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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10:39:46

알폰소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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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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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2위13위14위1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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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위22위23위24위2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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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위32위33위34위3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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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위37위38위39위40위
비센테 페레르 카밀로 호세 셀라 페드로 두케 다니 페드로사 파우 가솔
41위42위43위44위45위
다비드 비스발 라파엘 나달 카마롱 데 라 이슬라 아스투리아스의 펠라기우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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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리오 이글레시아스 미겔 에르난데스 후안 마누엘 세라 로페 데 베가 엘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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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스티나 데 아라곤 호아킨 사비나 로살리아 데 카스트로 앙헬 니에토 마누엘 아사냐
61위62위63위64위65위
조르디 푸졸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알레한드로 산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에르난 코르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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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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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티야 왕국 이브레아 왕조 제7대 국왕
레온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6대 국왕
알폰소 10세
Alfonso X
파일:Alfonso_X_el_Sabio_en_El_libro_de_los_juegos.jpg
<colbgcolor=#AA0044> 1283년 편찬된 《게임의 서》에 그려진 초상화.
출생 1221년 11월 23일
톨레도
사망 1284년 4월 4일 (향년 62세)
세비야
재위 카스티야 왕국레온 왕국의 왕
1252년 5월 31일 ~ 1284년 4월 4일
독일왕
1257년 ~ 1275년
배우자 아라곤의 비올란테 (1249년 결혼)
자녀 베렝겔라, 베아트리스, 페르난도, 레오노르, 산초 4세, 콘스탄사, 페드로, 후안, 비올란테, 하이메, 베아트리스(사생아), 알폰소(사생아)
아버지 페르난도 3세
어머니 슈바벤의 베아트리스
형제 파드리케, 페르난도, 레오노르, 베렝겔라, 엔리케, 펠리페, 산초, 마누엘, 마리아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기타

[clearfix]

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대공위시대 때 신성 로마 황제가 되려고 한 독일왕이기도 했다.[1]

페르난도 3세의 아들이며 별칭으로 현왕(스페인어:el Sabio)이라고도 불린다.

2. 생애

1221년 1월 23일 카스티야 왕국의 톨레도에서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이자 슈바벤 공작 필리프의 딸인 베아트리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파드리케, 페르난도, 레오노르, 베렝겔라, 엔리케, 펠리페, 산초, 마누엘, 마리아가 있었다. 1222년 3월 21일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페르난도 3세의 모친인 베렝겔라 왕비의 집사였던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빌라마요르의 가르침을 받았다.

1230년 페르난도 3세가 레온과 갈리시아 왕국을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하면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탄생한 뒤, 그는 갈리시아의 빌레데미로와 셀라다 델 카미노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갈리시아어와 포르투갈어를 익혔고, 갈리시아어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인 <칸타가스 데 산타 마리아(Cantigas de Santa María)>를 작곡하기도 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아버지의 원정에 동행하며 상당한 공적을 세웠다. 1240년 아버지로부터 레온과 안달루시아 일대의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1242년에 조상 대대로 관리하던 영지인 라 리오하 일대를 몰수하고 카스티야 라 비에하를 보상으로 넘긴 왕의 조치에 반발한 디에고 로페스 데 하로의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1243년 병에 걸린 아버지를 대신해 무르시아 왕국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한 그는 아버지에게 항복하여 용서받은 디에고 로페스와 함께 공세를 벌인 끝에 1244년 물라, 로르카를 공략하고 1245년에 카르타헤나를 공략했다. 그 과정에서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와 아버지가 맺은 알미즈라 조약(1244년 3월 26일)에 서명하여 두 왕국 사이의 경계를 설정했다. 1246년 카스티야 왕국을 상대로 2번의 공성전을 견뎌냈던 하옌 시를 상대로 한 세번째 공방전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이 부족해서 확실하지 않다.

