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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10:37:49

산초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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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7대 국왕
산초 4세
Sancho IV
파일:산초 4세.jpg
<colbgcolor=#AA0044> 19세기 상상화
출생 1258년 5월 12일
바야돌리드
사망 1295년 4월 25일 (36세)
톨레도
재위 카스티야 왕국레온 왕국의 왕
1284년 4월 4일 ~ 1295년 4월 25일
배우자 마리아 데 몰리나 (1282년 결혼)
자녀 이사벨, 페르난도 4세, 알폰소, 엔리케, 펠리페, 베아트리스, 비올란테 산체스(사생아), 테레사 산체스(사생아), 알폰소 산체스(사생아)
아버지 알폰소 10세
어머니 아라곤의 비올란테
형제 베렝겔라, 베아트리스, 페르난도, 레오노르, 콘스탄사, 페드로, 후안, 비올란테, 하이메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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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별칭으로 '용감한 왕'(스페인어: el Bravo)이라고도 불린다.

2. 생애

1258년 5월 12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 바야돌리드에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10세아라곤 왕국의 국왕 하이메 1세의 딸인 비올란테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베렝겔라, 베아트리스, 페르난도, 레오노르, 콘스탄사, 페드로, 후안, 비올란테, 하이메가 있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도전적인 아들이었다고 한다. 1269년 11월 부르고스에서 열린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딸 블랑슈와 그의 형 페르난도의 결혼식 때, 알폰소 10세는 장남 페르난도와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왕자의 아들인 에드워드를 기사로 선임했다. 이때 알폰소 10세는 다른 아들들에게도 기사 작위를 수여했는데, 오직 그만이 이를 거부했다. <알폰소 10세 연대기>는 축하 행사에 참석한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의 존재가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린 배경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1270년, 알폰소 10세는 베른의 자작이자 몽카다와 카스텔벨리의 영주인 가스통 7세의 딸 기예르마 데 몽카다와 아들 산초를 약혼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아라곤 왕국의 하이메 1세가 이 결혼으로 인해 아라곤 왕국이 카스티야 왕국에게 포위되는 형국이 될 것을 우려해 반발했고, 산초 역시 일국의 어엿한 왕자인 자신에게 맞지 않은 신부감이라며 불만을 제기했기에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다. 1272년부터 군대에 복무한 그는 알폰소 10세가 설립한 카르테헤나 기사단에 들어가 제독 칭호를 받았다. 이듬해 알폰소 10세가 나스르 왕조와의 전쟁에서 아라곤 왕국의 협력을 얻고자 레퀴나에서 하이메 1세를 만났을 때, 그도 이 회담에 참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75년 마린 왕조의 아미르 아부 유수프 야쿱이 안달루시아에 쳐들어오자, 형이자 차기 왕위 계승자인 페르난도가 이탈리아에 가 있느라 자리를 비운 알폰소 10세를 대신해 이를 막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러다가 시우다드 레알에 이르렀을 때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즉시 자신이 왕위 계승자라고 선언하고, 코르도바로 가서 군대를 수습해 마린 왕조와 대치했다. 그 후 알폰소 10세가 본국으로 돌아왔고 1275년 말에 야쿱과 휴전 협약을 체결했다.

카스티야 관습법에 따르면, 장자가 사망할 경우 차남이 왕위 계승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알폰소 10세가 반포한 신법인 <시에테 파르티다스(Siete Partidas)>에 따르면, 장자가 사망할 경우 장자의 자녀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알폰소 10세는 처음에는 산초를 왕위 후계자로 지명하기로 했다. 1278년, 산초는 세고비아의 코르테스에서 카스티야 왕국의 차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비올란테 왕비는 혹여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하기 위해 페르난도의 두 아들 알폰소와 페르난도를 아라곤 국왕 페드로 3세의 궁정에 보냈다.

1277년 6월, 알폰소 10세의 동생 파드리케가 알폰소 10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역을 꾀했다. 파드리케는 지난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려드는 알폰소 10세에게 불만을 품고 카스티야 왕국을 떠나 시칠리아의 만프레디 왕을 섬겼다가 만프레디가 카를루 1세에게 패망하자 다시 콘라딘을 섬겼다가 그 역시 카를루 1세에게 주살되자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산초 왕자를 왕으로 모시고 알폰소 10세를 수도원에 유폐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조기에 발각되었고, 알폰소 10세는 아들 산초에게 이들을 직접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산초는 이에 순종해 음모자들을 부르고스 인근의 트레비노에서 화형에 처했다.

이후 아버지가 무슬림과 전쟁을 벌일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행정 업무도 주관하는 등 국정 경험을 착실히 쌓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부자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알폰소 10세는 유대인 세금 징수관 이샤크 데 라 멜라하가 산초의 요청에 따라 왕실 수입의 일부를 산초가 진 빚을 갚는 데 쓴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급기야 1279년 7월 알헤시라스 공방전에서 참패한 뒤 이사크가 횡령을 저질러 물자가 부족해지는 바람에 패전을 초래했다는 혐의를 씌워 이사크를 처형했다. 또한 알폰소 10세는 장남 페르난도의 자녀들이 하옌 일대를 독자적으로 이끌도록 해주려 했다. 그러나 산초가 "왕국의 모든 영토는 온전히 국왕 단 한사람만이 이끌어야 한다"며 반대하자, 알폰소 10세는 그가 조카들을 배제하려 든다며 반감을 품었다.

