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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00:18:51

교황수위권

파일:D41o1Ng.jpg
《성 베드로》, 바스코 페르난데스[1], 1506년, 패널에 유채, 그랑 바스코 미술관, 비제우
1. 개요2. 언어별 명칭3. 그리스도교의 교파별 입장
3.1. 가톨릭 교회의 입장3.2. 동방 정교회의 입장3.3. 오리엔트 정교회의 입장3.4. 개신교의 입장
3.4.1. 성공회
4. 성경에서의 단서
4.1. 마태오 복음서4.2. 마르코 복음서4.3. 베드로의 특별성4.4. 베드로와 바울로
4.4.1. 바울로 서간4.4.2.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
4.5. 요한계 교회4.6.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
5. 성경 이외의 단서들
5.1. 서술에 앞서5.2. 로마 제국 공인 이전의 단서들
5.2.1. 클레멘스 1세와 초기 로마 교회5.2.2.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5.2.3. 리옹의 이레네오 주교5.2.4. 정경과 부활절 날짜의 확정5.2.5.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 주교
5.3. 로마 제국 공인 이후의 단서들
5.3.1. 343년 세르디카 교회회의5.3.2. 에페소 공의회5.3.3. 레오 1세 교황5.3.4.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3.5. 피렌체 공의회5.3.6. 그 외
6. 관련 문서

1. 개요

교황수위권(敎皇首位權, Primatus Romani Pontificis)은 로마의 주교가 전 세계 그리스도교 주교단의 단장인 교황으로서 개인 인격을 통해 실질적으로 주교단을 영도할 수 있다는 가톨릭의 교리이다.

교황은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후계자이기에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단에서 으뜸이고, 로마 주교좌는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순교로 축성된 성좌이기에 전체 교회의 수장좌라는 것. 그리스도교의 종파별로 입장이 매우 첨예하게 다르다. 정교회는 형식적으로나마 공식적인 첫 번째 주교로 인정하는 반면, 절대 다수의 개신교 교단에서는 교리로 인정하지 않는다.

2. 언어별 명칭

라틴어 Primatus Romani Pontificis
프랑스어 Primauté pontificale
영어 Papal Primacy

3. 그리스도교의 교파별 입장

3.1. 가톨릭 교회의 입장

가톨릭 교회는 교황수위권에 대해 이미 교리서에서부터 확고한 입장을 드러낸다.
1.#182 교황의 사명은 무엇인가?
로마의 주교이며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은, 교회 일치의 영구적이고 가시적인 근원이며 토대이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주교단의 으뜸이고, 온 교회의 목자로서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교회 전체에 대하여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최고의 권한을 가진다.
1. 주교단의 임무는 무엇인가?
주교단은 교황과 더불어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한을 행사하는데, 교황 없이는 그 권한을 결코 행사하지 못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1.#880 그리스도께서는 열두 사도를 세우시면서 그들을 "확고한 단체 또는 집단의 형태로 세우시고, 그들 가운데에서 선택하신 베드로를 으뜸으로 삼으셨다."[2] "주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거룩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하나의 사도단을 이루듯이, 비슷한 이치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도 서로 결합되어 있다."[3]
1. 주님께서는 당신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시몬 한 사람을 당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셨으며,[4] 그를 당신의 온 양 떼의 목자로 세우셨다.[5] 그런데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저 임무는 그 단장과 결합되어 있는 사도단에게도 부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6]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의 이러한 사목 임무는 교회의 기초에 속하는 것이다. 이 임무는 교황의 수위권 아래서 주교들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
1. 교황은 로마 주교이며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주교들의 일치는 물론 신자 대중이 이루는 일치의 영구적이고 가시적인 근원이며 토대이다."[7] 사실 "교황은 자기 임무의 힘으로 곧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온 교회의 목자로서 교회에 대하여 완전한 보편 권한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8]
1. 주교단은 "그 단장인 교황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한의 주체로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단장 없이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며, 또한 그 권한은 오로지 교황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행사될 수 있다."[9]
1. "주교단은 보편 교회에 대한 권한을 보편(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한다."[10] "베드로의 후계자가 세계 공의회로 확인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계 공의회는 결코 인정되지 아니한다."[11]
1. "이 사도단은 여러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하느님 백성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며, 또한 한 단장 아래 모여 있으므로 그리스도 양 떼의 단일성을 드러낸다."[12]
1. "개별 주교들은 자기 개별 교회 안에서 일치의 가시적인 근원과 토대가 된다."[13] 이처럼 그들은 사제들과 부제들의 협조를 받아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부분에 대하여 사목 통치를 한다."[14] 그러나 각 주교들은 주교단의 일원으로서 모든 교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15] 우선 "보편 교회의 한 부분인 자기 교회를 잘 다스림으로써 교회들의 몸인 신비체 전체의 선익에"[16] 이바지해야 한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17] 믿음 때문에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과 온 세계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에게 그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1.#891 "주교단의 단장인 교황은 참으로 신앙 안에서 자기 형제들의 힘을 북돋워 주는 사람이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하는 때에, 교황은 자기 임무에 따라 그 무류성을 지닌다. 교회에 약속된 무류성은 주교단이 베드로의 후계자와 더불어 최상 교도권을" 특별히 세계 공의회에서 "행사할 때에 주교단 안에도 내재한다."[18] 교회가 그 최상의 교도권을 통하여 어떠한 것을 "하느님에게서 계시되어 믿어야 할 것"[19]으로 제시하거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제시할 때에는 그러한 "결정에 신앙의 순종으로 따라야 한다."[20] 이 무류성은 "하느님 계시의 위탁이 펼쳐지는 그만큼 펼쳐진다."[21]
1.#895 "주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접 행사하는 이 권한은 고유한 직접적 직권이다. 비록 그 권한의 행사가 궁극적으로 교회의 최고 권위로 다스려지고 교회와 신자들의 선익을 고려하여 일정한 한계에 제한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다."[22] 주교들을 교황의 대리자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교황의 통상적이고도 직접적인 최고 권한은 주교들의 권한을 무효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확인하고 보호한다. 주교들의 권한은 교황의 지도 아래 온 교회의 친교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880~886, 891, 895항. 원문 링크: 880, 881, 882, 883, 884, 885, 891, 895. 교회 문헌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Itaque Nos traditioni a fidei Christianae exordio perceptae fideliter inhaerendo, ad Dei Salvatoris nostri gloriam, religionis Catholicae exaltationem et Christianorum populorum salutem, sacro approbante Concilio, docemus et divinitus revelatum dogma esse definimus: Romanum Pontificem, cum ex Cathedra loquitur, id est, cum omnium Christianorum Pastoris et Doctoris munere fungens, pro suprema sua Apostolica auctoritate doctrinam de fide vel moribus ab universa Ecclesia tenendam definit, per assistentiam divinam, ipsi in beato Petro promissam, ea infallibilitate pollere, qua divinus Redemptor Ecclesiam suam in definienda doctrina de fide vel moribus instructam esse voluit; ideoque eiusmodi Romani Pontificis definitiones ex sese, non autem ex consensu Ecclesiae irreformabiles esse.[23]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그리스도 신앙 초기부터 수용된 전통을 신실하게 따르면서, 우리의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가톨릭 종교와 그리스도교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거룩한 공의회의 승인 아래, 다음과 같은 것이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교의임을 가르치고 규정하는 바이다.
로마 교황이 사도좌에서 발언할 때, 곧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자요 스승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자신의 사도적 최고 권위를 가지고,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보편 교회가 고수해야 할 것이라고 결정한다면, 그는 복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하느님의 도움에 힘입어 무류성을 지닌다. 이 무류성은 하느님이신 구속주께서 당신의 교회가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규정지을 때 갖추기를 바라셨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의 결정들은 교회의 동의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개정될 수 없는 것이다.[24]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영원하신 목자(Pastor Aeternus)」 제4장
가톨릭 교회가 이해하는 교황권은 기본적으로, 교황이 주교단의 단장이며 실질적으로 주교단을 이끈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특히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듯, 교의를 무류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가능하므로 매우 강력한 권한을 지녔음은 분명하다.
교황의 수위권이 아무리 확고하고 강력할지라도 각 지역 주교들의 고유한 사목 권한을 배제하거나 축소하거나 대행하지 않는다. 주교들은 주교품을 받음으로써 사도들의 후계자가 되고, 위임된 지역 교회의 완전한 사목자가 되며, 로마 교황과 더불어 한 주교단을 이룬다. 베드로가 사도단의 단장이었던 것처럼 교황도 주교단의 단장이며, 따라서 교황을 제외한 주교단이나 주교단과 유리된 교황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교회헌장 22). 그러므로 주교단 안에서 각 주교들은 그들의 사목권을 교황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고 주교서품을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받기 때문에, 자기에게 위임된 지역 교회(교구)안에서 교황의 대리가 아니고(교회헌장 27) 고유하고 직접적이고 통상적인 사목자이며(교회헌장 23), 세계 교회에 대해서는 교황과 함께 한 주교단으로서 전반적 최고 사목권의 주체가 된다. 주교단의 단체성은 세계 공의회에서 잘 나타난다. 공의회의 결의는 단장인 교황의 동의를 받아서 교회 전제에 대한 보편적인 사목지침이 되는 것이다. 공의회 밖에서도 세계 주교들의 일치된 결정은 동의를 전제로 하여 교회의 최고 사목권의 발로로 인정된다(교회헌장 22, 주교교령 4).
《가톨릭대사전》, 교황 문서
다만 가톨릭 신자가 교황권을 이해할 때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흔히들 가톨릭 교회의 교황 개념을 단순하게 파악하기 쉽지만, 지역 교구 안에서 주교는 교황의 대리자가 아니라 고유하고 직접적으로 통상적인 사목자이다. 가톨릭의 교계 제도가 적지 않게 '중앙집권'으로 표현되고 정교나 성공회 등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는 그렇지만, 한국인들이 '중앙집권'이라는 말에서 흔히 연상하는 동아시아식 중앙집권체제와는 다르고, 역사적으로도 상관이 없다. 그보다는, 교리서가 표현하듯 주교단의 '단장'으로 로마 '주교'인 교황을 바라봐야 가톨릭 교회 스스로의 교황권 이해에 가깝다.

다음은 위에서 발췌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대한 해설이다.
본문은 교황이 무류적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에 언급된 조건들이 채워지면 교황은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 당신의 교회가 (…) 향유하기를 원하신 무류성을 지닌다." 다른 말로 하자면, 교황의 무류성은 교회라는 배경 안에 있는 것이지 그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의미하는 것이 명시되진 않았지만 단지 위계적인 교회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정말 우선적으로는 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 빛 Lumen Genitum〉에서 나타나듯이 하느님 백성, 그리스도교 신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도리에 맞다. 따라서 교황은 전체 그리스도교 백성에게 약속된 인도(guidance)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구절을 지나치게 축소하려는 접근을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끝내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의 결정들은 교회의 동의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바뀔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무류성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영광, 가톨릭교회의 고양 그리고 그리스도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교황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무류성은 숨은 목적, 특히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서지 교황의 개인적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노만 P. 탄너, 간추린 보편 공의회사, 김영식·최용감 옮김(서울: 가톨릭출판사, 2010), 152-153쪽
즉 교황의 무류성마저도 결국에는 교회의 무류성에서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교황의 무류성은 교회의 무류성에서 결코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교황의 무류성은 "교회 자체의 무류성일 뿐이다. 모든 논쟁을 종결지으려고 이를 권위 있게 해석하는 이가 절대적이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소유하는 것이다."[25] 이에 관하여, 드 뤼박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 무류성의 개인적 독자성을 설명한 "교회의 동의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exsese, et non ex consensu Ecclesiae)라는 유명한 정식이 어떻게 흔히 잇따른 논란으로 왜곡되었는지, 어떻게 "교황 무류성이 별개의 무류성을 의미하게 될 뻔했는지"를 설명한다.[26] 그의 올바른 해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재정립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동일한 정식과 동일한 가르침을 더 명확한 표현으로 강조하면서[27] 이 무류성이 온 교회에도 속하는 것으로 결정적으로 분명히 정의한다.[28]
마르코 스프리치(Msgr. Marco Sprizzi),[29] 《앙리 드 뤼박: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30], BOOKK 2018, p.197-198.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친교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교황의 직무가 그리스도의 뜻에 부합한다고 긍정할 때, 교회는 그 직무를 주교단 전체에 위탁된 임무와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주교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자들"[31]입니다. 교황은 "주교단"의 일원이며, 주교들은 직무에서 그의 형제들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Ut Unum Sint)」 95
이 부분에 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itum)」과, 그와 관련된 "사전 설명 주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22 주님께서 제정하신 대로, 거룩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하나의 사도단을 이루듯이, 비슷한 이치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도 서로 결합되어 있다. 전 세계에 세워진 주교들이 일치와 사랑과 평화의 유대로 서로 교류하고 교황과 친교를 이루던 매우 오랜 옛 규율과[32] 공의회 모임 자체가[33] 주교단의 단체적 본질과 특성을 드러내 준다. 공의회를 통하여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든 공동으로 결정하고[34] 많은 이의 의견을 숙고하여 판단한다.[35] 여러 세기의 흐름 속에서 개최된 세계 공의회들이 그 단체성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 뽑힌 이를 대사제 직무로 올리는 데에 참여하도록 여러 주교들을 초대하는 오랜 권고와 관습 자체가 이미 그 단체성을 가리키고 있다. 주교는 누구나 성사적 축성의 힘으로 또 주교단의 단장과 그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로 주교단의 구성원이 된다.
그러나 주교들의 단체인 주교단은 동시에 그 단장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더불어 이해되지 않을 때에는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목자들이든 신자들이든 모든 이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은 온전히 유지된다. 교황은 자기 임무의 힘으로 곧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온 교회의 목자로서 교회에 대하여 완전한 최고의 보편 권력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주교단은 교도권과 사목 통치에서 사도단을 계승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사도단이 계속하여 존속하며, 그 단장인 교황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력의 주체로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단장 없이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며,[36] 또한 그 권력은 오로지 교황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행사될 수 있다. 주님께서 한 사람 시몬을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으며(마태 16,18-19 참조), 그를 당신의 온 양 떼의 목자로 세우셨다(요한 21,15 이하 참조). 그러나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저 임무는(마태 16,19 참조) 그 단장과 결합되어 있는 사도단에게도 부여되었음이 분명하다(마태 18,18; 28,16-20 참조).[37] 이 사도단은 여러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하느님 백성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며, 또한 한 단장 아래 모여 있으므로 그리스도 양 떼의 단일성을 드러낸다. 주교단 안에서 주교들은 그 단장의 수위권과 최고 권위를 충실히 존중하면서, 교회의 유기적 조직과 화합을 끊임없이 북돋아 주시는 성령에 따라, 자기 신자들은 물론 온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고유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 주교단이 지닌, 보편 교회에 대한 최고 권력은 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된다. 그러나 베드로의 후계자가 세계 공의회로 확인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세계 공의회는 결코 인정되지 아니한다.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재하며 확인하는 것은 교황의 특권이다.[38] 전 세계에 살고 있는 주교들은 교황과 함께 그 동일한 합의체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나, 그것이 진정한 합의체적 행동이 되려면, 주교단의 단장이 주교들에게 합의체적 행동을 요청하거나 적어도 흩어져 있는 주교들의 일치된 행동을 승인하거나 자유로이 수락하여야 한다.
1.#25 (…) 각각의 주교들이 무류성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상호간에 또 베드로의 후계자와 친교의 유대를 보전하면서 신앙과 도덕의 사항들을 유권적으로 가르치는 주교들이 하나의 의견을 확정적으로 고수하여야 할 것으로 합의하는 때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류 없이 선포하는 것이다.[39] 그것은 이제 주교들이 세계 공의회에 모여서 보편 교회를 위하여 신앙과 도덕의 스승들이 되고 재판관들이 될 때에는 더욱 명백해지므로, 그들의 결정에 신앙의 순종으로 따라야 한다.[40] (…) 주교단의 단장인 교황은 참으로 신앙 안에서 자기 형제들의 힘을 북돋워 주는 사람이므로(루카 22,32 참조), 모든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자이며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확정적 행위로 선언하는 때에, 교황은 자기 임무에 따라 그 무류성을 지닌다.[41] 그러므로 교황의 결정은 교회의 동의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마땅히 바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복된 베드로 안에서 교황에게 약속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선포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결정은 결코 다른 누구의 승인도 필요하지 않고 다른 판단을 요구하는 어떠한 상소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할 때에 교황은 한 개인으로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 자체의 무류성의 은사를 특별히 지니고 있는 보편 교회의 최고 스승으로서 가톨릭 신앙의 교리를 설명하고 옹호하는 것이다.[42] 교회에 약속된 무류성은 주교단이 베드로의 후계자와 더불어 최고 교도권을 행사할 때에 주교단 안에도 내재한다. 이러한 결정에 대하여 교회의 동의가 결코 없을 수 없다. 똑같은 성령의 활동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양 떼가 신앙의 일치 안에서 보전되고 진보하기 때문이다.[4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사전 설명 주석
위원회는 '수정안들의 심의에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견해들을 전제하기로 결정하였다.
1. 단체는 엄밀한 법률적 의미로 이해되지 않는다. 곧 자기 권한을 자신의 단장에게 위임한 평등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 조직과 권위가 계시로부터 말미암아야 하는 확고한 집단의 의미로 이해된다. 그 때문에 수정안 12에 대한 답변에서 열두 사도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그들을 ‘확고한 단체 또는 집단의 형태로’ 세우셨다고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수정안 53c도 참조. 같은 이유로 도처에서 주교단에 또는 집단이라는 용어들이 관련되어 사용된다. 한편으로 베드로와 사도들, 또 다른 한편으로 교황과 주교들 사이의 동형(同形)은 사도들의 특권이 그 후계자들에게 전수된다는 의미도 아니고 또 분명하거니와 단체의 단장과 구성원들 사이의 평등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첫째 관계(베드로-사도들)와 둘째 관계(교황-주교들) 사이의 균형성만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위원회는 제22항에서 '동일한'이 아니라 '비슷한' 이치로 쓰도록 결정하였다. 수정안 57 참조.
1. 누구나 주교 서품의 힘으로 그리고 주교'단'의 단장과 그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로 '주교단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제22항 1의 끝 참조.
서품 안에서 거룩한 임무로의 존재론적 참여가 주어지는데, 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성전과 전례적 전통에도 있다. ‘임무’라는 용어가 ‘권한’ 대신 의도적으로 쓰이고 있는데,왜냐하면 후자는 권력의 자유로운 행사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자유로운 행사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교계의 권위를 통하여 교회법적 또는 법률적 결졍이 추가되어야 한다. 그러한 권한의 규정은 특별한 직무의 부여나 수하의 지정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또한 최고 권위가 승인한 규범에 따라 주어진다. 이러한 종류의 다른 규범은 사안의 본질상 요구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계적으로 협력하는 여러 주체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들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친교"는, 이를테면 법으로 성문화되기 전에, 교회의 생활 속에서 시대 상황에 따라 적용되어 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교회의 으뜸과 그 구성원의 교계적 친교가 요구된다고 명확히 언급된다. 친교는 고대 교회에서 (오늘날에도 특히 동방에서처럼) 크게 존중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막연한 어떤 감정이 아니라, 법률적 형식을 요구하는 동시에 사랑으로 살아가는 유기체적 실재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위원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교계적 친교 안에서’로 써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수정안 40과 제24항 아래에서 교회법적 임명에 관하여 말하는 것도 참조.
주교들의 재치권에 관한 최근 교황들의 문서들은 이 필요한 권력 결정에 대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1. 단장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주교단은 ‘마찬가지로 보편 교회에 대한 최고요 충만한 권한의 주체로서 존재한다.’고 언급된다. 교황의 충만한 권한이 위험에 놓이지 않기 위해서는 이 진술이 반드시 받아들여져야 한다. 주교단은 주교단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또 보편 교회의 목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온전히 보존하는 단장과 필연적으로 언제나 함께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교황과 집단으로 여겨지는 주교들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교황과 주교들이 함께 있는 교황이 구별되는 것이다. 실로 교황은 주교단의 단장이므로 교황 홀로 어느 모로도 주교들의 소관이 아닌 어떤 일들, 예컨대 주교단을 소집하고 지도하고 행동 규범을 승인하는 등의 행위를 할 수 있다. 수정안 81 참조. 그리스도의 양 떼 전체를 돌보는 일이 교황에게 맡겨져 있으므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변천하는 교회의 필요에 따라 개인적인 방식으로든 단체적인 방식으로든 이 사목의 실행에 알맞은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교황의 판단에 달려 있다. 교황은 교회의 선익을 고려하여 자기 재량에 따라 단체적 사목 수행을 조정하고 증진하고 승인하는 것이다.
1. 교황은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자신의 직무가 요구하는 대로 언제나 자기 뜻대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주교단은 언제나 존속되지만, 교회의 전통이 확증하듯이 항상 엄밀하게 단체적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주교단은 언제나 '충만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간격을 두고서만, 그리고 단장의 동의가 없지 않을 때에만 엄밀한 단체적 행위를 한다. 그리고 ‘단장이 동의할 때에만’이라고 하지만, 이를 마치 외부의 다른 사람에게 예속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동의'라는 용어는 그와 반대로 단장과 구성원 사이의 친교를 상기시켜 주며, 단장에게 고유한 행위의 필연성을 함축하고 있다. 그 사실은 제22항의 2에서 명백히 강조되고 또 그 말미에서 설명되고 있다. ‘없지 않을 때’라는 부정적 표현은 모든 경우를 포괄한다. 그러므로 최고 권위로 승인된 규범이 언제나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수정안 84 참조.
이 모든 것들이 주교들과 그 단장인 교황의 결합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지, 결코 교황으로부터 독립된 주교들의 행동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경우에 만약 단장의 행동이 없다면 주교들은 단체로서 행동할 수 없는데, 이는 '단체'의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교황과 모든 주교의 이러한 교계적 친교는 전통 안에서 확실히 관례적인 것이다.
* 주의. 교계적 친교가 없으면 교회법적-법률적 측면과 구별되는 성사적-존재론적 직무가 수행될 수 없다. 그러나 위원회는 ‘합법성’‘유효성’에 관한 문제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 문제들, 특별히 갈라진 동방 교회에서 실제로 행사되고 있으며 그 해석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 권한과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는 신학자들의 토론에 맡겨 둔다.[44]
문헌들에서는 일관적으로 교황의 권한을 언급하지만, 또한 일관적으로 교황을 주교단의 단장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주교단은 (…)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력의 주체로도 존재"(〈인류의 빛〉 22)하며, "주교단은 보편 교회에 대한 권한을 보편(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교리서 884)하고, "교황을 제외한 주교단이나 주교단과 유리된 교황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가톨릭대사전)이다.

가톨릭이 이해하는 교황권이 강력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가톨릭 신자가 이를 막연하게 '강력한 권한'으로 단순화해서 파악한다면 주교들의 권한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다. 최소한, 역사적으로 상관 없는 동아시아식 군현제의 황제-지방관 관계를 교황-주교 관계에 대입해서는 안된다.

또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 무류성 정의에 대하여 극단전으로 과장된 해석이, 극단적인 교황권 지지자와 반가톨릭주의자들 사이에서 모두 나오고 있는데, 이런 과장은 공의회 텍스트에 근거한 해석이 아니다. 유럽의 가톨릭-개신교 신학자 36명[45]이 공저한 서적인 《Neues Glaubensbuch - Der gemeinsame christliche Glaube》에서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황무류성 정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46]
무류성은 모든 교황 '각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베드로의 후계자를 교회와 분리시켜 교회 위에 앉히는 개인적인 특권은 아니다. 교황은 이를테면 교황이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 또는 서방교회의 총수이기 때문에) 무류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무류성이 있는 것은 그가 모든 신앙인들의 최고의 교사로서 이 직분의 최고권위에 의하여 (ex cathedra) 말을 할 때이다. 즉, 무류성은 직무 자체의 자격이 아니라 직무가 수행되는 특정한 행위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이 그런 행위를 수행할 때에는, 즉 그런 교리상의 결정올 내리고자 할 때에는 스스로 그것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또 교황이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것올 증명해야 한다. 당연한 일이거니와 제 1 바티칸 공의회 전의 시기에 관해서 그런 증명을 하기란 반드시 쉬운 일은 아니다.
"가톨릭교리에 의하면 교황은 무류성이 있다"는 말은 지나치게 간단한 표현이며 그야말로 오류이다. 공의회의 문서들과 일치해서 "로마 주교에 의한 교도직의 행사는 엄밀한 조건 하에서 오류가 없다"고 해야 옳다. (…) 나아가 이런 교황의 교리결정은 교희의 신앙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비단 교회의 신앙이 그 결정의 목적이라는 점만이 아니라 그 척도가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교의 자체가 교황으로 하여금 진리 발견을 위한 모든 인간적인 수단을 적용하도록 의무를 지우고 있다. 물론 그런 수단들의 선택에 있어서도 공의회가 교황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 있어서 성서와 전통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교의가 교황에게 약속하는 성령의 도움이란 〈소극적〉 의미의 (오류에서 보호된다는) 효과일 뿐이다. 교황에게 어떤 적극적 의미의 영감이 약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새로운 계시가 약속되어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가장 큰 반발을 ㅡ 당시에나 지금에나 ㅡ 사는 것은 "로마 주교의 결정이 교회의 동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에 의해서 철회될 수 없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실상 이 말은 듣기처럼 그렇게 반발을 살만한 것은 아니다. 공의회는 교황의 무류적 교리결정과 교회의 신앙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런 교리 결정이야말로 교회가 증언하는 신앙의 표헌이다. 교황은 교회의 신앙에서 분리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 자신이 교회 밖에 있는 셈이다. 〈그 자체에 의하여〉ex sese라는 말은 그러므로 교황이 임의로 신조를 제정하여 교회에 명령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일종의 의희(議會) 비준과 같은 일정한 법적 절차에 의해서 비로소 교황의 교리 결정이 철회될 수 없는 것으로 확정된다는 견해를 배제할 뿐이다. 이런 견해는 〈갈리아주의〉와 〈공의회주의〉 신학사조의 영향을 받아 실제로 존재했다(라틴어로 갈리아라고 불리는 프랑스에서 특히 강력히 대두되던 갈리아주의는 프랑스 교희의 로마로부터의 독립올 위하여 대단한 압력을 가하고 있었고, 공의회주의는 다소간에 교황보다 공의회에 우선권을 부여하려 했다). 이런 사조들은 교황 선언의 유효성을 백성의 대표자로서의 군주나 주교 또는 신도 전체의 직접 동의에 의존하게 하려고 했고, 이런 경향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 말썽 많은 표현형식이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에 글자 그대로 공의회 문서에 들어 가게 된 것이다.

