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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 |
교황명 | <colbgcolor=#FFFFFF,#1F2023>레오 10세 (Leo X) |
본명 | 조반니 디 로렌초 데 메디치 (Giovanni di Lorenzo de' Medici) |
출생 | 1475년 12월 11일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
사망 | 1521년 12월 1일 (향년 45세) |
교황령 로마 | |
재위기간 | 1513년 3월 9일 ~ 1521년 12월 1일 |
문장 |
[clearfix]
1. 개요
레오 교황은 고상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 교황이 되기 적합한 소양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특히 고전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인간미, 친절, 큰 도량, 예술가와 학자를 지원하려는 선명한 의지가 돋보였다. 그 덕분에 예술가들과 학자들이 그때처럼 교황청에서 수년 간이나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파올로 사르피(Paolo Sarpi)
―파올로 사르피(Paolo Sarpi)
제217대 교황.
피렌체 공화국의 명문가이며 피렌체의 은행가인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와 클라리체 오르시니 사이에서 '영리한' 차남[1]으로 태어났다. 또한 그와 함께 성장한 사촌[2] 줄리오 디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기금 마련을 위해 독일의 면벌부 판매를 승인했고,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교황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어떠한 측면으로든 빼놓을 수 없는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2. 생애
2.1. 교황이 되기까지
조반니 데 메디치의 어린 시절은 순전히 가문빨에 의한 승승장구였다. 7세에는 탁발수도회에 입회했고, 아버지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와 교황 인노첸시오 8세 사이의 거래에 의해 13세가 되던 1489년 3월 8일에는 추기경이 되었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모든 지지자들을 잃은 데다가 극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고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는 원래 피사 대주교를 성당에서 살해한 죄로 파문을 받은 경력도 있었지만 곧 교황청과 화해했다. 또한 그의 딸을 인노첸시오 8세의 서자에게 시집보내 지참금과 거액의 대출이 오가는 거래였다. 추기경이긴 했지만 이름만이었기 때문에 문장을 사용하거나 추기경단에 낄 수는 없었던 조반니는, 3년 동안 피사에서 제대로 신학과 교회법을 공부하고 난 1492년 3월에야 정식으로 추기경단에 들어가게 되었다.같은 해 4월에 아버지 로렌초가 죽고, 7월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사망하자 콘클라베에 참석하였다. 이 때 선출된 교황은 다름 아닌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 이때까지 탄탄하던 가세가 기울어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는데 훗날 행적을 보면 추기경으로써 보단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가문을 일으키려는 책임감 비슷한걸 느낀듯 하다. 보르자는 알렉산데르 6세로서 1503년까지 교황직을 수행했고, 그 뒤를 비오 3세와 율리오 2세가 잇는 짧은 순간 동안 조반니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형 피에로 데 메디치와 피렌체에 머물던 조반니는, 알렉산데르 6세에게 파문당한 수도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일으킨 봉기에 프랑스의 황제 샤를 8세의 침공이 겹쳐 나란히 밖으로 쫓겨난다. 이 난리통에 형과 헤어진 조반니는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를 전전하다 6년 후 1500년에 로마에 안착한다.
이 때 알렉산데르 6세의 도움을 받아 지내며 수년 간 예술과 문학에 푹 빠져있었다. 이 동안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알렉산드르 6세의 정적 율리오 2세가 선출되려고 했으나 아직 체사레 보르자의 군대가 건재했고, 타협으로 알렉산데르 6세 시절 강직함으로 존경받던 비오 3세가 후임 교황으로 착좌했다. 하지만 1달여 만에 사망했다.
1503년에는 호전적인 율리오 2세[3]가 교황이 되었다. 같은 해에 형 피에로가 죽자 집안을 이끌던 그는 1511년 10월 볼로냐와 로마냐의 교황특사가 되었지만 라벤나 전투 기간 동안 프랑스군에 붙잡혀 밀라노로 송치되었다가 간수에게 뇌물을 먹여 빠져나왔다.
이듬해 율리오 2세가 프랑스 주교단이 멋대로 개최한 피사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으며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2년~1517년)를 연 뒤 조반니로 하여금 교황군에 합류하여 피사 공의회(1511년~1512년)[4]를 지지하는 피렌체를 치도록 했다. 피렌체에서 신정정치를 실행해다 실각한 사보나롤라는 화형당한 지 오래인 데다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한 프랑스군도 철수한 마당에 피렌체 시민들도 그를 환영했고[5], 고향에 무혈입성한 그는 동생 줄리아노를 내세워 메디치로서 복권할 수 있었다.
