하게 통치했다. 그는 법률을 위배한 자들을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격하게 처벌했으며, 죄질이 조금이라도 나쁘다 싶으면 사형을 가차없이 내렸다. 귀족들은 그의 엄격한 판결에 두려움을 느끼고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반면 평민들에게는 너그럽게 대했기에 백성들의 열띤 지지를 받았다. 페르난도 로페스는 자신의 연대기에서 "포르투갈에서 페드루 왕의 10년 치세와 같은 시기는 없었다"고 호평했다. 한편, 그는 카스티야 내전에 개입해 엔리케 2세와 투쟁하는 조카 페드로를 지원했으며 1366년 내전에서 패배하고 포르투갈로 망명하려는 엔리케 2세를 받아주지 않았다.

2.2.8. 페르난두 1세

1367년 1월 18일 페드루 1세가 사망한 뒤 페르난두 1세가 페드루 1세의 유일한 적출자로서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2년 후인 1369년, 페르난두 1세의 사촌인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엔리케 2세와의 내전에서 패배해 목숨을 잃었다. 페드로를 지지했던 갈리시아 귀족들은 엔리케 2세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페르난두 1세를 자신들의 국왕으로 옹립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포르투갈간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1371년, 양국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중재에 따라 알코팅(Alcoutim)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했다. 이때 페르난두 1세는 엔리케 2세의 10살짜리 딸인 레오노르와 약혼했지만, 1372년 포르투갈 귀족 마르팀 아폰수 텔레스의 딸인 레오노르 텔레스와 결혼하기로 하고 카스티야 왕국과의 약혼 계약을 파기했다.

페르난두 1세와 레오노르 텔레스의 결혼은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레오노르 텔레스의 어머니 알돈사 아녜스는 보르고냐 왕조의 일원이었기에 성직자들로부터 근친간의 결혼이라며 비판받았고,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 시민들은 대귀족의 딸이 왕비가 되었으니 귀족들의 횡포가 심해질 것을 우려한 끝에 아예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난두 1세는 리스본 시민들의 의견을 듣는 척하다가 리스본을 비밀리에 탈출한 뒤 레사 두 발로 수도원에서 레오노르 텔레스와의 결혼을 감행했다. 이후 토벌대를 조직한 뒤 리스본으로 돌아와 반란 주모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1372년, 랭커스터 제1대 공작 곤트의 존이 파견한 사절이 포르투갈에 찾아와 자신이 카스티야 국왕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페르난두 1세는 그 해 7월 10일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이 될 때까지 바다와 육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잉글랜드 왕국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더 많은 특혜를 부여하고 포르투갈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타길데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두 1세는 조약에 서명한 직후 영국에 2명의 사절을 보냈고, 사절들은 곤트의 존의 거주지인 사보이 궁전에서 존의 서명을 받아냈다. 여기에 더해, 사절들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흑태자 에드워드와도 협상했고, 1373년 6월 16일 양국의 우호를 굳건히 하자는 내용의 런던 협약을 체결했다. 티길데 협약과 런던 협약은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이 공식적으로 체결한 최초의 우호 조약으로, 향후 600여 년간 이어질 양국의 우호 관계의 기반이 되었다.

페르난두 1세는 리스본과 포르투 및 여러 지역에 성채 건설을 감독했으며, 농업에 관한 법률을 개정했다. 이 법의 목적은 휴경지를 없애고 농업에 전념하는 일손의 수를 늘리기 위한 것으로, 대지주들이 농민들을 원활하게 징발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중세 흑사병의 여파로 치솟는 임금을 고정시켰고, 모든 농민의 노동이 의무화되었다. 방대한 토지를 보유한 귀족들은 이 법을 반겼지만, 일반 백성들은 노동력을 마음껏 착취하면서 임금 인상을 불허하는 처사에 불만을 품었다. 반면 페르난두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바스크인, 카탈루냐인, 제노아인, 롬바르드인, 밀란인 등 다양한 상인들이 리스본에 거주하면서 왕성한 상업 활동을 전개하면서, 포르투갈의 무역량은 갈수록 크게 불어났고 왕실과 상인들은 풍족한 삶을 누렸다.

1378년 로마와 아비뇽에서 2명의 교황이 난립하면서 서방 교회 대분열이 발발했다. 페르난두 1세는 처음엔 아비뇽 교황을 지지하는 카스티야 왕국에 대응하기 위해 로마 교황을 지지했지만, 1379년 카스티야 왕국과 종전 협약을 맺은 뒤 아비뇽 교황을 지지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1381년 캐임브리지 백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이끄는 원정대가 포르투갈에 도착하여 백년 전쟁에 개입해 프랑스 왕국을 적극적으로 돕는 카스티야 왕국을 응징하고자 전쟁을 단행하자 즉시 카스티야 왕국과 맺었던 종전 협약을 파기하고 로마 교황 지지로 선회했다.

1382년 랭글리의 에드먼드가 카스티야와의 전쟁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자, 페르난두 1세는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접촉해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양국의 화해를 위해 자신의 외동딸 베아트리스를 후안 1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때 맺은 결혼 조약에 따르면, 페르난두 1세가 남자 아이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포르투갈 왕위는 베아트리스에게 넘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통치를 하지는 않고 베아트리스의 어머니 레오노르가 섭정을 맡기로 했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낳은 자식은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위는 후안 1세에게 돌아가며, 그 다음엔 후안 1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왕자에게 넘어갈 것이었다.

1383년 5월 17일 바다호스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5월 21일 카스티야 기사와 고위 성직자들은 카스티야 왕이 조약에서 동의한 약속을 어긴다면 왕과 싸우겠다고 맹세했고, 포르투갈인들 역시 조약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1383년 10월 22일 페르난두 1세가 사망한 뒤, 포르투갈 왕국은 카스티야 왕국의 침략에 직면했다.

2.3. 카스티야 왕국의 침략과 격퇴

페르난두 1세 사후, 페르난두 1세의 아내이자 베아트리스의 어머니인 레오노르 텔레스가 베아트리스와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를 공동 왕으로 추대하고 두 사람의 이름으로 섭정을 시작했다. 여기에 레오노르의 연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가 재상으로 선임되었다. 후안 1세는 페르난두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몬탈반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베아트리스와 자신을 포르투갈의 통치자로 선포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포르투갈 전역에 보내고 알폰소 로페스 데 테하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리스본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이 훼손될까 두려웠던 포르투갈 상인 계급은 자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백성들을 선동해 11월 말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1383년 12월 6일 아비즈의 영주이자 페르난두 1세의 이복 동생인 주앙이 포르투갈의 섭정 레오노르의 애인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를 암살하면서 반란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알바로 파리스의 선동에 넘어간 백성들이 리스본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의 앞잡이로 간주된 리스본 주교 마르티뉴 아네스(Martinho Anes)를 살해한 뒤 주앙 왕자를 지도자로 옹립했으며, 포르투갈 제독 란사로테 페사냐도 베자 시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키고 포르투갈 국왕을 자칭했다.

알바로 파리스는 레오노르에게 주앙 왕자와 재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산타렝으로 도주한 뒤 후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안 1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포르투갈의 상황을 안정시키기로 마음먹고 베아트리스와 함께 산타렝으로 진격했다. 1384년 1월 13일 산타렝에 도착한 그는 레오노르로부터 사임 각서를 받아내고 많은 기사와 성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어냈다. 이후 4월 6일 아톨레이로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장군 페르난도 산체스 데 토바르와 포르투갈 귀족 페드루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 반란군과 처음으로 맞붙었다. 카스티야 기병대는 이 전투에서 정사각형 방진을 세운 적군을 향해 무작정 돌진했다가 큰 손실을 입고 패퇴했다.

1384년 5월, 후안 1세는 군대를 정비한 뒤 리스본으로 진격해 육지와 해상 모두 봉쇄했다.(리스본 공방전) 그러나 리스본 공략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고,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카스티야에 충성하는 도시들을 습격하고 침략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한편 주앙 1세는 잉글랜드 왕국에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자고 요청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17세의 리처드 2세를 대신해 국정을 주관하던 랭커스터 1대 공작 곤트의 존은 백년 전쟁에서 프랑스 왕국을 지원한 카스티야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포르투갈에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1384년 7월 18일, 루이스 페헤이라 제독이 이끄는 포르투갈 함대가 테주 강 해전에서 카스티야 해군과 격돌했다. 루이스 페헤이라는 이 해전에서 전사했지만, 포르투갈 함대는 적의 해상 봉쇄를 뚫고 리스본에 도착해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던 주민들에게 귀중한 보급품을 전달했다. 후안 1세는 이후에도 리스본을 계속 포위했지만,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가 보급로를 교란하면서 보급품이 부족해지고 진영에 페스트가 돌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가자 어쩔 수 없이 9월 3일에 봉쇄를 풀고 카스티야로 철수했다. 그렇지만 리스본 외 다수의 포르투갈 지역은 카스티야군에게 넘어갔다.

1385년 4월 6일, 주앙 1세는 코임브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귀족, 성직자, 시민 대표들의 추대를 받아 포르투갈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를 포르투갈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하고 카스티야군에 넘어간 지역을 모조리 탈환하게 했다. 여기에 잉글랜드군 600명이 포르투갈에 상륙했다. 이들 전원이 백년전쟁에서 활약한 베테랑으로, 대 기병 전술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강력한 기병을 앞세운 카스티야군을 상대하는 법을 포르투갈인들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후안 1세는 주앙 1세가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해 원정군을 파견했다. 이들은 비제우를 철저하게 약탈하고 포르투갈인들을 상대로 잔학 행위를 저질렀지만, 1385년 5월 29일 트랑코주(Trancoso) 전투에서 대패해 지휘관 7명 중 6명이 사망할 정도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후안 1세는 6월에 대군을 일으켜 셀로리쿠다베이라(Celourico da Beira)에서 코임브라와 레이리아에 이르는 포르투갈 중북부로 진격했다. 원정군 규모는 32,000명에 달했는데, 그 중엔 프랑스 중기병들도 있었다. 주앙 1세와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이에 맞서 6,500명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토마르 시에 집결했다. 이후 적을 어찌 맞서 싸울 지 논의한 끝에, 리스본에서 또다시 농성한다면 이번에는 버티기 어려우니 알주바호타(Aljubarrota) 마을 인근에서 적을 물리치기로 결의했다.

1385년 8월 14일, 험준한 산악 지형을 통과해야 하는 데다 숫자가 워낙 많아서 매우 느린 속도로 진군하던 카스티야군은 알주바호타 고지에서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을 발견했다. 후안 1세는 즉각 돌격 명령을 내렸지만, 무더운 날씨에 오래도록 행군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기사들과 장병들은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반면에 시원한 고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전면에 마름쇠 등 대기병 방어 구조물을 세우고 장궁병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적 기병대를 물리쳤다. 카스티야군은 축차투입을 반복해봤지만 하루종일 적의 전열을 뚫지 못하다가 제풀에 지쳐 퇴각했다. 이에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은 도망치는 적을 추격해 카스티야군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알주바호타 전투에서 포르투갈-잉글랜드 연합군이 천 명 이하의 손실을 입은 것에 비해, 카스티야군은 5천 가량의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카스티야군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인해 5,000명을 추가로 상실했다.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는 여세를 이어가 1385년 10월 카스티야에 속한 메리다를 공격했고, 발베르데 전투에서 카스티야군 2만 명을 격파하고 적장 페드로 무네스 데 고도이 이 산도발을 주살했다. 그 후 주앙 1세는 카스티야 국왕이 되기 위해 갈리시아에 상륙한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카스티야 왕국군이 존과 맞서느라 포르투갈 왕국에 원정군을 파견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 왕국의 간섭에서 벗어난 포르투갈 왕국은 주앙 1세가 창시한 아비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2.4. 아비스 왕조

2.4.1. 주앙 1세

카스티야 왕국을 물리치면서 포르투갈 왕위를 굳힌 주앙 1세는 카스티야를 향한 지속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1396년 카스티야 왕국이 어린 국왕 엔리케 3세의 등극 이래로 귀족들간의 전횡과 내전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바다호스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엔리케 3세는 귀족들을 제압하고 실권을 잡은 뒤 바다호스 요새에 구원군을 파견하는 한편 카스티야 함대에 포르투갈 해안을 공격하고 포르투갈 선박들을 습격하라고 명령했다. 결국 바다호스 포위를 중단하고 포르투갈로 귀환한 주앙 1세는 엔리케 3세가 어리고 병약하지만 절대로 만만한 군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그 결과 1402년 8월 15일 세고비야에서 10년간의 평화협약이 체결되었고, 1411년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포르투갈 국왕으로 인정받고 양국의 경계를 확정짓는 아일론 협약이 체결되었다.

주앙 1세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북아프리카로 눈길을 돌렸다. 1415년 7월 25일 아들 인판트 동 엔히크와 함께 19,000명 가량의 포르투갈, 잉글랜드, 갈리시아, 바스크 기사와 군인으로 구성된 병력과 59척의 갤리선, 33척의 전투선, 120척의 소형 선박을 이끌고 세우타 공략에 착수했다. 8월 21일 세우타에 상륙한 원정군은 포르투갈군이 쳐들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수비대를 손쉽게 제압하고 8월 22일 아침에 세우타 전역을 장악했다. 주앙 1세는 세우타에 세워진 모스크를 대성당으로 개조하고 아내 필리파의 고해사제인 아이마르 다우릴라크를 세우타의 첫번째 주교로 임명했다.

이후 주앙 1세는 3천 명의 장병에게 세우타 수비를 맡긴 뒤 본국으로 돌아가서 전 유럽에 자신의 승리를 널리 알렸다. 마린 왕조 칼리파 우스만 3세는 1418년과 1419년에 세우타 수복을 시도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세우타는 시간이 지나면서 포르투갈 사략선들이 살레에서 그라나다와 튀니스까지 무슬림 선박들을 습격하는 주요 기지로 자리잡았으며, 기독교측 함선들은 이와 반대로 지브롤터 해협에서의 항해를 보다 안전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아들 엔히크의 해상 탐험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카나리아 제도, 포르투 산투, 마데이라 제도, 아소르스 제도를 발견하고 그 일대에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이같은 확장 정책은 포르투갈의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안겼다. 백성들은 처음엔 승리를 거듭하는 왕에게 열광했지만,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부과된 막대한 세금에 허덕이자 차츰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적진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이나 다름없는 세우타를 유지하기 위해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상당한 재원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코르테스를 자주 개최해 귀족과 상인들을 압박하여 기부금을 받아냈고, 장남 두아르트에게 법률 집행과 재정 관리를 맡겼다.

당대 작가들은 주앙 1세를 권력욕이 강한 인물로 묘사하면서도 자애롭고 친절한 태도를 지닌 재치있는 사람이었다고 평했다. 특히 지식이 풍부했고 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지식과 문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후대의 포르투갈 역사가들에 의해 "저명한 세대"( Ínclita Geração)라고 불리는 그의 아들들에게 이어졌다. 장남 두아르트는 시인이자 작가였고,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는 당대 왕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학식을 갖췄다는 평을 받았다. 그리고 비제우 공작 인판트 동 엔히크는 해상 탐험가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주고 과학 기술에 과감히 투자했다. 딸 이자벨은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와 결혼한 뒤 포르투갈의 세련된 문화를 남편에게 소개했다.

2.4.2. 두아르트 1세

1433년 8월 14일, 주앙 1세는 역대 포르투갈 국왕들 중에서 가장 긴 48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리스본에서 사망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두아르트 1세는 1434년 4월 8일 산타렝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Lei Mental(정신법)>을 반포했다. 왕실 자산의 승계를 규정한 이 법에 따르면, 왕실에 속한 모든 토지와 재산은 장남에게만 증여할 수 있으며, 상속인 간의 공유는 금지되었다. 아울러 이 법이 시행되기 이전에 기부된 왕실 재산을 도로 왕실에 귀속시켰다. 다만 브라간사 가문의 재산만은 공유를 허락받았고, 왕 본인의 의지로 신하에게 일부 영지를 하사하는 것은 용인되었다. 그는 이 법을 통해 주앙 1세가 1383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상대로 봉기했을 때 지지자들을 확보하기 위해 모조리 기부해버린 왕실의 영지와 재산을 회수하고자 했다.

두아르트 1세는 5년이라는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코르테스를 5번 소집할 정도로 귀족과 성직자, 민중의 합의를 통해 국가 정책을 결정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주앙 1세부터 시작된 법률 정비 사업을 추진했으나 그의 대에 이뤄지지 못했고, 아들 아폰수 5세 치세 초기에 섭정을 맡은 페드루 왕자에 의해 완수되면서 포르투갈 왕국 최초의 성문법인 <아폰수 법률(Código Afonsino)>이 탄생했다. 아울러 아버지의 중앙 집중화 정책을 지속하여 귀족과 성직자들의 권력 남용을 방지했고, 해양 탐사 및 정복 정책도 이어갔다.

한편, 형제 엔히크는 두아르트 1세의 지시에 따라 라고스에서 함대를 조직한 뒤 라고스 출신의 탐험가 질 이아느스(Gil Eanes)에게 항해를 맡겼다. 질 이아느스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끝에 1434년 서사하라 북부 해안가에 위치한 보자도르 곶에 도착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그 곶의 해류는 무척 세고 괴물이 득실거려서 절대로 통과할 수 없다"는 속설이 돌았지만, 보자도르 곶을 통과하여 남쪽으로 몇 마일 더 항해한 뒤 본국으로 귀환하여 "비록 암초가 많고 짙은 안개가 자주 형성되어서 위험하기는 하지만 준비를 잘하면 통과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자극받은 탐험가들이 잇따라 아프리카 남쪽 해안으로의 여정에 도전하면서, 포르투갈 왕국의 본격적인 해상 진출이 이뤄졌다.

1437년, 엔히크와 페르난두 왕자는 마린 왕조의 지배 영역 한 가운데에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세우타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주변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두아르트 1세는 원정 성공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봤고 페드루와 주앙 왕자 역시 반대했지만, 엔히크와 페르난두가 강력하게 주장하자 그들의 뜻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정은 대실패로 끝났다. 탕헤르 공략에 나선 원정군은 요새를 공략하지 못하고 몇 달간 발이 묶여 있다가 마린 왕조군의 반격으로 궤멸되었고 페르난두는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잔여 병력을 수습한 엔히크는 군대가 방해받지 않고 본국으로 귀환하고 페르난두를 석방시키는 대가로 세우타를 마린 왕조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본국에 귀환한 엔히크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두아르트 1세는 1438년 초 레이리아에 코르테스를 소집하고 세우타를 마린 왕조에 돌려주는 문제를 논의했다. 페드루와 주앙은 조약을 이행하라고 촉구했지만, 정작 조약에 서명한 당사자인 엔히크는 주앙 1세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인 세우타를 넘겨줄 수 없다면서, 페르난두를 석방시킬 다른 방법을 찾자고 주장했다. 여론 역시 엔히크의 주장 쪽으로 쏠리자, 두아르트 1세는 어쩔 수 없이 조약을 파기하기로 했다. 그 후 페르난두는 끝내 석방되지 못한 채 페즈 요새에 갇혀 지내다 1443년에 사망했다.

2.4.3. 아폰수 5세

1438년 9월 9일, 두아르트 1세는 토마르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당시 6살이었던 아들 아폰수 5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시키고 섭정으로 레오노르 왕비를 선임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귀족들은 유언에 따르려 했지만, 리스본 시민들은 "아라곤 여자에게 포르투갈 통치를 맡길 수는 없으며, 두아르트 1세의 형제이자 당대의 왕자들 중에서 학식이 가장 뛰어나기로 유명한 페드루 왕자가 섭정해야 한다"며 봉기했다. 이후 양자간의 협상 끝에, 레오노르와 페드루 왕자가 공동으로 섭정을 맡고 권력을 공유하기로 했다. 레오노르는 아폰수를 돌보고 왕실 재정과 행정을 주관하기로 했으며, 페드루는 법률을 집행하고 군대를 통솔하기로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외국인 여자'로 간주된 레오노르의 입지는 갈수록 약화되었고, 대다수 왕족과 귀족들은 페드루를 따랐다. 오직 페드루의 형제로 페드루에게 경쟁의식을 강하게 품고 있던 아폰수만이 레오노르를 지지했다. 1439년, 레오노르는 페드루 세력의 강력한 압박에 굴복하여 아폰수 5세를 신트라 궁정에서 리스본으로 옮겨야 했고, 섭정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그녀는 아라곤 국왕이자 오빠인 알폰소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나폴리 왕국 정복에 사활을 걸고 있던 알폰소 5세는 포르투갈 왕국에 사절을 보내 항의 한 번 했을 뿐 그 이상의 조치를 하지 않았다. 결국 레오노르는 페드루에게 해코지 당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몇몇 측근과 함께 갓난아기 주아나와 함께 크라토로 피신했다가 다시 카스티야로 이동한 뒤 1445년에 사망했다.

레오노르를 축출하고 권력을 손아귀에 쥔 페드루 왕자는 국정을 잘 이끌었다. 그는 대귀족이 영지를 지나치게 늘리고 백성들을 수탈하는 것을 억제하고 왕권 강화에 몰두했으며, 주앙 1세와 두아르트 1세가 추진했지만 그들의 대에 이뤄지지 못했던 포르투갈 왕국의 법률 정비 사업을 이어받아 1444년경 포르투갈 왕국 최초의 성문법인 <아폰수 법률(Código Afonsino)>을 반포했다. 또한 동생 엔히크의 해상 탐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국내외 무역 활성화를 위한 정책 역시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페드루의 권세를 시기한 아폰수 왕자가 자신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페드루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포섭했다. 페드루는 그런 동생을 달래기 위해 1443년 브라간사 공작에 선임했지만, 아폰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형과 대립했다.

1446년, 아폰수 5세는 리스본 코르테스에 출석해 자신이 성년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친정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페드루 왕자는 왕의 조언자로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페드루는 자신의 입지를 보장하기 위해 1448년 5월 6일에 자신의 딸 이자벨을 아폰수 5세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해 9월 15일, 아폰수 5세는 페드루가 실시한 모든 칙령을 무효화한다고 선언했다. 페드루는 젊은 왕에게 자신의 충심을 알리기 위해 서신을 여러차례 보냈고 엔히크 왕자도 양자를 화해시키려 노력했지만, 아폰수 왕자가 이를 가로막고 페드루가 반역을 꾀하고 있으니 서둘러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폰수 5세는 아폰수 왕자의 뜻에 따라 페드루를 왕국의 반역자이자 적이라고 낙인찍었다.

페드루는 협상이 통하지 않자 "간신으로부터 왕과 왕국을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6천 병력을 이끌고 코임브라에서 출발해 리스본으로 향했지만, 1449년 5월 20일 알파로베이라 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토벌대에게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아폰수 5세는 페드루의 모든 영지와 재산을 몰수하고 페드루 편에 섰던 모든 이들의 재산을 압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다가 1450년 7월 딸 주아나가 태어난 후 페드루를 따랐던 이들 일부를 사면했으며, 1455년 7월 아들 주앙 2세가 태어난 뒤 아직 사면받지 못한 모든 페드루 지지자들을 사면했다.

그 후 아폰수 5세는 내정을 삼촌 아폰수에게 맡기고 자신은 무슬림과의 전쟁에 전념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오스만 제국에 함락되면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이 일은 유럽 전역에 큰 충격을 안겼고, 교황 갈리스토 3세는 1456년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는 이에 응해 군대를 소집한 뒤 지난날 탕헤르 원정에 착수했다가 마린 왕조군에 붙들린 뒤 페스 요새에 감금되었다가 1443년 옥사한 또다른 삼촌 페르난두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북아프리카 원정을 감행했다. 1458년 크사르 엘케비르 시가 25,000명의 병력과 220척의 함대를 동원한 아폰수 5세에게 함락되었다. 아폰수 5세가 수비대를 남기고 철수한 뒤, 마린 왕조 칼리파 아브드 알 하크가 1459년 7월에 도시 탈환 작전에 착수했지만 수비대에게 격퇴되었다. 1464년 카사블랑카도 포르투갈 왕국에 넘어갔으며, 1471년 아르질라와 탕헤르도 포르투갈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한편, 아폰수 5세는 탐험가 페르낭 고메스 다 미나(Fernão Gomes da Mina)에게 보조금을 지급해 그가 대서양을 탐험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의 엘미나에서 무역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1460년 엔히크 왕자가 사망한 뒤, 아폰수 5세는 투자에 비해 수익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탐험가들에게 더 이상 보조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1474년,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가 외동딸 후아나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후아나가 엔리케 4세의 총신인 벨트란 데 라 쿠에바와 두아르트 1세의 딸 주아나 왕비가 간통해서 태어났다는 소문을 퍼트리며, 후아나에게 벨트란의 딸이라는 의미인 '라 벨트라네하(la Beltraneja)'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였다. 그들은 후아나에게 등을 돌리고 엔리케 4세의 이복 동생인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자이자 이사벨의 남편인 페르난도를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 군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톨레도에서 무르시아까지 이르는 카스티야 남부 일대의 방대한 영지를 보유한 비에나 후작 디에고 로페스 파체코와 톨레도 대주교 알폰소 카리요 데 아쿠 등 일부 귀족과 성직자들은 후아나를 지지했다.

디에고 로페스 파체코와 알폰소 카리요 데 아쿠 등은 자신들의 세력이 이사벨의 지지자들보다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폰수 5세에게 조카 후아나가 카스티야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녀와 결혼하고 카스티야의 공동 국왕이 되라고 제안했다. 이 참에 카스티야 왕위를 자기 것으로 삼을 야심을 품은 아폰수 5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1,600명의 보병과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엑스트레마두라를 거쳐 팔렌시아에 도착해 후아나의 지지자들과 합세한 뒤 1475년 5월 25일 후아나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은 포르투갈에 이어 프랑스 왕국이 후아나를 지원하고 아라곤 왕국이 이사벨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국제전의 양상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1476년 3월 1일에 벌어진 토로 전투에서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이 후아나 지지세력과 포르투갈 왕국 동맹군을 격파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아폰수 5세는 1476년 6월 13일까지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갔지만, 전세를 뒤집을 가망이 없자 후아나를 데리고 포르투갈로 철수했다. 이후 3년간 포르투갈-카스티야 국경지대와 해상에서 간혈적인 전투가 이어졌는데, 국경지대에서는 양측이 승패를 주고받았지만 해상에서는 해전 경험이 많은 포르투갈 측이 대부분 승리했다.

1477년 11월, 아폰수 5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자신의 동의도 얻지 않고 카스티야 왕국과 일방적으로 종전 협약을 맺고 물러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이 소식에 깊은 환멸을 느끼고 11월 11일 왕위를 아들 주앙 2세에게 넘기고 자신은 토레스 베드라스에 있는 바라토호 수도원에 은거했다. 그러다 주앙 2세와 신하들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돌이켜 그해 11월 15일에 복위했다. 그 후 카스티야 왕국과 수 년간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479년 9월 4일 알카조바스 협약을 체결하면서 전쟁을 종식했다.

포르투갈 왕국은 알카조바스 협약에서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공동 국왕이 된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마데이라와 아소르스의 소유권, 와타스 왕조와 기니에 대한 독점적 무역권, 그리고 카나리아 제도를 제외한 대서양 섬들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5] 또한 후아나는 이사벨의 아들 후안이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혼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 중 하나를 6개월 안에 선택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후아나는 자신이 심한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고 즉시 산타 클라라 데 코임브라 수도원에 입회하여 그곳에서 수도서원을 하고 평생 수녀로 지냈다.

