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O.P. 이브 콩가르 Yves Cong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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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브 마리 조제프 콩가르 (Yves Marie-Joseph Congar) |
출생 | 1904년 4월 13일 |
프랑스 제3공화국 아르덴 스당 | |
사망 | 1995년 6월 22일 (향년 91세) |
프랑스 파리 7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아버지 조르주 콩가르 어머니 루시 콩가르 |
학력 | 르 사울슈아르[1] |
종교 | 가톨릭 |
직업 | 추기경, 수도자, 사제, 신학자 |
소속 | 도미니코회 |
사제 수품 | 1930년 7월 25일 |
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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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이자 추기경, 수도자, 신학자.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회 일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교회론과 성령론 분야에서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2. 생애
2.1. 초년기
1904년 프랑스 스당에서 태어났다. 그가 10살이 됐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 이때 느낀 배고픔과 아버지의 국외추방은 그의 내면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14살 때 처음으로 성소를 느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교구 신학교에 입학했고, 1921년 파리로 이사했다. 1924년 라인란트에서 1년간 병역의무를 이행했고, 1925년 아미앵의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마리-조제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1926년부터 1931년까지 르 사울슈아르[2]에서 신학 공부를 했고, 1930년 7월 25일 사제품을 받았다.1931년부터 1939년까지 르 사울슈아르에서 교회론 강의를 진행하며 교수 경력을 시작했고, 이때 개신교와 정교회 신학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에큐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
1937년에는 가톨릭 교회론의 역사적 주제를 다루는 Unam Sanctam 시리즈를 창간했다. 이 시리즈는 에큐메니즘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근원으로의 회귀를 요구했고, 77권까지 출간되었다. 또한 프랑스 누벨 테올로지Nouvelle Théologie 학파의 기초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위 계급의 군종사제로 징집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에 체포되어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전쟁 포로로 붙잡힌 채 거듭 탈출을 시도했고, 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2.2. 에큐메니스트
종전 이후에는 다시 르 사울슈아르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글을 썼으며, 정교회와 개신교 사상에 대한 가톨릭의 개방을 옹호했고, 교황청과 성직주의를 비판했다. 그러나 비오 12세 교황이 회칙 『Humani Generis』를 반포한 후, 콩가르와 그의 동료들 몇 명은 교수직에서 면직되었으며, 그의 저서 중 일부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에 의해 출판과 번역이 금지되었다. 이후 예루살렘, 로마, 케임브리지, 스트라스부르에서 하위 직책을 맡으며 떠돌아다녔다.그러나 요한 23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준비하며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1960년 콩가르는 공의회 준비 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고, 가장 중요한 공의회 문서들을 작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주교간의 평등한 권력, 평신도의 역할, 선교, 에큐메니즘에 관한 문제들은 미완성인 채로 남고 말았다. 이후 그의 신학 연구는 점차 성령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고, 결국 성령에 관한 3권짜리 시리즈인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Je crois en l'Esprit Saint는 현대신학의 고전이 되었다.
1969년부터 1985년까지 국제신학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했고, 마리아, 성체성사, 평신도, 성령을 포함한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저술하고 강의했다. 그러던 와중에 1935년부터 그를 괴롭혀오던 일종의 근육경화증은 점점 심해졌고, 결국 1986년에는 앵발리드 군사병원에 들어가 연구를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