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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 |
교황명 | <colbgcolor=#FFFFFF,#1F2023>클레멘스 7세 (Clemens Ⅶ) |
본명 | 줄리오 디 줄리아노 데 메디치 (Giulio di Giuliano de' Medici) |
출생 | 1478년 5월 26일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
사망 | 1534년 9월 25일 (향년 56세) |
교황령 로마 | |
재위기간 | 1523년 11월 19일 ~ 1534년 9월 25일 (10년 303일) |
문장 |
[clearfix]
1. 개요
제219대 교황.
개인적으로 그를 만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외모 그리고 후덕한 행실을 갖춘 훌륭한 남자라고 평가했다. 증오스럽기만 한 다른 메디치 일가와 종종 비교되기도 했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적법하지 않은 메디치 가문의 후예였을 시절부터 찬사를 받았다.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던 사람들도 그를 칭찬했다. 그들은 그가 얼마나 전력을 다하고 충성을 바쳐 레오 10세 교황을 위해 일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2. 생애
1478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를 대표한 유명한 집안 메디치 가문 출신인 그는 사생아였을 뿐만 아니라 유복자이기도 했다. 아버지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그가 태어나기 1달 전에 피렌체 대성당에서 벌어진 유명한 암살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촌인 교황 레오 10세는 혼외 출생이라는 결함을 무시하고 그에게 특별 관면[1]을 허락해 젊은 나이에 성직에 오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줄리오는 추기경과 나르본과 피렌체의 대교구장이 될 수 있었다.[2]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콘클라베가 소집되자, 줄리오 추기경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때까지 사생아는 교회법에 따라 교황으로 선출된 전례가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더군다나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서 줄리오는 정치적으로 친독일 전선에 속했기 때문에, 특히 친프랑스파 추기경들은 그의 교황 선출을 방해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썼다.
거기에는 정치적 파별싸움을 넘어선, 막강한 가문들 자체의 이해관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고대 로마의 귀족혈통인 콜론나 가는 마찬가지로 친황제파였음에도 신흥부자인 메디치 가문에 적대적이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그마치 50일 동안 이어진 선거 끝에 줄리오 데 메디치는 승리를 거두고 클레멘스 7세라는 이름을 얻었다.
외교가이자 저술가인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3]는 화려한 교황 즉위식 장면을 이렇게 보고한다.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교황에 대해 최고 중 최고를 희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식장에 모인 수많은 인파는 연단에 씌어 있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읽을 수 있었다.
세계 평화를 재수립하시고 그리스도교의 명예를 영구히 수호하시는 클레멘스 7세
모든 것이 이전보다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엿보였다.
로마 주재 베네치아 대사인 마르코 포스카리는 3년을 체류하는 동안 클레멘스 7세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교황의 정직함과 경건함이었다.
그는 성직록도, 성물도 판매하지 않았다. 레오 10세나 다른 교황들과는 달리 그는 은사를 내릴 때 어떤 보상도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이 적법하게 진행되기를 원했다.
또 다른 베네치아인은 교황이 매우 차가운 심장을 가졌고, 그 때문에 사실 훌륭한 판단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주 천천히 결정을 내린다고 전했다.
교황 전기작가인 루트비히 파스토르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클레멘스 7세는 항상 망설임으로써 불행에 빠지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이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은 깊이 사고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의지를 강화하는 대신 끊임없이 새로운 의심과 고민을 유발한다. 교황의 우유부단함과 망설임은 그 강도가 커질수록 더 큰 불운을 불러왔다.
파스토르는 당시 연대기 작가들의 냉정하고 비판적인 판단을 이렇게 요약했다.
동시대인들은 사려 깊은 클레멘스 7세의 특성을 거의 완전히 무시했다. 위대하고 큰 존경을 받던 추기경이 보잘것없는 소심한 교황이 되었기에 놀라움은 더 뼈아프게 느껴졌다.
나락으로의 카운트다운은 성좌에 오른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1525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파비아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사로잡힌 후 스페인으로 끌려갔다. 현실적인 정치가였던 클레멘스 7세는 즉각 승리를 거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연대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수아 1세는 1526년에 카를 5세와 화해하고 이탈리아에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유럽에서, 특히 강권정치로 인해 조각나 있는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의 위협적인 패권을 불안해한 교황은 카를 5세를 배신하고 카를 5세를 적대한 군주들과 동맹을 체결했다. 프랑스,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가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는 코냑 동맹에 동참했다.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이 발발했다.
1527년 5월 독일군에 의한 사코 디 로마(로마 약탈)에서 전쟁은 극에 달했다. 바티칸을 떠나 혼비백산 도망치던 클레멘스는 산탄젤로 성에서 포위되고 말았다. 스위스 근위대가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결국 교황은 굴복해야만 했다. 오르비에토로 피신한 그는 메디치 가가 피렌체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527년 가을이 지나가기도 전에 황제는 중립을 약속한 대가로 교황에게 교황령의 자유와 통치권을 돌려 주었다. 2년 후 메디치 가의 피렌체 통치권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후 사실상 완전히 황제 카를 5세의 입김에 종속돼 버리는 신세가 돼 버린다.
임기 동안 클레멘스 7세는 교회 개혁만큼이나 공의회를 두려워했다. 콘스탄츠 공의회와 바젤 공의회에서처럼 교황이 공의회 교부들 다수의 의사의 굴복해야 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모토였다. 게다가 당시 정세로 보건대 공의회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클레멘스 7세는 교회의 개혁 요구를 차단함으로써 원치 않게 종교개혁과 그로 인한 개신교의 등장을 촉진했다.
그러나 학문과 예술은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읽은 후 감명을 받아 그를 지지했던 것으로도 꽤 알려져 있으며, 그에게 출판까지 권했다고 한다.
클레멘스 7세는 1534년 9월 25일 로마에서 사망했고, 가까운 친척이자 후원자였던 레오 10세와 마찬가지로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