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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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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 Purgatorium
그리스어 Καθαρτήριο
영어 Purgatory

파일:external/www.catholiccompany.com/tumblr_ndxxx34ZQo1rsd0e4o1_500.jpg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 교회는 선택된 이들이 거치는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단죄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전혀 다르다.
가톨릭 교리서 1030-1031항
연옥은 무엇인가?

연옥은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죽어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기는 하였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정화를 거쳐야 하는 상태이다.
가톨릭 교리서 요약편 210항

1. 개요2. 명칭3. 과정4. 고통5. 기간6. 성경적 근거7. 역사적 배경8. 교부들의 관련 언급9. 비가톨릭 종파의 입장
9.1. 정교회9.2. 개신교
10. 타 종교의 유사 개념11. 창작물

1. 개요

연옥()은 가톨릭 교리상의 개념으로, 지옥의 벌을 받을 정도는 아닌 죄인이 천국의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겪는 정화(Purgatorium)를 일컫는다.

개신교(프로테스탄트)에서는 연옥의 개념을 부정한다.

2. 명칭

연옥을 가리키는 라틴어 단어 'Purgatorium'는 '정화'라는 의미이다. 또한 독일어에서는 연옥을 Fegefeuer, 곧 정화의(Fege) 불꽃(Feur)이라 하는데, 이는 은유적이긴 해도 연옥이 정화의 단계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자어 연옥(煉獄)은 달굴 련() 자에 옥 옥() 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대중신심 등에는 잘 부합하지만 단어 자체가 '장소'의 의미를 지니기에 교리적 엄밀함이 부족하다.

3. 과정

연옥은 저승에 있는 일종의 강제 수용소가 아니고, 인간에게 부여된 벌을 실증적인 방식으로 보속해야 한 곳도 아니다. 오히려 연옥은 인간이 변모되기 위해 내적으로 필요한 과정이다.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 《Eschatologie》(국내 번역명 《종말론》) 한국어판 272쪽

통상 '사후세계'처럼 묘사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연옥은 '장소'가 아니라 '사건'이다.[1] 한자어 연옥(煉獄)의 '獄(감옥 옥)' 자 때문에 오해를 부를 수 있지만 '장소'의 개념이 아니며, 사실 라틴어 Purgatorium은 담백하게 '정화'라는 의미일 뿐이다.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은총지위를 상실하고 대죄[2]를 지니고 죽은 영혼은 지옥으로 가며, 은총지위를 보존하고 아무런 죄와 잠벌[3] 없이 죽은 영혼(성인)은 바로 지복직관(천국) 상태가 된다. 이 두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 영혼, 즉 은총지위를 보존하고 죽었으나[4] 아직 정화Purgatorium될 필요가 있는 [5] 영혼이 천국에 가기 전에 남아 있는 소죄와 잠벌을 정화Purgatorium하는 상태를 바로 연옥Purgatorium이라 한다. 연옥 영혼들은 정화가 끝나면 천국으로 가게 되므로 구원이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지옥에서 연옥으로 가는 따위의 이동은 불가능하다. 지옥은 영구한[6] 곳이다.

'고성소'와 혼동하기 쉬우나 다른 개념이다.

4. 고통

(시간 개념을 쓸 수 없는) 사후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내세의 고통을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현세적 몸의 고통에 따라 유비를 쓸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전통적으로 정화의 '불꽃'이라던가 하는 설명을 사용하여 왔지만, 지옥의 고통과는 그 성격을 구분한다.

지옥의 고통은 주로 하느님과의 영구한 단절, 즉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조차 없다는 것에서 오는 것인 반면, 연옥에서의 고통은 주로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에서 오는 것인 만큼, 영원하지도 또 극한에 달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5. 기간

사후의 혼에 대해서 현세적 시간 개념을 그대로 쓸 수는 없지만, 흔히 유비적 의미에선 연옥을 시간 개념으로 설명한다.

현세 사람들이 기도하는 등 행위로 연옥 영혼들이 연옥에 있는 (유비적 의미에서) 기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7] 그 방법 중 대표적으로 11월 1일 모든성인대축일부터 8일까지의 팔일축제(과거의 '저성 대첨례 팔부첨례', 현재 폐지)에 죽은 이의 무덤을 방문해서 그들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 산티아고 같은 성지를 순례해서 대사를 받는 것이다. 이 대사는 자기 자신의 잠벌은 사할 수 없지만 연옥 영혼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본래 대사라는 것은 자신의 잠벌을 지우는 용도로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교회에서 선포한 주간에 일정한 과정을 통해 대사를 받거나 성지순례를 통한 대사는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단, 위령주간에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오로지 연옥 영혼을 위해 대사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외의 때에 얻은 전대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연옥 영혼들을 위해 양도한다고 기도함으로서 양도할 수 있다. 부분대사는 연옥 영혼들에게 양도가 불가능하며, 전대사만 연옥 영혼들에게 양도할 수 있다.연옥탈출 퀘스트

