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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폰소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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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onso V
가문 트라스타마라 왕조
생몰년도 1396년 ~ 1458년 6월 27일
출생지 카스티야 왕국 메디나 델 캄포
사망지 나폴리 왕국 나폴리 카스텔 누오보
재위
기간
아라곤 왕국시칠리아 왕국 국왕 1416년 - 1458년
나폴리 왕국 국왕 1442년 - 1458년
아버지 페르난도 1세
어머니 알부르케르케의 엘레오노르
형제자매 마리아, 추안 2세, 엔리케, 엘레오노르, 페드로, 산초
배우자 카스티야의 마리아
자녀 페르디난도 1세(사생아), 마리아(사생아), 레오노라(사생아)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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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18대 국왕, 시칠리아 왕국 24대 국왕, 나폴리 왕국 11대 국왕. 아라곤 트라스타마라 왕조 2대 국왕

왕호는 스페인어로는 '알폰소 5세(Alfonso V)', 아라곤어로는 '알리폰소 5세(Alifonso V)'이다.

2. 생애

1396년경 카스티야 왕국 메디나 델 캄포에서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의 차남 페르난도 왕자와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의 사생아이자 알부르케르케 백작인 산초 알폰소의 딸인 엘레오노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마리아, 후안, 엔리케, 엘레오노르, 페드로, 산초가 있었다. 1412년 아버지가 카스페 협약을 통해 페르난도 1세로서 아라곤 왕국의 국왕으로 선포된 뒤 아라곤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415년 6월 12일 발렌시아에서 카스티야 왕 엔리케 3세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했다. 1416년 4월 2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라곤, 발렌시아, 마요르카, 시칠리아, 샤르데냐, 코르시카의 왕이 되었다. 당시 사르데냐는 제노아의 수중에 들어갔지만, 그는 사르데냐 역시 자신의 영역이어야 한다며 왕을 자처했다.

1419년, 성년이 된 카스티야 왕 후안 2세는 페르난도 1세의 후계자인 알폰소 5세와 후안의 영향력을 없애려 노력했다.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나에게 권력을 위임해 이들을 축출하게 했다. 이리하여 양 진영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알바로 공과 소수의 카스티야 귀족들이 후안 2세를 지지했고, 후안과 다수의 귀족들은 알폰소 5세의 지원하에 후안 2세에게 대적했다. 내전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아 오랫동안 간혈적으로 벌어졌다. 그는 동생을 지원하기 위해 카탈루냐 귀족들에게 군자금을 좀더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은 정부 직책에 역임한 카스티야 귀족들이 너무 많다며 그들을 줄이지 않는다면 돕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카스티야 출신 귀족들이 반발했고, 그는 이를 수습하느라 카스티야 쪽에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

한편,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한 후 시칠리아인들 사이에서 아라곤 왕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알폰소 5세는 즉각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한 뒤 여세를 몰아 사르데냐 공략에 착수했다. 1420년 5월 24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친히 샤르데냐로 진군해 그곳의 주민들을 복속시켜서 샤르데냐의 지배권을 온전하게 가져간 뒤 코르시카 섬으로 분견대를 보내 칼비 시를 공략하고 보니파치오 시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애를 먹었다. 그러던 1421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앙주 공작 루이 3세의 맹공에 시달린 끝에 그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알폰소 5세는 보니파치오 시 포위를 풀고 나폴리로 진군해 그곳을 포위하던 루이 3세를 몰아냈다. 당시 아들이 없었던 조반나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칼라브리아 공작에 지명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5세가 나폴리 국왕을 자처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 후 알폰소 5세는 아라곤 통치를 아내 마리아에게 위임한 뒤 나폴리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브라치오 다 몬토네를 용병대장으로 고용해 경쟁자인 앙주의 루이 3세와 밀라노 귀족 아텐돌로 스포르차의 연합군을 상대하게 했다.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스포르차를 지원하자, 그는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진정한 교황으로 받들기로 하고, 당시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파문된 뒤 입지가 위태롭던 베네딕토 13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얼마 후 전세가 불리해진 스포르차 가문이 루이 3세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기로 하면서, 알폰소 5세의 입지는 굳건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권세가 갈수록 커지자 위협을 느낀 조반나 2세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을 철회하려 했다. 그는 낌새를 눈치채고 1423년 5월 여왕의 연인이자 나폴리 궁정의 유력한 인물인 잔니 카라촐로[1]를 체포하고 여왕 역시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조반나 2세는 아텐돌로 스포르차에게 아라곤인들을 몰아내달라고 요청했다. 스포르차는 군사를 일으켜 아라곤군을 기습공격해 크게 격파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의 요새인 카스텔 누오보로 피신했다. 그 후 조반나 2세는 카스텔 누오보를 포위 공격했지만 아라곤군의 반격으로 패배한 뒤 아베르사 요새로 퇴각했고, 알폰소 5세를 양자로 들였던 것을 취소하고 앙주의 루이 3세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했다.