수많은 반발과 오해의 근원이 된 이 표현을 구태여 이 문서에 넣을 필요가 있었던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이론들이 있다. 1870년 당시 까지도 갈리아주의나 공의희주의가 공의회에서 이 표헌방식을 옹호하던 이들이 생각하던 만큼 활발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개신교 신학자들까지도 〈교회의 동의〉consensus Ecclesiae라는, 의미가 석연치 못하여 별로 반가울 것이 없는 개념올 역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바르게 이해하려고, 그럼으로써 〈무류적 교(도)직〉 문제에 있어서 부질없는 논쟁을 피하려고 큰 노력올 기울이고 있다.[47]

여러면에서 제1 바티칸 공의회의 표현형식들은 극단적인 〈무류성론자들〉과 중도로선을 지키 던 존경할만한 소수자들 사이에 일어난 힘겨운 싸움과 점차적인 화해의 소산이다. 공의회 후의 시대에는 그러나 이 교의의 지지자들도 반대자들도 모두가 저 나름으로 교황교도직의 무류성올 과장해서 해석하게 되었다. (…) 이런 이론들은 제1 바티칸 공의회 문서에 근거한다고 할 수는 없다.
Johannes Feiner - Lukas Vischer 등 공저, 《새로운 공동신앙 고백서 - 하나인 믿음》Neues Glaubensbuch - Der gemeinsame christliche Glaube, 이경우·정한교 번역, 분도출판사 1979, pp.608-611
지금까지의 긴 발췌에서, '교황'과 '주교단'의 권한을 명료하게 종합해서 이해하는데는 드 뤼박 추기경의 설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교황이 온 교회를 "대표한다"고 말할 때에는, 그리스-로마의 정치 법률 문화에서 비롯되는 "대표자"의 개념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대표자의 성경 개념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공동체의 "지도자"는 바로 이 직무를 위하여 받은 하느님의 선택에 힘입어 공동체를 대표하고 이른바 공동체를 "인격화하며" 자기 자신 안에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48] 이는 베드로의 직무에 관하여 복음서가 가르치는 대로이다. 베드로는 "(자신을 포함하여) 열두 사도가 똑같이 받게 될 그 동일한 권한을 개인적으로 받았다. (…) 이러한 측면에서, 베드로는 최고 사도가 아니라, 사도단이 공유하는 모든 것을 그 안에 개인적으로 재통합하고 있는 사도로서 드러난다."[49]바로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드 뤼박과 함께 다음과 같이 차분하게 결론내릴 수 있다. "가톨릭 신자는 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시야를 넓혀 교회가 이른바 베드로 안에 온전히 요약되어 있음을 본다."[50]
마르코 스프리치(Msgr. Marco Sprizzi), 《앙리 드 뤼박: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BOOKK 2018, p.216.
즉 가톨릭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베드로는 "(자신을 포함하여) 열두 사도가 똑같이 받게 될 그 동일한 권한을 개인적으로 받았다. (…) 이러한 측면에서, 베드로는 최고 사도가 아니라, 사도단이 공유하는 모든 것을 그 안에 개인적으로 재통합하고 있는 사도로서 드러난다."

세속 국가로 비유하자면,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대등하며, 대통령[51] 역시도 국민으로서는 다른 국민과 대등하다. '대통령으로서의 국민의 권한'과 '대통령이 아닌 국민의 권한'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대등한 국민들로 이루어진 대한민국을 대통령이 대표하는 것이다. 물론 "일반 국민의 권한과 대통령의 권한이 다르다"고 표현하여도, 그 표현은 옳은 말이며 틀린 게 아니다. 그러나 동등한 국민들로 이루어진 대한민국을 대통령이라는 한 국민이 대표하고 실질적으로 이끈다고 이해한다면, 비록 복잡하지만 대통령직을 깊이 있게 이해 가능하다. 비슷한 원리로, '베드로 사도'와 '베드로가 아닌 사도'의 권한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대등한 사도들을 베드로가 대표한다'고 여기면 가톨릭의 이해에 가까울 것이다.

3.2. 동방 정교회의 입장

우리가 이야기하였듯, 모든 총대주교들의 최종 공동판관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세계 공의회이기 때문이다.
니코디모스(Νικόδημος ο Αγιορείτης)[52]의 저서 피달리온(Πηδάλιον) 中 제4차 세계 공의회 결정사항 제9조에 대한 주해
"정교회와 천주교회가 일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로마 교황이 교회 분리 이전 총대주교의 위치로 돌아오면 일치가 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없었던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교황무류성(敎皇無謬性)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정교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2대 정교회 한국대교구장 암브로시오스 조그라포스(조성암)와의 인터뷰 중에서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고백하는 모든 주교가 교회의 반석이다.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의 주교는 분명히 영예로운 자리지만, 모든 주교는 그 사도적 권리에 있어 서로 동등하고, 로마의 주교는 모든 교회에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로마의 주교가 교회의 수장이긴 하지만, 수직적인 위치에서 다른 주교들보다 높아서 수장이 아니라 수평적인 위치이기에 동등한 모든 주교를 대표하기에 수장인 것이다. 그렇기에 정교회는 이를 '명예 수위권'이라고 주로 표현한다. 그러나 정교회가 교황권을 '명예 수위권'이라 부른다고 해서, 이것이 동방 교구에 대한 로마의 실질적 권한이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교회는 오히려 이를 인정한다.
The bishop of Rome would be, by ancient custom, the "first" of the world’s bishops and of the regional patriarchs. His "primacy of honor" would mean, as it meant in the early Church, not simply honorific precedence but the authority to make real decisions, appropriate to the contexts in which he is acting.
로마 주교의 권한은 고대 관습이 그러했듯이 세계 주교들과 지역 총대주교들의 첫째가 되어야 한다. 그의 "명예 수위권"은 단지 존경적인 수위가 아니라 실제로 결정하는 권한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활동하는 맥락에 고유한 것이다. -고대 교회가 의미하듯이-
The North American Orthodox-Catholic Theological Consultation, 「Steps towards a Reunited Church: A Sketch of an Orthodox-Catholic Vision for the Future」, 2010-10-02, 제7항 a

3.3. 오리엔트 정교회의 입장

오리엔트 정교회도 교황수위권에 관해서 정교회와 입장이 비슷하다. 오리엔트 정교회는 로마 교황이 전체 교회의 수장이라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다만 역사적으로 주교들 가운데 손위 주교로 여겨졌을 뿐이라고 말한다. 물론 로마 교황의 무류성 또한 믿지 않는다. 오리엔트 정교회에서는 로마 교황은 물론 어느 주교도, 심지어 그들의 수장인 콥트 정교회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조차도 전체 교회를 통치할 권위를 지닌다고 보고 있지 않다.

3.4. 개신교의 입장

개신교 중에서 성공회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무시되는 교리이다.[53] 절대 다수의 개신교단에서는 교황수위권에 부정적이며, 신법(神法)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점차적으로 진화한 제도일 뿐이라고 본다. 사실 이런 부정적 입장 자체가 개신교의 정체성 중 하나이니. 당연히 후술하는 마태오 복음 16장을 통한 교황권 정당화도 역사적으로 의심스럽다고 본다.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갈라디아서에서는 베드로에게 유다인과 관련된 특별한 지위가 부여되는 동시에 바울로에게도 이방인에 대해 비슷한 역할이 주어진다.[54]

아울러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후계자를 로마 교회에서만 세운 것이 아니고, 아들이라 불리웠던 그의 제자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주교가 된다. 또한 안티오키아 교회는 최초의 이방 교회로서 모든 사도가 세우다시피 했다고 전해지며,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직속 교회이자 교회의 뿌리 그 자체다. 즉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제외한 총대주교좌들이 이러하니 천국의 열쇠를 홀로 지니는 주교좌는 없는 셈이다. 이에 대해 가톨릭 측은 초대 교회 시절부터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한 로마 교구가 베드로좌로 널리 인정되었다고 주장한다.
교회의 통일성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확립하는 것은 단일 군주론적인 사제직을 일신론적으로 확립시키는 것보다 신학적으로 훨씬 더 타당하다.(…) 전능으로서의 하나님은 교황의 보편적이고 오류가 없는 권위에 나타나고 이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경험된다. 그러나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은 공동체에 나타나고 그리스도가 그들을 함께 용납한 것같이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는 데서 경험된다. 단일 군주론적인 일신론은 교회를 계급제도로서 거룩한 주권으로서 확립시킨다. 삼위일체론은 교회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사귐"으로서 형성한다. 삼위일체론의 원리는 동의의 원리를 가지고 힘의 원리를 대체시킨다. 권위와 순종 대신에 대화와 의견의 일치와 조화가 등장한다. 교회의 권위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진리를 자기 자신이 깨닫게 됨으로써 신앙하게 된다. 통일성을 보존하고 관철시키는 계급 제도 대신에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형제애가 등장한다.
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대한기독교서회, 2017, 316p
몰트만 등의 진보 성향 개신교 신학자들은 단일 인물로서의 교황에 의한 일치는 삼위일체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거주에 상응하는 사귐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교황수위권을 비판하며, 장로제도와 노회 제도, 형제관계가 사회적 삼위일체에 가장 상응하는 조직체라고 보고 있다.[55][56]

3.4.1. 성공회

1.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대화는 교회 안의 권위의 문제에 관한 놀랄 만한 진보를 이룩하였다. 이 진보는 이미 이전의 국제 위원회가 발간한 문서들에 나타난 권위에 대한 이해의 수렴에 드러나 있다. 특히,
* 부활하신 주님의 성령께서 하느님 백성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도록 지켜 주심을 인정한다. 이러한 성령의 행위로 주님의 권위가 교회 안에서 실현된다.
* 신자들이, 특히 세례를 받고 신자 감각(sensus fidelium)에 참여하기 때문에, 교회의 정책 결정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 교회 안의 주교직(episcope)의 요소인 수위권(primacy)과 합의체성(concilianity)의 상호 보완성을 인정한다.
* 재결합된 교회 안의 일치의 표징이며 그 일치를 수호하는, 로마 주교가 행사하는 보편 수위권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 다른 주교들과 이루는 단체적 연합(collegial association)을 통하여 직무를 수행하는 보편 수위권자(universal primate)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 지역 교회에서 주교권 행사를 보조하되 대체하지 않는 보편 수위권과 합의체성을 인정한다.[57]
1.#47 로마 주교는 보편 수위권의 한 예로, 여러 직무 가운데 진리의 분별에 관련된 특별한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 특별한 직무가 교회 사이의 어려움과 오해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교회의 베드로 좌에서 선포된 모든 엄숙한 교리는 교회의 진리만을 표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한 교리는 주교직을 행사하는 이들의 주교단 밖이 아니라 안에서 선포된다. 이러한 권위적인 가르침은 신앙을 가르치고 확언하는 주교단의 특별한 소명과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다. 신앙이 이러한 방법으로 표현될 때 로마 주교는 지역 교회의 신앙을 선포한다. 이처럼 온 교회가 온전히 믿어야 할 가르침은 바로 보편 수위권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편 수위권은 그러한 가르침을 장엄하게 규정하며, 성령의 확실한 지원과 안내와 더불어 성경과 성전에 충실하게 전체 교회의 참된 신앙, 곧 맨 처음부터 선포되었던 신앙을 분별하고 선포하여야 한다. 바로 이 신앙이 친교를 이루는 세례 받은 모든 이의 신앙이며, 공의회에서 모든 주교가 주교단과 함께 오직 이것만을 언급한다. 로마 주교가 특정한 상황에서 분별하고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 바로 이 신앙이다. 이러한 형태의 권위적 가르침에서 공의회의 엄숙한 교리가 성령의 가장 강력한 보장을 받는다.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수용하는 것은 보편 수위권의 이러한 특별한 직무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것이 모든 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은사라고 믿는다.[58]
1.#60 국제 위원회의 활동은 함께 나누어야 하는 은사인 보편 수위권에 관한 충분한 합의를 이끌어 냈기에, 우리는 두 교회가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전에라도 그러한 수위권을 제시하고 수용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제안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는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께서 "하느님의 종들의 종"(「하나 되게 하소서」 88항)이라고 표현한 이 직무가 단체성과 합의체성을 통하여 수행된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이제 다양한 전승들을 복음에 충실하게 강화하고 보존하여 전승의 합당한 다양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위권을 상정해 본다. 이 수위권은 교회의 사명에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 이러한 수위권은 이미 지상의 교회가 참다운 보편적 친교를 이루도록 도울 것이다. 이 공동체에서 일치가 다양성을 손상하지 않고, 다양성은 일치를 위협하지 않고 향상시킨다. 이는 어떻게 이러한 하느님의 은사가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그 일치를 이룰 수 있는지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보여 주는 효율적인 표징이 될 것이다.[59]
1. 그러한 보편 수위권자는 예언자적 방식으로, 세상 안에서 그리고 두 교회 안에서 지도력을 행사한다. 보편 수위권자는 종파의 이해에 영향을 받지 않는 방법으로 공동선의 증진에 이바지하고, 특히 어려운 신학적 윤리적 주제에 관하여 지속적이고 확실히 가르치는 직무를 제공한다. 이러한 형태의 보편 수위권은 인간의 지혜와 교회의 신앙을 풍요롭고 강력하게 해 줄 결과를 낳는 신학 연구와 다른 형태의 진리 탐구를 환영하고 후원할 것이다. 이러한 보편 수위권은 자문과 토론을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회를 모을 것이다.[60]
1. 이러한 종류의 보편 수위권의 경험은 우리가 내린 다음 두 가지 구체적인 결론을 확인해 주고 있다.
* 성공회 신자들은 몇 가지 명백한 조건을 전제로 하여 로마 주교의 보편 수위권의 행사를 다시 발견하고 다시 수용할 의사와 열망이 있다.
*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로마 주교의 수위권 행사와 하느님의 교회 전체를 위한 그러한 직무의 행사를 다시 수용할 의사와 희망이 있다.[61]
성공회-로마 가톨릭 국제 위원회(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62], 〈권위의 은사〉The Gift of Authority,[63] 1999

4. 성경에서의 단서

4.1. 마태오 복음서

<rowcolor=#000> 마태오 복음 16장 18-19절
18κἀγὼ δέ σοι λέγω ὅτι σὺ εἶ Πέτρος, καὶ ἐπὶ ταύτῃ τῇ πέτρᾳ οἰκοδομήσω μου τὴν ἐκκλησίαν καὶ πύλαι ᾅδου οὐ κατισχύσουσιν αὐτῆς. 19δώσω σοι τὰς κλεῖδας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ῶν οὐρανῶν, καὶ ὃ ἐὰν δήσῃς ἐπὶ τῆς γῆς ἔσται δεδεμένο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καὶ ὃ ἐὰν λύσῃς ἐπὶ τῆς γῆς ἔσται λελυμένον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64]
18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18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가톨릭 번역 개신교 새번역
가톨릭 교회는 이것을 교황수위권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적 근거 중 하나로 말한다.[65] 현대의 가톨릭 성서학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태오는 복음서 저자들 중 유일하게 교회론적 구상을 펼쳐 보일 뿐 아니라, 비록 두 번뿐이지만(16,18; 18,17) 명시적으로 교회(ἐκκλησία)라는 낱말도 사용한다. 두 차례 중 한 번은 메시아의 보편적 교회를 가리키고, 다른 한 번은 지역 공동체를 지칭한다. 교회는 미래에, 다시 말해 부활 이후 상황에서 갱겨나고 건설될 것이다. 이 적절한 시기가 엄격히 규정되어 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οἰκοδομήσο)".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은, '교회 창설 말씀'과 시몬이 예수에게 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의 결부다. 하늘 아버지의 계시에 힘입은 이 고백은 메시아 교회 안에서 모든 고백자를 결합시킨다. 이것은 합당한 고백인데, 그 제자가 행복하다는 엄숙한 선언에 의해서도 그런 고백으로 명시된다.[66] 에클레시아(교회)라는 개념은, 원 그리스도교의 신학 언어에 이미 주어져 있었고 특히 바오로가 자주 사용했거니와, 유다교 회당과의 경계 설정을 나타내는 데 적절했다. 마태오에게 에클레시아의 바탕은 신앙고백이지, (바오로에게는 추가적이되 중요했던) 율법에 대한 다른 입장이 아니다. 베드로는 합당한 신앙고백을 했을 뿐 아니라, 예수에 의해 세워져야 할 교회 안에서의 바위(반석) 구실도 떠맡았다. 전통적 표상 자료 안에서 바위에게는 이중 임무 ― 건물의 기초 바위 그리고 위협적인 '저승의 세력'의 폐쇄 바위가 되는 것 ― 가 귀속된다. 시몬은 온 인격으로 바위이니, 그가 고백한 믿음이 바위 구실을 넘겨받는게 아니다. 여기서는 개념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한 인간에 관해 말하고 있다. 견줄 만한 것으로 성전 바위에 관한 유다교의 사색을 들 수 있는데, 이 바위는 거기로부터 세상이 창조되었고 또 재앙의 권세들을 저지하는 지점으로 여겨졌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우두머리 조상들이 이 바위와 동일시될 수 있었다.[67] 바위인 시몬 위에 세워진 교회는 저승의 세력들에 대항할 수 있다. 이것은 종말 시기의 교회다. 이 약속은 전투적이다. 우리는 이 약속에 교회에 속한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라는 확언[68]보다는, 그들의 실존과 세상 시간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주어질 그들의 주님 그리스도의 보호가 표현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8,20ㄴ 참조). 시몬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르침의 보증(인)으로서의 바위다. 그래서 그는 책임을 지고 매고 풀 수 있다(16,19). 그는 처음으로 부름 받은 자요(4,18; 10,2) 예수를 알아보는 계시를 선사받은 자다. 그 옛날 엘야킴에게 그랬듯이(이사 22,22 참조), 베드로에게 열쇠 권한 ― 물론 하늘 나라에 관한 ― 이 넘겨졌다. 이 전권이 인간에게, 제자 시몬에게 유일회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주어졌다. 이 전권의 계승에 관해 마태오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18,18에 따르면, 메고 푸는 권한이 교회 안에서 계속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분도출판사, 2014, 244-245p
이렇게 예수의 생애와 활동은 더 큰 구도 속에 엮여 들었고, 이 구도로 시야는 눈에 띄게 넓어졌다. 마태오가 예수 이야기를 부활 후의 전망에서 서술하는 경향은 마르코보다 더 뚜렷하다. 그는 '역사적' 예수를 '케리그마적' 그리스도와 결합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삶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에 따르면 예수께서 교회("나의 교회")의 기초를 놓으셨고, 반석인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마태 16,18; 참조: 18,17). 당신 교회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론적 인식이 이 복음서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에, 이 복음서를 '교회적' 복음서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분도출판사 2009, 145쪽

물론 이 발언에 "파스카 이후 교회의 자기 이해가 소급된 것인가"의 여부는 당연히 물어야 하며, 가톨릭 주석학에서도 당연히 이 질문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전략)이 삽입부분은 마태오가 수집한 것인데, 한때는 다른 배경에 속했던 자료를 여기에 삽입시킨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 자료를 수집한 것은 마태오가 아니고 전-마태오이며, 실제로 16,16b~19이 하나의 묶음으로 마태오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전-마태오의 배경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후-부활이라는 학설이 우세한데(후략)
-강한수, 「교회 안에서의 가르치는 권위와 무류성-미국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의 교회일치 대화(1980)에 대한 신학적 배경 연구」,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신학박사 학위논문, 2013, 66p
그러나 이 발언을 설령 예수의 역사적 발언이 아니라고 보더라도, 파스카 이후의 교회가 자기 자신을 그렇게 이해했으며, 그것이 정경 복음서인 마태오 복음서에서 표현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요한 복음서가 공관 복음서보다 '역사적 예수'와 거리가 있다고 해서 요한 복음서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수위권 교의의 합법상'이라는 면에서는 역사적 예수의 발언인가를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개신교에서 제기하는 가장 통상적인 반론은, 마태 16,18-19에서 말하는 반석(바위)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사도들이 공유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거나 혹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석학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반론은 지나치게 교파적이고 편협한 반박이다. W.F. Albright와 C.S.Mann의 앵커바이블 주해에서도, "마태오 16장의 바위는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이다"라는 식의 해석에 대하여, 분명한 증거를 무시하는 교파적인 해석에 불과하다며 일축하고 있다.
Rock(Aram. Kēphā). This is not a name, but an appellation and a play on words. There is no evidence of Peter or Kephas as a name before Christian TImes. On building on a rock, or from a rock, cf. Isa li 1 ff.; Matt vii 24 f. Peter as Rock will be the foundation of the future community (cf. I will build). Jesus, not quoting the OT, here uses Aramaic, not Hebrew, and so uses the only Aramaic word which would serve his purpose.
In this view of the backgrond of vs. 19, one must dismiss as confessional interpretation any attempt to see this rock as meaning the faith, or the Messianic confession, of Peter. To deny the pre-eminent posotion of Peter among the disciples or in the early Christian community is a denial of the evidences. Cf. in this gospel x 2, xiv 28-31, xv 15. The interest in Peter's failures and vacillation does not detract from this pre-eminence; rather, it emphasizes it. Had peter been a lesser figure his behavior would been of less consequence cf. Gal ii 11 ff.).
[바위(아람어. Kēphā). 이것은 이름이 아니라 직함이며 언어유희이다. 베드로 혹은 케파가 그리스도교 시대 전에 이름으로 쓰였다는 증거는 없다. 바위 위에, 혹은 바위로부터 건설을 하는 것에서 (cf. 이사 51,1 ff.; 마태 7,24 f.) 바위로서의 베드로는 미래 공동체의 기반이 될 것이다(cf. 내가 (…) 세울 터). 예수는 구약을 인용하지 않고 여기서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를 사용하는데, 그렇게 그의 목적에 봉사하는 유일한 아람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19절을 볼 때는 어떠한 교파적 해석도 떨쳐버려야만 한다. 이 바위가 베드로의 믿음라느니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이라느니 하는 시도를 떨쳐버려아만 한다. 베드로가 제자단 또는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사이에서 가진 탁월한 포지션을 부정하는 것은, 증거를 부정하는 것이다.(Cf. 마르 10,2; 14,28-31; 15,15.) 베드로의 실패와 흔들림에 대한 관심은 이 탁월함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한다. 베드로가 덜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그의 행위는 훨씬 덜 중요했을 것이다 (cf. 갈라 2,11 ff.).]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The Anchor Bible Matthew: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Doubleday & Company, Inc., 1971, p.195
There is no passage in the gospels which has been more discussed than this, especially with reference to vss. 17-19. The general sense of the passage is indisputable. (…) Jesus calls Peter fortunate, in that this knowledge has not come from human sources, but is a direct revelation from God. He goes on to assure Peter that he (Peter) is the rock on which the new community will be built, and in that community Peter's authority to "bind" or "release" will be a carrying out of decisions made in heaven. His teaching and disciplinary activities will be similarly guided by the Spirit to carry out Heaven's will.
[복음서들에서 여기보다, 특별히 17-19절보다 더 논쟁되어온 곳은 없다. 이 구절의 일반적인 의미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 예수께서는 이 지식이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의 직통 묵시에서 왔기에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다. 계속해서 그분께서는 베드로가 새 공동체가 그 위에 건설될 바위라고 학언하신다. 그리고 저 공동체 안에서 베드로의 "묶거나" "푸는" 권한이 하늘의 결정으로 수행될 것이다. 그의 가르치고 규율하는 활동은 하늘의 의지를 수행하는 성령에 의해서 유사하게 인도될 것이다.]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The Anchor Bible Matthew: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Doubleday & Company, Inc., 1971, pp.197-198
물론 언어적으로는 복음서가 베드로를 바위라 말하고 있더라도, 이는 오늘날 교회 전체가 공유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연루되어 있는 것은 맞는다. 이건 가톨릭 교회에서도 당연히 부정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교회의 근본적인 '바위'라는 것도 당연히 가톨릭 교회가 부정하지 않는다.
복음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반석과 열쇠라는 두 가지 상징적 핵심어(Bildworte)로 특징 지워진다. 두 단어 모두 구약에서 기원하지만 신약에서도 그 의미가 연결되는 단어로서, 복음이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님에 의해 설립된 제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우선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나 무조건 의지할 수 있는 토대라는 의미에서 특히 시편에서 빈번하게 야훼 하느님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분만이 내 바위, 내 구원, 내 성채. 나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시편 62,3). 그분의 거룩한 말씀은 모든 것을 내걸고 의지할 수 있는 말씀일뿐더러, 그분이 사람이 되셨어도, 그러니까 인간의 구원자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어도 그러하다. "그 바위(반석)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1코린 10,4) 예수님이 이 '반석'을 베드로에게 적용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더 이상 반석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반석에 베드로를 참여시키는 것이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18절)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말씀의 빛: 발타사르의 주인 강론 스케치』Licht des Wortes: Skizzen zu allen Sonntagslesungen, 김관희 번역, 인천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21, p.139
다시 말해서, 가톨릭적 의미에서 보더라도 시몬이 '바위'인 것은 근본적 '바위'인 그리스도에게 참여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위에서 스프리치의 책의 문장을 이미 발췌해서[69] 말했던 것처럼, 가톨릭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베드로의 권한은 피라미드 관료제의 군주 같은 의미가 아니다. 그런 교회론은 가톨릭에서도 주장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자신을 포함하여) 열두 사도가 똑같이 받게 될 그 동일한 권한을 개인적으로 받았다. (…) 이러한 측면에서, 베드로는 최고 사도가 아니라, 사도단이 공유하는 모든 것을 그 안에 개인적으로 재통합하고 있는 사도로서 드러난다." 언어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교황권을 강조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도, 교황의 무류성을 교회의 무류성이라는 맥락에서만 보았지, 교황이 교회를 지배한다는 식의 교회론은 주장한 적이 없다.[70]

아울러, 후대 교황들과 베드로의 계승관계는 신약에서 명시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부정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베드로의 권한이 2세대 3세대의 교회에서도 새삼 강조되었다는 점은 베드로의 직무 이야기를 단발성 일화로 축소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유럽의 가톨릭·개신교 신학자 36명의 공저인 《Neues Glaubensbuch - Der gemeinsame christliche Glaube》에서는 ㄱ. 신약에서는 베드로의 직무상 특별함이 인정되고 있다는 점 ㄴ. 베드로 직무의 계승이 직접 명시되지는 않지만, 초대교회 1세대 뿐만이 아니라 2세대와 3세대 교회에서도 베드로의 직무상 특별함이 새삼 강조되고 있으며, 따라서 베드로직의 계속성과 현존성이 베드로 개인의 죽음으로 종료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현대 주석학의 연구결과로 우리는 베드로직에 관한 문제의 객관적인 사정 자체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① 신약성서의 중요한 구절과 전승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특출한 지위에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구절과 전승이이 발생한 것은 장소적으로나 연대상으로나 다양하며 , 사실상 신약성서가 발생한 모든 시대에 해당된다.
② 베드로의 특별한 지위는 그가 모범적인 제자라는 것만이 아니라 마태오 16,18에 의하면 <직무상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 이렇게 그에게 위임되고 그에 의하여 보증된 예수의 가르침은 지상의 온 교회에 대하여 유효하고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선언된다 . 베드로의 결정에 따라 하늘에서 도’ 즉 최후심판에 있어서도 결정이 내려진다"[71]. 베드로에게는 가르치고 지도하는 권한이 하나의 통일 원리로 부여되어 있다 . 그는 " 예수의 가르침의 보증인이며 권위 있는 해석자"이다.[72]
③ 가톨릭 신학이 난점으로서 인정해야 할 것은 신약성서에 베드로 직무기능의 계승에 대하여 명언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동시에 거꾸로 보면 그런 계승자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이 문제는 역사상 단 한번 베드로에게 맡겨진 유일한 직분 문제일 뿐이며 베드로 자신이 죽음으로서 그의 〈직무〉 기능도 사라졌다는 것 역시 단정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다. 신약성서 자체에서도 분명히 알아 볼 수 있둣이 베드로에 관한 전통들은 비단 교회 창설기에만 (예컨대 사도로서의 직무와 관련해서) 의의와 타탕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상 교회 창설기 후의 제2·제3 세대에도 〈베드로〉의 〈직무상의〉 중요성이 새삼 긍정되었다. 에컨대 요한 21과, 베드로의 이름으로 (그러나 후대에) 교회 내에서 회람되던 두 편지가 이를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이미 신약성서 내에서도 〈베드로직〉의 계속성과 현존성 문제가 존재했다."[73]
-Johannes Feiner - Lukas Vischer 등 공저, 《새로운 공동신앙 고백서 - 하나인 믿음》Neues Glaubensbuch - Der gemeinsame christliche Glaube, 이경우·정한교 번역, 분도출판사 1979, p.615[74]

종합해서, 현대적인 성서주석학 및 일치 대화들의 시선에 의거하여,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마태 16,18-19에서 바위(반석)는 분명하게 시몬을 가리킨다.
  2. 교회의 근본적 바위는 분명하게 그리스도이다.
  3. 신약은 베드로와 후대 교황의 계승관계를 명시하지 않지만, 베드로 직무는 2세대, 3세대 교회에서도 새삼 강조되었다.

