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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21:33:00

펠라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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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펠라기우스.jpg

1. 개요2. 생애3.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논쟁
3.1.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3.2. 죄에 대한 이해3.3. 은총에 대한 이해3.4. 의인(구원론)에 대한 이해
4. 등장 매체5. 참고 서적

1. 개요

펠라기우스(Pelagius, 360년?~418년?)는 브리튼 섬 혹은 아일랜드 섬 출신의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5세기 초 로마에서 살았던 브리튼인 또는 게일인 평신도이다. 원칙주의적인 금욕적-종교적인 생활을 강조하여 방탕에 빠진 로마의 가톨릭을 개혁하려 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결정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의 격렬한 논쟁을 겪은 끝에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2. 생애

펠라기우스의 출생이나 약력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전통적으로 브리튼 섬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380년경, 펠라기우스는 법을 공부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로마로 갔으며, 거기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비도덕적이고 방탕한 생활에 경악하고 곧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로마에서 회심한 펠라기우스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삶을 일상 속에서 구현할 것을 호소하며 엄격한 도덕개혁운동을 전개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방종에 저항하였다. 특히 그를 분노하게 한 것은 육체적 약함을 핑계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변명하는 방만한 태도였다. 펠라기우스는 이러한 태도에 반대하며 "인간은 원하기만 하면 선을 완전하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육체의 약함은 단지 핑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의 힘을 높이 평가하는 수도자 전통 속에 있었던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교적 관습[1]들을 제거하고 로마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405년경부터 바오로 서간에 대한 강해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강해와 설교에 탁월한 재능으로 단숨에 로마 공동체에서 유명세를 탔고, 390~99년 사이에 만나게 된 켈레스티우스를 회심시키기도 하였다.[2] 그의 지지자들 중에는 귀족 출신이나 젊고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405년부터는 그는 바오로 주석을 저술하여 아담의 죄, 세례, 자유의지, 은총 이해에 관한 본인의 견해를 피력했다.

409년에 펠라기우스는 로마를 떠났다. 그는 북아프리카로 갔는데, 이는 아프리카가 로마보다는 자유로운 지적 토론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려 하였지만, 당시 도나투스주의[3]와 논쟁을 하고 있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후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갔고 그즈음에 히에로니무스와 갈등을 빚었다. 히에로니무스는 오리게네스의 신앙을 박멸하는데 열중했었는데 그가 보기에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새로운 오리게네스주의였던 것이다.[4]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릭이 로마에 입성하고 로마를 약탈하였다. 시민들은 로마에서 아프리카로 피난을 가기 시작했는데, 펠라기우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피난 가면서 히포를 지나갔다. 그곳에서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그때 그는 카르타고에서 열린 15차 회의에 참석하여 히포에 없었다.[5] 결국 둘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411년, 로마 제국에서 유명한 귀족 아니치(Anicii) 가문[6]의 딸인 데메트리아스(Demetrias)가 상류층의 삶을 버리고 수녀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회심에 그녀의 부모님은 당시 저명한 신학자들에게 영적인 권고를 부탁하였고, 이에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펠라기우스가 편지를 써보냈다.[7] 이들의 편지는 은총론에 관한 격렬한 논쟁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다.[8]

414년 펠라기우스는 히에로니무스의 비판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본성의 관하여(Liber de natura)>를 저술하였다. 펠라기우스의 제자들이 이 책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보내자 펠라기우스를 대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태도는 근본적으로 변했다. 그 이전에는 펠라기우스에게 존경을 표하고 문학적 자질과 우수성에 찬사도 보냈던 그지만, 이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펠라기우스는 당장 교회에서 축출시켜야 될 이단이 되었다.[9][10] 그는 펠라기우스에 반박하는 <본성과 은총에 관하여(De natura et gratia)>를 415년에 저술하였다.

결국 415년 7월, 요하네스 주교에 의해 회의가 열렸고, 교황 인노첸시오 1세에게 이 문제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펠라기우스는 14명의 주교들에게 심리를 받았지만 자신의 정당함에 대해 설득하였다. 그러나 416년의 주교회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는 이단이다"라는 자신의 입장을 밝혔고, 펠라기우스는 정죄되었다.

