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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4:40:15

페르난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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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3세
Fernando III
파일:2b984b2e-ea8a-433a-9297-92963eb7c99f.jpg
<colbgcolor=#AA0044> 19세기 상상화
성인명 성 페르디난도 3세
(Sanctus Ferdinandus III)
출생 1199년 또는 1201년 6월 24일
레온 왕국 펠레아스 데 아리바의 발파라이소 수도원
사망 1252년 5월 30일 (향년 50~53세)
카스티야 연합 왕국 세비야
재위 카스티야 왕국의 왕
1217년 8월 31일 ~ 1252년 5월 30일
레온 왕국의 왕
1230년 12월 11일 ~ 1252년 5월 30일
배우자 슈바벤의 베아트리스 (1219년 결혼 / 1235년 사망)
잔 드 퐁티외 (1237년 결혼)
자녀 알폰소 10세, 파드리케, 페르난도, 베렝겔라, 엔리케, 펠리페, 산초, 마누엘, 페르난도, 레오노르, 루이스
아버지 알폰수 9세
어머니 베렝겔라
형제 레오노르, 콘스탄사, 알폰소, 베렝겔라
축일 5월 30일
시복 1655년 5월 31일, 알렉산데르 7세
시성 1671년, 클레멘스 10세
1. 개요2. 생애3. 시성4. 가족 관계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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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을 통합하고 레콩키스타를 적극적으로 단행해 왕국의 영토를 크게 늘리고 국가의 번영을 이룩한 명군이다. 성인으로 시성되었기에 '엘 산토(el Santo: 성자)'라는 별칭이 붙었다.

2. 생애

1199년 또는 1201년 6월 24일 레온 왕국 펠레아스 데 아리바의 발파라이소에서 레온 국왕 알폰수 9세와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의 장녀 베렝겔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레오노르, 콘스탄사, 알폰소, 베렝겔라가 있었다. 그는 알폰수 9세와 베렝겔라 부부가 살라망카에서 사모라로 가던 중 산길에서 야영하고 있을 때 태어났다. 1232년, 페르난도 3세는 사모라 주교 마르틴이 아스토르가에서 멜리도까지 이어지는 플라타 가도를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며칠간 휴식을 취할 장소를 마련하고자 세운 수도원을 자신이 태어난 발파라이소로 옮기게 했다.

알폰수 9세와 베렝겔라 부부는 페르난도 외에도 4명의 자식을 더 낳았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폰수 9세와 베렝겔라의 결혼은 사촌지간끼리의 근친혼이니 교회법에 어긋난다며 당장 헤어지라고 요구했으며, 파문하겠다고 여러 차례 위협했다. 알폰수 9세는 이교도와의 항쟁을 위해 이웃 국가들끼리 단합하고자 단행한 것이니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교황은 끝내 거부했다. 다만 그들의 자녀들이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는 인정받았다. 결국 1204년 알폰수 9세는 베렝겔라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이때 페르난도는 레온 왕국의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어 있었기에 레온에 남았다.

1214년 10월 5일, 알폰소 8세가 열병에 걸려 사망하고 엔리케 1세가 카스티야 국왕이 되었다. 당시 엔리케 1세는 10살에 불과했기에, 알폰소 8세는 죽기 전에 아내 엘레오노르에게 섭정을 맡겼다. 그러나 엘레오노르 마저 남편이 죽은 지 24일만에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장녀 베렝겔라에게 엔리케 1세의 섭정을 맡겼다. 하지만 베렝겔라의 섭정은 엔리케 1세의 가정교사를 맡은 알바로 누녜스 데 라라 백작의 방해를 받았고, 베렝겔라는 카스티야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의 압박에 못 이겨 엔리케 1세의 후견인 자리를 그에게 넘겼다. 알바로 누녜스는 레온 국왕 알폰수 9세의 딸 산차와 엔리케 1세의 결혼을 주선해,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을 통합시키고 베렝겔라의 아들 페르난도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려 했다.

그러던 1217년 6월 6일, 엔리케 1세는 팔렌시아의 에피스코팔 궁전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지붕 위에서 떨어진 타일에 머리를 직격당해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엔리케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부르고스와 두에냐스 사이에 위치한 타리에고 데 세라토 마을에 그 시신을 숨겼다. 그러나 베렝겔라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두에냐스 시를 점거하고 엔리케 1세의 유해를 확보한 뒤 팔렌시아와 부르고스의 주교들을 보내 유골을 관리하게 했다.

