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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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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따르듯이 주교를 따르고, 사도들을 따르듯이 원로단을 따르며, 하느님의 계명을 섬기듯이 봉사자들을 섬기시오. 어느 누구든 주교를 제쳐두고 교회와 관계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주교가 드리는 감사례, 또는 주교가 위임한 사람이 드리는 감사례만이 유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듯이, 주교가 나타나는 곳에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주교를 제쳐두고 세례를 주거나 애찬을 행하지 마십시오. 주교가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도 흡족해하시므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은 확실하고 적법하게 됩니다.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스가 스미르나인들에게 보낸 편지 8.1-2[1]
주교직은 영예가 아니라 임무를 가리킨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주교는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해야 합니다.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파일:서울대교구 신임교구장임명.jpg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수단 색상의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예.

파일:주교 문장.svg[2]
한자
라틴어 Episcopus
그리스어 Επίσκοπος
프랑스어 Évêque
영어 Bishop

1. 개요2. 상세3. 역사
3.1. 고대 교회3.2. 중세에서 현재 교회(476~)
4. 주교 선발부터 서품까지의 과정5. 가톨릭
5.1. 명의주교/명예주교5.2. 한국 주교들의 여러 기록5.3.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사도 전래5.4. 한국 천주교의 '부주교' 용어
6. 정교회7. 성공회8.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주교

1. 개요

그리스도교의 고위 성직자다. 성경에는 '감독'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가톨릭이 번역에 참여한 공동번역성서와 가톨릭 단독으로 번역한 가톨릭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다.[3] 한국어 성경에서의 번역은 주교의 기능을, 가톨릭에서의 호칭은 주교의 지위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 수 있다. 즉, 주교는 감독하는 성직자로서 신부의 사목을 감독하고 교구를 대표, 총괄하며 이끄는 직책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주교를 상징하는 마스코트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유명한데 실제로 주교들은 미사를 집전할 때 지팡이를 들고 입장한다. 이는 '예수의 말씀대로 어린 양을 이끈다' 라는 사목의 직무를 뜻한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고위 성직자인 주교에 서품될 때 ‘주교 지팡이’가 수여되고, 교구장 착좌식(취임식)에서도 등장한다. 이것은 목장(牧杖), '목자 지팡이' 라고도 불리며 주교의 권한과 담당 관할권을 상징한다. 윗부분이 둥글게 휘어진 형태로 옛 양치기, 목자들의 지팡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디어에서는 홍해를 가르는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이미지로 유명하다.

2. 상세

주교에 대한 경칭은 각하(閣下, Your/His Excellency)[4]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나 한국에서는 외교 문서나 중대한 교회문서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보통 주교님이라고 부른다.[5]

주교를 상징하는 색은 서방 교회에서는 자주색(Amaranth purple)이다.[6]

스스로 사도교회로 정의하는 가톨릭·정교회·오리엔트 정교회·성공회는 이 직책을 가지고 있으며, 신학적으로는 주교들이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해석된다. 즉 한국의 A주교를 임명한 주교는 한국 최초의 주교인 B주교일 것이고, 그 B주교를 임명한 사람은 프랑스의 C 주교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던 12사도들이 나온다는 말. 이를 사도계승 또는 '사도 전래(apostolicitas, 使徒傳來)'라고 한다. 가톨릭정교회는 서로의 사도전승을 모두 인정한다. 이들 종파들은 주교단을 가지고 있으며 이 주교단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해당 종파의 으뜸이 되는 구조이다. 구체적으로 주교단들의 우두머리는 다음과 같다.

개신교 중에는 성공회가 사도전승을 유지하여[7] 주교가 존재하고, 감리회에서는 주교에 해당하는 직책이 감독이라는 명칭으로 존재한다.[8] 루터교회는 각 관구에 따라 교회의 형태가 달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힘드나, 북유럽루터교회에는 주교가 있다. 장로회도 원산지이자 본산인 스코틀랜드 국민교회에는 주교란 직위가 있기는 한데, 이는 그냥 청년회 감독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가톨릭 교회정교회, 그리고 성공회의 성직자는 부제[9], 사제, 주교 셋으로만 나뉜다. 즉 흔히 생각하는 주교 위의 성직자들, 곧 교황, 추기경, 총대주교, 수석 대주교, 대주교 등은 모두 주교품에 해당하는 성직자들이며 직급의 차이만 있는 것이다. 추기경과 교황은 으로서 주교처럼 서품을 받는게 아니라, 서임과 착좌로 그 직무를 받는다. 또한, 주교를 전부 구별해서 각자의 호칭대로 부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서[10] 주요한 직급[11]만을 칭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것이 바로 교황(Pope), 추기경(Cardinal), 대주교(Archbishop), 주교(Bishop)이다. 독일의 경우, Bischof은 교구장 주교를 의미하며 여타 보좌주교는 Weihbischof으로 부른다.

정교회도 각 교회의 총대주교(Patriarch), 대주교(Archbishop), 관구장 주교(Metropolitan bishop), 주교(Bishop)로 직책 구조가 있다.[12] 다만 일단 각 교회들이 스스로 교회들을 꾸려나가야 하다 보니 일단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세계 총대주교'로서 존재하되 가톨릭교황과 달리 동등한 가운데 명예상 첫째이기 때문에 달리 특권은 없다.

성공회는 대주교(Archbishop)과 주교(Bishop)로만 나눈다. 보통 관구장 주교를 대주교라 칭한다. 그리고 39개 관구는 서로 평등하기 때문에 39명의 대주교는 모두 평등하다. 다만 캔터베리 대주교가 모든 대주교와 '평등한 가운데 첫째'라고 불린다. 이런 구조는 비단 성공회 뿐만 아니라, 정교회나, 19세기에 가톨릭 교회에서 독립한 복고 가톨릭[13]의 경우도 동일하다. 교황처럼 절대적 권위를 갖는 직책이 있는게 아니라는 얘기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런 형식의 교회들의 수장을 국회의장으로, 주교들을 국회의원으로 생각하면 쉽다. 국회의장이 국회의원 전체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갖는게 아니라, 국회의원들 간의 갈등을 조율하고, 법안 발의 시한을 정하는 등의 총괄 역할만 하는 것처럼, 성공회 등의 수장도 그냥 주교회의의 의장 역할만 하는거다[14].

신부에서 주교가 되면 하나의 정식 교구의 총책임자가 될 수 있다. 대개 정식으로 설치된 교구는 주교가 교구장이 되긴 하지만, 면속구[15]의 경우에는 주교가 교구장이 아니다. 단, 가톨릭의 경우 대수도원장 아빠스는 주교와 다름없는 품위를 지닌다. 실제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는 베네딕토회 왜관수도원 아빠스도 (덕원자치수도원구장 서리의 자격으로, 반대로 또 한 명의 대수도원장인 경남 고성 올리베따노 성 베르나르도 똘로메이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는 주교회의의 회원이 아님) 함께 소속되어 있다. 대목구나 지목구(가톨릭) 혹은 주교대리구(정교회)의 경우에는 공식적인 교구장은 대리구장을 파견한 교구의 교구장이 된다. 주교는미사(가톨릭) / 성찬예배(정교회)를 집전하는 것 등의 권한을 가진다. 이와 같은 의식을 사제가 행할 때에는 전부 '사제가 속한 교구의 교구장 주교를 대리해서' 하는 것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기본적으로 사제의 교구 내 모든 성무활동은 교구장의 권한 위임으로 이루어진다. 아주 엄격히 말하면 가톨릭의 경우에는 어떤 사제에게는 교구장 주교가 강론을 금지시키거나 혹은 고해성사 집전을 중지시키거나 아니면 더 나아가 직무를 일정 기간 중지시킬 수도 있다. 물론, 마음대로 하는 것은 아니고 이유가 있는 경우에 한하지만, 본질적으로 교구 모든 성무 자체는 주교의 권한이다. 아예 견진성사성품성사처럼, 원칙적으로는 주교만이 직접 집전할 수 있는 성사도 있다. 견진성사의 경우, 몬시뇰급 사제도 주교의 위임을 받으면 집전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주교가 한 교구 일을 모두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제들의 협력 없이는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본당 사목자들의 재량에 맡겨두는 편이다.

교황의 경우 그 자격 중의 하나가 바로 '로마 주교'이므로,[16] 상징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이탈리아 로마교구는 다른 주교가 아닌 교황이 직접 주관한다.

