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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2:56:23

알폰소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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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onso VI de León
별칭 Alfonso el Bravo
(용맹왕 알폰소)
가문 히메네스 왕조
출생 1040년
레온 왕국
사망 1109년 7월 1일 (향년 68~69세)
톨레도 왕국 톨레도
재위
기간
레온 왕국 국왕 1065년-(1072년)[1]-1109년
갈리시아포르투갈 국왕 1071년[2]-(1072년)[3]-1109년
카스티야 왕국 국왕 1072년-1109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1077년-1109년
톨레도 왕국 국왕 1085년-1109년
아버지 페르난도 1세
어머니 레온의 산차
형제 사모라의 우라카, 산초 2세, 토로의 엘비라, 가르시아 2세
배우자 아그네스, 히메라 무뇨스(정부), 콩스탕스, 자이다(정부), 베르타, 이사벨[4], 베아트리체
자녀 엘비라(사생아), 테레사 데 레온(사생아), 우라카, 산초 알폰세스, 산차, 엘비라

1. 개요2. 생애
2.1. 형제들과의 권력 투쟁2.2. 레콩키스타2.3. 무라비트 왕조와의 전쟁2.4. 후계 문제와 사망
3. 가족 관계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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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알폰소 6세 인장.jpg
알폰소 6세의 인장.

레온 왕국, 갈리시아포르투갈, 카스티야 왕국, 톨레도 왕국의 국왕,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별칭은 '용맹왕 알폰소'이다. 형제들과의 투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권좌에 오른 뒤 치세 내내 레콩키스타를 단행해 한때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을 손아귀에 쥐고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칭했다.[5] 그러나 무라비트 왕조의 유수프 이븐 타쉬핀에게 연이은 참패를 당해 위세가 꺾였고, 말년에 후계자 선정을 깔끔하게 매듭짓지 못해 분란을 초래했다.

2. 생애

2.1. 형제들과의 권력 투쟁

1040년경 레온 왕국-카스티야-갈리시아 왕국의 군주 페르난도 1세와 레온 국왕 알폰수 5세의 딸 산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사모라의 우라카, 산초 2세, 토로의 엘비라, 가르시아 2세가 있었다. 12세기 라틴어로 작성된 미완성 연대기인 <히스토리아 실렌세(Historia silense)>에 따르면, 페르난도 1세의 모든 아들은 교양 교육과 '스페인 방식으로 말을 달리는 기술'과 사냥, 그리고 전쟁술을 익혔다고 한다. 알폰소는 훗날 국왕에 오른 뒤 가정교사였던 라이문도를 팔렌시아의 주교로 지명하고 "magistro nostro, viro nobile et Deum timenti(고귀한 사람이자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우리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는 티에라 데 캄포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살다냐 백작 고메스 디아스의 조카인 페드로 안수레스와 함께 전투 기술과 승마법을 익혔다.

1065년 12월 27일, 페르난도 1세가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상속인 사이에 왕실 소유물을 분배하는 것을 금지한 서고트 및 레온 법 대신 왕국을 분배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나바라 법 원칙을 따르라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에 따라 장남 산초 2세는 카스티야를 물려받았고, 차남 알폰소 6세는 레온 왕국을 물려받았으며, 3남 가르시아 2세갈리시아를 물려받았다. 여기에 누이 우라카와 엘비라는 평생 결혼하지 않는 대가로 각각 사모라와 토로를 영지로 수여받고 왕실에 속한 모든 수도원의 수입 일부를 받을 권한이 부여되었다.

페르난도 1세가 자신의 왕국을 분할하기로 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식들 모두 우수한 교육을 받고 나름의 능력을 갖추었는데 특정 자식만 유산을 물려받고 다른 자식들은 그러지 못한다면 필시 분란이 있을 것이니, 어린 시절을 보낸 지역을 물려받고 각자 협력하기를 기대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장남 산초 2세가 자신에게만 유산이 상속되어야 했는데 다른 형제들에게도 영토가 분배되어 버려서 카스티야에서만 왕 노릇하게 되었다는 불만을 품으면서, 형제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067년 11월 7일 세 형제들을 중재하던 산차 왕비가 사망하자, 산초 2세는 본격적으로 골육상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068년 5월 1일 알폰소 6세가 바다호스 타이파국을 공격하느라 레온 왕국을 비워두자, 그는 이 때를 틈타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바다호스 타이파 알 무자파르와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왔다.

