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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2:29:17

장 2세 드 로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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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800><colcolor=#000000> 로렌 공작
장 2세 드 로렌
Jean II de Lorraine
파일:장 2세 드 로렌.jpg
이름 장 2세 드 로렌
(Jean II de Lorraine)
출생 1425년 2월
로렌 공국 낭시
사망 1470년 12월 16일 (향년 45세)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재위기간 칼라브리아 공작
1437년 ~ 1470년
퐁타무송 후작
1445년 ~ 1470년
로렌 공국 공작
1453년 ~ 14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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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800><colcolor=#000000> 부모 아버지 앙주의 르네
어머니 로렌의 이자벨
배우자 마리 드 부르봉 (1444년 결혼 / 1448년 사망)
자녀 이자벨, 르네, 마리, 니콜라, 장(사생아), 오베르(사생아), 잔(사생아)
형제 루이, 니콜라, 욜랑드, 마르그리트, 샤를, 루이, 안 }}}}}}}}}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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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렌 공국의 공작, 칼라브리아 공작, 퐁타무송 후작. 나폴리 왕국의 명목상 후계자였고, 아라곤 국왕 추안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카탈루냐인들에 의해 아라곤 왕위 후계자로 추대되기도 했다.

2. 생애

1425년 2월, 로렌 공국의 수도 낭시에서 앙주 공작이자 나폴리 국왕 앙주의 르네와 로렌 여공작이자 나폴리 왕비 로렌의 이자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루이[1], 니콜라[2], 욜랑드[3], 마르그리트, 샤를[4], 루이[5], 안[6]이 있었다. 1431년 7월, 아버지 르네가 부르고뉴파의 지원을 받은 보데몽 백작 앙투안 드 보데몽의 로렌 침공에 맞서 싸우다가 볼뉴빌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뒤 프랑슈콩테의 돌 성채에 감금되었다. 1432년 2월 16일,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르네가 갇힌 성채를 찾아와서 5월 1일에 석방시켜주겠지만 그 대신 르네의 아들 장과 루이를 인질로 넘기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르네는 이를 받아들이고 가석방되었다.

1434년 4월 24일, 르네는 바젤 대성당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명목상 로렌 공국의 주권자인 지기스문트로부터 로렌 공작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로렌을 자기 것으로 삼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필리프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해 르네의 가석방을 취소하고 소환령을 내렸다. 르네는 강력한 권세를 누리는 부르고뉴 공작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돌 성채로 돌아가 2년간 장남 장과 함께 재감금되었다.[7] 1437년 2월 7일, 르네는 여러 영지를 필리프 3세에게 넘겨주고 배상금 납부를 지속하며, 자신의 아들 장과 필리프 3세의 조카인 부르봉의 마리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아들 장과 함께 풀려났다.

그 후 장은 프로방스에 정착했고, 나폴리로 간 아버지로부터 나폴리 국왕의 후계자가 맡는 작위인 칼라브리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1445년 7월 1일 아버지에 의해 로렌 공국의 정부를 이끌 권한을 부여받았고, 형제 루이가 사망한 뒤 퐁타무송 후작위를 물려받았다. 1453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로렌 공작이 되었다. 한편, 장은 백년전쟁에도 참여했다. 1450년 프랑스군의 노르망디 원정에 참여해 루앙, 아르플뢰르, 캉, 팔레즈, 세르부르 공방전에 잇따라 참여해 노르망디 제패에 기여했다.

1453년, 아버지 르네가 자신을 몰아내고 나폴리 국왕이 된 알리폰소 5세의 침공을 받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지원하기 위해 롬바르디아로 출진했다. 이때 장도 아버지의 원정에 참여했다. 1454년 2월 7일 피렌체에 도착한 뒤 알리폰소 5세와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그해 2월 22일 피렌체 정부로부터 피렌체 용병대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1455년 여름 계약이 해지된 뒤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가서 피에몬테의 제노바 공화국 인근 카바 성에 머물렀고, 가끔 프로방스로 몇 차례 여행을 떠난 것 외에는 그곳에 계속 머물렀다.