가톨릭의 경우, 주교가 되면 자신만의 고유한 문장(紋章)을 갖게 된다. 이는 주교가 고대 말부터 도시를 중심으로 그 지역 영주를 겸하던 중세 유럽의 전통에서 비롯한 것으로, 특히 신성 로마 제국주교공이 유명하다.[17][18] 보통 소속 교구나 사목 방침을 상징하는 도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단의 술이 달린 모자[19]를 그려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를 생략한 간략한 형태의 문장을 사용하는 주교도 있다. 1983년 교회법전에서는 주교의 문장 사용을 의무화하였는데, 그 이전에 서품된 주교는 아예 문장을 갖지 않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두봉(René Dupont) 주교(초대 안동교구장)는 "문장은 귀족이나 갖는 것이지, 나 같은 시골 신부에게는 필요치 않다"며 문장 사용을 사양하였다.

보아라 우리의 대사제(Ecce Sacerdos Magnus). 가톨릭성가 304번[20]
교구장 주교가 주요 사목행사에 참석할 때 쓰이는 성가로 'Ecce Sacerdos Magnus(보아라 우리의 대사제)'라는 노래가 있다. 주교가 친히 집전하는 중요한 미사(e.g., 대축일이나 축일, 또는 지역의 성대한 전례일)나 교구장 착좌식, 주교가 집전하는 교회의 여러 의식(e.g., 주교, 사제, 부제 서품식, 신자들의 견진성사) 등의 교구장 주교 등장 순서에 즐겨 쓰인다. 그래서 '주교 영접가'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3. 역사

3.1. 고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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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중세에서 현재 교회(476~)

사실상 로마 제국의 마지막 단일 통치자였던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그의 두 아들이 각각 동부와 서부를 다스리는 황제가 되었고, 서부(통칭 서로마 제국) 쪽이 이민족들의 침입에 시달리며 멸망하면서 로마 서부에서 유일한 총대교구의 주교였던 교황이 급부상한 것이다. 451년 훈족 아틸라로마로 침공하자 로마 주교 레오 1세아틸라와 협상을 벌인 결과 훈족로마를 약탈하지 않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한 세기 후의 인물인 그레고리오 1세 또한 권력의 공백기 동안 로마 교구의 위상을 강화하였다.

로마 교회는 점차 다른 교회들에 대한 우월성을 강조했으며, 이것이 장차 동서 교회 대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사실 로마 교회의 위상이 드러나던 시기는 이미 2세기부터였다. 당시 교황 빅토르 1세(186/9~197/201)는 각 교구 간 차이를 보이던 부활절 날짜를 로마식으로 통일을 시도하였으나 리옹이레네우스에 의해 저지되었다.[21]
성찬 공동체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친교communio는 부정적 대립 개념인 파문으로 대응되었다. 친교 서한을 교부할 권리를 지닌 주교는 공동체와의 관계를 거부할 수도 파기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조치는 무분별하게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친교 관계가 깨지면 사람들은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계속 따르기를 거부했으며, 그는 스스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 2세기 중엽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가 아니케투스와 부활절 날짜를 협상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을 때, 두 사람은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레네우스는 그들이 이룬 교회의 일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들은 공동으로 성찬례를 집전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5,24,17 참조). 로마의 주교는 소아시아 주교에게 성찬례를 주관하게 했으며, 두 사람은 평화롭게 헤어졌다. 후대에 로마의 주교 빅토르는, 소아시아인들이 부활절 날짜에 관한 그의 이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그들을 파문하려 하면서 더 완고하게 대응했다.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행 중에 로마에서 더 이상 손님으로 환대받지 못했고, 미사에 참석하지도 못했으며 서신을 주고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여러 교회회의에서 빅토르의 월권에 대한 저항이 매우 격렬하여 그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340쪽 참조). 빅토르의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이는 로마가 다른 공동체에 명령할 수 있는 우위에 있다는 로마의 권리를 드러낸다. 이론적으로 모든 주교가 동등하기에, 그들은 신앙에 대해 믿을 만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전권과 다른 주교가 이단에 빠졌음을 단언할 수 있는 전권을 지녔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각 주교좌가 특히 신앙에 관한 문제에서 두드러진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았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오랫동안 교회의 주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당연했다.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276-277쪽
부활절의 날짜 결정에 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에 많은 저술가가 관여하고, 교회회의가 열렸으며, 빅토르 주교(188~189)가 주도하는 로마 교회와 소아시아 교회가 거의 분열되는 수준에 이르렀다(277쪽 참조). 소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을 유대인의 파스카 축제를 본받아 니산 달 14일, 곧 춘분 다음 만월이 되는 날에, 그 밖의 교회는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거행했다. 그러나 '14일파'와 '주님의 날파' 사이의 논쟁은 단지 사소한 날짜 차이라는 문제만 아니라 축제 내용의 이해에 관한 강조점을 드러낸다. 사르데스의 주교 멜리톤의 『파스카 설교』(107쪽 참조)가 분명히 밝히듯이, '14일파' 제식은 참된 어린양인 그리스도로 구약성경의 파스카 축제를 회상했다. 이와 달리 '주님의 날파'는 무엇보다도 주간 첫날에 예수의 부활을 회상했다. 이 두 파는 자신들의 부활절 날짜를 지키면서도 상대방의 날짜를 인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가 로마의 주교 빅토르의 견해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아시아 교회와의 분열은 피할 수 있었다.
-같은 책, 340쪽

교황수위권 항목에 나와 있듯 로마 교회의 수위권에 대한 증언이 나타난 건 1~2세기부터였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공인, 국교화된 4세기에는 더욱 발전된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율리오 1세(337~352) 시기 세르디카 교회회의에 소집된 주교들은 "사도 베드로의 기억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 주교들 간의 분쟁과 탄원은 로마 주교에게 최종적으로 판결받아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다마소 1세(366~384)는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210~258)가 처음으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설명할 때 인용했던 마태오 복음서 16장 18-19절을 직접 인용하며 '로마 주교좌만이 사도 전승의 보좌’라고 칭했다. 시리치오(384~399)는 ‘교황(Papa)’이라는 호칭을 로마 주교에만 국한시켜 사용하게끔 했다. ‘파파’라는 말은 본래 동방에서는 주교들을 일컫는 일반 명사였으나 서방에서는 로마 주교를 일컫는 고유명사로 변화하였다.[22] 인노첸시오 1세(399~417)는 모든 중요 사항을 주교회의에서 검토한 후 교황이 이를 최종 결정해야 한다고 했고, 이와 관련해 교부 아우구스티노펠라기우스에 대한 이단 시비를 가리던 카르타고 교회회의를 진행하던 중 인노첸시오 1세에게서 펠라기우스에 대한 파문을 지지하는 서한이 도착하자 "로마에서 말하였으니 사건은 이제 끝났다(Roma Locuta Est. Causa Finita Est)."고 발언하기도 했다.[23] 보니파시오 1세(418~422)는 사도좌의 판단과 결정이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고 선언하며 항소를 금지했다. 첼레스티노 1세(?~432)는 교회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단죄했으나 당시 동로마 제국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가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며 세계공의회인 에페소 공의회를 소집했을 때, 교황은 자신의 서한을 지닌 사절들을 공의회에 파견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를 비롯한 공의회의 주교들은 '교회의 법규들과 로마 주교가 보낸 서한의 권위'로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레오 1세(440~461)와 그레고리오 1세(590~604) 같은 교황들이 나올 수 있었고, 서로마의 멸망에 걸쳐 약화된 서유럽의 다른 교구들은 (비록 독립성을 완전히 잃진 않았지만) 좋으나 싫으나 점차 로마 교구 밑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한편 그러는 와중 훗날 위서로 판명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와 ‘이시도르 문서’ 등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위서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와 제국 서쪽을 교황 실베스테르 1세(314~335)에게 증여하였으며 교황이 황제의 표장, 자색 도포 및 궁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고 다른 총대교구에 대한 지상권을 허락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문서이다. 사실 이 문서는 교황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인해 조작된 것이었지만, 비평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는 오랫동안 사실로 받아들여졌다.[24] 또한 로마 주교는 800년 카롤루스 대제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하였는데 이는 선례가 없는 일이어서 동로마 황제를 비롯한 동방 교회의 반발을 샀다.[25]