연옥에 머물며 잠벌을 씻는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티마의 성모 발현 때 3명의 목격자들 중 한 명인 루치아가 일찍 죽은 지인(아멜리아)의 안부를 묻자, 성모 마리아는 "그 아이는 세상 끝날 때까지 연옥에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사적 계시를 "이 사람은 마지막 때까지 무슨 일을 해도 연옥에서 못 나온다!"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루치아 수녀가 이 말을 성모 마리아에게 들었을 때는 1917년이었고, 이후에도 지금도 그녀를 위한 기도와 희생을 다른 신자들이 열심히 바쳐준다면, 교리적으로 최후의 심판 때보다 더 빨리 천국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현세의 사람들이 연옥의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를 정말정말 열심히 해준다면, 영혼들이 연옥에 머무르는 기간이 줄어든다고 한다. 실제로 현재 한국 천주교를 비롯해 전 세계 천주교회에서는 연옥 영혼을 위한 위령기도와 중보기도(전구)를 정말 많이 하고 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소모임으로 본당마다 연령회라는 것이 있는데, 본당 신자 중 선종한 사람이 나올 경우, 발인할 때까지 가서 기도해 주는 활동을 한다. 위에 어지간한 기도량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적어뒀지만, 없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다. 위령미사 역시 연옥 교리 덕에 생긴 것으로, 매년 기일마다 사망한 사람을 위해 위령미사를 봉헌함으로써 그가 천국으로 가는 기간이 앞당겨진다는 것이다. 제사를 안 지내는 집안도 위령미사만큼은 꼬박꼬박 바치는 경우가 많다. 2000년 사망한 김환성의 위령미사가 [age(2000-01-0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봉헌되는 걸 보면, 천주교 신자들이 연옥과 위령미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환성은 인기 연예인이었기에 팬들을 위한 추모의 형태도 적지 않아 있다.

6. 성경적 근거

가톨릭에서 연옥에 대한 성경의 직접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마카베오기 하권의 다음 대목이다.
다음 날, 장사 지내는 일이 시급해졌으므로, 유다와 그의 군사들은 전사자들의 주검을 거두어 조상들의 무덤에 친족들과 나란히 묻어 주려고 갔다. 그런데 죽은 자들마다 그 옷 속에서 율법으로 유다인들에게 금지된 얌니아 우상들의 패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전사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모든 이에게 분명히 드러났다. 그들은 모두 숨겨진 일들을 드러내시는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의 방식을 찬양하였다.또 그렇게 저질러진 죄를 완전히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며 간청하였다. 고결한 유다는 백성에게, 전사자들의 죄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을 눈으로 보았으니 죄를 멀리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런 다음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속죄의 제물을 바쳐 달라고 은 이천 드라크마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는 부활을 생각하며 그토록 훌륭하고 숭고한 일을 하였다.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쓸모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는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내다보았으니, 참으로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천주교 성경)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 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허사이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공동번역)
마카베오기 하권 (마카베오기 2권) 12장 39-45절

그런데 마카베오기 하권은 마르틴 루터종교개혁 당시에 성경에서 제외된 구약 제2경전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르틴 루터가 대사 논쟁에서 꿀릴까 봐 삭제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의견이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전지전능한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유일한 종교적 교범으로 보았고,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지 확인 불가한 출처가 부정확한 부분은 과감하게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경전은 초대 교회 시절 히브리어 사본을 찾아내지 못했고, 불가타 라틴어역을 저술한 히에로니무스도 히브리어 사본이 없는 제2경전의 신뢰성에 의문을 가졌다. 이런 교부들의 불신을 반영해서 구약 성경을 재편한 루터는 우선적으로 구약의 헬라어 부분인 제2경전을 위와 같은 이유로 외경으로 봤다.