1068년 7월 19일 피수에르가 강 인근의 린타다 전투에서 양군이 맞붙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이 전투의 승자가 상대방의 왕국을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전투 결과 산초 2세가 승리했지만 알폰소 6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알폰소 6세가 1069년 5월 26일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을 때 산초 2세가 결혼식에 참석한 것을 볼 때 곧 화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사료마다 기록이 달라 당시 아그네스와 약혼한것과 아귀에다 디 인글라테라[6]와 결혼한 것이 혼동되기도 한다. 공식적으론 아귀에다와 결혼해 1074년 또는 1075년 혼인했으나 1077년 별거했다.

1071년,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는 막내 동생 가르시아 2세가 다스리던 갈리시아를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하고 힘을 합쳐 갈리시아로 쳐들어갔다. 갈리시아 2세는 두 형의 공세에 패배하고 포르투갈 중심부로 도주했다가 산타렝에서 산초 2세에게 체포되어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 그 후 갈리시아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 의해 양분되었다. 포르투갈 백작령은 알폰소 6세의 레온 왕국으로 편입되었고, 갈리시아는 산초 2세의 카스티야 왕국에 편입되었다. 또한 양자는 3년간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산초 2세는 약속을 어기고 엘 시드와 함께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에 미처 대항하지 못하고 사로잡혔고, 산초 2세는 레온에 입성한 뒤 1072년 1월 12일 레온 국왕에 즉위했다. 그 후 여동생인 사모라의 우라카의 중재에 따라 알폰소 6세를 사하군 수도원에 유폐시켰지만, 알폰소 6세는 페드로 안수레스 등 몇몇 귀족들과 함께 탈출한 뒤 톨레도의 타이파 알 마문의 궁정에 망명한 뒤 그곳에 수 개월간 지냈다.

산초 2세는 자신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부하는 레온 귀족들을 진압하는 한편, 누나 우라카 역시 자신에게 반기를 들 거라고 의심했다. 그는 우라카에게 사모라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전하라고 명령했으나 거절당하자 반역자와 밀통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군대를 동원하여 사모라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던 1072년 8월 7일, 그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전승에 따르면, 벨리도 돌포스(Vellido Dolfos)라는 귀족이 사모라에서 카스티야군 진영에 들어간 뒤 산초 2세에게 도시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산초 2세는 이를 믿고 그를 따라가다가 돌연 손에 쥐고 있던 황금 창을 빼앗기고 창에 복부를 찔러 사망했다. 돌포스는 엘 시드의 추격을 피해 곧바로 사모라로 돌아와서 우라카를 향해 "도냐 우라카, 약속을 이행할 때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나 중세 히스파니아 역사의 주요 사료로 취급되는 <로데리크의 역사(Historia Roderici)>에는 산초 2세의 사인이 암살이었다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많은 학자들은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의 신빙성을 의심하며, 그가 공방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거나 병에 걸려 죽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후대의 많은 전승과 연대기에는 알폰소 6세를 산초 2세 암살 사건의 배후라고 지목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설령 산초 2세가 암살당했다고 해도 당시 톨레도에 멀리 망명한 그가 산초 2세를 처단하는 데 관여하기 어렵다며, 사모라의 우라카가 배후라는 이야기가 더욱 그럴듯하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우라카가 알폰소 6세와 비밀 협의를 하고 산초 2세를 암살한 뒤 알폰소 6세를 왕으로 옹립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