이와 같은 로마 주교의 수위권 강조와 행동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로마 제국의 동부와 서부 사이에는 이전부터 크고 작은 갈등이 있어왔다. 그리스어라틴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교회로 국한시킨다면 전례 문제와 교리[26] 심지어 옛 수도 로마와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간의 미묘한 신경전도 있어왔기 때문이다.
이집트와 리비아와 펜타폴리스의 옛 관습, 곧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는 모든 관구에 대한 재치권을 행사한다는 관습은 지켜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동일한 관습은 로마의 주교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안티오키아 교회와 그 밖의 다른 관구들에게도 그들의 특권들이 보존되어야 한다. 만일 누가 수석 대주교의 협의 없이 주교가 되었다면 위대한 이 공의회는 그가 주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명백하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주교 선출에 대한) 공통된 결정이 합리적으로 그리고 교회의 규정에 따라 승인되었다면, 두세 명이 개인적인 경쟁심으로 반대한다고 해도, 대다수의 결정이 관철된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교령 6

또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시대를 기준으로 교회는 삼두 체제[27]였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상 상승 등으로 오두 체제[28]로 변화한 것도 갈등의 원인이다. 이러한 시대 흐름에서 로마는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는 알렉산드리아를 밀어주는 경향이 있었는데,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측의 교회 이해[29]는 은연중에라도 로마 개별교회를 '정치적 중심지니까 그러한 위상을 얻은 것'이라고 해석함을 전제하기에, 복음사가 마르코를 통해 사도 베드로에게 연결되는 전승을 가진 알렉산드리아와는 달랐다.

결국 1054년 교황이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파문하고, 역으로도 파문이 이루어짐으로써 동서 교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다.[30]

한편 교황의 지원 아래 황제의 위에 오른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는 서방 교회의 다양한 전통과 관습을 로마를 기준으로 정비시키기 시작했다. 미사는 로마 양식에 따라 부활절 날짜를 비롯하여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를 보였던 교회력도 로마를 기준으로 맞춰졌다. 1077년에 이르러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주교의 서임권은 교황에게만 있다"고 천명했다. 그러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에 반발했다.

여기서 황제가 주교 서임권 문제에 반대 의견을 표명한 것은 고대 교회의 전통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는 국교였으므로 그리스도교의 문제는 곧 국가의 문제이며, 국교 문제를 떠나더라도 주교는 성직자와 평신도 양쪽의 의견이 고루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첫 세계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성직자는 커녕 세례성사도 받지 않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했다.[31] 그런데 1077년에 이르러 교황은 주교를 자신의 의중으로만 뽑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이에 황제가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 카노사의 굴욕으로 하인리히 4세그레고리오 7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그레고리오 7세를 교황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한 번 무릎을 꿇어버린 데다 후계구도를 놓고 싸움까지 일어나 황제의 권위가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되자 하인리히 4세의 뒤를 이은 하인리히 5세가 1122년 보름스 협약을 통해 교황에 의한 주교 서임을 인정하였고 대신 교회 재산은 세속 군주가 하사하는 내용으로 이 문제에 합의를 보았다. 이 협약에서 애매한 부분은 1139년 제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좀 더 다듬어져, 서방 교회에서는 교황이 주교를 서임하는 전통이 확립되었고, 각 교구는 로마 교구 밑에 확실히 종속되었다.[32][33]

이후 서방에서의 주교 제도는 중세 후기, 십자군 전쟁흑사병 발발 등으로 교회의 기강이 무너지고 타락함으로써 1인 주교가 복수의 교구를 담당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교구에서 나오는 성직록을 얻기 위해 실제로 임지에 부재하면서도 해당 교구를 관할할 권리를 받았는데, 이는 교회의 타락을 가속화했다. 예를 들어 1517년 종교 개혁 당시 면벌부 판매를 종용했던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자그만치 교구를 3개나 겸임했다.[34] 결국 이와 같은 행태는 종교 개혁을 야기하여 서방 교회를 분열시켰다. 가톨릭 자체 내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한 나머지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한 주교의 복수 교구 겸직을 폐지하여 종전처럼 1인 주교가 1개 교구만을 맡도록 하여[35] 오늘날에 이른다. 그러나 위 규정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유럽의 농촌교구는 인구의 축소로 인해 이웃하는 교구와의 통합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는 통합 전 농촌교구를 주교 한 사람이 2~3개 겸직 관리하기도 한다

4. 주교 선발부터 서품까지의 과정

신부가 되는 것만 해도 힘든 마당에 주교품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가톨릭이든 정교회성공회든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표적인 예로, 가톨릭의 보좌주교만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교황의 재가를 얻어야만 서품되기 때문에 교황청 공식 기관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에 서품 소식이 실린다. 그만큼 중요하고 신중한 일이므로 어느 사제가 주교품 후보로 선정되면 교황대사와 교황대사관은 해당 사제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며, 관계된 모든 사제들을[36] 통해 결격 사유가 없는지 평판은 어떠한지 조사한다. 정치인들이 청문회에서 먼지 한 톨까지 털리는 것과 마찬가지 일을 겪는 것. 차이가 있다면, 교황대사 측은 이러한 활동을 최대한 조용히 수행하며 모인 정보 및 평가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 교황청에만 보고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 주교 중 한 명이라도 반대하거나 대부분의 사제들이 부정적 의견을 피력하거나 바티칸에서 볼 때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주교로 승품되기 어렵다. 즉, 주교가 되려면 해당 교구 소속의 주교, 사제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최소한 나쁜 관계는 맺지 말아야 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동료평가를 통과한 사제들을 교황청 주교부 혹은 전교 지역의 경우 복음화부에서 한 번 더 꼼꼼히 심사하는데, 학력[37]에 행정가로서의 실무능력까지 따지기 때문에 단순히 사제로서 오랫동안 활동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교황청 평가를 통과한 3배수의 후보들을 교황에게 올리면, 교황이 마지막으로 평가서류를 확인하고 낙점한 사제가 주교로 임명된다.

더군다나 주교로 서품되는 인원 자체가 굉장히 적다. 2021년 한국 천주교 사제 인명록에 수록된 내·외국인 사제는 누적 6,705명인데, 한국 천주교의 역대 주교는 현직·원로·선종주교를 포함하여 87명에 불과하다. 사제 중에서 주교품을 받는 사람은 1.3%[38]에 불과하였다는 뜻. 주교직에는 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교구장 주교는 75세를 만료하면 직무의 사퇴 표명이 권고될 뿐이어서(교회법 제401조 제1항), 제아무리 덕행과 자질이 출중해도 전임자의 유고 등 이를테면 티오가 나지 않는다면 주교품 받기 어렵다.

가톨릭교회법에서는 주교를 서품하는 데에[39] 적어도 주교 3명의 안수가 필요하다. 교회법 제1014조에는 "주교 축성식에서는 사도좌의 관면이 없는 한 축성 주례 주교는 적어도 2명의 축성 주교들과 함께 거행하여야 한다. 축성식에 참석한 모든 주교들이 이들과 함께 주교 피선자를 축성하는 것이 매우 적합하다."고 명시되어 있다.

주례주교이든 축성주교이든 교회법상 합법적으로 서품되고 그 직위를 유효하게 가진 주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어떤 주교품을 받지 않은 평사제가 교황에 당선된다면, 즉위식에 주교서품식도 해야 하는데, 그 주례자는 오스티아 명의의 주교급 추기경[40]이 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가령 교구장 주교로 임명된 사람이 평사제여서 주교로 새로 서품해야 한다면, 전임자가 주례 주교가 되는 것이 일반이지만, 어떤 사정이 있어서 인접 교구의 주교나 교황대사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 주교가 서품 때 받은 안수를 준 주교, 또 그의 서품 때 안수를 준 주교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전세계의 가톨릭 주교단이 나뭇가지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41]

이 때문에 보좌 주교를 포함한 가톨릭 주교 서품식에는 경사스러운 일이어서 현역 주교들은 물론 은퇴 주교들도 참석해 축복해 준다. 임명장은 교황청이 해당 국가에 파견한 교황 대사가 교황을 대신해 전달한다.

어떤 성직자가 관구장 대주교[42]로 임명되었다면, 견대라고 불리는 팔리움을 받는다. 옛날엔 교황대사[43]바티칸에서 팔리움을 받아 대주교에게 걸어 주었는데,[44] 베네딕토 16세 이후 6월 29일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바티칸으로 관구장 피명자를 불러 교황이 직접 걸어주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었다.[45]

이렇게 특정 국가에 국한하지 않고 전세계 가톨릭의 최고위 기관에서 인정하는 직위인 만큼, 주교라는 칭호가 붙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 성직자는 비범한 거다.