베렝겔라는 알폰수 9세가 엔리케 1세가 사망하면서 카스티야 왕실의 혈통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려 들 것을 우려했다. 그녀는 일단 엔리케 1세가 죽었다는 것을 숨기고 알폰수 9세에게 아들 페르난도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올 때까지 임시로 카스티야 여왕을 맡았다. 알폰수 9세가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페르난도를 보내자, 베렝겔라는 곧바로 엔리케 1세의 사망을 대내외에 공개한 뒤 아들을 카스티야 국왕으로 옹립했다.

알폰수 9세는 베렝겔라가 자신을 속였다며 격분했고,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엔리케 1세의 전 섭정이었던 알바로 누녜스 데 라라와 손잡고 카스티야를 전격 침공해 우루에냐, 비야가르시아, 카스트로 몬테, 아로요를 점령했다. 그 후 베렝겔라로부터 협상을 요청받자, 그는 베렝겔라와 재혼하고 그녀가 카스티야 여왕이 되는 것을 용인하며, 그와 베렝겔라가 죽고 난 뒤 페르난도가 레온과 카스티야의 유일한 왕으로 군림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카스티야인들이 제안을 거부하자, 알폰수 9세는 무력으로 밀어붙이기로 하고 부르고스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조언에 따라 라구나 데 두에로, 토르케마다, 토르도마르를 거쳐 부르고스로 향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민중들이 강한 적의를 드러내며 곳곳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병력이 계속 소모되자, 그는 부르고스를 공략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레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돌아가는 동안 팔렌시아를 통과하면서 기론과 메네세스 가문의 영지를 초토화했다. 한편 페르난도 3세는 아빌라와 세고비아, 라라, 팔렌시아 일대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곳의 병력을 차출해 1217년 8월 중순 부르고스에 입성해 민중의 환호를 받고 8월 31일에 부르고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217년 9월 페르난도 3세가 부르고스를 떠나 팔렌시아로 향했을 때, 알바로 누녜스의 형제 페르난도가 레빌라 발레헤라에서 매복 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격퇴되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에레루엘라 데 카스티야레라에서 또다른 매복 공격을 시도했지만, 수에로 텔레즈 데 메네세스가 이끄는 적군의 역습을 받고 사로잡혀 바야돌리드로 호송되었다. 그는 알라르콘, 카네테, 타리에고, 아마야 및 빌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등 자신이 통제하는 요새들을 모조리 헌납해야 했다.

1217년 11월, 알폰수 9세는 풀려난 후 레온으로 망명한 알바로 누녜스와 함께 페르난도 3세와 만나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1218년 봄 카스티야를 재차 침공해 메디나 데 리오세코 인근의 발데네브로 요새를 공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로베 데이즈 데 하로, 알바로 디아즈 데 카메로스,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빌라마요르를 파견해 레온 왕국을 침공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알폰수 9세와 라라 가문에게 격퇴되어 카스트레욘 데 라 페냐 요새로 퇴각했다. 알바로 누녜스는 이 요새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이끌던 중 갑작스런 중병에 걸려 사망했고, 요새에 갇혔던 카스티야군은 적이 지휘관의 사망으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강경파였던 알바로 누녜스가 사망한 뒤, 알폰수 9세와 페르난도 3세는 베렝겔라의 중재에 따라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양자는 1218년 8월 26일 토로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아버지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고, 알폰수 9세는 빼앗았던 영토를 되돌려주고 다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일로 부자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토로 협약이 체결되면서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은 여전히 페르난도 3세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는 이들을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협하면서 화해를 도모하는 한편, 부르고스와 팔렌시아 등 자신을 지지하는 지역의 귀족 및 주교들을 중용하여 라라 가문을 견제했다. 또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강력한 외국과 결혼 동맹을 맺기로 했다.

1219년, 그는 어머니 베렝겔라의 조언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손녀이자 슈바벤 공작 필리프의 딸인 슈바벤의 베아트리스와의 혼사를 추진한 끝에 성사시켰다. 결혼식은 1219년 11월 30일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베아트리스에게 카리온 데 로스 콘데즈, 로그로뇨, 벨로라도, 페냐필, 카스트로게리즈, 판코르보, 푸엔테푸디아, 몬테알레그레, 팔렌주엘라, 아스투딜로, 비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및 로아를 지참금으로 제공했다. 연대기 작가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는 베아트리스를 "아주 훌륭하고 아름답고, 현명하고, 겸손한 왕비"라고 평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시칠리아 왕국프리드리히 2세 궁전에 머물면서 아랍과 기독교 문화가 뒤섞인 시칠리아 문화에 흠뻑 빠졌고, 남편과 자녀들에게 시칠리아 문화를 전파했다.