산초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기존에 맡고 있던 레온 왕국에 더해 형이 군림했던 갈리시아-포르투갈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을 겸임했다. 13세기 후반에 카르데냐 수도자들이 작성한 연대기인 <카르데냐의 전설(Cardeña Legend)>에 따르면, 엘 시드는 모두가 보는 광장으로 알폰소를 부른 뒤 성경에 손을 얹고 자신이 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만인에게 발표하라고 했다. 알폰소는 엘 시드의 지시에 따른 뒤 카스티야 국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데리크의 역사> 등 신뢰성이 높은 사료들에서는 이 이야기가 전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일화가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

한편, 부르고스에 투옥되었다가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로 하고 풀려난 후 세비야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의 궁정으로 망명했던 가르시아 2세는 산초 2세와 알폰소 6세가 서로 전쟁을 벌이느라 자신에게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세비야 타이파의 후원을 받으며 갈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073년 2월 13일 자신과 만나서 협상하자는 알폰소 6세의 제의를 따랐다가 알폰소 6세가 파견한 군대에 체포된 뒤 루고 성에 투옥되어 17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090년 3월 22일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6세는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 포르투갈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다.

여담으로 콘스탄자 데 부르고냐[7]와 결혼했는데, 1068년 필리프 1세의 첫째 딸인 엠마는 정복왕 윌리엄 1세와 약혼했지만 무산되었고, 1077년 경 알폰소 6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약혼은 성사되지 못했는데, 107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근친을 이유로 혼인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교황 입장에서는 프랑스와 카스티야가 결혼 동맹을 맺으면 너무 강해져서 교황청에 좋지 않다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필리프 역시 이베리아에 들어갈 군수 물자를 대주는 것에 부담을 느겼고, 윌리엄이 영국에서 득세한 상황에서 이베리아에 신경쓰는 건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해 약혼 계약을 철회하기로 했다.

그래서 알폰소가 선택한 것이 부르고뉴 백작 로베르 1세의 딸인 콘스탄자 였다. 부르고뉴는 프랑스 왕실에 비교해 총 병력이 부족했지만 우수한 정예 기병과 프랑스 왕실과의 인척 관계라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고 부르고뉴 정예기병대는 평가가 높았기에. 실제로 이들은 이베리아에 넘어와서 충격 전술을 구사해 많은 전투에 참여했다.

앞서 부르고뉴 자체가 인척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실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클뤼니 수도원을 장악하고 있는 부르고뉴를 통해 교황청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기에 프랑스 내에 가장 강력한 봉신 중 하나인 부르고뉴와 혼인을 맺은 것이었다.

2.2. 레콩키스타

알폰소 6세는 아버지의 왕국을 재통합한 뒤 망명 기간 동안 자신을 보호했던 톨레도의 타이파 알 마문과 굳건한 동맹을 맺고, 그와 함께 그라나다 토후국을 공격해 타격을 입힌 뒤 주변의 타이파들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상당량의 공물을 받았다. 또한 클뤼니 대수도원과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산 이시드로 데 두냐, 산티아고 데 아스투딜로, 산 후안 데 에르메데스 데 세라토 등 여러 수도원 건립을 허가했으며, 연간 2,000 디나르를 클뤼니 대수도원에 기부했다. 여기에 더해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의 친척인 콩스탕스와 결혼했으며, 이후에도 새 아내를 정할 때마다 클뤼니 수도원의 조언을 받았다.

그러던 1076년 6월 4일, 팜플로나 왕국의 국왕 안초 4세가 나바라 마을 인근의 페날렌에서 사냥하던 중 형제 라몬 가르세이츠가 고용한 암살자가 내지른 단검에 찔려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 라몬 가르세이츠는 팜플로나 왕국의 새 국왕이 되려 했지만, 귀족들이 형제를 살해한 그를 왕으로 받들기를 거부하자 사라고사 궁정으로 도주했다. 알폰소 6세는 이 때를 틈타 팜플로나 왕국으로 쳐들어가 비즈카이아, 기푸스코아 등 여러 영토를 빼앗아갔고,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는 팜플로나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팜플로나 국왕을 겸임했다. 1077년, 알폰소 6세는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자칭했다.