결국 1282년, 알폰소 10세는 세비야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장남 페르난도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페르난도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새 국왕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에 격분한 산초 왕자는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귀족들을 결집해 아버지를 상대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바야돌리드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해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선포했다. 당시 카스티야 귀족들은 알폰소 10세가 오래된 관습법을 배제하고 신법을 제정해 자신들의 권리에 제약을 가하고 막대한 보조금을 뜯어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그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나스르 왕조의 무함마드 2세 역시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알폰소 10세는 다수의 귀족과 성직자, 심지어 비올란테 왕비와 마누엘 왕자까지 산초의 편을 들자 세비야로 피신했다. 하지만 교황 마르티노 4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가 알폰소 10세를 지지했고, 야쿱 역시 알폰소 10세를 지지했다. 이렇듯 부자간의 내전이 진행되던 1182년 6월, 산초는 몰리나 영주 알폰소의 딸인 마리아 데 몰리나와 결혼했다. 그녀는 산초가 정부로 삼은 마리아 데 메네세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중 한 명의 대모였다. 교황청은 이 점을 문제삼아 산초와 마리아 데 몰리나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라고 비난했고, 알폰소 10세는 1182년 11월 8일 세비야에서 산초를 반역자이자 배은망덕한 아들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반포했다.

당초 아버지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왕으로 군림하려 했던 산초는 상황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타협하기로 했다. 알폰소 10세는 왕위를 유지하는 것을 허용받을 수 있었지만, 치세 내내 실시했던 재정 및 입법 정책을 전면 중단하고 예전의 관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바다호스, 아게르다, 소리아, 테르비뇨 일대에서 반란이 빗발쳤고, 이를 조기에 수습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던 1284년 4월 4일, 세비야 궁정에 사실상 유폐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내던 알폰소 10세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을 심하게 대하는 아들 산초를 저주하고 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산초는 아버지의 유언을 무시하고 1284년 4월 30일 툴레도에서 산초 4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알폰소 10세와 비올란테 왕비의 4남 후안과 로페 디아스 3세 데 하로 등이 선제의 유언을 받들어 찬탈자 산초를 몰아내고 페르난도의 아들들을 왕위에 올리겠다고 선언하며 우클레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1285년 4월 야쿱이 군대를 이끌고 지브롤터를 건너 헤레스를 포위 공격하고 분견대를 파견해 메디나 시도니아, 카르모나, 에시하, 세비야 일대를 습격했다. 일단 야쿱부터 물리치기로 하고 세비야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함대를 과달키바르 하구로 보내 적 함대의 세비야 공격을 방지했다.

1285년 8월, 대군을 이끌고 헤레스 구원 작전에 착수했다. 그때까지 헤레스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만 입었던 야쿱은 구원군이 다가오자 알헤시라스로 철수한 후 협상을 제의했다. 그해 10월 양측은 5년간의 휴전에 합의했고, 마린 왕조가 카스티야 왕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대신 카스티야 역시 마린 왕조와 나스르 왕조의 영지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이때 레콩키스타 전쟁으로 교회가 획득한 안달루스 장서들 중 아랍어 책들을 선물하였고, 야쿱 역시 습격과 약탈로 인한 카스티야 측의 피해에 금전 보상을 해주었다.

이리하여 야쿱을 돌려보낸 그는 뒤이어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다. 반란군은 압도적인 군세로 몰아붙인 토벌대에게 참패했고, 후안과 로페 디아스 3세 데 하로는 체포되었다. 로페 디아스를 처형하고 후안을 지하 감옥에 투옥했다. 여기에 조카들을 추종하던 바다호스 시민 4,000명과 탈라벨라 시민 400명, 아빌라와 톨레도의 많은 주민들을 집단 처형했다. 또한 카스티야 왕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독립을 꾀한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도 진압했다. 1288년,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3세가 알폰소 10세의 손자 알폰소 데 라 세르다를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으로 옹립해 산초 4세에 대적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수차례 벌어졌지만 큰 전쟁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291년 카스티야 왕국과 마린 왕조와의 휴전 협약이 종결되었다. 마린 왕조의 아미르 아부 야쿱 유수프 앗 나스르가 알제리의 도시이자 자얀 왕조의 수도인 틀렘센을 포위 공격하느라 바쁜 사이, 무함마드 2세와 동맹을 맺고 안달루스의 마린 왕조의 영토인 타리파, 알헤시라스, 론다 공략에 착수했다. 1292년 10월, 나스르 왕조군의 도움으로 타리파를 공략했다. 이때 그는 나스르 왕조에게 타리파를 넘기기로 약조했지만, 막상 공략한 후에는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에 분노한 무함마드 2세는 유수프에게 접근해 타리파가 수복되면 마린 왕조가 다시 가지는 것을 받아들이되 알헤시라스와 론다는 자신이 가지는 것으로 합의를 맺었다.

한편, 지난날 산초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지하감옥에 투옥되었던 후안은 형의 용서를 받고 풀려났지만 마린 왕조에 사절을 보내 형에게 복수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유수프는 즉각 군대를 일으켜 1294년 안달루스에 상륙하여 후안과 합세한 뒤 타리파를 공격했다. 카스티야 귀족 알폰소 페레스 데 구즈만은 성채에서 완강히 저항했다. 이에 후안이 인질로 잡고 있던 구즈만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였지만, 구즈만은 오히려 칼을 던져주며 그 칼로 어서 죽이라고 대꾸했다. 이리하여 포위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을 때, 리프 지역의 베르베르계 와타스 부족이 자얀 왕조의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비보를 접한 유수프는 어쩔 수 없이 회군하기로 했다. 유수프는 작전의 실패에 크게 좌절했고, 알안달루스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하고 알안달루스 내의 마린 왕조의 영역을 전부 나스르 왕조에 넘기고 북아프리카로 되돌아갔다.

1295년 4월 25일, 톨레도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톨레도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9살된 아들 페르난도 4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후 산초 4세의 조카들과 페르난도 4세의 지지자들간의 내전이 촉발되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또다시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3.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