2.4.4. 주앙 2세

1481년 8월 28일, 아폰수 5세는 리스본에 창궐한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신트라 궁전으로 피신했다가 자신이 태어난 방에서 사망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주앙 2세는 즉위 직후 대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련의 조치를 내렸다. 이보다 앞서, 아폰수 5세는 아프리카 원정과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에 몰두하는 동안 브라간사 공작 아폰수 등 대귀족들에게 국정을 일임하고 수많은 특권을 하사했다. 이 때문에 브라간사 공작, 비제우 공작 등 대귀족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힘들었다. 그는 대귀족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며 그들을 숙청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2세는 왕이 자신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부부왕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포르투갈을 공격해서 주앙 2세를 타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주앙 2세를 타도할 음모를 꾸미던 이들 몇 명이 도중에 배신하고 주앙 2세에게 페르난두 2세가 카스티야 왕국에 보낸 서신을 보여줬다. 1483년, 주앙 2세는 페르난두 2세를 긴급 체포한 뒤 22일간 카펫이 깔린 방에서 21명의 판사, 귀족, 기사들로 구성된 약식 재판을 거행한 후 사형을 선고했다. 페르난두 2세는 판결이 내려진 이튿날인 6월 20일에 에보라 광장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되었다.

1484년, 주앙 2세의 왕비 레오노르의 형제이자 비제우 공작인 디에구는 왕이 세루발 해변으로 행차했을 때 등 뒤에서 단검으로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왕이 해변이 아닌 육지로 여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고, 기밀이 샐 것을 우려한 공모자 몇 명이 왕에게 밀고했다. 주앙 2세는 디에구를 궁전에 소환한 뒤 그를 단검으로 직접 찔러 죽였다. 그 후 비제우 공작의 어머니 베아트리스에게 2명의 사절을 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대로 알리게 했고, 디오구의 형제인 마누엘 1세에게도 서신을 보내 "그를 죽이고 싶었기 때문에 찔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 아폰수가 죽고 더 이상 합법적인 자녀가 없다면 마누엘이 국왕 직위를 상속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후 음모에 관련된 80명 이상의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거나 카스티야로 추방했는데, 그 중엔 에보라 주교인 가르시아 데 메네세스도 있었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사건을 정리한 뒤 귀족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하인의 하인이 아니라 주군의 주군이다."

이후 대귀족들은 주앙 2세를 두려워해 감히 도전하거나 음모를 꾸미지 못했다. 그리하여 강력한 왕권 확보에 성공한 그는 아버지가 중단했던 해양 탐사 사업을 재개했다. 기니 만에 대한 탐사와 무역을 집중적으로 추진했는데, 특히 이 지역의 층적층에 매장된 사금을 다룬 교역소를 건설하게 했다. 아울러 인도로 향하는 바닷길 탐색을 자기 대에 이루기로 마음먹고 여러 탐험가들을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그의 치세 동안 아래의 발견이 이뤄졌다.

한편, 제노바 공화국 출신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포르투갈 궁정에 방문해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한다면 아프리카 대륙 해안을 돌아서 가는 것보다 인도로 빨리 도착할 수 있다며 자신의 항해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주앙 2세는 단호히 거절했다. 이를 거절한 가장 유력한 이유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 둘레를 계산한 것이 이슬람을 통해 유럽에 다시 전래된 상황에서, 콜롬버스가 제시한 인도까지의 거리가 터무니 없이 짧았기에 이를 거절하였다고 알려졌다. 일부 학자들은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지만 스페인 왕국이 개입할 것을 우려해 비밀에 붙였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아메리카 대륙에 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다면 대서양 서쪽으로 항해하는 게 보다 빨리 인도로 갈 수 있다는 콜럼버스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을 간파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아프리카를 우회해 인도에 도달하는 항로 개척을 오랫동안 추진하여 이제 결실을 거둘 기미가 보이는데 이제와서 새 항로 탐색에 돈을 쓸 이유는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렇듯 해양 탐사에 열을 올리던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종종 스페인 측 탐험가들과 충돌했고, 급기야 해상 전투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이에 1494년 6월 6일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에 따라 스페인 서부의 토르데시야스 시에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당시 구대륙의 끝이라 여겨지던 카보베르데 섬과 신대륙의 시작이라 여겨지던 히스파니올라 섬 사이의 정가운데를 관통하는 경선 서경 43도 37분을 기준선으로 삼고, 새로 발견한 미개척지의 서쪽은 에스파냐가, 동쪽은 포르투갈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이렇듯 포르투갈 왕국은 주앙 2세의 치세에 해양 탐사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며 국력이 날로 신장되고 있었지만, 그는 후계자 문제에 시달려야 했다. 유일한 아들이었던 아폰수는 1491년 타구스 강을 따라 산책하던 중 낙마한 여파로 사망했다. 이후 사생아인 조르즈를 합법화하고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1493년 비제우 공작 마누엘 1세에게 왕궁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누엘은 자신을 죽이려는 게 아닐까 염려했지만, 주앙 2세는 그를 양자로 삼고 왕위 계승자로 확정지었다. 이후 1495년 10월 25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세간에는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포르투갈 귀족들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진위 여부는 불명확하다.

2.4.5. 마누엘 1세

주앙 2세 사후 왕위에 오른 마누엘 1세는 주앙 2세의 왕권 강화 정책을 이어갔다.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3차례 개최해 귀족, 성직자, 상인 계급으로부터 충성 서약을 새롭게 받아냈다. 또한 20년간 작성된 모든 헌장을 수집한 뒤 새롭게 정한 양식에 따라 체계화한 <Forais Novos(새로운 헌장)>을 반포하면서, 앞으로는 이 양식에 맞춰 헌장을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1504년부터 1522년까지 법률을 편집 및 개정한 <마누엘 조례>를 제정 및 반포했다. 이중 1514년판 조례에 등장하는 6개의 판화에서, 그는 오른손에 "DEO IN CELO TIBI AVTEM IN MVNDO("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땅에 계신 당신을 영원히 축복한다")라는 라틴어 문구가 적힌 리본이 달린 왕실 홀을 들고 있다. 이 판화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선택된 왕이라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왕권 행사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삽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공공 재무부를 개편하고 행정 구조를 체계적으로 조직했으며, 정국의 도시, 마을 및 주요 시설 관리를 담당한 위원회를 설치했고, 회계 및 식민지 관리에 필요한 행정 및 법률 집행에 관한 서류들 역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마누엘 1세는 주앙 1세 이래 역대 포르투갈 왕들이 추진한 해상 진출에도 힘썼다. 1498년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했고, 1500년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브라질 해안가에 처음 상륙했다. 1505년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가 인도 방면 초대 포르투갈 총독에 선임되었고,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제독이 인도양 무역로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해 페르시아만믈라카, 고아, 호르무즈 등 무역에 필요한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또한 모로코의 사피, 이자모르, 아가디르 등 항구 도시들을 추가로 공략했으며, 아울러 그의 치세에 중국, 페르시아와 성업 조약 및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은 인도양 무역을 독점했으며, 자연히 막대한 재원이 포르투갈에 쏟아져 들어왔다. 마누엘 1세는 이 막대한 재원을 산타 마리아 드 벨렝 수도원, 벨렝 탑 등 여러 건물을 짓는 데 사용했다. 그의 치세에 지어진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의 건축 양식은 훗날 마누엘 양식(Manueline)으로 일컬어진다. 또한 유럽 각지의 인재들을 대거 불러모아 과학, 예술, 철학 등을 마음껏 탐구하도록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 그 덕분에 다방면의 학문이 발전할 수 있었는데, 특히 항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항해술, 천문학, 수학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마누엘 1세는 새롭게 확보한 식민지에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하고 교회와 수도원을 지음으로써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역대 포르투갈 국왕들의 전례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박해를 피해 포르투갈로 달아난 유대인들을 보살펴주고 세금 수취 및 관리를 맡기기도 했다. 그러던 1496년, 마누엘 1세는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공동 국왕 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의 장녀인 이사벨과 결혼했다. 이때 그는 이교도 추방 정책에 동참하라는 공동 왕들의 압력에 직면했고, 두 국왕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 자기가 아라곤과 카스티야 국왕까지 겸임함으로써 이베리아 전역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그는 두 사람에게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전역에서 가톨릭 개종을 거부한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강제 추방되는 상황이 포르투갈에서도 1497년에 벌어졌다. 다만, 그는 인구 유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항구를 일정 기간 동안 폐쇄해 놓고 기독교로의 개종 기간을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이 설정한 것보다 훨씬 길게 잡았고, 이번에 개종한 자들이 20년간 종교 재판소의 조사를 면제받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 덕분에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인원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에 비해 매우 적었다. 그러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이 거짓으로 개종했을 거라고 여기고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1506년 4월, 기독교인들은 당시 극심했던 가뭄과 역병을 종식해달라고 기원하기 위해 상 도밍구스(성 도미니코) 수녀원을 찾아갔다. 그들은 미사에 참여했다가 제단 위에 설치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얼굴에 빛이 비추는 것을 목격했다. 수도자가 "하느님께서 계시를 내렸다"고 주장하자, 한 유대인이 "저건 단순히 빛이 반사된 것뿐이다"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군중이 "하느님의 계시를 부정한다"며 그를 잡아다 때려죽였다.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리스본 전역에 퍼졌고, 곧 "가뭄과 역병의 원인은 거짓으로 개종하고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는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이에 리스본 시민들은 1506년 4월 19일부터 4월 21일까지 사흘 동안 4,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당시 알코셰트에 있던 마누엘 1세는 이 소식을 듣자 즉각 군대를 파견해 폭동을 진압하고 폭동을 선동한 수도자들을 모조리 잡아다 처형했으며, 도미니코 수도회에 책임을 물어 8년 동안 문을 닫게 했다. 하지만 이 조치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는 포르투갈 각지에서 기승을 부렸고, 크고 작은 폭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되었다.

1498년 이사벨 왕비가 출산 도중 미겔을 낳다가 사망하고 미겔마저 1500년에 2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마누엘 1세는 이사벨의 여동생인 마리아를 새 왕비로 들임으로써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차기 국왕을 겸임하려는 계획을 이어갔다. 마리아는 1517년 사망하기 전에 8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 차남 주앙 3세와 6남 엔히크 1세가 훗날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었다. 마리아가 사망한 후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군주이자 카스티야 국왕 펠리페 1세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여왕 후아나의 장녀인 엘레오노르와 결혼하여 아들 카를루스와 마리아를 낳았다. 그러나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사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자 후아나의 장남인 카를 5세스페인 왕국의 '카를로스 1세'로 등극한 뒤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국왕 직위를 독점하면서, 마누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2.4.6. 주앙 3세

1521년 12월 리스본에서 흑사병이 창궐하자 히베이라 궁전으로 피신한 마누엘 1세는 그 해 12월 4일 심한 열병을 앓기 시작했고, 9일간 고통에 시달린 끝에 12월 13일에 5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주앙 3세의 치세에 포르투갈 왕국의 확장 정책은 절정에 이르렀다. 포르투갈 함선들은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으로 뻗어나갔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샬레, 디우, 뭄바이, 바사이, 마카오를 새로운 식민지로 확보했다. 또한 브라질의 식민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프란시스쿠 샤비에르, 안토니우 모타, 프란시스쿠 제이모토, 안토니우 페이소토 등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일본에 방문해 가톨릭 교리를 설파했고 1550년 나가사키에 포르투갈 상인들의 거점이 설치되었다. 여기에 여러 원정대가 아프리카 해안지대를 넘어 내륙 깊숙이 진출하면서 흑인들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았다.

그러나 150만의 인구를 가진 포르투갈이 이 광범위한 식민지들을 관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수많은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재원이 들어왔지만 이를 훨씬 능가하는 관리 비용이 소모되었으며, 무슬림과 현지인들의 반격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전쟁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 결과, 포르투갈 왕실은 막대한 빚을 짊어져야 했다. 여기에 본국 주민들이 식민지 각지에 대거 이주하면서, 인구 유출이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주앙 3세는 사피, 아자모르, 아르질라, 아구즈, 크사르 엘케비르 등 모코로의 여러 해안도시들을 포기하기로 했다. 다만 탕헤르, 카사블랑카, 세우타 만큼은 막대한 재정 소모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한편, 주앙 3세는 이웃의 강대한 국가인 스페인 왕국과 가급적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1525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군주 펠리페 1세와 스페인 여왕 후아나의 딸인 카탈리나와 결혼했으며, 자신의 여동생인 포르투갈의 이사벨을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와 결혼시켰으며, 딸 마리아 마누엘라를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결혼시켰다. 이렇듯 스페인 왕실과의 결혼을 잇따라 성사시킴으로써, 스페인과의 우호 관계는 굳건해졌다. 1524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일주 이후 스페인 측이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포르투갈의 영역으로 설정된 범위 내에 있는 말루쿠가 자국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한 때 갈등이 일어났지만, 1529년 포르투갈 측이 스페인에 350,000 골드 두카트를 지불하고 말루쿠 제도를 사들인다는 내용의 사라고사 조약이 체결되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

주앙 3세는 주앙 1세 이래 역대 포르투갈 국왕들처럼 문학과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질 비센트, 가르시아 드 헤센드, 사 드 미란다, 베르나르딤 히베이루, 페르낭 멘데스 핀투, 주앙 드 바호스 등 저명한 학자들이 그의 두터운 지원을 받으며 여러 저서를 집필했고, 수학자 페드루 누녜스와 의사 가르시아 드 오르타도 왕의 신임을 받으며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또한 주앙 3세는 파리 대학 등 여러 해외 대학에 포르투갈 학생들을 유학보내고 상당한 장학금을 수여했으며, 1542년 코임브라에 예술대학을 설립하고 안드레 데 고베이아, 조지 뷰캐넌, 니콜라 드 그루시, 기욤 게랑트 등 저명한 포르투갈 및 유럽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경건왕(o Piedoso)'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536년 종교재판소가 포르투갈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래 리스본, 코임브라, 에보라 등 포르투갈 각 도시에 종교재판소를 잇따라 설립해 거짓으로 개종한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심문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고아 등 해외 식민지에도 종교 재판소를 설립했다. 이로 인해 기독교로 개종했던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종교재판소에 대거 회부되어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고, 많은 유대인 가족이 포르투갈을 탈출해 브라질, 프랑스, 오스만 제국 등지로 망명했다. 이때 유대인들은 왕에게 "몸값"을 지불해야만 포르투갈을 떠날 수 있었기에, 재산을 버리고 가거나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팔고 짊어질 수 있는 짐만 가지고 떠나야 했다. 다만 1531년 리스본 지진으로 인해 1,0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1/3 가량의 건물이 파괴된 뒤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형벌을 야기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유대힌 학살이 벌어질 기미가 보이자 이를 막고 유대인을 비난하는 수도자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등 유대인들을 무조건 적대하지는 않았다.

주앙 3세는 카탈리나 왕비와의 사이에서 9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 유년기에 죽지 않은 주앙 마누엘 왕자가 1539년에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고 1552년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딸 후아나와 결혼했다. 그러나 주앙 마누엘은 아들 세바스티앙 1세가 태어나기 18일 전인 1554년 1월 2일에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1557년 6월 11일 주앙 3세가 히베이라 궁전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을 때 자식들이 모두 그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그의 손자인 세바스티앙 1세가 3살의 나이에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2.4.7. 세바스티앙 1세

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세바스티앙 1세가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할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가 5년간 섭정을 맡았으며, 이후에는 에보라 추기경 엔히크(엔히크 1세)가 섭정을 맡았다. 섭정단은 세바스티앙이 성년이 될 때까지 왕국을 방어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결의하고, 확장 정책을 중단하고 함대를 건조하고 요새를 건설하는 등 국경 방비에 많은 투자가 이뤄졌다. 무슬림들은 브라질과 인도로 항해하는 포르투갈 선박들을 잇따라 습격했고, 1562년 마자강을 공격했지만 포르투갈군에 격퇴되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세바스티앙은 밝고 활기찬 소년이었으며, 키가 크고 날씬하고 금발이었다고 한다. 그는 예수회 소속 성직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갖췄으며, 허리띠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 사본을 항상 차고 다녔고, 어린 왕이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도록 감독하는 테아티노회 수도자 2명과 항상 동행했다고 전해진다. 1568년 11살의 나이에 코르테스에서 친정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세바스티앙은 그해 코임브라 대학에서 의학 또는 약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불했으며,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공적을 세운 브라질의 원주민 우두머리인 아라리보이아에게 구아나바라 만 인근의 영지를 수여했다. 1569년 두아르트 누녜스 데 레앙에게 왕국의 모든 법률과 법적 문서를 종합하여 <세바스티안의 법전>으로 편집하도록 명령했다.

1569년 리스본에 전염병이 창궐해 많은 이가 사망했다. 세바스티앙은 의사들이 전염병과 싸우는 것을 돕기 위해 세비야의 의사들을 리스본으로 보냈으며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2개의 병원을 리스본에 세우게 했다. 또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기 위해 '산타 마르타의 쉼터(Recolhimento de Santa Marta)'와 '어린이 쉼터(Recolhimento dos Meninos)'를 설립하고 아기들을 돌보기 위해 유모를 제공했다. 1570년 브라질에 정착한 포르투갈인들에게 그곳의 원주민들 역시 자신의 백성이니 노예로 삼지 말라고 명령하고 포로로 잡혀 있는 원주민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이 무렵,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세바스티앙을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추진했지만, 세바스티앙은 그녀가 장 칼뱅을 추종하는 위그노들을 제대로 탄압하지 않는다고 여겨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중에 교황 특사들이 "이단인 나바라 왕자 헨리케와 마르그리트의 결혼을 막아야 한다"고 설득하자, 그는 이를 받아들여 마르그리트와 결혼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미 헨리케 왕자와 마르그리트를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은 카트린 왕비는 이를 거절하고 1572년 마르그리트와 헨리케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1573년 아폰수 1세무라비트 왕조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오리크 전투를 기리기 위해 카스트루베르드(Castro Verde)에 왕립 대성당을 건설하게 했으며, 1576년 공동 곡물창고(Celeiros Comuns)를 개장하게 해 수확량이 저조해서 궁핍해진 농민들에게 종자와 상품을 빌려주게 하고 그들이 적자에서 회복되면 농산물로 빚을 갚게 했다. 1577년에는 변호사, 서기관 및 기타 법원 공무원이 고의로 판결 집행을 미루는 것에 벌금을 부과하고 행정 처리를 보다 신속하게 하기 위해 <세바스티앙의 조례>를 반포했다.

이렇듯 어린 나이에도 정력적으로 나라를 이끌던 세바스티앙은 주앙 3세가 포기한 모로코의 여러 거점 도시들을 탈환하고 사드 왕조를 무너뜨려 모로코 전역에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1576년, 사드 왕조의 전 술탄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2세가 포르투갈로 망명해 술탄 직위를 찬탈한 아부 마르완 아브드 알 말리크 1세를 타도하고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세바스티앙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1576년 성탄절에 과달루페에서 숙부 펠리페 2세와 대면해 "당신과 함께 이교도를 물리치고 아프리카에 가톨릭을 전파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펠리페 2세는 자신이 직접 가는 것은 거절했지만, 일부 스페인군을 지원해주겠다고 답했다.

1578년 6월 24일, 세바스티앙은 스페인에서 온 2,000명의 병사와 독일과 플랑드르에서 온 3,000명의 용병, 600명의 이탈리아 병사가 가세한 23,000명의 병력을 소집한 뒤 500척의 함대에 탑승시킨 후 리스본에서 출항했다. 이후 탕헤르에 상륙한 뒤 아르질라를 거쳐 페스를 향해 천천히 남하했다. 그러다가 크사르 엘케비르 인근의 와디 알 마카진에서 아부 마르완 아브드 알 말리크 1세와 동생 아흐마드 알 만수르가 이끄는 사드 왕조군 5만 명과 맞닥뜨렸다.

이후 벌어진 크사르 엘케비르(와디 알 마카진) 전투는 포르투갈 왕국의 재앙이었다. 8천 가량의 포르투갈군이 전사하고 15,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으며,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2세는 도주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포르투갈 귀족들은 왕에게 어서 피하거나 항복하여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러자 그는 단호히 답했다.
"전우여, 진정한 자유는 삶을 버림으로써 이룰 수 있노라!"

그리고는 적진을 향해 말을 몰아 뛰어들었고, 이후에는 종적이 묘연해졌다. 훗날 포르투갈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는 모로코에서 그의 유해를 인도받고 리스본의 벨렝에 있는 제로니무스(히에로니무스) 수도원에 안장했다고 주장했지만, 많은 이들은 그 시신이 세바스티앙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세바스티앙이 후사를 낳지 못한 채 사라지자, 마누엘 1세의 아들이자 주앙 3세의 동생이며 평생 성직자로 살아갔던 엔히크 1세가 포르투갈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2.4.8. 아비스 왕조의 몰락

세바스티앙 사망 시점에서의 아비스 왕조.

엔히크 1세는 성직자 직을 사임하고 대관식을 거행한 뒤 아비스 왕조를 지속하기 위해 신부를 맞이하기로 하고 교황청에 성직 서약을 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같은 가문 출신이자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겸임하길 원했기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엔히크는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사로잡힌 15,000명의 병사들과 장군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몸값을 협상했으며, 세바스티앙 1세가 실종된 후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후계자를 지명하라는 요구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왕위 계승권자로 인정해달라는 안토니우의 요구를 사생아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1579년 11월 23일 안토니우의 포르투갈 국적을 박탈하고 재산을 압수하며 타국으로 추방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안토니우는 당국의 추적을 피해 숨어지내면서 추종자들을 모집했다.

1580년 1월 30일, 엔히크 1세는 알메이링 궁전에서 6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리스본 대주교 주제 드 알마르다, 주앙 테요, 프란시스쿠 드 사 드 메네세스, 디에구 로페스 드 소자, 주앙 드 마스케르나스 등 5명의 대신들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를 세우게 했다. 안토니우는 엔히크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놓고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제4대 기마랑이스 공작 두아르트의 딸이자 마누엘 1세의 손녀이며, 포르투갈의 강력한 귀족인 브라간사 공작 주앙 1세의 아내인 카탈리나도 포르투갈 왕위에 도전했다.

하지만 섭정위원회는 두 사람 모두 왕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안토니우는 사생아이니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고, 포르투갈에서 여왕이 인정된 사례가 없으니[6] 카탈리나 역시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자신의 전 아내 마리아 마누엘라가 주앙 3세의 딸이며 자신 역시 포르투갈 왕실과 혈연 관계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막대한 뇌물을 보내자, 섭정위원회는 펠리페 2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옹립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안토니우는 이에 맞서 백성들에게 주앙 1세가 1383년 ~ 1385년 카스티야 왕국의 침략으로부터 포르투갈을 구한 일을 상기하라고 호소했다. 주앙 1세 역시 사생아로 간주되었지만 카스티야의 압제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났고 그의 후예들이 200여 년간 나라를 이끌었으니, 자신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왕국이 자국을 병합하기를 원하지 않은 민중은 이에 호응했고, 그는 1580년 7월 24일 산타렝에서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했다. 여기에 리스본과 세투발 등지에서도 그의 추종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한 달 후인 1580년 8월 25일, 안토니우는 펠리페 2세가 급파한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를 상대로 알칸타라 전투를 치렀다. 알바 공작이 이끌고 온 병력은 보병 18,000명, 기병 2,000명에 달한데 비해, 안토니우가 이끄는 병력은 보병 8,000명에 기병 1,800명에 불과했고 훈련도 역시 지극히 열세했다. 그는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알칸타라 강의 왼쪽 둑에 자리를 잡고 그 옆의 요새에 의지한 채 수비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강을 도하하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맞서는 사이, 스페인군 좌익 부대가 비밀리에 다른 곳에서 강을 도하한 뒤 요새를 빠르게 공략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추종자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안토니우는 비아나 데 카스텔로로 피신했다.

얼마 후 산초 데 아빌라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비아나 데 카스텔로에 이르자, 그는 다시 그곳을 탈출한 뒤 왕국 각지를 방랑하다가 1581년 6월 잉글랜드 왕국에 망명하여 엘리자베스 1세를 알현해 군사적 지원을 구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1582년 아조레스 제도의 테르세이라 섬에 들어간 뒤 그곳에서 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면서 펠리페 2세의 해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아그라 요새 방어를 강화하고 동전을 주조했으며, 프랑스 왕비이자 실권자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1583년 레판토 해전의 승리를 이끈 알바로 데 바잔 제독이 이끄는 스페인군과의 항쟁에서 패배를 면치 못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스페인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간의 전쟁이 벌어지자, 1589년 다시 잉글랜드로 이동해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원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번에는 그를 돕기로 하고, 브라질과 아조레스를 잉글랜드에 넘기는 대가로 안토니우를 복위시킨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1589년 6월 3일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이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와 함께 리스본으로 항해해 리스본 성벽 밖의 모든 건물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잉글랜드 함대는 역병에 시달리다가 본국으로 돌아갔고, 안토니우는 배에서 내린 뒤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리스본을 공략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자 스페인군의 추격을 피해 프랑스로 다시 피신했다. 그는 이후에도 포르투갈 왕위를 쟁취하려 시도했으나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1595년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아비스 왕조는 막을 내렸고, 포르투갈은 스페인 왕국과의 동군연합인 이베리아 연합에 귀속되었다.

2.5. 이베리아 연합

1580년 안토니우를 몰아내고 포르투갈의 국왕을 겸임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약속대로 포르투갈 귀족들에게 포르투갈의 행정을 맡기고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다만 국방, 외교 등 중요한 문제는 마드리드에서 판단한 뒤 포르투갈에 통보하기로 했다. 이후 스페인 당국은 포르투갈을 완전히 흡수하기 위해 포르투갈 대귀족들을 잘 대접하면서 그들을 스페인 왕실 및 명문 귀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게 해 스페인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브라간사 6대 공작 주앙 1세는 펠리페 2세로부터 황금 양털 목걸이를 수여받고 영지 내에 치안판사를 임의로 선임하고 여행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등 갖가지 특혜를 받았으며, 아들들 역시 여러 요직과 특권을 부여받고 스페인의 여성 귀족들과 결혼했다.

포르투갈 대귀족들은 펠리페 2세 시절엔 무제한적인 자치를 향유하며 스페인의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삼아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등극한 펠리페 3세펠리페 4세가 포르투갈 귀족들의 특권을 하나둘씩 회수하며 스페인 당국의 통제하에 두려 하자, 귀족들은 차츰 불만을 품었다. 특히 펠리페 4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올리바레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이 카스티야 뿐만 아니라 아라곤,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스페인이 다스리는 다른 영토에서도 직접세를 거두고 스페인 법률을 그대로 적용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이러한 불만은 고조되었다.

여기에 1609년부터 재개된 네덜란드 독립 전쟁으로 인해 포르투갈 상선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해군에 나포되고 포르투갈이 식민지배하고 있던 브라질, 앙골라, 상투메 등지가 공격당하는데도 스페인 당국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자, 식민지 경영을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던 상인 계급 역시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이어 30년 전쟁까지 뛰어든 스페인이 모자라는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포르투갈 장정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자, 스페인을 위해 희생당하고 싶지 않은 민중들의 독립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졌다.