사실 대사 논쟁이나 연옥 논쟁으로 마카베오기 하권이 가지는 위치는 가톨릭 내에서도 논쟁의 여지가 많다. 그 부분이 겨우 3절에 불과한 짧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후 마르틴 루터는 2차적으로 신약 성경의 재편을 주장했지만, 같은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신약은 구약과 비교할 때 출처가 분명하기 때문에 재편을 하면 안된다. 그것은 이단들만 하는 짓이다"라는 소리를 듣고 포기했다. 이때 빼려고 했던 게 대표적으로 야고보서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루터가 종교 개혁을 감행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로마서의 말씀과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는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내용들 때문이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부르면서 야고보서 첫 장 전 설명에서 성경의 전체 맥락과 다르다며 주의를 요구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재판이 나오자 이런 설명을 아예 빼버렸다. 종교 개혁 당시의 개신교는 종교개혁가들이 '부패했다' 믿던 가톨릭과는 다른, 순수한 그리스도 신앙으로써 꿈꾸는 무언가로 돌아가려는 열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들 스스로도 무엇이 '순수한 신앙'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거나 입증하지는 못한 채, 그러한 열망은 일단 그리스도교 안에서 성경 외의 것들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었다. 사실 루터는 사도신경도 성경에 없기 때문에 예배에서 빼버리려고 고민하기도 했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기원전 3세기 70인역과 이후 유대인 랍비들의 얌니야 회의를 기준으로만 구약을 인정했기에, 20세기 초까지 제2경전은 가톨릭이 자신들의 종교적 정당화를 위해 첨부한 부분이라고 개신교와 유대교에게 까여왔다. 정교회에서도 제2경전은 경독서라고 하며, 정경과 완전히 동등한 권위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본이 없는, 또는 시대상 마카베오서처럼 그리스어로 저술된 구약 제2경전 문헌은 헬레니즘 세계로 디아스포라된 여러 그리스어권 유대인 공동체들이 사용하고 형성시켜 온 것이었다. 70인역에서는 기존 히브리어로 있던 구약을 당시 지중해 세계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했기에 사도 시대에도 신약에서 구약을 인용할 때 그리스어(헬라어) 구약을 인용했을 정도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리스어권 유대인 공동체라는 문화적 기반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사도행전이나 서간에서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헬레니즘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에 터잡아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게 '성경'이란 그리스어 구약이었던 셈이다. 이를 통하여 제2경전 내지 외경들은 그리스도교가 처음 형성될 때부터 그리스도교 안에 있었던 것이다.

사해문서에서 보듯이 제2경전들이 실제로 히브리 원본이 존재했을 가능성 자체는 있지만(마카베오서는 시대적으로 70인역 이후이니 논외) 다른 제2경전인 희년서, 에녹서까지 히브리어로 나와서 근거로 삼기에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희년서와 에녹서를 경독서로 사용한다. 사실 애초에 마카베오서는 히브리서 원본 유무와 별 상관이 없다. 개신교에서 정경으로 삼은 근거인 70인역은 기원전 300년쯤이고, 마카베오 시대는 그로부터 150여 년 후인 데다가 집필 시기는 기원전 60년대이다. 이건 히브리 원전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하게 인정하냐 마냐의 문제. 어쨌든 개신교 대부분이 이제와서 제2경전을 정경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일부 교파에서 제2경전을 인정한다고 해서 무조건 연옥 및 유사 교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마카베오기에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 말고도, 개신교에서도 정경으로 인정하는 신약성경에도 연옥에 대하여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부분이 있다. 다만, 연옥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해석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기도 하다. 그중의 몇 구절을 통해 연옥이라는 개념을 옹호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또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공동번역)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개역개정)
마태오 복음서 12장 32절

위의 마태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하여 유추해 보면, 내세에서도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 이것이 사후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톨릭은 내세(연옥)에서 소죄를 다른 신자들의 전구나 자신의 벌로 용서받고 보속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이것이 그 신자의 구원 상태를 좌지우지하지는 않는다. 연옥에 가는 사람들은 쉽게 말해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며, 죽기 전에 모든 대죄를 용서받고(고해성사로) 떨쳐내거나 용서받지 못한 소죄+자신의 죄를 짓는 악습과 죄로 기우는 습성+이미 현세에 용서받았던 과거 대죄들의 못다한 보속을 연옥에서 모두 정화의 방식으로 벌 받는 것이다.