1222년, 페르난도 3세는 어머니 베렝겔라의 권유에 따라 남동생 알폰소를 최근에 사망한 몰리나 백작 곤살로 페레즈 데 라라의 상속녀인 마팔다와 결혼시키고 라라 가문과의 갈등을 종식하기 위한 자프라 협정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인 라라 가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또한 1224년에는 여동생 베렝겔라를 예루살렘 국왕 장 1세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수 9세가 포르투갈의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 산차를 장 1세와 결혼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한편, 당시 알안달루스를 지배하던 무와히드 왕조는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급격하게 쇠락했다. 특히 1224년 9월 칼리파 유수프 알 무스탄시르가 압둘라 알 아딜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후, 무와히드 왕조는 심각한 내분에 시달렸다. 모로코 등지에서 알 아딜에 반발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알 안달루스에서는 하옌의 총독 아브드 알라가 칼리파 압둘라 알 아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알 아딜은 알 안달루스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모로코로 대거 이동시켰고, 알 아딜의 사촌이며 알안달루스의 대리 통치자인 알 바야시는 아브드 알라에게 패전을 거듭하자 페르난도 3세에게 아브드 알라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 기회에 레콩키스타를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1225년 톨레도에서 출진해 알 바야시와 합세한 뒤 하옌 시를 포위 공격했다. 비록 공성 장비가 부족해서 공략엔 실패했지만, 하옌 시 주변 지역과 베가 데 그라나다 일대를 황폐화하고 연밀이 오기 전에 코르도바에 성공적으로 입성해 알 바야시를 총독에 복위시켰다. 알 바야시는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페르난도에게 비뇨스 데라 엔시나, 살바테리아 및 카필라 등 국경 지대의 전략적 요충지를 제공했다. 얼마 후 알 바야시가 코르도바에서 민중 봉기로 피살당하자, 카스티야군은 알 바야시가 소유하고 있던 안두하르, 바예자, 마르토스 일대를 점거했다.

1228년, 압둘라 알 아딜을 처단하고 새로운 무와히드 왕조 칼리파가 된 이두리스 알 마문은 알안달루스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마지막 병력을 모로코로 철수시켰다. 이후 알안달루스에는 사라고사의 타이파 무함마드 이븐 유수프 이븐 후드 알 유드하미 등 각지의 타이파들이 다스리는 토후국들이 난립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를 틈타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 아라곤 왕국의 하이메 1세, 포르투갈의 산슈 2세와 함께 알안달루스를 거의 매년 공격했다. 이븐 후드는 이들을 막으려 애썼지만 1230년 메리다를 포위한 알폰수 9세를 물리치려 했다가 오히려 격파당해 전력을 대부분 잃어버렸다. 이후 기독교 군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알안달루스를 마음껏 유린했다. 다만 1230년 6~9월에 추진된 카스티야군의 하엔 공략 작전은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다.

1230년, 레온 국왕 알폰수 9세는 메리다, 바다호스, 엘바스, 탈라베라 라 레알 공략에 성공한 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방문해 대 야고보에게 경의를 표한 후 레온으로 향하다가 그해 9월 24일 빌라누에바 데 사리아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는 당초 첫 왕비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페르난도가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베렝겔라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페르난도가 왕위 후계자로 거론되었지만, 페르난도가 이미 카스티야의 국왕인 점이 걸림돌이었다.

카스티야 왕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은 알폰수 9세에게 테레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산차둘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권유했다. 알폰수 9세 역시 자신의 동의 없이 카스티야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베렝겔라와 감히 자신에게 대항한 페르난도 3세 모자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의 설득에 따랐다. 그리하여 알폰수 9세 사후 산차와 둘세가 레온과 갈리시아의 공동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3세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토로에 입성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힘을 합쳐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을 제압했고, 페르난도 3세의 어머니 베렝겔라가 산차와 둘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협상한 끝에 1230년 12월 11일 베나벤테에서 연간 3만 메라베디(maravedí)에 달하는 거액의 연금과 토지를 받는 대가로 왕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게 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국왕에 이어 레온과 갈리시아 국왕으로 등극했다. 이후 2년간 두 왕국의 통합에 반대하는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의 반란이 잇따랐지만 모조리 진압되었다. 페르난도 3세는 모든 반란을 평정한 후 1233년에 왕국을 카스티야, 레온, 갈리시아의 3개의 행정 단위로 나누고 각 도시들과 영주들에게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형태로 행정 체계를 개편했다.