1634년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7]가 포르투갈의 여성 부왕으로 부임하고 포르투갈 출신이며 올리베리아 백작의 시종인 미겔 드 바스콘셀루스가 국무 장관으로 부임한뒤 올리베리아 백작의 지시에 따라 포르투갈 교회 자산을 조사한 뒤 일부를 몰수하기 시작하자, 스페인의 지배에 별다른 불만이 없던 성직자들까지 반발했다. 특히 오래 전부터 압스부르고 왕조와 마찰을 벌였던 예수회 수도사들은 민중을 선동해 스페인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켰다.

1637년 8월, 경제 위기와 가뭄으로 곤경에 처한 포르투갈 민중들은 포도주와 육류에 대한 새로운 세금이 부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에보라에서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순식간에 남부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예수회 수도사들은 반란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포르투갈 대귀족들 역시 자기 영지를 지키는 데 급급할 뿐 반란 진압에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이에 펠리페 4세는 토벌대를 파견해 폭동을 진압한 뒤 1638년 주앙을 비롯한 대다수 귀족들을 마드리드로 소환해 그들의 수동성을 질타했다. 이후 포르투갈의 통치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코르테스가 마드리드에서 소집되었다. 그 결과 포르투갈 평의회는 미겔 드 바스콘셀루스 등 올리베리아 백작에게 충실한 포르투갈 비서들이 지배하는 리스본과 마드리드의 2개 위원회로 대체되었고, 카스티야인들이 포르투갈 정계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스페인 당국의 간섭이 갈수록 강화되면서 자치권을 온전히 누리기 어려워지고, 영국과 네덜란드의 연이은 습격으로 인해 식민지 경영이 어려워지고, 민심이 갈수록 흉흉해져 자칫했다간 스페인의 앞잡이로 간주되어 처단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감돌자, 포르투갈 대귀족들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제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을 포르투갈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2.6. 브라간사 왕조

2.6.1. 주앙 4세

제8대 브라간사 공작 주앙은 스페인의 중용을 받는 메디나 사도니아 가문의 여식인 루이자 데 구스만과 결혼하고 스페인의 포르투갈 통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동생 두아르트를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투입해 스페인군을 돕게 할 정도로 명백한 친 스페인 인사였다. 그런 만큼 스페인을 상대로 반기를 들어 포르투갈 국왕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왕이 되어달라는 귀족들의 요청을 번번이 거부했다. 그러나 대귀족들은 포르투갈의 전 왕조인 아비스 왕조와 깊은 혈연 관계가 있는[8] 브라간사 가문만이 포르투갈 국왕이 될 수 있다며 계속 설득했다. 일설에 따르면, 주앙이 여전히 고민하고 있을 때 아내 루이자가 이렇게 말하며 왕이 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평생 동안 공작부인으로 살다가 죽느니 하루 동안 왕비가 되고 싶습니다."

루이자가 정말로 이런 발언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녀와 그녀의 가문이 주앙 4세의 포르투갈 국왕 등극에 적극적으로 지지한 것은 분명하다. 스페인 당국이 그를 회유하기 위해 짝지어준 아내마저 이렇게 나오자, 주앙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비밀리에 추종자들을 리스본의 브라간사 공작 궁전에 불러들인 뒤 봉기를 일으킬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1640년, 포르투갈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군 상당수가 카탈루냐의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 이리하여 스페인의 포르투갈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자, 주앙은 거사를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640년 12월 1일, 포르투갈 독립 전쟁의 시작으로써 미겔 드 알메이다, 조르즈 드 멜루, 안톤 드 아르마다, 주앙 핀투 브룩 등이 이끄는 사병들이 잘 무장한 채 히베이라 궁전으로 쳐들어가서 포르투갈 국무장관 미겔 드 바스콘셀루스를 체포해 그 자리에서 살해한 뒤 히베리아 궁 창밖으로 집어던졌다. 이후 포르투갈의 여성 부왕으로 군림하던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를 체포하여 별채에 감금했고, 리스본에 주둔하고 있던 스페인군을 모조리 무장해제시켰다. 당시 빌라 비소자 궁전에서 거병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주앙은 12월 3일에 거사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리스본으로 향하면서 전국에 거사를 알리는 전령을 파견했다.

파일:주앙 4세의 즉위식.jpg

1640년 12월 7일, 주앙은 리스본에 도착한 뒤 외국에 포르투갈 왕국이 복원되었음을 알리는 사절들과 국경과 항구를 수호할 장군들을 잇따라 임명하고 군대를 모집했다. 이후 12월 15일에 리스본의 파코 드 히베이라 궁전 옆의 대형 극장에서 수많은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로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거사를 성사시킨 동지들을 요직에 선임하고 귀족, 성직자 및 상인들의 전통적 권리, 자유 및 특권을 보장하겠으며, 포르투갈의 주권을 사수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주앙은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를 추방하고 군사를 이끌어본 경험이 있는 10명의 귀족들로 구성된 전쟁 위원회를 설립해 스페인의 침공에 대비하게 했다.

스페인 정부는 주앙이 반란을 일으킨 뒤 스스로 포르투갈 국왕을 칭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펠리페 4세는 주앙 4세와 그를 추대한 일당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에게 주앙의 동생이며 네덜란드 전선에 있는 두아르트를 당장 체포해달라고 요청했다. 두아르트는 형이 거사를 단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포르투갈에 돌아가려 했다가 피사우 요새에서 체포된 뒤 오스트리아 남부의 그라츠로 이송되었다. 주앙은 동생의 석방을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두아르트는 밀라노로 이송된 뒤 스포르시스코 성에 갇혀 지내다가 1649년 9월 3일에 옥사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 30년 전쟁, 카탈루냐의 반란 진압을 위해 사방에 군대를 파견했던 터라 토벌군을 조기에 파견하지 못했다. 단지 7,800명 가량의 병력만 국경지대에 배치하고 반란군이 스페인 영내로 침입하는 것을 저지하기만 했다. 1641년 7월 리스본에서 주앙 4세를 암살하고 마르게리타를 복위시키려는 음모가 친 스페인 성향의 귀족, 성직자들에 의해 기획되었지만, 그해 8월 29일에 음모자 몇명이 주앙 4세에게 밀고하면서 들통났다. 주앙 4세는 음모를 꾸민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고, 음모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들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으로 간주하고 숙청했다.

주앙은 스페인이 포르투갈에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하는 틈을 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 네덜란드에 접근했다.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1641년 6월 1일 파리에서 포르투갈 사절과 협의한 끝에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영토와 함대를 공격하는 대가로 그들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협약을 파리에서 체결했다. 여기에 네덜란드도 1641년 6월 앞으로는 포르투갈의 영토를 공격하지 않고 무역을 재개하며, 스페인에 대항하는 포르투갈을 지원하겠다는 내용의 헤이그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식민지에 대한 네덜란드의 공격은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한편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우호국인 잉글랜드는 당시 잉글랜드 내전에 휘말렸지만, 찰스 1세는 1642년 1월 말에 포르투갈과 휴전 협약을 맺고 그들이 잉글랜드 상선을 고용하여 보급품을 확보하는 것을 용인했다.

1642년, 포르투갈군은 시에라 데 가타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스페인군이 반격에 나서 국경 너머의 포르투갈 마을 몇 개를 약탈했다. 1643~1644년에 포르투갈인들이 카세레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바다호스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으며, 갈리시아를 습격해 살바티에라 데 미뇨 요새를 점령했다. 국경을 수비해야 할 스페인군은 재정난에 시달리는 정부로부터 별다른 봉급을 받지 못해 기강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져 적을 막으려 하기는 커녕 국경 지대의 백성들을 수탈하기만 했다. 이에 스페인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자경대를 결성해 포르투갈군에 맞서 싸웠다.

1644년 나폴리에서 포르투갈 전선으로 파견된 토레쿠사 후작 카를로 안드레아 카라치올로는 새로 모집한 용병대에 기존 병력을 규합하여 6,000~7,000명의 보병과 2,100~2,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스페인 바다호스 지방의 몬티주로 쳐들어온 포르투갈 지휘관 마티아스 드 알부케르크의 7,000 포르투갈군과 맞붙었다. 처음에는 스페인 기병대가 포르투갈 측면을 성공적으로 요격하면서 포르투갈군이 밀리는 듯했지만, 마티아스는 군대를 성공적으로 수습한 뒤 승리감에 빠져 방심하고 있는 스페인군에게 역습을 가해 강 건너편으로 패주시켰다. 이날 포르투갈군은 9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에 스페인군은 3,000명의 사상자를 입었다. 하지만 마티아스는 스페인 정부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것을 우려해 본국으로 철수했다.

스페인 당국은 마티아스의 예상대로 패전에 격노해 군대를 대대적으로 집결해 포르투갈 침공을 준비했다. 1644년 11월 토레쿠사 후작은 보병 12,000명, 기병 2,600명, 포병 20문, 박격포 2문을 이끌고 바다호스에서 국경을 넘어 과디아나 강을 건너 캄푸마이오르로 진격했다. 그들은 엘바스에 도착한 뒤 8일 동안 포위 공격을 감행했지만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으로 큰 손실만 입고 본국으로 퇴각했다. 1645년엔 포르투갈군이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살바테하두이스트레무(Salvaterra do Extremo)를 공략하려는 스페인군의 시도 역시 실패했다. 1648년 포르투갈인들이 스페인군의 만연한 기강 해이를 이용해 엑스트레마두라를 잇따라 공격해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고, 스페인 자경대가 이에 맞서 포르투갈 영내로 쳐들어가 잔학행위를 벌였다. 포르투갈군은 1649년과 1650년에 재차 스페인 영내를 습격해 스페인군과의 접전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다.

한편, 주앙 4세는 포르투갈 식민지에 대한 네덜란드의 침략 행위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는 네덜란드와 손잡고 스페인을 협공하기를 희망했기에 네덜란드와 휴전 협약을 맺고 가급적 우호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령 브라질과 앙골라 상당수를 강점하는 등 적대행위를 이어갔다. 게다가 주앙 페르난데스 비에이라 등 현지에서 식민지를 다스리던 포르투갈 유지들은 주앙 4세가 그동안 네덜란드가 빼앗아간 요새, 노예 등을 반환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해 자체적으로 군대를 일으켜 네덜란드 총독부를 무너뜨리고 네덜란드군에 맞서 싸웠다. 주앙은 한동안 반란을 은밀히 지원하면서도 네덜란드 정부가 이 사실을 눈치채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30년 전쟁이 종식되었다. 주앙 4세는 사절을 회담장에 보내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받으려 했지만, 스페인의 거센 반발과 포르투갈이 전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여긴 프랑스와 네덜란드 측의 무관심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또한 주앙은 네덜란드의 지원을 얻는 대가로 배상금을 지불하고 네덜란드가 상실한 네덜란드령 브라질과 앙골라 영토를 돌려준다는 내용의 헤이그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주앙 페르난데스 비에이라는 헤이그 조약을 무시하고 네덜란드와의 전쟁을 이어갔다.

주앙은 식민지 개척자들이 정부의 통제에 따라주지 않아서 생긴 문제라고 변명하며 브라질을 네덜란드에 판매할 뜻을 내비쳤지만, 네덜란드는 이를 묵살하고 포르투갈 대사를 추방했다. 이에 주앙은 프랑스 당국에 포르투갈 본토를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장 바티스트의 섭정에 맡기고 자신은 브라질과 아조레스 제도에서 왕으로 군림하며, 오를레앙 공작과 자신의 딸간의 결혼을 거행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쥘 마자랭은 오를레앙 공작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거부했다.

이렇듯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기 힘들어지고 영국은 내전으로 인해 포르투갈을 도울 여력이 없자, 주앙 4세는 스페인의 예상되는 대대적인 공세로부터 나라를 지킬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테르세이라 섬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행히도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스페인의 관심이 피레네 산맥 쪽으로 쏠린 덕분에 당분간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1649년 2월 19일 과라라페스 전투에서 주앙 페르난드스 비에이라가 이끄는 브라질 현지 포르투갈군이 네덜란드군을 격파하고 브라질을 완전히 탈환했다.

1649년, 예수회 수도사이자 외교관인 안토니우 비에이라가 네덜란드의 서인도 회사를 본뜬 브라질 무역 종합 회사(Companhia Geral do Comércio do Brasil)를 설립하여 상인들의 무역 거래를 통제하고 네덜란드의 지속적인 침략으로부터 식민지를 지켜내자고 주장했다. 그동안 정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무역 활동을 수행하던 상인과 식민지 포르투갈인들은 반발했고 성무성에서도 반대 입장을 밝혔지만, 주앙 4세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회사 설립을 명령했다. 이후 1649년 10월 14일 회사에 소속된 첫번째 연대가 리스본을 출항해 리우데자네이루에 상륙한 후 브라질의 경비와 치안을 담당했으며, 회사에 소속된 36척의 함대가 해상 무역로 경비를 담당했다.

1654년, 주앙 4세는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잉글랜드 정부와 접촉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은 스튜어트 왕실을 일부 수용한 포르투갈에게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했지만, 포르투갈 역시 네덜란드를 적대하는 것을 보고 그들과 연합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포르투갈 역시 네덜란드 함대에 대적할 거대 함선을 제작하려면 영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 결과 양자는 상호 방위 및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이 소식을 접한 네덜란드는 적도선 이북을 항해하는 모든 포르투갈 함선을 격침시키겠다는 분노에 찬 서한을 발송했고, 포르투갈 내부에서는 언젠가 대대적인 네덜란드의 침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에겐 다행히도,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와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에도 발트해에서 스웨덴과의 해상 분쟁에 신경쓰느라 수년간 포르투갈에 큰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주앙 4세는 당초 왕위에 오른 뒤 장남 테오도시우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가 1653년 19세의 나이에 요절해버리자,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3남 아폰수 6세를 왕위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아폰수는 정신병에 걸려 있었고, 그는 아들과 왕국의 미래를 근심하다가 1656년 11월 6일 통풍 및 결석병에 시달리다 히베이라 궁전에서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6.2. 아폰수 6세

주앙 4세 사후 왕위에 오른 아폰수 6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어머니 루이자 구스만의 섭정을 받았다. 루이자는 자신을 보좌해 줄 이로 오데미라 백작 프란시스쿠 드 파루를 선임했으며, 주앙 4세를 따랐던 관료들의 직위를 유지시켰다. 그러나 내각에 참여한 이들 중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 드 멜루와 프란시스쿠 드 파루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면서 궁정 음모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아폰수는 통치자로서 수행해야 하는 모든 정무를 어머니와 대신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왕궁 창문 너머에서 낮은 신분의 소년들이 게임을 하는 것을 지켜봤다. 아이들이 간혹 감정이 격해져 싸움박질을 벌이는 일이 종종 벌어졌는데, 그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룹을 응원하며 손뼉을 쳤다. 그러던 어느 날, 여성 장신구를 판매하던 제노바 상인 안토니오 콘티가 왕이 응원하는 그룹에게 박수를 보냈다. 왕이 이에 호기심을 품고 접근하자, 그는 장신구를 왕에게 제공하는 동시에 흑인, 무어인 등 노예 소년들을 싼값에 넘겼다. 궁궐 한 구석에서 외롭게 지내던 아폰수는 이 소년들을 친구로 사귀면서 안토니오 콘티에게 깊은 호감을 품었다.

1660년 성년의 나이가 되면서 자신만의 궁정을 얻게 된 아폰수는 안토니오 콘티를 궁궐 내로 들여서 왕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방에 투숙시켰다. 이후 일개 상인인 콘티를 귀족으로 승격시켰고, 그리스도 기사단의 일원으로 삼았으며 수입이 1,000 크루자두에 달하는 예배당을 넘겨주었다. 일설에 따르면, 아폰수는 콘티가 제공하는 여성용 장신구 및 의복을 입고 밤에 친구들과 함께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고 한다. 어머니 루이자와 프란시스쿠 드 파루 등은 그런 아폰수에게 콘티와 노예 소년들을 내보내라고 권고했다. 아폰수가 끝까지 거부하자, 루이자와 프란시스쿠는 콘티와 소년들을 강제로 추방시켰다.

아폰수는 친구들을 쫓아내고 연락하는 것도 막아버린 어머니와 대신들을 몹시 원망했다. 그런 왕에게 루이자 왕비의 시녀였던 필리파 드 빌례나(Filipa de VIlhena)[9]의 아들 제로니무 드 아타이드와 루이스 드 바스콘셀루스 이 소자가 접근했다. 그들은 곧 왕의 또다른 '친구'가 되었고 눈부신 출세가도를 밟았다. 제로니무는 1569년 알렌테주 총독에 선임되었고 1662년 왕립 해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었으며, 루이스는 포르투갈 총독에 선임되었다.

이렇듯 왕이 국정에 손을 떼고 있는 동안, 루이자와 대신들은 스페인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을 수호하고자 노력했다. 1657년, 카탈루냐 반란을 종식시킨 스페인 정부는 리스본을 향한 대대적인 공세를 벌여 전쟁을 끝내기로 작정하고 병력을 모집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이에 맞서 선제 공격을 하기로 하고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기습 공격했으나 수비대의 저항으로 패퇴했고, 1658년에 다시 바다호스를 공략하려 했으나 또다시 격퇴되었다. 1658년 말 스페인 장성 루이스 데 하로가 엘바스를 포위해 3개월간 공성전을 벌였으나 페스트에 시달리다가 1659년 1월 14일 안토니우 루이스 드 메네세스가 이끄는 포르투갈 구원군에 의해 참패하여 13,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했다.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간의 전쟁을 종식하는 피레네 협정이 체결되었다. 포르투갈 정부는 이 회담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인정하고 전쟁을 종식할 것을 제안했으나 스페인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이후 스페인이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베테랑 병사들을 포르투갈 국경에 집중 배치해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자, 포르투갈 정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루이 14세는 피레네 협약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포르투갈을 돕기로 하고, 독일 출신의 프랑스 장교 프란치스코 아르만도 드 쇤베르크의 직위를 헤제시키고 포르투갈군 군사고문으로 파견했다. 여기에 1661년 찰스 2세브라간사의 카타리나의 결혼이 성사되었고, 잉글랜드에서 2,000명 이상의 병력이 포르투갈에 파견되었다.

한편, 네덜란드와의 갈등은 아폰수 6세 치세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여전히 앙골라와 브라질에서 현지 포르투갈인들과 교전했고, 포르투갈 상선을 지속적으로 습격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독립 전쟁, 영국-네덜란드 전쟁, 스웨덴과의 발트해 분쟁을 연이어 치르면서 지칠대로 지친 네덜란드 민중은 평화를 갈망했고, 더 이상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네덜란드 정부는 포르투갈과 평화 협정을 맺기로 했다. 무엇보다 계속된 전쟁으로 네덜란드의 국력도 한계에 달하여 그 동안 포르투갈을 밀어붙이던 네덜란드가 이 시점에 도달하면 오히려 밀리는 추세였던 점도 한몫했다. 그 결과 1661년 8월 6일, 네덜란드는 세투발의 소금 무역을 재개하며 네덜란드령 브라질을 포르투갈에 매각하고 포르투갈은 16년간 네덜란드에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내용의 헤이그 조약이 체결되었다. 헤이그 조약 이후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에 대한 모든 적대 행위를 전면 중단했다.

1661년, 펠리페 4세사생아인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아홍시스(Arronches)를 공략하여 엘바스에 주둔한 포르투갈군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이에 포르투갈군은 군대를 국경 부근에서 대거 철수시켜 이스트레모스에 집결시켰다. 1662년, 스페인은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에게 대군을 맡겨 포르투갈을 대대적으로 침공할 준비에 착수했다. 후안은 군대를 3부대로 나눠 각기 다른 방향에서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보병 16,000명과 기병 6,000명으로 이뤄진 군대를 이끌고 진군을 개시해 1662년 6월 주로멘하를 공략했다.

1662년 6월, 아폰수 6세는 루이자 왕비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별궁에 유폐할 거라는 루이스 드 바스콘셀루스의 참언을 듣고 루이자의 섭정 자격을 박탈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루이자는 아구스티노스 데스칼로스 수녀원에 은퇴한 뒤 여생을 보내다 1666년 2월 27일에 사망했다. 그녀는 영국 왕비이자 자신의 딸인 브라간사의 카타리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궁정 음모로 은퇴당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도, 나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아폰수의 미래를 염려했다. 또한 임종을 맞이하기 전날 작성한 유언장에서 아폰수를 상속인으로 정하고 자신의 이름과 관련된 자선 사업을 이어가라고 부탁했다. 아폰수는 어머니를 실각시킨 뒤 루이스에게 모든 정무를 맡겼다.

1663년, 본격적으로 포르투갈 깊숙이 진군하여 알렌테주에 도착한 후안은 그 지역의 주요 도시인 에보라를 포위해 수개월간 포위 공격한 끝에 1663년 5월 22일에 공략에 성공했다. 뒤이어 135km 떨어진 리스본을 향한 원정에 착수한 후안은 적 습격대의 보급로 교란으로 인해 식량난에 시달리자 일단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곡창지대인 아메이시알(Ameixial) 평원으로 향했다. 이에 프란치스코 아르만도 드 쇤베르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먼저 아메이시알 평원에 도착해 스페인군이 오기를 기다렸고, 그해 6월 8일 아메이시알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스페인군은 4,000명이 전사하고 대포 18문을 포함한 모든 포병과 보급품이 노획당하는 참패를 당한 채 바다호스로 패주했다. 프란치스코는 여세를 몰아 6월 24일 에보라를 포위 공격한 끝에 3,700명으로 구성된 스페인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뒤이어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포위 공격한 끝에 1664년 6월 24일에 공략했다. 그 후 스페인 측이 전면전을 회피하면서 한동안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1665년, 펠리페 4세는 포르투갈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해 전쟁을 종식하기로 마음먹고 새로운 스페인 사령관으로 카라세나 후작 루이스 데 베나비데스를 선임했다. 루이스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모집한 용병을 추가한 22,6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통솔했다. 그는 적 병력을 압도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더 많은 병력을 모을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펠리페 4세의 병세가 악화되자, 스페인 당국은 왕의 죽음이 포르투갈에 대한 외국의 지원을 강화할 것을 두려워했다. 게다가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시간을 질질 끌면 군대를 유지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에게 침략을 진행하도록 명령했다.

사전에 첩자들을 파견하여 적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한 포르투갈 측은 즉시 반격에 나섰다. 포르투갈군 총사령관 안토니우 루이스 드 메네세스는 엘바스와 캄푸마이오르의 국경 수비대를 강화해놓아서 적이 그곳을 회피하고 다른 길을 택하도록 유도했다. 루이스는 병력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두 곳 대신 보르바(Borba) 쪽으로 이동했다. 며칠 후 수비대가 철수하여 텅 빈 보르바에 무혈 입성한 그는 뒤이어 빌라 비소사를 포위 공격했지만,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서 1,500명 가량의 사상자를 기록할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스페인 당국은 루이스에게 빌라 비소사 공략을 포기하고 리스본으로 계속 진군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이를 듣지 않고 공방전을 이어갔다.

적이 몇달 동안 요새 공략에 매달리느라 물자와 병력을 낭비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안토니우 드 메네세스는 적군이 회전을 벌이도록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적보다 열세한 병력을 이끌고 접근했다. 루이스는 이 소식을 접하자 즉각 그들과 교전하기로 마음먹고, 일부 병력을 남겨서 요새를 계속 포위하게 한 뒤 자신은 22,000명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포르투갈군에 접근했다. 이리하여 1665년 6월 17일에 발발한 몬트스클라루스(Montes Claros) 전투는 스페인군의 재앙이었다. 포르투갈 측은 2,700명의 사상자만 낸 데 비해, 스페인군은 8,000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6,000명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그 후 스페인은 더 이상 포르투갈을 향한 공세를 단행하지 못했다.

1665년 2월 24일, 아폰수 6세와 느무르 공작 카를로 아마데오의 딸이며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증손녀인 사보이아의 마리 프랑수아의 결혼 계약이 파리에서 체결되었다. 결혼식은 6월 27일 라로셸 에서 대리로 거행되었고, 왕비는 8월 2일 리스본에 도착했다. 그러나 왕비는 왕을 만난지 불과 이틀 만에 고해사제인 예수회 프란시스코 데 빌라에게 "왕의 성 기술이 너무 부족하고 무력하다"고 불평했다. 그녀는 몇달 간 왕과 성관계를 가지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1667년 초 "Nossa Senhora da Esperança(희망의 성모님)" 수녀원으로 은퇴한 뒤 교황청에 아무리 노력해도 '결합'이 성사되지 않았다며 결혼 무효를 요청했다.

1667년 11월, 아폰수 6세의 동생인 페드루 왕자가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 뒤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권신인 루이스 드 바스콘셀루스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마리 프랑수아 왕비와 밀회해 그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1668년 3월 27일 교황청의 결혼 무효 승인이 리스본에 도착하자, 페드루는 아내와 관계를 갖지도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 왕이 나라를 이끌 수 있을 리 없다며, 자신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리스본에서 소집된 코르테스는 아폰수 6세를 폐위시키지 않는 조건하에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 후 페드루는 섭정으로 군림하고 마리 프랑수아 왕비와 결혼했고, 아폰수 6세는 테르세이라 섬에 유폐되었다.

2.6.3. 페드루 2세

페드루는 형 아폰수 6세를 유폐시킨 뒤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왕에 오르지는 않고 섭정으로서 나라를 통치했다. 한편, 포르투갈을 굴복시키기 위해 연이은 침공을 감행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1665년 9월 17일에 붕어한 후 새 국왕으로 카를로스 2세가 옹립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데다 신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모후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가 섭정했다. 그녀는 포르투갈과의 전쟁을 이어가봐야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1667년 잉글랜드와 마드리드 협약을 체결해 그들에게 여러 무역 특혜를 주는 대가로 평화 협상을 중재하도록 했다.

페드루는 잉글랜드 정부의 설득을 받아들여 스페인과 평화 협상을 벌였고, 1668년 2월 13일 리스본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스페인은 브라간사 왕조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스페인에 충성을 맹세한 세우타를 제외한 포르투갈의 모든 식민지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정했으며, 포로를 교환하고 무역 거래를 회복하기로 했다.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스페인에 할양했고, 탕헤르봄베이를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와 결혼하는 누이 카타리나의 지참금 형식으로 잉글랜드에 넘기기로 했다. 이리하여 28년간 지속되던 포르투갈 독립 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와 별도로, 포르투갈은 고아, 코친, 디우, 바이아, 페르남부쿠, 리우데자네이루에 잉글랜드인들을 위한 주거 지역을 신설하고 포르투갈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잉글랜드는 이에 대한 대가로 리스본과 포르투 해안에 있는 포르투갈 선박을 보호하는 등 포르투갈에 군사적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1671년, 페드루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포르투갈에 거주하는 잉글랜드인에게 무역의 자유를 부여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은 유럽의 강대국인 잉글랜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잉글랜드의 우수한 섬유 상품이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은 채 쏟아져 들어오면서 국내의 섬유 산업이 고사할 위기에 몰렸다. 이에 페드루는 국내 섬유 산업을 지키기 위해 지방 관료들에게 뽕나무를 심고 누에 번식을 장려하라고 명령했으며,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의 섬유 기술자를 고용하고 포르탈레그르(Portalegre), 푼당(Fundão), 코빌량(Covilhã), 트라스우스몬트스(Trás-os-Montes)에 양모, 실크 등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게 했다.