4.2. 마르코 복음서

개신교 성서학자들은 네 복음서 중 최초로 쓰여진 마르코 복음서가 베드로의 무지함을 강조하는 걸 지적한다. 우선 베드로 수위권의 주된 근거가 되는 마태오 복음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평행을 이루는 마르코 복음 8장에서는, 베드로의 고백 바로 다음 구절에서 베드로의 무지함을 강조하고 '사탄'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한다.[75]
<rowcolor=#000> 마르코 복음 8장 27-33절
27 Καὶ ἐξῆλθεν ὁ Ἰησοῦς καὶ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εἰς τὰς κώμας Καισαρείας τῆς Φιλίππου· καὶ ἐν τῇ ὁδῷ ἐπηρώτα τοὺς μαθητὰς αὐτοῦ λέγων αὐτοῖς· τίνα με λέγουσιν οἱ ἄνθρωποι εἶναι; 28οἱ δὲ εἶπαν αὐτῷ λέγοντες [ὅτι] Ἰωάννην τὸν βαπτιστήν, καὶ ἄλλοι Ἠλίαν, ἄλλοι δὲ ὅτι εἷς τῶν προφητῶν. 29 καὶ αὐτὸς ἐπηρώτα αὐτούς· ὑμεῖς δὲ τίνα με λέγετε εἶναι; ἀποκριθεὶς ὁ Πέτρος λέγει αὐτῷ· σὺ εἶ ὁ χριστός. 30καὶ ἐπετίμησεν αὐτοῖς ἵνα μηδενὶ λέγωσιν περὶ αὐτοῦ.

31Καὶ ἤρξατο διδάσκειν αὐτοὺς ὅτι δεῖ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 πολλὰ παθεῖν καὶ ἀποδοκιμασθῆναι ὑπὸ τῶν πρεσβυτέρων καὶ τῶν ἀρχιερέων καὶ τῶν γραμματέων καὶ ἀποκτανθῆναι καὶ μετὰ τρεῖς ἡμέρας ἀναστῆναι· 32καὶ παρρησίᾳ τὸν λόγον ἐλάλει. καὶ προσλαβόμενος ὁ Πέτρος αὐτὸν ἤρξατο ἐπιτιμᾶν αὐτῷ. 33ὁ δὲ ἐπιστραφεὶς καὶ ἰδὼν τοὺς μαθητὰς αὐτοῦ ἐπετίμησεν Πέτρῳ καὶ λέγει· 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σατανᾶ, ὅτι οὐ φρονεῖς τὰ τοῦ θεοῦ ἀλλὰ τὰ τῶν ἀνθρώπων.[76]
27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1827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9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0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31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바싹 잡아당기고, 그에게 항의하였다. 33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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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에서 마가는 예수의 첫 번째 수난-부활 예고를 언급한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한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침묵을 요구하지 않고 "드러내어 놓고"[plainly](8:32) 이 말씀을 하신다. 문맥에 따르면, 이것은 현재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예수의 고백이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여전히 예수의 고백과 베드로의 고백이 일치하며,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의 고백과 조화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 8:32에서 베드로는 예수의 고백에 뒤이어 그분을 꾸짖는다. 이제 이것은 오해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베드로가 예수의 고백에 뒤이어 그분을 꾸짖었다면, 베드로는 예수의 고백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며, 베드로의 그리스도 신앙고백은 고난 받는 인자로서의 예수의 고백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의 그리스도 개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예수의 그리스도 개념과는 모순된다.

예수와 베드로의 대결은, 우리가 마가복음에서 '꾸짖다'라는 단어가 귀신 축출을 뜻하는 전문 용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훨씬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예수께서는 일전에 더러운 영을 꾸짖으실 때에(1:25), 그를 귀신의 세력으로 취급하셨다. 마가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 번의 꾸짖음(8:22-10:52를 제외하고 3번으로 1:25; 3:12; 4:39을 말한다-역주[77])은 귀신과 관련된 배경을 떠오르게 하고, 두 등장인물이 서로를 사탄적인 인물로 대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 마가복음에서 베드로는 사탄적인 인물로 밝혀지는, 그것도 예수에 의해서 그 정체가 탄로 나는 유일한 사람이다.
베르너 H. 켈버, 『마가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 감은사, 2019, 75-79p; 이하 베르너 H. 켈버
심지어 예수님과 베드로(및 베드로가 대표하는 제자 집단) 사이의 이런 불일치는 마르코 복음의 결말 부분에서도 해소되지 않고 있으며, 마르코 복음의 원래 결말부분이었던 16장 8절[78]은 마르코가 제자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는 점을 입증한다고 보고 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16:7). 마지막 어구는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한다(14:28). 예언된 대로, 예수께서는 부활하셨고, 이제 갈릴리로 돌아가라고 호소하고 있으시다. (…) 하지만 그 여성들은 이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지가 이 여성들의 실패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고] 좌초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은 갈릴리로 되돌아가라는 신호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결고 알지 못했다. (…)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들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베르너 H. 켈버, 142-148p
해당 관점에서 볼때 마르코 복음의 이러한 서술은 베드로를 넘어서 예루살렘 교회 자체에 대한 마르코의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아울러 이러한 반대는 예루살렘 함락으로 인한 예루살렘 교회의 몰락으로 인해 예수의 예언이 실현되었다는 인식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종합하면, 열둘, 세 제자, 베드로, 예수의 가족, 갈릴리 여인들에 대한 마가의 전체적인 비판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확인되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비판 논리는 예루살렘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겨냥하기도 한다. 예수를 가장 가깝게 따르던 자들이 갈릴리 공동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를 버렸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대관식을 놓쳐버렸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예루살렘에 멈춰선 채 목적지인 갈릴리로 결코 돌아가지 못했다.(…) 마가의 이야기가 예루살렘 교회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 인정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가 감히 그럴 수 있었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 마가복음 독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은 예수 자신의 죽음에 관한 예언처럼 실현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마가복음이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파괴에 뒤이어, 예루살렘 교회의 몰락을 완전히 알게 된 다음인, 주후 70년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가가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예루살렘과 성전과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반대할 수 있는 이유이다.
베르너 H. 켈버, 152-156p

그러나 마르코가 베드로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것은,그것은 베드로 개인의 인품에 대한 대한 복음사가의 단죄가 아니다. 이미 켈버의 해석에서도 전제하고 있듯이, '베드로가 대표하는' 제자단의 인간적 약점을, '대표로 베드로를 지목해서' 부각하는 것이다.

공관 복음서, 특히 마르코 복음서의 이해에 의하면, 파스카 이전엔 예수 주변의 그 어떤 인간도 메시아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선 마리아도 베드로(마르 8,31-33)도 예외가 아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해당 인물들을 나쁘게 말하기 위해 복음사가가 넣은 게 아니라, (예수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함을 강조하는 표현이다.[79] 베드로도, 예루살렘의 야고보도, 마리아도, 초대 교회에서 존경 받는 유명인사였고, 이러한 유명인사들이 인류의 무지를 대변하는 건 매우 효과적인 이야기 장치였다. 마르코가 특히 이런 관점을 강조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는 성경 전체가 공유하는 관점이다. 가령 루가 복음서는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루가 2,48)고 무지하게 예수를 질책하는 마리아를 소개하고,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가 2,49)라는 예수의 질책을 소개한다. 그렇기에, 앵커바이블 주석에선, 마르 8,27-30과 똑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병행구절을 해설하며 베드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The interest in Peter's failures and vacillation does not detract from this pre-eminence; rather, it emphasizes it. Had peter been a lesser figure his behavior would been of less consequence cf. Gal ii 11 ff.).
[베드로의 실패와 흔들림에 대한 관심은 이 탁월함을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한다. 베드로가 덜 중요한 인물이었다면 그의 행위는 훨씬 덜 중요했을 것이다 (cf. 갈라 2,11 ff.).]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The Anchor Bible Matthew: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Notes》, Doubleday & Company, Inc., 1971, p.195
그리고 마르 8,31-33과 똑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병행구절(마태 16,21-23)을 해설하면서는 이렇게 말한다.
Peter spoke for the rest in confessing Jesus as Messiah, and here he is their spokesman in protecting the need for the Messiah to suffer and to die.
William Foxwell Albright & Christopher Stephen Mann, 같은 책, p.200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베드로의 인간적 약점과 무지함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베드로가 1세대 교회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비판 받으니 그는 교회를 대표할 수 없다"라는 관점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한 현대 성서주석학의 연구 성과를 반대로 오독한 것이며, 오히려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 신약 저자들에게 당연했기에, 베드로의 인간적 약점이 부각된 것이다"라고 읽는 것이야말로 현대 주석학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서, 더 나아가서 신약 전체에 걸쳐서 나타나는 베드로의 약점들은 그가 대표하는 '교회'의 약점이다.

4.3. 베드로의 특별성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오늘날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이 널리 성서 해석학자들에 의하여 인정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가 부활의 최초의 목격자였다(1고린 15,5; 루가 24,35)는 사실에 의하여 확실히 열두 제자 중에서도 특별히 뚜렷한 존재였다. 그는 최초의 부활 증인이라는 점에서 교회의 반석이라고 볼 수 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동체 내에서 영도자였다. 즉, 사도회의 때까지 적어도 사실상 최초의 공동체와 흩어진 그리스도 신자들(diaspora)을 지도했다. 이것은 베드로와 바울로 사이에 이루어진 유대인과 이교도 선교의 분담에 관한 공식 합의가 확인되어 있는 갈라디아서 2,7-8에 의하여 증명된다. 이미 복음서에서도 루가는 마르코와 마태오에 비하여, 베싸이다에서 나고 가파르나움에서 결혼한 어부 시몬을 참으로 인간다운 모습으로 이상화하려 하고, 사도행전 1-12장에서도 이상화 경향이 드러나지만, 그런 점에서도 베드로가 최초의 선교 활동에 있어서 신생 공동체의 실력자였다는 것만은 확실히 인정될 수가 있다. 그리고 베드로의 신학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 역사적 근거 자료를 마르코 복음이나 ―파피아스(Papias)의 기록에 의하면 마르코가 베드로의 통역이라고 했으나 신빙성이 없다― 베드로의 이름으로 나온 편지들에서 찾기는 어렵고 바울로의 편지들과 사도행전을 참작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점에서도 그만큼 더, 베드로가 유대인 그리스도 신자들의 대표자였으며 바울로의 이교도 선교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열두 제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베드로에 대해서만 예루살렘 밖에서도 선교 활동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어 있다. 그가 안티오키아에 체류했다는 것은 갈라디아 2,11-12(사도 15,7 참조)에 증언되어 있고, 고린토에도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1고린 1,12 참조). 확인된 여정과 정확한 연대는 물론 없다. 이 모든 것은, 자료를 근거로 해서 초대 교회의 베드로의 지위에 관하여 인정해야 할 최소한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4), 176-177쪽

로마 주교가 베드로를 계승했냐는 질문과는 별개로, 최소한 베드로 당사자는 나머지 제자들과 비교할 때 특별히 뚜렷한 존재였다는 것은 널리 인정 받고 있다. 또한 같은 책에 의하면, 교회 내에서 한 개인의 봉사 수위권이[80] 비성서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가톨릭의 논증이 결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교회나 개신교의 신학자도 한 가지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교회 내의 한 개인의 봉사 수위권이 성서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그 타당성의 근거야 어디에 있든 그런 봉사 수위권이 성서에 의하여 배제될 근거는 없다. 처음부터 비성서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 아마도 정교나 개신교 신학자들도 시인(是認)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 봉사 수위권이 성서에 기초를 두고 행사·수행·처리되는 한 '성서적일 수 있다고. 이것은 젊은 루터에서 멜랑크톤을 거쳐 칼뱅에 이르기까지 대개의 종교 개혁자들이 시인한 바이거니와, 오늘의 정교회와 개신교의 많은 신학자들도 시인할 것이다.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4), 184쪽

4.4. 베드로와 바울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베드로와 바울로의 관계이다. 신약에서 말하는 베드로와 바울로 사이에서는 꽤 복합적인 관계가 보인다.

4.4.1. 바울로 서간

개신교에서는 바울로 서간에서 베드로의 지위를 다른 사도들과 병렬적인 것으로 보는 입장이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갈라디아서 2:9절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순서 주의)을 '기둥과 같은 사도'로 묘사하여 이들을 새로운 성전의 기둥들로 이해하는 입장을 보인다.[81] 아울러 바울로가 베드로를 케파로 부르는 것은 오히려 베드로라는 이름의 그리스어 형태에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라는 의미를 환기시키기 때문에 이를 피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82] 아울러 바울로는 그가 개척한 교회에서는 최고 권위를 가진 수장으로 자리잡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교회들에서는 후대의 교회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제도화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교회들의 조직에 관해서는 어렴풋한 윤곽만이 알려졌을 뿐이다. 바울은 명맥히[83] 그 수장(首長)이었으며, 그의 동역자들이 바울의 권위를 세우고 교리와 규율상의 단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들을 순회했다. 그러나 그 정확한 기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감독들과 집사들이 세워져 있었던 빌립보 교회를 제외하면, 이들 교회에서 사역하던 목회자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고린도전서 12장-14장과 같은 텍스트에 의하면, 영적인 은사를 받은 적지 않은 수의 신도들이 다른 형제들에 대해 예배와 도덕과 관련, 그 기능은 명확치 않으나 권위 있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바울과 그의 주요 동역자들이 사라진 이후에야 고린도 같은 교회에 상존(常存)하는 목회자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초기 기독교의 형성』,125p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바울로와 베드로의 관계가 (그리고 후대의 교황권이) 피라미드적 관료제라는 말을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바울로는 베드로에게 복종하지 않으면서도, 복음을 헛되이 선포하지 않기 위해서는 베드로를 필요로 한다. 바울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 삼 년 만에야 베드로에게 오는 등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직무상 이름인 게파로 베드로를 부르는 등 베드로의 두드러진 지위를 전제한다.
56년경 로마서가 쓰이기 전에 바오로는 소아시아의 갈라디아 교회에 준엄한 편지 한 통을 썼다. "사람들이 시켜서도 아니요,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죽은 이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느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나 바오로…"(갈라 1,1). 무엇보다 그는 하느님과 부활하신 분이 보낸 사도(Apostolos)로서 자신의 근본적인 권위의 의미를 강조한다. 그는 어떤 다른 지도자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어떤 사도에게서 파견된 자도 아니고 어떤 교회로부터 파견된 사신도 아니다. 그는 그들의 권위하에 있는 아랫 사람이 아니다. 물론 베드로와의 관계는 필요하다. 그것은 복음을 헛되이 선포하지 않기 위해서(갈라 2,2)이다. 그렇다고 그는 베드로에게 복종하는 관계에 있지도 않다.
-샤를르 페로, 《예수 이후-초대교회의 직무》, 가톨릭출판사, 2002, 84p
아무튼 바울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첫 번째 예루살렘 체류에 관해 매우 삼가면서 덤덤하게 언급한다(갈라 1,18-20). 거의 외적 정보들만 제공한다: 만난 사람들(자신의 논증에 중요한 인물들에 국한한다) 그리고 머문 기간. 필경 누이네 집에 묵었을 것이다. 바울로는 방문 목적을 단 한 가지만 밝혔으니, 게파를 만나서 알게 되는 것이었다.[84] 이는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설적으로, 이 구절이 사도행전에 들어 있다면,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길 비판적 주석학자는 분명 아무도 없으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바울로는 그 고참 사도를 (언제나 그렇긴 하지만) 그냥 부르는 이름 시몬이 아니라 직무상 이름 게파로 칭하는데, 이 이름은 사도들 동아리에서 베드로의 두드러진 지위를 나타낸다.[85] 아무튼 바울로는 베드로를 방문하여 서로 알기 위해 왔는데, 한편 그로써 베드로에게 자신이 부름받은 사도로서 그와 동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표현에서 바울로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을 읽어 낼 수 있다. 바울로는 자신의 사도직을 게파에게 보증받고자 하지 않았고, 그에게서 복음에 관해 가르침을 받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런 까닭에 바울로는 다마스커스 사건 이후 삼 년 만에야 게파에게 왔던 것이니, 자신이 고양되신 주님께 직접 복음을 위임받았음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85p
아울러 바울로 계통 교회에서 '직무'와 '카리스마'는 상호배제하는 의미가 아니며, 가톨릭 교계제도나 사도계승에 대한 반대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러한 독해는 텍스트 자체의 의미를 넘어서는 독해이다. 무엇보다도, 바울로 자신이 '사도'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고린토 교회의 혼란상을 조율하고 있으며, 그 어떤 주석학자들도 사도라는 '직무'가 초대 교회에서 가진 두드러진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코린토 교회에 대해 언급한 사실과 관련해서 보다 세부적인 사항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흔히 말하길, 이 교회는 공동체의 모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코린토 교회는 여러 어려움들을 갖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분열되어 있는 공동체였다[일부는 바오로파라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아폴로파, 또는 케파스파라고 불렸다(1코린 1,11-13)]. 또한 여기에는 공동체가 묵묵히 견디고 있던 근친상간 사례도 있었다(5장). 그리고 시민 법정에서 해결해야 할 소송 사례도 있었고(6장), 자유가 너무 쉽게 잘못 이해되기도 했다(6장). 이것이 바로 코린토 공동체의 실상이었다. 그래서 코린토가 다른 공동체들을 위한 모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이 사례는 바오로가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던 경우인데, 이는 그가 신앙 안에서 이 공동체를 탄생시킨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제기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권위를 십분 발휘했다. 그래서 이 문제들이 자유로운 카리스마적 방법으로 해결되도록 방치하지 않았다. 바오로는 공동체가 다양한 직무들이 성장하는 몸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에게 그러한 공동체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즉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또 어떤 이들은 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1코린 12,28-30), 모든 카리스마가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지향해야 한다고 그는 가르쳤다(1코린 12,1). 바오로는 공동체 회중을 위해서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무질서를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리스(Frieds)[86]는 과연 코린토 교회가 카리스마적인 공동체였는가에 대해 질문하면서, 만일 카리스마를 특별한 선물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그 공동체는 카리스마적이 아니었다고 대답한다. "카리스마적인 것이 어떤 구조나 명령, 규정, 권위 그리고 권리적 요소에 대한 배제로 이해되는 것이라면 코린토 교회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카리스마와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바오로는 티모테오와 티토(갈라 2,23; 2코린 2,13) 그리고 에파프라스(콜로 4,12 이하)와 에파프로디토(필리 2,25) 그리고 오네시모콜로 4,9)의 경우처럼 자신이 창립한 여러 공동체(1코린 16,10-11)에 파견한 자신의 협력자들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1서 5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애쓰며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이끌고 타이르는 이들을 존중하십시오."
호세 안토니오 사예스José Antonio Sayés, 《교회론》La Iglesia de Cristo, 윤주현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8, pp,206-207
바울로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호소하고 있으며 "어떤 구조나 명령, 규정, 권위 그리고 권리적 요소에 대한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는 제도도 권위도 없는 카리스마적인 공동체였는데 후대에 제도와 권위가 들어왔다"는 개인주의적 교회론은 '직무'와 '카리스마'를 상호 배제하는 의미로 오독한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 이 둘은 상호 배제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바오로는 고린토 및 다른 곳에서 처음부터 그리스도인 직무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바오로 위서의 전통은 그의 목소리를 계속 담아내고 교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예수 이후 ―초대교회의 직무》Après Jésus: Le Ministère chez l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2, p.195
예루살렘과 갈릴래아 그리고 안티오키아에서 시작된 말씀은 외관상 무질서해 보이는 가운데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그 말씀은 전방 위로 뻗어나갔으며 여기서 파생된 일탈 현상이 효과적인 실행을, 곧 위협하게 되었다. 이미 바오로는 고린토 교회에서와 같이 자신이 창설한 공동체 내부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직무의 무정부 상태를 진압하고자 하였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예수 이후 ―초대교회의 직무》Après Jésus: Le Ministère chez l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2, p.150
사실 바오로 계통의 서간들은 앞선 세대와의 직무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생생한 관심을 각자의 방법과 나름의 언어로 증언하고 있다. 바오로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후발 주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기초하여 미래를 올바로 준비하고자 노력하였다. 직무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늘 새롭게 전개되는 중개(仲介)의 다양한 자리에서 순례의 언어로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직무에 관한 사도 바오로의 건설적인 메시지는 망각되지 않고 각자의 상황에 적응되었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예수 이후 ―초대교회의 직무》Après Jésus: Le Ministère chez les premiers chrétiens, 백운철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2, p.100

또한 Franzen 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도적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는 어떠한 교회상을 나타내고 있을까? 사도행전과 바오로의 서간들은, 원시교회에서 처음부터 영적 '직무'가 교회 질서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로 간주되고 있었음을 명백하게 알려준다. 직무도 없고 법규도 없고 확고한 신앙의 구성도 없이, 자유로운 영적 활동에 의거한 온전한 카리스마적 체제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오로의 교회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다. (…) 직무는 특별한 봉사를 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되었던 카리스마와 대립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직무의 소유자가 동시에 카리스마적 소유자였던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2고린 8,23; 디도: 필립 2,25; 갈라 1,19; 1고린 15,7). 반대로 카리스마의 소유자들이 교회의 지도직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결국 바오로 자신도 성령의 소유자요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동시에 그는 직무의 소유자로서 새로 세운 그의 교회들이 세심하고 실제적이고 직무적이고 권위적인 엄격한 지도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냉정하고 객관적이었다. 카리스마들은 통상적인 교회 지도에 있어서 직무에 종속되어야만 하였다.
--August Franzen · Remigius Bämer · Roland Fröhlich. 《세계 교회사》.[87] 최석우 옮김. 27-28쪽
이 은사적 교회 모델을 어찌 평가해야 할까? 아니 도대체 하나의 모델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 바오로는 상황ㅡ코린토 교회의 경우 상황이 빌미가 되었으나 또한 상황을 넘어선다ㅡ을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바라는 대로 교회를 구상한다고 말해야 옳다. 이 구상은 이상적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구상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단순한 훈계적 관심을 넘어서는 모델(본보기)로서의 성격을 띤다.[88] 이 모델은 하나의 교회상을 얻도록 도와줄뿐더러, 신자 개개인이 전체 안에서 자기 위치를 보고 제 역할을 완수하도록 가르쳐 준다. 실천에 관해 말한다면, 바오로가 교회 안에서의 '기능 수행'을 전적으로 상황 자체에 맡겼다고 짐작하면 안 된다. 신자 개개인이 성도들을 위한 봉사에 기꺼이 헌신한(1코린 16,15-16) 것과 더불어, 바오로가 사도로서 편지와 대리인을 통해 직접 개입한(예컨대 14,26-33 참조) 것도 유념해야 한다. 은사적 교회 모델에서도 봉사 직분의 수행에서 위아래가 드러난다. 이 직분 수행은 거부당해서는 안 되며, 존경과 순종도 요구한다.[89]
--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이종한 옮김. 154쪽
아울러 '초기 가톨리시즘'(Frühkatholizismus, "초대교회의 특유한 가톨릭적인 형태")[90]과 관련하여, 개신교 신학자인 Ernst Käsemann은 "바울로사도를 '초기 가톨리시즘'의 창시자로 여기고자 한다. 왜냐하면 바울로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세계적인 선교를 할 수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1]"[92]

요약하자면, 바울로 서간은 바울로의 독립적인 활동을 보여주고 있지만 베드로의 두드러진 지위를 전제하고 있으며, 개인의 카리스마가 강조되고 있지만 이 카리스마는 '직무'와 '제도'를 배제하는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4.4.2.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

적어도 루가는(혹은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로에게 이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여기서 루가가 제시하는 바울로의 모습을 살펴보아야겠다. 루가는 역사를 당시 규준들에 따라, 그러나 신학자로서 서술한다. 루가의 바울로상은 그가 펼쳐보인 신학적 구상에 맞추어져 있어서, 역사상 바울로와는 거리가 있다.
아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울로가 루가에게는 여느 사도들처럼 진짜배기 사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는 열둘이니,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부터 예수 부활까지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들이다(1,21-22 참조). 루가는 사도 칭호를 이 열두 사람에게 국한하기 때문에, 바울로에게는 사도 칭호 부여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루가가 바울로와 바르나바를 사도로 칭하는 경우가 한 번 있는데(14,4.14), 사도 칭호를 좀 헐값에 내주었다고 하겠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사도들, 즉 교회가 선교 과업을 위해 가려내어 파견한 "사자들"(13,2-3),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들의 사자들이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467-468p
사도 개념을 폭넓게 이해·사용하는 경우 ―예컨대 루카 복음서 11,49나 바르나바와 바오로(순서 주목!)를 사도로 지칭하는 사도행전 14,14[93] ― 는 아주 드물다. 열두 사람 사도직이라는 강령적 의미에서는 바오로도 당연히 사도일 수 없다. 열두 사도는 바오로의 활동에 앞서 존재하는 일종의 제도다. 열두 사도는 사도회의와 거기서 내려진 결정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언급되는데(사도 15,22-23; 16,4), 바로 이 대목 이후에는 오로지 바오로의 선교 활동만 보도된다.[94] 열두 사도의 활동 장소는 예루살렘이다. 여기서 그들은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4,33; 참조: 2,43),교회 지도 직무를 맡았다(4,35 이하 5,2 등). 또한 필리포스의 선교 활동을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다(8,14).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갑자기 들이닥친 박해가 그리스도인들을 그 도성에서 쫓아냈으나, 사도들은 예외였다(8,1). 사도들은 그곳에 계속 남았다. 베드로는 리따와 야포의 교회들을 방문하고(9,32.43), 이방인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를 최초로 교회에 받아들였다(10,1-48). 이 일은 한편으로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적극적 선교 결정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15,7-11). 예루살렘은, 그러니까 루카 이부작의 전체 구도에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장소일뿐더러, 열두 사도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그들의 특출한 대표자다. 그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설교를 하고(2,14 이하)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방문하여, 성령에 부추겨져 이방인을 최초로 교회에 받아들인다. 갈라티아서 2,7.9에 따르면 루카는 사도회의에서 확증된, 베드로에게는 유다인 선교를 그리고 바오로에게는 이방인 선교를 할당한 결정을 알고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사도행전에서 이 결정은 베드로(그리고 다른 사도들)는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고, 바오로는 땅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사도 1,8 참조).
사도행전의 바오로상은 양면적이다. 한편 바오로는 열두 사도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 이 책 둘째 부분에서는 열두 사도의 과업을 이방인 지역에서 속행하는 권위 있는 증인이 된다. 물론 바오로상의 좀 더 상세한 규정에는 논란이 많다. 사도행전의 묘사는 저술 당시 교회 내의 분규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연구 경향이 있다. 이단적·영지주의적 동아리들이 바오로를 빙자하고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그의 자유와 독자성을 끌어댔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카는 이에 맞서 바오로를 대교회에 맞춰 넣으려는, 요컨대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사도행전을 저술했다는 것이다.[95] 이 역사적 배경의 재구성은 매우 가정假定적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신학적 관심사들이다. 또한 루카가 바오로 사후 약 30년이 지난 자기 시대 교회의 바오로상에 부합하는 바오로의 모습을 많이 전해 주고 있음을 셈에 넣어야 할 것이다. 바오로 활동의 방사력放射力은 과장되어 있다. 바오로는 총독과 임금들 면전의 탁월한 연설가(사도 24-26), 대단한 이적가(19,11-12), 아레오파고스에 등장하고 그 옛날 소크라테스처럼 아테네 아고라에서 철학자들과 논전을 벌이는 철학자로 나타난다(17,16-34). 바오로는 시종일관 그리스도인 2세대 사람으로, 그러나 사도들의 전승을 계속 교회에 전해 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사울/바오로가 열두 사도에게 결부되어 있음은 두 차례 예루살렘 방문을 토해 표현된다: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었다"(9,28; 참조: 11,30; 12,25).[96] 세 번째 방문의 목적인 사도회의에 바오로는 물론 참석했지만, 중요한 결정을 한 이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다: "그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 결정하였다"(15,22). 또한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 교회(15,2-3)뿐 아니라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15,22)의 사절 역할도 했음을 유념해야 한다. 부활화신 그리스도에 의해 종과 증인으로(26,16) 그리고 '이민족들의 빛'으로(13,47) 세워진 바오로는,교회일치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사도들과의 결속을 통해 자기 교회들에 보증한다. 역사상 바오로에게는 복음의 일치가 확실히 중요한 관심사였는데(참조: 갈라 2,1-2; 1코린 15,11), 루카는 자신의 바오로상에서 독자성과 자주성을 많이 깎아 냈다. 루카는 자기 교회들(예전 바오로 교회들의 영향권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이 예루살렘이라는 원천에 정향되어 있는 질서로서 구상된 교회일치를 받아들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분도출판사, 2014, 293-295p
부활후대에는 열두제자단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가 뒷전으로 물러난다.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는 그들이 지도 구실을 별로 취하지 않는다. 사도 6,2는 그렇다는 근거라고 보기에 너무 어렵다. 이제는 그들의 의미를 새로운 빛으로 보게 된다. 비록 1고린토 15,5.7에서는 아직 그들이 모든 사도와 나란히 거명되지만(이때 열두 제자는 모든 사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루가가 강력히 추진하는, 사도라는 이름을 열둘에 한정시키는 발전이 있다. 열두 사도로서 그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표준적이며 권위적인 증인들이다. 사도단 안에서 시몬 베드로는 이미 말한 의미에서 특별한 공식 증인testis qualificatus이 되고 또 따라서 그 위에 메시아의 교회가 건설되어야 할 바위가 된다. 부활전대 상황에 연결점이 있는 시몬 베드로의 이 빼어난 소임이 부활후대에서는 열둘보다도 먼저 그에게 몸소 나타나시는 부활자의 첫 발현으로 밑받침된다(1고린 15,5; 루가 24,34). 이 첫 제자는 두 번, 예수 활동의 시작 때와 십자가와 부활 후의 새 시작 때, 교회의 케파가 되었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분도출판사 2002, 253-254쪽