연옥은 구원(=천국행)이 확정된 신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오점이나 의롭지 못한 실수들을 마저 치르는 상태와 장소를 말한다. 따라서, 가톨릭의 연옥 교리를 설명하며 연옥은 죽은 뒤의 제2의 구원 기회를 바라는 곳이라거나 하는 식의 설명을 하는 것은 오류이다.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만일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습니까? (공동번역)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개역개정)
고린토 1서/고린도전서 15장 29절

위 구절은 사도 바울로가 코린토 교회를 향해 하는 말이다. 현재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받는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 어떤 의식을 행했고, 또 바울로가 그 의식을 언급하면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가 그 죽은 이들을 위한 어떤 의식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자. 고린토 1서 15장 전체를 읽어보면 오히려 바울로가 이 의식에 행하는 것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기초 위에다가 어떤 사람은 금으로, 어떤 사람은 은으로, 어떤 사람은 보석으로, 어떤 사람은 나무로, 어떤 사람은 마른 풀로, 어떤 사람은 짚으로 집을 짓는다고 합시다.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줄 것입니다.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고린토 1서/고린도전서 3장 12-15절

고린토 서간서의 이 말씀도 연옥의 존재 유무를 지지하는 논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육체로는 인간이 받는 심판을 받았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을 따라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공동번역)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개역개정)
베드로 1서/전서 4장 6절
베드로는 죽은 자에게도 복음이 전해진다고 말하고 있다. 전하다의 원어는 εὐηγγελίσθη, 유앙게리세스로 읽을 수 있는 이 단어는 복음의 동사형이다. Preach(대다수 영어성경)혹은 Proclaim(BLB, ISV)으로 번역한다. 다만 이 구절에서는 주의가 필요한데 복음이 전해진다고 했지 죽은 이들이 복음을 따라 믿는다고 한 적은 없다. 이 대목은 같은 책 3장 19절의 ἐκήρυξεν, 선포하다와 동의어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승리 선포라는 해석도 가능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모든 죽음, 사망을 영적 죽음이나 사망으로 보는 견해는 개신교의 정통 견해가 아니다. 신약 성경 누가복음 16장 22절에서 거지 나사로가 죽었을 때 원문에서는 ἀποθανεῖν(아포사임)으로 적는데 동일한 단어들이 맥락상 영적 죽음을 의미할 수 없는 대목에서 지속적으로 쓰인다. 히브리서 9장 27절의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가 대표적. 이 구절이 영적 죽음이라고 해석한다면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죽는단 말인가? 하지만 이 죽음을 영적 죽음으로 해석하더라도 영적으로 죽은 이들이 복음을 받을리가 없다.

위의 성경 말씀들을 종합해 보자면, 우리가 (현실에서의 소원을 담아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죽은 자의 소죄(구원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 하느님 앞에서의 작은 죄악들)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보자면, 연옥이 유대교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아래의 "역사적 배경" 문단 참고)과 위에서 살펴본 성경 구절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죽은 자들의 상황을 담아낼 개념으로서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다듬어져 형성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연옥"이 원래 그리스도교 안에서 논란이 많았던 주제이므로, 이런 문장에 개신교인들의 반론이 없진 않을 것이다. 성경을 근거해서,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전통을 통해 좀 더 진실에 다가가려는 토론은 바람직하지만, "내 성경 해석만이 옳으니 다른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는 자세는 지양해야 한다.

7. 역사적 배경

연옥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믿음과 그 전제가 되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은, 위에서 인용된 마카베오기 하권 12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기 전부터 유대교(특히 바빌론 유수 이후의 유대교)에 널리 퍼져있었다.
바울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의회는 갈라지고 말았다.
사두가이파는 부활도 천사도 영적 존재도 다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고 바리사이파는 그런 것이 다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23장 7-8절 (공동번역)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도 부활이나 천사가 있다고 믿는 바리사이파와, 모세오경만을 인정해서 그런 게 없다고 믿는 사두가이파가 대립하여 서로 원수지간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당시 바리사이파가 믿었던 "부활"이 어떤 의미였었을 지를 생각해 보자. 당시 유대교에는 메시아가 고난 당해 죽음을 당하고 부활한다는 개념은 없었으며, 동양 종교에서 말하는 환생이나 윤회라는 개념도 없었다. 이들에게 부활은 내세에서의 죽은 자들의 부활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이런 믿음을 유대교로부터 이어받았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어떤 식으로 죽은 이들에게 유익한지, 그리고 죽은 이들이 어떤 상태에 있길래 기도가 필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차츰 지금과 같은 개념으로서의 연옥 교리가 발전했다. 이는 5세기 초부터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4세기까지는 역사적인 혼돈기로서, 그리스도교 전반에 종말론적 성향이 강하게 끼어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의 심판이 곧 도래할 것이라 믿었고, '모 아니면 도',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분법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5세기 무렵부턴 직전의 테살로니카 칙령으로 나타나듯 로마 제국 내 그리스도교, 특히 아리우스파 등의 이단을 몰아낸 정통인 가톨릭 교회의 국교로서의 위치가 안정되었는데, 한편으론 점차로, 비교적 세속적 태도를 버리지 못한 제국 내 신자들의 숫자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교회는 기존의 이분법적 구원론에 관해서 일종의 중간값이라 할 수 있는 "분명 죄를 지었으나 지옥에 갈 만큼의 죄[8]까지는 아닌 이들''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도 명확히 설명해야 할 당위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존의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에 대한 설명으로써 여겨져 오던 연옥 교리가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곤 한다.