1246-1247년 포르투갈 왕국에서 발발한 산슈 2세아폰수 3세간의 내전에 참여해 산슈 2세를 지원했지만 아폰수 3세가 산슈 2세를 밀어내고 포르투갈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 아버지가 1247년 8월 20일부터 1248년 11월 23일까지 단행한 세비야 공방전에 참여해 세비야 공략에 기여했다. 이후 새로 확보한 영토를 가신들에게 분배하고 행정 체계를 기획하는 등 각종 업무를 건강이 좋지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 처리했다.

세비야 공략 2년 전인 1246년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의 딸 비올란테와 약혼했고, 1249년 바야돌리드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자식이 일찍 태어나지 않자 아내가 불임이라고 의심하고 교황청에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비올란테가 알리칸테 시에서 휴양 생활을 한 뒤 1253년 임신에 성공하면서, 이 요청은 없던 일이 되었다. 이후 비올란테는 여러 자식을 낳았지만, 알폰소 10세는 궁정 관리인 기옌 페레즈 데 구즈만의 딸인 기옌 데 구즈만을 정부로 삼고 1262년 초 사망할 때까지 관계를 이어갔다. 1252년 5월 31일, 페르난도 3세가 세비야에서 사망한 뒤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아버지의 정복 전쟁으로 영토가 급격하게 불어난 왕국을 안정시키는 것을 중점으로 삼았다. 우선 레온과 카스티야의 모든 목동들을 관리하는 평의회를 설립하고, 이들에게 병역 면제, 재판에서의 증언 우선권, 통행권, 방목권 등 여러 특권을 부여했다. 이 평의회는 1273년에 3,000마리의 크고 작은 양을 소유한 협회인 메스타(Mesta) 로 발전했다. 이 조치는 잉글랜드로 수출보내야 하는 양모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내려졌다.

또한 평민들에 대한 세금을 감면해 국내 거래를 원활하게 하려 노력하면서도, 왕실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수출과 수입에 관세를 부과했으며, 국가가 대외 무역을 담당하는 상인을 지명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여기에 동일한 화폐와 도량형이 도입되었으며, 통치 기간 동안 25개의 주조소를 설립해 백성들이 화폐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대외 무역에 상당한 투자를 하던 귀족과 성직자들이 상당한 세금을 내는 것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알폰소 10세는 왕국 각지에 난립한 법전들을 통합한 새 법전을 편찬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왕국의 각 도시들에 적용되는 <푸에로 레알 데 에스파냐(Fuero Real de España)>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 헌장은 왕이 자유 재량에 따라 여러 도시에 부여한 경제적 특권을 명시한 것으로서, 봉건 귀족들의 권세를 견제하고자 도시를 키우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때 그는 국법의 발의, 심의 및 후속 승인은 오직 왕만이 책임을 가진다고 명시해, 국왕만이 국법을 제정 및 반포할 권한이 있음을 밝혔다.

그는 뒤이어 법률 개론서인 <법의 표본(El espéculo de las leyes)>을 작성해 각 도시에 발송했다. 카스티야 왕국에 통용되는 관습법들을 어느 정도 정리한 이 저서는 1255년에 공포될 예정이었지만, 125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야심을 품은 알폰소 10세가 반포를 중단시켰다. 이후 10년간 여러 법학자들과 함께 법률 편찬에 몰두한 끝에, '법의 표본'과 신성 로마 제국의 법을 결합하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참조한 <시에테 파르티다스(Siete Partidas)>를 1265년에 반포했다. 이 법은 카스티야 연합 왕국 최초의 성문법으로, 19세기까지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기본법으로 활용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세비야 공방전에 참여했을 때 임시로 창설된 함대가 세비야 항구를 봉쇄하여 도시 함락에 기여한 것을 지켜보고, 앞으로 강력한 해군을 육성할 필요성을 확실히 느꼈다. 1253년 카스티야 제독 직책을 정식으로 신설했고, 세비야에 조선소를 조성해 함대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게 했다. 여기에 안달루시아와 무르시아에 마요르(mayor)가 신설되었으며, 뒤이어 알라바와 기푸스코아에서도 마요르가 신설되었다. 이들은 할당된 영지에서 사법 활동을 독립적으로 수행하고 외적으로부터 영지를 지키는 등 군사 업무도 맡았다. 그는 뒤이어 1188년 레온 왕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코르테스(Cortes)를 정식으로 도입했다.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빈번하게 열린 코르테스에는 귀족, 성직자, 마을과 도시의 검찰관 등 다양한 신분이 참석했다. 코르테스를 소집한 주된 목적은 왕국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각 신분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알폰소 10세의 치세 동안 시행된 정책 중 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손꼽는 정책은 정복지에 인구를 이주시키는 정책이었다. 그는 세비야 전역을 카스티야 왕국 곳곳에서 이주해온 기독교인들에게 분배했고, 정복지에 남은 무슬림들이 하엔, 세라노, 무데자르 일대에서 집단촌을 이뤄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상당한 '종교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1264년 무데자르의 무슬림들이 나스르 왕조의 선동에 넘어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반란을 진압한 뒤 무슬림들을 대거 추방하고 과달레테 지역과 카디스 만에 살던 백성들을 과달키비르 계곡 등 무슬림이 떠나서 생긴 공백지에 대거 이주시켰다. 또한 세구라, 에스테파, 메디나 시도니아 등 나스르 왕조와의 국경지대에 군사 총독을 설치하고 그들이 자율적으로 군사 활동을 벌이는 것을 용인했다.