이 무렵, 알폰소 6세의 동맹자였던 알 마문은 코르도바에서 독살당했고, 뒤이어 톨레도 타이파가 된 알 카디르는 톨레도 시에 대한 통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1079년 바다호스의 타이파인 알 무타와길 이븐 알 아프타스가 톨레도 타이파국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톨레토 타이파국이 점유하고 있던 코르도바 등 남쪽 영토를 빼앗았다. 알 카디르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알폰소 6세는 일단 엘 시드를 세비야로 보내 그들과 동맹을 맺고 바다호스 타이파국을 협공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했다.

그런데 엘 시드는 그라나다 타이파국이 세비야를 침공하자 다른 카스티야 기사들과 함께 세비야와 손잡고 카브라 전투에서 그라나다군을 격파했다. 이때 그라나다군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백작과 다른 카스티야 귀족들은 포로로 잡혀 3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그 후 엘 시드는 군대를 이끌고 그라나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귀환했다. 엘 시드가 허락 없이 타이파들간의 전쟁에 뛰어들고 카스티야 귀족들을 포로로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알폰소 6세는 격분해 1080년 5월 8일 엘 시드를 추방했다.

1080년, 알 카디르가 톨레도 시민들의 반란으로 축출되었고 알 무타와킬이 톨레도에 입성하여 자기 영지로 삼았다. 이에 알폰소 6세는 알 카디르를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바다호스 타이파국과의 전쟁을 감행했다. 1081년, 알폰소 6세는 마드리드와 탈라베라를 공략하고 에스칼로나에 요새를 건설했다. 1082년에는 코루체를 공략하고 알 카디르를 그곳에 안착시킨 뒤 톨레도를 압박했다.

이 무렵, 사라고사 타이파국에 속한 레우데 데 하이온 성채의 총독인 알부파크(Albufac)는 사라고사 타이파 알 무타만( Al-Mutaman)에 대항하는 알 무자파르(Al -Muzáffar)를 지지했다. 그는 알폰소 6세의 지원을 받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여기고, 알폰소 6세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이 요새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루에다 데 하이온 성채는 하이온 강 계곡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알폰소 6세는 이를 받아들여 요새로 출진했다. 그러나 얼마 후 알 무자파르가 사망하자, 알부카프는 알 무타만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하고 기독교인들에게 요새를 내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083년 1월 6일, 알폰소 6세가 이끄는 군대가 루에다 성채에 입성했다. 이때 알부파크가 돌연 성문을 닫고 성안에 들어온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로 인해 산초 가르시아, 라미로 데 팜플로나, 곤살로 살바도레스 등 유력 귀족들이 살해되었다. 당시 후방에 있어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알폰소 6세는 격분해 사라고사와 전면전을 벌이려 했다. 하지만 알 무타만의 부하로 지내던 엘 시드가 "이 일은 알부파크가 타이파의 지시를 받지 않고 무단으로 벌인 짓이니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알폰소 6세는 엘 시드의 중재 아래 알부파크를 처형하고 배상금을 받고 루에다 요새를 넘겨받는 대가로 사라고사와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1084년 가을, 알폰소 6세는 톨레도 남쪽에 진영을 세워 톨레도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게 한 뒤 본국에 귀환했다가 1085년 3월 주력군을 이끌고 톨레도로 진군했다. 이후 2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주변 타이파들로부터 어떠한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톨레도 시민들은 그해 5월 6일에 생명, 재산, 자유 및 종교적 표현에 대한 보장을 약속받고 항복했다. 그는 "톨레도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추가하는 한편, 알바르 파네스에게 알 카디르가 발렌시아의 타이파가 되도록 발렌시아를 압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사라고사가 공물 지불을 중단했다는 이유를 들어 사라고사로 쳐들어가 1086년 봄 도시를 포위했다. 그해 3월 초 발렌시아는 알바르 파네스의 압박에 굴복하여 알 카디르를 타이파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톨레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발렌시아에 속국 군주를 세우는 데 성공한 알폰소 6세는 자신을 "두 종교의 황제"라고 칭했다. 그는 정복지의 무슬림들이 기꺼이 복종하게 하게 위해 그들의 재산을 존중하는 것 외에도 모스크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톨레도 대주교로 부임한 베르나르드 데 세디락은 왕의 뜻을 거부하고 모스크를 대성당으로 개조했다. 또한 알폰소 6세는 현지 기독교인들의 언어와 관습을 존중해야만 그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여겼기에, 새로 정복한 영토에 사는 주민들에게 라틴어와 로마 교회식 미사를 강요하라는 교황청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우르바노 2세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자, 그들의 지원을 얻어낼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들의 뜻대로 이베리아 교회의 예배 방식을 로마 교회식으로 통합하고 오직 라틴어만 사용하게 했다.

