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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23:32:03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

파일:브르타뉴 상징 문장.svg
브르타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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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
François II de Bretagne
파일: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jpg
이름 프랑수아 2세 드 브르타뉴 (François II de Bretagne)
출생 1433년 6월 23일
브르타뉴 공국 클리송 성
사망 1488년 9월 9일 (향년 55세)
브르타뉴 공국 쿠에롱
지위 브르타뉴 공작
1458년 ~ 1488년
배우자 마르그리트 드 브르타뉴[1] (1455년 결혼/1469년 사망)
마르그리트 드 푸아[2] (1471년 결혼)
자녀 장, , 이자보, 프랑수아(사생아), 안토네(사생아), 프랑수아즈(사생아)
아버지 에탕프 백작 리샤르[3]
어머니 베르튀스 여백작 마르그리트[4]
형제 마리, 이자보, 카트린, 마르그리트, 마들렌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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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프랑스 왕비이자 브르타뉴 여공작 안 드 브르타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2. 생애

1435년 6월 23일, 브르타뉴 공국 클리송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에탕프 백작 리샤르는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4남으로 베농, 망트, 클리송, 팔루아우. 에사르, 후단의 영주였으며, 어머니 베르튀스 여백작 마르그리트는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발렌티나 비스콘티의 고명딸이었다. 형제로 마리[5], 이자보[6], 카트린[7], 마르그리트[8], 마들렌[9]이 있었다.

1438년 6월 아버지 리샤르가 사망하자 당시 5살이었던 프랑수아는 아버지의 작위인 에탕프 백작 칭호를 물려받았고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을 맡았다. 1455년 에탕프 백작 프랑수아의 사촌인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2세 드 브르타뉴는 슬하에 자식이 없고 건강이 악화되었기에 제2의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이 벌어질 소지가 생기자, 이를 막기 위해 형이자 전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의 딸 마르그리트를 사촌인 프랑수아와 결혼시켜 에탕프 가문을 포섭하였다. 피에르 2세가 1457년 9월 22일 사망한 뒤 피에르 2세와 에탕프 백작 프랑수아의 삼촌이자 프랑스 무관장을 맡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아르튀르 3세로서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지만 1년 3개월 후인 1458년 12월 26일에 사망했다. 이후 프랑수아가 '프랑수아 2세'로서 브르타뉴 공작위를 물려받았다.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의 간섭으로부터 브르타뉴 공국의 자주권을 지켜내는 걸 목표로 삼았다. 1465년 3월, 샤롤레 백작이자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아들인 용담공 샤를, 로렌 공작 장 2세, 느무르 공작 및 라 마르쉐 백작 자크 다르마냐크느무르, 아르마냐크 백작 장 5세 다르마냐크,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 뒤누아 백작 장 드 뒤누아, 도매르탱 백작 앙투안 드 샤반, 알브레 백작 샤를 2세 달브레, 피에르 당부아즈, 앙드레 드 라발몽모랑시 등과 함께 공익 연맹을 결성해, 프랑스 대귀족의 특권을 박탈하고 중앙집권제를 추진하는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클레베 공작 요한 1세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 등 외부 세력도 공익 연맹에 가담했다.

1465년 7월 16일, 프랑수아 2세는 용담공 샤를과 함께 몽레리에서 루이 1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맞붙어 승리했다. 이후 파리로 진군해 프랑스 시를 포위했지만, 식량 부족에 시달린 데다 타 지역의 프랑스군이 접근해오는 것에 압박감을 느꼈다. 결국 공익 연맹은 루이 11세에게 평화 협상을 맺자고 요청했고, 루이 11세는 받아들였다. 양자는 1465년 10월 5일 콩플랑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공익 연맹 참가자들은 각종 이권을 받아내는 대가로 루이 11세를 국왕으로 계속 받들기로 하고, 루이 11세는 그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이때 프랑수아 2세는 1465년 12월 23일 루이 11세와 캉 조약을 별도로 체결해, 몽모르와 에탕프를 받아내는 대가로 프랑스 국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유지하기로 했다.

1466년, 루이 11세가 파견한 왕실군이 노르망디 공작 샤를을 노르망디 공국에서 축출했다. 샤를은 브르타뉴 공국으로 도망친 뒤 프랑수아 2세의 보호를 받았다. 1468년, 루이 11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했다. 그 해 9월 7일, 앙센이 5일간의 공방전 끝에 프랑스군에 함락되었다. 그 후 9월 10일 교황청의 중재에 따라 샤를과 함께 "왕의 훌륭한 종이 되겠다"는 서명을 제출하고 콩플랑 조약 때 얻었던 영토를 돌려주고,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의 동맹 관계를 끊겠다고 약속했다.

