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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29 14:04:32

라미루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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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miro II de León
가문 아스투리아스 왕조
생몰년도 미상 ~ 951년 1월
출생지 아스투리아스 왕국
사망지 레온 왕국 레온
재위
기간
레온 왕국 국왕 931년 - 951년
아버지 오르도뉴 2세
어머니 엘비라 메넨데스
형제 산추 오르도녜스, 알폰수 4세,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히메나 오르도녜스
배우자 아도신다 구티에레스, 우라카 사노이츠
자녀 베르무두, 오르도뉴 3세, 테레사 라미레스, 산추 1세, 엘비라 라미레스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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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온 왕국 6대 국왕. 무슬림들을 연이어 격파하여 왕국의 영역을 크게 늘렸기에 '대왕(el Grande)'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2. 생애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왕자이자 레온 왕국 2대 국왕이었던 오르도뉴 2세갈리시아 귀족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 백작의 딸인 엘비라 메넨데스의 3남이다. 형제로 산추 오르도녜스, 알폰수 2세,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히메나 오르도녜스가 있었다. 92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삼촌 프루엘라 2세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레온 왕국의 왕위를 가로채자, 형제들과 함께 갈리시아로 피신했다. 그는 이 시기에 포르투갈 귀족 구티에레스 오소레스의 딸인 아도신다 구티에레스와 결혼했고, 산추 오르도녜스는 갈리시아의 세력가인 무니오 구티에레즈 백작의 딸 고토 무뇨스와 결혼했으며, 알폰수 4세는 팜플로나 왕국 국왕 안초 1세의 딸 오네카 사노이츠와 결혼했다.

925년 8월 프루엘라 2세가 나병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뒤 아들 알폰수 프루엘라스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두 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반란은 팜플로나 왕국과 갈리시아, 포르투갈 귀족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고, 알폰수 프루엘라스는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926년 초 권좌에서 밀려나 아스투리아스 산악지대로 도피했다. 산추와 알폰수는 각각 갈리시아 왕국과 레온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라미루는 코임브라를 비롯한 포르투갈 지역을 다스렸다. 929년 여름, 산추 오르도녜스는 고토 무뇨스 왕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 갈리시아는 곧바로 알폰수 4세가 다스리던 레온 왕국에 편입되었다.

931년 여름 알폰수 4세의 왕비 오네카가 사망했다.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아내의 죽음으로 상심한 그는 왕위를 형제 라미루에게 넘기기로 하고, 사모라에서 귀족들을 소집해 자신의 결정을 밝인 뒤 사하군의 어느 수도원에 은거했다. 931년 11월 6일 레온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레온 국왕에 오른 라미루 2세는 932년 초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의 침공을 받은 톨레도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그들을 돕고자 출진했다.

그런데 알폰수 4세는 양위를 후회하고 알폰수 프루엘라스, 라미루 프루엘라스, 오르도뉴 프루엘라스 형제와 카스티야 귀족들을 포섭해 복위를 꾀했다. 레온에서 대리 통치를 받았던 오베코 주교의 보고로 이 사실을 알게 된 라미루 2세는 레온 왕국으로 돌아가 주동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알폰수 4세, 알폰수 프루엘라스, 라미루 프루엘라스, 오르도뉴 프루엘라스를 모조리 실명형에 처하고 타 바실리사 데 루이포르코 수도원에 감금했다.

이후 후우마이야 왕조에 넘어간 톨레도를 해방시키겠다고 선포하고 후우마이야 왕조의 요새 마게리타(현재 마드리드)를 공략했지만, 이곳을 지킬 만한 여건이 되지 않자 요새를 파괴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한 뒤 레온 왕구긍로 귀환했다. 933년 여름, 후우마이야 칼리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대군을 소집해 레온 왕국으로 진격했다.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곤살레스로부터 이 소식을 접한 라미루 2세는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오스마에서 무슬림군을 상대로 크게 이기고 수천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934년 여름, 또다른 강력한 무슬림 분견대가 북상했다. 그는 이에 맞서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하자 산악지대로 퇴각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여세를 이어가 팜플로나 왕국을 침공하려 하자, 팜플로나 국왕 가르체아 1세 사노이츠의 섭정을 맡고 있던 토타 왕비가 아랍군 진영에 찾아와서 자신이 그의 고모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군대를 물려달라고 요청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무슬림들을 해치지 말며, 무슬림 포로들을 전원 석방시키고 코르도바에 조공을 바치며,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팜플로나를 통과하여 카스티야를 공격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토타는 이를 받아들였고,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팜플로나 왕국의 영토를 빠르게 통과한 뒤 알라바와 카스티야를 공격해 각지를 파괴한 후 귀환했다. 하지만 라미루 2세는 군대를 재정비한 뒤 철수하는 적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며 괴롭히다가 적보다 먼저 두에로 강에 도착한 뒤 오스마 요새를 공략하고 적이 협곡에 진입하기를 기다렸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오스마로 진입한 후우마이야 왕조군은 라미루 2세의 급습을 받고 수천 명의 사상자 및 포로를 낸 채 패퇴했다.