1512년엔 메디치가문이 피렌체로 복귀하였고 151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사망하자 콘클라베가 열렸는데, 그의 젊은 나이는 교황이 되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지병인 치핵과 그 부위의 천공(fistula) 때문에 건강이 안 좋았는데, 이런 상태를 내세우며 최대한 아픈 척을 했다. 그래야 "아, 저 자는 교황이 되어도 그렇게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군" 이라는 메리트(?)가 붙기 때문. 그게 먹혔는지, 조반니는 3월 9일 교황좌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그의 나이는 불과 37세였다.
2.2. 여러 가지 전쟁들
레오 10세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역대 교황들이 교황령 기득권과 종주권 유지, 이탈리아반도 내에서 세력균형과 플러스로 메디치 가문 퍼주기까지 하려는 구상 때문에 치세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베네치아와 결탁하여 이탈리아 북부의 패권을 쥐려 했기 때문에, 1513년 4월 5일에는 그에 대항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및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더불어 메헬린 동맹을 맺었다. 처음에는 좀 밀리는가 싶었는데 6월 노바라 전투에서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을 몰아내고야 말았다. 전쟁은 10월까지 계속됐지만 한 번 꺾여버린 전세가 좀처럼 회복되지 않은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은 결국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그런데 1515년 루이 12세의 후임으로 즉위한 프랑수아 1세가, 9월 13일 협정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연합군은 다시 모였지만 프랑수아의 3만 8천 대군을 막아내지 못했다. 9월 14일 마리냐노 전투에서 패배하자[6] 교황은 그가 원하는 밀라노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동맹은 깨졌다. 이를 위해 12월 교황이 프랑수아 1세와 볼로냐에서 단독 비밀회동을 가지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국왕 카를 5세는 상당히 아니꼬워했다고 한다.
1513년 12월 9일에는 제5의 라테란 공의회를 재개하여 피사 공의회를 재차 이교로 단정, 개최한 주교단을
1516년에는 피렌체 공화국을 다스리던 동생 줄리아노가 세상을 떠나자, 형 피에로의 아들인 로렌초를 우르비노 공으로 임명하려고 우르비노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 1세를 파문하고 추방시켰다. 또한 로렌초를 프랑스 왕가와 혼인시켜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별로 성과는 거두지 못했는데, 로렌초가 딸 하나 남기고 일찍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딸이 바로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한편 빡친 로베레는 우르비노를 탈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순조롭게 재입성, 몬테 임페리알레에서는 비비에나 추기경 베르나르도 도비치가 이끈 군사를 신명나게 털어 페사로로 쫓아내지만 사비가 부족해서 전쟁을 종결시킨 뒤 만토바로 퇴각했다. 레오 10세는 이를 위해 교황청 금고를 탈탈 털었으며 알렉산데르 6세마냥 괜한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이 과정에서 교황청은 메디치 가문 영지 만들기 전쟁에 참전하여 1515~1516년 약 2년간 80만 두카트를 탕진했는데, 재정난 타개를 위해 31명의 추기경을 한꺼번에 서임해서 비난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50만 두카트를 벌었다고 한다. 후임 교황 하드리아노 6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매관매직으로 팔아치운 자리였고 31명중엔 자신의 친족 조카와 사촌도 3명이 껴 있었기 때문(클레멘스 7세는 1513년에 이미 추기경으로 꽂았다.) 레오 10세의 사망 후 콘클라베에 참가한 추기경이 39명이었고, 후대 바오로 4세 시기 이후 20세기까지 추기경단이 약 70명 정도로 유지했는데, 재정난이 아무리 심했다 해도 비상식적인 파격 조치였다. 당연히 기존 추기경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그러나 레오 10세는 자신을 미워하는 기존 추기경단을 그냥 두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사건 진위가 의심스러운 페트로치 추기경 암살모의 사건을 조작하여 알폰소 페트루치 추기경을 처형시키고, 나머지 반대파 추기경들 산탄젤로 성에 감금했다. 페트로치 추기경이 자신의 주치의 베르첼리를 사주하여 치질 자리에 붙이는 고약에 독을 타려다가 발각되었다는 구실로 체포당했다. 페트로치 추기경은 레오 10세의 동성#애인(?)으로 추정될 정도로 상당히 총애받은 심복이었는데, 의사는 거열형에 처하고, 페트로치 추기경은 추기경을 차마 그리스도인이 처형할 수 없어서 무어인을 고용하여 교살시켰다고 한다. 나머지 추기경들은 거의 전재산을 싹싹 긁어서 조공으로 바친 후에야 용서받았다.