루가는 바울로를 진짜배기 사도로 보지 않으며, 열두 사도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쓴다. 바울로를 무작정 깎아내리지는 않지만 독자성과 자주성에 관해서는 깎아 내렸으며, 이는 설령 바울로의 역사적 자주성을 높게 잡더라도 후대의 교황권 논쟁에서 바울로를 단순한 반대 사례로 제시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오늘날 가톨릭에서든 개신교에서든 바울로는 사도라고 불리지만, "바울로가 그렇게 했다"는 "초대 교회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을 옳다고 봤다"와 별개의 명제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혼란의 중심에서 베드로의 자리는 루가의 시대에 기억되었던 바 그대로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사도행전에서 56회 거명되는데 열둘 중 으뜸가는 이가 지닌 준거적 중요성은 지대했다. 베드로는 으뜸자리를 지켰고 다른 사도들과 단연 구별되었으며 주님의 형제로서 그 중요성이 돋보였던 야고보와도 차별되었다(사도 12,17; 15,13 이하; 21,25). 베드로는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보고할 의무도 있었다. 그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선교한 내용을 예루살렘의 신도들에게 보고하여 묵시적인 동의를 얻어냈으며 아울러 성령의 결정을 전해주었다(사도 11,1-18). 영은 베드로의 선교 활동을 인증해주었으나 사도행전의 저자는 공동체의 암묵적인 수용도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오늘의 용어로 말해서 "수용의 기준"은 성령과 공동체의 인준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상황은 상당히 복잡하다. 확실히 루가는 열둘에 속하면서 지속적으로 "말씀의 봉사"에 기여하는 베드로의 준거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되 또 한편으로는 영의 주도 아래 파란 많은 선교 활동을 전개한 베드로의 사도적인 행위도 차별화하였다(11,12). 그러나 베드로에게 특징을 부여하는 것은 특정 공동체의 섭정이 아니라 교회 일치의 중심에서 그가 준거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이었다.[97] 이제 사도행전으로 다시 돌아와 사도 6,1-7의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이야기는 열둘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완성하고 직무의 계승을 보장하는 새로운 실행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샤를르 페로, 《예수 이후-초대교회의 직무》, 가톨릭출판사 2002, 208-209p

그리고 루가에 의하면 베드로는 나머지 사도들과도 구별되었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도 차별되었다.

또한 갈라디아서 2장의 이야기는 베드로와 바울로 사이의 논쟁 승패에 대해서도 명시하지 않는다.
주석학에서는 갈라디아서 2장 15-21절이 바울로가 게파에게 했던 항의와 관계가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나 그러한지가 논란되고 있다.[98] 물론 이 대목은 당시 실제로 했던 말의 복사본이 아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갈라디아의 거짓 선생들과의 투쟁에 의해 꼴지어져 있다. 그러나 율법의 행업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의 대비·대립은 이미 당시에도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실로써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향한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16). 바울로는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을 주장하고 있다.
게파는 무슨 생각으로 태도를 바꾸었던가? 바울로는 게파의 할례받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위선, 복음의 진리에서의 이탈을 비난했다(갈라 2,12-14). 이것이 바울로의 관점이다. 게파는 두 맷돌, 야고보와 바울로 사이에 끼었다. 바울로는 베드로의 두려움이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과 주님의 아우 자신 그리고 유대인 선교에서의 주도 역할 상실 가능성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그 밖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획책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정치권력자들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다.[99]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비판은 신학적 비일관성, 올바른 앎과 상충되는 행동을 겨냥한다. 게파는 유대인답지 않고 이방인다운 자신의 생활 방식을 통해 모세 율법은 구원에 본질적인 의의를 더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 확신을 이제 버렸던가? 그렇지 않았음은 거의 확실하다. 다만 그는 이 충돌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에게 부추겨져, 율법을 이스라엘 역사를 틀짓고 유대인의 고유성을 꼴지어 온, 유대인들이 언제까지나 보존해야 할 제도와 문화적 생활 공간으로 인정하려 했을 수 있다. 게파는 유대인 선교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에선 (게파를 인격적으로 모욕하기까지 한) 바울로와의 충돌을 결연히 감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게파는 바울로와는 달리, 기꺼이 타협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필경 그는 훗날을 위해 그런 타협을 바랐을 것이다.
이 충돌이 어찌 끝났는지 바울로는 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말이 낫다면, 그에 관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입 다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게파는 자신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여기서 승자와 패자에 관해 말하면 안 된다. 바울로는 안티오키아를 떠났고 (우리가 아는 바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일했고 사도회의에서도 자신과 함께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했던 바르나바가 그 충돌에서 자기편에 서지 않은 일이 바울로에게는 특히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르나바가 이방인들 가운데서의 선교 활동을 포기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마 바르나바야말로 제3의 길을 모색했던 것 같다. 충돌이 바울로에게 쓰라린 결과로 끝난 것이, 그가 바르나바 및 게파와의 결속을 영구히 깨버렸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훗날의 진술들, 특히 고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가 확인해 준다(1고린 9,5-6 참조). 무엇보다도 바울로는 고린토 전서 15장 1-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복음에서 자신이 게파와 다른 모든 사도 그리고 주님의 아우 야고보와 일치함을 확언한다. 바울로는 (사도회의의 합의에 따라) 이방인들 가운데서의 복음 선포에 온전히 헌신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와의 유대를 보존하고자 한 사도의 의지는 모금 활동을 통해 인상 깊게 입증되거니와, 이 일을 그는 자기 교회들에서 성심으로 수행했다(갈라 2,10).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159-161p

위에서 발췌한 그닐카는 바울로에게 "유리하게 결말이 낫다면, 그에 관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입 다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결국 갈라디아서의 사례를 후대 교황직 논쟁에서의 반례로 삼기엔 부적절함을 보여준다. 갈라 2,15-21은 실제로 했던 말의 복사본이 아닐 뿐더러, 이 구절은 바울로가 실제로 베드로에게 어떤 말투로 말했는지, 저자세였는지, 만약 자주적이였다면 베드로는 뭐라고 받아줬는지 등을 명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신교에서는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나 바울이 아닌 야고보의 지도력에 의존했다는 것이 암시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이 결정은 원래 제자들의 주요 대변인인 베드로에 의해서 내려지지도 않고, 사도행전 이야기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 바울에 의해서 내려지지도 않는다. 이 결정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의해서 내려진다.
분명히, 베드로(행 15:7-11)와 바울(행 15:12)도 이 논쟁에서 공헌을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야고보이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편을 들고, 교회가 취할 입장을 말로 표현하고, 그런 후에 바울, 바나바, 소수의 다른 사람들에게 이 결절을 바울이 복음 전도와 선교 사역에 종사해왔던 이스라엘 땅 밖에, 즉 디아스포라에 알려줄 임무를 부여한다.
크레이그 A. 에반스, 위의 책, 140p

그러나 이는 교구장 중심의 후대 교회 구조를 1세대 교회에 투사한 것으로, 근본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지적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자리를 야고보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100] 실제로 예루살렘의 상황에서 바오로가 야고보를 게파와 요한에 앞서 첫 번째 거명하였고(갈라 2,9)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사도 15,12-19; 21,18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수위권이 야고보에게 넘어갔으리라는 논증은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 또 그 시대는 말씀의 직무가 장소나 도시보다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경우처럼(갈라 2,7) 사회-종교적인 영역에 결부되어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랑 형식의 직무가 나중에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지역 관할권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리하여 말씀의 전달이 어디서나 가장 중요하였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그들의 이름을 빌려 쓴 위서에 이르기까지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보다 우위에 있었다(1베드 1,1 참조). 나중에야 비로소 디다케 시대에 이 유랑 예언자들의 활동이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에 밀려 사라지게 되었다(디다케 11,3 이하; 15,1).
-《예수 이후》 182-183쪽
후대의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는 교구장 중심의 체제이며, '가장 높은 교구장이 교회의 가장 높은 어른'이다. 그러나 1세대 교회는 교구장 중심 교회가 아니었으며, 교구장보다는 (사도를 포함한) 유랑 선교사가 더 높았다. 당장 AD 100년경 편집된 디다케에서도 교구장보다 유랑 선교사가 중시되며, 심지어 디다케는 시리아-팔레스티나 교회의 문헌이다.
디다케 교회에는 세 부류의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이 교회 저 교회로 돌아다니면서 전도한 떠돌이 은사자들(11장),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한 지역 교회에 정착한 붙박이 은사자들(13장)을 꼽겠는데 이들은 지역 교직자들보다 높은 초지역적 지도자들로서 사도들·예언자들·교사들이라고 불렸다. 이와는 달리 교우들이 뽑은 지역 교회 책임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곧 감독들과 봉사자들이다(15,1-2; 참조: 필립1,1)
『디다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정양모 역주, 분도출판사, 1993, p.96-97
그중에서도 특히 최협의의 사도(곧 12사도)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직무였다는 데는 가톨릭/개신교를 막론하고 별다른 주석학적 반론이 없다.[101] 1세대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오늘날 종종 모(母)교회로 불릴 정도로 매우 중요한 지역 교회였고, 야고보는 그 중요한 교회의 지도자였지만, 분명히 최협의의 사도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 야고보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개신교 학자들 역시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라는 점과, 사도회의 결론 연설(15,13-21)을 상기시키는 정도이지, 야고보를 일종의 교황 비슷한 역할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군다나 사도회의 결론 연설을 야고보가 한 것은, 베드로 수위권을 반박하는 사례가 아니다. 사도회의는 유다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계 그리스도인의 할례 논쟁이며, 그 결론은 본질적으로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크게 양보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전통적인 생각을 대표하는 야고보가 이 '양보'를 말하는 것이야말로 '합의'의 정신에 가장 부합한다. 만약 교회 지도자들의 단순 다수결로 정한 후 법적으로 강요했거나, 혹은 (바울로만큼은 아니지만 이 문제에서 개방적인)[102] 베드로가 유다계가 양보하라는 결론을 발표했으면 '합의'의 정신이 매우 우스꽝스러워졌을 것이다.[103]

물론 사도행전이 역사적 상황을 얼마나 정확하게 전하느냐는 의문은 있다.
우선 고찰할 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확장하는 이방인 선교 사이의 매우 심각하고 깊은 분열을 누가가 어떤 방법으로 은폐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히브리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의 내적인 분열을 단순히 행정상의 얽힘으로 묘사했으나 (행 6장) 실재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 사이에 할례에 대한 불일치는 심각했으나 예루살렘 회의에서 원만하게 만장일치로 해결을 보았다.(행 15장) 그렇지만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분명히 극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바(갈 2장), 바울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을 포함하여) 안디옥에서의 베드로 사이의 차후에 계속된 대결에 대해서, 또한 갈 1. 6-9, 5. 12, 그리고 빌 3. 2 이하의 격렬한 감정적인 폭발, 혹은 그 폭발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고후 10-13장에 나타난 바울과 팔레스틴 출신의 사도들 사이의 깊은 적대감에 대해서도 전혀 무지하다. 마찬가지로 행21장에 기록된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기사도 (기부금 전달을 위한) 그의 방문 목적을 누가는 훌륭하게 묵살해 버리며 바울과 예루살렘 지도력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가장 지독한 불화의 내용을 베일로 가리고 있다. (…)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것으로 보이는 설교들의 특성도 사도행전 전반부에 나타난 설교들과 매우 흡사하며 바울적인 특징을 전혀 포함하지 않고 있다.(참고. 특히 2.22-40과 13.26-41을 대조할 것)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보아 누가는 거의 자신이 다루려고 했던 일화들과 분야들에 대해서 조차 편견이 없는, 그리고 매우 세련된 영상을 얻지 못했다. 누가가 이런 세부 사실 모두를 혹은 대부분을 창안했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으며 또한 우리는 바울이 자신과 예루살렘 교회 사이에 대두된 문제들을 다루는 태도가 완전히 객관적이며 공정하다고 추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바울의 태도가 일방적이라면 누가의 태도도 분명히 그러할 것이다. 기껏해야 누가는 원시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통일화된 영상속에 스스로를 안락하게 조화시킬 필요성을 느꼈던 것 만큼이나 바울의 인격과 논박의 날카로운 국면을 제해버렸다.
제임스 던,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솔로몬, 2010, 550-551p. 이하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그러나 최소한 사도행전 15장의 본문을 근거로 교황수위권을 반박하는 것에는, 바로 그 사도행전의 본문 자체가 이를 재반박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도행전의 역사적 신빙성을 어떻게 보든 간에, 정주 교구장에 대한 유랑 선교사의 우위, 다른 직무와 구분되는 12제자의 우위, 유다계/이방계/요한계 전승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베드로의 중요성은 가톨릭/개신교를 막론하고 부정할 수 없다.

4.5. 요한계 교회

요한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며 요한계 교회에 전해진 전승의 주된 출처인 '애제자'[104]와 베드로의 관계에서 둘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애제자와 베드로를 특유한 방식으로 맞세우는데, 여기서 베드로는 온 교회와 관련되는 보편적 임무를 받았다고 해석된다. 애제자는 베드로와 달리 스승을 부인하지 않지만, 무덤에 먼저 도착했으나 베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며, 21장에서는 특히 베드로가 지닌 준거적인 기능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증언한다.
요한계 교회들의 역사적 상황을 알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포괄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은 이렇다: 이 교회들은 한 도시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대교회 변두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고유한 전승들을 발전시켜 나갔으나, 대교회 측 공동체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썼다. 이 교회들은 시리아 또는 동부 요르단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물론 에페소 가설도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105]
(…)
부활한 예수는 시몬 베드로에게 목자 직무를 넘겨준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21,15), :내 양들을 지켜 돌보아라"(21,16.17)라는 말씀은 양들이 목자 소유임을 강조하는 착한 목자에 관한 비유 말씀(10,11-14)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임무는 온 교회와 관련되는 보편적 임무이다. 양 떼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 제자에게는 단지 목자로서 보살피는 임무가 부과된다.
(…)
시몬 베드로가 포괄적 직무를 위임받았지만, 요한계 교회에서는 애제자가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계속 남아(살아) 있을 터였다.(21,22-23). 이 두 제자의 대비 ― 근본적으로 매번 이 둘과 예수의 삼각관계를 내포한다 ― 에서 시몬 베드로가 더 큰 권위를 지닌 자로 나타나지만,[106] 애제자와 예수는 더 친밀한 관계다.
(…)
요한 복음서는 왜 애제자와 시몬 베드로를 그렇게 특유한 방식으로 맞세우는가라는 물음이 남아 있다. 이 두 사람은 그동안 교회에서 권위자들이 되었는데, 애제자는 그의 공동체들의 국지적 영역에서 그러했다. 이 공동체들은 대교회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이 대교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썼음은 거의 확실한데, 방식은 이랬다: 한편으로는 시몬 베드로가 대표하는 대교회의 권위를 인정해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상응하여 자기네 대표자의 권위 또한 관철시켰다. 그 밖에 이 두 제자에게 모종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 예컨대 베드로는 직무를, 애제자는 카리스마를 대표한다[107] ― 것은 신빙성이 없다고 하겠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분도출판사, 2014, 403-411p
가장 놀라운 것은 시몬, 게파, 베드로라고 삼중으로 이름이 소개된 안드레아의 형제에 비교하여 요한 전승은 '사랑받는 제자'라는 익명의 인물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익명의 제자는 신도의 전형이 되어서 베드로를 비롯하여 다른 제자들을 능가한다. 요한 19,35에 의하면 그는 탁월한 의미로 참된 증인이며 신앙의 보증이다. 더욱이 베드로의 이미지는 요한 21,30-31의 결론 구절로 완결되는 요한 1장-20장의 내용와 25절로 끝맺음을 하는 요한 21장의 내용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21장은 요한의 색채를 가지고 있는 부록이다. 바로 이 점이 요한 공동체의 중심에서 베드로의 이미지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구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요한 1장에서 20장까지 베드로는 여러 번 등장하지만 공관복음에 비교하여 대조적인 이미지를 가진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를 처음으로 추종한 인물은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아였다(요한 1,40 이하; 6,8). 따라서 먼저 메시아를 발견한 이는 안드레아이지 나중에 예수와의 첫 만남에서 게파라고 불리운 시몬이 아니다(요한 1,42 비교 마태 16,16-18). 그러나 생명의 빵에 대한 담론이 야기한 어려운 상황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떠나간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의 지고한 신원을 고백하였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6,69). 이것은 루가 9,20에 의한 필립보의 카이사리아에서의 신앙고백과 유사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묘하게도 요한 6,69에서 사용된 어휘들은 마르 1,24에서 더러운 영들이 사용한 말들과 같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마르 1,24). 더욱이 베드로는 예수의 신원을 올바르게 고백한 첫 번째 인물이 아니었다. 요한 전승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신도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요한 1,34)이라고 고백하였다. 나중에 11,27에서 아마 아이러니의 정점으로 마르타라는 여인이 마태 16,16의 베드로처럼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게다가 요한은 베드로의 몰이해(13,8 이하)와 그가 세 번에 걸쳐 예수를 부인한 사실(13,36 이하; 18,18-27)을 강조하였고 다른 복음서들처럼 그에게 두려움에 대한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사랑받는 제자는 스승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으며 십자가 밑에서 함께 있었다. 그러나 풍미가 넘치는 요한 전승은 이 제자가 무덤에 먼저 도착했으나 베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였음을 상기시킨다(20,4 이하). 그리고 복음사가는 요한에 대해서만 "그가 보고 믿었다"(20,4)라고 덧붙였다. 분명히 첫 번째 요한 전승은 베드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나 마르코복음의 말미에서 그러했듯이 그를 참된 제자의 전형으로 만들지 않았다. 베드로가 비록 요한 전승의 중심에 자리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준거의 대상으로는 남아 있었다. 요한 전승은 익명으로 침묵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랑받는 제자에게 누구보다도 큰 비중을 두었으나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베드로도 함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편 베드로를 기준으로 삼는 이 움직임은 부록으로 덧붙여진 21장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번에는 시선이 누구보다도 베드로에게 주어졌다. 이러한 방향 선회는 의심할 여지없이 후대의 일부 요한계 공동체 내부에서 사고의 발전적인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복음서 상호 간의 많은 만남과 관계가 증거하고 있듯이 교회 간의 연대가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공관복음 상호 간의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소위 "공관복음 문제"는 교회간의 이러한 연결 고리를 잘 설명해준다. 예컨대 루가는 마르코에 의존하되 자신의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이를 수정하였다. 그리고 수눈사화의 경우 요한 전승과 루가 전승은 부분적으로 내용이 섞여 있다. 적어도 70년대부터 이들 교회는 오늘날의 용어로 교회 일치의 과정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사랑받는 제자가 설립한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처음에는 다른 교회들과 매우 달랐으나 당시에는 이미 사망했던 베드로(요한 21,19)에게 부여된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이제 이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게 되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80년대의 유다계 그리스도인 교회들의 확신을 반영하는 마태 16,17-19의 방식으로 요한 21장은 베드로가 지닌 준거적인 기능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전승에서처럼 바오로에게서도(갈라 1,18) 베드로는 여하튼 받아들여야 할 인물이었던 것이다.
(…)
베드로는 목초지를 찾아 앞장서서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처럼 양떼를 돌보아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
복음 전승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과의 관계를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예의 수위권" 내지 "사법권의 수위권"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관계의 표현들은 주석학에서 나온 언어도 아니다. 이 관계는 굳이 권력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보다 발전된 의미로 표명되었다. 이 관계는 실존적이고 표상적인 언어로 표현되었고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와 준거의 틀 안에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이 핵심적인 준거는 베드로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는 참되게 언표될 수 없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자는 이 준거적인 관계가 성서 안에서 확정된 과거의 표지만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에 대한 기억이 소멸해 가는 과정에서 베드로의 과거만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관계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 안에서 언표되어야 한다. 가톨릭 주석가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넘어서는 이 주제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 다만 그는 신약성서의 정보들이 공동체적 삶의 중심에서 이들이 갖는 중요성에 따라 말이나 글로 전해진 첫 전승들에 의해 얼마나 점진적으로 선택되고 기억되었는지를 강조한다. 여기에는 신약성서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중요성도 포함된다. 베드로에 대한 준거적인 기억이 솟아나는 과거가 이 으뜸가는 인물과 늘 엮어왔던 유기적인 관계의 존속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관계가 베드로에게 부여된 몇 가지 권한보다 훨씬 중요하다. 비록 초대 공동체들이 때로는 베드로가 남긴 흔적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베드로의 면모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베드로는 이 지고한 말씀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고 그는 신도들과 주님 간에 엮어진 관계에 늘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실제로 요한은 시몬이 게파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음을 상기시켜주고(요한 1,42) 갈라 2,9의 바오로와 함께 베드로의 이름을 아람어로 전해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한편 게파는 다른 돌들이 덧붙여질 건축물의 첫 번째 돌을 의미하지 않고 바위를 뜻한다. 물론 그는 엄격한 의미로 머릿돌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1고린 10,4; 1베드 2,8). 베드로는 굳건한 바위로서 그것 없이는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마태 7,24 이하) 건축물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베드로는 결코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성서의 제한되고 동시에 본질적인 이 영역에서 베드로에 관해 이처럼 주석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후대의 베드로 전승의 가치를 미리부터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마태오 교회 같은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입장을 처음부터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더욱더 아닌 것이다.
-샤를르 페로, 《예수 이후-초대교회의 직무》, 가톨릭출판사, 2002, 144-149p

요한계 교회에서는 베드로의 '사목적 위치'를 인정하였으나,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독자적인 전승의 자신들의 공동체를 대변하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더욱 우월하게 보았다. 다시 말해서, '직무를 대변하는 베드로'와 '카리스마를 대변하는 애제자'라는 두 개의 긴장되는 축이 요한 복음서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형태의 추종자들과 제자들에 대한 일련의 장면들로부터 요한 공동체가 적어도 두 형태의 그리스도인들, 곧 베드로나 아마도 공관복음서 전승에 비교할 만한 신앙을 가진 소박한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예수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발전시킨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나는 이 진보된 형태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바로 성령이 처음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그리스도인들을 이끌어 주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첫 번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명백하게 규정된다. 니고데모와의 토론 주제였던 예수에 대한 더 높은 이해는 단지 성령에 의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요한 해석학의 마지막 단계는 인간이 성령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가정한다.
게르트 타이센, 『복음서의 교회정치학』, 대한기독교서회, 2017, 202p
또다른 그룹은 열두 제자들로 구성된다(요 6:67), 이 그룹의 대변자는 베드로이다(요 6:68).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기를 거절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베드로와 열두 제자로 상징되는 보다 바람직한 그리스도인들의 목소리를 여기에서 듣고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

베드로와 열두 제자가 요한 공동체와 구별되는 한 그룹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108] (숨은 그리스도인과 부적절한 신앙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한)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는가? 그 질문의 해답은 베드로와 요한 공동체의 영웅인 사랑받는 제자 사이의 일관성 있는 의도적인 대조이다.[원주49] 그를 언급한 여섯 구절 중에 다섯 구절에는 사랑하는 제자와 베드로가 분명히 대조되어 있다. 요한복음 13:23~26에 의하면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고 있던 반면 베드로는 그에게 머릿짓을 하며 예수님을 배반할 자가 누구이지 알려 달라고 요청한다. 요한복음 18:15~16에 의하면 사랑받는 제자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예수님과 동행한 반면 베드로는 그의 도움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다. 요한복음 20 : 2~10에 의하면 사랑받는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가는 도중 베드로를 앞지른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본 것에 근거해서 믿게 되었다. 요한복음 21 : 7에 의하면 사랑받는 제자는 디베랴 호숫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본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그가 누구인지 말한다. 요한복음 21 : 20~23에 의하면 베드로가 사랑하는 제자의 운명에 관해 물을 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을 듣는다. 사랑하는 제자가 십자가 아래 있었다는 여섯 번째 구절(요 19:26 - 27)은 그 대조가 암시적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간 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요 16 : 32). 이와 같은 대조는 우연일 수 없다. 특별히 여러 장면에서 요한이 대조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사랑하는 제자를 덧붙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열두 제자들 중에 가장 유명한 제자를 그들의 영웅과 대조함으로써 요한 공동체는 베드로와 열두 제자를 공경하는 교회들, 곧 사도계 교회들과 자신을 상징적으로 대조하고 있다. 사도계 교회들을 다른 학자들이 '공교회'라고 부른다(2세기 교회는 점차적으로 오순절과 장로교가 상호 인정된 공동된 구조를 갖게 됨에 따라 보다 가까워지기 때문에 나는 이 용어를 선호한다).