1674년, 페드루는 국경 수비대의 훈련도를 강화하고 무기 체계를 개선하며, 성 및 해양 요새를 보수하는 등 왕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코르테스에 기부금을 요청했다. 코르테스는 요청 전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인도와 브라질에서 오는 상선들이 해적들의 약탈을 받지 않도록 11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토벌 함대를 건조하기로 결의했다. 이 함대는 1675년 7월 21일 페드루 야스케스 드 마갈헤스의 지휘하에 타구스 항에서 출항한 뒤 대서양과 인도양 경비를 맡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676년, 페드루는 교황청의 승인을 받고 바이아 주교구를 대주교구를 격상시키고 올린다와 리우데자네이루 주교구를 창설했다. 또한 1686년 브라질 북부 오지에서 활동하는 예수회의 특권을 제한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하는 등 식민지 행정을 재조직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기를 싫어하는 타푸이아스(Tapuias: 투피어를 사용하지 않는 브라질 현지 원주민)들이 1680년대에 북동부 여러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포르투갈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페드루는 아내 마리 프랑수아와의 사이에서 외동딸 이자벨 루이자를 낳았다. 그는 딸을 일찌감치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으며, 1678년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결혼시키려 했다. 1640년 라메코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는 포르투갈 상속녀와 외국 왕자의 결혼을 금지한 바 있었지만, 1679년 11월 1일에 소집된 코르테스는 왕의 요청에 따라 이번 결혼을 허용하기로 결의했다. 사보이아 측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사절단을 리스본에 파견해 결혼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나 1682년 5월 토리노로 파견된 카디발 공작의 사절단은 프랑스 왕국의 강한 압력을 받은 사보이아 공국으로부터 속시원한 응답을 얻지 못하고 귀환했다. 그 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684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조카딸인 마리 도를레앙과 결혼했다.

1683년 9월 12일, 테르세이라 섬에 유폐되었다가 5년만에 리스본으로 송환된 뒤 산트라 궁전에 9년간 갇혀 지내던 아폰수 6세가 사망했다. 그동안 섭정으로 군림하던 페드루는 즉시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2세로 등극했다. 그 해 12월 27일 마리 프랑수아 왕비가 사망하자, 그는 자식이 딸 하나 뿐인 게 걱정되니 자식을 더 낳아야 한다며 재혼을 추진했다. 카디발 공작, 폰테 드 리마 자작 등은 프랑스 왕실과 결혼을 협상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서유럽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는 프랑스 왕국이 포르투갈을 좌지우지하려 들 것을 우려해 팔츠 선제후 필리프 2세 빌헬름의 딸 마리 조피와 결혼하기로 했다. 결혼식은 1687년에 성립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주앙 5세를 포함한 8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17세기 말 브라질 북동부 페르남부쿠 주의 카에테스에서 금광이 발견된 이래 수많은 이민자가 금을 캐려고 몰려들면서 브라질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페드루 2세는 광산 탐사를 장려하기 위해 바바세나 자작을 브라질의 총독으로 선임했고, 1693년 상파울루와 미나스 제라이스 등 여러 항구 도시를 건설했다. 1694년에는 바이아에서 브라질 최초의 조폐국이 설립되어 독자적으로 은화를 주조했다. 브라질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막대한 금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했던 포르투갈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고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해줬지만, 외국에서 몰려온 이민자들과 기존의 주민들간의 심각한 분쟁이 브라질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1700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카를로스 2세는 생전에 앙주 공작 필리프를 새 국왕으로 지명했지만,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가 스페인 국왕이 되면 프랑스와 스페인이 머지않아 통합되리라 여긴 잉글랜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을 스페인 국왕으로 내세웠다. 페드루 2세는 처음엔 중립을 표명했지만, 프랑스와 협상한 끝에 1701년 6월18일 파리 협약을 체결해 필리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이탈리아와 라인강에서 합스부르크 왕조군에게 패배하자, 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이어가야 할 지 고심했다.

1702년, 잉글랜드 정부는 페드루 2세에게 프랑스와 동맹을 끊고 자신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을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페드루는 당장 그럴 수는 없고 영국의 우위를 확인하는 대로 진영을 바꾸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해 10월 23일 비고 만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가 스페인 함대를 상대로 승리하자, 그는 프랑스와의 동맹 협약을 파기하고 잉글랜드와 협상했다. 그 결과, 1703년 5월 16일 리스본에서 잉글랜드와 상호 방위 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와 별도로 스페인을 공동으로 공격하기 위한 비밀 협약을 맺었는데, 이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카를 대공이 스페인 국왕이 되는 것을 도와주는 대가로 바다호스, 엘베케르케,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 투이, 바이오나, 비고 등 국경 도시들과 라플라타 강 북쪽 기슭의 영역을 영구적으로 가지기로 약속받았다.

1704년 3월 9일 리스본에 상륙한 카를 대공은 앞서 맺은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했고, 포르투갈군은 즉시 공세를 개시해 베이라와 알렌테주,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어렵지 않게 공략했다. 이후 1705년 10월 19일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 지방의 대도시인 바르셀로나를 2개월간 공격한 끝에 공략하고 그해 12월 카탈루냐 전역을 석권했다. 연합군은 여세를 이어가 스페인-프랑스 동맹군을 연이어 격파하며 스페인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고, 1706년 6월 25일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포르투갈군은 사흘 후 마드리드에 들어온 뒤 카를 대공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로 받들었다. 그러나 스페인 귀족과 국민들은 여전히 펠리페 5세를 자신들의 국왕으로 지지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2.6.4. 주앙 5세

1706년 12월 9일, 페드루 2세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4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새 국왕으로 등극한 주앙 5세가 통치를 막 시작했을 때, 포르투갈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카를 대공을 추대한 오스트리아-영국-네덜란드와 연합해 펠리페 5세를 스페인 국왕으로 내세운 프랑스 왕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706년 6월 25일, 포르투갈군은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카를 대공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로 옹립했다. 그러나 스페인 현지인들이 펠리페 5세를 위해 끝까지 싸우면서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다가 프랑스 장군 제임스 피츠제임스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역공으로 1706년 10월 마드리드를 도로 빼앗겼다. 포르투갈군은 1707년 초 마드리드를 재탈환하고자 골웨이 백작 앙리 드 마스의 지휘하에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함께 공세에 착수했으나, 1707년 4월 25일 알만사 전투에서 제임스 피츠제임스에게 참패했다.

프랑스-스페인 동맹군은 알만사 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1707년 5월 발렌시아와 사라고사를 탈환했다. 이후 포르투갈군이 점거한 스페인 국경 도시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 알렌테주, 세르파, 모라가 도로 스페인군에 넘어갔다. 주앙 5세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페드루 2세의 전직 고문 몇 명을 해임하고 디에고 데 멘도사를 국무장관으로 선임한 뒤 군사개혁을 실시했다. 1707년에 반포된 군사령에 따라 테르시오를 고수하던 군대는 연대 체제로 변모했고, 야전 사령관의 지위는 대령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1618년 설립되어 포르투갈의 가장 오래된 정규군 부대였던 테르수 다 아르마다 다 코로아 드 포르투갈(Terço da Armada da Coroa de Portugal)은 2개의 해군 연대로 전환되었다. 또한 군사 연구를 장려하고 해외의 군사 기술자들이 집필한 요새 건축 및 포병 훈련 요령서를 번역 및 인쇄해 전군에 배포하게 했다. 그리고 군사 교육을 위한 수업을 리스본 궁정에서 실시하게 했다. 이 수업은 다른 도시들에서도 행해졌고, 1732년에는 포르투갈의 주요 국경도시인 엘바스와 알메이다에 사관학교가 세워졌다.

1707년 6월 27일, 포르투갈 대사 페르낭 텔레스 드 실바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를 상대로 협상한 끝에 주앙 5세와 레오폴트 1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의 결혼 게약을 체결했다. 포르투갈을 동맹국으로 묶어놓고 싶었던 황제는 공주의 지참금으로 10만 크라운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했다. 1708년 10월 26일 공주를 리스본까지 호위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포르투갈 함대가 타구스 강 하구에 도착했고, 공주가 탄 기함은 히메리아 궁전의 부두에 정박했다. 이후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결혼 축하 행사가 12월 27일까지 거행되었다.

주앙과 마리아 부부는 1710년 말까지 왕위 계승자를 낳지 못했다. 1711년 초, 프란치스코회 추기경이자 포르투갈 종교재판소 대심문관인 누누 드 쿠냐 이 아타이데의 권고에 따라 프린치스코 수녀원을 짓고 하느님에게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1711년 12월 4일 마리아 안나가 장녀 마리아 바르바라를 낳으면서, 이들의 소원이 성사되었다. 이후 부부는 주제 1세, 카를루스, 페드루 3세, 알레산드르를 추가로 낳았다. 하지만 부부 사이는 대체로 소원하여 별거 생활을 유지했고, 주앙 5세는 필리파 드 노론하, 파울라 드 오디블라스, 루이스 이네스 안토니아 마차도 몬테이로, 마달레나 막시마 드 미란다, 이나시아 로사 드 타보라, 루이스 클라라 드 포르투갈 등 여러 정부를 두고 사생아들을 많이 낳았다.

1710년, 프랑스 제독 장 프랑수아 뒤클레르가 6척의 배를 이끌고 금 선적항인 리우데자네이루를 공격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구아나바라 만에서 바라 요새에 의해 격퇴되었고, 더 먼 해변에 상륙한 뒤 리우데자네이루로 행진했다가 현지 군대의 역공으로 크게 패하고 생포되었다. 이에 1707년 이베리아 반도로 향하던 200척의 영국군 수송선을 습격해 막심한 피해를 입히고 1709년 300척의 상선과 20척의 전함을 나포해 프랑스 전역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르네 뒤과이트루앙 제독이 나섰다. 1711년 9월 11일, 그는 12척의 전함과 6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리우데자네이루로 항해해 난공불락이라 여겨지던 바라 요새를 습격해 11일간의 전투 끝에 공략하고 리우데자네이루 시를 점령했다. 이후 2개월간 주지사를 억류한 채 도시를 지배하던 그는 도시를 돌려주는 대가로 막대한 몸값을 받아내고 1,000명의 프랑스 포로들을 구출했으며,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빼내서 프랑스령 기아나로 끌고 갔다. 브라질의 금 운송에 크게 의존하던 포르투갈은 이 패배로 인해 막심한 손실을 입었다.

1711년 4월 17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가 사망한 뒤 카를 대공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로 등극했다. 이에 영국, 네덜란드는 스페인이 신성 로마 제국과 결합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프랑스와 평화를 논의하기로 했다. 주앙 5세 역시 전쟁을 그만두기로 하고, 루이스 데 쿤하를 프랑스 정부로 보내 협상을 벌이게 했다. 그 결과 1711년 4월 1일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으며, 1715년 2월 6일 스페인과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양자는 서로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고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며 포로들을 교환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무렵, 전통적으로 포르투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무굴 제국이 쇠락하고 마라타 동맹이 대두했다. 마라타 동맹은 포르투갈인들을 인도에서 몰아내려 했다. 여기에 포르투갈의 식민도시였다가 독립한 무스카트의 아랍인들이 잔지바르 등 동아프리카 해안의 여러 거점을 공략하고 포르투갈인들과 크고 작은 충돌을 벌였다. 포르투갈은 인도양과 동아프리카 해안의 거점 도시들을 지키기 위해 두 세력을 상대로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러던 1714년, 7척으로 구성된 무스카트 아랍 함대가 무굴 제국의 주요 항구 도시이자 아랍과 포르투갈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한 곳인 수라트에 상륙했다.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 횡단 중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2척을 수리하기 위해 항구에 남아야 했다. 이때 그들은 마카오에서 온 포르투갈 선박들을 발견하고 빼앗았다. 인도의 포르투갈 총독 바스쿠 페르난드스 세사르 드 메네스는 이에 격분해 3개 전함들을 이끌고 아랍인들을 공격해 사투를 벌인 끝에 그들을 제압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무스카트는 보복하기로 결의하고 인도에 대규모 아랍 함대를 파견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포르투갈-무스카트 해상 전쟁은 5년간 이어지다가 1719년 페르시아 만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포르투갈 해군이 완승을 거두면서 포르투갈의 승리로 돌아갔다. 반면 1727-1729년에 동아프리카 해안의 도시인 뭄바사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에서는 포르투갈군이 바다에서 승리했지만 육지에서는 패해 뭄바사 시를 빼앗겼다. 한편 마라타 동맹과의 전쟁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1739년 2월 ~ 5월 바사이 공방전에서 패배해 바사이를 마라타 동맹에 넘겨야 했다. 이후 포르투갈의 인도 동북부에서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쇠락했다.

포르투갈 왕국의 전통적인 수입원이었던 인도에서의 영향력이 쇠락하자, 주앙 5세는 브라질 경영에 집중했다. 페드루 2세 치세 말기에 브라질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골드 러시는 그의 치세에 절정을 이루었다. 주앙 5세는 모든 금의 5분의 1은 왕의 금고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고 규정했고, 상 비센트 총독부(1709), 페르남부쿠 총독부(1716)를 잇따라 신설해 브라질의 가장 가치있는 두 지방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세금을 거둬들이게 했다. 1721년에는 상 비센트에서 미나스 제라이스를 따로 분리해 자치령으로 삼고, 이곳에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 주앙 5세는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재수립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전쟁으로 악화된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히베리아 그란데 3대 백작 루이스 마누엘 드 카마라는 1715년 8월 초 루이 14세의 궁정에 파견되어 막대한 선물을 프랑스 국왕에게 바치고 시민들에게 금전을 베풀어 프랑스인들의 호의를 샀다. 한편, 주앙 5세의 동생 마누엘은 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본국을 떠나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각지의 포르투갈 대사 및 귀족들과 함께 호화로운 연회를 벌였다. 주앙 5세는 처음엔 마누엘이 허락 없이 떠난 것을 불쾌하게 여겼지만, 마누엘에게 "네가 아직 어리니 이해하마"라며 용서했다. 그 후 마누엘은 주앙 5세의 허락을 받고 사부아 공자 외젠의 부관이 되어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가 맞붙은 페트로바라딘 전투에서 활약했다. 마누엘은 이후에도 여러 궁정을 전전하며 유능한 군 지휘관으로 활약했으며, 1732년에는 폴란드 국왕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의 모험은 여러 문학 작품에 영감을 주었고 포르투갈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일조했다.

1715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3세베네치아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모레아를 공략한 뒤 달마티아를 침공하자, 베네치아는 전유럽에 구원을 호소했다. 1716년 스페인이 베네치아를 돕기 위해 지중해에 함대를 파견하자, 그는 스페인 군주에게 뒤쳐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오스만 함대에 포위된 코르푸를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5척의 전함과 호위함 1척, 보조함 몇 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오스만 함대는 이미 포위를 풀고 돌아가버렸기 때문에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못했다.

1717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주앙 5세에게 함대를 다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주앙 5세는 동생 프란치스쿠에게 7척의 전함을 파견해 베네치아와 구호 기사단 함대와 합세하도록 했다. 이후 오스만 함대 15척과 마주치면서 벌어진 마타팡 해전에서, 구호 기사단 함대와 포르투갈 함대가 베네치아 제독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이탈해버리면서, 베네치아 함선 5척이 15척의 적선에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스만 함대는 탄약이 다 떨어져서 전투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여기고 곧 철수했고, 기독교 측은 이를 승리로 해석했다. 포르투갈 함대는 시칠리아에 귀환한 뒤 화려한 연회와 불꽃놀이를 벌여 승리를 자축했고, 함대 사령관인 리오 그란데 백작 로페 푸르타도 데 멘도사는 로마로 귀환한 뒤 시내에서 5대의 황금 마차를 앞세워 개선식을 거행한 후 교황청에 마차를 바쳤다. 클레멘스 11세는 이에 감격해 주앙 5세에게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보냈고, 포르투갈의 명성은 이전보다 크게 상승했다.

이렇듯 주앙 5세는 교황청과 우호 관계를 맺었지만, 리스본의 교황 대사 빈센초 비키(Vincenzo Bichi) 문제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빈센초 비치는 리스본에서 면죄부를 대량으로 판매한 일로 포르투갈 성직자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비키는 교황청으로 불려가서 엄중한 경고를 받고 리스본으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언행을 고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타팡 해전 후 교황청이 포르투갈 왕국이 오스만 해군을 물리쳐준 것에 보답하는 의미로 리스본 대교구를 총대주교청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1719년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비키를 로마로 소환하기로 했을 때, 주앙 5세는 리스본이 파리, 마드리드, 비엔나와 같은 급이 되었으니 이들 도시의 교황 대사가 교황청으로 귀환한 뒤 추기경으로 승진하는 관례대로 비키를 추기경으로 선임하겠다고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교황이 비키의 그릇된 행실을 문제삼으며 요청에 응하지 않자, 주앙 5세는 비키가 추기경이 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지 않고서는 리스본을 떠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포르투갈을 오스트리아, 스페인, 프랑스와 동급의 국가로 올려놓으려는 계산이었다.

1720년 9월, 클레멘스 11세는 비키를 로마로 소환하고 나폴리 출신의 주세페 피라오를 리스본의 새로운 교황 대사로 선임했다. 그러나 주앙 5세는 비키가 리스본을 떠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피라오가 포르투갈 영내에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1721년 초 클레멘스 11세가 선종한 후 인노첸시오 13세가 선출되자, 주앙 5세는 새 교황이 1697년부터 1710년까지 리스본의 교황 대사로 일한 적이 있는 점에 기대를 걸고 비키를 추기경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13세는 이를 무시하고 피라오를 교황 대사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주앙 5세는 비키를 추기경으로 세우지 않는다면 교황청과의 외교 관계를 끊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포르투갈 함선이 교황청을 위해 중국으로 가는 선교사들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이 협박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1724년, 인노첸시오 13세가 선종했다. 새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의 후손이었기에 주앙 5세는 다시 한 번 기대를 걸었지만, 비키를 추기경에 세우려는 기미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주앙 5세는 1728년 모든 포르투갈인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막론하고 교황청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금지하며 로마에 있는 포르투갈인은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베네딕토 13세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주앙 5세는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중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1730년 가을, 그해 7월에 선출된 새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비키를 추기경으로 승진시키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빈센초 비키는 1731년 9월 24일 몬토리오에서 성 피에트로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리스본은 마드리드, 파리, 비엔나와 함께 추기경을 배출한 도시가 되었다. 그 후 포르투갈과 교황청의 관계는 호전되었고, 1748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주앙 5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가장 충실한 왕(Sua Majestade Fidelíssima)"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1722년, 앙골라의 루안다 총독이 주앙 5세에게 영국이 콩고 강 하구의 카빈다에 요새를 건설하고 있다고 알렸다. 영국은 포르투갈의 우방이었지만, 카빈다를 앙골라의 일부로 간주했던 포르투갈인들은 그곳에 영국 거점이 세워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주앙 5세는 이를 심각한 상황으로 여기고 브라질 해군의 일부 편대를 앙골라로 파견해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얼마 후 영국인들이 실제로 요새를 건설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앙 5세는 영국인들에게 요새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라고 지시했다. 영국인들이 이를 거부하자, 포르투갈 함대는 요새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영국인들은 한동안 저항했지만 이내 요새가 무너질 위기에 몰리자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장받는 대가로 요새와 수송선을 넘겨주기로 했다.영국 측이 이에 대해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요새 건설은 본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한 것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35년 스페인의 리오데라플라타 총독 미겔 데 살세도 이 시에라알타가 우루과이 지역 공략을 위해 침공을 가하자, 현지 포르투갈 총독 안토니우 페드루 바스콘셀루스가 반격하여 물리쳤다. 이 소식을 접한 주앙 5세는 6척의 전함을 우루과이 지역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5척의 소형 전선과 3척의 프리깃함으로 구성된 적 함선과 교전했지만 양측 모두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물러났다. 이후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기미가 감지되었고, 영국 함대는 주앙 5세의 요청에 따라 리스본에 정박했다. 하지만 1737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의 중재에 따라 양측이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하면서 분쟁이 종식되었다.

1744년 9월, 카스텔루노부 후작 페드루 미겔 드 알메이다(Pedro Miguel de Almeida)가 포르투갈령 인도부왕으로 부임했다. 25년 전 상파울루와 미나스 데 오로의 총독이었던 그는 포르투갈의 고아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북부 고아 일대의 보운솔로스를 공략하기로 했다. 1745년 4월 공세를 개시한 그는 알로나, 비콜림, 산클림 일대를 공략했고, 나머지 지역을 별다른 전투 없이 점거했다. 그해 11월에는 고아의 최북단인 티라콜 요새를 항복했다. 카스텔루노부 후작은 이후에도 고아 주변의 여러 마을을 공략하면서 포르투갈의 지배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1748년 주앙 5세에 의해 알로나 후작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1746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스페인령 남미 영토와 포르투갈령 브라질 간의 경계를 확실히 정하지 않으면 분쟁이 계속 되리라는 것을 깨닫고 협상을 시작했다. 4년간 이어진 협상 끝에, 1750년 1월 13일에 마드리드 협정이 체결되었다. 포르투갈은 협정에 따라 로니아 델 사크라멘토를 스페인에 양도하고 그 대가로 세븐 타운스 오브 미션스를 받았다. 그러나 현지의 과라니 부족은 예수회 수도사들과 함께 스페인의 지배를 받기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주앙 5세의 뒤를 이은 주제 1세 통치기에 이 지역을 둘러싼 과라니 전쟁이 발발했다.

어린 시절부터 건강이 약했던 주앙 5세는 1742년 심한 발작으로 죽을 뻔했다가 칼다스다하이냐(Caldas da Rainha)의 온천으로 옮겨지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후 1743년 5월과 9월, 1744년 4~5월과 7월, 1744년 10월, 1745년 5월과 10월, 1746년 9~10월, 1747년 4월과 9월, 1750년 7월에 중병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병자성사를 받았다. 그러던 1750년 7월 31일 히베이라 궁전에서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6.5. 주제 1세

주앙 5세 사후 왕위에 오른 주제 1세는 열병에 줄곧 시달리면서도 정무에 전념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국정을 신하들에게 떠맡기고 음악과 사냥을 즐기거나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곤 했다. 특히 평소 총애하던 세바스티앙 드 카르발류를 즉위 직후 외무부 장관으로 선임한 뒤 1755년에 총리로 승진시키고 통치권을 위임했다. 세바스티앙은 주제 1세의 치세 내내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기에, 주제 1세 시기의 공과는 온전히 세바스티앙의 책임이었다.

주앙 5세 치세 말기인 1750년 1월 13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남미 식민지의 경계를 확정짓는 마드리드 협정을 체결했다. 포르투갈은 협정에 따라 로니아 델 사크라멘토를 스페인에 양도하고 그 대가로 세븐 타운스 오브 미션스를 받았다. 그러나 스페인 관료들이 조약에 따라 로니아 델 사크라멘토를 접수하러 왔을 때, 현지의 과나리 부족민들과 예수회 수도사들은 이 땅을 스페인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주제 1세는 스페인 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브라질 총독에게 스페인 측과 협력해 과라니 족을 토벌하게 했다. 이리하여 1753년부터 벌어진 과라니 전쟁은 1756년까지 3년간 이어지며 과라니 족 1,500여 명이 피살되었다. 1756년 과라니 지도자 낭기루(Ñanguirú)가 전사하고 과라니족이 항복하면서 전쟁이 종식되었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우루과이 서쪽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1755년 11월 1일 리스본 대지진이 발발해 3만에서 10만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건물 1만 채 이상이 파괴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왕 본인은 대지진 당시 가족과 함께 피크닉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화를 피했고, 세바스티앙에게 사태를 수습할 전권을 맡겼다. 세바스티앙은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달성해 리스본의 재건이 빠른 속도로 이뤄지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지진 대비를 위한 재난 대책도 충실하게 집행되었다. 그러나 주제 1세는 대지진 이후 심각한 폐소공포증에 시달려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 안에서 생활하는 걸 극도로 기피하고 왕궁에서 벗어나 아주다 언덕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걸 선호했다.

포르투갈 왕국은 페드루 2세 치세 말기에 브라질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골드 러시 덕분에 주앙 5세 시절에 막강한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브라질의 금광에 지나치게 의존해 국내 산업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고, 제조업 대부분을 영국에 의존해야 했다. 심지어 포르투갈의 수출 조차도 대부분 영국, 프랑스 등 외국 사업가들을 통해 이뤄질 정도로,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이는 포르투갈 경제의 해외 의존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러다 주제 1세 치세에 이르러 브라질의 금광이 고갈되었고, 설상가상으로 1755년 11월 리스본 대지진이 발발하면서 포르투갈 경제는 급격히 쇠락했다.

세바스티앙은 경제 부흥을 위한 여러 개혁을 실시했다. 우선 도루 강 유역의 와인을 관리하는 도루 와인 회사를 설립해, 해당 지역의 와인 품질을 보장하게 했다. 여기에 "알가르브 왕립 수산 종합 회사(Companhia Geral das Reais Pescarias do Reino do Algarve)"를 설립해 포르투갈 남부의 어업을 감독하게 했으며, 국내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 세금 혜택을 부여하고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 상품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수출을 최대한 늘리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주제 1세의 치세 동안 수백 개의 소규모 제조업체가 세워졌고 사양길을 걷던 제조산업은 활력을 되찾았다.

또한 왕립 은행을 설치해 국가가 금융산업에 지속적으로 개입할 발판을 마련했고, 높은 귀족에서 가장 가난한 노동 계급에 이르기까지 포르투갈 사회의 모든 계층에 엄격한 법률을 부과했으며, 면세 혜택을 받던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가차없이 거둬들여 지진의 여파로 바닥을 드러낸 국고를 채웠다. 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은 이에 반발했지만, 세바스티앙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정책을 가차없이 밀어붙였다.

한편 포트루갈과 포르투갈령 인도 내에서 흑인 노예의 수입을 금지했는데, 이는 인도주의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한 브라질에 흑인 노예를 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브라질에 흑인 노예 무역을 관장하는 회사를 설립해 흑인 노예들이 브라질에 정착하여 노동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감독하게 했다. 그 결과 1757년에서 1777년 사이에 총 25,365명의 흑인 노예가 서아프리카 항구에서 브라질의 파라와 마라냥 항구로 끌려왔다.

세바스티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뒤쳐진 제도 전반의 개혁을 꾀했다. 육군과 해군을 개편하고, 코임브라 대학 시스템을 영국 대학과 맞추게 했으며, 저명한 외국 교수를 고용하고, 현대 과학 장비를 갖추게 했다. 그리고 "새 기독교인"으로 간주된 기독교 개종 유대인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종식시키고 앞으로 "새 기독교인"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자들을 광장에서 채찍질하고 앙골라로 추방하게 했다. 여기에 프랑스 민법 체계를 포르투갈에 도입하고 왕권신수설을 대대적으로 홍보해 국왕의 권위를 드높이면서, 자연히 국왕의 총애를 받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주제 1세는 국가를 알아서 이끌어가는 세바스티앙을 무척 총애했고, 지진 2년 후인 1757년에 국가 평의회 의장 겸 군 사령관을 겸임하게 했다. 세바스티앙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은 주제 1세가 살아있는 한 세바스티앙을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주제 1세를 암살하기로 작정했다. 1758년 9월 3일, 주제 1세는 타보라 후작부인이자 자신의 정부인 테레사 레오노르와 함께 저녁을 먹고 마차를 타고 돌아가던 중 괴한 3명의 습격으로 팔에 총탄을 맞았다. 하지만 호위병들의 결사적인 경호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져 아주다에 돌아왔다. 세바스티앙은 즉시 조사를 신속하게 실시한 뒤 타보라 가문 구성원들이 이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몰아세웠다.