알폰소 5세는 라퀼라에서 조반나 2세의 군대를 포위하고 있던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동생 엔리케가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에게 구금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일단 귀국하여 전열을 가다듬기로 했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바르셀로나로 귀환하던 중 루이 3세가 소유한 마르세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분풀이를 했다.

아라곤 왕국에 도착한 알폰소 5세는 엔리케가 모라 성에 구금되고 그의 재산이 몰수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카스티야와의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이에 후안 2세는 알폰소 5세의 동생 후안 왕자를 알폰소 5세에게 보내 협상하도록 했다. 1425년 9월 3일, 양국은 토레 데 아르시엘 조약을 체결했다. 엔리케는 이 조약에 따라 석방되었고 체포 후 압수된 모든 재산과 수입을 돌려받았으며, 산티아고 기사단장으로서의 지위도 회복되었다.

1423년 말, 제노바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반 알폰소 동맹에 가담한 뒤 남부 티레니아 해로 진군해 가에타, 프로키다, 카스텔람마레, 소렌토를 공략했다. 형 알폰소 5세를 대신하여 나폴리 내 아라곤 영토를 지키고 있던 페드로는 1424년 제노바와 나폴리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카스텔 누오보에서 저항했지만, 1424년 8월 요새가 함락되려 하자 시칠리아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아라곤군은 나폴리 왕국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조반나 2세와 루이 3세가 나폴리 왕국의 권좌에 올랐다.

한편,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알폰소 5세는 카스티야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던 동생 후안을 지원했다. 1429년에서 1430년 사이에 카스티야로 친정해 자드라케(Jadraque)에서 후안 2세와 알바로 공작의 군대와 대적했다. 이때 알폰소 5세의 왕비이자 카스티야 왕 후안 2세의 누이인 마리아가 개입했다. 그녀는 같은 기독교인이고 친척인데 서로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설득했고, 알폰소 5세와 후안 2세는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후에도 양자간 무력 충돌이 몇차례 벌어졌지만,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1432년, 나폴리 왕국의 권신 잔니 칼라촐로가 조반나 2세가 고용한 암살자에게 피살되었다. 이로 인해 나폴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시가 군사 동맹을 맺고 그를 압박해오자, 어쩔 수 없이 1433년 조반나 2세와 10년 휴전 협약을 맺었다. 이후 예르바 섬에 대한 군사 원정을 감행했고, 1434년 트리폴리 공략에 착수하는 등, 한동안 북아프리카에 관심을 기울였다.

1434년 앙주의 루이 3세가 사망했다. 조반나 2세는 루이 3세의 형제인 르네를 나폴리의 새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승인하지 않았고, 여왕은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가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중인 1435년에 사망했다. 알폰소 5세는 드디어 나폴리 왕국을 공략할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동생 후안, 엔리케, 페드로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카푸아를 공략한 후 가에타를 포위했다. 그러나 1435년 8월 4일 폰차 해전에서 제노바 함대가 아라곤 함대를 격파했고, 알폰소 5세는 후안, 엔리케와 함께 포로로 잡혀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에게 넘겨졌다.