사도계 그리스도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요한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들을 진단하는 장면(요 6 : 60 - 69)은 근본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사도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분명히 구분된다. 마지막 만찬 시에 열두 제자가 참석한 것(요 13:6, 14: 5, 8, 22)은 사도계 교회에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시는'자기 사람'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요 13:1). 그들의 조상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 중에 있으며(요 17:6), 그들이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기 때문에(요 17:4),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요 17 : 9,20),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요 20 : 19, 24, 21:2). 그들의 가장 유명한 대변자인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요 21: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복음서에는 일반적으로 이름이 밝혀진 제자들, 그리고 특별히 시몬 베드로가 사랑받는 제자와 비교될 때 보았던 바와 같이, 이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지각의 온전함을 구현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수난당할 때 그를 버리고 흩어졌지만(요 16:32),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아래에 남아 있었다(요 19:26-27).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한다(요 18:17. 25). 이것은 특히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범주인 제자도에 대한 요한의 강조 사항을 수용하기를 강하게 거절한 것과 동일하다. 그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예수님에 의해 회복될 필요가 있었다(요 21:15-17). 그와 같은 질문과 회복은 가장 뛰어난 제자인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의 경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의 생전(요 13 : 23)에, 그리고 그가 죽임을 당할 때(요 19:26 - 27)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었던 사랑받는 제자는 베드로가 아직 깨닫지 못할 때 빈 무덤에 남겨진 옷의 의미를 알았다(요 20 : 8-10). 그는 또한 베드로가 알아보지 못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요 21:7). 사랑받는 제자에 의해 대표되는 요한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자신들이 사도계 교회들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지각이 뛰어나며, 예수님과 더 가까이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레이몬드 E. 브라운, 『요한 교회의 신앙과 역사』, 한국장로교출판사, 2013, 93-96p

그러나 요한 복음서가 '베드로의 사목적 권위'와 '애제자의 카리스마'를 대변하였다는 것은, 두 신학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요한 복음서는 애제자의 카리스마에 더 강조점을 찍고 있지만, 위 발췌문에서도 말했듯이 기본적으로 베드로 및 사도들에 대한 관점은 호의적이며, 그 '긴장'이라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는 이전투구적 신학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애제자'와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에 귀를 기울이려는 선의의 경주에서 경쟁하며, 더군다나 사도 교회에서 베드로의 사목적 권위는 요한 복음서에 분명하게 전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요한계 교회에서 교계적인 권위는 사랑의 카리스마에 의해 상대화되어있는 것이지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요한 복음서의 강조점은 분명하게 사랑의 카리스마이지만, 그것은 사도적 권위을 비방하지 않고 단지 그 권위를 상대화시키는 것이다.
1) 베드로는 예수에 의해서 좋은 목자가 된다. 예수는 그에게 세번에 걸쳐 말한다. "내 양을 먹이라."(21:15-17) 베드로는 특정한 기독교 회중의 모범적인 지도자이다. Tourivetv와 ‘TouvLov' 이라는 단어는 베드로전서와 사도행전에서만 발견되지만, "목자"는 교회 지도자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엡 4:11; lgnatius, Rom, 9:1, Ignatius, Pbld, 2:1, 벧전 5:21, 행 20:281.) 의심할 것 없이 베드로는 한 공동체의 지도자로 임명된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 공동체에서 지도자의 자격으로 그의 "양떼"(21:15.)를 사랑해야 한다는 점과 그 공동체의 연합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21:11), 반드시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21:18f.)

2) 요한서신에서 우리는 권위를 주장하는 두 인물을 만나게 된다. 요한 2서와 3서의 저자인 장로 요한은 멀리 떨어져 있는 회중에 대해 권위를 주장한다. 그는 추천의 서신(요한 3서)과 교훈의 서신(요한 2서)을 각각 그 회중에게 보낸다.

3) 이 회중들 가운데서 요한은 디오드레베라고 불리는 반대자의 저항을 경험하게 된다. 그 사람은 "으뜸되기를 좋아하는"사람으로 성격화된다.(요 3:9) "장로"와 그의 적대자인 디오드레베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점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우리는 권위를 결여하고 있는 구조와 만나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친구이다. 모든 이들은 직접적으로 예수와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유일한 권위를 가진 단 하나의 인물들을 - 예수 자신이나, 베드로, 혹은 장로나 디오드레베 - 선호하는 경향과 만나게 된다. 요한 공동체는 일종의 '단일 권위적 사회적 환경(monocharismatic milieu) 곧 한 명의 권위적 인물을 요구하는 경향을 띠고 있는 사회적 환경을 갖고 있었다. 이 인물은 공식적인 권력 없이 충성심을 창출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유일한 권위를 채우기 위해서는 단지 단 한 사람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권위구조를 거부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단일 권위적인 성향을 발전시키는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제도화되어 연속성이 있는 권위 구조가 결여되면 카리스마적인 한 인물로 이러한 '부재'를 채워야 하는 필요가 생겨난다.

우리는 단일 권위적인 권위를 누린 인물 하나를 추가할 수 있는데,그는 바로 안디옥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이다. 그는 요한복음서가 처해있는 사회적 환경과 유사한 환경에서 살았다. 우리는 이를 요한복음서6:52 이하에 나오는 성만찬 본문과 이그나티우스가 같은 단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양자는 모두 "육"과 "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양자는 또한 같은 단일 권위적 성향을 공유한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여행하는 도중에 그가 방문한 공동체들이 수용할 수 있는 단일 주교권(moepiscopate)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이러한 경향을 부제(deacon) 및 성직자(priest)들과 같이 전통적인 권위 체계들과 연결하였다. 결국, 그는 세 권위 체계의 고전적인 모델을 발전시켰다. 위계 질서상 꼭대기에는 한 명의 주교가 있고, 이를 뒤따르는 장로(presbyters)와 부제 그룹이 있다. 예수의 권위 외에는 권위 구조를 거부하는 요한의 단일 권위적 사회적 환경이 단 한사람의 주교권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예수가 유일한 권위라면 그는 어떤 권위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거나 아니면 단지 단 한 명의 권위에 의해서 대체된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발전을 거부했을 것이다. 요한복음서 안에서 우리는 예수를 잇는 세 명의 계승자를 본다. 그들은 일련의 이야기에서 소개된다. 첫 번째는 보혜사( 14:16f.)이고, 다음에는 애제자(19:26f.), 그리고 마지막에는 베드로(21:15ff.)이다. 이 흐름은 위계 질서를 상징화한다. 예수의 진정한 계승자는 보혜사이다. 예수 자신이 첫 번째 보혜사이고, 성령을 "다른 보혜사로서 예고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네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6-17)

모든 그리스도인은 직접적으로 성령에게 접근한다. 그는 영원히 그들 안에 거주한다. 어떤 주교도, 어떤 위계 질서도 성령을 영원히 줄 수 없다. 두 번째 계승자는 애제자이다. 십자가에서 애제자는 예수가 그의 어머니에게 말한 바에 따라 마리아의 아들로 소개된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19:26f.)

애제자는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십자가 장면에서 등장하는 제자이다. 예수가 예언한 대로 다른 모든 제자들은 "흩어져서 제각기 자기 집으로 갔고, 모두 예수를 혼자 버려 두었다.(16:32) 이 애제자는 요한 복음서의 저자인데, 그는 예수의 중요성에 대해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복음서를 썼다. 애제자는 성령의 다스림에 대한 증인이며, 그 자신은 요한복음서 안에서 영원히 현존한다. 예수의 마지막 계승자로 소개되는 인물은 베드로이다. 그는 예수와 같이 양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목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애제자에게 종속되어 있다. 예수는 그에게 묻는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리고 이에 베드로는 대답한다. "예,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당신은 아십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질문을 두 번이나 더 반복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5-17) 예수가 세 번에 걸쳐 거듭 묻는다는 사실은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부인을 기억나게 한다.(18:17, 25, 27) 다른 모든 제자들은 예수를 떠났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예수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랐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부인했다. 요한복음서의 독자들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애제자가 더 우월하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를 떠나지도 않았고 그를 부인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 계승자에 대한 일련의 소개는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복음서 기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곧 예수의 가장 중요한 계승자는 성령이다. 성령은 기독교 회중 가운데 최고의 권위자가 된다. 애제자는 두 번째 권위를 상징한다. 이는 성서이다. 교회 조직(베드로와 같은 목자들)은 세 번째 권위인데, 이는 분명하게 예수와 성령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 성서에 종속된다. 요한은 성령과 성서로 기독교 회중 가운데 있는 권위자들을 통제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요한은 성령이나 성서(곧 그의 복음서)가 우월한 규범이며 통제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요한복음서가 교회의 권위자들에 대한 하나의 안내(guide)가 될 것이라 믿었다. 다른 복음서 기자와 같이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교회의 지도자로서, 아마도 어떤 공식적인 직분을 갖지 않은 채로 기록하였던 것 같다.
게르트 타이센, 『복음서의 교회정치학』, 대한기독교서회, 2017, 208-211p
만약 다른 전승과 구분되는 요한계 전승의 독특한 강조점들만으로 후대의 교계 구조를 '연역'할 수 있냐고 물으면 그 답은 회의적일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로 대변되는 권위적 교계, 혹은 사도적 교회는 요한계 전승과 신약성경 시대에 분열 없는 친교를 갖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사도적 권위에 대한 수용은 이미 요한 복음서 안에서도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사목의 베드로'(더 나아가, 오늘날 가톨릭의 주교)와 '카리스마의 애제자'(더 나아가, 평신도 사도직을 강조하는 오늘날 신학)의 긴장을 아무리 극단적으로 해석하더라도, 현재 우리에게 주워져있는 요한계 문헌의 최종 형태에서는 이것은 신학적 분열로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상호 인정을 지향하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요한신학은 당시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사도적 근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에서 강조되었던 직분과 제도의 중요성을 상대화시키고 있다. 은사의 다양성을 수용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호소했던 몸과 지체에 관한 바울의 표상과는 다르게, 요한의 포도나무와 가지들의 표상은 단지 하나의 논점을 강조한다 — 포도나무에 붙어 있거나 예수님 안에 거한다(만일 요한이 은사의 다양성에 관심이 있었다면 바울이 상징적으로 발, 손, 귀, 그리고 눈에 대해 썼던 것처럼 그는 가지들, 잔가지, 잎, 열매에 관해 썼을 것이다). 사랑에 근거한 제자도의 범주는 요한 공동체 내의 어떤 다른 구분의 중요. 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킨다. 그래서 잘 알려진 베드로와 장로의 목자 표상조차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라는 조건적인 질문 없이 소개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 이름이 밝혀진 사도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예루살렘의 야고보이다. 이들 모두는 60년경에 죽었다. 그 후 교회의 직분들이 사도들을 계승한 것임을 강조함으로 이들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가르침의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이들의 이름에 호소한 교회들은 사도들이 가르쳤던 바를 수정 없이 보존하고자 했다(행 20 : 28 - 30, 딛 1:9, 반 후 1 : 12 - 21).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의 문제를 알고 있는 제사복음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요 14:15 -17) 모든 사람들 안에 영원히 계시는 파라클레토스가 선생임을 강조한다. 그는 모두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요 16:13).

이그나티우스와 요한은 고 기독론과 성만찬의 문제에 있어서는 유사점들이 많지만, 교회론, 특히 교회 구조에 관해서는 각각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요한 공동체는 직분의 권위로 교리를 통제할 수 있는 권위적인 교회 직분들(장로-감독)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점에서 요한의 교회는 누가복음-사도행정, 목회서신, 마태복음에서 증거하는 교회들과는 차이가 있다. (…) 요한 그리스도인들이 파라클레토스의 특권들을 감독에게 부여하는 그와 같은 교회론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분명한 것은 이 교회론이 요한의 전승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점차 파라클레토스-교사에 의존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을 때, 요한 공동체는 더 큰 선을 위해서 마지못해 이 제도를 묵인했을 것이다.
레이몬드 E. 브라운, 『요한 교회의 신앙과 역사』, 한국장로교출판사, 2013, 99p,182-183p

4.6.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1980년 미국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회의 교회일치 대화에서는 다음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Any biblical and historical scholar today would consider anachronistic the question whether Jesus constituted Peter the first pope, since this question derives from a later model of the papacy which it projects back into the New Testament. Such a reading helps neither papal opponents nor papal supporters. Therefore terms such as "primacy" and "jurisdiction" are best avoided when one describes the role of Peter in the New Testament. Even without these terms, however, a wide variety of images is applied to Peter in the New Testament which signalizes his importance in the early church.
어떤 성서학자나 역사학자라도 오늘날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첫 교황으로 임명하셨는지에 대한 질문을 시대착오적이라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나중의 교황권 모델을 신약 성경으로 역투사하여 이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는 것은 교황권에 대한 반대에도 지지에도 기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위권'과 '재치권'이라는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의 베드로의 역할을 묘사할때 가장 피해야 한다. 그러나 이 용어들이 아니더라도, 이미지들의 넓은 다양성이 신약 성경에서 베드로에게 적용된다. 신약 성경은 그의 중요성을 초기 교회에서 돋보이게 한다.
There is increasing agreement that Peter went to Rome and was martyred there, but we have no trustworthy evidence that Peter ever served as the supervisor or bishop of the local church in Rome. From the New Testament, we know nothing of a succession to Peter in Rome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거기서 순교했다는데는 동의가 증가하고 있으나, 로마 지역교회의 감독 혹은 주교로서 봉사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신뢰할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신약성경에서는 로마에서의 베드로 계승에 대해 아무것도 알수 없다
출처

5. 성경 이외의 단서들

이 문단은 로마 제국 공인을 기준으로 그 전과 그 후로 나눈다. 이는 교황권이 그리스도교의 로마 제국 국교화 이후에 생겼다는 오해에 대해 반박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5.1. 서술에 앞서

초대 교회를 다루는 데 있어서 흔히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는 "그건 황제가 했다"는 식의 거론이다. 이 경우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콘스탄티누스 1세이다. 즉 세속 황제가 건드린 것이니 가치를 낮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단지 '제일 높으신 분이 황제였으니, 당연히 황제가 건드린 거 아니냐?'는 식의 시선은 지양해야 한다. 이를테면 최초의 세계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경우, 개최 자체는 '제국 신앙 통일'이라는 콘스탄티누스의 강한 의중이 분명히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의 신학적 담론들을 콘스탄티누스의 의중에서 찾기에는 무리가 많다. 콘스탄티누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통합된 신앙'이었을 뿐, 그 통합된 신앙이 무엇일지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정복자이신 최고 황제(Augustus)인 콘스탄티누스가 알렉산데르와 아리우스에게 고하는 바이오.
그대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충실하게 조사한 결과, 나는 그 원인이 참으로 사소한 것이며 격렬한 쟁점으로서는 너무도 부족하다는 점을 깨달았소. (…) 그러므로 이제 그대들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대들과 같은 하느님의 종이 드리는 충고를 받아들여 주기 바라오.
이 충고란 다름이 아니오. 실은 이런 질문을 제기한 것도 잘못이었고, 제기된 질문에 응답한 것도 잘못이었소. 법의 권위가 아니라 논쟁의 정신에서, 즉 여가를 오용하여 심심풀이처럼 제기한 논점은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만 제한해야 하며, 대중 집회에서 서둘러 발표하거나 경솔하게 대중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될 것이오. 그토록 숭고하고 난해한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오.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II, 64~72
나는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요를 전쟁이나 전투로 간주할 것입니다. 오히려 소요는 전쟁이나 전투보다도 진정시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소요를 적대시할 것입니다.

- 콘스탄티누스의 공의회 개막 연설

물론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동로마 황제들 중에는유스티니아누스 1세이라클리오스처럼 신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이 직접 논쟁에 뛰어든 경우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논쟁 속에서는 황제 역시도 '신자 A'일 뿐 세속적 권위로 "내 생각에 너희는 복종해야 한다"라고 밀어붙일 수 없었다. 오히려 헤라클리우스의 경우 그리스도론에서 '단의론'을 주장하다가 신학자들에게 잘근잘근 씹혀야 했다. 따라서 밀라노 칙령 이후의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무턱대고 '그건 다 황제 때문이다'라는 식의 우기기는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수위권 논쟁은 단순히 '누가 로마 주교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종결되는게 아니다. 당장 21세기의 가톨릭 교회에서도 교황(교도권 차원의 공식입장)과 신학적 노선이 다른 신학자는 널려있으며, 강경하게 교황과 논쟁하는 (그러면서도 파문은 먹지 않는) 신학자들도 널렸다. 또한 이 논쟁에서 각 종파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오해들 때문에 이 논쟁을 더욱 꼬이게 한다.

1번에 대해 반박하자면, 위에서 말했듯 신학 때문에 교황과 멱살 잡고도 파문되지 않는 건 21세기 가톨릭 교회에서도 널리고 널렸다.[110] 또한 위에서 예시로 든 헤라클리우스의 경우 다른 신학자에게 잘근잘근 씹히는 와중에 교황 호노리오 1세에게서 사적 서신으로 "단의론이 맞다"라는 답변을 들은 바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교황이 인정했다는 이유만으로 단의론이 채택된 경우는 없었고, 오히려 호노리오 1세는 후대의 가톨릭 학자들에게도 씹혀야 했다. 즉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수위권이라는 건, 세계공의회처럼 굵직굵직한 사안에 대해 사적이 아니라 공적으로 교황이 권위를 호소했을 때만 발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교황이 다른 사람과 멱살 잡아봤다고 가톨릭의 주장이 쉽게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2번에 대해 말하자면, 정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지역 교회의 독립성이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그것보다) 막대하다는 것이지, 교황이 주교 중에 으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며, 정교회가 즐겨 표현하는 '명예 수위권'을 '실권 없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결정하는 권리를 의미한다.

5.2. 로마 제국 공인 이전의 단서들

5.2.1. 클레멘스 1세와 초기 로마 교회

기원후 96~98년 사이에 코린토 교회에 분열이 일어났을 때[111], 코린토 교회의 관계자들은 그 중재를 위해서 로마 주교 클레멘스 1세를 찾아갔다.

이에 클레멘스 1세는 사도교부 문헌 중 중요한 두 작품 중 하나인 로마 주교 클레멘스 1세의 「코린토 교회에 보내는 편지」(Κλήμεντος πρὸς Κορινθίους)를 써주었고, 그로 인해 코린토 교회의 분열은 중지되고, 그 서간은 2세기 내내 정경처럼 받들여져서 필사되고 소아시아 지역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읽혀졌다.

이것은 교황의 수위권을 보여주는 역사적 문서에 남아있는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1) 형제 여러분, 우리에게 닥친 갑작스럽고 연이은 재난과 역경 때문에, 사랑하는 여러분이 바라는 문제와, 소수의 경솔하고 대담한 사람들이 그토록 무례하게 일으킨 (…) 불경하고 가증스러운 소요에 너무 늦게 주의를 기울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명예롭고 빛나는 이름이 (…) 크게 모욕을 당할 정도가 되어서 (…) 우리는 여러분의 의무를 상기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57) 그러므로 소요의 기초를 놓은 여러분은 순명으로 원로들에게 순종하고 참회를 위해 징계를 받으십시오…

(59)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들이 그분[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은 스스로 적지 않은 불운과 위험에 말려들게 될 것임을 알게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이 죄에 대해서는 탓이 없을 것입니다…

(63) 사실 여러분이 우리가 성령으로 기록한 것에 순종하고 이 편지로 우리가 평화와 화합을 위해 권장하는 대로 정당치 못한 질투에 전념하는 것을 끊어버린다면, 여러분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것입니다.
-클레멘스 1세, 「코린토 교회에 보내는 서간」[112]
만약 로마 주교의 수위권이 없다고 생각하면 예수를 직접 보고, 예수로부터 직접 뽑혔으며, 예수와 함께 생활했으며, 예수의 직접적인 증인인 사도 요한이 당연히 더 큰 권위를 가지고, 그에게 중재를 청해야 했을 것인데 코린토 교회 신자들은 요한이 아니라 클레멘스에게 중재를 청했다. 물론 사도 요한이 정말로 그때 살아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또다른 역사학적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이 편지의 작성 시기에는 베드로와 바울로를 직접 보고 교류한 사람들이 멀쩡히 살아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1세대 사도에게 교육 받은 교회들 사이에서 로마 교회의 특별한 지위가 편지 안에서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개신교의 반박은 이러하다. 당시 코린토는 로마의 관습과 로마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받았다. 여러 면에서 코린토 인들은 헬라 땅에 사는 로마의 임시숙소 (pied-a-terre)와 같으며, 로마에 살던 그리스도인들 역시 자신을 코린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느꼈다. 학자들은 로마와 코린토는 좋은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것은 1세기 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본문에서 클레멘스는 코린토 교회와의 관계를 동일한 경주장에 있으며, 동일한 싸움을 하고 있다 (클7,1)고 말하였으며 '우리' 라는 말을 매우 강조하여 7장에만 '우리'라는 말을 무려 8회나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해당 서신은 교황의 수위권보다는 코린토 교회와 로마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특별한 우애적인 관계임을 반영하는 표시로 해석가능하다.[113]

그리고 클레멘스는 위에서 강조 표시한 것과 같이 해당 서신에서 자신들의 뜻을 교도권에 따른 지시가 아닌 간청의 형식으로 표현하였으며, 자신의 가르침이 성령이 명한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로마교회만이 행사하는 권위가 아니었다.
1제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에 큰 소리로, 곧 하느님의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말에 따라 주교와 원로단 그리고 봉사자들을 존중하십시오.
2제가 몇몇 사람드링 분열할 것을 예견하고서 이렇게 충고했다고 함부로 말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서슬에 묶이게 하신 그분께서 증언하시거니와 제가 사람들을 통해서 이를 알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소리 높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교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성전으로 여겨 보호하십시오. 일치를 추구하십시오. 분열들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닮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 〈필라델피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7,1-2

또한 해당문서에서 저자는 어느 구절에서도 자신을 로마의 주교라고 명확히 밝히지 않으며 로마의 주교라고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은 이레네오이다.
이 서한을 쓰게 된 계기는 코린토 공동체에서 몇몇 신부가 부당하게 직무를 박탈당해 일어난 소요 때문이었다. 이 본문은 로마 교회가 다른 지역 교회를 걱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증언으로는 가장 일찍 쓰인 것이다. 저자는 어느 구절에서도 로마의 주교라고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로마의 주교라고 처음으로 언급한 인물은 이레네오이다. 저자는 로마 공동체 사제단의 최고 지도자인 것 같다.
덴칭거 32p

아울러 이 편지에는 단일 주교직이나 이를 위해 반드시 따르는 관할권에 대한 언급이 없다.[114][115]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클레멘스의 편지가 후대 교회의 법적인 수위권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단순한 '형제적 개입' 차원으로만 독해한다면, 이 서간은 이해할 수 없고 너무나 이상한 글이 되어버린다는 걸 지적한다. 그 누구도, 위에서 인용한 클레멘스의 어조가 이냐시우스의 어조와 동일하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뭐니뭐니 해도 이 문헌의 중요성은 로마 교회의 수위권을 둘러싼 민감한 문제로 말미암아 가장 두드러진다. 사도 시대부터 각 지역 교회는 책임자인 주교가 관리해 온 것이 관례였는데, 로마의 주교가 무슨 권리로 멀리 발칸 반도에 있는 고린토 교회의 문제에까지 개입하게 되었는가? 이 개입의 성격은 단지 이웃 교회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 동등한 지위의 교회가 ’형제’ 자격으로 행한 하나의 ’형제적 교정’(correctio fraterna)에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특별한 구속력과 책임을 지닌 어떤 권위의 행사라 할 것인가? "단일 주교직이나 이를 위해 반드시 따르는 관할권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이 편지를 로마 공동체의 수위권 요구에 관한 첫 증언이라는 견해는 옳지않다"(드롭너)는 지적을 무시할 순 없지만, 이 편지에 단순한 ’형제적 개입’ 차원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구절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예컨대 "우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은 결코 가볍지 않은 죄와 위험에 빠진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입니다"(59,1)는 표현이나 "우리가 성령의 감도로 적어 보내는 훈계에 순종하여 여러분이 시기의 불의한 분노를 근절한다면,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63,2)는 표현 말이다. 한 마디로, 이 편지가 엄격하고 법적인 의미에서 로마 수위권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바티폴)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헌이 지닌 단호하고도 권위있는 말투는 로마 교회가 ’아가페’의 차원에서 다른 모든 교회들에 대해 지닌 우위성과 책임을 의식하고 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2년 12월 1일, 이연학 신부(고성 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 수도원 원장)]

또한 클레멘스 시대의 로마 지역 교회가 집단지도체제이든, 단일 주교의 지도에 있든, 그것은 교황의 수위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이다. 분명히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는 단일 교황의 수위권을 강조하지만, 베드로와 후대 교황의 관계는 사도계승이 연결되었다는 점이 중요하지 중간에 집단지도체제가 있었느냐의 문제는 부차적일 뿐이다. 교황이 추기경단의 콘클라베로 선출된다고 해서 "단일 지도자가 없는 공백기간에 추기경들의 집단 투표에 의해서 선출되었으니 베드로의 계승자가 아니다"라는 논리를 펴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무엇보다도 추기경이라는 제도부터가, 로마 지역 교회의 단체적인 직함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대 추기경이 바티칸과의 이중국적을 가지는 이유도, 형식적으로 추기경은 로마 지역 교회의 성직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추기경단은 전세계 가톨릭에서 권위를 인정받는다.) 오히려 클레멘스 서간은 개인의 능력이나 카리스마가 아닌 '우리', 곧 '로마 교회'라는 제도적인 단위를 성령의 영감과 연결하고 있다는 점은 로마의 수위권을 함축한다.