이로 인해 12월 한 달 동안 천 명 이상이 수감되었는데, 그 중엔 여자와 어린이들도 있었지만 전부 사형 판결을 받았다. 보다못한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비와 왕위 계승자인 마리아 공주가 개입해 그들 대부분을 사면시켰지만, 아베이루 공작 주제 드 마스카레냐스 다 실바 이 렌카스트르, 타보라 후작 프란시스쿠 드 아시스, 테레사 레오노르 등 타보라 가문 일가 및 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 이들 수십 명이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고, 그들의 유골은 타구스 강에 던져졌다. 이후 타보라와 아베이루 가문의 문장은 폐기되었고, 타보라라는 이름은 언급조차 금지되었다.

귀족들이 잔혹한 사건 처리에 경악하여 자신에게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자, 세바스티앙은 예수회를 다음 타겟으로 정했다. 우선 예수회 소속 신부이며 타보라 가문의 고해신부였던 말라그라다가 반역 음모를 신고하지 않은 점을 빌미로 삼아 재판에 회부한 뒤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주제 1세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진지 1년 후인 1759년 9월 3일, 그는 예수회가 포르투갈 내부에서 자치 세력으로 활동하며 왕실을 모해하려 했다며 예수회를 금지하고 예수회 수도사들을 대도시와 식민지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자산을 몰수했으며, 예수회가 세웠던 에보라 대학을 허물었다. 여기에 형제인 파울루 안토니우 드 카르발류 멘돈차를 종교 재판소 대심문관으로 선임해 종교 인사들을 통제하게 했으며, 1768년 "헤알 메사 센소리아(Real Mesa Censoria)"를 설립해 정치적 성격을 지닌 책과 출판물을 검열하고 왕권신수설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작품을 소각시키고 작가를 박해하게 했다. 세바스티앙은 1770년 주제 1세에 의해 폼발 후작에 선임되었고, 주제 1세가 사망할 때까지 사실상 독재자로 군림했다.

주제 1세는 일찍이 포르투갈 왕위 계승녀로 지명된 장녀 마리아를 스페인 왕자 루이스 안토니오(1727 ~ 1785),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와 결혼시키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서 실패했다. 이후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면서 어느 한 국가의 왕자와 결혼시켰다가는 그 나라를 적대하는 국가들로부터 잠재적 적국으로 인식될 것을 우려해 결혼을 미루었다. 그러던 1760년, 마리아는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26세에 결혼했는데, 신랑은 뜻밖에도 주제 1세의 동생인 페드루 왕자였다.

포르투갈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브라간사 왕조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결혼을 단행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기 어려워진 시점에서 공주의 결혼 상대는 포르투갈 국내의 귀족이 유력했다. 그러나 귀족들을 모조리 찍어누르고 독재 정치를 펼치던 세바스티앙은 장차 여왕이 될 마리아가 귀족 집안의 자제와 결혼한다면 자신의 입지가 급격히 위태로워질 것이라 여겼고, 정치에 별 관심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던 페드루 왕자라면 위험하지 않을 거라 여기고 마리아와 짝지어주기로 했다. 삼촌과 조카의 결혼은 친족간의 결혼이 흔했던 유럽 왕실에서도 매우 비정상적인 일이었고 교회법에도 어긋났지만, 어느 누구도 독재 권력을 펼치는 세바스티앙의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1758년 프로이센 왕국-영국 연합과 프랑스 왕국-합스부르크 제국-러시아 제국 동맹국이 맞붙은 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포르투갈은 영국과 오랜 동맹 관계를 맺었지만 리스본 대지진의 참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중립을 선포했다. 1759년 8월 18일, 영국 제독 에드워드 보스카웬이 포르투갈 남쪽의 라구스 해안에서 프랑스 해군을 요격하면서 라구스 해전이 벌어지자, 세바스티앙은 영국에 사절을 보내 자국의 바다에서 전투를 벌인 것에 항의해 사과를 받아낸 뒤 라구스 항구로 피신한 프랑스 병사들을 보살핀 후 본국으로 보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프랑스 선원들에게 주어진 모든 지원에 대해 주제 1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간의 분쟁이 포르투갈에까지 미치면서, 포르투갈은 중립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 번은 파루의 영국 영사가 영국 호위함에게 파루 항구에 진입하여 프랑스 전함이 하역하는 것을 막으라고 지시했다가 포르투갈 해군에게 저지되었다. 또 한 번은 비아나두카스텔루에서 활동하던 영국 사업가들이 스스로 무장한 채 보트에 올라타 프랑스 해적에게 포획된 영국 상선을 탈환했다. 여기에 프랑스 측에서 지지부진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스페인에게 자국과 연합하여 영국을 대적하라고 압력을 행사했고, 스페인은 같은 부르봉 가문 끼리 힘을 합치기로 하고 1762년 영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1762년 4월 1일 두 부르봉 국가들은 포르투갈에게 다음과 같은 최후 통첩을 보냈다.
1. 영국-포르투갈 동맹을 파기하고 프랑스 및 스페인과 새로운 동맹을 맺는다.
2. 영국 선박을 항구에 들이지 말고 영국과의 모든 무역을 중단한다.
3. 영국에 선전포고한다.
4. 스페인군의 포르투갈 항구 점령을 수락한다.
5. 위의 사항을 준수한다면 영국의 압제로부터 보호해주겠지만, 끝내 듣지 않는다면 부득이 침공하겠다.

당시 포르투갈군은 세바스티앙의 군제 개혁에도 불구하고 리스본 대지진으로 입은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포르투갈 요새가 손상되었고, 브라질의 금광 채굴량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육군과 해군을 유지하기 어려워서 군대 규모를 대폭 축소해야 했다. 병사들은 1761년 11월까지 1년 반 동안 급여를 받지 못하다가 1762년 3월 말이 되어서야 6개월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생명줄이 영국과의 무역 및 군사적 보호에 달려 있었기에, 세바스티앙은 최후 통첩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스페인군이 포르투갈 북쪽 국경 지대에 집결하기 시작하자, 포르투갈은 1762년 4월 18일 스페인과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하고 영국에 재정 및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1762년 4월 30일 사리아 후작 니콜라스 데 카르바할이 이끄는 스페인군 22,000명이 트라스우스몬트스 지방을 통해 포르투갈에 쳐들어왔다. 그들은 <포르투갈에 들어온 이유>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반포했는데, 그 내용은 "영국의 무거운 족쇄", "바다의 폭군"으로부터 포르투갈 국민을 해방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트라스우스몬트스 지방의 유일하게 요새화된 요새인 미란다는 그해 5월 6일 포위된 뒤 갑작스런 화약 폭발로 인해 400명이 사망하고 성벽에 2개의 돌파구가 생겨버리자 5월 9일에 항복했으며, 그 외의 다른 도시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되었다. 사리아 후작은 포르투갈군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자 다음과 같은 농담을 부관에게 건넸다.
"이 곤충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렀다. 그들은 단순한 힘의 과시만으로도 포르투갈이 굴복하도록 유도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식량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진격했다. 스페인군은 처음에는 현지인들과 잘 지내려 노력했지만, 포르투갈이 항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이 식량이 금세 바닥나자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징발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트라스우스몬트스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하여 민병대를 결성해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스페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다. 여기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4,000명 이상의 병사들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스페인군은 이를 보복하고자 각 마을을 돌며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지만 주민들이 더욱 거세게 저항하는 역효과만 야기했다. 결국 스페인군은 1762년 6월 샤베스(Chaves)를 제외한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한편, 영국은 포르투갈의 구원 요청에 응해 1762년 5월 리스본에 제 83, 91 보병 연대와 16개 용기병 분대를 상륙시켰다. 여기에 제3, 67, 75, 85 보병 연대가 2개의 왕립 포병 중대와 함께 1762년 7월 벨 아일에 상륙했다. 포르투갈에 파견된 영국군의 총 병력은 7,104명이었다. 또한 영국은 포르투갈에 식량, 탄약 및 20만 파운드의 대출금을 보냈다. 여기에 7,000~8,000명의 포르투갈 병력이 합세해 총 15,000명의 병력이 구성된 연합군은 샴부르크리페 백작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의 지휘를 받았다.

빌헬름은 아브란트스(Abrantes) 근처의 훈련 숙영지에 포르투갈군을 집결시킨 후 철저한 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포르투갈군의 가장 큰 문제는 대부분의 고위 장교들이 문맹이었고 탈영자가 너무 많았으며 규율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빌헬름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로 포르투갈군을 재편성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전쟁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엘바스 근처에 노사 세뇨라 다 그라사 요새(Forte de Nossa Senhora da Graça)를 세웠다. 이 요새는 훗날 '리페 백작 요새'(Forte Conde de Lippe)로 개칭되었다.

1762년 7월,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한 프랑스군과 합류한 스페인군은 재공세를 준비했다. 그들은 병력을 3개 사단으로 나눴다. 갈리시아의 동부 사단은 포르투를 최종 목표로 정하고 포르투갈 북동부인 트라스우스몬트스와 미뉴를 침공했다. 중앙 사단은 트라스우스몬트스에서 큰 피해를 입은 사리아 후작의 군대와 합세한 뒤 포르투갈의 중앙 지역을 돌파하여 리스본으로 진격했고, 남부 사단은 알렌테주 지방 등 포르투갈 남부 지역을 공략하기로 했다. 빌헬름은 상황을 살피다가 알렌테주의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 지역에서 재정비하고 있는 남부 사단 선두부대를 먼저 쳐부수기로 했다.

1762년 8월 27일, 존 버고인 소장이 이끄는 2,800명의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기습 공격하여 그곳에 주둔한 스페인의 최고 연대 중 하나인 세비야 연대를 섬멸하고 3개의 군기를 탈취했다. 여기에 전날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에 도착했던 남부 사단장 미겔 데 이루니베니도 생포되었다. 버고인은 이 공적으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고, 주제 1세로부터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수여받았다.

한편, 사리아 후작을 대신하여 군대 지휘권을 맡은 아란다 백작 페드로 파블로 아바르카가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중앙 군단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포르투갈 중심부를 횡단한 끝에 1762년 8월 25일 알메이다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들은 산악 지형이 많은 포르투갈 내륙으로 너무 깊숙이 침투했다가 게릴라 부대의 연이은 습격으로 인해 보급로가 끊겼다. 여기에 빌헬름이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적과의 전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그들의 진군로 주변의 모든 마을을 불사르고 밭을 갈아엎는 청야 전술을 구사하면서, 현지조달 역시 매우 힘들어졌다.

아바르카는 이런 상황에서도 리스본만 공략하면 모든 게 끝나리라 기대하며 진군을 이어갔으나, 타구스 강변에 도착했을 때 포르투갈군이 배를 모조리 없애버린 데다 장대비가 내려서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건널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바르카는 강을 건너는 대신 산악로를 통해 리스본으로 진군하기로 했지만, 빌헬름이 사전에 리스본으로 들어가는 주요 산악로가 위치한 아브란트스 고지에 강력한 수비대를 배치하는 바람에 이마저도 어려워졌다. 스페인군은 강행돌파를 꾀했지만, 1762년 10월 3일부터 10월 5일까지 이어진 아브란트스 전역에서 적 방위선을 뚫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만 입었다.

이후 폭우와 질병, 굶주림, 수많은 탈영병에 시달린 아바르카는 1762년 11월 본국으로 퇴각하면서 후방에 28개 대대를 남겨뒀다. 빌헬름은 이들을 추격하려 했지만 전력 손실을 회피하고 싶었던 포르투갈군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발렌시아로 철수한 아바르카는 바디호스 근처에서 돌파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겨울 숙영지를 마련하기 위해 엑스트라마두라 지역으로 돌아갔다. 이때 아바르카는 본부로 삼았던 카스트렐로 브랑코에 수많은 부상병들을 남겨뒀고, 이들은 곧 포르투갈군에게 투항했다. 프랑스-스페인 중앙 사단이 입은 손실이 어느 정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대략 20,000~30,000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1762년 11월 3일, 프랑스와 영국이 퐁텐블로 예비 협약을 체결해 평화 협상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이에 포르투갈인들은 전쟁이 곧 끝나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엑스트라마두라로 철수한 아바르카는 적이 방심하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1762년 11월 포르투갈의 알렌테주 지방을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포르투갈 민병대의 게릴라 전술에 휘말린데다, 마르방(Marvão)과 오겔라(Ouguela)에서 포르투갈 수비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는 바람에 큰 손실만 볼 뿐 요새 하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여기에 빌헬름이 연합군을 총동원해 알렌테주로 진군하자, 아바르카는 어쩔 수 없이 11월 15일에 퇴각했다. 이후 스페인군과 포르투갈-영국 연합군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소규모 접전을 벌였지만, 더 이상 대규모 공세를 가하지 않았다.

한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남미에서도 충돌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상 주세 드 마라비타나스, 상 가브리엘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냈고, 아마존 유역에 있는 히우 네그루(Rio Negro) 유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한편 산타 크루스 데 라 시에라(볼리비아)에서 파견된 스페인군은 한 때 금이 여전히 나오던 마투그로수 주를 장악했지만, 롤림 모우라가 지휘하는 포르투갈군에게 구아포라 강둑에서 격파당하고 질병, 기아, 탈영으로 인해 병력이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참상을 겪어야 했다. 한편, 또다른 스페인군은 콜로니아 두 사크라멘토와 히우 그란지 두 술 등 브라질 남부 지역을 공략했다.

1763년 2월 10일, 프랑스-스페인 연합과 영국-포르투갈 동맹의 전쟁을 종식하는 파리 협약이 체결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전쟁 중에 상대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고 전쟁 포로를 교환하기로 했다. 남미 현지의 포르투갈인들이 장악한 히우 네그루 유역은 포르투갈이 그대로 점유했지만, 스페인군의 지속적인 압박 끝에 1777년 포르투갈인들이 물러나면서 스페인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1774년, 주제 1세는 아버지 주앙 5세가 말년에 그랬던 것처럼 심각한 발작에 시달렸다. 이에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비가 남편이 죽을 때까지 섭정을 맡기로 했다. 그 후 의사소통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독방에 갇혀 지내던 주제 1세는 1777년 2월 24일 신트라 궁전에서 사망했다.

2.6.6. 마리아 1세

주제 1세 사후, 주제 1세의 딸 마리아 1세와 주제 1세의 동생이자 사위인 페드루 3세가 공동으로 포르투갈 국왕이 되었다. 하지만 페드루 3세는 사냥과 종교 활동에 전념할 뿐 정치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아내에게 떠맡겼기에, 실질적인 통치자는 마리아 1세였다. 마리아가 여왕이 된 뒤에 첫번째로 취한 정책은 아버지 주제 1세의 전폭적인 총애를 받으며 독재정치를 편 폼발 후작을 해임한 것이었다. 그녀는 세바스티앙이 자신으로부터 20마일 이상 가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추가로 내리면서, 자신이 그의 영지 근처를 여행할 경우 세바스티앙은 집을 떠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바스티앙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이들은 그를 아예 죽여버리고 재산을 몰수하려 했지만, 마리아는 세바스티앙이 비록 악행을 저질렀지만 리스본 대지진을 제대로 수습하고 스페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공적을 고려해 이 이상의 처벌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마리아 1세는 폼발 후작을 해임한 뒤 그에게 탄압받던 800명 이상의 정치범들을 석방했다. 또한 폼발 후작이 후원한 코임브라 대학의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백과사전파, 방법론적 자연주의, 이신론이단에 빠졌다는 비난을 받고 종교재판소에 회부된 뒤 추방형에 처해졌다. 이때 추방된 이들 중 한 명인 프란시스쿠 드 멜루 프랑쿠(Francisco de Melo Franco)는 마리아 정권을 규탄한 저서 <어리석음의 왕국>을 집필했다. 다만 폼발 후작이 세운 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전반적인 정책 기조를 그대로 이어갔다.

1777년, 마리아는 식민지를 놓고 오랜 분쟁을 벌였던 스페인을 상대로 산일데폰소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양국은 영구적인 평화를 이루며 양측의 수감자를 석방하고 1763년 이후 만들어진 해상 방벽을 상호 배상하기로 했다. 또한 스페인은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철수하고, 포르투갈은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와 산 가브리엘 섬(현재 우루과이 남부), 기니 해역의 안노본 섬과 페르난도 푸 섬을 스페인에 양도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경을 이루는 구간을 통과하는 강을 통한 항해는 양국 모두에게 무제한으로 허용되고, 양국은 적국의 선박과 밀수품을 실은 모든 깃발의 선박에 대해 항구 입성을 거부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1778년에 일데폰소 협약을 보충하는 목적으로 엘 파르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의 브라질 통치를 완전히 인정하고, 포르투갈은 안노본 섬, 비오코 섬과 그 맞은편 기니 만 해안에 대한 무역권을 양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오랜 분쟁을 마무리짓고 화해했다.

1781년 5월 23일, 포르투갈 법원은 1758년 주제 1세 암살 미수 사건의 배후로 기소되어 심각한 박해를 받았던 타보라 가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유족들에게 재산을 돌려줬으며, 왕실 모해 단체로 규탄받고 금지된 예수회 역시 복권되었다. 폼발 후작은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뒤 1781년 8월 16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마리아 1세는 "폼발 후작은 처벌받아 마땅하지만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자신의 소유지에서 여생을 보내게 해주겠다"라며 사면을 선고했다. 폼발 후작은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다 1782년 5월 8일에 사망했다.

1782년, 마리아는 미국 독립 전쟁을 치르는 영국이 프랑스 밀수품에 대한 중립 선박을 무제한 탐색하는 영국 해군 의 전시 정책에 맞서 중립 선박을 보호하고자 결성된 제1차 무장 중립 동맹에 가입했다. 러시아 제국, 덴마크, 스웨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이 동맹은 지중해, 대서양북해를 항해하는 자국의 상선을 무자비하게 수색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783년 파리 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 독립 전쟁이 종식되자, 제1차 무장 중립 동맹은 해체되었다.

마리아는 과학자들을 후원하고자 리스본 왕립 과학원을 설립했고, 왕립 공립 도서관을 설립해 저명한 문학가들의 저서를 보관했다. 또한 고아와 거지, 부랑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카자 피아 드 리스보아(Casa Pia de Lisboa)를 창설했다. 이 기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학생들은 상업 기술, 프랑스어, 군사 산술, 그림 및 약학 등을 배웠고, 가장 탁월한 재능을 갖췄다는 평을 받은 이들은 사관학교나 런던의 의학 대학, 로마의 포르투갈 대학에 입학했다. 또한 해군 장교를 전면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왕립 해군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1785년 1월 5일, 마리아 1세는 브라질의 섬유 제조업이 과도하게 발전하여 본국의 섬유업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예와 노동자가 땀을 닦을 때 사용하는 천을 제외한 모든 섬유품을 식민지인들이 개별적으로 생산하여 해외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명 <1785년 헌장>을 반포했다. 조아킹 주제 다 실바 샤비에르(Joaquim José da Silva Xavier)는 이에 반발하여 포르투갈로부터 브라질의 독립을 꾀하기 위해 봉기를 계획했다가 1789년 체포되었고, 3년간 옥고를 치르다 1792년 4월 21일 리우데자네이루 도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786년 초, 마리아는 정무를 보던 중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며 별궁에 옮겨졌다. 이때부터 그녀의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 대내외에 알려졌다. 1786년 5월 25일 마리아와 함께 포르투갈 국왕을 맡던 페드루 3세가 병사했다. 정치에 별다른 공헌을 하지 않았지만 자상한 남편이었던 페드루 3세를 사랑했던 마리아는 남편의 사망에 망연자실했고, 궁궐에서 어떤 오락도 열리지 못하게 했다. 동시대 기록에 따르면, 당시 포르투갈에서 행해진 국가 축제는 종교 의식과 비슷했다고 한다.

1788년 9월 11일 장남이자 후계자인 주제 왕자가 천연두에 걸려 27세에 사망했고, 마리아의 고해사제였던 이나시우 드 상 카에타누 역시 그해 11월에 사망했다. 가까운 이들이 자신의 곁을 잇따라 떠나자, 그녀는 극심한 환각, 우울증, 불안 증세를 보였고 나중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까지 맞물리면서 종교적 광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밤마다 궁궐 안에서 끔찍한 비명을 질렀고, 시종들은 자신의 몸을 자해하고 미친듯이 울부짖는 여왕을 달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792년 2월, 신하들은 여왕이 미쳤다고 결론짓고 영국의 국왕 조지 3세의 정신병을 치료한 전적이 있던 프랜시스 윌리스에게 치료를 맡겼다. 윌리스는 5년간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국 불치병 판정을 내렸다. 1794년 레알 바라카 드 아주다 궁전이 화재에 휩싸이면서, 궁정은 정신병에 시달리는 여왕이 있는 켈루스로 옮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여왕에게 통치를 맡기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신하들은 마리아 1세의 아들 주앙에게 어머니를 대신해 국정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주앙은 공식적으로 섭정을 맡기를 꺼렸고, 성직자, 귀족, 상인 대표로 구성된 코르테스에서 국가를 운영하게 했다.

2.6.7.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린 포르투갈

1793년 루이 16세가 혁명 세력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각국의 국왕들은 대 프랑스 동맹을 맺고 프랑스 혁명을 진압하려 했다. 포르투갈 정부 역시 7월 25일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9월 26일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대 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이후 피레네 전선에 6,000명의 포르투갈군이 파견되었지만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1795년 7월 22일 스페인과 프랑스간의 평화 협약인 바젤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포르투갈 역시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으려 했으나 포르투갈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의존하는 영국의 압력이 가해지자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프랑스와 무력 충돌을 벌이지 않으면서도 공식적으로 화해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상태로 남았다.

1799년 7월 14일, 주앙은 비로소 섭정에 취임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포르투갈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뒤 포르투갈에 "영국과 손을 끊고 프랑스-스페인 동맹과 손잡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주앙이 거부하자, 스페인의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는 나폴레옹의 권고에 따라 포르투갈을 침공해 올리벤사 등 일부 영토를 공략했다. 이후 엘바스를 공격하려 했다가 프란시스쿠 드 노로냐 장군이 지휘하는 포르투갈 수비대에게 격퇴당한 뒤 철수했고, 양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럼에도 고도이는 엘바스 외곽에서 오렌지를 가져와서 마리아 1세에게 리스본으로 가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오렌지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일컬어졌다.

1801년 6월 6일 포르투갈은 영국 선박에 항구를 폐쇄하고 프랑스에 상업적 특권을 제공하고 올리벤사를 스페인에게 양도하며, 스페인은 그 대가로 철수한다는 내용의 바다호스 협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이에 대응해 1801년 7월 윌리엄 헨리 클린턴 대령 휘하의 3,500 병력을 파견해 북대서양에 있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을 점령했다. 이들은 1802년 아미앵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그곳에 주둔했다. 또한 1801년 9월 29일 포르투갈령 기아나의 절반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대가로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는다는 내용의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1805년, 아내 카를로타가 남편을 섭정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섭정이 되려다 발각되어 켈루스 궁전에 유폐되었다. 이후 주앙은 코임브라 대학교 출신이며 자유주의 성향을 갖춘 정치가 및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자기 편으로 포섭하고자 노력했으며, 학자들의 권고에 따라 여러 과학 탐험을 조직하고 식민지의 잠재력과 사회 및 경제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왕립 해양 학회(Royal Sociedade Maritima)는 포르투갈 제국의 지리와 해상 및 수로를 다룬 지도 제작을 담당했고, 아르쿠두세구 문학관(Casa Literária do Arco do Cego)은 농업, 제조, 과학 및 예술에 관한 고급 연구의 제작 및 출판을 담당했다. 그러나 자유주의를 못마땅하게 여긴 보수 성향의 인사들이 대거 반발했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주의 성향의 정책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영국에 우호적이었지만, 영국이 마데이라 섬을 점거하고 인도에서의 포르투갈인들의 활동을 제약하자 포르투갈 궁정 내에서 프랑스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주앙은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나 영국 중 한 국가와 갈라섰다가는 친 영국파나 친 프랑스파가 이반해 나라가 위태로워질 거라 여기고, 할 수 있는 한 두 나라에게 잘못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1802년에 체결된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고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재개했을 때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영국 국왕 조지 3세에게 밀사를 보내 "프랑스의 협박 때문에 부득이 전쟁을 선포했지만 영국에 적대행위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라"고 알렸다.

1805년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상대로 트라팔가 해전에서 완승을 거두자, 주앙은 즉시 영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관계를 회복했다. 이듬해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반포하면서 포르투갈에 이를 따를 것을 요구하자, 영국과의 무역에 의존하는 자국 상황에 대륙 봉쇄령에 동참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여겨 거부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바다호스 협약이 파기되었다고 선언하고 고도이와 협의해 양국이 포르투갈을 양분하는 대가로 스페인군의 지원을 받아냈다. 1807년 말 장앙도슈 쥐노가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7,000명이 포르투갈을 전격 침공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이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 일부 인사들은 영국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자고 주장했고, 또다른 인사들은 프랑스에게 항복하고 영국과 관계를 끊자고 주장했다. 그러던 11월 16일 영국 함대가 리스본 항구에 도착했다. 그들은 왕실을 브라질로 호위할 의향이 있지만, 프랑스와 손잡는다면 리스본을 무력으로 장악하겠다고 통보했다. 주앙은 국론이 분열되고 군대는 프랑스에 비하면 지극히 미약한 상황에서 프랑스와 맞서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고, 그렇다고 영국을 적대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고심 끝에 영국 함대에 몸을 싣고 브라질로 피신하기로 마음먹었다.

파일: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 망명.png

1807년 11월 29일, 주앙과 왕실 인사들, 고위 관료들과 하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파가 영국 함대 15척에 몸을 실었다. 그는 왕국의 무결성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부득이 브라질로 망명할 수 밖에 없다며, 자신이 떠난 뒤에도 질서를 유지하며 피를 헛되이 흘리지 말고 침략자들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내용의 포스터를 거리 곳곳에 붙이게 했다. 그는 아들 페드루, 미겔과 함께 한 배에 올라탔고, 아내 카를로타와 다른 딸들을 다른 2척의 배에 태웠다. 그와 함께 승선한 사람들의 수는 분명하지 않다. 19세기에는 최대 3만 명이 그를 따라갔다는 이야기가 대두되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4,000명에서 7,000명 사이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이 몸을 실은 배들은 하나같이 수많은 승객과 짐이 가득 실린 과적 상태였으며, 승객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잠을 자야 했고 곳곳에 배설물이 쌓였다. 갈아입을 옷조차 챙겨오지 못하다보니 머릿니가 들끓는 등 위생 상태가 지극히 나빴고 많은 이들이 병에 걸렸다. 또한 보급품이 부족해서 배급이 실시되었다. 게다가 항해 내내 무더위에 시달려야 했고, 2번의 폭풍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남미에 근접할 무렵, 주앙은 본래 리우데자네이루에 곧바로 가려던 계획을 변경해 바히아의 사우바도르를 먼저 들리기로 했다. 이는 브라질 최초의 중심지였다가 리우데자네이루에게 그 지위를 잃은 뒤 민심이 흉흉했던 이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였다. 다만 다른 배들은 원래 목적지인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했다.

