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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3-12 01:22:33

에르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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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고트 왕국 가톨릭 군주
Erwig | 에르위그
파일:에르위그.jpg
제호 한국어 에르위그
라틴어 Flavius Ervigius
생몰 년도 미상 ~ 687년 11월 15일
재위 기간 680년 10월 15일 ~ 687년 11월 15일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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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고트 왕국 가톨릭 15대 국왕.

2. 행적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친다수윈트 왕 시대에 그리스에서 아르타바즈드라는 인물이 황제에 의해 추방되어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왔다. 친다수윈트 왕은 그를 훌륭하게 맞이했고 자신의 조카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그 후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에르위그라고 한다. 아르타바즈드라는 이름은 아르메니아 또는 이란에서 쓰이는 이름이다. 역사학계는 이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그가 동로마 사람이었다면, 외국인의 혈통이 왕이 되는 걸 금지하는 툴레도 공의회의 결정에 위배되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었다. 다만 학자들은 그의 모계가 서고트 왕실의 일원일 가능성은 높다고 본다.

680년 가을, 왐바 왕의 귀족 탄압 정책에 반감을 품은 에르위그 등은 왕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음모자들이 탄 독이 든 술을 마신 왐바는 의식을 잃었고, 주변인들은 왕이 곧 죽을 거라고 여기고 관습에 따라 수도자의 옷을 입혔다. 왐바는 몇 시간 후 의식을 되찾았지만, 이미 수도자의 의복을 입었기에 나라를 다스릴 권리가 박탈당했다는 걸 깨닫고 왕위 포기서에 서명한 뒤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이후 680년 10월 15일 에르위그가 왕위에 올랐고, 10월 21일 일요일에 즉위식을 거행했다.

681년 1월 9일 제 12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는 셉티마니아와 스페인 타라코나 주교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왐바 왕이 그 지역 교회를 박해한 여파가 가시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공의회에서는 왐바의 퇴위 문서와 에르위그의 왕위 계승 문서를 공인하고 그의 즉위가 정당함을 확인했다. 또한 전 군주가 권력을 되찾으려는 모든 시도를 사전에 차단했다. 에르위그와 위원회의 결의서에는 왐바의 정책에 대한 강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왐바가 창설한 새 주교직을 없애기로 했다. 다만 실제로 왐바에게 임명된 주교들은 직위를 박탈하지 않고 공석인 곳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왕위를 공인받은 그는 법률 제정 정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왐바의 병역법이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보고 681년 10월 21일 병역법을 포함한 84개의 법률을 수정한 법전을 반포했다. 병역 기피에 대한 처벌이 완화되었으며, 주교 역시 병역을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은 삭제되었다. 한편, 유대인에 대한 28개 조항이 신설되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에게 명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유대인에게 그런 자리를 맡긴 귀족은 720 솔리디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려 하면서, 개종을 거절하는 자는 노역 및 고문에 시달렸다. 하지만 서고트 왕국의 유일한 갈리아 영토인 셉티마니아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태도가 더욱 부드러웠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피신했다.

683년 11월 4일, 에르위그는 제13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번에는 각 지방의 주교와 재판소의 고위 관리 26명이 소집되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전 왕 왐바의 탄압 문제를 제기하면서, 플라비우스 파울루스 등 왐바에게 맞서다 처벌받은 정치범들을 완전히 사면하고 몰수된 재산을 돌려주게 했다. 그러나 공의회는 재산을 돌려주는 것은 반대하고, 왐바에게 맞선 자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친다수윈트 왕때까지 왕권에 의해 박해받은 모든 이들을 사면하기로 결의했다. 에르위그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법원과 교회의 최고 관리들을 재판 없이 존엄, 생명, 재산을 박탈할 수 없다는 법령 역시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즉위하기 1년 전부터 체납된 모든 세금을 면제했다. 공의회는 이에 더해 친다수윈트 왕이 도입한 자유민과 해방노예들을 궁정의 주요 직책에 임명하는 관행을 금지했다. 또한 에르위그는 앞으로 왕의 모든 후손의 생명과 재산을 건드릴 수 없으며, 왕실의 과부에게 새 결혼을 강요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특별 법령을 채택했다.

684년 11월, 톨레도 대주교 율리안이 자발적으로 제14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공식적으로는 왕의 명령없이 열린 공의회였지만, 왕국의 모든 대도시 대표가 참석했다. 공의회 소집 이유는 680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의론을 채택하기로 한 결정을 따라달라는 교황 레오 2세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안은 교황의 요청에 따라 단의론을 채택하기로 했다. 왕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 교회의 권력이 왕권에 버금갈 정도로 강대해졌다.

한편, 서고트 왕국의 사정은 점점 악화되었다. 알안달루스 시기 익명의 무슬림 역사가가 저술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이 끔찍한 기근으로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자유민의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자, 그는 자유민을 지키기 위해 자유민이 노예가 되는 것을 제한했으며, 자유 여성이 노예와 결혼해서 낳은 자식은 노예로 간주되지만 그들이 간섭없이 자유민으로 30년을 살았다면 자유민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한편 에르위그는 군대를 어떻게든 강화하려 했다. 그는 귀족들이 노예의 20분의 1도 병사로 보내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적어도 10분의 1은 군대에 보내고 장비는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선포했다.

그는 생전에 리우비고토와 결혼하여 딸 시실로를 낳았다. 시실로는 왐바의 친척인 에기카와 결혼했다. 687년 11월 15일 중병에 걸려 임종을 눈앞에 둔 그는 사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자신의 권력을 불법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시킨 뒤 눈을 감았다. 사후 에기카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