정교회에서도 신학대학원 이상 수료자에 수도사제[46]라는 조건이 붙는다. 모든 주교들은 공식적인 자기 소속의 수도원이 있다. 선출은 재치권과 최고 상소심권을 가진 총대주교(혹은 대주교)를 의장으로 한 지역 시노드에서 실시한다.[47]

5.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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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단체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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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의 문장 대주교의 문장[48]
“주님께서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에게 특별히 맡기시어 그 후계자들에게 전수되는 임무가 영속하듯이, 사도들의 교회 사목 임무도 영속하며 주교들의 거룩한 품계에서 끊임없이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주교들이 신적 제도에 따라 사도들의 자리를 계승하였다고 가르친다. 주교들은 교회의 목자들이므로, 주교의 말을 듣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고 주교를 배척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862항
교황의 수위권이 아무리 확고하고 강력할지라도 각 지역 주교들의 고유한 사목 권한을 배제하거나 축소하거나 대행하지 않는다. 주교들은 주교품을 받음으로써 사도들의 후계자가 되고, 위임된 지역교회의 완전한 사목자가 되며, 로마 교황과 더불어 한 주교단을 이룬다. 베드로가 사도단의 단장이었던 것처럼 교황도 주교단의 단장이며, 따라서 교황을 제외한 주교단이나 주교단과 유리된 교황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교회헌장 22). 그러므로 주교단 안에서 각 주교들은 그들의 사목권을 교황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고 주교서품을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받기 때문에, 자기에게 위임된 지역 교회(교구)안에서 교황의 대리가 아니고(교회헌장 27) 고유하고 직접적이고 통상적인 사목자이며(교회헌장 23), 세계 교회에 대해서는 교황과 함께 한 주교단으로서 전반적 최고 사목권의 주체가 된다. 주교단의 단체성은 세계 공의회에서 잘 나타난다. 공의회의 결의는 단장인 교황의 동의를 받아서 교회 전제에 대한 보편적인 사목지침이 되는 것이다. 공의회 밖에서도 세계 주교들의 일치된 결정은 동의를 전제로 하여 교회의 최고 사목권의 발로로 인정된다(교회헌장 22, 주교교령 4).
《가톨릭대사전》, 교황 문서
22... 주교단은 교도권과 사목 통치에서 사도단을 계승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사도단이 계속하여 존속하며, 그 단장인 교황과 더불어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한 최고 권력의 주체로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단장 없이는 결코 그러하지 아니하며,[49] 또한 그 권력은 오로지 교황의 동의가 있을 때에만 행사될 수 있다. 주님께서 한 사람 시몬을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교회의 열쇠를 맡기셨으며(마태 16,18-19 참조), 그를 당신의 온 양 떼의 목자로 세우셨다(요한 21,15 이하 참조). 그러나 베드로에게 주어진 매고 푸는 저 임무는(마태 16,19 참조) 그 단장과 결합되어 있는 사도단에게도 부여되었음이 분명하다(마태 18,18; 28,16-20 참조).[50] 이 사도단은 여러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하느님 백성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드러내며, 또한 한 단장 아래 모여 있으므로 그리스도 양 떼의 단일성을 드러낸다. 주교단 안에서 주교들은 그 단장의 수위권과 최고 권위를 충실히 존중하면서, 교회의 유기적 조직과 화합을 끊임없이 북돋아 주시는 성령에 따라, 자기 신자들은 물론 온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고유한 권력을 행사한다. 이 주교단이 지닌, 보편 교회에 대한 최고 권력은 세계 공의회에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된다.
25... 각각의 주교들이 무류성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상호간에 또 베드로의 후계자와 친교의 유대를 보전하면서 신앙과 도덕의 사항들을 유권적으로 가르치는 주교들이 하나의 의견을 확정적으로 고수하여야 할 것으로 합의하는 때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류 없이 선포하는 것이다.[5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
가톨릭교회는 교황의 직무가 그리스도의 뜻에 부합한다고 긍정할 때, 교회는 그 직무를 주교단 전체에 위탁된 임무와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주교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사자들”[52]입니다. 교황은 “주교단”의 일원이며, 주교들은 직무에서 그의 형제들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하나 되게 하소서」 95


교황의 주교 서품식. 주례자는 베네딕토 16세, 수품자는 게오르그 겐스바인 대주교다.

한국 가톨릭에는 서울대교구, 광주대교구, 대구대교구를 포함한 16개 교구에 군종교구를 합친 총 17개 교구에 현역 27명[53], 은퇴[54] 15명을 합쳐 총 42명(2021. 11. 현재)이 소속되었다. 여기엔 주교뿐 아니라 대주교, 추기경 등 역시 포함된다. 한편 한국 가톨릭의 대교구장 주교(추기경 또는 대주교)들은 각각 서울관구, 대구관구, 광주관구의 관구장을 겸하고 대교구장에 임명되면 자동적으로 대주교로 임명된다. 관구장 주교라고 해서 관구 산하의 각 교구에 대한 통치권이나 간섭권을 행사한다면 교회법적으로 불법행위인데, 가톨릭 교회의 교구는 완전한 지방자치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관구장 주교 산하에 교회사법체계상 2심 교회법원[55]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 관구장주교의 최대 권한이다. 자세한 내용은 교구 문서를 참고.

교구는 17개이지만, 교구마다 1명씩의 현직 주교(교구장)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교구장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2024년 3월 현재 북한에 속하는 세 교구인 평양교구함흥교구의 주교와, 덕원자치수도원구의 자치구장은 각각 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와 춘천교구김주영 시몬 주교,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장인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가 서리로서 겸직하고 있다.

반대로 한 교구에 2인 이상의 주교가 있는 경우도 있다. 단 주교가 몇 명이든 교구장 주교는 한 명뿐이다. 보좌주교나 부교구장 주교는 교구장 주교 칭호를 사용하지 못한다. 보좌주교는 예전에 있던 폐쇄교구의 주교 명의를 사용하며, 자신이 현재 봉직한 교구에 실권이 없다. 교구장 주교 명의로 업무를 본다. 아래 '명의주교' 참조.

추기경도 자신이 교구장으로 있는 교구의 주교(대주교)가 될 수 있다. 유의할 점은 추기경직만으로 교구장을 자동적으로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주교직(교구장직)을 은퇴한 추기경은 일선을 떠난 원로사제일 뿐이다. 물론 추기경직은 종신이다.

주교급 성직자부터는 외국인이라도 국외추방을 하려면 교황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미 사직서를 썼던 프랑스인 두봉 주교가 재가를 받지 않은 상황에서 박정희의 눈 밖에 나서 추방 직전까지 갔다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사표를 수리하지 않음과 동시에 추방을 불허하여 추방을 면한 사례가 있다.

한국 가톨릭에는 지금까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처럼 이미 사망한 주교들까지 모두 합쳐) 총 89명의 주교들이 있으며, 그 명단은 이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http://www.gcatholic.orghttp://www.catholic-hierarchy.org에서 전세계의 가톨릭 주교 목록을 볼 수 있다.

5.1. 명의주교/명예주교

명의주교(名儀主敎, Titular Bishop, Episcopus titularis)
주교로 서품되었으나 교구책임자, 즉 교구 통치권이 없는 주교를 뜻한다. 교황청 각 부서의 직책에 종사하는 주교[56], 각국에 파견된 교황대사, 보좌주교 등 주교품이 필요하나 교구 통치권은 필요하지 않은 자리에 성직자를 임명할 때 주교로 성성하기 위한 제도이다.

즉, 명의주교들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교구의 주교로 임명되는데, 예를 들어 구요비서울대교구 보좌주교는 북아프리카 알제리에 있던 옛 로마 제국의 속주 도시인 스파스페리아의 명의주교이다.

명예주교(名譽主敎, Emeritus Bishop, Episcopus emeritus)
교구장으로 봉직하다 여러 이유로 교구장 자리에서 물러나 통치권이 사라진 주교를 일컫는다. 명예주교는 본래 교구장으로 재임하던 교구의 명예를 그대로 유지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로부터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받아 2017년까지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재직했던 게르하르트 루드비히 뮐러 추기경은, 현재도 독일에 존재하는 레겐스부르크 교구의 명예 주교(emeritus bishop)이며, 2000년 정년 도래로 사임한 윤공희 빅토리노 광주대교구장은 퇴임 후에도 광주대교구 명예대주교를 받고 있다.