1808년 1월 22일, 주앙의 배와 다른 2척이 사우바도르에 도착했다. 브라질 식민 행정관을 맡고 있던 폰트 백작 주앙 드 살다냐 다 가마 멜루 토르스 게드스 브리투는 시민들에게 섭정 왕세자의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마중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 부두는 텅 비어 있었다. 주앙은 고된 여정에 시달린 귀족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하선을 다음 날로 미뤘다. 이튿날 배에서 내린 주앙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경의를 표하고자 찾아온 모든 이들이 베이자망(beija-mão: 군주의 손등에 입맞춤하는 의식)를 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사우바도르 총독부에 입성한 후, 주앙은 식민지 주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경제학과 외교학과 학교를 독자적으로 설립하는 것을 허락하고, 우호적인 국가에 대한 항구 개방을 용인하며, 마리아 1세가 포르투갈의 섬유업이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 식민지인들이 섬유품을 개별적으로 생산하여 해외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한 <1785년 헌장>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사우바도르 시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하는 한편, 왕실을 위한 호화로운 궁전을 짓겠으니 이곳에 계속 머물러달라고 요청했다. 주앙은 자신을 정성껏 영접하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통치를 하겠다고 분명히 밝힌 뒤 그 곳을 떠났다. 리우데자네이루 시민들은 3월 8일에 도착한 주앙을 위해 9일간의 축하 행사를 거행했다.

그 후 포르투갈 왕실은 리우데자네이루를 새 수도로 삼고 총독의 대저택에 임시로 머물다가 상인 엘리아스 안토니우 로프스가 마련한 별장으로 이주했고, 몇 차례의 확장을 거치면서 훗날 브라질의 역대 통치자들이 기거하게 될 파수 드 상 크리스토방 궁전이 세워졌다. 그러나 왕실 자제와 귀족들을 만족시킬 만한 집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카르무 수녀원 외 수많은 주택들이 몰수되고 주인들은 푼돈을 받고 쫓겨났다. 한편 주앙과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던 카를로타 왕세자비(훗날 왕비)는 보타포구 해변 농장에 머물렀다.

당시 약 6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리우데자네이루는 포르투갈의 귀족들이 한꺼번에 모여들면서 크게 달라졌다. 상인들은 사치품을 포함해서 귀족들이 만족할 만한 식품 및 기타 소비재 공급을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귀족들을 위한 수많은 새 거주지 및 기타 건물이 수 년간 건설되었으며, 서비스 및 기반 시설이 대폭 개선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내게 된 주민들은 차츰 포르투갈 왕실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품었다.

파일:주앙 6세의 궁정에서 거행된 손키스 행사.jpg
주앙 6세의 궁정에서 거행된 손키스 행사 풍자화

주앙은 시민들의 불만을 눈치채고 그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포르투갈에서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손키스 의식을 리우데자네이루에서도 주기적으로 실시했다.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날마다 귀족과 평민이 섞인 긴 줄이 섭정 왕세자의 거처에 늘어섰고, 주앙은 그들 한 사람씩 대면하여 손등을 내밀면서 따뜻한 말을 건넸다. 브라질 화가 엔히크 레베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왕세자는 어떤 사람을 위로하고 또다른 이들을 격려했다. 왕세자는 천박한 매너, 촌스러운 말투, 쓸데없는 고집, 장황한 언사 등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군주라기보다 아버지처럼 민중을 대했다."

브라질 작가 및 역사가 마누에우 지 올리베이라 리마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자신을 만나러 온 자들의 얼굴이나 탄원을 혼동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삶과 가족, 심지어 과거에 발생한 작은 사실을 언급해 그들 모두를 놀라게 했다."

주앙은 브라질에 머무는 동안 많은 기관과 공공 서비스의 창설을 공식화하고 경제, 문화, 예술 및 기타 국가 생활 영역을 촉진했다. 그는 많은 브라질인을 왕실 비서로 고용하고, 언론 및 제조 시설의 설치를 허가하고, 새로운 농업 문화를 도입했다. 또한 종교재판소의 폐해를 인정하고 더 이상 종교재판을 열지 못하게 했으며, 도로를 개선하고, 여러 학급, 학교 및 공립 아카데미를 만들고, 과학 연구를 장려하고, 공공 행정을 조직했다. 이 모든 조치는 이러한 자원이 없었던 식민지를 관리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시행된 것이었지만, 브라질이 독자적인 국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주앙이 포르투갈을 떠났을 때 포르투갈에 남겨둔 섭정위원회는 프랑스군의 공세에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다. 쥐노의 프랑스군은 포르투갈을 행군하는 동안 막대한 비전투 손실을 입었던 터라 리스본을 가차없이 약탈했다. 그 바람에 리스본의 많은 역사적 명소가 파괴되었으며, 리스본 시내의 식량은 사라지고 화폐 가치가 폭락했으며, 환전소와 사업체는 문을 닫았다. 그 후 쥐노는 군사 정부를 수립한 뒤 나폴레옹 1세의 명령에 따라 포르투갈 군인을 대거 징발해 독일에 주둔한 프랑스군에 파견했으며, 모든 지방 행정직과 치안관에 프랑스인을 임명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에 분노해 리스본에서 여러 차례 무력 시위를 벌였지만 그때마다 가차없이 진압되었다. 많은 포르투갈인이 내륙의 외딴 지역으로 숨거나 영국 등 해외로 피신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약탈과 몰수로 재산을 잃었다. 런던의 포르투갈 대사는 영국 국왕 조지 3세에게 약 2만 가량의 주민만이 리스본에 남아있으며 그나마도 거의 모두가 굶주리고 있다며 포르투갈을 구원해달라고 호소했다.

포르투갈인들은 프랑스의 폭압적인 정책에 분노해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파루와 포르투에 2개의 의회가 수립되었고, 각지에서 별도의 지방 의회가 세워져서 행정망이 개편되었다. 쥐노는 이를 진압하기엔 병력이 부족하고 자기가 출진했다가 리스본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리스본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1808년 8월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이 포르투갈에 상륙해 쥐노를 여러 차례 격파했다. 이에 쥐노는 아서 웰즐리의 뒤를 이어 부임한 영국 장군들과 협상한 끝에 포르투갈에서 물러나는 대신 영국 수송선에 약탈품과 함께 탑승하여 프랑스로 수송된다는 내용의 산트라 협약을 체결하고 포르투갈을 떠났다.

1809년 1월 2일 지방 총독들의 기능과 권한이 정해졌고 포르투갈 재무부는 브라질에서 임명된 왕립 재무부 장관에 종속되었다. 그 해 3월 프랑스군이 포르투갈 북부를 침공했지만 영국 장군 윌리엄 베레스포드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후 포르투갈군이 재편되어 영국군과 합류해 프랑스군의 연이은 침략을 격퇴하고 아서 웰즐리가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치르는 기반이 되어줬다. 한편 브라질에 있던 주앙은 프랑스에 전쟁을 정식으로 선포하고 프랑스령 기아나를 공략했다가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자 프랑스에 돌려줬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상황은 프랑스군의 위협 외의 다른 이유로도 위험해졌다. 지방 총독들은 섭정 왕세자가 자신들에게 부과한 권한으로는 외부의 적에 대한 효율적인 방어를 할 수 없으며, 동요하는 시민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또한 왕실이 자신들을 버리고 브라질로 망명한 것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매우 강했고, 자유주의자들은 이 때를 틈타 주앙 5세부터 이어지는 절대군주제를 '자유군주제'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앙은 이에 대응해 언론과 비밀 결사에 검열을 가해 선동적인 사상의 유포를 억제하려 했고, 알로마 후작 페드루 드 아르마다를 "프랑스주의"를 설파하는 등 왕실에 불손한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하고 모든 직함과 특권을 박탈했다. 또한 지방 총독들의 호소에 따라 1809년 8월 30일 그들의 권한을 확대해 군주의 허락을 따로 받지 않고도 임의로 군대를 이끌고 시민들을 통제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로도 무질서해진 사회를 통제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고, 포르투갈 경제는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 포르투갈은 전쟁 기간인 1807년에서 1814년 사이에 전체 인구의 1/6을 전쟁, 기근, 질병, 실종 등의 요인으로 상실했다.

2.6.8. 포르투갈 왕실의 귀환과 브라질의 이탈

1814년 프랑스군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최종적으로 축출되면서 전쟁이 종식된 후, 포르투갈인들은 주앙에게 조속히 귀국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불안정하고 이웃의 스페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포르투갈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브라질에서 그대로 통치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815년 12월 16일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을 창설하고 리우데자네이루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1816년 3월 20일 정신병에 시달리던 마리아 1세가 사망하면서, 주앙 왕자는 비로소 주앙 6세로 등극했다. 대관식은 1818년 2월 6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성대한 축제와 함께 거행되었다.

한편, 카를로타 왕비는 남미 대륙의 스페인인들과 히우 지 플라타 지역(현재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민족주의자들과 손잡고 남편을 퇴위시킨 뒤 자신이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들의 새로운 여왕으로 등극하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도중에 정보가 새는 바람에 실패했고, 주앙 6세는 그녀를 별궁에 유폐하고 철저히 감시하게 했다. 이후 브라질의 지배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1817년 몬테비데오를 공략하고 1821년 시스플라티나 주를 합병했다. 또한 1817년 장남 페드루의 아내로 오스트리아 제국 초대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마리아 레오폴디네를 결혼시킴으로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었다.

국왕이 포르투갈에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포르투갈인들은 각지에서 소요를 일으키며 왕을 압박했으며 자유주의자들은 영국식 의회를 포르투갈에도 도입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브라질에서도 자유주의자들의 선동이 이어졌다. 1817년 헤시피에서 시작된 페르남부쿠 반란이 일어났다. 도밍구스 주제 마르틴스, 안토니우 드 안드라다, 프레이 카네카 등이 이끄는 반란군은 공화 정부를 페르남부쿠에 수립하고 미국, 아르헨티나,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몇 달 만에 토벌되었다.

1820년 10월 17일 포르투에서 시작된 반란이 여러 도시들에 빠르게 확산되어 마침내 리스본에서 민중 봉기가 발발했다. 반란을 주동한 이들은 자신들이 "자유 혁명"을 일으켰다고 자축하며 포르투갈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왕실이 포르투갈로 즉각 돌아와야 하며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브라질과의 무역에서 포르투갈의 독점권을 회복하여 브라질을 식민지 상태로 되돌리고 공식적으로 "브라질 왕국"이 아닌 "브라질 공국"으로 격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왕이 돌아올 때까지 잠정적인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제헌 의회 선거를 실시해 변호사, 교수 출신의 의원들이 선출되었다.

1821년 1월 30일, 새 의원들로 구성된 코르테스가 리스본에서 소집된 뒤 군주의 즉각적인 귀환을 요구했다. 이 소식이 브라질에 전해지자, 이번에는 브라질인들이 반발했다. 그들은 포르투갈에 예속된 식민지인 취급을 받다가 주앙 6세의 망명 이래로 '브라질 왕국의 일등 백성'으로 인정받았는데, 이제와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보고, 주앙 6세의 귀국을 강력히 반대했다. 주앙 6세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페드루를 포르투갈에 보내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자유주의 성향의 서적을 탐독하여 열렬한 자유주의자가 된 아들이 포르투갈에 갔다가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페드루의 출발을 가능한 한 연기했다.

그러던 1821년 2월 26일, 포르투갈 병사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새 내각을 임명하고 포르투갈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외치며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4월 21일 리우데자네이루에 모인 자유주의자들이 자체적으로 선거를 벌여 의원들을 선출해 코르테스를 조직했다. 주앙 6세는 이 사태를 어찌 수습해야 할 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다가 페드루 왕자로부터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설득을 받아들여 코르테스에 선출된 의원들을 받아들였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주앙 6세는 결국 포르투갈로 귀환하기로 했다. 그는 아들 페드루를 브라질의 섭정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1821년 4월 26일에 왕실 식구들 및 귀족들과 함께 리스본으로 향했다. 전승에 따르면, 주앙은 포르투갈로 떠나기 전에 페드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페드루, 브라질은 곧 포르투갈에게서 분리되겠구나!"

7월 3일 리스본 항구에 입항한 주앙 6세는 자유주의자들의 영접을 받은 뒤 그들이 정한 헌법을 승인했다. 1822년 10월 1일부터 헌법이 효력을 발휘되면서, 포르투갈 국왕은 상당한 특권을 상실했다. 카를로타 왕비는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맹세를 수행하기를 거부했다가 왕비의 칭호를 박탈당하고 켈루스 궁전에 유페되었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아들 페드루가 브라질 자유주의자들의 추대를 받아 1822년 9월 7일 브라질 제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로 등극했다. 주앙 6세는 예상했던 일이었기 때문인지 아들이 브라질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1823년 6월 27일, 카를로타 왕비의 부추김을 받은 미겔 왕자가 절대군주제를 회복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내심 자유주의자들 때문에 권력이 제한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주앙 6세는 즉시 호응해 제복을 입고 공개석상에서 아들 옆에 모습을 드러냈고, 병사들은 왕과 왕자를 향해 손뼉을 쳤다. 이후 코르테스를 무력으로 압박한 끝에 해산시키고 헌법을 대폭 수정해 절대군주 체제를 복원시켰다. 이후 카를로타의 권리가 회복되었고, 1823년 6월 5일 자유 헌법 수호를 위해 들고 일어난 시위대를 진압하고 일부 자유주의자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카를로타와 미겔은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1824년 4월 29일, 미겔은 리스본에서 수비대를 이끌고 주앙 6세를 체포한 뒤 왕을 살해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로 파수 다 벵포스타에 감금했다. 이후 여러 정적을 체포해 반역 혐의를 적용해 처형할 준비를 하는 한편, 주앙 6세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그러다 외국 대사들이 궁궐에 들어서서 왕을 뵙기를 청하자, 반란군은 외국과 갈등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주앙 6세에게 다소의 자유를 줬다.

주앙 6세는 영국 대사의 권유를 따라 5월 9일 카시아스(Caxias)로 여행가는 척 했다가 리스본 항구에 정박한 영국 군함 윈저 호에 탑승했다. 이후 영국군의 도움에 힘입어 미겔을 체포한 뒤 추방했고, 뱀포스타에 돌아온 뒤 반란군 전원을 사면하는 대가로 다시 한 번 충성 서약을 받았다. 카를로타는 다시 반란을 준비했지만 얼마 안가 발각되어 켈루스 궁전에 재차 감금되었다. 1824년 6월 5일 지난날 추방되었던 자유주의자들을 사면하고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새 헌법을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많은 대신들은 포르투갈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브라질의 반란을 진압할 원정군을 파견하자고 제안했지만, 주앙 6세는 포르투갈이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거부하고 협상을 택했다. 1825년 8월 29일, 포르투갈과 브라질은 영국의 중재 하에 양자를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주앙 6세는 투옥된 모든 브라질인을 석방하고 양국 간의 무역을 승인하고, 페드루 1세가 브라질의 황제를 칭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2.6.9. 포르투갈 내전

1826년 3월 4일, 주앙 6세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점심을 먹다가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벵포스타 궁전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구토, 경련 및 실신을 며칠간 지속하다가 3월 10일 오전 5시경에 사망했다. 주앙 6세 사후 브라질 제국 황제 노릇하고 있던 페드루 1세가 페드루 4세로서 포르투갈 왕위를 겸임하게 되었지만, 브라질 정부는 포르투갈의 군주인 사람을 섬길 수는 없다며 반대했고, 포르투갈 역시 아버지를 배신하고 황제를 칭한 그를 군주로 섬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에 페드루는 5월 2일 포르투갈 왕위에서 퇴위하고 딸 마리아 2세를 포르투갈 여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마리아 2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페드루의 누이인 이자벨 마리아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이자벨 마리아의 섭정은 극도로 불안정했다. 자유주의자들과 절대군주제 옹호자들 간의 불화가 정부를 지배했고, 시의회 내에서도 심각한 분열이 일었으며, 리스본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상황이 이처럼 좋지 않자, 페드루는 미겔에게 포르투갈의 섭정을 제안하는 동시에 마리아 2세가 성년이 되면 결혼하라고 권유했다. 미겔은 형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포르투갈 헌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뒤 포르투갈에 복귀했다.

미겔은 초기에는 자유주의자들과 협의하며 국정을 그럭저럭 이끌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1828년 3월 13일 헌법에 명시된 대로 새로운 선거를 실시하지 않고 코르테스를 해산했다. 많은 귀족과 성직자, 몇몇 사회 인사들은 미겔에게 이참에 헌법을 페지하고 국왕으로 통치하라고 권유했다. 여기에 4월 25일 코임브라 대학 총회는 미겔에게 왕위를 차지할 것을 요청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미겔은 형과 완전히 갈라서는 것을 주저했지만, 어머니 카를로타가 적극적으로 권하자 마침내 마음을 굳게 먹고 1828년 7월 7일 정식으로 포르투갈 국왕 미겔 1세에 선임되었다. 마리아 2세는 영국으로 피신한 뒤 영국 당국의 지원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브라질로 돌아갔다.

미겔 1세의 즉위에 반발한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축출하고 마리아 2세를 복위시키기 위해 각지에서 봉기했다. 1828년 8월, 포르투의 수비대가 반란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자유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코임브라로 진군했다. 미겔 1세는 이에 대응해 군대를 소집한 뒤 포르투를 즉시 봉쇄해 조기 진압에 성공했다. 라구스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라구스 군영 내 자유주의파 장군이 미겔파 장군에게 총살당하면서 진압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마데이라 제도아소르스 제도의 테르세이라 섬으로 피신하여 항전을 이어갔다. 마데이라 섬은 곧 포르투갈 해군에게 장악되었지만, 테르세이라 섬은 쉽게 굴복하지 않고 자유주의를 계속 따랐다.

1829년 3월 6일, 리스본 시내 카이스두소드레(Cais do Sodré)에서 자유주의자들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고, 모레이라 준장 및 장교들과 추종자들이 총검에 찔러 살해되었다. 그 해 5월 7일 모포르투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가 며칠 만에 진압되었고, 수비대원 전원이 총살되었다. 빌라 프랑카 데 시라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자유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간주된 70여 명의 인사를 학살했다. 카를로타 역시 자유주의자들을 적대하는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하며 그들에 대한 탄압을 지원했다. 1830년 1월 7일 카를로타가 세상에서 잊힌 채 사망한 후에도 미겔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자에 대한 잔혹 행위가 지속적으로 자행되었다.

심지어 포르투갈에서 활동하던 영국인과 프랑스인들까지 공격당하자, 초기에 수수방관하던 두 나라는 미겔 정권에 반감을 품었다. 그들은 외교관을 잇따라 파견해 항의했지만, 미겔 1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에 프랑스 제독 알빈 레네 루생은 루이필리프의 지시에 따라 타구스를 항해하여 8척의 포르투갈 선박을 나포한 뒤 1831년 7월 14일에 선박을 돌려주는 대가로 희생된 프랑스인들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미겔 정부의 숙청은 지속되었다. 리스본에 주둔한 제4보병대는 1831년 8월 22일과 23일에만 29명의 정치범을 처형했으며, 대부분의 사형 선고는 24시간 이내에 집행되었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이 유일하게 버티고 있던 테르세이라 섬에서는 안토니우 주제 세베링 드 노로냐가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그는 방어 시설을 재건하고 군대를 훈련시킨 뒤 1829년 8월 11일 섬을 침공하려는 미겔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그의 군대는 1831년까지 아소르스 제도의 모든 섬을 장악했다.

이 무렵, 브라질 황제 직위에서 물러나 프랑스로 망명한 페드루라파예트 후작의 후원에 힘입어 외국 용병대와 자유주의 성향의 자원 부대를 이끌고 1832년 초 아소르스 제도에 갔다. 이후 몇달 간 재정비를 한 후 포르투갈 본토로 출발해 7월 9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포르투에 입성했다. 이 소식을 접한 미겔 1세는 군대를 동원해 포르투를 포위하여 1년 이상 포위 공격을 가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이후 영국이 페드루를 돕기로 결정하고 찰스 네이피어 제독의 해군을 파견하자, 미겔은 샤를 10세 몰락 후 미겔을 돕기 위해 찾아온 프랑스 장군 루이 오귀스트 빅토르를 비롯한 해외의 절대왕정주의자들과 스페인 왕국의 지원을 받으며 대항했다. 그러나 포르투를 향한 무리한 공세가 좌절되면서 기세가 꺾였고, 1833년 7월 5일 상 비센트 곶 해전에서 미겔파 함대가 찰스 네이피어가 이끄는 영국 함대에게 궤멸되고 7월 24일 안토니우가 리스본을 공략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설상가상으로 1833년 9월 29일 이사벨 2세의 즉위에 반발한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역시 포르투갈처럼 내란에 휩쓸렸다. 이로 인해 스페인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미겔 정권은 페드루 1세 지지자들에게 속절없이 밀려났다.

미겔 1세는 이런 상황에서도 포르투갈 북서부에서 항전했지만 1834년 5월 16일 아세이세이라(Asseiceira) 전투에서 안토니우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며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어버렸다. 결국 엘바스 쪽으로 퇴각한 미겔 1세는 이 이상의 항전은 불가능하니 평화 협상을 제기하자는 전쟁평의회의 결의를 받아들였다. 이후 십여 일간의 협상 끝에 1834년 5월 26일 미겔 1세가 퇴위하고 지지자들과 함께 포르투갈을 떠나는 대신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에보라몬트(Évora Monte) 협약이 체결되었다. 미겔은 제노바로 향하는 영국 전함에 승선한 뒤 로마로 이동했다.

이후 포르투갈 코르테스는 미겔과 그의 모든 후손을 포르투갈에서 영구 추방한다고 선언하고 헌법 98조에 미겔의 후손들은 포르투갈 왕위를 이을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미겔 1세 이후 포르투갈에는 더 이상 전제군주가 나타나지 않았다.

2.6.10. 마리아 2세

6년간 이어진 내전 끝에 복위에 성공한 마리아 2세는 아버지 페드루 1세의 섭정을 받았다. 1834년 9월 18일, 포르투갈 의회는 성년이 된 마리아의 친정을 선포했고 그 날 첫번째 장관 회의가 그녀의 주재 하에 거행되었다. 그리고 9월 24일 페드루 1세가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그녀는 명실상부한 포르투갈 군주가 되었다. 이후 아버지가 생전에 정한 대로 외젠 드 보아르네의 장남이자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며 페드루 1세의 2번째 아내 아멜리의 오빠인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1835년 1월 28일 리스본에서 거행되었지만, 불과 2달 후인 3월 28일에 오귀스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오귀스트의 장례식이 거행된지 2주 후, 의회는 여왕에게 조속히 재혼해서 후계자를 낳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이에 대해 잇따라 사망한 아버지와 남편을 애도하면서 "같은 제안을 같은 날 2번 듣는 것은 너무 괴로운 마음입니다!"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측근들은 그녀가 상속인 없이 사망해버리면 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포르투갈의 운명을 가늠할 수 없다며 결단을 내려달라고 촉구했다. 결국 그녀는 재혼을 서두르기로 했다.

마리아는 자신을 잘 대해줬던 프랑스 왕실과 혼사를 논의했지만, 프랑스와 포르투갈 간의 결혼 동맹이 맺어지는 것을 우려한 영국의 반대로 실패했다. 여기에 마리아의 계모인 아멜리가 페드루 1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리아 아멜리아가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녀가 되어야 한다며 마리아의 재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결혼 협상을 꿋꿋이 이어간 끝에 1836년 4월 9일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19세된 왕자 페르난두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곧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1837년 9월 16일 첫 아들 페드루가 태어나면서 왕위 계승 논란이 종식되었다.

마리아는 1836년에서 1853년까지 11번의 임신을 했으며, 그 중 7명은 유아기를 무사히 넘겼다. 그녀는 그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들에게 적절한 행동을 요구했다. 한 번은 그녀가 어린 페드루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어느 평민 아이가 왕자에게 다가와 껴안았다. 깜짝 놀란 왕자가 소년을 밀쳐내고 꾸짖자, 마리아는 왕자의 팔을 잡고 그 아이를 강제로 포옹하게 한 뒤, 아이에게 용서를 구했다. 마리아의 정적들조차도 그녀의 다정한 성품만큼은 인정했다. 야당 신문 <이스페트루(Espectro)>는 1847년경에 그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여왕만큼 고결한 아내와 어머니는 없다. 그녀의 가정은 유럽의 모든 이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는 정치 방면에서 곤경에 처했다. 당시 포르투갈 헌법은 자유주의를 국가의 절대적인 이념으로 표방하면서도 의회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권을 국왕에게 부여했다. 또한 의회는 영국의 제도를 본받아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었는데, 국왕이 귀족들로 상원 의원을 임명하고 하원은 제한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들이 차지했다. 그러나 이 헌법은 좌우 모두의 반대에 직면했다. 많은 포르투갈인들은 미겔 1세가 몰락한 후에도 절대왕정을 여전히 추종했으며, 자유주의자들로 둘러싸인 여왕을 탐탁치 않게 바라봤다. 한편 언론을 장악한 좌파 계열은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의회에 재직하는 모든 의원이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대중 주권을 인정하는 1822년의 헌법으로 돌아가야 하고 절대적인 거부권이 아닌 제한된 거부권만 군주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외쳤다.

1836년 9월, 리스본의 반체제 자유주의자들이 리스본에서 9월 혁명을 단행했다. 리스본 수비대 상당수가 혁명에 가담하자, 페르난두는 아내에게 항구에 정박해 있는 영국 해군 함정으로 피신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랬다가는 저들이 군주제 폐지까지 거론할 수도 있다"며 거부하고, 시위대 대표와 접견한 뒤 1822년 헌법을 받아들이겠다고 서약했다. 이후 혁명 지도자 사 다 반데이라가 내각을 구성했지만, 마리아는 9월 혁명을 되돌리기 위해 벨기에 대사 실뱅 반 데 바이어를 통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와 연락했다. 레오폴드 1세는 그녀를 도와주는 대가로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식민지 중 하나를 벨기에에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여왕이 이를 받아들이자, 레오폴드 1세는 영국 정부에 벨기에군을 포르투갈로 수송하는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한편, 마리아는 영국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영국 정부는 타구스 강에 영국 함대를 파견해 그녀를 보호해주겠다고 답했다. 이에 여왕의 측근들은 그녀를 벨렝 궁전으로 피신시킨 뒤 영국의 보호를 받으며 헌법을 되돌리는 방안을 고려했다. 하지만 이 계획의 주동자인 살다냐 공작 주앙 카를루스 그레고리오 도밍구스 비센트 프란시스쿠와 테르세이라 공작 안토니우 주제 세베링 드 노로냐 간의 의견이 엇갈렸다. 살다냐 공작은 1822년 헌법으로 돌아간 것에 불만을 품은 보수파가 장악한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한 뒤, 반데이라 내각이 그쪽에 관심을 돌린 틈을 타 여왕을 벨렝으로 피신시키자고 주장했다. 반면 테르세이라 공작은 여왕을 가능한 한 빨리 벨렝으로 피신시킨 뒤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는 사이, 왕실이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가 새면서 리스본 언론사에 대서특필되었다. 이를 접한 총리 사 다 반데이라와 내무장관 마누엘 다 실바 파소스는 여왕을 찾아가 사실 여부를 물었다. 마리아가 벨렝 궁전으로 행차하여 영국군의 보호를 받을 예정이라며 사실상 인정하자, 두 사람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마리아는 사직서를 수락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았고, 마누엘은 그녀가 할아버지 주앙 6세가 그랬던 것처럼 영국 선박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한다면 퇴위 신호로 간주될 거라고 경고했다. 이후 마리아는 남편 페르난두와 함께 벨렝 궁전으로 향해 오후 4시에 도착한 뒤 테르세이라 공이 동원한 충성스러운 국가 방위군의 호위를 받았다.