2.3. 무라비트 왕조와의 전쟁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공략하고 발렌시아를 복속시키는 등 이베리아 반도 내 타이파국들을 상대로 강력한 압박을 행사하자,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 군주들은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꼈다. 급기야 카스티야군에게 포위된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타미드는 모로코, 세네갈 등지를 장악한 무라비트 왕조의 에미르 유수프 이븐 타슈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유수프는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이후 세비야로 진군해 세비야, 말라가 등 각지의 타이파들이 이끌고 온 군대와 합세한 뒤 바다호스로 행진했다.

알폰소 6세는 북아프리카에서 무슬림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사라고사 포위를 풀고 발렌시아에서 군대를 소집하는 한편, 아라곤 국왕 산초 라미레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이후 바다호스로 진군한 그는 1086년 10월 23일 사그라하스 또는 잘라카에서 유수프의 군대와 마주쳤다. 기독교측 기록에 따르면, 알폰소 6세는 레온과 카스티야 기병 1,500명을 포함해 약 2,500명의 병력을 이끌었으며, 이중 750명은 기사였다고 한다. 반면 무슬림측 사료에 따르면 6만에서 8만에 달했다고 한다. 유수프의 군대 규모는 3배에 달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규모는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유수프는 전투를 개시하기 전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조공을 바치거나 전투를 벌이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알폰소 6세는 전투를 벌이겠다고 답한 뒤, 아라곤 왕국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미루자는 부하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 초반엔 기독교군이 강력한 돌격을 감행해 많은 적을 사살했지만, 유수프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적절히 활용해 기독교군을 포위하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알폰소는 정강이뼈에 큰 상처를 입고 패주했고, 500명의 전사만이 목숨을 건진 채 왕의 뒤를 따라갔다.

유수프와의 전투에서 완패한 알폰소 6세는 톨레도에 돌아가 수성전을 준비했지만, 유수프는 본국에 있던 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후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기병대만 남기고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일단 한시름을 놓게 된 그는 1086년 말 또는 1087년 초에 엘 시드와 화해하고 카스티야 왕국에 복귀시켰다. 이후 엘 시드에게 왕국의 동쪽 국경지대를 지키게 했고, 알바르 파네스에게 발렌시아와 톨레도 사이의 방위를 맡겼으며, 페드로 안수레스에게 서쪽 국경 방위를 맡겼다.

알폰소 6세는 유럽 각국과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해달라고 호소했다. 십자군 선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앙리(엔히크 드 보르고냐) 등 부르고뉴 공국 출신 인사들이 상당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 진입했다. 그들은 1086년 또는 1087년에 투델라 공방전을 치렀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한편 1087년 또는 1088년에 갈리시아에서 루고 성에 갇힌 가르시아 2세의 복위를 노린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폰소 6세는 이를 순조롭게 진압하고 갈리시아 지역의 주교 7명 중 2명을 해임하는 등 갈리시아 통치 체계를 개편했다.

1088년 유수프가 두번째로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와서 알레도를 포위했다. 그러나 사라고사 타이파 알 무타미드가 유수프가 이베리아 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여기고 포위된 수비대에 보급품을 은밀히 공급했고, 이로 인해 알레도는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알레도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한 유수프는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와 마드리드를 일시적으로 공략했지만 과달라하라에서 격퇴당하자 코르도바로 물러났다가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 후 알폰소 6세는 타이파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하고자 노력했고, 유수프를 경계하던 그라나다와 사라고사 등 여러 타이파들은 알폰소 6세에게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그의 보호를 받기로 했다. 그러나 세비야 에미르는 공물 납부를 거부했고, 카스티야군이 압박을 가하기 위해 공세를 가해오자 유수프에게 재차 구원을 요청했다.