연옥 개념은 중세의 경제 발전 때문에 탄생했다는 이론도 있다.[9] 중세 시기 교회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벌지 않는 행위를 죄악시했는데, 특히 고리대금업이 대표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에 고리대금업자 이미지가 덧씌워진 반유대주의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서양 중세 시기 경제 발전이 이뤄지면서 교회의 이러한 통제는 잘 되지 않았고, 교회는 언제부턴가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순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10]자크 르 보프가 이런 타협의 일환으로 설정되었다고 보는 '연옥'이라는 공간은 내면적 회개를 중시하는 공간으로, 정죄가 끝나면 천국행을 보장받는 곳이었다. 금융업자들은 생전에 돈을 벌기 위해 저질렀던 자신의 잘못을 참회, 회개하고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자크 르 보프는 연옥이 자본가들에게 지옥을 면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연옥은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았다.

8. 교부들의 관련 언급

"충성스런 아내는 죽은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며, 특히 그 기일에는 기도한다. 만일 이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허위로써 남편을 배신하고 버리는 사람이다."
테르툴리아누스, 《일부일처에 관하여》
"황제의 시체는 높은 관대(棺臺)에 안치되었고 하느님의 제관들과 군중은 눈물과 비애 속에서 그의 영혼의 안식을 위하여 기도와 제물을 봉헌하였다. 이는 황제의 평생소원의 성취이니, 그는 자기가 죽은 뒤 신자들이 모여 자기를 추억하며 기도하기 위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도들을 주보로 삼은 대성전을 건설하였다."
에우세비우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
"우리는 별세한 교황과 주교들을 기도 중에 기념한다. 이는 지극히 성스럽고 지고한 제례를 봉헌할 때 주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그들의 영혼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믿는 까닭이다."
예루살렘의 키릴로스
"나의 형제들과 친구들이여,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부탁한다. (죽은 뒤에) 형제들이 기도하러 모이거든 부디 나를 잊지 말고 기억하여 주기를 바란다. 나의 시체에 향료를 바라 장례지내지 말라. 향료는 하느님께 바치고 죄 중에서 잉태된 나는 비애 속에 매장하라. 내게는 향액을 주지 말고 기도로 도와 달라. 죽은 자의 영혼은 산 성인의 기도로 큰 이익을 받는 법이다."
에프렘
(그라티아누스 황제와 발렌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별세하였을 때)
"제 기도가 유효하다면 폐하는 행복할 것입니다. 제가 폐하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은 때가 없었으며, 모든 제례 중에 페하를 기억하였습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별세하였을 때)
"주의 종 테오도시우스에게 주께서 성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평안을 주소서. 저의 영혼이 죽음의 가시가 쏘지 않는 평안한 곳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내가 저를 사랑하였으니 천국에까지 저를 좇아가리이다. 내가 눈물과 기도로써 저를 우수와 비애가 없는 불사불멸의 주님의 산 위로 인도하기까지 저를 떠나지 않으리이다."
암브로시우스, 《Faith of Catholics》, Vol. Ⅲ., 176
"사도들이 지극히 거룩한 제사 중에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한 것은 실로 지당하다. 이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저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Faith of Catholics》, Vol. Ⅱ
(죽은 어머니를 위한 기도)
"내 마음의 하느님이시여, 내 어머니 죄를 위하여 주께 간구하옵나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상처의 구속 능력으로 말미암아 내 기도를 들어 주소서.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또한 내 마음과 소리와 붓으로 봉사하는 나의 형제들로 하여금 이 기도문을 읽을 때마다 주님 제대 앞에서 주님의 종 모니카(그의 어머니)를 기념하도록 복돋아 주시옵소서."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9. 비가톨릭 종파의 입장