한편 교황 중심의 대 오스만 투르크 십자군 원정을 재추진하기 위해 원대한 계획을 짜고 헌금으로 기금을 모은 뒤,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단결을 주재하려 했지만 황제 카를 5세를 비롯한 세속 군주들의 무관심으로 뭍혔다. 다만 여기에는 다른 사정도 있었는데,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는 십자군에 참가하라는 레오 10세의 제안에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공격하고 있는 판국에 어떻게 나라를 비우고 군대를 이끌고 멀리 원정을 갈 수 있겠는가?"라고 거절했다.
2.3. 종교개혁의 불씨
예술을 사랑하는 레오 10세는 라파엘로 산치오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을 초빙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속행했다. 그가 진행한 작업은 자신의 초상화, 시스티나 경당의 벽면, 바티칸 회랑의 벽화 등이었는데, 성 베드로 대성당이야 전임교황 때부터 꾸준히 증축해오던 차였으니 별로 다를 바는 없겠지만, 특유의 낭비벽과 적절하지 못한 인력 배치로 인해 공사에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앞서 사치를 제외했다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전쟁, 낭비벽, 가문 퍼주기 등의 복합적인 요소가 재정난을 끼친 것이다.다만 면벌부, 정확히 표현하자면 '헌금 받고 대사 주기'는 레오 10세의 실책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레오 10세 이전 교황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본래 가톨릭에서는 정기적으로 또는 특별히 필요하다 인정될 때 대사령을 반포하여, 가톨릭 신자 개개인이 절실한 회개를 한 뒤 고해성사와 미사에 참례하여 영성체를 하고 나서 교황의 명령으로 지시된 신심행위를 이행하는 절차를 밟으면 모든 죄와 그에 따른 연옥에서의 벌을 용서받을 수 있게 하는 전통이 있었다.[7] 보속 방법은 크게 2가지로, 기도와 성지순례로 대표되는 신심행위와 봉사활동 등의 선행이 있었다. 레오 10세는 이를 이용하여 대성당 건축 특별 대사령을 반포, "성지순례나 선행이 어려우면 자선헌금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일정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대사를 뿌리기 시작했다. (면벌부에 대해선 해당항목 설명 참조)
여기서 가장 논란이 된 것은 '헌금으로 대사를 받을 수 있는가'이다.[8] 사실 이 당시는 기존 관례와 비교하여 볼 때 문제는 없었다. 성지순례 같은 기존의 보속 방법은 초기 그리스도교에는 있었으나 점점 보속이 가벼워지면서 헌금으로 보속을 하거나 대사를 받는 게 일반화되었고 대중들도 이를 선호했다.[9]
문제는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공사 등으로 인해 교황청의 재정이 바닥나면서, '헌금형 대사'를 본격적으로 재정 수입에 애용하기 시작하면서 터졌다. 이미 100여년전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 때부터 남용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있었지만, 대사령과 성유물 판매와 전시로 인한 순례객은 로마교회의 큰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이유로 점차 확대 되었고 교황청 분열이 끝나고 마르티노 5세 시절부터 황폐화된 로마시내를 재개발 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컸기 때문이다.[10] 그리고 그 연장선상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보수공사까지 해야 했는데 이왕 보수하느니 화끈하게 재건축하자... 였다고.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중 한 명이자 마인츠 대주교인 '알브레히트(Albrecht)'[11]는 마침 공석이던 마인츠 대주교직이 매물로 나오자 2만 9천 두카트에 입찰하여 교황청에서 성직을 매입했고[12] 매입과정에서 현금이 모자르니 레오 10세는 자금 회수를 위해 헌금형 대사를 8년간 승인하고 초입세를 제외한 8년간의 수입 중 절반을 상납받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독일지역에서 로마로의 송금은 유럽 최고의 사채업자(?) 푸거가문이 맡았다.
게다가 또다른 실책까지 겹쳤는데, 우선 당시 독일 지역에 선포된 대사의 조건을 보자.
1. 지은 죄를 회개하고 다시 죄짓지 않기로 마음먹은 뒤 사제에게 가서 고해성사를 보아야 한다.
2. 적어도 지정된 7개 성당을 순례하여야 하며, 순례할 때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여 주신 주 예수의 오상(양손, 양발, 옆구리)을 기념하고 공경하는 뜻으로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5번씩 열심으로 바치거나 또는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0)을 바쳐야 한다.