그 후 여왕은 모든 장관을 해임하고 주제 베르나르디누 드 포르투갈 이 카스트루를 총리로 삼아 새 내각을 구성한다고 선언했고, 기존 헌법을 복원한다는 내용의 법령에 서명했다. 이에 9월 혁명을 따르는 나머지 방위군이 집결해 벨렝으로 진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여기에 친위 쿠데타에 분노한 민중이 대거 모여들어 군대로부터 무기를 수령하고 민병대를 결성해 벨렝을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급기야 여왕의 부름을 받고 내각에 참여하러 가던 아구스티뉴 주제 프레이레는 도중에 9월 혁명을 지지하는 방위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아구스티뉴가 총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벨렝 궁전을 지키던 장병 일부가 겁에 질러 집으로 돌아가버렸고, 일부 포병 부대는 리스본 지지로 돌아섰다. 이에 여왕이 구원을 호소하자, 영국군 함대 지휘관 하워드 드 윌든은 500~700명의 병력을 벨렝과 알칸타라 사이의 지역에 상륙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리스본 시민들은 외국군의 개입에 격분해 민병대에 대거 가담하여 벨렝을 압박했고, 벨렝 수비대 역시 대부분 이탈해버렸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여왕은 영국군에게 배로 돌아가달라고 요청하고 살다냐 공작에게 전령을 보내 리스본 정부와 협상해 줄 것을 부탁했다. 살다냐 공작은 즉시 리스본 정부와 협의한 끝에 마리아가 이틀 전에 해산한 내각을 재선임하는 대가로 왕권이 존중받을 거라는 합의를 이뤄냈다. 이후 11월 5일 오후 5시, 마리아와 페르난두는 방위군과 군중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리스본에 돌아갔다. 그 후 모든 방위군이 숙소로 돌아갔고, 리스본은 평온을 되찾았다. 1836년 11월 12일에 제헌의회가 소집되었고, 11월 18일 쿠데타 시도에 연루된 이들을 전원 사면한다는 칙령이 발표되었다. 이리하여 혼란이 가라앉는 듯했지만, 이 일로 상호간의 불신이 고조되었다.

이후 수 개월간 헌법 개정이 논의되었지만 결론이 좀처럼 나오지 않자, 민중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다. 그러던 1838년 3월 초 주제 루시우 트라바수스 발데스가 전쟁장관 직을 사임하자, 급진적인 클럽들과 방위군 병사들은 마리아가 기존 헌법을 부활시키기 위해 새 장관을 세울 것을 우려했다. 1838년 3월 4일, 리스본 총독이자 방위군 사령관인 프란시스쿠 소아르스 칼데이라는 군단 사령관들을 초청해 9월 혁명의 기치에 충실하지 않은 장관을 임명하지 말 것을 여왕에게 요청하는 청원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대다수 사령관들은 거부했지만, 히카르두 주제 호드리기스 프랑카가 이끄는 포병 대대는 동의했다. 다음날, 프랑카의 포병 대대는 여왕에게 충성을 다하겠지만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제헌 의회에 보냈다.

1838년 3월 7일, 마리아는 장군들을 사사로운 목적으로 소집한 책임을 물어 칼데이라를 해임하고 안토니우 베르나르두 다 코스타 카브랄을 새 총독에 선임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카 포병 대대는 격분했다. 3월 9일 아침, 그들은 병기고를 점거하고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정부군이 출동해 병기고를 포위하여 무력 충돌이 곧 벌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동족끼리 또다시 피를 보는 것은 원하지 않았던 프랑카는 정부군 지휘관 조르즈 드 아빌레스 수자르테 드 소자 타바르스와 병기고 건너편의 마르쿠스 필리프라는 이름의 커피 하우스에서 접견해 논의한 끝에 반란군은 오후 3시에 병기고를 떠나는 대가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내용의 '마르쿠스 필리프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프랑카의 포병 대대는 병기고를 떠나 로시우 광장을 행진한 뒤 해산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프랑카가 해임되고 포병 대대도 폐지되자, 3월 10일 아침 격분한 장병들이 또다시 병기고 근처에 모여 프랑카의 복직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정부가 이에 대해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자, 그들은 3월 13일 왕궁을 향해 행진하다가 앞을 가로막은 정부군과 맞붙었다. 그 결과 수적으로 열세한 그들이 큰 피해를 입고 상 벤투 궁전 앞에 있는 예수회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이후 토벌대에게 에워싸인 포병 대대원들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로시우 광장으로 행진하여 무기를 반납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들이 로시우 광장에 도착했을 때 갑작스러운 발포 소리가 들려왔고, 양자는 서로가 자신들에게 총을 쐈다고 여기고 총기를 난사했다. 그 결과 많은 방위병들이 부상당해 체포되었고, 나머지는 무기를 버리고 집으로 달아났다.

마리아와 포르투갈 정부는 이 사건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또다른 봉기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사건 주모자들을 사면해 사건을 덮기로 했다. 또한 제헌의회는 헌법 개정 작업을 신속하게 진행해 마리아의 19번째 생일인 1838년 4월 4일에 기존 헌법 옹호자들과 급진주의자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헌법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상원은 앞으로 국왕의 선임이 아닌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되지만, 그 외에 많은 조항이 기존대로 유지되었다. 그녀는 이 헌법을 확고하게 옹호하면서, 앞으로 이를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밝혔다.

1939년, 주제 루시우 트라바수스 발데스가 총리에 선임되었다. 이후 수년간 상대적인 정치적 평화가 이어졌고, 정부에 회유된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반 가톨릭 성향을 포기했다. 또한 1840년 12월 26일 미국과 통상 및 항해에 관한 상호 조약이 체결되면서 포르투갈의 무역 수지가 개선될 기미를 보였다. 1841년 6월 9일, 방위군 개혁을 주도하다가 병사들의 반발을 사자 사임한 발데스의 뒤를 이어 조아킹 안토니우 드 아기아르가 총리에 취임했다.

1842년 1월 27일, 안토니우 베르나르두 다 코스타 카브랄이 포르투에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여전히 혼란스러운 포르투갈을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리스본 정부는 이에 맞서 조아킹 안토니우 드 아기아르 총리를 페드루 드 소자 이 홀스타인으로 교체했지만, 2월 8일 리스본 수비대가 쿠데타군에 귀순하면서 진압에 실패했다. 카브랄은 리스본에 입성한 뒤 총리에 선임된 후 3월 18일 새로운 행정법을 공포하여 중앙 및 지방 공공 행정을 통제했다. 이에 주제 루시우 트라바수스 발데스가 토레스노바스(Torres Novas)에서 반란을 일으켜 카브랄 정권을 타도하려 했지만,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한 끝에 1844년 마지막 보루인 알메이다 시마저 공략되자 항복하고 추방형에 처해졌다.

마리아는 1843년 카브랄을 국가 평의원에 선임하고 1844년에 "왕국의 수호자" 칭호를 내렸으며, 1845년에 토마르 백작에 선임하는 등 굳게 신임했다. 그러나 그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친족들이 여러 요직을 독차지하자, 많은 언론이 이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다. 여기에 1844년 9월 28일 반포된 매장법은 세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르면, 교회가 시신을 임의로 매장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정부에 사망을 등록한 뒤 고인의 유골을 공개된 들판에 지어지고 위생 면허를 취득한 묘지에서 매장해야 했다. 이때 유족들은 고인의 사망을 증명할 때까지 장례를 미뤄야 하며, 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수수료도 지불해야 했다.

당시 포르투갈 국민들은 반복되는 내전과 감자 역병 및 가뭄으로 인한 경제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장례까지 규제당하자 극심한 반감을 품었다. 성직자들 역시 교회 매장을 금지하는 법이 반종교적이며 "악마와 프리메이슨의 인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러던 1846년 3월 22일, 폰타르카다(Fontarcada) 교구의 주민들이 쿠스토디아 테레사라는 이름의 여인을 폰타르카다 교회 묘지에 매장했다. 3월 24일 당국 관료들이 유해를 교회 묘지에서 파내어 공동묘지로 조성할 땅에 이장하려 하자,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군중이 들고 일어나 낫과 파이크,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내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에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사건의 주모자로 간주된 4명의 여성을 체포했다. 3월 27일 이들의 공판이 진행되던 중 사람들이 수감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감옥으로 행진해 도끼로 감옥문을 부수고 수감자들을 구출했다. 이들의 선두에는 붉은 옷을 눈에 띄게 차려입은 한 젊은 여자가 있었다. 이 여자의 이름은 마리아 안젤리나였지만, 당국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마리아 드 폰트 아르카다'(Maria da Fonte Arcada)라는 가명을 썼다. 이 이야기가 퍼지면서 자신을 '마리아 드 폰트'라고 자칭하는 이들의 선동으로 봉기가 잇따랐다. 급기야 봉기가 포르투갈 북부 전역에 확산되자, 마리아는 어쩔수 없이 5월 20일에 카브랄을 해임하고 페드루 드 소자 이 홀스타인의 내각을 재수립한 뒤 매장법을 폐지했다.

그러나 페드루 드 소자가 여왕의 정치 관여를 최소한으로 국한시키고 자유주의에 치우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자, 마리아는 그에게 불만을 품은 끝에 친위 쿠데타를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846년 10월 6일 살다냐 공작 주앙 카를루스 그레고리우 도밍구스 비센트 프란시스쿠는 여왕의 지시를 받들어 공동 국왕 페르난두 2세와 그의 고문들과 결탁해 페드루 드 소자를 궁궐로 소환하여 즉각 해임시킨 뒤 자신이 의회 의장을 맡았다. 또한 일전에 실각했던 카브랄이 총리에 복직하고 여왕의 의중에 따라 현재의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자, 포르투를 비롯한 포르투갈 북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여왕으로부터 반란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받은 테르세이라 공작 안토니우 주제 세베링 드 노로냐는 포르투로 갔다가 체포되었고, 자유주의 급진파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포르투에 세워졌다. 이후 리스본 정부와 포르투 정부간의 내전이 8개월간 이어지다가 스페인, 영국의 지원을 받은 리스본 정부가 승기를 잡았고, 1847년 6월 29일에 카브랄이 총리 직에서 물러나고, 포르투갈에 남으려는 반란군은 마리아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무기를 반납한다면 사면받을 수 있고, 떠나려는 자들에게 여권을 제공한다는 내용의 그라미도(Gramido) 협약이 체결되면서 종식되었다.

그 후 포르투갈 정부는 살다냐 공작과 카브랄의 세력 다툼으로 점철되었다. 살다냐 공작은 새 총리에 선임된 뒤 의회를 확고히 장악하고 여왕의 수석 집사로 선임되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1849년 6월 19일 카브랄 파벌의 압력을 받은 여왕에 의해 총리 직에서 해임되었고 카브랄이 재차 총리에 선임되었다. 이에 분노한 살다냐 공작은 야당과 동맹을 맺고 카브랄을 향한 정치적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카브랄의 편을 들었고, 1850년 2월 7일 살다냐 공작을 수석 집사에서 해임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살다냐 공작은 무력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쿠데타를 준비했다.

1851년 4월 7일, 살다냐 공작은 신트라에서 몇몇 참모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마프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주둔한 제7 보병연대의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군인 몇 명만이 그를 따랐고 리스본에 주둔한 부대 중 세투발에서 온 제1 카사도르스 연대에 소속된 소수의 대대만 합세했다. 군대가 제대로 호응해주지 않자, 그는 절망에 빠져 스페인 서북부의 갈리시아로 망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카브랄의 정치에 반감을 품고 있던 진보당의 당수 폰트스 페헤이라 드 멜루가 리스본에서 대대적인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카브랄은 이에 압도되어 해외로 망명했고, 갈리시아로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살다냐 공작은 이 소식을 듣자 곧바로 리스본으로 향해 5월 13일 민중의 갈채를 받으며 입성했다.

페르난두 2세는 그에게 육군 총사령관 직임을 맡겼고, 마리아 역시 "이 나라와 왕관의 미래를 아버지의 장군이자 친구에게 전적으로 맡긴다"라고 밝혔다. 그 후 살다냐 공작이 총리에 취임해 1856년 6월까지 국정을 이끌었지만, 실권은 폰트스 페헤이라 드 멜루와 진보당에게 주어졌다. 진보당 정권은 17년간 포르투갈을 안정적으로 다스리면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 성장을 일궈냈기에, 포르투갈 역사학계는 이 시기를 "재생(Regeneração)"이라고 지칭한다.

이렇듯 정치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마리아는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다만 어린아이들을 위한 보호소와 탁아소를 만들고 초등교육을 개혁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기에 "교육자(a Educadora)"와 "좋은 어머니(a Boa Mãe)"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편, 그녀는 아이를 낳을 때마다 심한 난산으로 고생했다. 여왕이 18세일 때 낳은 셋째 아이는 32시간의 진통 끝에 사산되었고, 의사들은 더 이상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을 권했다. 그러나 많은 자식을 낳는 게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여왕은, 이후로도 치세의 대부분을 임신 상태로 있었다. 계속된 임신과 출산으로 건강이 심각하게 상했고, 다섯째 아이부터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자신이 죽는다면 그것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 말했고, 자녀 계획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여왕은 사산과 유산을 반복하다가 1853년 11월 15일 막내아들인 에우제니우를 낳을 때 13시간의 진통 끝에 겨우 출산했으나 곧 사망했고, 태어난 아기 역시 곧 죽었다.

2.7. 브라간사-사셰-코브르구-고타왕조

2.7.1. 페드루 5세

마리아 2세 사후 왕위에 오른 페드루 5세는 16살의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아버지 페르난두 2세의 섭정을 받았다. 아버지가 포르투갈을 대리 통치하는 동안, 그는 포르투갈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동맹국인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여왕과 회동했으며,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여러 독일 제후국들을 거쳐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그는 방문하는 곳마다 예의바르게 행동하면서도 명석한 면모를 드러냈으며, 외모도 잘생겼기에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다.

1855년 18살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한 페드루 5세는 1851년부터 지금까지 총리를 맡았던 살다냐 공작 주앙 카를로스 그레고리오 도밍구스 비센트 프란시스쿠를 해임하고 진보당의 누누 주제 세베루 드 멘도사 롤링 드 모라 바헤투를 총리로 선임했다. 이후 진보당 위주로 정국을 운영하면서도, 보수파 인사들을 내각에 상당수 가담시키고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이후 두 주요 정당의 대표가 번갈아가며 내각을 이끄는 관행이 페드루 5세의 후계자들에 의해 대대로 이어졌다.

페드루는 오랜 내전으로 피폐해지고 유럽 열강에 비해 한참 뒤쳐진 포르투갈의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개선하는 사업을 단행했다. 주요 도심을 연결하는 도로, 교량, 철도 및 전신선이 그의 치세에 건설되었으며, 포르투갈과 앙골라 사이의 최초의 정기 선박 여행이 시작되었다. 또한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고, 왕립 과학원 구내에 상급 문학과정을 설립해 포르투갈 작가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게 했으며, 과학적 발견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책을 포르투갈어로 번역하여 대중에 번역했다. 그는 때때로 많은 과학 서적들을 자기 돈으로 구입한 뒤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배포했다.

페드루는 정부에서 제안한 정책을 심도있게 분석해 문제점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봤으며, 정책이 시행된 후에도 부작용이 있는지를 세심하게 따져봤고, 인프라가 잘 갖춰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시찰했다. 그리고 노예제 폐지를 확고하게 지지했으며, 모잠비크 해안에서 흑인 노예를 끌고 가던 프랑스 노예선을 나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의 항의에 배를 풀어주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1858년 5월 18일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공자이자 프로이센 장관이었던 카를 안톤의 딸인 스테파니 공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1년 후인 1859년 스테파니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페드루 5세는 아내의 요절에 큰 충격을 받고, 이때부터 포르투갈의 의료 시스템을 현대화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많은 병원을 설립하고 하수 시스템을 개선했으며,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 스테파니의 이름을 딴 어린이병원을 설립했다. 오늘날 이 병원은 도나 에스테파니아 병원(Hospital de Dona Estefânia)이란 명칭으로서, 리스본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페드루는 자신을 맞이하는 이들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손등에 키스하는 관습을 폐지하고, 궁전 문에 녹색 상자를 만들어서 시민들이 거기에 요구사항을 적은 편지를 넣게 한 뒤 하나하나 읽어본 후 반드시 답장을 보냈으며, 사형제도를 전격적으로 폐지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콜레라가 창궐했고 1856~1857년 황열병이 창궐해 수천 명이 죽었지만, 그는 안전한 곳에 피하라는 신하들의 권고를 묵살하고 병원을 돌아다니며 병자들을 일일이 위로했다. 백성들은 이렇듯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는 왕에게 진심으로 감격해 "거룩한 자(o Esperançoso)"라는 별칭을 붙였다.

이렇듯 국정에 전념하여 국가를 훌륭히 이끌고 인품도 훌륭했기에 백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페드루는 1861년 여행 중에 두 형제 주앙, 페르난두와 함께 장티푸스에 걸렸다. 먼저 페르난두가 1861년 11월 6일에 사망했고, 페드루 왕이 11월 11일에 사망했으며, 주앙은 12월 27일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포르투갈인들은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깊은 충격과 슬픔에 잠겼다.

2.7.2. 루이스 1세

페드루 5세 사후, 동생 루이스 1세가 포르투갈의 새 국왕이 되었다. 그는 1862년 9월 27일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딸인 마리아 피아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마리아 피아는 그해 9월 29일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호에 승선한 뒤 리스본으로 향했고, 10월 5일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 도착했다. 리스본 항구에서 마중나온 루이스 1세를 처음 만난 순간, 그녀는 한 눈에 반했고 아버지에게 보낸 서신에서 "저는 그를 사진에서 봤을 때보다 더욱 사모합니다."라고 밝혔다. 그들 사이에서 두 아들 카를루스 1세와 아폰수가 태어났지만, 3번째 아이를 사산한 후에는 더 이상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

루이스 1세는 짧은 치세에도 선정을 베풀어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형 페드루 5세를 동경해 형의 정책을 그대로 받들었다. 인프라 개선을 위한 공공지출을 지속적으로 늘렸다. 리스본과 레이숑이스 항구 인프라가 개선되었으며, 도로 및 철도가 대거 확장되었고, 포르투에 수정궁이 건설되었다. 또한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민사 범죄에 대한 사형을 폐지했다. 그러나 페드루 5세 시기와는 달리 그의 시기에는 경제성장은 차츰 둔화되는 데 비해 지출이 지나치게 늘어나서 국가 재정이 위험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진보당 당수이자 포르투갈 총리였던 조아킹 안토니우 드 아기아르는 1867년 6월 26일 민사 행정법을 제정하여 자치권을 행사하는 지방 정부를 통제하고 그 해 소비세를 대폭 늘렸다. 이에 반발한 주민들은 1868년 1월 1일 리스본, 포르투, 브라가에서 대규모 시위를 단행했다. 루이스 1세는 이러다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을 우려해 1월 4일 내각을 해산시키고 안토니우 주제 드 아빌라가 이끄는 개혁당에게 정권을 맡겼다. 이리하여 1851년 진보당이 집권한 이래 17년간 정치적 안정과 인프라 개선, 경제 발전이 이뤄지던 "재생(Regeneração)" 시대는 막을 내렸고, 이후 진보당과 개혁당의 치열한 정치 암투가 벌어졌다.

1869년, 지난 해에 이사벨 2세가 9월 혁명으로 폐위되어 프랑스로 망명한 뒤 조직된 혁명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던 일부 스페인 정치인들이 루이스 1세에게 스페인 국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되자, 많은 포르투갈인들은 그가 포르투갈 왕위를 아들 카를루스에게 양위하고 스페인 국왕이 된 후 카를루스의 섭정을 맡음으로써 장기적으로 이베리아 연합을 부활시키려 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루이스 1세는 그해 9월 28일 <디아리우 드 노티시아스(Diário de Notícias)>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힌 글을 개재함으로써 스페인 국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나는 포르투갈에서 태어났으며 포르투갈에서 죽을 것이다."

1870년 5월 19일, 살다냐 공작이자 전 포르투갈 원수였던 주앙 카를루스 그레고리우 도밍구스 비센트 프란시스쿠는 페니시 백작 카에타누 가스파르 드 알메이다 등 우파 인사들과 연계해 쿠데타를 단행했다. 그는 제5 카사도르스 대대와 제7 보병 연대를 이끌고 아주다 궁전을 포위했다. 궁궐을 수비하던 제3 포병 연대가 포격을 가하자, 쿠데타군은 즉시 총격을 가해 궁전 수비대 5명을 사살했으며, 여러 총탄이 궁전 창문을 깨고 벽에 수많은 구멍을 냈다. 당시 포르투갈 총리를 맡고 있던 롤레 후작 누누 주제 세베루 드 멘도사는 반군의 압박에도 사임을 거부했지만, 루이스 1세는 분쟁을 속히 끝내고 싶었기에 내각에 롤레 후작을 사임시키고 살다냐 공작을 새 총리로 인정하라고 통보했다.

5월 25일 롤레 후작을 몰아내고 새 총리에 오른 살다냐 공작은 의회의 지원 없이 우파 정치인들로 구성된 내각을 세웠다. 그 후 루이스 1세는 살다냐 공작에게 통치권을 위임하고 궁궐에 틀어박혀 지내야 했다. 평소 정치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던 마리아 피아 왕비는 남편이 실권을 상실한 것에 분노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제가 왕이었다면 그 자를 총살하라고 명령했을 겁니다!"

그러나 살다냐 공작의 독재는 오래가지 않았다. 사 다 반데이라 후작 베르나르두 드 사 노게이라 드 피게이레두가 이끄는 반 살다냐 군부 세력이 의회를 무시하는 살다냐 공작에게 반감을 품은 개혁당, 진보당과 연계해 100일 만에 또다른 쿠데타를 일으켜 살다냐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다. 포르투갈 내전부터 반 세기 동안 포르투갈 정계와 군부에서 대표적인 우파 인사로 활동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살다냐 공작은 영국으로 망명했고, 다시는 포르투갈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사 다 반데이라 후작이 집권했다가 노령을 이유로 곧 사임하고 개혁당 수장 안토니우 주제 드 아빌라가 총리에 재선임되었다가 1871년에 선거에서 패한 뒤 진보당 수장 폰트스 페헤이라 드 멜루가 총리로 선임되었다.

폰트스 페헤이라 드 멜루는 살다냐 공작의 쿠데타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고, 포르투갈의 신용을 상승시키고 공적 부채를 어느 정도 개선했다. 그러나 1876년 은행들이 대거 도산당하면서 벌어진 경제 위기로 인해 지지율이 떨어졌고, 1877년 경제 위기를 제때에 수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강한 비난을 받자 사임했다. 이후 안토니우 주제 드 아빌라가 재집권했으나, 그 역시 의회 분쟁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다 왕의 불신을 사서 1878년 해임되고 폰트스 페헤이라 드 멜루가 재집권했다.

이후 1878년 선거에서 야당이 대승을 거두면서 다수의 야당 의원이 의회에 진출했다. 이후 진보당 위주로 짜여진 기존의 내각을 유지하려는 진보당 측과 선거에서 승리했으니 자기들이 내각에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는 개혁당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의회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자, 루이스 1세는 폰테스 페헤이라 드 멜루에게 압력을 가해 사임하게 한 뒤 개혁당 위주의 내각을 조직했다. 이에 진보당 지지자들은 국왕이 개혁당을 비열하게 후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후에도 개혁당과 진보당의 암투가 지속됨에도 국왕이 두 당을 번갈아 집권시키기만 하면서 별다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자 왕실에 대한 불신이 차츰 커져갔다. 그 결과 포르투갈 사회당(1875년), 노동당(1876년) 등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잇따라 신설되었으며 1883년에는 왕정 폐지를 목표로 삼은 정당인 포르투갈 공화당이 조직되었다. 루이스 1세의 치세 동안 공화주의자들의 세력은 미약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세력을 불려가면서 훗날 포르투갈 왕국을 몰락으로 이끌었다.

1884년 오스만 제국을 물리친 러시아 제국의 발칸 반도 진출 문제 등 유럽의 여러 분쟁을 논의하기 위한 베를린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때 회의에 참석한 포르투갈 사절단은 앙골라에서 모잠비크 식민지로 이어지는 회랑이 자국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아프리카 지도에 자신들이 요구하는 영토를 분홍색으로 칠했기에, 학계에서는 이 주장을 가리켜 '분홍색 지도(Mapa Cor-de-Rosa, Pink Map)'로 일컫는다. 그러나 이집트 - 수단에서 남아공까지의 회랑을 세우려던 영국 측의 거센 반대와 다른 열강의 무관심으로 인해, 사절단은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지 못했다.[10]

2.7.3. 카를루스 1세

1889년 10월 19일, 루이스 1세는 오랜 지병에 시달린 끝에 51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카스 카이스 요새에서 병사했다. 사후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고, 장남 카를루스 1세가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1889년 12월 28일 대관식을 거행했는데, 이 자리에는 그해 12월 6일에 브라질에서 추방된 황제 페드루 2세가 참석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초기부터 불안정했다. 1890년, 영국은 포르투갈에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육로로 연결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일대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야욕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전쟁을 선포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시 최강국인 영국에 맞서는 건 도저히 승산이 없었기에, 카를루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현지에 주둔한 포르투갈군을 철수시키고 영국의 요구 조건을 들어줬다. 자국이 오랫동안 열망했던 식민 진출을 포기하고 영국에게 굴복했다는 소식에 국민적 감정이 격앙되었다. 공화파는 이 때를 틈타 국민들을 선동해 왕실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켰다. 1891년 1월 31일 포르투에서 공화파들이 주동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공화주의가 왕국에 위험할 정도로 확산되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1901년, 카를루스 1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에 포르투갈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영국의 새 국왕 에드워드 7세는 이에 보답하고자 1903년에 포르투갈을 방문했다. 카를루스는 이후에도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에드워드 7세의 왕비 알렉산드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프랑스 대통령 에밀 루베의 방문을 받았다. 그 역시 1904년 스페인, 프랑스, 영국을 잇따라 방문하는 등 해외 순방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1908년에는 증조부 주앙 6세의 브라질 망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브라질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렇듯 재위 초기 영국과 마찰이 벌어진 것 외에는 유럽 열강들과 우호관계를 이어갔으나, 국내 상황은 갈수록 불안정해졌다. 포르투갈 왕실은 두 주요 정당인 진보당과 개혁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방식을 페드루 5세 대부터 수십 년간 쭉 이어가며 정치적 안정을 꾀했지만, 공화주의사회주의가 포르투갈에서 갈수록 강해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방식은 한계가 있었다. 포르투갈 사회당과 노동당, 그리고 공화당은 왕실과 정부가 조금이라도 실책을 저지를 때마다 언론을 통해 맹비난하며 정권을 탈취할 기회를 노렸다.