9.1. 정교회

정교회는 좀 더 복잡하다. 그들도 죽은 이들을 위한 간구의 기도를 바친다. 하지만 서방 교회의 연옥 교리가 말하는 응보적이고 징벌적인 측면은 거부한다. 정교회의 소극적인 태도는 결정적으로, 서방의 연옥 교리가 오리게네스의 '만유 회복설'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그들의 지속적인 의심 때문이었다. 연옥 교리를 둘러싼 서방 신학과 동방 신학 사이의 서로 다른 발전에 대해서는 G. Bätzing, Kirch im Werden 23-28을 보라.
Gerhard Lohfink. 《Am Ende das Nichts? Über Auferstehung und ewiges Leben》 393쪽
연옥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은 중세 때 동방 교회와 일치를 이끌어내고자 개체된 두 공의회에서 그 최종적인 형상을 찾아냈다. … 동방 교회는 중간 상태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구축한 견해를 고수했다. 그리하여 일치를 위해 개최된 리옹 공의회(1274)와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연옥설이 쟁점으로 등장했다. 그 차이점은 1백년 뒤 종교 개혁자들과 대결한 가운데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드러난 차이점과는 물론 다른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사후의 벌과 보속에 대한 가르침은 거부했지만,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서방 교회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이는 기도와 자선, 선행을 비롯해 특히 그들을 위한 영성체에서도 이루어진다.
요제프 라칭거(베네딕토 16세). 《Eschatologie》(국내 번역명 《종말론》) 한국어판 259-260쪽

정교회에서는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지만, 가톨릭 연옥 교리의 징벌적 요소는 거부한다. 15세기 서방에서 개최된 피렌체 공의회에서 에페소스의 마르코스(Μάρκος ο Ευγενικός) 주교는 교황수위권필리오케를 비롯한 서방 신학을 반대하면서 연옥에 대한 믿음 또한 거부하였으며 오늘날의 정교회도 이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죽은 영혼이 천국에 다다르기 전 정화의 상태가 있다는 믿음은 가톨릭과 정교회 두 교회가 갈라지기 이전부터 있었다.

정교회에서도 죽은 후 사람의 영혼이 어떤 '중간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가르친다. 완전한 심판이 이루어질 때까지 중간 상태에서 쉬게 되는데, 이때 의로운 영혼들은 선한 것들을, 불의한 영혼들은 고통을 미리 맛보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신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하여 추도식, 기도, 자선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가톨릭과 같으며, 그 근거 중 하나로 마카베오 2서 12장 43절을 드는 것도 가톨릭과 같다. 양자는 의로운 영혼이라도 지은 죄가 없지 않다면 천국행이 지연된다는 것과 산 사람들이 죽은 이들의 지복을 앞당기기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유익하다는 두 가지 교리를 핵심으로 하고 있어 공통된다.

다만 정교회는 이 중간 상태를 어디까지나 미지의 요소로서 남기며, 가톨릭의 연옥과 같이 상세히 가르치는 공식적인 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교회에서는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할 뿐,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교리로서 확정 짓지 않고 그저 전승으로 말한다. 이에 대하여 델로니아(방벽)라는 전승이 있으며, 영어로는 'Aerial toll house'라 한다. 이 전승에 따르면 죽은 의로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때 일종의 관문을 거치며, 천사들이 의로운 영혼을 천상으로 받아들이려 할 때 대기권에서 악마들이 생전에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며 영혼들을 가로막는다고 한다. (정교회 신앙의 신조 제11조 참고)

9.2. 개신교

“연옥, 면죄, 성상 및 유물에 대한 예배와 숭배, 그리고 성인을 통한 기도에 관한 로마 교회의 교리는 어리석은 것이며, 헛되게 발명된 것이고, 성서에 전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적대하는 것이다.”
성공회 39개 신조 제22조. (현대 성공회는 이 교리에 대해 굳이 설명하거나 도그마로 받아들이지 않으나 공식적(원론적)으로는 연옥을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
"연옥과 사죄의 우상과 유물에 경배하고 존중함과 성인의 이름으로 기도함에 관한 로마교도리는 허망하고 위조한 것이다. 성경에 빙거할 수 없을뿐더러 하나님의 말씀에 반항하는 것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교리와 장정> "종교의 강령" 제 14조[11]

성공회루터교회를 포함한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은 연옥과 같이 '죄를 씻는' 상태는 없다는 주장을 유지한다. 애초에 타인의 기도를 통해 벌이 사라진다, 벌을 줄여준다 등은 개신교에선 해괴한 소리로 취급한다. 사실 개신교에서 이토록 연옥을 배격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계기 중 큰 하나가 면죄부(면벌부)라는 연옥 교리의 큰 폐단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연옥에 대한 현대 성공회의 주류 입장은 적극적인 부정론보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에 가깝다. 물론 제3의 상태를 사실상 인정하는 일부 신학자들이나 신자들도 잠벌을 정화하는 상태로서의 가톨릭적 개념은 부정한다.

대다수 개신교 교회에서는 마카베오서를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나아가 마카베오서의 해당 구절이 연옥을 의미하지도 않는다고 본다.