3.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바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 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와 대재로 대사를 받을 수 있다.[13]
2. 적어도 지정된 7개 성당을 순례하여야 하며, 순례할 때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여 주신 주 예수의 오상(양손, 양발, 옆구리)을 기념하고 공경하는 뜻으로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5번씩 열심으로 바치거나 또는 "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0)을 바쳐야 한다.
3.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로 응분의 헌금을 바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같이 갈 수 있도록 열려 있으므로, 돈이 없는 사람들은 헌금 대신 기도와 대재로 대사를 받을 수 있다.[13]
여기까지만 보자면 전혀 문제가 없어보일 것이다. 그런데 알브레히트는 이 조건 중에서 2번째와 3번째를 완전히 이행하였거나, 혹은 첫 번째와 2번째를 이행할 의사를 가지고 3번째를 이행한 사람은 고해성사를 줄 사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특전을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는 몇몇 중대한 대죄들은 아무 사제에게나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고, 교황 혹은 대리자가 특정 사제권을 받은 사제에게만 고해성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14] 그런데 당시에는 이 특전을 받은 사람에게 '고해 특전 준허 증서'를 주었다. 문제는 이 증서이다. 본래 대사라는 건 교회 측에서 '성지순례 하기' 같은 퀘스트를 제시하고, 신자가 그 퀘스트를 완수하면 '난 성실하게 퀘스트를 완료했으니까 잠벌은 면제 받았겠지'라고 믿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그런데 '증서'를 발행하면서, 이 증서를 받아든 신자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마치 그 종이쪼가리 자체가 부적처럼 자신의 잠벌을 면제해준다는 오해가 발생하기 딱 좋았던 것이다. 물론 교회 쪽에서도 이런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돈 없다면 헌금은 없어도 되고, 그냥 기도만 해도 대사로 인정된다" 같은 세부 조건들을 삽입하긴 했지만, 헌금을 내고 증서를 받는 것은 마치 이 증서를 돈으로 사는 것 같은 인상을 신자들에게 강하게 풍길 수 있었다. 게다가 '대사 설교가'를 파견했는데 이런 식의 구조는 대사 홍보를 마치 홈쇼핑 선전마냥 변질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 우려는 사실이 되었다.
레오 10세는 추기경 시절 수하로 부리던 요한 테첼이란 도미니코회 수도자를 홍보꾼으로 파견한다. 요한 테첼 수사는 1502년부터 레오 10세가 추기경 시절부터 부린 수하로 폴란드에서 이단심문관을 지냈으나, 실상은 무늬만 수도자였다. 이전에 티롤 지방 인스브루크에서 유부녀와 간통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교회의 무마로 석방된 전적과 타 지역에서 면벌부 판매로 능력을 인정(?)받은 막장인물이었다. 요한 테첼 수사는 "돈이 헌금함이 짤랑 떨어지는 순간 당신뿐 아니라 당신 부모, 친지의 영혼까지 모조리 연옥에서 해방, 천국으로 간다! 등의 최신 마케팅(?) 기법으로 수익을 많이 올렸다. 그리고 테첼은 판매 과정에서 "교황청 도장이 찍힌 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동일한 효력"이라는 신성모독성 개드립과 현재나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 미리 용서받는다는 선전을 했기 때문에 불티난 듯 팔렸다.[15]
독일에서 알브레히트의 영지였던 마그데부르크와 마인츠뿐만 아닌 타 지역 신자들까지 테첼 수사에게 면벌부를 사러 가자, 독일 지역 제후들과 교구사제들의 불만이 팽배했다. 상품이 팔려야 돈을 버는 상인들까지 면죄부 판매 덕에 큰 타격을 입을 지경...
이런 분위기 속에서 1517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있었던 마르틴 루터 수사신부가 수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 사실 마르틴 루터는 이전에도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동료 신학자나 교수들에게 강하게 비판했다고는 한다. 그러나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주장한 것은 1514년 10월부터였고, 1517년 이전 비텐부르크 신학교수로 있으면서도 비판을 계속했다. 1517년의 사건이 크게 전파된 건 인쇄술 때문... 한편 루터가 파문당하기 전까지 교황권을 의심하지 않았다는데 사실이 아니다. 교황권 자체를 부인하진 않았지만, 교회의 권위는 성경 밑에 있다고 주장한 것만으로도[16] 당시 교회 입장에선 수용하기 어려웠고 더 나아가 '죄인인 교황은 속히 속죄하고 그리스도 품으로 돌아와야 된다'고 선언해서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가 내걸렸다.[17] 내용에 대해서는 95개조 반박문을 참조.