게다가 두 당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1901년 주앙 프랑쿠가 이끄는 다수의 개혁당 의원들이 개혁당을 탈퇴하고 '자유 개혁당'을 결성했다. 1905년에는 주제 마리아 알포임이 진보당에서 탈퇴한 뒤 '진보적 반체제당'을 창설했다. 1901년 개혁당이 분열되었을 때 진보당은 이를 이용하지 않았지만, 1905년에는 개혁당이 진보적 반체제당과 동맹을 맺고 진보당을 꺾고 정권을 잡았다. 이에 분노한 진보당 당수 주앙 프랑쿠 페헤이라 핀투는 개혁당에 대한 복수를 천명했다.

1906년 4월 29일, 개혁당 당수이자 총리인 에르네스투 힌체 히베이루가 경찰 탄압에 의지하여 시위를 억압하는 것에 유권자들이 반감을 품는 바람에 선거에서 참패했다. 여기에 1906년 5월 4일 공화당 지도자 베르나르디누 마샤두(Bernardino Machado)가 리스본 호시우(Rossio) 역에서 벌인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카를루스 1세는 총리를 질타했고, 의회 개회를 연기해달라는 총리의 요청을 거부했다. 결국 힌체 히베이루는 사임했고, 그 해 5월 19일 주앙 프랑쿠가 새 총리에 선임되었다.

주앙 프랑쿠는 총리에 오른 직후 진보당 위주의 내각을 결성하고 공공 회계, 장관의 책임, 언론의 자유 제한, 무정부주의자 탄압에 관한 법률을 의회에 제출했다. 공화당 의원들이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법안은 통과되었고, 프랑쿠는 1906년 11월 20일 아폰수 코스타, 알레샨드르 브라가를 포함한 많은 공화당 의원들을 "국왕에게 불손한 언행을 했다"라는 이유로 의회에서 추방했다.[11] 1907년 코임브라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정권의 언론 탄압을 비판하는 시위를 전개하고 노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하면서 사회 불안이 커지자, 의회는 진보당 내각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많은 장관들은 사임했다.

여론은 카를루스 1세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총리를 사임시키고 개혁당 당수에게 새 내각을 조직하라고 지시할 거라 예상했지만, 왕은 뜻밖에도 주앙 프랑쿠를 굳건히 신임했고, 그가 요청한 대로 의회를 해산하고 의회 선거는 주앙 프랑쿠가 "적절하다고 판단한 시기"에 시행하기로 했다. 총리가 잇따라 교체되며 정치 혼란이 장기화되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주앙 프랑쿠에게 힘을 실어줘서 정국을 안정시키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왕의 신임을 등에 업은 주앙 프랑쿠는 반체제 인사로 간주된 이들을 탄압하고 모든 시위를 불법화했다.

이에 공화당과 반체제 인사들은 무력으로 정권을 무너뜨리기로 결의하고 카르보나리우나 프리메이슨 같은 비밀 조직을 결성하거나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1908년 1월 28일 왕립 도서관에 잠입한 아폰수 코스타, 히베이라 프라바, 프란시스쿠 코헤이아 드 에레디아 등 공화당 인사들은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뒤 왕이 머물고 있는 층을 습격하려 했다가 도중에 발각되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일로 공화당은 강제 해산되고 카르보나리우 지도자 안토니우 주제 드 알메이다루즈 알메이다, 언론인 주앙 차가스 등 93명이 공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1908년 1월 30일, 포르투갈 정부는 공공 질서를 위반하여 체포된 이들을 재판없이 식민지로 추방한다는 내용의 법령을 카를루스 1세에게 제출했다. 카를루스 1세는 이에 서명한 뒤 아내 아멜리, 장남 루이스 필리프, 차남 마누엘과 함께 겨울 사냥을 하러 빌라비소자(Vila Viçosa)로 떠났다. 2월 1일 사냥을 마친 이들은 빌라비소사 역에서 기차를 타고 리스본으로 귀환했다. 기차는 도중에 카사브랑카(Casa Branca) 철도 교차점 옆에서 약간의 탈선을 겪었고, 이로 인해 거의 1시간이 지연되었다. 오후 5시경 리스본 역에 도착한 왕실 일행은 측근들로부터 민심의 동향이 심상치 않으니 비밀리에 왕궁으로 이동하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백성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왕실의 지지를 끌어올리기로 하고 육군 군복을 입고 뚜껑이 덮히지 않은 마차를 탄 채 왕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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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마차가 코메르시우 광장 서쪽에 이르렀을 때, 마누엘 부이사가 마차 뒤 8~10m로 달려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망토 속에 숨겨두었던 카빈을 꺼내 발포했다. 총탄은 카를루스 1세의 목을 꿰뚫었고, 그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뒤이어 발사된 2번째 총탄은 마차의 왼쪽에 등을 대고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왕의 어깨를 관통했다. 알프레두 코스타가 뒤이어 마차로 뛰어올라 확인 사살을 하기 위해 왕의 등에 2발을 쐈다. 이에 아멜리 왕비는 손에 쥐고 있던 꽃다발을 휘두르며 "이 악한! 이 악한!"이라고 외쳤다. 알프레두는 왕비 옆에 있던 루이스 필리프를 향해 발포했고, 총탄은 가슴에 맞췄지만 흉골을 관통하지 않았다.

루이스 필리프는 외투 주머니에 숨겨뒀던 리볼버 권총을 꺼내 알프레두 코스타를 향해 4번 사격했고, 코스타는 마차에서 굴러 떨어졌다. 뒤이어 마누엘 부이사가 왕자를 향해 발포했고, 총탄은 루이스 필리프의 왼쪽 뺨을 뚫고 머리 뒤쪽으로 빠져나갔다. 당시 총탄이 스쳐 지나가면서 팔에 부상을 입은 마누엘 왕자는 땅에 쓰러진 형을 부축했으나, 루이스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마부가 말을 채찍질하며 현장을 부리나케 탈출하자, 알프레두 코스타는 몸을 일으켜 마차를 향해 사격하려 했다.

이때 현장을 지나가고 있던 기병 장교인 프란시스쿠 피게이라 중위가 말을 몰아 세이버로 코스타를 공격해 등과 얼굴에 부상을 입혔고, 코스타는 현장에서 쓰러졌다. 이후 경찰이 현장에 달려와서 코스타를 체포하고 시청 근처의 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러던 중 신원 미상의 장교 또는 시 경비대원이 달려들어 코스타를 향해 총을 쐈고, 코스타는 폐에 구멍이 뚫려 사망했다.

한편, 마누엘 부이사는 은신처로 숨으려 시도했지만 현장을 지나가고 있던 보병 제12연대 병사 엔히크 다 실바 발렌테가 달려들면서 무산되었다. 부이사는 엔히크의 다리에 총상을 입혔으나, 뒤이은 엔히크의 반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부이사는 도망치려 했지만 코스타를 제압한 피게이라 중위가 쏜 총탄에 허벅지가 관통되는 바람에 몸을 더 움직일 수 없었다. 이후 현장에 달려온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살되었다. 두 암살자의 시신은 시청 인근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한편, 금세공인이자 국왕 지지자였던 주앙 사비누 다 코스타라는 시민이 현장에 출두한 경찰에 의해 공범으로 오인되어 사살되었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카를루스 1세 암살 사건 참조.

2.7.4. 마누엘 2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멸망

카를루스 1세가 장남 루이스 필리프와 함께 피살된 후, 암살을 가까스로 모면한 차남 마누엘 2세가 포르투갈 왕국의 새 국왕에 선임되었다. 1908년 2월 2일 오후 군복을 입은 채 국무회의를 주관한 젊은 군주는 신하들에게 자신이 통치하기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니 많이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그가 왕으로서 내린 첫번째 지시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독재 체제를 구축해 민심을 요동시키고 아버지와 형을 제대로 경호하지 않은 주앙 프랑쿠 페헤이라 핀투 내각에 사임을 종용한 것이었다.

이후 새 총리에 선임된 프란시스쿠 페헤이라 두 아마랄은 진보당과 개혁당 인사들을 골고루 포진시킴으로서 행정 독재를 공식적으로 종식하고 의회를 정상으로 되돌렸으며, 정치범들을 해방하고 공화당의 언론 자유의 보장, 카를루스 1세 암살 주동자들의 묘소에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것을 허용 등의 요구사항을 어느정도 받아들였다. 이러한 정책은 들끓어오르던 포르투갈 정계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공화주의자들에게 왕실과 정부가 약하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1908년 5월 6일, 마누엘 2세는 의회를 소집한 뒤 의원들 앞에서 정식으로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으며, 아버지의 국정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이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으니 앞으로는 "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격언에 따라 국정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사회 문제"라는 한 가지 사안을 직접 거론하며 이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마누엘 2세가 지목한 사회 문제는 산업혁명 이래로 도시 노동자들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가중되고 공화주의와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 왕실의 안위가 흔들리는 상황을 의미했다. 산업화가 미약한 포르투갈에서는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별로 강하지 않았지만, 포르투갈의 경제 위기에 편승하여 점점 세력을 불리는 공화당에 상당한 사회주의자들이 스며들고 있었다. 마누엘은 공화당과는 양립하기 어렵지만, 노동자들의 생활 조건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사회주의자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공화당과 사회당이 서로 갈라서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1909년, 마누엘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레몽 푸앵카레를 포르투갈로 초대해 포르투갈의 실정을 직접 조사하게 했다. 푸앵카레는 포르투갈 전역을 여행하며 실태를 확인한 뒤, 마누엘에게 광범위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지역 정부와 행정을 재편하고 정치 개혁을 올바르게 이끈다면 포르투갈 왕실의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왕은 이 조언에 고무되어 1909년 6월 각료회의 의장인 벤체슬라우 드 리마에게 서신을 보내 최근 사회당이 아퀼레스 몬테바르데의 지도 아래 통합된 것을 이용해 몬테바르데와 접촉해 정권과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라고 지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장담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노동계급을 공화당으로부터 우리 편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유용하고 생산적인 힘이 될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후 왕과 아킬레스 몬테베르드간의 서신이 연이어 교환되었다. 1910년 7월에는 국립노동연구소 설립을 목표로 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 위원회에는 3명의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몬테베르드가 위원회가 효과적일 수 있는 수단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자, 왕은 공공 사업부 장관을 통해 정부에 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에게 협조적으로 나오는 국왕에게 호의를 표했지만, 이 정도로는 날로 강성해지는 공화주의자들을 견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마누엘 2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스페인, 프랑스, 영국을 방문하고 각국의 수장들과 서신을 교환했다. 특히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동맹국인 영국의 확실한 지원을 받기 위해 영국 공주와 결혼하고자 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7세는 카를루스 1세가 암살된 일에 깊은 경계를 품고 공주를 보내기를 주저했고, 결혼 협상은 장기간 지연되다가 1910년 5월 6일 에드워드 7세가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마누엘 2세는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참석해 영국의 새 국왕 조지 5세에게 위로를 전하며 포르투갈을 계속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정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그의 통치 2년간 7개의 내각이 수립되었다가 해산되길 반복했다.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개혁당과 진보당은 서로간의 심각한 갈등과 내분으로 약화되었고, 공화당은 갈수록 강해져 1910년 8월 28일 선거 결과 9%의 지지율을 얻으면서 14명의 의원을 진출시켰다. 하지만 공화당은 여전히 개혁당과 진보당이 의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선거로 정권을 차지할 가망은 없다고 여기고, 혁명을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1910년 여름부터 리스본에서 혁명이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들끓자, 정부는 도시 수비대에 대기 상태를 유지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군부 내의 많은 인사들은 군주제는 미래가 없고 공화정 만이 포르투갈을 살릴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1910년 10월 3일, 공화당 당수 마샤두 산투스는 제16보병 연대로 가서 제16보병 연대에게 거사를 단행하라고 요구했다. 사전에 공화당과 내통한 상병 다수가 즉시 병사들을 선동해 봉기를 일으켰고, 이를 막으려던 사령관과 대위는 피살되었다. 한편, 해군 제독 카를루스 칸디두 두스 헤이스는 수십 명의 카르보나리오들과 함께 제1포병 연대로 이동해 그들을 회유시킨 뒤 마샤도와 합세했다. 이후 여러 함대와 포병 연대가 가세했지만, 혁명에 가담하기로 해놓고 실제로는 가담하지 않은 부대도 많았고 정부군 역시 비교적 신속하게 병력을 소집해 대응에 나섰기에 성공 여부는 불확실했다.

공화파에 동조하는 일부 부대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거나 군주 편에 섰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혁명 세력은 호툰다(Rotunda)와 알카타라에 참호를 파고 수비에 전념하면서 토벌대에서 추가 이탈자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식민지의 독립 세력을 상대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던 엔히크 드 파이바 코세이루가 이끄는 보병 제2연대와 기병 제2 연대는 호툰다 인근에 이동식 포대를 설치해 혁명군을 격멸하려 하다가 혁명군의 역공을 받았다. 코세이루는 수적인 열세에 굴하지 않고 항전하면서, 리스본 사단 사령관 안토니우 카르발랼 장군에게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카르발랼은 철수 명령을 내릴 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고, 코세이루는 절반 가량의 병력을 상실하고 퇴각했다. 또한 카르보나리우들은 혁명이 개시되자마자 전신선을 차단해 리스본 외부 부대에 토벌 명령이 전달되지 않게 했으며, 명령을 이미 입수한 부대가 이동할 수 없도록 철로 역시 끊었다. 여기에 혁명군에 가담한 순양함 상하파엘(São Rafael) 호가 호툰다와 알칸타라 사이의 호시우에 주둔한 정부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고, 이로 인해 정부군의 사기는 갈수록 악회되었다.

한편, 마누엘 2세는 포르투갈에 방문한 브라질 대통령 당선자 에르메스 다 폰세카를 위한 연회를 베푼 뒤 파수 다스 네세시다드스 궁전에서 일부 관리들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전화를 시도했지만 회선이 끊어진 것을 발견하고, 사람을 보내 페나 궁전에 있는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얼마 후 카르보나리오 수십 명이 궁궐로 침입하여 창문에 총격을 가했지만, 궁궐 수비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날 9시경 회선이 겨우 연결된 직후 의회 의장으로부터 "반군이 함포 사격을 가하고 있으니 마프라 또는 신트라로 피신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마누엘 2세는 "헌법이 내가 여기서 죽어야 하는 역할을 맡겼기에 나는 이를 완수할 것이다"라며 거부했지만, 정오 무렵 혁명대에 가담한 함선 아다마스토르와 상 라팔이 파수 다스 네세시다드스 궁전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궁궐 수비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다.

마누엘 2세는 궁전 공원의 작은 집으로 피신한 뒤 안토니우 테세이라 드 소자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케일스 궁전에 배속된 포병대를 네세시다드스 궁전으로 이동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안토니우는 반란군 주력 부대가 호툰다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을 억제하려면 포대가 거기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우선 신트라 또는 마프라로 피신하고 네세시다드스 궁전을 수비하고 있는 병력을 로툰다의 반군 토벌에 투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결국 마누엘 2세는 궁전을 떠나기로 하고 오후 2시에 마프라를 향해 떠났다. 오후 4시경 마프라에 도착했으나, 마프라를 수비하기로 되어 있던 800명의 군인과 지휘관은 온데 간데 없고 단지 100명 미만의 군인만 있었다. 여기에 네세시다드스 궁전을 지키던 병사 상당수가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호툰다로의 공세 역시 이뤄지지 못했다.

10월 4일 새벽, 호툰다와 호시우의 양 포병대가 서로를 향해 발포를 가했다. 포격전은 정부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어 혁명군 측이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8시경에 양측 수뇌부가 외국 시민들을 대피시킬 시간을 벌려는 독일 대사의 요청에 따라 1시간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하면서 전투가 중단되었다. 이후 독일 외교관이 혁명군과 휴전 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백기를 든 채 호툰다 쪽으로 향하자,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민중들이 정부군이 항복했다고 여기고 거리로 뛰쳐나와 "공화국 만세!"를 외쳤다. 이에 호시우에 주둔한 정부군이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항복하거나 집으로 도망치면서, 대세는 혁명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오전 9시 리스본 시청 건물의 발코니에서 공화파 지도자 주제 헬바스가 서서 공화국 건국을 선포했고, 포르투갈 공화당 의원들이 장관직을 맡은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마누엘 2세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깨닫고 10월 5일 가족들과 함께 마프라에서 포르투로 향하는 왕실 요트 아멜리아에 탑승했다. 그러나 요트는 도중에 방향을 돌려 지브롤터로 향했다. 그가 지브롤터로 이동하라는 측근들의 설득에 따르기로 했는지 또는 도중에 목적지를 변경하도록 강요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지브롤터에 하선한 마누엘은 얼마 후 포르투마저 공화국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가족 및 측근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해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영접을 받았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8. 멸망 이후의 왕가


마지막 국왕 마누엘 2세는 영국에 망명한 뒤 어머니가 태어난 런던 트위크넘의 풀웰 파크에 거주하면서 지역사회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으며, 트위크넘의 성 제임스 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했고 여러 자녀의 대부가 되었다. 그러면서 무력으로 공화정부를 무너뜨리고 왕정을 복구시키려는 왕당파의 움직임에 "그것은 포르투갈을 파괴하는 짓일 뿐이다"라며 반대하면서, 오직 협상과 국민투표를 통해 재집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 왕당파 인사들은 자신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그를 불신해 미겔 1세의 후손들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마누엘은 이를 눈치채고 미겔 1세의 후손들과 직접 담판을 보기로 하고 1912년 도버에서 미겔 자누아리우 드 브라간사와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이 회의의 결과가 어찌 나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마누엘 2세 본인은 미겔 자누아리우가 자신을 포르투갈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미겔 1세 후손의 왕위 계승권 영구 박탈을 취소하며 잃어버린 포르투갈 시민권을 부여하겠다는 합의를 맺었다고 주장했지만, 미겔 자누아리우가 회담 이후에도 포르투갈 국왕 '미겔 2세'를 여전히 자처한 것을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역사가들은 공화국에 대한 투쟁 방식에 대해 대체로 합의를 맺었지만 승계와 관련한 문제는 합의를 보지 못했으리라 추정한다.

그러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마누엘은 포르투갈에 영국과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왕당파에게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왕정을 복구시키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공화정부에 협조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다수의 왕당파는 공화정부 수립을 방조한 영국을 불신했고, 빌헬름 2세가 승리한다면 왕정을 회복할 길이 열릴 거라 여기고 독일을 지지했다. 한편, 마누엘은 이 참에 전쟁에 참여해 공적을 세움으로써 영국 정부의 인정을 받기로 하고 영국 정부에 참전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그를 위험한 전선에 투입시키지 않기로 하고, 대신 영국 적십자에 참여하게 했다. 그는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막상 적십자에 배속된 뒤 기금 모금, 병원 방문, 최전선의 부상병 방문 등 직무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면서 전투 도중에 흉터가 생긴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스티븐의 부시 병원에 정형외과 부서를 창설하는 데 기여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19년, 조지 5세는 승리 축하 행사에 그를 초대해 그동안의 공헌에 감사를 표했다.

1926년, 오스카르 카르모나 장군에 의해 고메스 다 코스타 정부가 전복되었다. 이후 코스타는 런던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영국 정부는 그의 신임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포르투갈 외무부는 영국에 대한 포르투갈 부채 청산을 협상해야 했는데 대사가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난처해 하다가 마누엘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마누엘은 조국을 도울 기회가 주어진 것에 기뻐하며 조지 5세 등 여러 인사들과 접촉해 코스타를 대사로 인정해달라고 호소해 끝내 관철시켰다. 또한 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재산을 포르투갈로 이전해 불우 이웃 구제에 쓰겠으며, 자신이 죽으면 포르투갈에 묻히겠다고 밝혔다.

마누엘은 망명 기간 동안 포르투갈의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는 등 문학 연구에 전념했다. 또한 포르투갈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처음에 전기물을 쓰는 데 관심을 가지고,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가 다른 역사가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여기고 그에 관한 전기를 집필했다. 그러다 1926년부터 전기물에 대한 관심을 접고 1489년부터 1600년까지의 기간 동안 출간된 포르투갈 문헌들을 수집한 <포르투갈 고대 문헌집(Livros Antigos Portugueses)> 3권 집필에 착수했다.

1489년부터 1539년까지의 문헌들을 모은 제1권은 1929년에 출판되었다. 마누엘은 이 저서를 윈저 성으로 가지고 가서 조지 5세에게 직접 전달했다. 이 저서에는 포르투갈 역사를 다룬 2개의 연대기, 5개의 팜플렛, 33권의 문학 작품이 담겨 있었다.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마누엘 2세는 1540년부터 1569년까지 이어지는 제2권 집필에 바로 착수해 1932년에 완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제3권 집필에 착수하기 직전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사후에 도서관 사서인 마저리 윈터스가 제3권을 출판했다. 그는 이 작품들로 인해 포르투갈 역사가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의 흉상이 리스본 국립 도서관 입구에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1932년 7월 2일, 마누엘 2세는 런던 풀웰에서 폐부종으로 인한 질식으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자식을 두지 못했기에 브라간사 왕조 직계는 끊어졌고, 왕가의 수장 자리는 마누엘 2세의 생전에 합의에 따라 포르투갈 내전 이후 추방 상태였던 미겔 1세의 자손 쪽으로 넘어갔다. 촌수가 더 가까운 마리아 2세의 두 딸의 후손은 지금도 남아 있으나 외국 왕가의 일원이기 때문에 외국인은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할 수 없음을 규정한 구 포르투갈 왕국 헌법에 의해 계승서열에서 제외되어 미겔 1세의 손자인 두아르트 누누가 왕가를 계승하게 되었다.

두아르트 누누와 가족들은 1950년에 입국 금지가 해제되면서[14] 1952년에 포르투갈로 귀환하였으며, 현재는 두아르트 누누의 아들인 두아르트 피우가 왕가의 수장이다. 왕가의 수장은 브라간사 공작[15]의 직함을 사용한다.

3. 무역

포르투갈 왕국의 역사적인 무역 활동 등의 내용은 포르투갈 왕국/무역 참조.

4. 인구

1820년을 기준으로 포르투갈의 지역별 인구는 다음과 같다.
지역 지역별 인구
포르투갈 3,300,000명
마데이라
브라질 4,500,000명
마카오
고아
동티모르
앙골라 1,350,000명
카보베르데 50,000명
모잠비크 2,100,000명
기니비사우 200,000명
상투메
합계 11,500,000명

5. 대중매체에서

문명 3에서 첫 등장한 이래 문명 4 비욘드 더 소드문명 5 멋진 신세계에서 꾸준히 등장했다. 세 작품 모두 그냥 포르투갈이라고만 나오지만 정확히는 이 시기가 모티브로 각 시리즈별 지도자는 항해왕자 엔히크, 주앙 2세, 마리아 1세. 문명 5의 포르투갈에 대해서는 문명 5/등장 문명/포르투갈 참조.

Hearts of Iron IV에서 포르투갈로 브라질 제국 중점을 통해 브라질에 내전을 터뜨린 이후 개입, 내전이 끝난 후 포르투갈에서 재결합한 왕국 중점을 찍으면 포르투갈-브라질 연합왕국을 형성할 수 있다.

6.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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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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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폰수 1세 산슈 1세 아폰수 2세 산슈 2세
보르고냐 왕조
아폰수 3세 디니스 1세 아폰수 4세 페드루 1세
보르고냐 왕조 아비스 왕조
페르난두 1세 베아트리스 주앙 1세 두아르트 1세
아비스 왕조
아폰수 5세 주앙 2세 아폰수 5세 주앙 2세
아비스 왕조
마누엘 1세 주앙 3세 세바스티앙 1세 엔히크 1세
아비스 왕조 압스부르구 왕조
안토니우 필리프 1세 필리프 2세 필리프 3세
브라간사 왕조
주앙 4세 아폰수 6세 페드루 2세 주앙 5세
브라간사 왕조
주제 1세 마리아 1세 주앙 6세 페드루 4세
페드루 3세
브라간사 왕조
마리아 2세 미겔 1세 마리아 2세 페드루 5세
페르난두 2세
브라간사 왕조
루이스 1세 카를루스 1세 마누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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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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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 1143년(포르투갈 백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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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3년 ~ 11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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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5년 ~ 12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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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8년 ~ 13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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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5년 ~ 14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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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5년 ~ 15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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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년 ~ 15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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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년 ~ 15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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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8년 ~ 16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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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 16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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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년 ~ 16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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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7년 ~ 17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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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 18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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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 ~ 18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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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6년 ~ 1826년(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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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년 ~ 1834년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svg
1834년 ~ 1910년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1910년 ~ 현재(포르투갈 공화국)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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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틴어로, 가톨릭 신자라면 쉽게 알겠지만 '영광송'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의 변형이다.[2] 왕국 시기 포르투갈어 철자법에 따른 표기이다. 공화정 수립 후 개정된 현대 철자법에 따른 표기는 Hino da Carta이다.[3]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피난했다.[4] 프랑스어 이름은 '마틸드(Mathilde)', 포르투갈어 이름은 '마팔다(Mafalda)'이다.[5] 카나리아 제도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중에 넘어갔다.[6] 1116년 테레사 데 레온이 포르투갈 여왕을 자칭한 적이 있었지만 어떤 국가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1383년 베아트리스가 남편인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에 의해 포르투갈 여왕으로 내세워지기도 했지만 역시 인정받지 못했다.[7] 1589 ~ 1656,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와 스페인의 카탈리나 미카엘라의 딸.[8] 브라간사 가문의 시조인 아폰수 1세는 아비스 왕조 시조 주앙 1세의 장남이었다.[9] 1640년 12월 1일 주앙 4세의 대 스페인 봉기에 가담한 두 아들의 손을 묶고 조국을 부흥시키지 못하면 집에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진다.[10] 당시 포르투갈 사절단은 이 지도의 근거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들었다. 다만 이 조약은 이미 사문화된 지 오래였기에 전혀 안 먹혔다.[11] 아폰수 코스타는 정부가 의회의 승인없이 임의로 공금을 이전할 수 있게 한 것에 대해 프랑쿠와 논쟁을 벌이던 중 "루이 16세는 카를루스 왕이 저지른 것보다 훨씬 적은 범죄로 인해 단두대에서 목이 떨어졌소!"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12] 부인은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장녀 이자베우의 손녀(이자베우의 장남 페드루의 차녀)인 마리아 프란시스카였다.[13] 1995년에 포르투갈인 귀족인 이자벨 드 에레디아(Isabel de Herédia, 1966 ~)와 결혼, 후계자 아폰수를 비롯한 2남 1녀를 두고 있다.[14] 1834년 제정된 미겔 1세의 후손에 대한 추방법에 의해 입국이 금지되어 있었다. 이는 1910년 포르투갈 왕정 폐지 후 구왕족들의 입국을 금지하였을 때 기존의 미겔 1세의 후손에 대한 추방법은 그대로 두고 별도의 법령으로 마리아 2세의 후손인 구왕족들의 입국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후 1910년의 추방법은 포르투갈 왕가의 직계가 끊어지며 사문화되고, 1834년의 추방법에 의해 나머지 구왕족의 입국이 금지되다가 1950년에 두 법령을 모두 폐지하였다.[15] 이 칭호는 포르투갈 의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칭호이다. 다만 명목상의 예우일 뿐 특권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