해당 본문에서는 전사한 몇 사람이 우상숭배를 한 것으로 밝혀지자 마카베오와 부하들이 그들도 부활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도와 제사를 올린다. 그런데 이런 기도와 제사는 연옥에서 벗어나고자 함이 아니라, 모든 이가 똑같이 중간 상태에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육신의 부활을 얻기를 소망한 몇몇 사람이 아직 속죄받지 못한 죄가 있기 때문에, 이들도 다시 일어나(하늘에 가서가 아니라)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를 확실히 누리도록 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12] 애초에 우상숭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톨릭에서 대죄로 보는 것으로 이러한 죄를 연옥에서 씻는다는 것은 가톨릭 교리와도 맞지 않는다.

개신교에서 마카베오서를 교리의 근거로서 인용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성서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나아가 최초의 70인역 자체에 마카베오서 등 제2경전으로 간주하는 문서가 포함되었는가라는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참고

또한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에서 연옥의 근거로 드는 베드로전서의 구절들을 이렇게 해석하며 연옥설에 반대한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불 가운데서 받은 구원은 공적이 불에 타버려서 상급이 없다는 뜻이지 연옥에서 나와 구원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고 본다. 죽은 자들을 위해 받는 세례에 대해 나오는 고린도전서 15장 29절 역시, 그런 것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지 그것에 대한 어떤 평가도 내리고 있지 않고, 만약 그것이 일반적인 교회 전통이었다면 우리가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다고 표현했을 것이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연옥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비약이 있다고 본다. 또한 개신교에서는 마태복음 12장 32절에 나오는 성령을 거역한 사람은 내세에서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을, 단순히 죽어서는 죄를 용서받을 기회가 없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라고 해석하며, 죄를 용서받을 수도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비약이라고 본다.

또한 만약 연옥이 있다면 재림 때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천국으로 직행하는 사람, 잠벌이 남아 있어서 연옥에 가야 하는 사람, 지옥에 가야 하는 사람, 세 부류로 나뉘어야 공평한 것인데, 성경에는 이와 관련한 내용이 전혀 없고 가톨릭도 이런 주장을 하지는 않는 것을 근거로 들어 개신교에서 연옥설을 반대하기도 한다. 재림의 때에는 연옥에 안 가도 천국에 들어가는 데에 문제가 없다면, 그동안은 뭐하러 사람들이 연옥에 갔는지 의문이 남는다.

또한 개신교에서는 고린도전서 11장 32절, 고린도후서 12장 7절, 히브리서 12장 11절 등을 근거로 들어, 신자들이 받는 벌은 어디까지나 신앙적 유익을 위한 것이지, 연옥에 가야하는 근거가 되는 잠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아울러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믿음과 관련하여 죽은 신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성공회에서도 별세한 신자들을 위한 기도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도로 그들의 죄가 덜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신자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듯이 그렇게 기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성찬례의 모든 과정 속에 지금까지 이 세상에 왔다가 돌아간 모든 신자들과도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그 안에서 친교를 나누었다는 의미.[13]

다만 교파나 신학자에 따라서 정교회의 정화단계에 더 가까운 것을 믿기고 하기도 한다. 물론 정식교리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또한 개신교에서는 연옥이란 것 자체는 인정하지는 않지만, 교파나 신학자들에 따라 비슷한 곳은 있는다고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천국이나 지옥에도 종류가 있어, 신앙과 선행, 혹은 악행의 수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단계의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는 견해가 있기도 한데, 이 경우, 예수를 믿지는 않았지만 선행을 쌓은 사람인 경우에는 지옥중에서 그나마 고통스럽지 않은 곳으로 간다던지, 예수를 믿었어도 딱히 특별하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게 살았다면 천국에 가더라도 정말 특별할거 없는 곳으로 간다는 식의 견해이다. 물론 이런 입장에서도 잠벌을 정화하는 상태로서의 가톨릭적 개념은 부정된다. 다른 견해로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지 않았던 지역이라면 일단 임시로 다른 상태를 상정 가능하다는 견해도 있다.

10. 타 종교의 유사 개념

이슬람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다. 이슬람교에 따르면 선인은 낙원에 가고, 악인은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하지만,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받을 만큼의 무거운 죄를 짓지는 않은 인간에 대해서는 일정 기간 동안 지옥에서 반성하고, 그 후 낙원으로 올라간다고 본다. 그래서 무슬림들도 죽은 자에 대한 기도를 꽤 자주 하는 편이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한 히틀러스탈린과 빵 하나를 훔친 도둑'을 신의 '전지'의 속성을 겸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심판은 객관적이며 정의롭게 진행된다. 즉, 인간이 직접 경험하고 생각하고 듣는 것으로는 그것의 공평성, 실효성에 대해 말하거나 주장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덧붙여서 인간은 지식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점을 우려해보면 옳다, 옳지 못하다로 나누기엔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낙원(천국)과 지옥은 단계가 나뉘어 있다"고 함으로써 불공평성에 대한 의문증을 어느 정도 해소하기도 한다.