1090년 6월, 유수프는 3번째로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했다. 그는 타이파들이 기독교 군주에게 복종하는 등 종교적으로 해이해지고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고 주장하며, 교조적인 종교학자들의 지지를 명분삼아 타이파들을 공격했다. 그 결과 그라나다 (1090년), 세비야 & 알메리야 (1091년), 알리칸테 (1092년), 바다호스 (1094년) 등의 타이파들이 모조리 축출되고 무라비트 왕조가 이 도시들을 직할 통치했다. 알폰소 6세는 타이파들을 복위시키기 위해 유수프와 전쟁을 벌였지만 모든 전선에서 실패했다. 동쪽 방면에서는 제노바 함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토르토사 공략에 실패했고, 남쪽에서는 발렌시아의 타이파 알 카디르가 반란으로 축출되었으며, 서쪽에서는 바다호스-카스티야 연합군이 유수프의 군대에게 연전연패해 리스본, 신트라, 산타렘 일대를 빼앗겼다. 오직 엘 시드만이 1094년 6월 발렌시아를 탈환하고 10월에 무라비트 왕조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096년 11월, 아라곤 국왕 페드로 1세가 우에스카를 포위 공격하던 중 우에스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 빌라흐를 알코라즈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에 알폰소 6세는 봉신인 사라고사를 돕기 위해 친히 그곳으로 향했다. 유수프는 이 때를 틈타 알폰소 6세가 자리를 비운 톨레도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6세는 황급히 군대를 돌려 1097년 8월 15일 콘수에그라에서 유수프를 저지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기독교 전사들이 적 보병 대열을 돌파했지만, 기병으로 구성된 무라비트 양익이 기독교인들을 포위섬멸했다.

알폰소 6세는 콘수에그라 성으로 도피한 뒤 수백 명 밖에 안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압도적인 수로 몰아붙이는 적에 맞서 항전했다. 당시 성채에는 물과 식량이 거의 없었지만, 왕이 성벽 위에 몸소 나아가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은 전의를 끌어올리며 침략자에 맞서 싸웠다. 유수프는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8일 동안 성채를 공략하지 못하자 적 지원군이 도착할 것을 우려해 철수했다.

그 후 알폰소는 군대를 재건하고 국경 지대의 방비를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지만, 1099년 6월 유수프가 재차 대군을 이끌고 톨레도로 쳐들어왔을 때는 군대 재건이 덜 된 상태였기에 속절없이 밀려났다. 무슬림군은 톨레도를 지키던 성채 대부분을 공략했고, 1100년에 톨레도를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하자 주변 지역을 철저히 약탈하고 돌아갔다. 이제 카스티야 왕국은 톨레도 남쪽 지역을 모조리 상실했고, 톨레도는 국경 도시가 되어버렸다. 알폰소 6세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1101년 살라망카와 아빌라에 요새를 새로 세워서 톨레도를 지키게 했고,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에게 톨레도 수비를 맡겼다.