1472년, 프랑수아 2세는 앙센 협약을 파기하고 용담공 샤를과 동맹을 맺었다. 루이 11세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그해 6월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브르타뉴로 진격했다. 프랑수아 2세는 용담공 샤를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샤를은 이에 부응해 피카르디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루이 11세는 브르타뉴에서 군대를 돌려야 했다. 이후 프랑수아 2세는 노르망디와 푸아투를 수 차례 침공했지만 프랑스군에게 격퇴되었다. 1474년 7월 25일, 프랑스 무관장을 역임하면서도 루이11세에 대한 음모를 꾸미던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의 중재하에 용담공 샤를과 함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런던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이들은 루이 11세를 처단한 뒤 프랑스를 생폴 백작, 부르고뉴 공작, 브르타뉴 공작, 부르봉 공작, 느무르 공작, 멘 백작, 에드워드 4세의 주도하에 분할하기로 했다. 여기에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은 에드워드 4세에게 피카르디를 침공한다면 생캉탱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으며, 프랑스의 여러 거물을 음모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1475년 7월 4일, 에드워드 4세는 칼레에 11,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상륙했다. 그러나 정작 용담공 샤를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다른 영주들에게서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에드워드 4세는 전쟁을 이어가봐야 소용없겠다고 판단하고 루이 11세와 회담을 가진 끝에 1475년 8월 29일 파퀴니 평화 협약을 체결한 뒤 본국으로 철수했다. 1477년 1월 5일, 부르고뉴 전쟁을 치르던 용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 루이 11세가 부르고뉴국으로 쳐들어가 영지들을 대거 석권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프랑수아 2세는 루쇼에서 루이 1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해 브르타뉴와 프랑스 간의 상호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1479년 용담공 샤를의 후계자인 마리 드 부르고뉴를 돕는 막시밀리안 대공과 전쟁을 치르는 루이 11세에게 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1480년 1월, 루이 11세는 팡티에브르 가문 대표로부터 브르타뉴 공작위에 대한 권리를 구입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장녀 을 막시밀리안 대공이 속한 합스부르크 가문과 맺기 위해 협상을 시작했다. 1484년, 리치먼드 백작이자 잉글랜드 왕위 주장자 헨리 튜더가 브르타뉴로 망명했다.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3세는 프랑수아 2세에게 헨리 튜더를 넘겨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함대에 브르타뉴 해안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피해를 입은 프랑수아 2세는 헨리 튜더를 설득해 프랑스 본토로 이동하게 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1483년 루이 11세가 사망한 뒤 13세 아들 샤를 8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1세의 딸이자 샤를 8세의 누나인 안 드 발루아와 그녀의 남편인 부르봉 공작 피에르 2세가 샤를 8세의 섭정이 되었다. 이에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가 자신이 섭정이 되어야 한다며 반발했다. 1485년, 루이 2세가 반기를 들었고, 프랑수아 2세는 그를 도왔다. 그러나 루이 2세는 왕실군에게 패배했고, 1487년 1월 브르타뉴 공국에 망명했다. 이후 프랑수아 2세는 반란에 호응한 다른 귀족들과 연합해 파리로 진군했지만, 1488년 7월 28일 생토뱅뒤코미에 전투에서 왕실군에게 패배했다. 루이 2세는 체포된 뒤 수년간 감옥에 갇혔다가 1491년에 풀려났고, 프랑수아 2세는 1488년 8월 19일 베르주에서 샤를 8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브르타뉴의 주권을 보장받는 대가로 배상금을 지불하고 여러 국경 요새를 양도해야 했으며, 상속녀인 안의 결혼은 프랑스 국왕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했다.

1488년 9월 9일, 프랑수아 2세가 쿠에롱에서 낙마 사고로 인해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낭트의 카르멜회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11살의 장녀 이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었다.

3. 가족


[1] 친사촌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의 딸로 오촌 조카다.[2] 가스통 4세 드 푸아레오노르 1세의 딸.[3] 장 4세 드 브르타뉴의 4남.[4]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발렌티나 비스콘티의 고명딸.[5] 1424 ~ 1477, 퐁트브로의 제 25대 수녀원장[6] 1426 ~ 1438, 미혼일 때 사망했다.[7] 1428 ~ 1476, 오랑주 공 기욤 7세 드 샬롱아를레의 부인[8] 1437 ~ 1466년 이전, 수녀[9] ? ~ 1461, 수녀[10]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