교황 레오 10세는 처음 마르틴 루터의 비판에 대해 별 반응이 없었다. 독일에서 도미니코회가 잘 나가자 루터의 소속 수도회이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가 질투해서 비방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해인 1518년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독일관구 총회에서 알아서 잘 처리하길 바랬고, 무엇보다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고령으로 오늘 내일해서 차기 황제로 세력이 너무 강한 합스부르크 가문 카를보다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차기 황제감으로 점 찍었기 때문에 루터를 비호하는 작센 선제후의 심기를 별로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도 있다. 독일 지역에서 그동안의 경제적 수탈로 인한 반로마 감정까지 더해졌기 때문에 교황청에서도 반발을 무릅쓰고 체포하진 못했다. 그리고 테첼 수사는 대사로 받은 헌금의 착복과 일부 신성모독성 발언이 인정되어 감금 정도로... 넘어가려 했지만, 마인츠 대주교는 처벌은커녕 승승장구했다.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4년 후인 1518년 마르틴 루터를 이단으로 고발했고 4월, 28세의 나이에 추기경으로 서임...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다가 죽을 때까지 마인츠 대주교구,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 할버슈타트 주교구 등[18] 2개 대교구와 1개 교구를 겸임하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살았다. 신성 로마 제국에선 마인츠를 비롯한 성직 대주교들 3인은 황제선거권과 특권 및 왕국 재상의 명예직이 있는 고귀한 위치였고, 해당 주교구는 성직 교구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세속 제후 직위까지 같이 누리기 때문에 독일에서 가장 높은 성직자였으며 황제 다음으로 가장 큰 영토와 권력을 누린 사람의 수준이 이 정도였다.
- 알브레히트가 나중에 루터교로 개종했다는 잘못된 정보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1526년에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전 튜튼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라는 인물이 개종하여 기사단 영지 중 프로이센 지역이 세속국가로 전환되고 개신교 제후가 된 것은 맞다. 그러나 이 사람과 알브레히트 추기경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같은 이름일 뿐 동명이인이다.[19] 그리고 프로이센과 브란덴부르크가 합쳐진 것은 프로이센 공작가의 후손이 끊기고, 같은 친척이며 맏사위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20]가 프로이센 공작직을 물려받은 1618년이다.[21]
레오 10세는 면벌부 판매의 공범인 데다가 독일 지역의 반발에 대해서도 초기부터 사건의 해결과 동떨어진 사태 인식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고 토론을 요구할 때도 복종과 회개를 요구하고, 문제가 된 면벌부의 판매에 대해서도 문제삼지 않았고 오히려 마인츠 대주교와 프랑크푸르트 데어 오데르 대학, 잉골슈타트 대학 요한에크의 고소 내용만 받아들였지 자신과 수입을 나누기로 한 마인츠 대주교나 하수인이었던 테첼이 교회법을 넘어서고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내용에 대해선 별 문제 삼지 않았다. 늦게서야 대사의 효력과 면벌부 판매권한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고 파문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이미 공론화된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부족한 것을 드러냈다. 이후 레오 10세는 1520년 루터를 파문했다. 서유럽 교회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 사태에서 레오 10세의 실책을 정리하자면 이렇게 된다. 우선 대사를 선포하는 것과, 그 대사를 헌금으로 받는 것 자체는 가톨릭 교회에서 본래 있었던 정상적인 일이었고, 이게 개신교와 가톨릭의 신학적 논쟁이 될지언정[22] 레오 10세 개인의 문제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교황청 재정이 바닥나면서, 대사를 주 수입원으로 변질시킨 데다가, 대사 전문 홍보꾼을 마인츠 지역에 파견하는 등의 행위에서 레오 10세의 책임은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가톨릭 내부에서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 홍보꾼들을 금지시키며 자체적인 개혁을 이루었으니, 당시 충분히 비판받을 여지가 충분하다. 즉 본래 중세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돌아가던 헌금형 대사라는 시스템을 교황청의 주요 사업으로, 심지어 쇼핑몰에서 판매하는 듯한 분위기로 변질시킨 것은 그의 실책이라 할 수 있다.