1456년 5월 프랑스 궁정에 찾아갔다가 그해 8월 20일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 의해 제노바 총독에 선임되었다. 이후 피에몬테에서 몇 번의 임무를 수행한 뒤 1458년 5월 초 프레고소 총독의 요청에 따라 제노바 항구에 입항했고, 5월 15일 제노바 총독 임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던 1458년 6월 27일, 나폴리 국왕 알리폰소 5세가 사망한 뒤 사생아 페르디난도 1세가 나폴리 국왕이 되었다. 이후 일부 나폴리 귀족들은 페르디난도 1세에게 반감을 품고 장을 추대하기로 했다. 장은 지금이야말로 아버지가 잃어버린 왕좌를 되찾을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1460년 마르세유에서 대규모 함선을 이끌고 나폴리로 항해했다. 페르디난도는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전국의 귀족들에게 소집령을 내렸지만 이에 응한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많은 귀족들은 앞다퉈 장에게 투항했다. 이때 란토 공국, 시트라 공국, 바실리카타, 칼라브리아, 크로토네 일대가 장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장은 내친김에 나폴리를 공략하려 했지만, 다른 곳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있는 남편을 대신해 나폴리 수비를 맡은 이자벨 왕비가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로사노 공작 마리노 마르차노는 아예 페르디난도를 함정으로 유인해 죽이고 수급을 장에게 넘겨 신임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460년 7월 7일, 페르디난도는 장의 프랑스군과 반란군을 상대로 사르노에서 맞붙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고, 적에게 포위되어 목숨을 잃을 위기에 몰렸다. 이때 조수에(Giosuè)와 마리오 롱고(Marino Longo)가 이끄는 카바 데 티레니(Cava de' Tirreni) 시 의용병 및 징집병 부대가 전장에 도착한 뒤 산을 올라 프랑스군을 요격하자, 장은 새로운 적의 출현에 놀라 물러섰다. 페르디난도는 그 덕분에 포위망을 뚫고 놀라를 통해 나폴리로 후퇴했다. 이후 로렌 공작이 나폴리 왕국을 삼키면 자기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한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페르디난도를 돕기로 마음먹고, 형제 알레산드로 스포르차와 조카 로베르토 산세베리노에게 병력을 맡겨 나폴리로 파견했다.

칼리초 백작 로베르토 산세베리노는 페르디난도에게 반란을 일으킨 마르시코 백작과 산세베리노 백작의 친척인 점을 살려 두 사람을 설득했고, 두 사람은 '왕자'라는 칭호를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동전을 독자적으로 주조할 수 있는 등 많은 혜택을 주겠다는 페르디난도의 제안에 따라 페르디난도를 지지하기로 했다. 여기에 교황령 북쪽과 남쪽에 단일 국가가 세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비오 2세 역시 페르디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자, 장을 지지하던 나폴리 귀족들 상당수가 페르디난도 쪽으로 도로 귀순했다. 게다가 알리폰소 5세의 봉신을 자처한 이래 나폴리 왕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았던 알바니아의 군주 제르지 카스트리오티가 페르디난도를 돕기 위해 수많은 수송선과 700명의 기병, 1,000명의 베테랑 보병을 파견하자, 전세는 페르디난도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1462년 8월 18일, 페르디난도와 알레산드로 스포르차는 트로이아 전투에서 로렌 공작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1463년 9월 세사에서 포위된 타란토와 로사노 공작 마리노 마르차노는 항복 후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고, 장은 이스키아 섬으로 피신했다. 그해 11월 16일, 가장 강력한 반 페르디난도 세력 지도자였던 타란토 공작 조반니 안토니오 오르시니 델 바조가 병사하면서, 반란군은 지리멸렬해졌다. 페르디난도는 장이 도망친 이스키아 섬을 제외한 왕국 전역을 회복한 뒤 아풀리아 영지를 왕비 이자벨에게 양도했다.

장이 이스키아 섬에서 버티면서 나폴리 만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자, 페르디난도는 아라곤 국왕 추안 2세에게 함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464년 봄 카탈루냐 함대가 이스키아 섬으로 다가와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자, 더 이상 저항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장은 2척의 갤리선과 함께 프로방스로 달아났다. 니콜라 디 캄포바소 백작, 자코모 갈레오타, 로팔로 델 주디체 등이 장을 따라 망명했다. 그 후 장은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지원을 받고 다시 나폴리 왕위를 노리려 했지만, 루이 11세가 응하지 않자 불만을 품었다.

1465년 프랑스의 대귀족들이 공익 연맹을 결성하고 루이 11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자, 그는 장고 끝에 공익 연맹에 가담했다. 1465년 10월 29일, 루이 11세는 귀족들과 화해하고 그들에게 여러 영지를 나눠주는 대가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때 장은 무종, 생트메네홀드 및 네프샤토를 수여받았다. 한편, 아라곤 왕국에서는 추안 2세에게 반감을 품은 카탈루냐 주민들이 1460년부터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수년간 추안 2세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465년 카탈루냐 주민들에 의해 아라곤 국왕으로 옹립되었던 코임브라 공작 페드로가 그라놀러스에서 병사하자, 카탈루냐인들은 앙주의 르네를 아라곤 왕으로 추대했다. 르네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아들 장에게 자기를 대신해 카탈루냐로 가도록 했다. 장은 곧바로 칭호에 아라곤의 후계자이자 지로나의 왕자라는 칭호를 추가했다.

1467년 8월 31일 바르셀로나에 입성한 그는 추안 2세와 대적하다가 1468년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가 프랑스 왕실에 항복한 앙센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1469년 봄 카탈루냐로 돌아온 그는 그해 6월 1일 지로나에 입성했다. 그러나 1470년 12월 16일 바르셀로나에서 산타 마리아 데 몬세라트 수도원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갑작스러운 뇌졸중에 걸려 사망했다.

3. 가족



[1] 1427 ~ 1445, 퐁타무송 후작[2] 1428 ~ 1430, 요절[3] 1428 ~ 1483, 보데몽 백작 페리 2세 드 로렌의 부인[4] 1431 ~ 1432, 요절[5] 1436 ~ 1438, 요절[6] 1437 ~ 1450, 미혼인 채 사망[7] 다만 차남 루이는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