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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7:13:30

장 3세 드 브르타뉴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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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장 3세 드 브르타뉴
Jean III de Bretagne, Duc de Bretagne
파일:Jean III de Bretagne.jpg
장 3세 드 브르타뉴의 장례식
이름 장 3세 드 브르타뉴(Jean III de Bretagne)
출생 1286년 3월 8일
브르타뉴 공국 샹토소
사망 1341년 4월 30일
브르타뉴 공국
재위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1312년 8월 27일 ~ 1341년 4월 30일
아내 발루아의 이자벨[1] (1297년 결혼/1309년 사망)
카스티야의 이사벨[2] (1310년 결혼/1328년 사망)
사보이아의 조반나[3] (1329년 결혼)
아버지 아르튀르 2세 드 브르타뉴
어머니 리모주의 마리
친형제 기 7세 드 리모주[4], 피에르
이복형제 장 드 몽포르, 베아트리스, 잔, 알릭스, 블랑슈, 마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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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28년간 브르타뉴를 평화롭게 이끌었지만 자식이 없었고 후계 구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아 친조카 잔 드 팡티에브르와 이복동생 장 드 몽포르 사이에서 24년간 이어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을 초래했다.

2. 생애

1286년 3월 8일 브르타뉴 공국 샹토소에서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2세 드 브르타뉴와 리모주의 마리[5]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친형제로 기 7세 드 리모주[6], 피에르[7]가 있었다. 1290년 어머니 마리가 사망한 뒤, 아버지 아르튀르 2세는 몽포르 여백작이자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의 왕비였던 드뢰의 욜랑드와 재혼해 장 드 몽포르, 베아트리스[8], 잔[9], 알릭스[10], 마리[11]를 낳았다.

장 3세는 어머니로부터 리모주 자작령을 물려받았으며, 1301년부터 1314년까지 이곳을 통치했다. 이후 두번째 아내인 카스티야의 이사벨에게 리모주 자작령을 일시적으로 부여했다가 다시 남동생인 기 7세에게 양도했다. 1312년 8월 27일 아버지 아르튀르 2세가 사망한 뒤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두번째 아내이자 자신의 계모인 드뢰의 욜랑드 및 이복 형제 장 드 몽포르와 유산 상속을 놓고 갈등을 벌였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그의 아버지와 욜랑드 사이의 결혼이 적합하지 않다며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청원했으나 실패했다.

1317년, 욜랑드와 장 드 몽포르가 장 3세가 모든 영지를 독차지하는 건 부당하다며 교황청에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전은 1328년까지 장기간 이어졌다. 교황 요한 22세는 1319년 생플로랑 드 소뮈르의 수도원장인 장 밀레가 이끄는 사도 위원회에 중재를 맡겼고, 1324년 장 밀레가 사망한 후에는 돌드브르타뉴의 주교인 기욤 메생을 포함한 다른 위원회에 맡겼다. 소송전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양자가 우호적인 합의를 맺고 끝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지리한 소송전을 벌이는 동안에도, 장 3세는 통치를 무난하게 수행했다. 그의 기간에 브르타뉴 주교들은 총 57명의 브르타뉴 출신 장학금 수혜자들을 위해 파리 대학교 내에 3개의 대학[12]을 설립했다.

1314년, 장 3세는 아바구르 영주 롤랑 드 디낭이 지휘하는 브르타뉴 부대를 플란데런에 파견했다. 이들은 1315년에 프랑스 국왕이자 브르타뉴 공작의 주군인 루이 10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다. 루이 10세는 공로를 인정해 장 3세에게 브르타뉴와 노르망디 국경에 있는 생자크 드 뵈브롱 성채를 수여했다. 1328년, 장 3세는 필리프 6세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해 카셀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가면서 필리프 6세가 승리를 거두는 데 일조했다. 그의 삼촌인 리치먼드 백작 장 드 브르타뉴가 사망한 후인 1334년 5월 8일, 장 3세는 켄터베리 대주교의 중재 하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같은 해 5월 24일에 리치먼드 영지를 장 3세에게 수여했다.

1337년 백년전쟁이 발발한 후, 장 3세는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그는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으며, 리치먼드 백작으로서 잉글랜드 국왕의 봉신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프랑스 국왕을 지지하기로 하고, 필리프 6세의 1339~1340년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다. 1340년 프랑스 국왕의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자기 함대를 슬로이스 항구로 보냈지만,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군에게 파괴되었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투르네에서 대치한 필리프 6세와 함께 했고, 1340년 9월 25일 에드워드 3세와 필리프 6세가 1341년 6월 24일까지 9개월 동안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한 에스플레친 휴전 협약(Trêve d'Esplechin)을 체결할 때 현장에 함께 했다. 이후 필리프 6세와 겨울을 함께 보낸 그는 1341년 부활절에 브르타뉴로 돌아가다가 1341년 4월 말에 캉에서 중병에 걸려 몸져 누웠다.

그는 생전에 발루아 백작 샤를의 딸인 발루아의 이자벨(1292 ~ 1309),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산초 4세의 딸인 카스티야의 이사벨(1283 ~ 1328), 사보이아 백작 에도아르도의 딸인 사보이아의 조반나와 잇따라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이에 장 3세의 친형제인 기 7세 드 리모주의 딸인 잔 드 팡티에브르와 이복형제 장 드 몽포르가 경합했다. 그는 자신과 유산 상속을 놓고 오래도록 대립했던 장 드 몽포르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잔 드 팡티에브르를 후계자로 내정하고 철저하게 교육시켰으며,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친척인 샤를 드 블루아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정작 임종을 맞이할 때 후계자를 누구로 삼을지 정해달라는 가신들의 요청에 냉담하게 답했다.
"그런 일로 괴롭히지 말고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시오."

1341년 4월 30일, 장 3세는 캉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플로에르멜의 카르멜 수도회에 안장되었다. 이후 잔 드 팡티에브르와 장 드 몽포르가 브르타뉴 공작위를 놓고 대립하면서, 장장 24년간 이어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의 막이 올랐다.


[1] 발루아 백작 샤를앙주 여백작 마르그리트의 딸.[2]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딸.[3] 사보이아 백작 에도아르도의 딸.[4] 잔 드 팡티에브르의 아버지.[5] 리모주 자작 기 6세 드 리모주의 딸.[6] 1287 ~ 1331, 리모주 자작, 팡티에브르 백작[7] 1289 ~ 1312, 아베네스 영주[8] 1295 ~ 1384, 라발 영주이자 아퀴니, 비트레 남작 기 10세 드 라발의 부인[9] 1296 ~ 1364, 카셀의 영주이자 말 백작인 로베르 드 플란데런의 부인[10] 1298 ~ 1377, 방돔과 카스트르 백작 부샤르 6세 드 방돔의 부인[11] 1302 ~ 1371, 푸아시의 생루이 수도원의 수녀.[12] 콘월 대학, 플레시 대학, 트에귀에 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