418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칙령을 내려 펠라기우스를 로마에서 추방하였다. 같은 해에 열린 카르타고 주교회의(카르타고 공의회)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향해 대대적으로 정죄하였고, 교황 조시모는 <회람서신>을 통해 펠라기우스를 파문한다. 이후 펠라기우스는 팔레스타인에서마저 추방당한다.[11][12][13]

이후의 펠라기우스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저술들도 현재는 많이 남아있지 않고, 있더라도 원저자가 정말 그인지 의심스러운 저작들도 있어 그의 사상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3.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논쟁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학적으로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 서있던 사람들이었다. 인간의 능력과 자유를 강조하며 원죄를 부인했던 펠라기우스와 하느님의 절대 주권과 은총 그리고 인간의 전적 타락을 주장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든 부딪힐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못마땅해 했는데 특히 <고백록>의 “당신이 명하시는 것을 주소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명하소서.”(고백록,10.40)라는 구절을 인간을 무기력한 존재로 만든다고 굉장히 싫어하였다.

당연히 둘의 견해는 은총론뿐만 아니라 구원론, 세례에 대한 관점, 자유의지론, 원죄론, 칭의론에 대해서도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전체적으로 이 둘의 주장은 교회사 2천 년 동안 반복해서 논란이 될 입장이 된다.

3.1.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

펠라기우스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에 자신의 죄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자유로우며 이해할 수 없는 약함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느님이 인간의 결정에 직접 간섭하는 것은 인간의 순수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느님은 자신이 직접 인간을 지었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이 가능한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이 명령한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고, 또 지켜야 했다. 하느님이 인간이 못 지킬 명령 따위 내릴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약해서 계명을 못 지켰다느니 하는 소리는 전부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적인 숙명론은 거부하면서 인간은 제한된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지만 이 자유는 죄로 얼룩져 계속 죄를 짓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포로 된 자유의지’였으며, 오로지 은총만이 이 경향에서 해방시켜주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자유의지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는 천칭의 비유를 들었다. 천칭에 아무 것도 올려놓지 않으면 천칭은 균형을 가진다. 그러나 한쪽 접시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으면 천칭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상태가 인간의 자유의지가 처한 상태이며, 따라서 인간은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악한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고, 타락한 인간은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3.2. 죄에 대한 이해

완전한 인간 본성을 강력히 피력했던 펠라기우스에게 있어, 죄란 하느님을 거슬러서 고의적으로 저지르는 행위였다. 인류는 죄 없이 태어났고, 본성상 죄된 성향이란 찾을 수 없다[14] 인간의 능력은 전혀 훼손되거나 손상되거나 하지 않으며, 인간은 언제든지 하느님의 계명을 수행할 수 있다. 육체의 약함은 변명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교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도 이렇게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만 가능했다. 이러한 그의 낙관적인 인간관은 아우구스티누스식 원죄론을 철저하게 부정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담 안에서의 죄인을 얘기할 때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는 아담 당시로 끝나며 후의 인류에게는 관계가 없었다.

젊은 시절 흑역사를 많이 보낸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지성을 역설하였다. 또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된 성향을 갖고 태어나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백록>이나 다른 반反펠라기우스 책에서 갓태어난 아기도 죄를 갖고 태어남을 증명하고자 했다. 태어나자마자 우는 것을 그는 강력한 증거로 제시하였다. 따라서 죄를 씻겨주는 세례를 유아도 받는 것은 필수였다. 죄는 유전되는 것이며 죄의 세력은 인간을 포로로 잡고 있어 인간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 하느님의 은총만이 인간을 죄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사로, 교회를 병원, 인간을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 자주 묘사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때 그는 가라지의 비유를 들어 평신도나 사제 역시 죄인이며 교회란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닌 죄인과 의인의 혼합된 공동체라 주장하였다. [15]

3.3. 은총에 대한 이해

펠라기우스는 은총을 2가지 면에서 이해했다.