1102년 무라비트 왕조군이 발렌시아로 쳐들어왔다. 당시 발렌시아를 지키던 엘 시드는 1099년에 무슬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히메나 디아스가 발렌시아를 다스렸다. 히메나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알폰소 6세는 즉시 군대를 보냈다. 양측은 쿨레라 전투에서 막심한 손실을 입고 돌아갔다. 하지만 알폰소 6세는 적의 영역 주변에 튀어나온 형국인 발렌시아를 지키는 건 무리라고 여기고 히메나를 설득해 발렌시아에서 철수하게 했다. 기독교인들은 3~4월에 발렌시아를 파괴한 뒤 철수했고, 무라비트 왕조군은 5월에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이렇듯 기독교인들이 갈수록 수세에 몰리자, 사라고사 타이파국은 알폰소 6세에게 더 이상 공물을 납부하지 않고 유수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발렌시아를 상실하면서 동쪽 국경 지대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자, 알폰소 6세는 1104년 7월 메디나 셀리를 공략한 뒤 이곳을 요충지로 삼아 동쪽 국경을 지키게 했다. 이후 1104~1106년에 안달루시아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해 무슬림들에게 타격을 입혔다. 1108년 코르도바 총독이자 유수프의 아들인 타밈의 군대가 우클레스에 쳐들어왔다. 고령의 나이에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알폰소 6세는 왕위 계승자로 지명한 아들 산초 알폰세스에게 군대를 맡겼다. 그러나 1108년 5월 30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기독교군이 또다시 참패했고 산초 알폰세스는 전사했다. 알폰소 6세는 급히 군대를 수습한 뒤 무슬림군의 추가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 남쪽 국경으로 향했지만, 무슬림군이 의외로 공세를 더 이어가지 않자 톨레도로 돌아갔다.

2.4. 후계 문제와 사망

알폰소 6세는 생전에 여러 아내를 두었지만 우라카 외에는 자식을 보지 못했고, 정부로 삼은 여인들로부터 두 딸 엘비라, 테레사 데 레온를 두었다. 그는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의 설득에 따라 정실 아내로부터 얻은 우라카를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결혼시키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또한 포르투갈 백작이 될 엔히크 드 보르고냐와 정부로부터 얻은 테레사의 결혼을 주선해, 그가 차기 후계자를 보좌하게 했다.

그러던 1093년, 알폰소 6세의 정부 중 한 명인 자이다가 아들 산초 알폰세스를 낳았다. 그는 왕위를 물려주기로 마음먹고, 산초 알폰세스를 자신의 합법적인 아들로 삼았다. 그러나 1105년 부르고뉴의 레이몽과 우라카 부부가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낳으면서 상황이 매우 복잡해졌다. 자이다와 그녀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산초 알폰세스가 성년에 가까우니 그를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우라카와 부르고뉴 측 인사들은 알폰소 6세의 합법적인 자식은 오로지 우라카뿐이니 그녀의 아들인 알폰소 라이문데스야말로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폰소 6세는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한 끝에 1107년 5월 레온에서 열린 왕실 회의에서 15살이 된 산초 알폰세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해 9월 레이몽이 사망한 후, 알폰소 6세는 딸 우라카를 갈리시아의 단독 영주로 삼고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갈리시아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리하여 후계 구도가 정해지는 듯했지만, 1108년 5월 30일 우클레스 전투에서 산초 알폰세스가 전사해버리면서 일이 어그러졌다.

알폰소 6세는 남쪽 국경으로 가서 무슬림의 추가 공세에 대한 방비를 수행한 뒤 톨레도로 귀환한 후 귀족들을 소집한 뒤 우라카가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우라카를 재혼시킬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여러 후보가 우라카와 결혼하러 나섰는데, 많은 귀족과 성직자들은 라라 가문의 우두머리이자 알폰소 6세의 측근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 백작이 적합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알폰소 6세는 신하였던 자가 자기 딸을 밀어내고 왕권을 행사할 것을 우려했고, 레온 귀족들과 카스티야 귀족 중 한 명을 택하면 다른 쪽이 반발할까 걱정했다.