알폰소 5세는 밀라노에서 교양있는 태도를 보여 비스콘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아라곤 세력이 나폴리를 공략하는 것을 막는 것은 밀라노에 어떠한 이득도 안 된다고 설득했다. 때마침 아라곤에서 남편을 대신해 통치를 행사하던 마리아 왕비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며 남편을 석방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비스콘티 공작은 1436년 알폰소 5세와 형제들을 풀어주고 앞으로는 아라곤 왕국과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1436년 2월, 알폰소 5세는 시칠리아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남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카푸아를 탈환하고 가에타에 군사 기지를 세웠다. 1438년 5월 19일 조반나 2세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르네가 나폴리에 도착하여 '레나토 왕'으로서 나폴리 왕을 자처했다. 알폰소 5세는 1439년 9월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동생 페드로가 전사했다. 그 후 르네가 이끄는 앙주 용병들이 맹공을 가하자 아라곤군은 점점 밀려났다. 그러나 르네의 편에 선 바리 공작 야코포 칼도라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앙주 용병대의 기세는 약화되었다. 알폰소 5세는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해 아베르사, 살레르노, 베네벤토, 만프레도니아, 비톤토를 공략했다. 르네는 교황으로부터 1만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알폰소 5세는 교황군 지휘관인 조반니 비텔레스 추기경을 매수해 교황령으로 돌아가게 했다.

1441년 11월 10일 나폴리를 포위한 아라곤군은 수개월간 맹공을 퍼부은 끝에 1442년 6월 2일 공략에 성공했다. 르네는 앙주로 도피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에 입성한 뒤 나폴리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이래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은 아라곤 왕국에 의해 통합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알폰소 5세가 스포르자 가문과 맞서고 있는 교황군을 지원하는 대가로 나폴리의 왕으로 인정했다. 알폰소 5세는 마요르카의 건축가 기옘 사그레라(Guillem Sagrera)에게 카스텔 누오보 요새에 궁정을 세우게 한 뒤, 다시는 아라곤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폴리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알폰소 5세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나폴리에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1443년 나폴리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카스텔 누오보 정문에 웅장한 개선문을 세웠다. 또한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를 즐겨 읽고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로마사를 매일 읽는 등 고전 문학을 탐독했다. 또한 시칠리아 최초의 대학인 시치랄레 스투디움 제네날레(Siciliae Studium Generale)를 설립하는 등 교육에도 신경썼다. 그리고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 조반니 폰타노(Giovanni Pontano), 안토니오 베카델리(Antonio Beccadelli) 등 인문주의자들을 보호하는 등 이탈리아 문인들을 후원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혈전을 벌이고 있던 알바니아 지도자 제르지 카스트리오티를 주목하고, 자신의 봉신으로 삼고 막대한 지원을 해줬다. 여기에 보스니아 공작 스테판 부치치 코사차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내고 그가 보스니아의 지배를 확고히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는 이렇듯 발칸 반도의 군소 세력을 봉신으로 끌여들이고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도록 부추김으로써, 장차 발칸 반도로 영역을 확장할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했다.

알폰소 5세는 에티오피아 제국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1428년 에티오피아 황제 예사크 1세가 파견한 두 명의 고관이 그에게 황제의 서신을 전달했다. 예사크 1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의 딸과 알폰소 5세의 동생 페드로를 결혼시키고 무슬림을 협공하자고 제안했으며, 쓸만한 기술자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이에 대해 어떤 응답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450년 예샤크 1세의 후계자 자라 야코프에게 안전을 보장한다면 기술자를 보내겠다고 밝히는 서신을 보냈다.

1454년 제노바와의 전쟁이 발발했다. 4년간의 전쟁을 치렀지만 승패가 쉽사리 가려지지 않자, 알폰소 5세는 1458년 6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해 제노바를 향한 공세에 착수하려 했다. 그러나 돌연 중병에 걸렸고, 6월 27일 나폴리의 카스텔 누오보에서 사망했다. 동생 추안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아라곤,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고, 알폰소 5세의 사생아인 페르디난도가 나폴리의 왕이 되었다.

3. 가족 관계



[1] '조반니 카라촐로'라고도 하는데, 잔니(Gianni)는 조반니(Giovanni)의 애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