페르난도 3세는 내치를 어머니 베렝겔라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레콩키스타에 몰두했다. 1231년 카졸라, 1233년 우베다를 공략했으며, 1235년 토레스 데 알반체스 성을 공략했다. 또한 1235년 코르도바를 지키는 두 요새 이즈나토라프, 토레 데 포야토를 공략한 뒤 코르도바의 무와히드 총독과 1년 휴전 협정을 맺고 430,000 마라베디(maravedi)를 매년 공물로 받기로 했다. 1236년 1월 무어인 탈영병들로부터 코르도바가 무방비 상태라는 정보를 입수한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살라망카, 사모라, 토로 일대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코르도바로 진격했다.

그해 2월 코르도바에 도착한 페르난도 3세는 4달간 공성전을 벌였다. 시민들은 에미르가 구하러 와 줄 거라 믿고 항전했지만, 끝내 구원군이 오지 않자 낙담하여 6월 29일 항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알 안달루스의 핵심 도시였던 코르도바에 입성한 뒤 알폰소 텔레스 데 메네스와 알바 페레스 데 카스트로에게 도시 관리와 방비를 맡겼으며, 코르도바 주교구를 신설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코르도바 공략 소식에 크게 기뻐하며 페르난도 3세에게 경제적 및 정치적 특권을 부여했다.

1135년 슈바벤의 베아트리스 왕비가 사망했다. 당시 페르난도 3세는 7명의 자식을 두었지만, 베렝겔라는 아들이 여러 정부와 관계를 맺고 있어 왕의 미덕이 훼손되는 상황을 우려해 새 왕비를 들일 것을 강하게 권고해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아들의 재혼 상대를 몸소 물색한 끝에 퐁티외 백작 시몬의 딸이며 당시 퐁티외 여백작이었던 잔 드 퐁티외를 아들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결혼식은 1237년 11월 부르고스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1238년 기독교 세력의 공세를 상대로 조직적인 저항과 타협을 병행하면서 알안달루스를 이끌어가던 이븐 후드가 사망했다. 이후 알안달루스는 여러 타이파들의 난립으로 사분오열되었고, 페르난도 3세는 이 기회를 틈타 확장 정책을 이어갔다. 1240년 초 무르시아를 공략하고 대부분의 코르도바 지방을 정복했으며, 1241년 알바세테 공략에 성공했다. 이후 1243년까지 칠론, 가헤테, 페드로체, 산타 에우페미아, 오베조, 세테필라, 호르나추엘로스, 알모도바르, 루케나, 루세나, 산타엘라, 몬토로, 아길라르, 바에나, 에시하, 마르체나, 모론, 오수나, 에스테파 일대를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했다.

이렇듯 알안달루스를 순조롭게 공략했지만 아라곤 왕국 역시 영토를 급격히 늘리면서 서로 충돌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에 페르난도 3세는 1244년 3월 알미즈라에서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와 만나 알미즈라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비야르에서 부소트를 거쳐 비야호요사까지 이르는 전선 이북 지역은 아라곤 왕국이 갖고, 그 남쪽은 카스티야 왕국이 가지며, 양국은 상대방에게 할당된 영토를 침범하지 않기로 했다. 이 협약은 나중에 하이메 1세가 카스티야에 할당되었던 카우데테, 빌레나, 사스를 장악하고 카스티야의 알폰소 왕자가 아라곤에게 할당된 샤티바를 장악하면서 깨졌지만, 양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걸 자제했기에 넘어갔다.

1245년 8월, 페르난도 3세는 하엔 시를 3번째로 포위 공격했다. 하엔 시는 1246년 2월까지 7개월간 버티면서 카스티야 왕국의 침략으로 1244년 수도 아르주나를 빼앗기고 그라나다를 새 거점으로 삼은 무함마드 1세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무함마드 1세는 어떻게든 하엔을 구하려 했지만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그라나다로 피신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신변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하엔 시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1246년 3월 하엔에 입성했다. 1246년 세비야 인근의 알칼라 데 과다이라 요새를 공략한 그는 그동안 자신을 대신해 내치에 전념하던 어머니 베렝겔라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에 귀환하여 부르고스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라스 우에가스 수도원에 어머니의 유해를 안장했다.