알폰소 6세는 고심 끝에 아라곤 국왕 알폰소 1세를 딸의 결혼 상대로 낙점했다. 알폰소 1세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우라카와 같은 신분이고, 군사적 역량이 출중하고 용맹해서 무슬림들의 침략으로부터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을 거뜬히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우라카가 첫번째 남편 레이몽과 결혼한 뒤 산티아고로 돌아갔을 때 함께 했던 부르고뉴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이 결혼으로 인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매사에 엄격하다는 평을 받던 아라곤 군주를 섬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부르고뉴 출신 성직자들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팜플로나 왕국의 선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니 근친상간이므로 혼인을 무효화해달라고 청원했다. 여기에 지난날 우라카에게 구혼했지만 알폰소 6세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던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우라카가 알폰소와 결혼한 후에도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렇듯 반대가 심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알폰소 6세는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알폰소 1세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결국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레온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때 우라카와 알폰소는 결혼 계약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폰소는 우라카에게 상당한 땅을 양도하며, 파문이나 친족 관계로 인해 그녀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양자는 상대방의 영토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알폰소가 죽으면 우라카가 알폰소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고 우라카가 먼저 죽으면 역시 자식들이 그녀의 영지를 물려받기로 했다. 하지만 알폰소와 우라카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할 경우, 우라카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두 사람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테레사 데 레온과 엔히크는 자신들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것에 불만을 품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1109년 7월 1일, 알폰소 6세는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사하군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우라카와 알폰소 1세가 공동으로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칭했지만, 그들은 알폰소 6세의 뜻과는 달리 심한 반목을 벌이며 테레사와 엔히크 부부와 함께 심각한 내전을 벌였다.

알폰소 6세의 강행으로 이행된 그의 딸인 우라카와 사위인 아라곤의 왕인 알폰소 1세는 결혼 후 카스티야 레온의 통치를 간섭했는데 주요 내용은 전쟁을 위한 증세와 군사배치였다. 우라카와 카스티야 귀족의 반대로 둘은 결국 파경을 맞고 내전을 일으키기 까지 했는데 근친혼으로 인한 이혼에 도장을 찍고도 알폰소 1세는 그가 사망한 1134년까지 남부 원정을 단행해 동남부 발렌시아까지 확장했고, 그라나다까지 진격해 전쟁을 벌였으므로, 알폰소 6세의 판단과 안목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우라카와 이혼 이후 아라곤 왕국은 사라고사를 기점으로 해서 당시 카스티야 레온의 50~60%까지 따라잡을 정도로 팽창하여 기독교 패권 국가가 되었다.

3. 가족 관계

오비에도의 주교 펠라기우스가 집필한 <레온 왕들의 연대기>에 따르면, 알폰소 6세는 총 5명의 아내와 2명의 정부를 두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아내들은 아그네스, 콩스탕스, 베르타, 이사벨, 베아트리체이고, 정부는 무뇨스와 자이다였다. 이들의 신상정보는 다음과 같다.

4. 대중매체

실제론 중세 이베리아 반도의 걸출한 명군 중 하나였지만, 엘 시드 전설에 의해서 충신이자 명장군인 엘시드가 왕위를 위협할까봐 온갖 탄압을 한 찌질이로 이미지가 왜곡되었다. 거의 대부분 엘 시드가 주인공인 작품에 나오는지라 찌질이나 빌런으로 등장한다(...). 물론 엘 시드가 죽기 직전에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엘 시드의 충심을 인정하는 장면도 항상 등장한다.


[1] 1072년에 잠깐 산초 2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가 복위했다.[2] 산초 2세와 갈리시아 공동 왕이 되었다.[3] 1072년에 잠깐 산초 2세가 갈리시아 왕위를 단독으로 차지했다가 알폰소 6세가 갈리시아 단독 왕으로 복위했다.[4] 자이다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음[5] 알폰소 6세 이전에도 이베리아에서 안초 3세 등이 황제 칭호를 가끔 쓰기도 했지만 지속적으로 황제 칭호를 쓴 이는 알폰소 6세가 처음이다. 당시까지 황제는 로마와의 연관성을 증명해야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 세계의 비난을 받았다. 이 자칭 황제 칭호는 딸 우라카, 사위 알폰소 1세, 외손자 알폰소 7세까지 3대에 걸쳐 사용되었다.[6] Agatha of England, 잉글랜드 출신으로, 노르만디 공작 윌리엄 1세의 딸[7] Constance of Burgundy. 부르고뉴 백작 로베르 1세의 딸로, 1081년 혼인하여 알폰소 6세의 대를 이었다.[8] 1079년 ~ 1157년 4월 이후, 툴루즈 백작 레이몽 4세와 초혼, 카리온 백작 페르난도 페르난데스와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