알폰소 10세는 외치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1253년, 그는 포르투갈 왕국으로 친정해 알가르베 일대를 공략했다.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3세는 알폰소 10세의 딸 베아트리스와 결혼하고 그 땅을 베아트리스에게 지불할 지참금으로 삼겠다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1267년, 알폰소 10세는 아폰수 3세와 바다호스에서 만나서 알가르베 일대를 포르투갈에 돌려주고 포르투갈과 상호 방위 협약을 맺는 데가로 아라세나, 모우라, 세르파, 아로체 등 과디아나 강 동쪽의 포르투갈 영토를 카스티야 왕국이 가진다는 내용의 바다호스 조약을 체결했다.

한편, 그는 재위 초기에 나바라 왕국의 종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나바라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나바라 국왕 티발트 2세는 이를 두려워해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와 에브로 강변에서 만나 하이메 1세를 주권자로 섬기고 아라곤 왕국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그들이 전쟁을 보낼 때 병력을 반드시 보내주겠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알폰소 10세는 이에 맞서 아키텐 공국을 소유하고 있던 잉글랜드와 손잡기로 하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왕자와 자신의 누이인 레오노르를 결혼시키고 가스코뉴 일대를 지참금으로 양도하는 대가로 나바라 문제에서 잉글랜드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아라곤 왕국과 불필요한 갈등을 벌일 필요는 없다고 여기고 1256년 하이메 1세, 티발트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알폰소 10세는 하이메 1세를 나바라 왕국의 보호자로 인정하기로 했고, 하이메 1세는 카스티야 왕국이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탈취했던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1256년 독일왕 빌렘 2세가 프리지아인과의 전쟁 도중 전사하자, 피사 공화국의 사절이 알폰소 10세를 찾아와서 독일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알폰소 10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1257년에 전 유럽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인 베아트리스가 자신의 어머니인 점을 들며 독일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선언했다. 그 후 이탈리아의 기벨린파(친 황제파) 도시들에 외교관을 보내 지지를 호소했고, 나중에는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무력으로 복종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황제가 되려는 그의 계획은 많은 장애에 부딪쳤다. 카스티야 귀족들은 황제가 되기 위해 막대한 자금과 군대를 보내라는 왕의 요구에 난색을 보였고, 소리아에서는 과도한 세금에 반발한 지역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위세를 떨치는 카스티야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까지 겸임한다면 너무 강해진다고 여겼기에 반대했다.