첫째 자연적인 인간 능력: 인간의 능력은 하느님이 활용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절대로 타락하거나 무능해지거나 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성과 의지 능력을 활용해 얼마든지 무죄상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펠라기우스가 이해한 은총이었다.[16]

둘째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깨우침: 십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의무를 알려주며 인간은 이러한 모범을 통해 죄를 피할 수 있었다.[17]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이해에 따르면, 인간은 굳이 하느님의 도움이 없어도 선한 행동을 충분히 해낼 수 있었고 이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을 성취해낼 수 있었다.[18]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은총이란 죄에 의해 무력해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인간을 죄에서 꺼내주시고 치유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본성상 죄인인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베푸시는 관대한 호의가 필요한데, 이 호의가 바로 하느님의 은총인 것이다. 은총을 내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파악한 그에게 있어 은총이란, 인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변화시키고 실제적이고 구원하는 힘을 지닌 하느님의 임재였다. 그에 따르면,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구원”이 일어난다.[19]

그저 가르침을 알려주기만 하는 것이 펠라기우스식 은총 이해였다면 가르침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 가르침에 제대로 접근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까지 도와주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식 은총 이해였다.

3.4. 의인(구원론)에 대한 이해

펠라기우스에게 있어 의인(인간이 하느님께 의롭다 인정받음)의 근거는 인간의 공적이었다. 얼마나 자유의지를 잘 활용하여 하느님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느냐에 따라 심판이 결정된다. 인간에게 부과된 도덕적 책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려면 도덕적 완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의인의 근거는 인간의 공적이 아니었다. 그의 죄에 대한 이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인간이 절대로 죄인이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고 구원을 받으려면 공적만으로는 얻지 못하는 하느님의 값없는 선물인 하느님의 은총이 먼저 필요한 것이었다. 마태오의 복음서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 비유가 그 근거다. 펠라기우스는 "하느님의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 정확하게 보상하신다"고 주장한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이 한 약속에 근거하여 보상하신다"고 반박하였다. 인간이 “믿음”으로 이 약속을 우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하더라고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었다.

4. 등장 매체

영화 <킹 아서>(2004)에 등장하여 아서(클라이브 오웬 扮)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배우는 웨일스 스완지 출신의 오웬 틸(Owen Teale)이다. 사실 아서왕 시대는 100년 정도 후이다.