2.4. 재위 말년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공석인 제위를 놓고 각국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크게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1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계승권을 놓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는데, 어느 쪽을 택하든 이탈리아반도가 위험할 거라고 생각한 레오 10세는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밀었다.하지만 결국 제위는 카를로스 1세가 차지하게 되었고, 스페인과 프랑스가 크게 한판 붙으려 하자 눈치를 보던 레오 10세는 슬그머니 카를 5세가 된 카를로스 1세에 빌붙었다. 이로서 볼로냐
교황과 황제 연합군이 밀라노를 함락하자, 레오는 11월 22일 라 마글리아나 별장에서 그 소식을 듣고 엄청나게 기뻐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 체스를 두다가 뜬금없이 오한이 발병되어서 바티칸으로 돌아갔으나 병세는 급속히 악화되어 1521년 12월 1일 45살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가 죽을 때 교황청 재정은 파탄 상태라, 하루 전 지아난토니 디 산조르조 추기경이 사망했을 때 쓰고 남은 초를 그대로 재활용해서 장례식을 치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바티칸에 안장되었으나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은 한창 공사중이어서 여러 해 동안 묘비도 세워지지 않았고, 후에 사촌 클레멘스 7세가 죽은 뒤 이 두 메디치 사람을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 매장하기로 결정되었다.
3. 일화
3.1. 예술과 학문의 후원자
레오 10세는 피렌체의 지배자이자 당시 재벌인 메디치 가문 출신답게 품위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예술과 학문을 사랑한 인문주의자였다. 로마에서 쫓겨나서 방황할 땐 에라스뮈스를 만나서 친분을 맺을 정도로 학문을 지원했으며 헬라어 원본 신약성경을 편찬하는 것도 지원했고, 에라스뮈스를 이단 고소하는 것도 다 막아주었다.[23]30여년간 거의 개점 휴업 상태였던 로마의 사피엔차 대학을 부활시켜서 100여 명의 교수를 신규 임용하고 의학, 수학, 식물학, 천문학 등의 강좌도 부활시켰고 인쇄소까지 차려줬다.
메디치 가문 출신답게 예술품을 보는 식견이 대단하였고 평소에 많은 예술가 후원에 힘썼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도 그 중 하나다. 특히나 아끼던 라파엘로 산치오가 사망했을 때는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그의 초상도 라파엘로가 그린 것이다. 다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경우는 너무 늙었고 건강도 안 좋았기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큰 도움은 받지 못했던 듯하다.
자신과 자신의 지인들 뿐만 아니라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가문을 일으키려고 했기 때문에, 훗날 교황청의 재정을 아낌없이 퍼주는 원인이 되었다. 안 그래도 잦은 전쟁으로 거덜나 있던 교황청의 재정이 바닥을 드러내었다. 대표적으로 피렌체의 메디치가 가묘는 당연히 교황청 재정으로(?) 미켈란젤로 등 예술가를 동원하여 초호화판으로 지었는데, 채석장에서 193km의 도로를 고작 무덤 하나 장식하려고 뚫었다...
본인도 치장을 좋아했기 때문에 여러 발굴품들 및 유물들을 사들여 바티칸 내부에 전시했고, 학자들을 섭외하여 여러 사전이나 인문학 서적을 편찬하도록 했다. 성경을 번역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파괴된 문화재가 있다면 복원도 시켰다. 또한 라파엘로에게 명하여 고대 로마 유적 발굴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결과로 부활한 것이 그로테스크 양식이다. 잡음이 심했던 레오 10세 치세에서 유일하게 부정할 수 없는 긍정적인 면인 셈.
3.2. 사치 행각
하지만 반대로 그의 사치가 겹쳐 교황청에 미증유의 재정 파탄이 일어난 점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레오 10세는 3대에 걸친 교황의 수입분을 혼자 처먹었다. 율리오 2세 때 축적된 재산, 레오 10세 자신의 수입, 다음 교황 것까지 3인분!"이란 소리까지 나왔다. 재위기간과 더불어 그가 비교적 이른 40대의 나이에 사망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공식적인 기록보다도 사치가 더 심했을 수도 있다.또한 미식가로도 유명했고, 한번 잔치를 열었다 하면 300명씩은 대동하여 사냥터까지 가서 말을 몰고 다니면서 호화로운 연회를 차릴 정도. 당대 이탈리아 최고의 명문가였던 메디치 집안의,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재벌 3세~4세로[24] 태어난 초부유층 출신이기 때문에 금전감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훌륭한 자선가였고, 대체로 씀씀이가 커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퍼다주는 편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호구 중에 상 호구.