1247년 세비야 공략 작전에 착수한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왕국 최초의 제독으로 대상인이었던 라몬 데 보니파스(Ramón de Bonifaz)를 선임했다. 라몬은 칸타브리아로 가서 13척의 대형 선박과 약간의 갤리선 및 소형 선박을 건조한 뒤 과달키바르 강으로 항해해 수적으로 우세한 무슬림 함대를 격파하고 세비야를 해상에서 봉쇄했다. 여기에 페르난도 3세가 1247년 8월 20일 세비야 인근 지역을 모조리 장악하고 외벽을 세우면서, 세비야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세비야의 총독 악사타프(Axataf)는 1년여간 항전하면서 하프스 왕조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좀처럼 구원이 오지 않자 결국 1248년 11월 23일에 항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에 입성한 뒤 궁정을 이곳으로 옮겼다.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 정복 후에도 전쟁을 이어갔다. 1249년 레브리하를 공략했고, 1250년에는 폰타나르, 보르노스, 아르코스 데 라 프론테라를 공략했다. 여기에 니에블라와 알가르베의 에미르인 이븐 마흐푸즈로부터 알가르베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았으며, 헤레스 데라 프론테라, 메니다 시도니아, 알칼라 데 로스 가줄레스, 에헤르 데 라 프론테라, 엘 푸에르토 데 산타 마리아, 카디스, 산루칼라 시장, 로타, 트레부예나 일대의 무슬림 영주들을 봉신으로 삼았다.

몇몇 연대기에 따르면, 페르난도 3세는 세비야 정복 후 마그레브 원정을 계획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그는 알제리 북서부의 도시 오랑을 공략한 뒤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의 해협 양쪽을 통제하고 십자군과 연합해 마그레브의 무슬림들을 복속시키려 했으며, 이 계획을 이루기 위해 아들 알폰소에게 세비야에 조선소를 건설하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폰소 10세는 1257년 가자우에트와 오랑, 1260년 살레 등 알제리 북서부의 해안 도시들을 해상에서 습격하는 등 마그레브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페르난도 3세는 치세 내내 정복 전쟁을 단행하면서도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왕국의 통합을 이루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서고트 왕국의 국왕 레케스윈트가 654년에 반포하고 에르위그 왕이 681년 개정한 <Liber Iudiciorum(심판의 책)>을 카스티야어로 번역한 <Fuero Juzgo>를 반포했다. 그는 이 법률을 일종의 '관습법'으로서 새로 확보한 영토에 그대로 적용했다. 또한 지금까지 왕실과 국가의 공식 언어로 쓰이던 라틴어를 카스티야어로 대체했다. 아들 알폰소는 갈리시아어로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노래인 <칸타가스 데 산타 마리아(Cantigas de Santa María)>를 작곡하기도 했다.

또한 1237년경에 12명의 학자들이 작성한 <고귀함과 충성의 책(Libro de la nobleza y lealtad)>을 출간했다. 이 책은 좋은 정부를 위한 통치자의 의무와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미덕에 대한 정치법과 규범을 담았는데, 스콜라 학파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이 많이 반영되었다. 그 외에도 가톨릭 신앙이 투철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부르고스 대성당 등 여러 성당과 수도원을 세우거나 막대한 기부를 했으며, 여러 병원을 왕국 각지에 신설하여 많은 병자들에게 치료받을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에 살라망카 대학이 유럽 최고의 대학이 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 말년에는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기도 했다.

1251년 겨울부터 부종에 시달리던 페르난도 3세는 1252년 5월 30일 세비야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세비야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장례식은 1252년 5월 30일에 거행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아랍어, 히브리어, 라틴어 및 초기 카스티야어 등 4가지 언어로 새겨졌다. 사후 알폰소 10세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3. 시성

1590년 교황 식스토 5세는 페르난도 3세의 유해가 안장된 세비야 성당에서 병자들이 자연 치유되는 현상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고 페르난도 3세가 성인으로 시성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우르바노 8세가 1649년부터 시성 절차를 시작했고, 교황 특사들은 수십년간 페르난도 3세의 이름으로 이뤄진 기적 사례들의 신빙성을 검증했다. 1671년 2월 7일, 교황 클레멘스 10세는 성인으로 시성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었다며 페르난도 3세를 정식으로 시성했다.

파일:페르난도 3세의 유해가 담긴 관.jpg

페르난도 3세가 성인으로 시성된 근거 중 하나는 그의 시신이 썩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 유해는 세비야 대성당내 지하실에서 금과 수정으로 제작된 관에 둘러싸인 채 안치되었고, 황금 왕관이 유해의 머리를 여전히 감싸고 있다.

4. 가족 관계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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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의 휘장에 성 이시도르와 레안드로 형제와 함께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