한편, 신성 로마 황제를 선출할 자격이 있는 7명의 선제후 중 4명은 알폰소 10세를 지지하기로 했지만, 3명은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 백작 리처드를 지지했다. 알폰소 10세가 카스티야 왕국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반면, 리처드는 재빨리 아헨으로 이동해 1257년 5월 카롤루스 대제의 묘지를 참배한 뒤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 후 알폰소 10세는 십여 년간 리처드를 꺾고 교황의 마음을 돌리며 자신의 지지자들을 지원하고자 막대한 돈을 지출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272년 리처드가 사망하면서 그가 황제로 인정받는 듯했으나, 독일 제후들은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루돌프 1세독일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역시 루돌프 1세를 지지하고 알폰소 10세의 독일왕 폐위를 선언했다.

설상가상으로, 알폰소 10세는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1271년 초 레르마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누뇨 곤잘레스 데 라라가 이끄는 대다수 귀족들은 국왕에게 "귀족에 대한 지나친 과세와 보조금 요구를 중단하고 착취를 일삼는 대리인들을 해임하며, 신법 집행을 중단하고 오랫동안 따라온 관습법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알폰소 10세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귀족들은 1272년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알폰소 10세는 이 반란에 곤욕을 치르다 1273년 신법을 다소 완화하고 귀족들에게 부과된 보조금 액수를 줄이는 등 온건책을 써서 가까스로 그들과 타협했다.

1275년 초, 알폰소 10세는 몬페라토 후작이며 자신을 독일왕으로 받들었던 기욤 7세와 만나서 앙주 공작 샤를 1세로부터 승리를 거둔 것을 축하하면서 자신이 롬바르디아에서 독일왕으로 즉위하려 하니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기욤 7세가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이자 다시 리옹 공의회에 참석해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교황은 공연히 독일왕이 되려 하지 말고 카스티야로 돌아가라고 답했다. 그러다가 본국에서 마린 왕조가 쳐들어왔다는 급박한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신성 로마 황제가 되려는 뜻을 완전히 접고 본국에 돌아갔다.

이보다 앞선 1274년, 나스르 왕조의 군주 무함마드 2세는 알폰소 10세에게 연공을 바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카스티야 왕국이 왕조 내부의 불만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기자, 마린 왕조의 아미르 아부 유수프 야쿱에게 타리파, 알헤시라스, 론다 등을 할양하고 충성을 바칠 테니 카스티야 왕국을 정벌해달라고 요청했다. 야쿱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275년 4월 대군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타리파와 알헤시라스를 공략했다. 뒤이어 카스티야령 안달루시아를 습격했고, 무함마드 2세는 독자적으로 코르도바를 공격했다. 카스티야의 왕자이자 본국을 떠난 알폰소 10세를 대신해 국가를 운영하던 페르난도가 반격하려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 7월에 병사했다.

야쿱은 기세를 이어가 세비야와 코르도바 사이의 요충지인 에시하로 진격했다. 카스티야령 안달루시아 총독 누뇨 곤살레스 엘 부에노가 출진했지만, 1275년 9월 8일에 벌어진 에시하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야쿱은 뒤이어 에시하를 공격했지만 공성 무기가 준비되지 않아 철수한 뒤 9월 18일 알헤사리스에 개선하여 누뇨 곤살레스의 수급을 효수했다. 톨레도 대주교이자 알폰소 10세의 동생인 산초는 이에 맞서 톨레도, 마드리드, 과달라하라, 탈라베라 일대의 기사들을 모아 남하하다가 10월 21일 하엔 부근 마르토스에서 노획물과 포로들을 대등하고 이동 중이던 적군을 포착했다.

산초는 뒤따라 오는 기사들을 기다리자는 조언을 듣지 않고 곧바로 돌격했으나 참패를 당하고 생포된 후 마린 왕조군과 나스르 왕조군이 산초를 어찌 처리할 지를 놓고 분쟁을 벌이던 중에 살해되었다. 카스티야에 급히 돌아온 알폰소 10세는 군대를 수습해 국경지대에 집중 배치하는 한편 야쿱에게 휴전 협정을 맺자고 청했다. 원정이 장기화되면서 병력 손실이 많은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 야쿱은 이를 받아들였다. 아라곤 왕국이 그라나다를 기습 공격하는 바람에 얼른 돌아가야 했던 무함마드 2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과의 휴전에 동의했다.

