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S.J. 앙리 드 뤼박 Henri de Luba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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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앙리-마리 조제프 소니에 드 뤼박 (Henri-Marie Joseph Sonier de Lubac) |
출생 | 1896년 2월 20일 |
프랑스 제3공화국 노르 캉브레 | |
사망 | 1991년 9월 4일 (향년 95세) |
프랑스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종교 | 가톨릭 |
직업 | 추기경, 사제, 신학자 |
소속 | 예수회 |
사제 수품 | 1927년 8월 22일 |
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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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이자 추기경, 신학자.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학자 중 한 명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로써 현대 가톨릭 신학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2. 생애
1896년 2월 20일 프랑스 캉브레에서 귀족 가문의 자녀로 태어났으며, 프랑스 가톨릭의 지적 전통을 이어받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년기부터 학문적 소양을 갖추기 시작한 그는 1913년 만 17세의 나이로 예수회에 입회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프랑스 군대에 징집되어 전쟁 중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러한 경험은 이후 그의 신학적 사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전쟁이 끝난 후 예수회 수련을 재개하여 1927년 8월 22일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후 리옹 가톨릭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학문 활동에 매진하게 되었다.1938년 『가톨릭주의(Catholicisme)』를 출간하며 신학계에 등장한 뤼박은 이후 『초자연적인 것(Surnaturel)』(1946), 『중세 성서해석(Exégèse médiévale)』(1959-1964), 『무신론의 드라마(Le drame de l'humanisme athée)』(1944) 등 수많은 저서를 통해 당시 가톨릭 신학계의 지배적이었던 신스콜라주의적 접근에 도전했으며, 장 다니엘루, 이브 콩가르 등과 함께 '누벨 테올로지(Nouvelle Théologie)' 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하며 교부 시대와 중세 초기 신학에 기반한 현대적 재해석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 사상은 교회 내 보수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1950년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인류(Humani Generis)』 발표 이후 교수직에서 물러나 저작 활동도 제한받는 '신학적 침묵기'를 겪어야 했다.
1958년 교황 요한 23세의 즉위와 함께 점차 복권된 뤼박은 1960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초청받아 공의회의 주요 문서 작성에 참여하며 현대 가톨릭 교회의 개혁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그의 교회론적 통찰은 교회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에 깊이 반영되었다고 평가받는다. 그의 학문적 업적과 교회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87세의 고령으로 인해 추기경 서품 의식에서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되는 특별 허가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뤼박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공헌으로는 자연과 초자연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통해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에 단순히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완성이라는 혁신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또한 교회를 단순한 제도가 아닌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이해하는 관점을 강조하며 20세기 가톨릭 교회론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무신론의 드라마』와 같은 저서를 통해 현대 무신론의 뿌리와 특성을 분석하고 불교와 같은 동양 종교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며 종교 간 대화의 기초를 마련했다.
앙리 드 뤼박은 1991년 9월 4일, 프랑스 파리에서 95세의 나이로 선종했지만, 그의 사상은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평가받는다. 오늘날까지도 성서해석, 교회론, 종교 간 대화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계속해서 연구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신학 연구소와 학술상이 설립되어 20세기 가톨릭 신학의 거장으로서 그의 유산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