이는 "가톨릭교회법 제2권 하느님의 백성 제 2부 개별 교회와 그 연합 제1장 개별 교회와 그 안에 설정된 권위 제2절 주교 제2관 교구장 주교 제402 조 ① 직무의 사퇴가 수리된 주교는 자기 교구의 명예(퇴임) 교구장의 명의를 보존하고, 본인이 원하면 그 교구 내에 거주지를 보존할 수 있다. 다만 특수한 사정 때문에 사도좌가 달리 조처하는 특정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에 따른 것으로, 실제로 뮐러 추기경은 레겐스부르크 교구장직 사임 이후 다른 교구의 명의 주교로 임명받지 않았기 때문이다.[57]

한편, 요제프 라칭어 신부는 1977년 3월에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뮌헨-프라이징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6월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81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를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뮌헨-프라이징 대주교직은 사임했으나 명의로 남았고, 1993년 주교급 추기경에게 주어지는 Velletri-Segni의 명의 주교가 되면서 '사도좌가 달리 조처하는 특정한 경우'가 되었다. 2002년 주교급 추기경단장에게 주어지는 오스티아(Ostia)의 명의 주교가 되었다. 현재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도 대전교구 교구장직을 사퇴했으나 명예는 남아 있다.

명의주교도 교구장 주교처럼 만 75세 이상이 되면 교황에게 사의를 표명하도록 권고되는데, 은퇴 후에는 "OO교구 명예 보좌주교"나 "명예 교황대사" 등 마지막 맡았던 보직에 "명예"를 붙인 타이틀로 불리게 된다. (즉 명의주교직도 끝난다. 명의주교직도 현직주교에게만 적용된다. 다만, 유대가 해소되지 않았거나 사망하지 않은 명의주교의 명의교구는 다른 주교에게 배정되지 않는다.) 한편, 명의주교가 바로 추기경으로 서임받는 경우에는 기존 명의주교직을 사임시킨 후[58], "OO성당 명의사제(혹은 부제)"직만을 부여한다. 보좌주교가 교구장 주교로 임명받을 때도 역시 명의주교좌의 유대를 해소하며 OO교구장 주교가 된다.

5.2. 한국 주교들의 여러 기록

5.3.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사도 전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주교/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사도 전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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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한국 천주교의 '부주교' 용어

한국 천주교에서는 70년대까지 '부주교'라는 용어가 활발히 사용되었다. 그런데 80년대 초반까지도 사용된(출처) 이 호칭은 사실 '부교구장 주교'나 '보좌 주교' 등의 개념과는 달리, 주로 주교가 아닌 사제에게 부여되었다.[70] 가령 유명한 성가 작곡가인 이문근 신부(요한, 1917~1980, 1944년 수품)나 인보성체수녀회의 창설자인 윤을수 신부(라우렌시오, 1907~1971, 1932년 수품)서울대교구 부주교를 역임한 바 있다.

이 '부주교' 용어는 바로 현대의 '총대리 사제'에 대응된다. 보좌 주교가 없는 교구에는 현재도 총대리에 주교가 아닌 사제가 임명되어 있는데, 이들의 직책을 당시에는 부주교라고 번역했던 것이다.[71] 따라서 한번 주교로 임명되면 다시 주교가 아닌 사제로 돌아가지 않는 보좌 주교와 달리 이때의 부주교는 대부분 지금의 총대리 사제처럼 임기를 마치고 부주교 직책에서 해제되어 일반 사제로 돌아갔다. 물론 총대리 직책을 맡을 정도면 명망 있는 사제가 맞으므로, 부주교를 역임한 사제가 나중에 진짜 주교품을 받는 일도 꽤 있었다.

장병화 주교, 김재덕 주교, 권 야고보 주교와 박 토마스 주교는 총대리 사제에 해당하는 부주교 직책을 역임한 후 주교가 된 사례이다. 장병화 주교는 부산교구의 부주교 역임 중 다른 직책의 사제로 돌아가지 않고 마산교구의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고(출처), 김재덕 주교는 전주교구의 부주교를 역임한 후 다른 직책의 사제로 봉직하다가 다시금 전주교구의 부주교 역임 중 전주교구의 교구장 주교가 되었다(출처). 권 야고보(James Michaels) 주교는 광주대교구 부주교 역임 중 광주대교구 보좌 주교로 서품되었고, 박 토마스(Thomas Stewart) 주교는 춘천교구 부주교 역임 중 춘천교구 교구장 주교로 서품되었다.

혼란을 일으키는 지점은, 기존의 '부주교' 용어가 점차 '총대리'로 대체되고 난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부주교' 용어가 쓰이는 경우에는 현대의 '(교구장직 승계권을 가진) 부교구장 주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원주교구김지석 주교(출처)나 수원교구최덕기 주교(출처)는 지금의 용어로는 부교구장 주교였는데, 이들을 부주교라고 칭했던 사례가 있다. 이때의 부주교는 기존의 부주교와는 품계와 교구장직 승계권의 두 중요한 지점에서 다르다. 현대에는 '총대리 사제'와 '부교구장 주교'로서 두 개념을 확실히 구분해서 일컬으며, '부주교'라는 용어는 한국 가톨릭에서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용어가 되었다.

그렇다면 왜 주교품을 받지 않은 성직자를 '부주교'라고 불렀을까?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 현대의 한국 천주교 교구는 1962년에 교계 제도가 정착하기 전까지 대목구나 지목구였다. 그때는 지역의 정식 책임자가 주교인 곳과 신부인 곳이 있었기에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지역 책임자가 주교품을 받았는지 여부를 명확히 인식하지 않았다. 둘째, 예전에도 한국에서 '주교'라는 말의 엄밀한 뜻은 '주교품을 받은 자'였으나, 일상적으로 쓰는 '주교'라는 말에는 한동안 '주교품을 받은 자'와 '교구 책임자'라는 의미가 혼재되어 있었다. 2020년대에는 '천주교 OO교구장 주교 김 아무개'라는 표현으로 직책과 성품을 명확히 드러내지만, 1990년대까지도 한국 천주교에서는 '서울 주교', '대구 주교'와 같은 뭉뚱그린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다. 여기에 나온 '주교'를 그때의 언중이 '주교품을 받은 자' 대신 '교구 책임자'라고 인식했다면, 총대리 신부에게 붙이는 '부주교'라고 호칭이 그때의 언중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6.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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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한국 대교구의 교구장인 암브로시오스 조그라포스 대주교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주교들을 세우셔서 교회들을 이끄는 지도자요 목자로 삼으셨다… 주교의 위엄은 교회에서 무척 필요한 것이, 주교 없이는 교회나 신자들도 없는 것이다. 사도들의 계승자인 주교는 안수를 통해 주님께서 베푸셨던 푼 것을 매고 맨 것을 푸는 성령의 은혜를 이어받은 것으로 지상에서 하느님의 살아있는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도시테오스의 신앙고백 제10조.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는 '정교회 한국 대교구(Metropolis of Korea)'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청 산하의 지역 교구[72]이며, 현재 교구장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겸하고 있는 '암브로시오스 조그라포스(한국명 조성암)' 대주교로 제2대 교구장이다.

초대 교구장은 대교구 설정 전까지 한국을 관할하던 뉴질랜드 대주교의 보좌 주교 겸 질론의 주교(명의) 소티리오스 트람바스가 재임했다. 이후 2008년 소티리오스 대주교는 은퇴하여 가평 수도원에 머물며 피시디아의 대주교(명의)로 재임했다. 한편 현 암브로시오스 대주교 역시 소티리오스 대주교 재임기간 동안 질론의 주교직을 승계받아 보좌 주교로 봉직한 경력이 있다.