1277년 6월, 알폰소 10세의 동생 파드리케가 알폰소 10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역을 꾀했다. 파드리케는 지난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려드는 알폰소 10세에게 불만을 품고 카스티야 왕국을 떠나 시칠리아의 만프레디 왕을 섬겼다가 만프레디가 카를루 1세에게 패망하자 다시 콘라딘을 섬겼다가 그 역시 카를루 1세에게 주살되자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산초 왕자를 왕으로 모시고 알폰소 10세를 수도원에 유폐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조기에 발각되었고, 알폰소 10세는 아들 산초에게 이들을 직접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산초는 이에 순종해 음모자들을 부르고스 인근의 트레비노에서 화형에 처했다.

1277년 6월, 야쿱이 재차 카스티야로 쳐들어왔다. 야쿱이 이끄는 무슬림군은 8월 2일 세비야 외곽에서 카스티야군을 격파하고 과달키바르 강을 따라 몇몇 성채를 공략한 후 8월 29일에 알헤시라스로 개선했다. 10월 30일에 재차 출병하여 아르키도나 부근에서 무함마드 2세와 합류한 뒤 베나메지 성채를 공략했다. 이후 연합군은 코르도바를 포위하고 근교를 약탈했다.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알폰소 10세가 배상금을 지불할 테니 휴전을 맺자고 청하자, 야쿱과 무함마드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물러났다. 야쿱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숙부인 우마르 이븐 야흐야를 알안달루스 총독으로 선임하고,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한 말라가의 타이파 바누 이쉬킬룰라와 동맹을 맺었다.

나스르 왕조의 군주 무함마드 2세는 마린 왕조가 자신의 정적인 비누 이쉬킬룰라와 손잡고 알안달루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끝에 그들과 갈라서기로 하고 알폰소 10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알폰소 10세는 이를 받아들여 세비야 함대 100척을 동원하여 알헤시라스 공격을 준비했다. 1278년 8월 5일, 알폰소 10세는 3만에 달하는 육군을 이끌고 알헤시라스 근교에 당도했고, 24척의 선박과 80척의 갤리선으로 이뤄진 함대가 지브롤터 만을 봉쇄해 마린 왕조의 본토인 북아프리카에서 알헤시라스로 수송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에 무함마드 2세가 말라가로 진격해오자, 야쿱은 일단 무함마드 2세와 화해하기로 하고 말라가 지배권을 포기하고 바누 아쉬킬룰라에 대한 보호를 철회할 테니 카스티야 왕국에 협력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무함마드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그라나다로 돌아갔다.

알폰소 10세는 무함마드 2세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1년간 알헤시라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우마르 이븐 야흐야가 이끄는 수비대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고, 장병들은 물자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역병에 시달렸다. 특히 해상 봉쇄를 수행하던 선원들은 괴혈병에 시달린 끝에 선박을 육지로 두고 육상 포위망으로 이동했다. 그 사이 야쿱의 아들 유수프가 72척의 함대를 이끌고 알헤시라스로 이동했고, 무함마드 2세 역시 12척을 보태줬다. 1279년 7월 20일 또는 25일, 나스르 왕조-마린 왕조 연합 함대는 기강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카스티야 함대를 습격해 막심한 타격을 입혔고, 사로잡은 적군 중 장교를 제외한 이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이에 사기가 뚝 떨어진 카스티야군은 철수했고, 수비대는 이들을 즉각 추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알폰소 10세는 어쩔 수 없이 마린 왕조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고, 야쿱은 포위측 진영이 있던 비야 누에바 쪽에 성채를 건설하여 알헤시라스의 수비를 강화했다.