교황청에 인사를 온 단순 참배객들에게도 고가의 은전을 펑펑 뿌려서, 재임 초기부터 교황청 재정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고 한다. 8년여간 재임기간 2,150여개 성직을 매매하여 300만 두카트를 벌었으나 고작 8년간 500만 두카트를 탕진하고, 사망시 교황청에 80만 두카트에 달하는 빚을 남겼다. 이 정도의 금액은 세속 왕국 하나를 여러 번 파산시킬 금액이었다.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 시에 유럽 최강대국 프랑수아 1세가 선거자금으로 30만 두카트, 카를 5세가 푸거 가문에 50만 두카트를 대출받아 85만 두카트를 지급하여 당선되었는데, 레오 10세 치세의 지출이 이 정도였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할지..
3.3. 건강
레오 10세는 위의 초상화에서도 보이듯이 비만으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주치의가 맨날 "운동을 해야 한다"고 권고했다고 한다.심각한 근시였다고 하는데, 10cm 이상 떨어진 대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문서 상단에 있는 초상화에서 왼손에 오목렌즈를 들고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평소에는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대중 앞에 나설 때에는 안경을 벗었다. 당시에는 근시가 신체적인 장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때문에 안경을 쓴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지 않았다.#
3.4. 동물 애호가
또한 지극한 동물애호가로, 바티칸 안에 동물원을 만들었다. 사자도 있었고, 언제나 포르투갈 왕에게서 공수한 애완 코끼리[25]인 하얀 한노(Hanno)를 데리고 로마 시내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한노라는 이름은 한니발에서 따온 것으로, 교황이 바티칸 정원에 따로 지어준 집에서 살며 전용 신발을 신었다고 한다. 게다가 한노를 보살피는 사람은 다름아닌 '브란코니노'라는 이름을 지닌 라파엘로 산치오의 친구.한 번은 조카 로렌초가 한노를 데리고 피렌체에 가면 안 되겠냐고 할 때, 교황은 코끼리가 아파할까 봐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노는 1516년 병으로 쓰러졌고, 교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교황은 너무나 슬퍼 주치의들에게 사인서를 작성하도록 하고, 한노를 바티칸의 어느 담벽에 고이 묻어주었다.
4. 대중 매체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신의 대리인"이라는 책에서 다룬 적이 있다. 정확히는 피우스 2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우스 2세에 레오까지 4명의 교황들의 전기를 모은 것. 일단 필력은 좋은 사람답게 레오 10세의 성격이나 전반적인 치세를 대화문, 일반적인 산문, 보고서 등 여러 유형의 글로 흥미롭게 소개하기는 하는데, 누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아니랄까봐 레오의 장점은 실제보다 부풀리고 한계나 문제점은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26]. 특히나 압권인 부분은 루터 등의 개신교 세력은 인간의 선한 면만 보려 했고 스페인이 주도한 반동종교개혁은 인간의 악한 면만 보려 한 것인 반면 레오 10세는 인간의 선한 면과 악한 면을 모두 보았다고 한 것인데, 다른 부분은 그렇다고 쳐도 어째서 레오는 선악을 모두 보았다고 할 수 있는지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고 "따라서 레오가 개신교 세력이나 반동종교개혁 세력보다 한 수 위" 라고 은근슬쩍 암시하는 게 문제.[1] 로렌초 데 메디치는 자신의 세 아들을 평가하여, "나의 세 아들 중 첫째는 미쳤고, 둘째는 똑똑하고, 셋째는 착하다."라고 했다.[2]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의 서자.[3] 1492년 콘클라베에서 로드리고 보르지아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추기경단에게 뇌물을 마구 먹인 로드리고 보르지아에게 패한 전적이 있다. 또한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할 때 그에게 힘을 실어 알렉산데르 6세를 쫓아버리려고 했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4] 공의회의 결의가 교황수위권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5] 피렌체에선 극단적 금욕을 강요하던 사보나롤라에 진작에 실증을 내고 있었다.[6] 이때 프랑스 중기병은 랜스 차징으로 유럽 최고의 보병부대인 스위스 용병을 격파하는 위업을 보였다.[7] 이는 현대 가톨릭도 동일하다. 