5. 참고 서적


[1] 주로 마니교. 펠라기우스는 인간 본성의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마니교의 숙명론을 큰 적으로 여겼다. 마니교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그저 신의 손에 놀아나는 장난감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이러한 마니교의 사상을 반박하고자 인간의 책임과 자유를 역설하게 된 것이다.[2] 켈레스티우스는 곧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켈레스티우스도 411년에 정죄된다.[3] 로마 제국의 박해시 그리스도교를 배교했던 인물들이 다시 주교나 성직자 신분에 복귀한 것에 강하게 반발하여, 기존 가톨릭 교회에서 스스로 이탈하려 했던 극단적 분리주의 분파이다. 이들도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논쟁에서 패배하고 이단으로 정죄된다.[4] 심지어는 펠라기우스를 “스코틀랜드의 잡탕죽을 먹고 몸집이 불어난 뚱뚱한 개”로 묘사하기도 했다.[5] 이때 카르타고 회의에서 도나투스파에 대한 관용 철회를 언명했다.[6] 이 가문의 남성들은 모두 집정관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도 역시 집정관이었다.[7] 당시 편지 내용: "우리는 지식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이중의 죄를 짓고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을 알지 못하는 죄이며, 또 하나는 그가 명령한 것을 알지 못하는 죄이다...(중략)...그분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느님 자신의 도움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포이에마, 2013.에서 인용)[8] 아우구스티누스는 411년부터 죽을 때까지 약 20년 동안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 논쟁하는 데 대부분의 남은 생애를 보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은총론은 더욱 정교해졌다.[9] 아우구스티누스를 자극했을 또 다른 요소는 펠라기우스가 <본성의 관하여>의 마지막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론>(3.50)을 인용했다는 것이다.[10] 사실, 두 사람의 신학적 견해는 거의 대척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11] 펠라기우스와 펠라기우스주의가 몰락했지만, 율리안을 중심으로 한 반(半,semi)펠라기우스주의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논쟁을 이어갔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중도적인 입장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구원의 은총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다고 보았다. 이는 사실 초기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과 유사한 것으로, 그는 주교가 된 후에 이 입장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수정하였다(아우구스티누스의 <심플리아키누스께> 참조. 그리고 권진호, <아우구스티누스의 초기 은총론>, <신학논단>76,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2014.06,pp43~77 참조 ) 아우구스티누스는 말년에 최대 논적이었던 반펠라기우스주의와의 논쟁은 끝마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529년 가톨릭 교회의 오랑쥬 공의회에서 반펠라기우스도 이단으로 정죄됨으로써 이들도 쇠퇴하였다.[12] 종교개혁 이후 생겨난 개신교 교파들은 대부분 루터와 칼뱅의 영향을 받아 강력한 이신칭의 구원관을 채택하였고,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가 언급되고 원죄 후 잔존 자유의지가 논의되는 가톨릭 (및 정교회)의 의화론을 반펠라기우스주의로 규정하였고 현재 대부분의 근본주의 개신교 신학자들도 그렇게 판단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됐듯, 6세기 반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한 건 분명 보편교회였기에 가톨릭은 개신교 측이 가톨릭의 구원관을 반펠라기우스주의로 규정하는 것을 굉장히 한심하게 여기며 강력하게 반박한다. 가톨릭 구원관에 대해서는 의인(구원론), 가톨릭 문서를 참고바람. 가톨릭의 구원관과 대략적으로 가까운 교리를 가진 개신교파는 상당수 성공회 고교회파(다만 이 경우는 스스로를 개신교도로 정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다음으로는 아르미니우스파 및 감리회(웨슬리안)인데, 이 두 교파는 교회론, 성사론 및 인간의 응답이라는 측면에서 가톨릭 및 성공회 고교회파와 다르다고 보면 된다.[13] 한편, 영국의 유명 역사가이자 작가인 폴 존슨은 펠라기우스가 아우구스티누스와의 논쟁에서 패배하고 이단으로 정죄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 교회 주교들과 로마 당국간의 유착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로마 명문 귀족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로마 당국은 수용하려 하였다. 그런데 아프리카 교회 주교들이 우수한 종마 80마리를 로마의 기병대대 지휘관들에게 갖다바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을 받아들이도록 부탁했다는 것이다. 즉, 이로 인하여 펠라기우스와 그 추종자들이 위험 분자로 간주되어 추방되었다는 것이 폴 존슨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해석은 두 인물간의 논쟁결과가 성경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싸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정치적인 이유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톨릭, 개신교를 막론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관점이다.[14] 요한복음 3장에 비추어 보면 세례를 받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되어있다. 펠라기우스가 '갓 태어난 아기가 세례를 받고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갓 태어난 아기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었다고 해서 과연 하느님이 자비를 보이지 않고 고통에 떨어지게 할 것이냐고 생각했을 때 그렇지 않기에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부인한 것이다.[15] 현대까지 영향력있는 근세기 개신교 신학자들 중 존 웨슬리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가 펠라기우스주의를 계승했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잇는 칼뱅주의자들에게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웨슬리와 그의 사상을 따르는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의 신학자들은 웨슬리의 신학은 이단자인 펠라기우스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우선 펠라기우스 사상의 근본 토대가 되는 원죄론 및 인간본성에 대한 이해가 웨슬리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기 때문에,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을 부인하지 않는다. 존 웨슬리의 신학은 성공회 고교회파(종교개혁 이래 전통적인 개신교 교의에 충실했던 저교회파에 대비하여 성공회 내에서 보편교회의 정체성과 가치를 강조하던 부류)에 기반한 복음주의로 칭의와 구원에 있어서는 오히려 고대 보편교회의 교부들의 입장과 더 가깝다. 그가 펠라기우스주의를 계승했다는 인식이 퍼진 것은 칼뱅주의자들과 신학적으로 대척점에 서서 이들과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감리회 25개조 종교강령을 참조하라 https://kmc.or.kr/about-kmc/faith-of-kmc[16]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장 17-18절)

대놓고 성경에 어긋나는 주장이다보니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이단으로 정죄될 수 밖에 없다.
[17] 그러나 이러한 은총 이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오직 율법과 가르침만을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말하는 협소한 처사라고 비판했다.[18] 이러한 그의 입장은 지금까지 행위구원론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19]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그의 입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이신칭의 이론을 발전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