알폰소 10세는 이번 패전은 나스르 왕조의 배신 때문에 야기되었다고 여기고 1280년 아들 산초에게 나스르 왕조의 수도 그라나다를 공격하게 했다. 마침 무함마드 2세와 갈등을 벌이고 있던 야쿱도 알폰소 10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해 6월 모슬린 전투에서 산초가 적의 매복에 걸려 패배하자, 1281년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라나다 부근까지 진격했지만 그라나다의 방비가 워낙 강고해서 공략할 가망이 없자 퇴각했다. 그 후 무함마드 2세는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와 동맹을 맺고 카스티야 왕국을 견제했다.

이렇듯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위신이 떨어진 알폰소 10세에게 또다른 악재가 닥쳤다. 그는 당초 장남 페르난도를 왕위 후계자로 삼았지만, 페르난도는 1275년 빌라 레알에서 마린 왕조군과 대적하던 중 병사했다. 카스티야 관습법에 따르면, 장자가 사망할 경우 차남이 왕위 계승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가 반포한 신법인 <시에테 파르티다스(Siete Partidas)>에 따르면, 장자가 사망할 경우 장자의 자녀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알폰소 10세는 처음에는 산초를 왕위 후계자로 지명하기로 했다. 1278년, 산초는 세고비아의 코르테스에서 카스티야 왕국의 차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비올란테 왕비는 혹여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해 페르난도의 두 아들 알폰소와 페르난도를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의 궁정에 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유대인 세금 징수관 이샤크 데 라 멜라하가 산초의 요청에 따라 왕실 수입의 일부를 산초가 진 빚을 갚는 데 쓴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급기야 1279년 7월 알헤시라스 공방전에서 참패한 뒤 이사크가 횡령을 저질러 물자가 부족해지는 바람에 패전을 초래했다는 혐의를 씌워 이사크를 처형했다. 또한 알폰소 10세는 장남 페르난도의 자녀들이 하옌 일대를 독자적으로 이끌도록 해주려 했다. 그러나 산초가 "왕국의 모든 영토는 온전히 국왕 단 한사람만이 이끌어야 한다"며 반대하자, 알폰소 10세는 그가 조카들을 배제하려 든다며 반감을 품었다.

결국 1282년, 알폰소 10세는 세비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장남 페르난도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페르난도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새 국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격분한 산초 왕자는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귀족들을 결집해 아버지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바야돌리드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선포했다. 다수의 귀족과 성직자, 심지어 비올란테 왕비와 마누엘 왕자까지 산초의 편을 들자, 그는 세비야로 피신했다. 하지만 교황 마르티노 4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가 알폰소 10세를 지지하고 알폰소 10세의 동맹자였던 야쿱 역시 알폰소 10세를 돕기 위해 개입하려 하자, 반란군은 폐위를 감행하는 대신 타협하기로 했다. 알폰소 10세는 왕위를 유지하는 것을 허용받을 수 있었지만, 치세 내내 실시했던 재정 및 입법 정책을 전면 중단하고 예전의 관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후 세비야 궁정에 사실상 유폐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알폰소 10세는 1284년 4월 4일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을 심하게 대하는 아들 산초를 저주하고 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산초는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1284년 4월 30일 툴레도에서 산초 4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알폰소 10세의 유언장을 근거 삼은 산초 4세의 정적들이 들고 일어나고 외세가 개입하면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3. 가족 관계

4. 기타

징기스칸 4 챕터2 카스티야 왕국의 군주로 등장한다.[2] 능력치는 정치 55, 전투 62, 지모 33이며, 내정특기로는 건설, 문화가 있다. 전투특기는 없다.

천문학과도 접점이 있는데 알폰소 10세가 후원해서 2명의 유대인 천문학자[3]가 1252년 완성한 천체목록 '알폰소 목록(Alfonsine Tables)'은 중세 유럽에 수백년 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 구름의 바다 부근 크레이터 중 하나인 '알폰수스'[4]도 알폰소 10세를 따 붙인 이름.


[1] 홀란트 백작 빌럼 2세, 콘월 백작 리처드와 대립왕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독일왕 재위 기간이 겹친다.[2] 챕터3에도 등장하는데 왕족 신분이다.[3] 헤우다 벤 모세스 코헨, 이삭 벤 시드[4] 직경이 110km나 되며 가운데에 높은 산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