7. 성공회

주교는 특별히 한 교구의 사도, 수석 사제, 목자로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대표합니다. 또한, 온 교회의 믿음과 일치와 규율을 수호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와 함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상의 화해와 교회의 발전을 위해 일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목을 이어갈 사람에게 성직을 서품합니다.
성공회 기도서 《신앙의 개요》 제12장 제74문의 답

대한성공회에서는 3개 교구(서울, 대전, 부산)가 존재하며, 성공회는 사제단 중에서 후보[73]를 등록하여 사제단, 평신도 대표로 이뤄진 선거를 통해서 교구장 주교가 선출된다. 교구장 주교 선출에 평신도까지 참여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가장 민주적 절차로 교구장을 선출하고 있는 셈이다.[74]

대한성공회의 교구장 주교 선출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현임 교구장의 정년은퇴 1년여를 남겨둔 시점에 교구의회를 열어 투표를 하는데, 투표 방식은 교구장 주교가 되었으면 하는 사제의 이름을 투표지에 적어내는 방식으로 한다. 성직자와 평신도, 양원 출석인원이 3분의 2 이상이고, 그 중에서 양원 모두 3분의 2 이상의 표를 얻은 사람이 나온다면, 그가 그 즉시 당선자가 된다. 한 회기 중 최대 20번까지 투표가 가능하고, 20번의 투표에도 당선인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2개월 후에 이를 전국의회로 넘겨 마찬가지로 최대 20번의 투표를 진행하여, 이를 당선자가 나올 때까지 반복한다. 당선자가 나오면, 각 교구와 잉글랜드 성공회가 공동으로 제공하는 주교 연수 프로그램을 수료하도록 한 뒤에 주교로 서품한다.
제 10 조(교구장 주교 후보 선출, 서품 및 승좌) 기존교구의 교구장 주교 후보 선출, 서품 및 승좌하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1. 교구장 주교 후보의 선출은 교구의회에서 행한다.
2. 교구장 주교 후보의 피선자격은 주교 또는 사제로 하되, 30세 이상이어야 한다.
3. 교구장 주교의 선출은 정년 150일 전까지 후임 교구장을 선출하여야 한다.
4. 교구장 주교의 유고 시에 관리주교는 그날로부터 2월 이내에 교구장 주교 선출을 위한 임시 교구의회를 소집하여야 한다. 임시 교구의회 소집일은 해당 교구 상임위원회가 정하고, 공문으로 소집 통보한다.
5. 교구장 주교 후보의 당선자 결정은 교구의회에서 주교를 포함한 성직자과 평신도원이 따로 투표하되 각각 재적대의원 3분의 2 이상 출석과 출석대의원 3분의 2이상의 득표를 동시에 얻은 자로 한다
6. 투표는 당선자가 있을 때까지 계속하되 1회기에 10회를 초과하지 못한다. 그래도 당선자가 없을 경우에는 30일 이내에 재선거를 실시한다. 재선거에서도 10회차 투표까지 당선자를 정하지 못한 때에는 2월 이내에 전국의회에서 선출한다.
7. 교구장 후보의 확정은 당선자의 승낙과 주교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당선자가 승낙하지 아니하거나 주교원의 동의를 얻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교구장 주교 또는 관리주교는 2월 이내에 선거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취하여야 하며 위의 경우 해당자는 피선거권이 상실된다.
8. 확정된 교구장 주교 후보가 사제일 때에는 해당 교구의 교구장 혹은 관리주교는 의장주교와 협의하여 서품과 승좌일을 정하고 의장주교의 집전과 현직 주교 3인 이상의 안수로 서품을 받고 승좌한다. 교구장 주교 후보가 주교인 경우에는 의장주교의 집전으로 승좌한다.
9. 전국의회에서 교구장 주교 후보를 선출하게 된 때에는 다음의 절차와 방법에 따른다.
㉮ 의장주교는 10일 이내에 전국상임위원회를 소집하여 전국의회 개최 및 투표일을 공고한다.
㉯ 당선자의 결정은 전항 5호의 규정에 따른다.
㉰ 5회차 이내에 당선자가 정해지지 않은 경우에는 투표 6 회차 부터 양원 합계 최하위 득표자 1인을 제외하며, 최종 2인의 후보자 중 결선 투표하여 2/3 이상의 득표자를 당선자로 한다.
관구헌장, '제3장 주교' 중 제10조(교구장 주교 후보 선출, 서품 및 승좌)

한편, 한국 성공회의 보좌주교는 후보자를 의회에서 결정하지 않고, 교구장 주교가 직접 제청하여, 교구의회와 관구장 주교의 동의를 받아 확정하도록 각 교구 법규에 명시되어 있다. 가톨릭의 보좌주교와 다르게 (정년이 되지 않았더라도) 현직 교구장이 퇴임하면 같이 퇴임해야 하고, 정년까지 자리를 유지하려면 후임 교구장에 의해 다시 보좌주교로 임명받아야 한다. 물론 보좌주교도 정년 이전까지는 당연히 교구장 후보가 된다. 참고로, 지금까지 한국 성공회 역사에서 보좌주교였던 성직자는 임휴고(휴 존 엠블링) 주교[75]차애덕(아서 어니스트 차드웰)[76]주교 단 둘 뿐이다.

주교는 한 번 서품받으면 본인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죽을 때 까지 '주교'라는 이름이 유지되며, 성공회에서 역시 이 점은 유지된다. 하지만 정년이 65세로 75세인 천주교보다 10년이나 정년 나이가 낮다보니 교구장 교체가 빨라서 임기제로 종종 오해하곤 한다.[77]
파일:케이 골즈워디 주교.jpg
성공회의 첫 여성 주교인 호주 성공회 소속 케이 골즈워디 주교

성공회에서는 여성이 성직을 수행하는 것을 제한하지 않으므로 여성도 주교가 될 수 있으며, 호주 성공회에서 케이 골즈워디 주교가 첫 여성 주교로 서품되었다. 영국, 미국, 일본 등에도 여성 주교가 존재한다. 다만, 한국 성공회에선 아직 없다. 일본관구에서는 2022년 4월, 홋카이도교구장으로 사사모리 타즈(笹森田鶴: ささもり たづ) 마리아 주교가 수품 및 승좌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최초의 여성주교 서품 사례이다.

원래 영국 성공회(Church of England) 관할에 있었던 대한성공회에서는 주교가 가장 높은 직위였으나, 1990년 서울교구장이었던 김성수 시몬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하면서 한국인 최초의 성공회 대주교가 되었고, 1993년 대한성공회가 캔터베리 대교구 관할에서 벗어나 세계성공회 독립 관구가 되어 관구장 주교가 대주교로 불리던 때가 있었으나 (정철범 대주교 등) 공식적으로 대한성공회는 현재 대주교라는 호칭을 쓰지 않고 의장주교라는 호칭을 쓴다. 의장주교는 전국회의를 소집하고, 한국관구를 대표하는 주교이지만 자신의 교구 관할권 외의 다른교구 관할권은 가지고 있지 않다.[78]