로마 교회가 수위권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가톨릭측에서만 주장하는 교파적인 견해가 아니다. 루터교 신학자인 Adolf von Harnack는 초기 로마교회가 실질적 수위권을 지녔다고 해석하고 있다.
From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the Roman church was in a position of practical primacy over Christendom. It had gained this position as the church of the metropolis, as the church of Peter and Paul, as the community which had done most for the catholicizing and unification of the churches, and above all as the church which was not only vigilant and alert but ready[116] to aid any poor or suffering church throughout the empire with gifts.[117]
[1세기 말부터 로마교회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실질적 수위권이 있었다. 로마교회는 메트로폴리스의 교회로서, 베드로와 바오로의 교회로서, 교회들을 가톨릭화하고 통일하는데 최고로 활동하는 공동체로서, 무엇보다도 경계하고 경고할 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어떤 가난하고 교통받는 교회든 기부로 돕는 교회라는 점에서 이 위치를 얻었다.]
-Adolf von Harnack, 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118] James Moffatt 옮김 (Grand Rapids, MI: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395쪽

해당 책을 언급하며 가톨릭측 교회사 학자인 Ernst Dassmann은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도교화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코르넬리우스 주교는 로마에서 노바티아누스를 단죄하기 위해 '60명의 주교와 이보다 더 많은 사제와 부제가 참석한 대규모의 교회회의'가 열렸다고 전한다. 그는, 로마에서 열린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결의 사항에 동의한 주교들의 이름과 교회도 보고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에는 백 명 또는 그 이상의 주교 공동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6,43,1.21-22 참조).[119]
로마는 매우 일찍이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우위를 차지했다. 네로 황제 치하에서 처음으로 매우 혹독한 박해를 겪은 로마 공동체는, 『클레멘스의 첫째 편지』가 입증하듯이 빨리 복구되었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박해들로도 약화되지 않았다. 로마 공동체는 1세기 말부터 전 그리스도인에게 '실질적인 수위권'을 지녔다.[120]로마 공동체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세운 공동체로 여겨졌으며 곧바로 교회 신앙의 규범이 되었다. 2세기에 전통 신앙과 이단을 정확히 구분하기 시작했다면, 이는 특히 로마인들이 지닌 신앙의 척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사도신경」과 주교들의 '사도 계승'successio apostolica에 대한 고증은 로마 관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공동체는 신앙을 실질적으로 전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것 같지 않다. 로마는 곧바로 교회의 중심이 되었지만 선교의 중심은 아니었다. 로마 공동체의 매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2세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로마로 여행한 전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들의 목록, 곧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이레네우스, 헤게시푸스,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 아베르키우스, 마르키온, 발렌티누스, 사벨리우스, 테오도투스를 한 번이라도 상기해야 한다.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로마에 도움을 청했고, 로마는 조언뿐 아니라 능력에 따라 물질적 원조도 했다. 코린토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여러분에게는 모든 형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고 모든 도시에 있는 많은 공동체에 기부금을 보내는 관습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로마인인 여러분은 전승된 로마 관습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예부터 보낸 희사금으로 곤궁한 이들의 가난을 덜어 주었으며, 광산에 사는 형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주교 소테르는 이 관습을 철저히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식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하듯이 성도들뿐 아니라 (로마에) 오는 형제들에게도 (많은) 희사금을 나누어 주어 이 관습을 더 확대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4,23,10).[121]

실제로 코린토와 아라비아, 카파도키아, 메소포타미아 공동체에 행해진 기부금들은 잘 알려져 있다(381쪽 참조).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서론에서 로마는 '사랑의 연맹의 수좌'라고 쓴 표현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 배경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그나티우스는 이 낱말로 2세기 초에 로마가 재판 관할 수위권을 지니고 있다고 내세우는 것도 아니며, 원조를 받은 공동체들이 몇 세기 뒤에도 기억하고 있는 '사랑의 실천'caritas에서 로마가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줄곧 로마로 왔으며 로마 공동체는 이들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법적·규율적으로 확정되지않은 공동체들의 관계는 대부분 이러한 방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새 공동체들의 곤경과 근심거리에 관해 들었으며, 방문자들은 유명한 로마의 사도 공동체와의 친교communio를 진심으로 느꼈다. 그 뒤 그들이, 아마도 그들 공동체를 위한 희사금을 가지고 다시 떠나면, 로마 공동체가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사를 지내고 어떤 신앙을 고백했는지를 그들이 와보지 않고 이야기한 것보다 쉽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변두리의 소공동체들이 로마인들의 '사도적 권위'auctoritas apostolica에 관해 들어 알고 있는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따라서 의도적이든 않은 로마의 사랑 실천 행위는 교회일치를 위해 구심력을 지니는 운동에서 과소평가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로마가 훈령을 내릴 수 있다는 권한은 아직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로마의 주교 빅토르가 양보해야 했던 부활절 논쟁에서 입증된다(277; 340쪽 참조). 로마의 권리를 요구하는 신학적·법적 강구는 이른바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와 로마의 스테파누스(254~257)의 이단자 논쟁에서 시작했다. 이 논쟁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바위)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고 한 이 말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후대의 수위권론은 오래 전부터 로마의 실제적인 우위를 인정한 것보다는 교의적으로 이 약속을 실마리로 삼았다.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122]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410-412쪽

비슷하게, 역사학자 Jeffrey Burton Russell은 Harnack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e slow growth of papal influence began no later than ca. 95, when the church of Rome intervened to settle a dispute at Corinth, and as the Protestant historian Harnack observed, "From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the Roman church was in a position of practical primacy over Christendom."
[교황의 영향력의 느린 성장은 늦어도 기원후 95년에 시작되었다. 이때 로마교회는 코린토의 논쟁을 해결하는 데 개입하였다. 개신교 역사가 Harnack이 관찰했듯이, "1세기 말부터 로마교회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실질적 수위권이 있었다."]
-Jeffrey Burton Russell, 《Medieval Civilization》,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5, p.69

또한, 한스 큉에 의하면 적어도 로마와 베드로의 관계성은 부인하기 어렵다.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늦게 잡아도 레오 1세 때에 교회 운영의 수위권에 대한 로마의 주장이 ― 언제나 바로 동방에서 그것을 인정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은 어떻든간에 ― 확립되고 명시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머물렀고 거기서 순교했다는 것도 최근 가톨릭·비가톨릭을 막론하고 갈수록 많은 사학자들이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바티칸 성당 아래의 베드로의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가톨릭의 유능한 전문가들도 매우 회의적이다. 그러나 문헌상의 증언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클레멘스의 편지」(1,5-6)를 보면 베드로와 바울로(!)가 네로 시대에 로마에서 순교했을 개연성이 극히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베드로 전서 5,13의 "바빌론"이란 바로 로마가 아닐까?). 이 1세기 말의 로마인의 증언은 또 2세기 초의 소아시아인인 이냐시우스가 「로마에 보낸 편지」(4,3)에서도 확인된다. 95년경부터 분명하고도 이의 없이,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런 교회 정책적인 의향도 없이 고수되어 온 이 전통의 신빙성을 부인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4), 180쪽

신자 공동체, 곧 교회의 규모로 볼 경우 밀라노 칙령 이전의 로마 교회가 그리스-오리엔트 쪽보다는 소규모였을 정황이 크다. 그리스도교 문제로 소란스러웠던 곳은 그리스와 이집트, 소아시아 일대다. 로마 당국과 황제들에게 그리스도교란 동방 변경에서 등장하여 그리스 등 동방 총독들을 골치 아프게 하더니 로마 수도일대까지 들어온 배타적 종교였다. 당연히 박해도 중심지를 겨냥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절대 다수의 박해는 이집트와 소아시아, 그리스가 타겟이었다. 또한 성경에서도 초기 교회의 시작은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등 동방지역을 겨냥하고 있다.

물론 소아시아 교회들의 박해가 심했다고 해서, 로마 주교의 우위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의 진술이나 네로의 박해 등 로마 역시도 비교적 일찍 교회가 시작되었음은 종파를 막론하고 인정되며, 제국의 도성으로서 전체 교회의 특별한 관심을 로마 교회가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대체적으로 당시에도 로마 주교가 베드로의 후계자로 인정받았으며, 교회 규모와는 별개로 로마 주교가 주교들 중 우위성을 인정 받았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5.2.2.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

107년에서 110년 사이에 있었던 트라야누스의 박해로 순교되었다고 전해지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압송되는 되는 도중에 일곱 편의 편지를 썼다.[123] 그 중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Επιστολή προς Ρωμαίους)의 서두에서 이렇게 썼다.
Εγώ ο Ιγνάτιος, που ονομάζομαι και Θεοφόρος, στην ελεημένη από τη μεγαλειότητα του ύψιστου Πατέρα και του Ιησού Χριστού, του μοναδικού Υιού του, Εκκλησία, την αγαπημένη και φωτισμένη με το θέλημα εκείνου που θέλησε τα πάντα, τα οποία υπάρχουν με την αγάπη του Ιησού Χριστού του Θεού μας, που προΐσταται στη θέση της χώρας των Ρωμαίων, την αντάξια του Θεού, την αξιοπρεπή, την αξιομακάριστη, την αξιέπαινη, την αξία επιτυχίας, την επάξια αγνή και προηγούμενη στην αγάπη, αυτήν που ακολουθεί τον νόμο του Χριστού και φέρει το όνομα του Πατέρα, την οποία και ασπάζομαι στο όνομα του Ιησού Χριστού, του Υιού του Πατέρα, που σωματικά και πνευματικά είναι ενωμένοι με κάθε εντολή αυτού, τους γεμάτους από τη χάρη του Θεού χωρίς διακρίσεις και αποκαθαρισμένους από κάθε ξένο χαρακτηριστικό, είθε να δοκιμάζουν πάρα πολύ μεγάλη χαρά ενωμένοι άμεμπτα με τον Ιησού Χριστό, τον Θεό μας.

테오포로스라고 하는 저 이냐시오스가 로마인들의 지역에 앞서는 교회에 문안드립니다. 로마 교회는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와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 안에서 자비를 입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 교회는 우리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만물이 존재하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랑과 빛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는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존경할 만하며, 복되고 칭찬받을 만하고, 성공하며 정결합니다. 또한 로마 교회는 사랑에 앞서며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고 아버지의 이름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문안드립니다.[124]

위의 발췌 중 '로마인들의 지역에 앞서는 교회'에서 '앞서다'의 뜻을 가진 그리스어 προκαθημαι는 이냐시오가 막네시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쓰였다. 이때는 사도들의 "자리를 이어받은"(막네 6,1) 이들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권위를 가진 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특히 이냐시오는 비잔틴의 성인전이 그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겸손의 본보기로 보여준 그 어린이라고 하였을(마태 18.2-5) 정도로 굉장히 오래된 교부인데, 비록 이냐시오가 그 어린이라는 이야기는 논외로 한다 하더라도 1세기경의 교부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에 대해 분명히 알수 있는 지식은 전적으로 그가 쓴 7개의 서신에 국한된 것이며, 그에 대한 다른 일화는 전혀 역사적 근거를 가지지 않은 순전한 가공적 이야기이다.[125] 아울러 이그나티오스의 서신에서 나타나는 군주적 감독제 등은 당시 행하여진 관습을 묘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혹은 교회를 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수사적 권고로 해석된다.[126] 또한 로마인에게 보낸 서신에 로마의 1인 주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으로 당시 클레멘스 시기와 마찬가지로 단일 감독직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그나티우스 서신에서는 사도적 계승에 대한 가르침의 결핍이 두드러진다. 이그나티우스에게 있어서 직분자의 권위는 안수의 계승이 아닌 그들의 직분이 천상의 패턴에 대응하는 지상의 모형이라는 사실에서 나온다. 이러한 관점은 사물을 바라보는 플라톤주의적 방법에서 파생되며 사도와 감독단의 역사적 계승을 강조하는 권위에 대한 관점과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127]

'앞서다'라는 의미의 προκαθημαι가 포함된 표현 전체(prokathetai en topo choriou Romaion)는 일반적으로 "로마인들의 행정 구역에서 통할하는(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으로 번역된다. 이 번역은 이 지위가 로마 제국의 전 교회에 영향을 끼치는가 혹은 로마 교회의 관할 영역에 한정되는가를 명료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해당 구절을 "ho topos tes choras(지역의 지방적 환경)"이라는 표현에 따라 번역한다면 이 구절은 "로마 인들 지역의 지방적 환경에서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으로 직역할 수 있을 것이며 이 경우 해당 구절의 의미는 후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128]

또한 위 한국어 번역에서 "사랑에 앞서는(προκάθημένη τηϛ αγάπηϛ)"으로 번역한 부분의 αγάπηϛ를 교회와 동의어로 보는 해석이 있으나[129] 당시 로마 교회가 광범위한 사랑(자선)의 행위로 존경받았음을 나타내는 행위로 해석 가능하다.[130]

5.2.3. 리옹의 이레네오 주교

이레네오는 당시에 보이던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어떤 가르침이 참으로 사도적인지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원 사도의 교회들 안에 보존된 가르침을 조사해야 한다고 보았다.[131]

하지만 이 작업은 상대적으로 곤란하고 어려운 방법이었고, 그는 이것 말고 훨씬 더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말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로마 교회의 가르침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Ad hanc enim ecclesiam, propter potentiorem principalitatem, necesse est omnem convenire Ecclesiam, hoc est, eos qui sunt undique fideles, in qua, semper ab his, qui sunt undique, conservata est ea quae est ab apostolis traditio.

모든 교회, 즉 모든 곳의 신자들은 로마 교회가 지니는 특별한 우위 때문에 로마 교회와 일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교회 안에 전세계에 오는 신자들에 의하여 항상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전승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리옹의 이레네오, 거짓 지식의 폭로와 반박 ( Ἔλεγχος καὶ ἀνατροπὴ τῆς ψευδωνύμου γνώσεως, Adversus Haereses) 3,3,2

여기에 대하여 서로마 제국 내에서 황제의 지지가 있었던 덕분이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성 이레네오는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도 약 120년 전의 사람이다.[132] 콘스탄티노스 대제 이후 그리스도인 황제들과는 상관이 없는 인물이다. 동방교회에서 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정작 이레네오 주교가 동방 교회 출신이다.[133] 게다가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카르포[134]의 제자였다. 게다가 이레네오는 가톨릭의 성인일 뿐만 아니라 정교회 그리고 성공회의 성인이기도 하다. 이 사람의 저작인 <이단논박> 등은 초대교회 신학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 즉, '그냥' 주교도 아니고, 서방 교회 출신도 아니고, 당시에 황제가 밀어주던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동방 교회들이 탄압을 받았고, 피난하는 과정에 서적들을 로마로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며 성 이레네오가 주장하는 로마 교회의 우위적인 권위에 대한 반박이 아니다.

단, 동방교회 즉 정교회에서 성 이레네오의 이와 같은 서술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이레네오가 서술하듯이 로마 교회의 특별한 권위는 다름아닌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전승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제국의 수도라는 입지에서 비롯된 여러 혜택에서 기인한 것이다.[135] 동방교회는 여기서, 만약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전승이 변질된다면, 그 교회는[136] 권위를 잃게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정교회는 이러한 입장을 대분열 시기에 견지하여 로마 교회를 변질되어 권위를 잃은 교회로 간주하고 파문하였다.

5.2.4. 정경과 부활절 날짜의 확정

신약성경의 책들을 수집하는 것이 전승의 업적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학자들은 2세기 말경 사도성과 가톨릭성의 기준을 따르는 가운데 로마에서 신약정경이 확정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준이란 로마 교회가 지닌 고유한 가치와 권위의 힘을 바탕으로 다른 교회들을 통해 지속되어 왔던 기준을 말한다. 다시 말해 사도전승, 더 구체적으로 말해 성경의 정경을 확립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하는 로마 교회의 전승이 있었다.

부활절 날짜의 확정에 관해서는 성 빅토르 1세 교황의 역할이 중요했다. 빅토르 1세는 여기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발휘했다. 그는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로마가 견지해온 부활절 날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파문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교회가 동서로 분열되려는 듯한 사태의 심각성을 본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는 교황으로 하여금 좀 더 온화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했다.

이는 권위있는 행동일 뿐 아니라 분열된 교회들이 로마 교회의 규율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아시아 교회들은 각 지역의 전통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에 반기를 들었다. 특히 에페소 대주교 폴리크라테스[137]는 교황에게 편지를 써서 거부의사를 나타냈는데, 이에 빅토르 1세는 빡쳐서 정말 폴리크라테스를 보편교회의 친교에서 추방을 선언한다. 그러나 빅토르 1세의 행위에 대부분 주교들이 질겁을 했고, 심지어 리옹의 주교였던 이레네오조차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고 뜯어말려서 유야무야된다.[138]
성찬 공동체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친교communio는 부정적 대립 개념인 파문으로 대응되었다. 친교 서한을 교부할 권리를 지닌 주교는 공동체와의 관계를 거부할 수도 파기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조치는 무분별하게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친교 관계가 깨지면 사람들은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계속 따르기를 거부했으며, 그는 스스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 2세기 중엽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가 아니케투스와 부활절 날짜를 협상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을 때, 두 사람은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레네우스는 그들이 이룬 교회의 일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들은 공동으로 성찬례를 집전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5,24,17 참조). 로마의 주교는 소아시아 주교에게 성찬례를 주관하게 했으며, 두 사람은 평화롭게 헤어졌다. 후대에 로마의 주교 빅토르는, 소아시아인들이 부활절 날짜에 관한 그의 이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그들을 파문하려 하면서 더 완고하게 대응했다.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행 중에 로마에서 더 이상 손님으로 환대받지 못했고, 미사에 참석하지도 못했으며 서신을 주고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여러 교회회의에서 빅토르의 월권에 대한 저항이 매우 격렬하여 그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340쪽 참조). 빅토르의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이는 로마가 다른 공동체에 명령할 수 있는 우위에 있다는 로마의 권리를 드러낸다. 이론적으로 모든 주교가 동등하기에, 그들은 신앙에 대해 믿을 만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전권과 다른 주교가 이단에 빠졌음을 단언할 수 있는 전권을 지녔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각 주교좌가 특히 신앙에 관한 문제에서 두드러진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오랫동안 교회의 주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당연했다.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276-277쪽
부활절의 날짜 결정에 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에 많은 저술가가 관여하고, 교회회의가 열렸으며, 빅토르 주교(188~189)가 주도하는 로마 교회와 소아시아 교회가 거의 분열되는 수준에 이르렀다(277쪽 참조). 소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을 유대인의 파스카 축제를 본받아 니산 달 14일, 곧 춘분 다음 만월이 되는 날에, 그 밖의 교회는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거행했다. 그러나 '14일파'와 '주님의 날파' 사이의 논쟁은 단지 사소한 날짜 차이라는 문제만 아니라 축제 내용의 이해에 관한 강조점을 드러낸다. 사르데스의 주교 멜리톤의 『파스카 설교』(107쪽 참조)가 분명히 밝히듯이, '14일파' 제식은 참된 어린양인 그리스도로 구약성경의 파스카 축제를 회상했다. 이와 달리 '주님의 날파'는 무엇보다도 주간 첫날에 예수의 부활을 회상했다. 이 두 파는 자신들의 부활절 날짜를 지키면서도 상대방의 날짜를 인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가 로마의 주교 빅토르의 견해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아시아 교회와의 분열은 피할 수 있었다.
-같은 책, 340쪽

결국 부활절이 통일된건 훗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부활절을 통일하는 측의 의견에 힘을 실어준 이후다. 현재 가톨릭과 정교회의 부활절 날짜가 때때로 다른 이유는 가톨릭은 그레고리력을 쓰고 정교회는 율리우스력으로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이 때 동서분열이 일어날 뻔했다고 주장하나, 동방 교회들도 의견이 통일된게 아니었고, 당시 교회는 당시 영지주의자들, 즉 이단과 싸우는 것에 주력했다.

5.2.5.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 주교

치프리아노(210-258)는 자신의 저작 《가톨릭 교회 일치》(INCIPIT DE ECCLESIAE CATHOLICAE VNITATE) 4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139]
누구든지 위의 사실들을 검토·조사해 보려 하면, 길게 논란할 필요가 없읍니다. 신앙은 다음의 진리의 요약을 통해 쉽게 증명되며, 확신에 이를 수가 있읍니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또 부활 후에 그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고 하셨읍니다. 이렇듯이 주님은 그분(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에게 양들을 맡기셨읍니다.
모든 사도에게 동등한 권한을 주셨지만, 하나의 교좌를 세우셨으며, 당신 권위로 일치의 기원과 이치를 제정하셨읍니다. 베드로 역시 다른 사도들과 같은 사도였지만 베드로에겐 수위권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하나의 교회, 하나의 교좌가 드러나기 위함입니다. 사도가 모두 목자이지만 한마음으로 사목하기 위해 그 양떼는 하나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이 일치를 견지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신앙을 보존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겠읍니까? 교회가 베드로의 교좌 위에 세워져 있는데, 그 교좌로부터 떠나 있는 자가 어떻게 교회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읍니까? 주교권은 하나이며 각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부분을 통해 전체에 동참하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이지만 왕성히 성장되어 만방에 널리 퍼져나가는 것은 마치 태양이 많은 광선을 갖고 있지만 그 빛은 하나이고, 나무가 많은 가지를 갖고 있지만 견고한 뿌리에 기초를 두고 있는 그 둥치는 하나이며, 또 많은 개울물이 한 샘에서 시작되고 그 개울 수가 아무리 여럿이고 그 분출량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원천은 하나인 이치와 같습니다. 태양의 광선은 그 본체에서 떼어 보십시오. 그러나 빛은 본체와 일치되어 있어야 하므로 그런 분리는 생각할 수도 없읍니다. 나무에서 가지를 떼어 보십시오. 분리된 가지에서 싹이 트지 못할 것입니다. 샘으로부터 개울을 분리시켜 보십시오. 분리된 개울은 말라 버릴 것입니다. 이와같이 주님의 빛으로 충만한 교회는 세상 방방곡곡에 자기의 광선을 비춥니다. 한 빛이 곳곳에 퍼져 나가지만 본체와의 일치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가지들이 온 세상에 풍성히 퍼져 있고, 넘치는 개울들이 널리 퍼져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 머리는 하나이며, 그 원천도 또한 하나입니다. 낳아 주신 어머니가 한 분 계시나, 그 자손은 많습니다. 우리는 그 어머니의 모태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젖으로 양육되고, 그의 영으로 생기를 얻게 됩니다.[140]

위에서 보다시피 치프리아노는 베드로가 수위권을 언급했으며, 베드로를 향한 일치를 견지하지 않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251년 〈가톨릭 교회 일치〉와 거의 같은 시기에 씌어진 〈서간〉 48,3에서 치프리아노는 로마 교회를 "가톨릭 교회의 모체이며 뿌리"라 하였고, 1년 후인 252년 부활 축일 후에 씌어진 〈서간〉 59,14에서는 "주교들의 일치는 베드로의 교좌이며 으뜸 교회(인 로마 교회)에서 나온다"(Petri cathedram atque Ecclesiam principalem unde unitas sacerdotalis exorta est)고 하였다.

코르넬리오 교황이 자신이 교황에 선출되었음을 치프리아노에게 전했을 때, 치프리아노는 이 사실을 아프리카 교회의 주교들에게 서신으로 알림으로써 모두가 이 새 교황과의 친교를 유지하고 보편교회적 일치를 유지하도록 알렸음을 전하면서 교황에게 회신했다.

당시 카르타고와 북아프라카 신도들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는 배교자들의 처우였다. 로마 중앙정권은 북아프리카에는 비교적 종교적으로 노터치였는데, 치프리아노 시절 갑자기 대규모 박해를 시작했는데, 이때 배교자들이 무더기로 생겼다. 박해가 어느정도 가라앉자 배교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싶어했는데 이 때문에 교회가 둘로 쪼개진다.

심지어 이들을 받아주면 안 된다는 강경파들이 멋대로 노바시아노를 교황으로 선출하는 경악스로운 짓을 저지르고 이들을 받아줘야 한다는 온건파는 온건파대로 박해 도중 치프리아노가 피난간 틈을 타서 포르투나투스를 카르타고 대주교로 뽑는 짓거리를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절충안이 받아들여졌고 치프리아노는 카르타고 대주교직을 유지했으며, 멋대로 로마 주교(=교황)을 참칭한 노바시아노는 빡친 코르넬리오 교황에게 보편교회의 친교에서 추방당한다.

5.3. 로마 제국 공인 이후의 단서들

5.3.1. 343년 세르디카 교회회의

[라틴어 본문 번역]
오시우스 주교는 말하였다. 이건 또한 [그리스어본: 반드시 첨가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문을 닫아걸었던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한 관구의 주교는 동료들로부터 초청을 받지 않았다면 주교들이 있는 다른 관구로 갈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경우도 대비해 두어야 합니다. 어느 관구에서 한 주교가 그의 동료 주교와 논쟁을 하였다면, 두 주교 가운데 누구도 다른 관구 주교들에게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어느 주교가 한 사건에서 단죄되었고, 다시 한번 새로운 판결이 내려져야 할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것을 여러분이 찬성한다면, 지극히 거룩한 사도 베드로의 기억을 영예롭게 합시다. 곧 소송을 조사한 이들이 이웃 관구에 있는 주교들은 로마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로마 주교가 재심을 내려야 한다고 판단한다면, 재심이 이루어져야 하고, 재판관을 임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소송이 이미 다루어진 것을 다시 제기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면, 그가 내린 결정은 확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모두 찬성하십니까? 교회회의는 "찬성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우덴티우스 주교가 말하였다. 그것에 여러분이 찬성한다면, 여러분이 내린 전적으로 거룩한 이 결정에 다음과 같은 사항이 첨가되어야 합니다; 곧 어느 주교가 이웃한 곳에 있는 주교들의 판결로 면직되었지만 로마 시에서 소송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고 표명하였다면, 면직된 자로 여겨진 이의 항소에 따라 로마 주교의 판결로 소송이 종결 되기 전에, 어떤 다른 주교를 바로 그 주교좌에 결코 임명해서는 안됩니다.
오시우스 주교가 말하였다.
그러나 어느 주교가 고발되고, 소집된 같은 지역의 주교들이 그를 단죄하고 면직시켰다면, 그가 로마 교회의 지극히 복된 주교에게 항소하고 피신하였고, <로마 주교가>그를 받아들여 조사가 다시 이루어지는 것이 정당하다고 여긴다면, 그는 경계를 접한 이웃 관구의 주교들이 이 모든 것을 양심적으로 조사하고 그들의 신앙에 진리로 여겨지는 것에 따라 결정하도록, 주교들에게 서한을 써서 보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주교가 자신에 관한 소송에서 다시 한번 판결을 듣고자 요구하고, 그의 청원으로 로마 주교 측에서 신부를 파견하게 한다면, 로마 주교가 바라고 옳다고 여기는 것은 그의 권한에 달려 있어야 합니다. 로마 주교가 주교들과 함께 판결해야 하고 그들을 임명한 주교의 권위를 지닌 이들을 파견해야 한다고 결정하면, 그것은 그의 뜻에 따라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이 소송을 종결짓기 위해서 주교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의 가장 현명한 의지로 결정한 것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어 본문]
오시우스 주교가 말하였다. 이것 또한 반드시 첨가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문들을 닫아건 듯한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 주교들 중의 어느 누구도 동료로부터 초청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관구에서 주교들이 있는 다른 관구로 갈 수 없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경우도 대비해 두어야 합니다. 어느 관구에서 주교들 가운데 한 주교가 자신의 형제이며 동료인 주교와 논쟁을 하였다면, 두 주교는 누구도 다른 관구의 주교들에게 심판관으로 도움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교들 가운데 어느 주교가 한 사건에서 단죄되고, 그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타당한 동기에서 한 일이기에, 다시 한번 새로운 판결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밝혀지면, 그것이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올바르다고 보일 경우, 사도 베드로의 기억을 영예롭게 합시다. 그리고 판결을 내린 이들은 로마의 주교에게 서한을 보내야 합니다. 이는 필요한 경우 이웃 관구의 주교들에 의해 새로운 재판이 열리고, 그가 심판관을 임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의 소송이 재심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으면, 한번 내려진 판결은 파기되지 않고 기존 <판결>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가우덴티우스 주교가 말하였다. 이것이 그대에게 옳다고 여겨지면, 그대가 찬성하였고 전적으로 순수한 사랑인 이 결정에 다음과 같은 사항이 첨가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곧 어느 주교가 이웃한 곳에 있는 주교들의 판결로 면직되고, 그에게 다시 한번 변론할 소송이 주어져야 한다고 표명한다면, 로마인들의 주교가 이에 관해 결정하고 그 결정을 공포하기 전에, 어떤 다른 주교들 그의 주교좌에 임명해서는 안 됩니다.
오시우스 주교가 말하였다.
어느 주교가 고소당하고, 소집된 같은 지역의 주교들이 그를 면직하여, 피고인인 그가 로마인들의 지극히 복된 주교에게 피신하였고, 로마 주교가 그를 받아들이고, 그의 소송에 관한 조사가 다시 이루어지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웃 관구의 주교들이 세부적인 이 모든 것을 양심적으로, 그리고 면밀히 심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진리에 따라 소송에 판결을 내리도록, 이들에게 기꺼이 서한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주교가 자신에 관한 소송에서 다시 한번 판결을 듣고자 요구하고, 그의 청원으로 로마인들의 주교 측에서 신부들을 파견하는 것이 드러나면, 로마 주교가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그의 권한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주교는 주교들과 함께 판결하고 그들을 파견한 그의 권위를 지닌 어떤 이들을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하[면], 그는 그렇게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로마 주교가 소송의 심리와 그 주교에 관한 판결을 위해 주교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언제나 합리적인 자신의 의지에 옳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해야 합니다. 주교들은 "그것에 찬성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덴칭거》 제44판 133-135

이 교회회의는 343년 가을 또는 이미 342년에 세르디카(오늘날의 소피아/불가리아)에서 소집되었다. 세계 공의회는 아니지만 교황 수위권에 관련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리고 교황 율리오 1세에게 보낸 세르디카 교회회의 서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Hoc enim optimum et valde congruentissimum esse videbiur, si ad caput, id est ad petri Apostoli sedem, de singulis quibusque provinciis Domini referant sacerdotes.
모든 관구에서 주님의 사제들이 머리인 사도 베드로좌에 보고한다면, 이는 가장 좋고 가장 적절한 것으로 입증될 것입니다.
《덴칭거》 제44판 136

5.3.2. 에페소 공의회

교황이 자신이 수위권을 갖고 있음을 의식하고 에페소 공의회에 개입하기도 했다.