동양권에서는 윤회 사상과 섞여서 현세를 연옥으로 보는 견해가 은근히 존재한다. 혹은 불교의 지옥도 엄청나게 괴롭고 길긴 하지만 끝이 있다는 이유로 연옥으로 보기도 한다.[14] 또한 동양의 사후세계에서는 지옥이나 극락에 가기 애매한 영혼은 황천에 머무르다가 다시 환생한다고 한다.(대신 여기서 사고치면 지옥행)

11. 창작물


[1] "'연옥'은 어떤 장소가 아니다. … 그리스도교 신학이 말하는 정화(연옥)는 하나의 '사건'이지 장소가 아니다." (Gerhard Lohfink. 《Am Ende das Nichts? Über Auferstehung und ewiges Leben》 한국어판 235쪽)[2] 하느님을 저버리는 중대한 죄.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3] 가톨릭에서는 죄와 벌을 논리적으로 구분한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었더라도(이를 전통적으로 '죄의 용서'라 한다) 죄 자체가 초래한 부정적 결과를 정화할 의무는 사람에게 남기 때문이다.(이를 전통적으로 '잠시적 벌', 곧 '잠벌'이라 한다) 만일 이 보응을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면 연옥으로 남은 정화를 마저 하고 나서야 천국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4]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으며 대죄 중에 있지 않은 상태.[5] 즉 소죄(대죄에 대비되는, 죄이기는 하나 지옥에 갈 정도는 아닌 죄)와 잠벌이 남아 있는[6] 다소 엄밀하지 못하게는 지옥을 '영원'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교리서에서도 쓰는 표현이니 틀린 건 아니지만, 신학에서는 하느님 및 천국의 '영원함'과 지옥의 '영구함'(끝없음)을 구분한다.[7] 어찌 보면,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이 선행을 많이 베풀었어도, 그걸 아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이 많지 않다면 기도해줄 사람이 당연히 많지 않을테니 단축기간도 짧을 것이다.[8] 죽을 죄, 요한 1서 5,16-17[9]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탄생>.[10] 물론 가톨릭의 입장은 연옥은 중세에 새로 만들어진 교리가 아니라, (니케아 공의회 이전의 삼위일체론처럼) 이미 교회에서 인식되던 것이 중세에 명료화되었다는 것이다.[11] 기감 공식 사이트[12] 톰 라이트, '톰 라이트 죽음 이후를 말하다', IVP, 2017, 53-54p[13] 톰 라이트, 위의 책 및 참고[14] 참 애매한 것이 불교에서 천국에 해당하는 것은 모든 윤회에서 벗어나 극락에 가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지옥도에 떨어지는 것, 그러나 윤회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끝없이 환생하므로 지옥도에 떨어져도 언젠가는 환생하여 다른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지옥도는 지옥처럼 고통스럽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영원하지는 않다는 점에선 연옥과 같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정도에 따라 달라도 다 비슷한 처지이기에 근본적으로 지옥도를 포함한 육도윤회 전부가 다르지 않다. 그나마 전생에서 선행을 했다면 조금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난다는 점이 다르다.[16][15] 하지만 방어에 특화된 물의 호흡, 그 중에서도 뛰어난 품새이며 아무리 일륜도가 부러져 재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해도 수주인 기유가 사용하는 잔잔한 물결을 뚫어버린 그 아카자다. 거기다 상현부터는 신체 능력이 하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상승하고, 아카자는 요 몇백 년간 맨몸 격투를 주로 해왔으니 더욱 더 몸의 내구성이 단련돼 있을 것이다. 그 탄지로와 기유마저도 그 둘이 전부 반점를 터득하고도 말 그대로 잠깐만 밀릴 뿐, 금방 적응해 또 전자 둘을 압도했다. 그리고 탄지로가 내비치는 세계를 터득하기 전까지 우세를 점했고, 내비치는 세계를 터득하고 나서야 아카자의 목을 베었다. 싸움에 즐기면서 임했다고 해도 상현 3인 만큼 내구성이나 방어력, 전투력이 뛰어난 아카자를 반점과 혁도 없이 아카자의 좌반신을 깎아내고, 마지막에는 목까지 반쯤은 깎아내는 모습을 보면 귀살대 상위권으로서의 강함을 충분히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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