당장 2015~2016년 기간에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비의 희년'을 선포하며 고해성사와 주요 지정 주교좌 성당 순례 및 미사참례와 지정된 기도 및 회개를 하면 세계 어느 가톨릭 교구에서든 대사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8] 물론 신학적으로 가장 뜨거운 떡밥은 고해성사와 대사의 효용성이고 루터 등도 이것을 비판하였지만, 대중에게 가장 유명한 논란은 역시 돈 문제(...)이다.[9] 초기의 그리스도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평생에 딱 한번만 받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이를 일생에 몇 없는 무거운 사건으로 여겼다. 이로 인해 보속 역시 굉장히 강하게 주는 경향이 있었다. 이후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유럽대륙에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의 고해성사를 전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보속 역시도 그때 이후로 점점 가벼워지는 경향이 있었고, 헌금을 보속이나 대사에 쓰는 것도 이런 경향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10] 콘스탄츠 공의회로 3명의 교황이 나란히 폐위 또는 자진사임하고 로마로 돌아왔을 때, 로마 시는 인구가 2만 5천으로 줄어 있고 무너진 성벽으로 늑대가 출몰하는 지경이었다고. 방치된 건물들의 보수만 해도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다.[11]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동생으로 호엔촐레른 가문 출신. 교황청에서도 성직매매로 돈 번 것도 좋았지만, 유력 가문에서 선제후직을 맡아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12] 당연히(?) 최고가에 팔리며 마인츠 쾰른 잘츠부르크 대주교 같이 큰 주교구는 2만 두카트가 넘었다.[13] 출처는 제임스 기본스의 저서 <교부들의 신앙>[14] 지금도 낙태의 경우는,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한다면 이에 해당한다. 참고로 이 특별한 케이스 중 하나가 한국 가톨릭.[15] 대중적으론 성모 마리아를 강간해도 깨끗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소리까지 했다고 알려졌으나, 현대 루터교에서조차 이를 마르틴 루터에 의해 퍼진 근거 없는 루머로 보고 있다. 면벌부 항목 참조.[16] 덧붙이자면 이는 가톨릭/정교회가 개신교 종파들과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즉 '교회'라는 조직을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서에서 인증한 대로 저승의 세력으로도 무너트리지 못하는 초공간적 초시간적 초자연적 조직으로 보느냐, 혹은 단순한 신앙 공동체로 보느냐의 차이이다.[17] 본인이 한 것인지는 여러 서적에 엇갈리나, 본인의 저작이 내걸린 것에 대하여 문제 삼지 않고 내걸린 것에 대해 의견을 계속 주장했기 때문에 직접 붙였는지는 중요치 않다.[18] 이들 주교구는 단순 교회 직위가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의 세속제후 지위도 가진다. 교회 십일조 뿐만 아니라 영지 주민들에게서 세속 세금도 걷고, 군대와 궁정도 보유한 명실상부한 제후였다.[19] 한 명은 브란덴부르크였다가 마인츠였다가 한 명은 또 안스바흐에 프로이센이고 뭐 이리 개판이냐 하면 유럽 귀족들은 본래 성이 따로 있지만 실제론 영지 이름을 성으로 삼는게 일반적이었다. 마인츠 대주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아들이라 직위가 없기 전엔 브란덴부르크를 성으로 썼으나 마인츠 대주교가 되고 나선 알브레히트 폰 마인츠로 불렸고, 프로이센 공작은 독일 남부 안스바흐 후작의 차남으로 튜튼기사단장이었으나 초대 프로이센 공작이 되고 다시 개명한 것이다.[20] 알브레히트 대주교의 형의 고손자[21] 한편 마인츠 주교 알브레히트의 본가인 브란덴부르크는 조카대에 루터교로 개종한다. 알브레히트의 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네스토르는 아들에게 숙부를 도우며 개신교로 개종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5년 후에 유언을 어기고 개종했다.[22] 루터의 태클 역시도 헌금형 대사보다는, 대사를 발행하는 교회의 권위 자체에 대한 비판이었다. 즉 본질적으로 가톨릭교회란 세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대한 논쟁이다.[23] 에라스뮈스가 『우신예찬』 출판 뒤 논란에 답하며 쓴 편지들에서, 간간히 '주교와 추기경과 교황의 인정도 받은 글인데 왜 그러냐'는 투의 말이 나오기도 한다.[24]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를 창업자로 세면 파테르 파트리아이와 그의 아들(레오 10세의 할아버지)일 고토소가 2세대, 레오 10세의 아버지인 일 마니피코가 3세대이다. 레오 10세는 대략 재벌 4세...[25] 아시아코끼리라고 한다.[26] 루터가 언급되긴 하는데, "어쭈? 얘 봐라...? 뭐, 그래! 맞는 말이긴 하지!ㅋㅋㅋ" 정도의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걸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