422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임명된 네스토리우스는 당시 교황 첼레스티노 1세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인정받기 위해 그에게 서신을 보냈다. 한편,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이자 네스토리우스를 대항해서 참된 그리스도론의 진리를 옹호했던 성 치릴로 역시 그가 이단임을 밝히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문서를 동봉한 자신의 서신을 첨부해서 교황에게 서신을 보냈다.

치릴로는 여기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교회의 오랜 관습에 따라 저는 성하께 다음과 같은 사안들을 알려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그(네스토리우스)와 더불어 친교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그 누구도 그러한 신념을 가진 이와는 절대로 친교를 유지하지 말아야 하는지 하는 견해 가운데 성하의 견해를 제가 간히 알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 사안에 대한 성하의 판단이 마케도니아와 동방교회의 모든 주교들에게 드러나야 합니다.

이에 첼레스티노 1세는 430년에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단죄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당시 황제였던 테오도시오스 2세의 지지를 얻었으며, 이 황제는 431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에페소에서 세계공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교황은 이 공의회에 세 명의 사절을 파견했는데, 이 사절들의 도착이 지연되자 치릴로는 자신의 견해가 교황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신념 아래 자신의 주재하에 공의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공의회는 마침내 네스토리우스의 저작들을 검토하고 "교회 법규로마 교회의 주교 첼레스티노의 서한과 권위로"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했다.
Super alia neque obaudire volente honorabili Nestorio nostram vocationem neque quidem a nobis destinatos sanctissimos et rev'mos episcopos suscipiente, necessario accessimus ad discussionem impie ab eo dictorum et conprehendentes eum et ex epistolis eius et ex scriptis, quae lecta sunt, et de nuper ab eo dictis in hac metropoli et per testium depositionem impie sapientem et praedicantem, necessario coacti sumus tam
다른 이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네스토리우스는 우리의 초청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고 우리가 보낸 거룩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주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네스토리우스가 야기한 불경에 대해서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낭독한 그의 서한들과 저서들을 바탕으로, 최근에 그가 이 도시에서 말한 것과 증인들이 확인한 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그가 불경스럽게 생각하고 이러한 것을 선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 ex canonibus quam
● 따라서 법규들과

ex epistola sanctissimi patris nostri et comministri Caelestini episcopi Romanorum Ecclesiae, lacrimantes saepius, ad hanc maestam contra eum venire sententiam
지극히 거룩한 우리의 아버지이자 동료이며 로마 교회의 주교인 첼레스티노가 쓴 서한에 따라, 우리는 네스토리우스에 대해 애통해하면서 어쩔 수 없이 다음과 같은 유감스러운 판결을 내리게 되었다.


Qui blasphematus igitur ab eo est Dominus Iesus Christus, definiit per praesentem sanctissimam Synodum: alienum esse eundem Nestorium ab episcopali dignitate et omni conventu sacerdotali.
네스토리우스에게서 모욕을 받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거룩한 이 공의회를 통해 네스토리우스가 주교의 품위와 사제가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집회에서 배제되었음을 확정하셨다.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단죄 (Contra Nestorius) [141]

또한 공의회 문헌은 이렇게 말한다.
Juvenal the bishop of Jerusalem said to Arcadius and Projectus the most reverend bishops, and to Philip the most reverend presbyter; Yesterday while this holy and great synod was in session, when your holiness was present, you demanded after the reading of the letter of the most holy and blessed bishop of Great Rome, Cœlestine, that the minutes made in the Acts with regard to the deposition of Nestorius the heretic should be read. And thereupon the Synod ordered this to be done. Your holiness will be good enough to inform us whether you have read them and understand their power.
예루살렘의 주교 유베날리스는 가장 존경하올 주교이신 아르카디우스와 프로옉투스, 가장 존경하올 원로이신 필립보께 말씀하셨다; 작일 이 거룩하고 위대한 시노드가 성하께서 계셨던 회기였던 동안, 여러분께서는 가장 거룩하고 복되신 大로마 주교 첼레스티노의 편지를 읽으신 후, 이단자 네스토리우스의 면직을 고려한 법령으로 된 회의록이 읽혀져야 한다고 요청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시노드는 이것이 행해지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성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분이 그것들을 읽고 그것들의 권위를 이해하든 말든 친절하게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Philip the presbyter and legate of the Apostolic See said: From reading the Acts we have found what things have been done in your holy synod with regard to Nestorius. We have found from the minutes that all things have been decided in accordance with the canons and with ecclesiastical discipline. And now also we seek from your honour, although it may be useless, that what things have been read in your synod, the same should now again be read to us also; so that we may follow the formula (τύπῳ) of the most holy pope Cœlestine (who committed this same care to us), and of your holiness also, and may be able to confirm (βεβαιώσαι) the judgment.
사도좌의 특사이자 원로인 필립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법령을 읽으며 우리는 무엇이 여러분의 거룩한 시노드에서 네스토리우스를 고려하며 이루어졌는지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카논들과 교회 규율들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 회의록으로부터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여러분의 명예로부터 무엇이 여러분의 시노드에서 읽혔는지 찾았습니다. 아마 쓸모 없겠지만 말입니다. 같은 것이 이제 다시 우리에게도 읽혀야 합니다; 우리가 가장 거룩한 교황 첼레스티노(그분께서 이 동일한 사항을 우리에게 맡겼습니다)와 성하의 공식을 따르고 판결을 확정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Arcadius having seconded Philip's motion, Memnon directed the acts to be read which was done by the primicerius of the notaries.]
[필립보의 움직임으로부터 아르카디우스가 동의를 받자, 멤논이 공증인들의 수석에 의해 법령들이 읽히도록 지시했다]

Philip the presbyter and legate of the Apostolic See said: There is no doubt, and in fact it has been known in all ages, that the holy and most blessed Peter, prince (ἔξαρχος) and head of the Apostles, pillar of the faith, and foundation (θεμέλιος) of the Catholic Church, received the keys of the kingdom from our Lord Jesus Christ, the Saviour and Redeemer of the human race, and that to him was given the power of loosing and binding sins: who down even to today and forever both lives and judges in his successors. The holy and most blessed pope Cœlestine, according to due order, is his successor and holds his place (…)
사도좌의 특사이자 원로인 필립보께서 말씀하셨다: 지극히 복되신 성 베드로는 사도들의 머리요 우두머리이며 신덕의 지주요 가톨릭 교회의 기초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아 죄를 풀고 매고 하는 권한을 받았음은 모든 세기에 알려진 바로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며, 그는 오늘까지 또는 영구히 자기 후계자들 안에 살아 계셔서 권위를 행사하신다. 그의 뒤를 따라 그의 교좌에 앉으신 거룩하고 복되신 우리 교황 첼레스티노 주교께서는 (…)[142]

교황 사절들은 공의회에 도착한 후 교황의 의지에 따라 교황의 승인과 더불어 첫 회기의 의사록을 재가하기 위해 이 의사록에 대한 검토를 요청했다. 교황 사절 가운데 한 사람인 필리포스는 전체 교회와 모든 사도들의 머리에서 거룩한 회원들이 일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기쁨을 표현했다.

실제로 이 사절들은 공의회에서 결정된 규정들을 공식적으로 낭독하도록 요청했으며, 필리포스는 다음과 같은 담화로 끝맺었다.
그 누구도 모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이들은 예로부터 거룩하고 복된 베드로, 사도들의 머리이자 수장이요 믿음의 기둥이며 공번된 교회의 초석인 베드로가 인류의 구세주요 구원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으며, 그에게 묶고 푸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계승자이신 복된 교황 첼레스티노는 당신을 대신하기 위해 우리를 이 공의회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는 펠라기우스를 보호하여, 그를 정죄한 예루살렘 공의회 등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상황에, 테오도코스 문제까지 겹쳤다. 당연히 '너보다 로마가 위다'로 쓰인 것.

5.3.3. 레오 1세 교황

베드로는 사도의 품위뿐만 아니라 주교의 품위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끊임없이 그분의 자리에 현존해 있습니다. (…) 그가 그리스도로부터 반석이라고 받은 견고함은 그의 후계자에게 계승되었는데, 그 자신이 반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단호한 결단력이 드러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목자의 강함이 나타납니다.[143]
주교들은 많고, 목자들도 많지만 이들은 모두 본래 베드로를 통해서 다스려집니다. 그들이 동시에 우선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스려지듯이 말입니다.[144]

레오 교황은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보편적인 수위권을 지닌다는 개념을 분명히 드러냈다.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이기에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에 대해 지녔던 유비적인 권위를 다른 주교들에게 요구할 수 있다.

레오 교황에게 지극히 복되신 사도 성 베드로는 당신의 성좌에서 주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레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믿음의 견고함은 영원하다. 그리스도는 이 믿음 때문에 사도들 가운데 첫째 가는 이를 칭찬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은 언제나 존속한다. 같은 식으로 베드로의 인격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임명하신 것은 언제나 존속한다.
(…)
성 베드로는 자신에게 부여된 반석의 견고함을 언제나 보존하면서 교회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키를 놓지 않았다.
(…)
그래서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고 올바르게 결정하며 일상의 청원 기도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자비에 감동한다면, 이 모든 것은 아직 자신의 성좌에서 권능을 갖고 살아있으며 권위 또한 계속 돋보이는 이가 하는 일과 공로 덕분이다.
(…)
베드로는 모든 교회에 매일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 이렇게 고백하는 모든 언어는 이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생기를 얻는다.

로마좌의 이러한 권리 요청은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실상 보편적인 의식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칼케돈 공의회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도원장인 에우티케스는 레오 교황에게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를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으로 고소했다. 그러나 이는 에우티케스 자신이 총대주교인 플라비아누스 앞에서 이단으로 고소 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무슨 상황이지? 그래서 이 둘은 레오 교황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이에 교황은 449년 6월 14일에 플라비아누스에게 그 유명한 서간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내는 교의 교서(Tomus ad Flavianum)」를 쓰게 되는데, 여기서 교황은 그리스도론적인 신앙에 관한 용어들을 명백히 표현하고 있다.

당시 교황은 칼체돈 공의회에 자신의 사절들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630명의 주교들 앞에서 이 공의회를 주재했다. 이 사절 가운데 첫번째 인물은 파스카리누스 주교로서, 그는 "모든 교회의 머리"인 로마 주교의 훈령에 따라 디오스코로스가 공의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2번째 회기에서 플라비아누스에 대한 레오 교황의 서간이 낭독되었으며, 이에 대해 주교들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이것이 교부들의 신앙이며 이것이 사도들의 신앙이다. 베드로가 레오의 입을 통해서 말했다.

교황에 대한 이러한 승인은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이 레오 교황에게 보낸 서간에서 추인되었으며 그들은 여기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당신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당신은 모든 이를 위한 베드로의 목소리의 해설자셨습니다. (…) 당신은 대리자들을 통해서 모든 교부들의 회중을 이끌고 명하셨으며 당신 지체들의 머리로서 교의에 참된 의미를 가르치고 명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루트비히(L. Ludwig)는 이렇게 말하였다.
교황권은 1870년이 아니라 이미 450년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

개신교, 정교회 옥시덴탈리스트 입장에서는 싸움 당사자인 콘스탄티노플과 안티오키아 외에, 알렉산드리아는 가루가 되게 까인 복합단성론으로 나가리 상태였고 이후 오리엔트 정교회의 기원이 될 상황이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론 교의결정 외에 28개 조항의 교회법 규정(카논)들도 공포했다. 그 대부분은 성직자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새로운 일이었거니와) 수도자들의 주교와의 결속을 다루고 있다. 사실 당시 규율 없고 마음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교회정치적으로 행동하며 술책을 쓰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그리스도론 논쟁을 비롯한 많은 싸움에서 특수한 문제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의회는 떠돌이 성직자들을 규제하는 규정들을 공포하여 그들을 주교 감독 아래 두었고, 또 일정한 교회와 결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서품을 금지했다. 여기서 새로운 점은, 그때까지 교회법적 지위 없는 일종의 "카리스마적" 운동이었던 수도생활이 이제 교회 안에서 제도상의 지위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도자들은 한편 주교들에게 종속되었고 다른 한편 교회적 신분이 되었는바, 이 신분을 멋대로 버리는 것은 파문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런 규정들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특히 서방에서 그랬는데, 거기서는 교황들의 주도 아래 칼케돈 공의회 이래 동방에서 개최되는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들 가운데 그저 신앙과 관련된 것들만 받아들였고 법률적 규정들은 거의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논 28조가 심각한 충돌을 야기했다.

칼케돈 공의회는 훗날의 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680-81)와 유사하게, 옛 공의회들이 로마의 교도권을 인정한 사실의 한 정점頂點을 이룬다. 물론 여기서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씀하셨다" 같은 환호를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이 공의회가 「레오의 교리서간」을 크게 존중한 것이 교황의 "형식적"(정식) 교도권에 대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단지) 사도들의 신앙과 그 서간의 "질료적"(내용적) 일치에 대한 것이었는가라는 논란 많은 문제에 관해서는, 그런 우악스런 양자택일은 적저하지 않다고 말해야 하겠다. 레오의 서간이 내용에 대한 토론 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은 결코 아니었고, 레오 자신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의회가 마르키아누스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아무튼 사람들은 레오에게서 언제나 베드로좌의 보유자를 보았고, 그의 교리서간은 베드로좌의 선포(케리그마)라고 여겼다.[145] 로마 교회는 그 안에 사도 베드로의 카리스마가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교회, 자신이 위탁받은 사명을 레오의 서간을 통해 다시 한번 전범적으로 확증한 교회로 여겨졌다. 그것은, 물론 그때그때 진실됨이 입증되어야 할 것이되, 하나의 좌와 결부된 일종의 카리스마였다.[146] 그리고 로마 사절들이 주장한 견해, 즉 디오스코루스 등의 불법성은 그 핵심이 로마를 거슬러 공의회를 개최했다는 데 있다는 견해 역시 공의회 교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147]
Klaus Schatz, 《보편공의회사》, 분도출판사 2005, 80-81쪽

5.3.4.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We believe that the saying of the Lord that Christ addressed to his holy apostles and disciples, Whoever receives you receives me, and whoever despises you despises me, was also addressed to all who were likewise made supreme pontiffs and chief pastors in succession to them in the catholic church. Therefore we declare that no secular powers should treat with disrespect any of those who hold the office of patriarch or seek to move them from their high positions, but rather they should esteem them as worthy of all honour and reverence. This applies in the first place to the most holy pope of old Rome, secondly to th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and then to the patriarchs of Alexandria, Antioch and Jerusalem. Furthermore, nobody else should compose or edit writings or tracts against the most holy pope of old Rome, on the pretext of making incriminating charges, as Photius did recently and Dioscorus a long time ago.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 곧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와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라는 말씀이, 그들의 뒤를 이어 그들을 따라, 가톨릭 교회의 교황들과 최고 사목자들이 된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믿으며,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권력들도 총대주교좌를 다스리는 이들에게서 어떤 것도 절대로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그들의 주교좌에서 어떤 것도 제거하려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옛 로마의 교황 성하와 그다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그다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이 모든 영예와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판단할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옛 로마의 교황 성하를 거슬러, 포티오스가 최근에 한 것과 오래 전에 디오스코로스가 한 것처럼, 마치 어떤 범죄를 알리는 듯한 핑계로, 글들을 쓰거나 이야기를 꾸며 내서는 안 될 것이다.

Whoever shows such great arrogance and audacity, after the manner of Photius and Dioscorus, and makes false accusations in writing or speech against the see of Peter, the chief of the apostles, let him receive a punishment equal to theirs.
그러나 만일 누가 포티오스와 디오스코로스처럼,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좌에 반대하여 글로써 또는 글을 쓰지 않고 어떤 모욕을 야기시키는 그런 자만심과 대담함을 행사한다면, 그는 저들과 동등하고 같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If, then, any ruler or secular authority tries to expel the aforesaid pope of the apostolic see, or any of the other patriarchs, let him be anathema.
만일 세속의 권력을 향유하거나 차지하면서 이미 언급한 사도좌의 교황이나 다른 총대주교들 중 어느 누구를 내쫓으려 시도한다면 그는 파문될 것이다.

Furthermore, if a universal synod is held and any question or controversy arises about the holy church of Rome, it should make inquiries with proper reverence and respect about the question raised and should find a profitable solution; it must on no account pronounce sentence rashly against the supreme pontiffs of old Rome.
더 나아가, 만일 보편 공의회가 소집되어 로마인들의 거룩한 교회에 대해 어떤 의심이나 논쟁이 생겼다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마땅한 경의를 가지고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고, 도움을 받든지 도움을 주든지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결코 옛 로마의 교황들을 거슬러 감히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교령 21조[148] 869년 - 870년

5.3.5. 피렌체 공의회

Eugenius, bishop, servant of the servants of God, for an everlasting record. With the agreement of our most dear son John Palaeologus, illustrious emperor of the Romans, of the deputies of our venerable brothers the patriarchs and of other representatives of the eastern church, to the following.
하느님의 종들의 종 에우제니오 주교, 영원한 기록을 위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자 로마인들의 빛나는 황제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의 동의와, 우리의 공경하올 형제들인 총대주교들과 동방 교회의 다른 대리인들의 동의로, 후술할 내용에 대해.
(…)
We also define that the holy apostolic see and the Roman pontiff holds the primacy over the whole world and the Roman pontiff is the successor of blessed Peter prince of the apostles, and that he is the true vicar of Christ, the head of the whole church and the father and teacher of all Christians, and to him was committed in blessed Peter the full power of tending, ruling and governing the whole church, as is contained also in the acts of ecumenical councils and in the sacred canons.
거룩한 사도좌와 로마 주교는 온 세계에 대한 수위권을 보유한다. 로마 주교는 거룩한 사도들의 우두머리 베드로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참된 대리자, 전체교회의 수장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요 스승이다. 로마 주교에게는 거룩한 베드로 안에서 전체교회를 양육하고 이끌고 지배하는 충만한 권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져 있는 바, 이 사실은 보편공의회들의 문서들과 거룩한 법령들 안에도 나타나 있다.

Also, renewing the order of the other patriarchs which has been handed down in the canons, the patriarch of Constantinople should be second after the most holy Roman pontiff, third should be the patriarch of Alexandria, fourth the patriarch of Antioch, and fifth the patriarch of Jerusalem, without prejudice to all their privileges and rights.
더 나아가 우리는 나머지 총대주교들의 교회법적 서열을 갱신하는 바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로마 주교 다음의 둘째 지위를 보유하며, 셋째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넷째는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다섯째는 예루살렘 총대주교다. 이들의 모든 특권들과 권한들은 그대로 보존한다.
피렌체 공의회 SESSION 6 6 July 1439, 연합교령 「하늘들아, 기뻐 용약하라」Laetentur Caeli [149]

5.3.6. 그 외

레오 이후에도 성 아우구스티노와 더불어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한 수위권에 대한 의식은 보다 분명해졌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펠라기우스의 추종자들을 거슬러 싸우는데 열의를 갖고 로마의 승인을 얻으려 했다. 왜냐하면 오직 이 사도좌(Sedes Apostolica)의 의견 표명과 더불어 아프리카 주교들의 결정에 대해 참으로 함께 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 뤼박(De Lubac)이 언급하는 것처럼, 당시 어떤 규율이나 가르침에 관한 중요한 사안의 최종적인 해결 방법은 사도좌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이들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아프리카 교회에서 이단적인 가르침을 거슬러 싸워야 했다. 그래서 그는 친히 카르타고 공의회(418년)와 밀레비 공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대다수의 주교들과 함께 인노첸시오 교황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 서간은 밀도 있는 장문의 소송 사건을 다룬 청원서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교황의 승인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해 드 뤼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신의 공동체적 의무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아우구스티노는 로마의 개입이 이 위태로운 담판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분명히 보았다. 로마가 자신의 판단을 주지 않는 동안, 문제는 계속 미해결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 그러나 성 아우구스티노는 로마가 아니라면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후대에도 교황권은 여러 기회에 동방의 문제에 개입되었다. 교황 호르미다스(Hormidas)의 신앙고백은 250명의 동방주교들의 수용과 함께 아카치아누스 이교(484-519)를 끝맺었다. 그리고 868-87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참석한 이들 모두는 호르미다스의 양식과 아주 유사한 "libellus satisfactionis"에 서명해야 했다. 우리는 단의론 위기 당시 예루살렘의 성 소프로니오와 고백자 성 막시모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인 요한이 교황의 수위권을 위해 증언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교황권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로마의 주교인 교황은 베드로의 권위와 유사한 권위를 갖는 그의 계승자라는 의식이 보다 분명하게 발전되어 갔다. 사실 대 레오 교황의 입장은 이를 명백히 입증한다. 그리고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로마교회가 제시하는 기준은 중대한 문제들에 대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50] 특히 에페소 공의회의 사례에서 보듯, 동서 분열 이전의 세계공의회는 (먼저 개최하고 승인을 받을지언정) 어떻게든 명목상으로는 교황의 승인을 필요로 하였다.

정교회 역시도 가톨릭과 보편교회의 역사를 공유하므로 교회의 수장으로써 로마 주교의 역사적 우위는 인정한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때때로 로마 주교의 권위에 기대기도 하였으니 로마 주교가 주교들 중에서 으뜸이라는 것도 당연히 인정한다. 즉 이 논쟁의 당사자인 가톨릭과 정교회는 둘 다 '로마 주교가 가진 어떤 우위성' 자체는 인정하는 것이다. 즉, 정교회 측이 위에서 주장한 교황은 '실권 없는 명예직' 설은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151]

이러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서는 9세기에 있었던 포티오스 분열 당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서 오갔던 교회정치적 관계를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자기 내부의 교회정치적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서 분명히 로마의 권위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에서 나온 갈등 봉합의 결론을 인정하는 것 외에 달리 뭘 하지는 못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 교회정치의 승자가 된 포티오스[152]에게 불만을 품고도 최후의 승자로 그를 인정하였다.
당시 상황은 매우 기묘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자기 내부의 갈등들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가 필요했고, 사실 로마의 권위는 매우 강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로마의 권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내부 권력투쟁의 결과를 그대로 인정해 주는 외에 달리 행할 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사실 로마는 무엇인가 달리 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Klaus Schatz, 《보편공의회사》, 분도출판사 2005, 124쪽

