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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I | ||
가문 | 바르셀로나 왕조 | |
출생 | 1376년 | |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 ||
사망 | 1409년 7월 25일 (향년 33세) | |
시칠리아 왕국 칼리아리 | ||
재위 기간 | 시칠리아 왕국 국왕 | 1390년 ~ 1409년 |
아버지 | 마르틴 1세 | |
어머니 | 루나의 마리아 | |
배우자 | 마리아 수리아 1세 | |
자녀 | 피에트로, 마르틴, 페데리코(사생아), 비올란테(사생아) | |
종교 | 로마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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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왕국 제21대 국왕.스페인어 이름은 '마르틴'이다. 아버지 마르틴 1세와 이름이 똑같아서 아들쪽에 'el Joven(the Younger, 소(小))', 아버지쪽에 'el Viejo(the Elder, 대(大))'를 붙여서 구별하기도 한다.
2. 생애
1376년경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의 둘째 아들이자 카마라사 후작 마르틴과 루나 백작 로페스의 딸인 마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1378년, 페드로 4세의 맏아들이자 지로나 공작인 추안 왕자의 아내 마르타가 사망했다. 이에 카탈루냐 출신 시칠리아 귀족들은 마리아 여왕을 후안과 결혼시키자고 주장했다. 아라곤 왕국이 언제 시칠리아에 쳐들어올까 노심초사했던 다른 시칠리아 귀족들도 동의했고, 시칠리아 사절단은 1380년 봄에 아라곤 왕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후안은 같은 바르셀로나 왕가끼리 결혼하는 것은 근친상간이라 여기고 바르 공작의 딸 비올란테와 약혼했다.페드로 4세는 그 대신에 이제 갓 4살된 손자 마르틴과 마리아를 짝지어주기로 했다. 이 약혼은 1380년 7월 24일 시칠리다 사절단 대표 굴리에모 라몬 데 몬카다와 엔리코 로소가 바르셀로나 대성당에서 여왕을 대신하여 협약서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 아라곤 왕 페드로 4세는 마리아와 마르틴 모두 어리다는 이유로 둘째 아들이자 마리아의 남편 마르틴의 아버지인 마르틴의 섭정을 받게 했다. 1386년 칼리아리에 수년간 억류생활을 하던 마리아가 아라곤으로 이송되면서 미래의 아내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즉시 페드랄베스 수도원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억류 생활을 해야 했다.
1390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마르틴과 마리아의 결혼을 허가하면서 비로소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392년 3월 22일 마리아가 장인 마르틴, 남편 마르틴과 함께 시칠리아의 항구도시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그동안 시칠리아를 좌지우지하던 아르탈 달라고, 만프레디 치아라몬테, 굴리엘모 디 페랄타, 프란체스코 벤티밀리아는 마리아를 여왕으로서 받들겠지만 두 마르틴 부자를 섬길 수는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에 아버지 마르틴은 무력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아라곤 왕국군을 이끌고 팔레르모로 진군했다. 안드레아 치아라몬테가 팔레르모에서 농성했지만, 안드레아의 수탈에 시달렸던 백성들이 성문을 자발적으로 연 덕분에 아라곤군이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입성했다. 이후 마리아 여왕은 1392년 5월 팔레르모에서 왕관을 썼다.
안드레아 치아라몬테는 마르틴의 집권을 인정하는 조건하에 사면되었지만, 아버지 마르틴의 최측근인 베르나르도 카브레라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안드레아가 단검을 숨긴 채 궁정을 들락거리고 있다고 고발했다. 안드레아는 곧 체포된 뒤 공범자로 간주된 인사들과 함께 6월 1일에 처형되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영지는 베르나르도에게 수여되었으며, 시칠리아의 대제독 직위 역시 베르다르도에게 수여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팔레르모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왕실은 카타니아로 피신했다. 반란은 시칠리아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아들 마르틴의 세력권은 카타니아, 메시나, 시라쿠사만 남았다. 여기에 튀니지에서 세력을 떨치던 하프스 왕조가 고용한 사라센 해적들이 시칠리아를 연이어 습격했다. 1393년 6월, 해적들은 시라쿠사 주교를 포함해 몸값을 지불할 가능성이 있는 부유한 주민들을 납치했다.
1396년 형 후안 1세가 사망하면서 아라곤 왕위에 오른 아버지 마르틴(이하 마르틴 1세)은 아들의 집권을 인정받고자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1398년 시칠리아 귀족들이 모조리 제압되면서 난이 진정되었고, 왕실은 팔레르모로 귀환했다. 아들 마르틴은 1398년 초 아들 마르틴이 마르티누 1세로서 마리아와 함께 공동 왕으로 등극했고, 마리아는 1398년 11월 17일 아들 피에트로를 낳았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1400년 11월 8일 마상창시합 도중 날아온 창에 가격당해 목숨을 잃었고, 마리아는 이 일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401년 5월 25일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마리아 사후 시칠리아의 단독 국왕이 된 마르티누 1세는 1402년 나바라 왕국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딸 수리아 1세와 재혼했다. 1409년 사르데냐가 아라곤 왕 마르틴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해 그 해 6월 30일 나르본 자작 기욤 2세 드 나르본이 지휘하는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해 7월 25일 칼리아리에서 사망했다. 사후 칼리아리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마르티누 1세는 1406년 수리아 왕비와의 사이에서 아들 마르틴을 낳았다. 그러나 마르틴은 1407년 8월 시칠리아에서 병사했다. 그 밖에 시칠리아 귀족 타르시아 리자니의 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페데리코를 두었고, 또다른 시칠리아 귀족 여성 아가투치아 페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비올란테를 두었다. 아라곤 왕 마르틴 1세는 아들이 죽자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내세우고 아라곤 왕위 후계자로 계승시키려 했다. 그러나 사생아라는 점 때문에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410년 5월 31일 마르틴 1세 마저 사망해버리면서, 바르셀로나 왕조는 단절되었다.
페데리코는 1412년 아라곤 국왕으로 선출된 페르난도 1세 휘하에서 루나 백작으로 봉해진 뒤 제르바 섬 원정에 참여했으나, 1430년대에 아라곤 왕이 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한 뒤 모든 영지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지하감옥에 수감되어 죽을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비올란테는 니블라 백작 엔리케 페레스와 결혼했다가 결혼 무효 판결이 내려지자 다시 오르가즈 영주 알바르 페레스 데 구스만의 아들 마르틴 페르난데스 데 구스만과 결혼해 세 딸 카타니아, 아그네스, 마리나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