937년, 사라고사 타이파 아부 아히야는 후우마이야 왕조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레온 왕국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에 분노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대군을 일으켜 칼라타유드를 공략하고 사라고사 주변 지역을 확보한 후 사라고사 시를 포위했다. 아부 아히야는 다시 후우마이야 왕조에 충성을 서약했고,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인질을 받아낸 후 코르도바로 돌아갔다.

939년 초, 라미루 2세는 산타렝에서 후우마이야 왕조의 지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무슬림들을 지원했지만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급파한 무슬림군에게 패퇴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승리의 여세를 이어가 레온 왕국을 끝장내기로 하고, 대군을 소집한 뒤 그해 여름에 레온 왕국 깊숙이 침입했다. 라미루 2세는 즉각 팜플로나 왕국, 아라곤 왕국과 손을 잡고 이에 대항했고, 939년 8월 시망카스 전투에서 후우마이야 왕조군을 궤멸시켰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가까스로 도주했고, 라미루 2세는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항상 소지하고 다니던 쿠란을 비롯한 수많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라미루 2세는 여세를 이어가 왕국의 국경선을 두에로 강에서 토르메스 강으로 남하시키고 레데스마, 살라망카, 페냐란다 데 브라카몬테, 세풀베다 및 과드라미로를 잇따라 공략했다. 940년과 941년에 후우마이야 왕조와 2번의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이후에도 후우마이야 왕조와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다. 942년 사라고사 토후국의 공격을 받은 팜플로나 왕국을 돕고자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곤살레스를 파견했다. 팜플로나-카스티야 연합군은 그 해 4월 5일 투델라 전투에서 사라고사 타이파인 무함마드 이븐 하심을 격파했다.

라미루 2세는 무슬림과의 전쟁을 벌이는 것 외에도 행정 체계를 체계화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정복지에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사업을 집행하면서 그곳의 행정 체계를 빠른 시일에 갖추고자 노력했다. 또한 산 클라우디오 수도원을 복원하고 왕궁에 인접한 산 마르셀로와 산 살바도르 수도원을 궁정에 포함되도록 토목 공사를 벌였다. 여기에 영토 전역에 많은 수도원들을 건립해 기독교를 전파하고 지역 행정 관리를 자체적으로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통치 말년에 그동안 그를 도와 무슬림군에 대항했던 카스티야 백작 페르난도 곤살레스와 갈등을 벌였다.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후우마이야 칼리파와 맺었던 휴전 협정을 위반하고 번번이 무슬림의 영토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하여 라미루 2세의 진노를 샀다. 또한 변경 지역에 레온 왕실군이 주둔하면서 자신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무슬림들과 내통하며 레온 왕국에 반항했고, 후우마이야 왕조는 이 때를 틈타 레온 왕국을 공격했다. 940년, 아흐마드 이븐 야이아가 이끄는 무슬림군은 레온 평원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944년 아흐마드 무함마드 이븐 아이야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갈리시아의 심장부를 관통해 약탈을 자행했다.

라미루 2세는 무슬림군이 카스티야를 치지 않고 다른 곳을 습격하는 것을 보고 그가 무슬림들과 내통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에 944년 페르난도 곤살레스를 체포해 레온의 지하감옥에 투옥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산초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봉했다. 3년 동안 구금되었던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결국 레온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화해의 표시로 자신의 딸을 라미로 2세의 아들인 오르도뉴 3세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석방 후에도 라미루 2세에게 대한 반감을 간직한 그는 카스티야 동부로 피신한 뒤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무슬림들은 그런 그를 지원했고, 947년 사모라를 공격했다가 패퇴했으며 948년 갈리시아의 큰 도시인 오르티게이라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라미루 2세는 무슬림들이 갈리시아 등 레온 왕국의 서부 지역을 잇따라 공격하는 것을 방어하느라 카스티야에 별 신경을 쓰지 못했고,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이 때를 틈타 잃어버린 카스티야 영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결국 라미루 2세는 페르난도 곤살레스와 화해하기로 했다.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카스티야 백작으로 복위했고, 산초 1세는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950년, 라미루 2세는 원정에 나서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에서 무슬림군을 격파하고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확보했다. 그러나 신체적으로 허약해진 그는 아들 오르도뉴 3세에게 통치를 맡기다가 951년 1월 5일 죽음이 임박하자 산 살바도르 데 팔라트 델 레이 성당에 들어가서 모든 귀족과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복을 벗고 의식용 재를 머리 위에 뿌리면서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 그는 1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망했고, 아들 오르도뉴 3세가 뒤이어 레온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사후에 산 살바도르 데 팔레트 델 레이 성당에 안장되었다가, 훗날 레온 국왕 알폰수 5세에 의해 산 이시도르 데 레온 대성당으로 이장되었다.

3.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