6. 관련 문서


[1] 그랑 바스코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2]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19항.[3]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2항; 교회법 제330조 참조.[4] (교리서 내 주석)마태 16,18-19 참조.[5] (교리서 내 주석)요한 21,15-17 참조.[6]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2항.[7]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3항.[8]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2항; 주교 교령, 2, 9항 참조.[9]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2항; 교회법 제336조 참조.[10] (교리서 내 주석)교회법 제337조 1항.[11]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2항.[12]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2항.[13]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3항.[14]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3항.[15] (교리서 내 주석)주교 교령, 3항 참조.[16]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3항.[17] (교리서 내 주석)갈라 2,10 참조.[18]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5항.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Pastor aeternus, c. 4: DS 3074 참조.[19] (교리서 내 주석)계시 헌장, 10항.[20]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5항.[21]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5항.[22] (교리서 내 주석)교회 헌장, 27항.[23] 라틴어 원문 출처: #[24] 한국어 번역 출처: 『하인리히 덴칭거: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선언 편람』(이하 덴칭거로 표기) 3074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BCK), 2017을 따름[25] (책 속 주석)Meditazione sulla Chiesa(「교회에 관한 묵상」, Milano 1993, p.187.)[26] (책 속 주석) Ibidem, nota n.125.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인용에 관해서는, cfr.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인간 존엄성」(Dignitatis Humanae) 3074.[27] (책 속 주석)Cfr.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itum) 25.[28] (책 속 주석) '교회 헌장' 12항은 실제로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성령께 도유를 받는 신자 전체는(1요한 2,20.27 참조)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cfr. 사도좌 관보 Acta Apostolicae Sedis 57(1965), p. 16. 또한 '교회 헌장' 25항은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힌다. "교회에 약속된 무류성은 주교단이 베드로의 후계자와 더불어 최고 교도권을 행사할 때에 주교단 안에도 내제한다." cfr. ibidem, p.30.[29] 책 출판 당시 대한민국과 몽골 주재 교황 대사 대리이자 가톨릭대학교에서 교의신학 교수.[30] 원제: 《De Lubac: L'identità ecclesiale del cristiano》. 앙리 드 뤼박 추기경의 신학에 대한 책이다. 참고로 베네딕토 16세는 "교황님은 어떤 신학자를 최고로 여기나요?" 라는 질문에 "저는 개인적으로 뤼박 추기경님과 발타자르 추기경님을 꼽고 싶습니다." 라고 답하며 앙리 드 뤼박 추기경과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를 평가한 바 있다(《마지막 이야기(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페타 제발트 대담 및 정리, 김선태 주교 옮김, 196쪽). 가톨릭에서 드 뤼박은 "명실공히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인정받으며, "공의회는 계시헌장에 나타난 성경과 성전의 유일한 원천, 무신론, 교회헌장, 비그리스도인 선언 등에 그의 사상을 수용했다." #1#2#3[31] (회칙 내 주석)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27항.[32] (문헌 내 주석)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5,24,10, 『그리스 그리스도교 저술가 총서』(GCS), 2,1, 495; SC, Bardy 편, 2, 69; 에우세비우스의 저술에 나오는 디오니시오, 「교회사」, 7,5,2, GCS 2,2, 638-639, Bardy 편, 2, 168-169 참조.[33] (문헌 내 주석)옛 공의회들에 관하여: 에우세비우스, 「교회사」, 5,23-24, GCS, 2,1, 488 이하, Bardy 편, 2, 66 이하. 여러 곳; 니케아 공의회, 제5조, 「세계 공의회 결의문집」(COD), 7 참조.[34] (문헌 내 주석)테르툴리아누스, 「금식」, 13, PL 2,972B; CSEL 20, 292면, 13-16행 참조.[35] (문헌 내 주석) 성 치프리아노, 「서간집」, 56,3, Hartel, 3 B, 650; Bardy 편, 2, 154 참조.[36] (문헌 내 주석)제1차 바티칸 공의회, 치넬리 공식 보고서, 『공의회 교령집』(Mansi), 52,1109C 참조.[37] (문헌 내 주석)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제2초안, 제4장, Mansi 53,310; 수정 초안에 대한 클로이트겐 보고서 Mansi, 53,321B-322B; 치넬리 선언 Mansi 52,1110A 참조; 또한 성 대 레오, 「설교집」, 4,3, PL 54,151A를 보라.[38] (문헌 내 주석)구교회법 제222조; 제227조 참조.[39] (문헌 내 주석)제1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아드님」, 3, Dz 1792(3011); 교회에 관한 제1의안에 붙여진 주해(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의 말 인용): Mansi 51, 579C; 또한 제2헌장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수정안과 더불어 클로이트겐의 해설: Mansi 53, 313AB; 비오 9세, 교서 Tuas libenter, Dz 1683(2879) 참조.[40] (문헌 내 주석)구교회법 제1322-1323조 참조.[41] (문헌 내 주석)제1차 바티칸 공의회, 「영원하신 목자」, Dz 1839(3074) 참조.[42] (문헌 내 주석)가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해설」, Mansi 52, 1213AC 참조.[43] (문헌 내 주석)「제1차 바티칸 공의회 해설」, Mansi 52, 1214A 참조.[44] 번역 출처: 《덴칭거》 제44판 4353-4359[45] 가톨릭 19명, 개신교 17[46] 저술 원칙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부탁하여 각 장(§)마다 한분씩 기본 텍스트를 작성하게 했읍니다.그러니까 가롤릭 신학자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중의 어느 한분이 첫 원고를 써 낸 것입니다.각 장마다 그러나 또 한분씩 다른 교파의 감수자를 두어 그 초고에 대한 견지를 밝히게 했읍니다. 이런 방식으로 어느 부분의 텍스트에 대해서나 공동책임이 보장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 책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하여 독자들이 특별히 알아 두어야 할 점은 이것입니다: 서로가 텍스트를 검토 · 판단함에 있어서 기준이 된 물음은, 내가 이 부분을 맡았더라도 꼭 이렇게 썼을까? ㅡ 그런 물음이 아니라, 내가 이 텍스트에 찬성올 해도 나는 역시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라 할 수 있올까? ㅡ 이런 물음이었다는것입니다.」
-Johannes Feiner - Lukas Vischer 등 공저, 《새로운 공동신앙 고백서 - 하나인 믿음》Neues Glaubensbuch - Der gemeinsame christliche Glaube, 이경우·정한교 번역, 분도출판사 1979, p.27
다음 인용문은 가톨릭의 Karl Lehmann이 초고를 저술하고 개신교의 Heinrich Ott가 감수했다.
[47] (책 속 주석)예를 들면 H. Ott, Die Lehre des I. Vatikanischen Konzils (Basel 1963) 156ff.; w.Pannenberg, Thesen zur Theologie der Kirche (München 1970) 46f[48] (책 속 주석)Cfr.Pluralismo di Chiesa o unità della Chiesa?(「보편 교회 안에 개별 교회들」), Brescia 1973, p.123. 필립스(G.Philips)는 '교회 헌장'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황이 그의 직무에 힘입어 행동할 때, 그는 이와 동시에 온 교회와 목자단 전체를 대표한다. 그러나 그가 그의 권력을 교회 공동체나 주교들로부터 받는다고 그 누구도 결론내릴 수 없다. 교황의 권력은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cit. in ibidem.[49] (책 속 주석) Ibidem, note nn.24.25. 「보편 교회 안에 개별 교회들」 각주 24에서는 참고 본문으로 마태 18,18(요한 20,23)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미 말했듯이, 공의회의 가르침도, 특히 '교회 헌장' 22항에서는 교황이 온 교회에 대하여 "완전한 최고의 보편 권력"(plenam, supremam et universalem potestatem)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다(cfr.Acta Apostolicae Sedis(사도좌 관보) 57[1965], p.26).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나 되게 하소서」 95항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톨릭 교회는 교황의 직무가 그리스도의 뜻에 부합한다고 긍정할 때, 교회는 그 직무를 주교단 전체에 위탁된 임무와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주교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파견자들'입니다." cfr.Acta Apostolicae Sedis 87(1995), p.977.[50] (책 속 주석)Meditazione sulla Chiesa(「교회에 관한 묵상」, Milano 1993, p.186. 이텔릭체 표기는 필자가 한 것이다.[51] 비록 교황이 온 교회를 "대표"한다고 말할 때 그 개념이 한국 헌법의 "대표" 의미와는 다를 수 있겠지만[52] 1749-1809. '성산(聖山)의 니코데모'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정교회의 교회법 주석자이다. 1955년 세계 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의 주도 하에 정교회에서 시성되었다.[53]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법적 제도적 장치로서만 수위권을 이해하면 이는 곧 통제의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참조[54] 강한수,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신학박사 학위 논문, 「교회 안에서의 가르치는 권위와 무류성-미국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회의 교회일치 대화(1980)에 대한 신학적 배경 연구」, 2013, 227p[55] 위르겐 몰트만, 위의 책, 316-317p[56] 가톨릭에서는 해방신학자들의 관점이 이와 비슷하다. #[57] 1. The dialogue between Anglicans and Roman Catholics1 has shown significant signs of progress on the question of authority in the Church. This progress can already be seen in the convergence in understanding of authority achieved by previous ARCIC statements, notably:
-acknowledgement that the Spirit of the Risen Lord maintains the people of God in obedience to the Father’s will. By this action of the Holy Spirit, the authority of the Lord is active in the Church;
-a recognition that because of their baptism and their participation in the sensus fidelium the laity play an integral part in decision making in the Church;
-the complementarity of primacy and conciliarity as elements of episcope within the Church;
-the need for a universal primacy exercised by the Bishop of Rome as a sign and safeguard of unity within a re-united Church;
-the need for the universal primate to exercise his ministry in collegial association with the other bishops;
-an understanding of universal primacy and conciliarity which complements and does not supplant the exercise of episcope in local churches.
[58] Within his wider ministry, the Bishop of Rome offers a specific ministry concerning the discernment of truth, as an expression of universal primacy. This particular service has been the source of difficulties and misunderstandings among the churches. Every solemn definition pronounced from the chair of Peter in the church of Peter and Paul may, however, express only the faith of the Church. Any such definition is pronounced within the college of those who exercise episcope and not outside that college. Such authoritative teaching is a particular exercise of the calling and responsibility of the body of bishops to teach and affirm the faith. When the faith is articulated in this way, the Bishop of Rome proclaims the faith of the local churches. It is thus the wholly reliable teaching of the whole Church that is operative in the judgement of the universal primate. In solemnly formulating such teaching, the universal primate must discern and declare, with the assured assistance and guidance of the Holy Spirit, in fidelity to Scripture and Tradition, the authentic faith of the whole Church, that is, the faith proclaimed from the beginning. It is this faith, the faith of all the baptised in communion, and this only, that each bishop utters with the body of bishops in council. It is this faith which the Bishop of Rome in certain circumstances has a duty to discern and make explicit. This form of authoritative teaching has no stronger guarantee from the Spirit than have the solemn definitions of ecumenical councils. The reception of the primacy of the Bishop of Rome entails the recognition of this specific ministry of the universal primate. We believe that this is a gift to be received by all the churches.[59] The Commission's work has resulted in sufficient agreement on universal primacy as a gift to be shared, for us to propose that such a primacy could be offered and received even before our churches are in full communion. Both Roman Catholics and Anglicans look to this ministry being exercised in collegiality and synodality – a ministry of servus servorum Dei (Gregory the Great, cited in Ut Unum Sint, 88). We envisage a primacy that will even now help to uphold the legitimate diversity of traditions, strengthening and safeguarding them in fidelity to the Gospel. It will encourage the churches in their mission. This sort of primacy will already assist the Church on earth to be the authentic catholic koinonia in which unity does not curtail diversity, and diversity does not endanger but enhances unity. It will be an effective sign for all Christians as to how this gift of God builds up that unity for which Christ prayed.[60] Such a universal primate will exercise leadership in the world and also in both communions, addressing them in a prophetic way. He will promote the common good in ways that are not constrained by sectional interests, and offer a continuing and distinctive teaching ministry, particularly in addressing difficult theological and moral issues. A universal primacy of this style will welcome and protect theological enquiry and other forms of the search for truth, so that their results may enrich and strengthen both human wisdom and the Church's faith. Such a universal primacy might gather the churches in various ways for consultation and discussion.[61] An experience of universal primacy of this kind would confirm two particular conclusions we have reached:
-that Anglicans be open to and desire a recovery and re-reception under certain clear conditions of the exercise of universal primacy by the Bishop of Rome;
-that Roman Catholics be open to and desire a re-reception of the exercise of primacy by the Bishop of Rome and the offering of such a ministry to the whole Church of God.
[62] 성공회 측 위원: Mark Santer 은퇴 주교(공동 의장)(영국 버밍햄 교구), John Baycroft 주교(캐나다 오타와 교구) 등. 가톨릭 측 위원: Cormac Murphy-O’Connor 은퇴 주교(공동 의장)(영국 애런들-브라이튼 교구), Patrick A. Kelly 주교(영국 리버풀 대교구) 등. 그 외 자세한 위원 구성은 링크 참조.[63] 번역 출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교회일치문헌》 제2권, 2009, pp.131-180.[64] 18kagō de soi legō hoti sy ei Petros, kai epi tautēi tēi petrāi oikodomēsō mou tēn ekklēsian kai pylai hāidou ou katischysousin autēs. 19 dōsō soi tas kleidas tēs basileias tōn ouranōn kai ho ean dēsēis epi tēs gēs estai dedemenon en tois ouranois, kai ho ean lysēis epi tēs gēs estai lelymenon en tois ouranois.[65] 이것은 교부 테르툴리아노(약 155년~약 230년)가 가장 먼저 교황의 권위에 대해 말하며 인용했다. 교황 중에서 가장 먼저 이 부분을 언급하며 자신의 수위권을 말한 사람은 성 스테파노 1세(재위: 254년 5월 12일 ~ 257년 8월 2일)[66] (책 속 주석) 1,17에 들어 있는 행복 선언 양식의 특징: C.KÄHLER, ZUR Form- und Traditions-geschichte von Mt 16,17-19: NTS 23 (1977) 36-58.[67] (책 속 주석) 참조: J. JEREMIAS, Golgotha (Angelos 1)(Leipzig 1926) 74-75.54ff; G. KLINZING, Die Umdeutung des Kultus in der Qumrangemeinde und im NT (Stunt 7) (Göttingen 1971) 206 Anm. 30 und 31.[68] (책 속 주석)TRILLING(ISRAEL 162)의 견해다.[69] 마르코 스프리치(Msgr. Marco Sprizzi), 《앙리 드 뤼박: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BOOKK 2018, p.216.[70]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마치 교황 하나만 강조한 것처럼 보인 것은, 신학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리적인(말 그대로 물리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교회의 공동합의성 주제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미 논의되고 있었으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문에 공의회가 조기종결되어버려 단지 교황권만 강조한 것 처럼 보인 것이다.
"교황의 수위권을 선포한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에서도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논의만큼 강력하게 토론되었던 주제가 바로 주교단이었다.주6) 사실 가톨릭교회의 최고 권위에 대한 논의에서 교황의 권위와 주교단의 권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에 대한 교령만 선포한 상태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발발로 중단되었고(1870. 9. 20.), 이로 인해 주교와 주교단에 대한 교의가 최종 문헌의 형태로 선포될 수 없었다. 그 결과 세상에는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교의만 알려졌고, 공의회 과정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가톨릭교회는 마치 전제 군주 국가처럼 보이게 되었다."
[주6)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에서 주교단을 다룰 때, 각주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회의록에만 나오는 신학위원회의 발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교회헌장」 각주 28 참조. 공의회 문헌 작성에서 이렇게 공의회 최종 문헌이 아닌 회의록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주교단에 대한 교의가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얼마나 많이 논의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1차 바티칸공의회와의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최현순, 《시노달리타스》, 바오로딸, 2022, p.23
[71] (책 속 주석) G. Bornkamm, Geschichte und Glaube II (München 1971) 37-50, 특히 47[72] (책 속 주석) Ebd. 49. Vgl. auch R. Hummel, Die Auseinandersetzung zwischen Kirche und Judentum im Matthäusevangelium (München 1963) 61ff.[73] (책 속 주석) W. Trilling, Zum Petrusamt im Neuen Testament, in: Theol. Quartalschrift (Tübingen) 151 (1971) 110-133, 특히 133.[74] 해당 부분은 가톨릭의 Karl Lehmann이 초고를 저술하고 개신교의 Heinrich Ott가 감수했다. 여기서 감수의 원칙은, 가톨릭 신자로서 혹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로서 "이 텍스트에 찬성을 해도 나는 역시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라 할 수 있을까?"(본서 27쪽)이다.[75] 이 부분은 마태오 복음 16,21-23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병행구절로 있으며, 마태오 복음서에서도 베드로의 고백 바로 다음에 위치한다.[76] 27Kai exēlthen ho Iēsous kai hoi mathētai autou eis tas kōmas Kaisareias tēs Philippou· kai en tēi hodōi epērōta tous mathētas autou legōn autois· tina me legousin hoi anthrōpoi einai; 28hoi de eipan autōi legontes [hoti] Iōannēn ton baptistēn, kai alloi Ēlian, alloi de hoti heis tōn prophētōn. 29kai autos epērōta autous· hymeis de tina me legete einai; apokritheis ho Petros legei autōi· sy ei ho christos. 30kai epetimēsen autois hina mēdeni legōsin peri autou.
31Kai ērxato didaskein autous hoti dei ton huion tou anthrōpou polla pathein kai apodokimasthēnai hypo tōn presbyterōn kai tōn archiereōn kai tōn grammateōn kai apoktanthēnai kai meta treis hēmeras anastēnai· 32kai parrēsiāi ton logon elalei. kai proslabomenos ho Petros auton ērxato epitimān autōi. 33ho de epistrapheis kai idōn tous mathētas autou epetimēsen Petrōi kai legei· hypage opisō mou, satanā, hoti ou phroneis ta tou theou alla ta tōn anthrōpōn.
[77] 역서 내 역주[78] 현재의 마르코 복음은 16장 20절에서 끝나나 다수의 사본 증거를 고려할때 원래의 결말이 8절에서 끝났다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79] 바로 그렇기에, 마르 3,31-35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다소 가혹하게 말하는 것 역시도 마리아 개인의 인품에 대한 교회의 단죄가 아니다. 가톨릭과 성공회의 일치 선언문에서는, 마르 3,31-35를 다음과 같이 공동으로 해석한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뒤에 세 공관 복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참가족은 누구인지를 언급하믄, 어떤 면에서는 다소 놀라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마르 3,31) 밖에 서서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였다고 말합니다.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가족과 거리를 두시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종말론적 의미에서 당신의 가족'이라는,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마르 3,35) 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도 포함하여 예수님의 육신의 가족들은 예수님 사명의 참본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은 주님의 제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났습니다(예: 마르 8.33-35; 9,30-33; 10,35-40).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이해하는 과정은 길고도 험난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십자가와 빈 무덤을 보기 전까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신앙에 이를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After these birth stories, it comes as something of a surprise to read the episode, narrated in all three Synoptic Gospels, which addresses the question of Jesus’ true family. Mark tells us that Jesus’ "mother and his brothers" (Mark 3:31) come and stand outside, wanting to speak to him.3 Jesus in response distances himself from his natural family: he speaks instead of those gathered around him, his ‘eschatological family’, that is to say, "whoever does the will of God" (3:35). For Mark, Jesus’ natural family, including his own mother, seems at this stage to lack understanding of the true nature of his mission. But that will be the case also with his disciples (e.g. 8:33-35, 9:30-33, 10:35-40). Mark indicates that growth in understanding is inevitably slow and painful, and that genuine faith in Christ is not reached until the encounter with the cross and the empty tomb.]
성공회-로마 가톨릭 국제 위원회(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과 희망이신 마리아〉(Mary: Grace and Hope in Christ), 2005[153], 제19항
[80] 큉은 이 책에서 베드로의 '권력'이 아닌 베드로의 '봉사'를 강조하며 요한 23세의 행동과 정신을 '베드로의 봉사에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이라 평가했다.(185-186쪽 참고)[81] 크레이그 A. 에반스, 『예수와 교회』, CLC, 2016, 130p[82] 에티엔느 트로크메, 『초기 기독교의 형성』, 대한기독교서회, 2016. 118p, 이하『초기 기독교의 형성』[83] 원문 오기[84] (책 속 주석) 신약성서에서 오직 여기에만 나오는 동사 ιοτορῆσαι의 의미는 "만나서 알게 되다"에 국한되어야 한다. 특히 교부시대 해석에서의 지나친 의미 부여에 관해 Mußner, Gal 93-5 참조. 또한 G.D. Kilpatrick, Galatians 1, 18: NT Essays (Studies in Memory of T.W. Manson)(Manchester 1959) 144-9도 참조.[85] (책 속 주석) 게파라는 이름은 (요한 1,42를 제외하면) 오직 바울로 서간에만 나온다(8번). 갈라 2,7 이하에서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사용한다.[86] (책 속 주석) H. Fries, L'église, questions actuelles, Paris 1966, p.540.[87] 원제: 《Kleine Kirchengeschichte》(2000년판)[88] (책 속 주석)U.BROCKHAUS.'Charisma und Amt''(Wuppertal 1972).226-227에 따르면, 은사들에 관한 표상은 윤리 안으로도 교회 제도 안으로도 흡수되지 않고, 오히려 성령론 안에 정착한다. 사실 '제도'라는 말은 지나치다 하겠다.[89] (책 속 주석)참조: E.SCHWEIZER, Gemeinde und Gemeindeordnung im NT(AThANT 35)(Zürich 1959).90-91.[90] 『백과사전이나 신학전문서적을 펼쳐봐도 '초기 가톨리시즘'이란 하나의 독립된 어휘로서의 표제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초기 가톨리시즘'이란 낱말이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금세기 불후의 명작인 개신교계통의 신학대사전 Die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와 가톨릭계통의 신학대사전 Lexikon für Theologie und Kirche에서도 다른 주제나 표제어를 설명하는 가운데 다만 부분적으로 언급하거나 암시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초기 가톨리시즘'에 대한 개념이나 의미설명도 약간씩 차이가 있다. 하지만 F. Mussner의 설명이 가장 포괄적이고 무리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는 '가톨리시즘'을 설명하면서 '초기 가톨리시즘'을 곁들여 해설하는데, '초기 가톨리시즘'을 한마디로 "초대교회의 특유한 '가톨릭적인' 형태"라고 요약한다.』, 이영헌, "新約聖書와 初基 가톨리시즘", 〈신학전망〉 90(1990)[91] (논문 내 주석) E. Käsemann, Paulus und Frühkatholizismus, in : ebd. S. 240-245[92] 이영헌, "新約聖書와 初基 가톨리시즘", 〈신학전망〉 90(1990)[93] (책 속 주석) 사도행전 14,4 참조. SCHNEIDER(Apg I 228)는 14,14에서 사도 칭호가 없는 서방 텍스트의 '더 어려운 이문(異文)'을 우대한다.[94] (책 속 주석) 사도행전 18,24-28에 삽입된 아폴로의 활동에 관한 짧은 보도는 전적으로 바오로에게 정향되어 있다.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 바오로는 한 명의 사도도 만나지 못하고 (주님의 아우) 야고보만 만난다(21,18).[95] (책 속 주석)참조: G. GLEIN, Die Zwölf Apostel(FRLANT 77) (Göttingen 1961) 특히 11-188: J. ROLLOF,Apostolat ― Verkündigung ― Kirche(Gütersloh 1965) 199-211; C,BURCHARD, Der dreizehnte Zeuge (FRLANT 103) (Göttingen 1970); G.LÜDEMANN, Paulus, der Heidenapostel I (FRLANT 123) (Göttingen 1980); K. KERTELGE (Hrsg.), Paulus, in den ntl. Spätschriften (QD 89) (Freiburg 1981) 중 P.-G. MÜLLER(157-201)와 K. LÖNING(202-234)의 논문.[96] (책 속 주석)갈라티아서 1,18-19에서는 바오로가 사도회의 전에 한 차례만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한다.[97] (책 속 주석)이 주제에 대한 비판적인 토론에 대하여 참조: Christian Grappe, Images de Pierre aux deux premiers siècles, PUF, Paris, pp.49-81.[98] (책 속 주석) 수사학적 · 양식비판적 주석에서는 갈라 2,11-21을 갈라디아의 거짓 선생들과의 대결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Wechsler, Geschichtsbild 373 참조. 특히 번역에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은 2,15("우리는 태생이 유대인들이며 이방인 출신 죄인이 아닙니다")인데, 여러 주석자는 이 구절을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의 논증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본다. 앞의 책, 363 참조.[99] (책 속 주석) 사람들은 이와 관련하여 예수 수난 당시 베드로의 처신을 거듭 지적한다.[100] (책 속 주석) 예컨대 Oscar Cullmann, Saint Pierre, disciple, apôtre, martyr, Neuchâtel, 1952.[101] 요한 복음서에서 애제자가 베드로만큼 중시되고, 사도행전에서 바울로가 베드로만큼 중시되지만, 여기서 포인트는 '베드로만큼 대단한 애제자/바울로'이지 '애제자/바울로만큼 대단한 베드로'가 아니다. 베드로는 초대 교회에서 유다계/희랍계/요한계 교회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중시되었기 때문이다.[102]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코르넬리우스를 받아들인 개방적 율법관의 사도이다. 또한 갈라 2,11-14에서 바울로가 (자신보다는 보수적인) 베드로의 율법관을 비판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다른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보다) 개방적인 사도로 언급한다.[103] 이외에도 갈라 2,9에서 야고보가 베드로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을 근거로 '야고보가 더 중요한 사람 아니냐'는 의혹도 있지만, 해당 문맥은 사도회의를 말하는 문맥이다. 바울로의 포지션상 "야고보도 나를 인정했다"고 강조하려고 먼저 언급하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104] 전통적으로 이 제자를 사도 요한으로 보았으나 현대에는 이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105] (책 속 주석) 참조: J.L. MARTYN, History and Theology of the Beloved Disciple (Nashvile{ }^{2}1979); R.E. BROWN, The Community of the Beloved Disciple (New York 1979); D.M. SMITH jr., Johannine Christianity: Some Reflections on Its Character and Delineation: NTS 21 (1975) 222-248; K. WENGST, Bedrängte Gemeinde und verherrlicher Christus (BThST 5) (Göttingen{ }^{2}1983); J. KÜGLER, DAS Johannesevangelium und seine Gemeinde ― kein Thema für Science Fiction: Biblische Notizen H.23 (1984) 48-62[106] (책 속 주석) 요한 복음서 1,40-42의 이름 부여와 21,15-19 사이에 모종의 어원적 관련성을 성립시키기는 어렵다. 마태오 복음서 16,18에는, 베드로가 페트라(바위)라는 의미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그런 관련성이 존재한다. 참조: GNILKA, ''Matthäusevangelium (각주 227) 49-50.69.[107] (책 속 주석) A. KRAGERUD[Der Lieblinsjünger im johannesevangelium (Oslo 1959)]의 해결책이다. 연구자들의 널리 일치된 견해에 따르면, 베드로의 권위를 강조하는 마태오 복음서가 시리아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이 주장은 요한 복음서도 시리아에서 생겨났으리라는 견해의 한 논거가 된다. 이 복음서를 대교회에서 통용시키려는 의도가 애제자를 사도 요한과 동일시하는 데로 귀결되었다고 하겠다.[108] 문맥상 '한 그룹의 그리스도인들로'가 타당한 것으로 보이나 번역서 그대로 인용[원주49] 요한이 이 영웅을 사도가 아니라 제자로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에 있어서 제자직은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범주이다. 사도적 사명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가까움이 권위를 보장해 준다.[110] 구체적인 예시로,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은 무슬림에 대한 강경한 논조 등으로 인해 프란치스코 교황과 껄끄러운 사이로 알려져 있다. 물론 파문 먹은 적 없다.[111] 이 분열의 원인은 사도들로부터 적법하게 서품받은 사제들을 코린토 신자들이 멋대로 쫓아내려는 문제 때문에 일어났다[112] 콘라드 키르흐Konrad Kirch S.I., 《고대 교회사 사료 편람》Enchiridion fontium historiae ecclesiasticae antiquae quod in usum scholarum collegit, 황치헌 번역,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23, p.81.[113] 이상 내용은 황명길,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서신의 신학과 교회사적 위치에 관한 연구」, 2008 의 내용을 발췌하였음[114] 서신 전체에서 발송 주체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형으로 언급되며 이는 저자와 비슷한 위치의 인물이 1명이 아니었음을 암시한다[115] 이상 문장은 'H.R. 드롭너, 『교부학』, 분도출판사, 2001, 119p'에서 인용[116] (책 속 주석)Evidence is forthcoming from the second and the third centuries, for Corinth, Arabia, Cappadocia, and Mesopotamia (cp. above, pp. 157, 185, 376; and below, Book IV.). In a still larger number of cases Rome intervened with her advice and opinion.[117] (책 속 주석)A considerable amount of the relevant material is collected in my History of Dogma, I. pp. 455 f. (Eng. trans., vol. ii. pp.149-168), under the title of "Catholic and Roman."[118] 원제: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119] (책 속 주석)A. VON HARNACK,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Leipzig{ }^{4}1924) 807.[120] (책 속 주석) VON HARNACK, Mission 487.[121] (책 속 주석)번역: KRAFT 223.[122] 원제: Kirchengeschichte I: Ausbreitung, Leben und Lehre der Kirche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123] 그리고 그는 지역교회의 신자들이 자기 지역의 주교들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124]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박미경 역주판에서 발췌.[125] 『초기 기독교 교부들』, 두란노아카데미, 2017, 107p[126] 데일마틴, 『신약읽기』, 오픈예일코스, 2019, 675p 및 H. R. 드롭너, 『교부학』, 분도출판사, 2001 참조[127] 『초기 기독교 교부들』, 109p[128] 이상 문단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 143p에서 발췌함[129] #[130] 『초기 기독교 교부들』, 143p[131] 이렇게 말한 이유는 영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교리가 사도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자신들의 스승을 통해 전수된 비밀스러운 교리라고 주장하고 선전했기 때문이다.[132] 당장 이레네오의 스승도 당국에게 체포되어 화형당했다.[133] 이레네오 성인이 동방교회의 의견을 대표하는가는 차치하더라도.[134] 성 폴리카르포는 교황에게 부활절 날짜를 확정받기 위해서 오늘날 터키에서 로마까지 찾아갔다가 체포되고 순교한다.[135] 제국의 수도라는 점은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에게 로마 주교와 동등한 특권을 부여하기로 한 결정의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136] 어느 교회이든지.[137] 참고로 가톨릭과 정교회의 성인이다.[138] 이 당시 그리스도교가 박해받던 시절이다.[139] 덧붙이자면, 치프리아노의 이 문헌은 아래의 사본 말고도 "베드로에게 수위권이 주워졌"다는 문장이 없는 사본도 있다. 두 사본 문제에 대해 논쟁이 있었지만, J.Ludwig는 아래 발췌한 사본을 원본으로 보았으며, 나머지 한 사본은 치프리아노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위조됐다고 봤다. 반면 D. Van den Eynde는 둘 다 치프리아노의 저술이되, 아래 발췌는 저술 당시의 원본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단자들의 세례 문제에 대한 논쟁(이때 로마측과 긴장 관계에 놓였다) 당시 치프리아노에 의해 수정된 것으로 해석했다. 아래 발췌의 역자인 이형우 시몬 베드로 신부도 해제에서 여기에 가까운 의견을 보였다.[140] 이형우 번역. 옛 맞춤법은 책 그대로 발췌한 것이므로 존중 차원에서 그대로 놔뒀다.[141] 덴칭거 264[142] 영어 번역은 이곳이 출처이고, 한국어 번역은 굵은 글씨를 빼고는 위의 영어 번역으로부터 중역했다. 굵은 글씨는 《상해천주교요리》 개정판 상권 229-230쪽을 그대로 발췌하였다.[143] 레오 1세 강론집 5,4: PL 54, 155.[144] 레오 1세 강론집 4,2[145] (책 속 주석)E. Schawartz 등 편 Acta Conciliorum Oecumenicorum (1914~) II 2 III(20)113,31-8[146] (책 속 주석) 참조: St.O. Horn, Petrou Cathedra. Der Bischof von Rom und die Synoden von Ephesus(449) und Chalcedon (Paderborn 1982); K. Schatz, ''Der päpstliche Primat. Seine Geschichte von den Ursprüngen bis zur Gegenwart(Würzburg 1990) 62-3.[147] (책 속 주석)E. Schawartz 등 편 Acta Conciliorum Oecumenicorum (1914~) II 3 I 40; II 3 II (98) 83-4[148] 영어판 출처는 #, 번역 출처는 사서 아나스타시우스의 라틴어 번역본을 원문으로 덴칭거를 따랐다.[149] 영문 번역 출처는 #, 한국어 번역은 첫 문단은 편집자가 영어 번역으로부터 중역했으며 나머지는 클라우스 샤츠의 《보편공의회사》(이종한 번역)에서 발췌.[150] 상술했다시피 빅토르 교황은 파문까지도 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소아시아 교회를 위협했다.[151] 이럴 수 밖에 없는게 나중에 교황을 비롯한 보편교회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고 떨어져 나간 개신교와 다르게 정교회는 가톨릭과 보편교회의 역사를 공유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인정했던 로마 주교, 즉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기 굉장히 어렵다.[152] 포티오스는 필리오퀘 논쟁에서 라틴 신학을 공격한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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