8. 나무위키에 문서가 개설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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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도출판사의 박미경 역주판으로부터 발췌.[2] 천주교의 기본 주교 문장.[3] 구한말일제강점기 가톨릭 문헌에는 종종 '감목'이라는 표현도 보인다.[4] 가톨릭에서는 대주교는 주교와 같이 각하를 쓴다. 정교회에서는 불교에서 유래한 경칭인 '예하'를 쓰기도 하고, 성공회에서 대주교(Archbishop)의 경우에는 은하(恩下 = Your Grace, 저하라고도 번역됨)라고 특별히 칭하기도 한다.[5] 애초에 각하라는 표현 자체가 주로 대통령을 지칭하는 표현이었기 때문에 어감도 그렇고 자칫하면 오해를 살수있기 때문이다.[6]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주교가 사제와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는다.[7] 성공회의 사도계승 여부는 논란이 있는 주제이다.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좌는 1922년 성공회의 사도전승 여부를 긍정하였으며, 복고 가톨릭 (모든 미국의 성공회 주교들은 복고 가톨릭의 주교들에게 안수받았다.) 또한 성공회의 사도전승을 인정한다. 반면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공회의 사도전승 여부를 부정한다.[8] 영어로는 주교나 감독 모두 'bishop'으로 같다.[9] 정교회가톨릭+성공회가 서로 다른 이름을 쓰긴 하는데, 라틴어그리스어냐로 차이가 갈려, 서로 다르지만 직책의 유례는 똑같으며 의미도 같다. 한국어 번역도 유사하다. 가톨릭과 성공회는 '부제'라고 하며, 정교회에서는 '보제'라고 한다. 이후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가톨릭/성공회의 용어를 따름.[10] 기본 직계만도 10여 개에 이른다![11] 계급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교회의 성직은 본질적으로 봉사직이기 때문에, 실제상이 어떻든 취지를 존중해야 한다.[12] 단 슬라브 계통 정교회에서는 총대주교, 관구장 주교, 대주교, 주교 순으로 직책이 이루어진다.[13] 여기는 위트레흐트 대주교가 명목 상의 종교지도자 역할을 한다.[14] 사실 교황도 초기 기독교 시기에는 단순히 여러 주교들 중에서 명목상 최고지도자의 역할만 했다. 다만, 교황이 어쩌다가 서방교회 전체를 이끌다보니, 그 권한이 크게 불어나면서 지금같은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정교회의 명목상 수장인 세계 총대주교동로마 제국유럽 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던 시절에는 다른 교구 소속의 총대주교들을 하급자인양 취급한 적이 있다.[15] 고위성직자치구, 자치수도원구[16] 정확하게는 제1사도인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주교가 사용하는 직함 중의 하나가 교황인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법 상 메인이 되는 직함은 로마 주교이지 교황이 아니지만, 주교단의 단장으로서의 직함이 워낙 상징하는 바가 크므로, 교황이라는 명칭을 기본 칭호인 로마 주교보다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17]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는 도시마다 설정되는 주교구를 중심으로 전파되고 발전하였고, 중세 동안 도시공동체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형성했으며, 근대 시민사회의 형성과 공화주의의 존속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관해서는 자유도시코뮌 문서 참고.[18] 오늘날에도 스페인 우르헬(Urgell, 카탈루냐어로는 우르젤)의 주교는 안도라 공국의 대공(Prince)을 겸하고 있다.[19] 대주교는 4단, 총대주교와 추기경은 5단의 술이 달린 모자. 교황의 문장에는 삼중관과 교황권을 상징하는 열쇠 도안을 그려 넣는다.[20] 다양한 곡조가 존재하나, 현재 쓰이는 곡조는 로렌조 페로시 몬시뇰(Lorenzo Perosi, 1872~1956)이 작곡한 것이다. 페로시 몬시뇰은 사제 수품 4년차인 1898년부터 시스티나 성당 성가대 종신 지휘자 자격으로 교황청 내에서 교황의 음악교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당대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는 천재 음악가로 명성이 높았다.[21] 한스 큉, "가톨릭의 역사, 70-71.[22] 비슷한 예로 '짐'을 황제 전용으로 바꾼 진시황이나 고위 관료들에게 두루 사용되던 경칭이던 '각하'가 박정희에 의해 대통령을 일컫는 고유 명사가 된 것 등이 있다.[23] 즉 아우구스티노는 인노첸시오 1세가 교황의 최종 결정 권한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기 전부터든지, 혹은 그 이후일지라도 '그렇게 선언할 수 있는' 로마의 권위 자체를 인정하고 지지했다는 뜻이다.[24] 한스 큉, "가톨릭의 역사", 72-74.[25] 그도 그럴 것이, 비록 그리스도교가 주류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점차 로마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고는 해도, 근본적으로 로마 황제는 세속 시민사회의 공화주의적 법제에 근거한 지위였지, 종교적 권위에 근거하는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대에나 중세에나 로마 황제는 동서를 막론하고 (명목상으로든 실제상으로든) 제국시민이 추대 및 승인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래서 혈연이나 전임자의 지명과는 무관하게 대중적 동의를 얻는 자가 제위를 계승하기도 했고, 황제가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폐위되기도 했으며, 때때로 시민사회 내 견해차로 파벌이 나뉘어 내전까지 벌어졌다.(예컨대 수도-지방 갈등) 즉, 교황에게는 황제를 옹립할 근거가 없었으므로 동로마 세계가 반발했던 것이다.[26] 754~787년에 일어난 성상 논쟁, 867년 필리오케 문제. 이미 필리오케 논쟁으로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를 파문한 적이 있었다.[27]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28] 삼두 체제+콘스탄티노폴리스+예루살렘[29] 새 로마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위상 강조[30] 다만, 이 시기 파문이 동서교회를 완전히 갈라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 파문은 유야무야되었고, 이후로도 동서교회는 교류를 지속하였으며,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동로마 황제 3인 간 치열한 야합과 갈등이 반복되었다. 동로마가 저지른 라틴인 학살 이후 동방에 대한 악감정이 최고로 치달은 시기에 소집된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교황청의 회군 지시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이 동로마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지고서야 비로소 양자 간 관계는 회복불능으로 치닫는다.[31] 물론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만 하더라도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는 아니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어디까지나 제국 내 종교 중 하나였고, 세속적 공민주권에 근거하였던 로마 제국에서는 각 종교를 황제 등 세속 권력 하에 두었다. 로마 황제는 예로부터 최고 사제를 겸했고, 이는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자리잡은 이후에도 한동안 존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황제는 교회에 적법하게 관여하였다.[32] 제2차 라테란 공의회에서는 엄연히 또 한 사람의 주교인 교황을 선출하는 방식도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확립되었다. 교황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추기경에게만 부여한 것이다.[33] 하지만 실제 지역 교회들은 여전히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다. 고유의 암브로시오 전례를 고집한 북이탈리아 밀라노 교구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 자치에 자긍심을 느끼던 많은 지역 주교들은 이러한 조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무렵 지역 교회와 로마 교회 간 갈등을 유발하였고, 때때로 서임권 투쟁과 같은 세속 군주제후와의 갈등이나 코뮌 운동과 같은 도시공동체의 자치권 투쟁과 접목하기도 하였다.[34] 알브레히트는 독일을 통일프로이센 왕국의 전신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호엔촐레른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1세 네스토어였고, 사촌은 프로이센 공국의 설립자 안스바흐의 알브레히트 공작이었다. 그는 교회법을 위반하여 20세 이전에 주교 서품을 받았고, 이후 겸직을 금지하는 교회법을 어기고 돈으로 할버슈타트 주교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까지 올랐다. 거기에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최선임 선제후마인츠 대주교 자리가 나오자 푸거 가문에게 대출을 받아 어마어마한 금액을 빚졌고 이를 갚으려고 8년간 면벌부 판매 수입의 절반과 초입세를 교황 레오 10세에게 바치기로 합의했을 정도로 썩은 인물이었다. 정작 그의 조카 요아힘 2세 헥토어는 숙부를 매우 싫어하고 루터교회로 개종했던 친척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1539년 개종했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신성 로마 제국에서 루터교회가 공인되면서 종교 개혁을 실시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은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35] 하지만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신성 로마 제국선제후였던 쾰른 대주교 같은 경우 뮌스터파더보른의 주교를 겸하기도 했고, 뷔르츠부르크 주교는 밤베르크 주교를 겸하기도 했다.[36] 동창은 물론이고, 직무 중 만난 모든 선후배.[37] 주교가 되려면, 신학, 성서학, 교회법학 중 하나의 박사 학위를 요구하나 석사도 가능하다.(교회법 제 378조 1항) 현재 한국의 모든 사제들은 석사과정을 수료 내지는 졸업하고 서품받기에 학력상의 결격사유는 없지만, 외국에서는 학사 학위만 받고 서품되는 사제가 많다.