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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30 00:49:43

프리드리히 4세(시칠리아)

파일:7ohXzDr.png
시칠리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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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리드리히 4세(시칠리아).jpg
Frederick IV
가문 바르셀로나 왕조
출생 1341년 9월 1일
시칠리아 왕국 카타니아
사망 1377년 7월 27일 (향년 35세)
시칠리아 왕국 메시나
재위
기간
시칠리아 왕국 국왕 1355년 ~ 1377년
아버지 페트루 2세
어머니 카린시아의 엘리자베타
형제자매 쿠스탄차, 엘레오노르, 베아트리체, 에우페미아, 루이지, 비올란테, 조반니, 블랑슈
배우자 아라곤의 콘스탄사, 보의 안토니아
자녀 마리아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시칠리아 왕국 제19대 국왕.

독일어 이름은 '프리드리히'이고, 시칠리아어 이름은 '피디리쿠(Fidiricu)'이다. 시칠리아 왕국에서 이름이 같은 전왕이 2명이라 시칠리아 왕호는 '피디리쿠 3세'이지만, 피디리쿠 2세가 '프리드리히 3세'를 자칭했었기 때문에 피디리쿠 3세는 '프리드리히 4세'로 불리기도 한다. 이로 인해 '3세'로도 불리고 '4세'로도 불리는 혼동이 있다.

2. 생애

1341년 9월 1일 시칠리아 왕국 카타니아에서 페트루 2세와 카린시아의 엘리자베타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쿠스탄차, 엘레오노르, 베아트리체, 에우페미아, 루이지, 비올란테, 조반니, 블랑슈가 있었다. 14살 때인 1355년 10월 형 루이지가 사망하면서 시칠리아 왕위가 비자, 누나이자 섭정을 맡은 에우페미아에 의해 새 국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실권은 블라스코 2세 데 알라고나에게 있었다. 당시 시칠리아는 귀족들의 내전과 중세 흑사병으로 인해 피폐해졌고,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는 나폴리 왕국의 수중에 있었다.

1357년 에우페미아가 사망한 뒤 통치를 직접 맡은 프리드리히 4세는 아라곤 국왕이자 누이 엘레오노르의 남편인 페드로 4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의 봉신인 아테네 공국과 네오파트리아 공국을 아라곤 왕국에 넘길 테니 시칠리아에 군대를 보내 나폴리 왕국군을 축출하고 반란군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다. 페드로 4세는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들과의 전쟁이 급했기에 별다른 지원을 해주지 못했다. 한편, 아테네 공국에서는 아테네 총독 레이먼드 베르나르디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봉기를 일으켜 베르나르디를 축출했다. 그들은 프리드리히 4세에게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 왕가의 사생아인 아라곤의 올랜도나 디에고 페데리코를 새로운 대리자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하고 디에고 페데리코를 아테네 공국의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아테네와 네오파트리아 공작의 칭호를 취한 최초의 시칠리아 군주였다.[1]

1360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의 남편이자 공동 국왕인 루이지 1세가 이끄는 나폴리군이 메시나에 상륙해 시칠리아 내륙으로 진격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카타니아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나폴리군을 상대로 농성전을 벌였다. 얼마 후 카탈루냐 출신 귀족들이 동원한 용병대가 나폴리군을 격파했고, 루이지 1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나폴리로 철수했다. 그러나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에 합의된 대로 시칠리아를 앙주 가문의 통치로 되돌려야 한다고 여긴 귀족들이 여전히 건재했고, 프리드리히 4세는 이들을 상대로 긴 내전을 벌였지만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했다.

1373년 3월, 오랜 내전에 지친 양자는 아베르사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자신을 교황과 조반나 1세의 가신으로 칭하면서도 트리나크리아(Trinacria: 시칠리아의 고대 지명)의 왕으로서 시칠리아를 계속 다스리는 것이 용인되었으며, 자기가 죽으면 유일한 자식인 마리아가 왕위에 오르고 앙주 가문의 왕족과 결혼하도록 하겠다고 약조했다. 교황청은 프리드리히 4세와 화해하고 1321년부터 바르셀로나 왕조에 가해지던 파문을 해제했다. 그러나 이 합의는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 때처럼 프리드리히 4세의 뒤를 이은 후계자들이 묵살해버리면서 이행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4세는 1361년 4월 11일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의 딸인 콘스탄사와 결혼해 외동딸 마리아를 낳았고, 1363년 콘스탄사가 사망한 후에는 안드리아 공작 프란치스코 드 보의 딸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얻지 못했다. 1375년 안토니아가 사망하자 밀라노 군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인 안토니아 비스콘티와 약혼했지만, 결혼식이 거행되기 전인 1377년 7월 27일 메시나에서 사망했다. 사후 유일한 자녀인 마리아가 시칠리아 여왕에 등극했다.


[1] 이전까지는 바르셀로나 왕조의 어린 왕자가 이 칭호를 획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