[38]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흔히 군대에 비유해서 별을 단다고도 하지만, 육군사관학교 한 기수 250명 중 35명 정도(약 15%)가 준장에 오른다는 것에 비하면, 산술적으로 주교가 된다는 것은 장군이 되는 것보다 열 배 이상 어려운 일이다.[39] 일반 평사제가 주교, 대주교, 추기경 혹은 교황을 비롯한 주교 품위의 성직자로 서품받는 모든 경우를 말한다.[40] 오스티아 명의주교는 추기경단의 수석으로서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유고시에는 콘클라베 주재자가 된다. 2019년부터 임명되는 모든 오스티아 명의주교는 임기가 5년으로 제한되고, 교황의 허가를 받으면 연임 가능하다.[41] 이러한 논리는 평사제 즉, 일반 사제에게도 적용된다.[42] 일반 교구장 주교나 보좌주교도 교회에 공로를 세우면, 추기경 품위를 주는 경우도 있지만, 개인 명의의 대주교로 임명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이런 고위 성직자를 개인 명의의 대주교(archbishop of personal title)라고 부른다. 경성감목구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일례. 이들은 관구장 대주교가 아니어서, 팔리움을 두르지 않는다.[43] 추가로 교황대사도 역시 명의대주교이기 때문에 팔리움을 두르지 않는다.[44] 대표적인 예시로 정진석 추기경이 있다. 정 추기경은 199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한 후 당시 교황대사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모란디니 대주교로부터 팔리움을 받았다.[45]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 전 대구대교구최영수 대주교의 경우 당시 교황대사였던 에밀 폴 체릭 대주교로부터 대신 팔리움을 수여 받았다. 이에 대한 이유는 문서 참조.[46] 교구사제가 주교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혼남이 성직자가 되는 것이 가능한 정교회에서도 주교만큼은 결혼하지 않은 사제를 선출하는 것이 불문율인지라, 상당수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교구사제는 주교가 되지 못한다. 정작 신자들 가까이에서 사목하는 교구사제들이 주교가 되지 못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교회에서도 꽤 골치 아픈 논쟁거리인데, 그렇다고 유부남이 주교가 되는 걸 허용하기도 뭐한지라(…), 이 불문율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47] 참고로 정교회의 경우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을 제외하면, 국교로 공인된 교회인 경우, 각각의 독립 교회들의 총대주교를 해당 국가의 왕이 임명했거나 선출에 중대한 역할을 했다. 제정 러시아 시절의 러시아 정교회의 총대주교는 러시아 황제가 임명했는데, 황제가 총대주교를 지명하지 않아서 100년 간 총대주교좌가 공석이었던 적이 있었다.(...)[48]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방패 아래에 있는 띠는 '팔리움'이라는 견대로, 관구장 대주교에 해당하는 사람만이 이를 문장에 그려넣을 수 있고, 착용 가능하다.[49] (문헌 내 주석)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치넬리 공식 보고서, 『공의회 교령집』(Mansi), 52,1109C 참조.[50] (문헌 내 주석)제1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제2초안, 제4장, Mansi 53,310; 수정 초안에 대한 클로이트겐 보고서 Mansi, 53,321B-322B; 치넬리 선언 Mansi 52,1110A 참조; 또한 성 대 레오, 「설교집」, 4,3, PL 54,151A를 보라.[51] (문헌 내 주석)제1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아드님」, 3, Dz 1792(3011); 교회에 관한 제1의안에 붙여진 주해(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의 말 인용): Mansi 51, 579C; 또한 제2헌장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수정안과 더불어 클로이트겐의 해설: Mansi 53, 313AB; 비오 9세, 교서 Tuas libenter, Dz 1683(2879) 참조.[52] (회칙 내 주석)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헌장, 27항.[53] 덕원자치수도원구 대수도원장 서리 박현동 블라시오 아빠스 포함[54] 사목활동에서 물러난 은퇴 주교를 가리킨다. 교구장은 교회법에 따라 만 75세 이상일 경우 사임을 청하도록 권고하고 있다.[55] 1심 법원은 각 교구에 설치되어 있고, 3심 법원은 로마 교황청에 있다. 아시아 최초로 교회의 검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한동일 신부가 활동한 곳이 로마 교황청 내의 법원들 중 한 곳이다. (한동일 신부는 환속했다.)[56] 예를 들어, 교황청 궁내원장(Prefect of Pontifical Household)인 게오르크 겐스바인 대주교(Archbishop Georg Gänswein)는 현재 이탈리아 마츠게주의 마체라타 현에 있는 폐쇄 교구인 Urbs salvia의 명의대주교이다.[57] 정확히는 임명받을 필요가 없다. 명의주교는 교황대사 등 교구 직권자가 아닌 직분에 주교급 성직자가 필요할 때 주교품을 부여하기 위한 방편인데, 이미 교구장 주교로 있던 사람이 교황청으로 간다고 해서 성사로 부여받은 주교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58] 교회법적으로는 "명의주교좌의 유대를 해소"한다고 표현한다.[59] 한국명 신상원[60] 사망 시점과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1949년 5월 북한 정부가 신상원 주교를 체포하고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몰수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해 북한 정부 인사와 면담하러 갔고 그 해 5월 14일에 체포된 것이 마지막 행적이다. 북한 외무성 제1부장을 지낸 박길룡의 증언에 따르면 홍 주교는 1950년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의 북진으로 조선인민군 지도부가 급히 퇴각할 때 1950년 10월 18일 북한 내무성 정보처 한규만 소좌에 의해 평양에서 총살당했다고 전해지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부분은 없다. 참고로 홍 주교가 총살됐을 때 함께 처형된 사람이 독립운동가였던 고당 조만식 선생이다.[61] 미국 국적의 선교사 겸 수도자 출신 사제.[62] 일설에는 홍용호 주교가 역대 최연소 주교라는 기록도 있다. 이는 홍 주교의 생일과 주교 수품일이 문헌마다 달리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기록으로는 1906년 8월 24일 출생, 1943년 6월 29일 주교 수품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Catholic Hierarchy에는 1906년 10월 12일 출생, 1944년 6월 29일 주교 수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단 생년월일의 문제는 태양태음력 1906년 8월 24일이 태양력으로는 1906년 10월 12일이기 때문에 역법의 차이에서 기록의 차이가 오는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1906년 10월 12일이 정확한 생년월일이 된다. 주교 수품에 대해서는 날짜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한쪽이 연도 오기를 한 것으로 보이며, 평양대목구장으로 임명된 것이 1943년 3월이고 주교 서품식은 대개 주교 임명 수개월 안에 거행된다는 것을 감안할 때 1943년이 정확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래서 가장 유력한 1906년 10월 12일 생, 1943년 6월 29일 수품설을 따르면 홍 주교가 출생으로부터 36년 10개월이 되었을 때 주교로 성성되었다는 뜻이기에 최연소 한국인 주교는 홍 주교이다. 그러나 만약 1944년에 주교 서품식을 거행하였다면 홍 주교가 출생으로부터 37년 8개월에 주교가 되었다는 뜻이며, 이 경우에는 출생 후 37년 2개월에 대구대교구 보좌주교가 된 이문희 바오로 주교가 최연소 한국인 주교가 된다.[63] 청주교구장 27년 9개월 + 서울대교구장 13년 10개월[64] 광주대교구장 재임 시절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참상을 눈앞에서 목격했다.[65] 한국 가톨릭 교회 사상 최초의 주교 회경축. 사제품은 1950년에 받았기 때문에 성직자 생활기간은 70년을 훌쩍 넘겼다.[A] 서울대목구장 겸직[A] [A] [69] 수원교구장 겸직. 노기남 대주교의 은퇴에 따른 교구장 서리 재임[70] 문헌 상으로는 주교가 아닌 사제를 부주교로 칭한 자료가 많지만, 기사와 같이 주교품을 받고 당시 광주대교구의 보좌 주교로 봉직하던 권 야고보 주교로 추정되는 인물을 부주교라고 호칭한 자료도 있다.[71] 다만 교구에 한 명만 임명되는 총대리 사제와 달리 사례와 같이 두 명의 부주교가 임명된 적도 있었다. 부주교의 직책을 현재의 각종 분야별 교구장 대리 사제로 폭 넓게 보아도 문제없을 듯하다.[72] 즉, 세계 총대주교청에 속한 자치 교회이다.[73] 대한성공회에서는 교구장 선거에 입후보과정이 전혀 없고, 교구 내의 만 30세 이상 65세 미만 사제 모두가 교구장 주교 후보이다. 1997년까지는 입후보제도가 있었으나, 파벌 정치의 폐단을 막기 위해 관구 차원에서 이를 폐지했다.[74] 그런데 사실 고대~중세 초의 초기 그리스도교 사회에서는 서품 자체는 인접 주교에게 받더라도 후보자를 지역사회에서 자체적으로 선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는 그 무렵 주교가 그 지역의 교회는 물론 세속행정도 떠맡아야했던 시대적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이는 상당히 전통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75] 1926~1930 성공회 조선교구 보좌주교. 당시 한반도 전역을 관할하던 조선교구를 서울교구와 평양교구로 나누려던 마크 트롤로프 주교와 의견차이로 별 성과없이 본국으로 귀국했다.[76] 1951~1963 성공회 한국교구 보좌주교. 1950년 한국전쟁으로 납북된 교구장 세실 쿠퍼 주교를 대신해 교구의 사목을 맡기 위해 주교로 서품되었으며, 1953년 세실 쿠퍼 주교가 돌아올 때까지 교구장 서리를 맡았다. 이후 세실 쿠퍼 주교의 사임으로 인한 교구장 공석에도 교구장 서리로서 교구를 지켰으며, 존 데일리 주교의 한국 도착 및 교구장 승좌 이후에도 보좌주교로서 사목을 이어나갔다.[77] 성공회 내에서도 성직자의 정년을 연장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78] 말 그대로 전국의회를 소집하고 진행하는 '의장'의 역할밖에 없는셈. 그래도 주교원의 의장이고, 대한성공회를 대표하니 결코 작다고도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