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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파라비 | |
<colbgcolor=black> 이름 | 아부 나스르 무함마드 알 파라비 |
영어 | Abu Nasr Muhammad Al Farabi |
아랍어 | أبو نصر محمد الفارابي |
카자흐어 | Әбу Насыр Мұхаммад әл-Фараби |
라틴어 | Alpharabius |
출생 | 870년 |
사망 | 95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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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슬림 철학자. 거의 평생을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살았으며, 그의 아버지는 튀르크계 혹은 타지크계 호위 장교로 알려져 있다.그의 출생지인 '파라브'라는 마을은 오늘날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우트라르인지, 아니면 아프가니스탄의 파리압 주에 위치해있는지 여전히 논쟁중인데 카자흐스탄에서는 그가 우트라르 출신 튀르크인이라고 주장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그가 아프가니스탄 출신 타지크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어린시절 일찍 바그다드로 이사온 이래, 변방 출생인 것이 부끄러워서인지 자신의 고향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아직 당시는 아랍인들이 우대받고 튀르크인 등 비아랍인들은 야만인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2. 사상
조물주는 만유를 지배하지만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이성이다. 종교는 기껏해야 이성의 진리에 대한 상징적인 번역을 제공할 뿐이다. |
이슬람의 주류 종파인 수니파가 아니라 시아파에 속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통 이슬람과는 거리를 두고 사변 철학과 음악학 등을 연구하였다. 서기 3세 티레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포르피리오스[1]의 영향을 받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재구성하였다.
포르피리오스는 신이 무형의 유일신 절대자라고 생각하였으며, 그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과 공통 분모가 꽤 있었다. 따라서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유일신 사상의 배경과 근원에 대한 많은 호기심을 품고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준 그리스 철학자의 대표주자들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당시 구할 수 있는 서적들을 모두 섭렵하다시피하며 재구성한 것.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혐오했던 것처럼 파라비도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사회를 별 볼일 없는 일반 대중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도시적인 사람이었고 시민 간의 자발적인 협력을 칭송했으며, 모든 인간은 도시 생활에 참여해야만 최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의 목표는 바로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플라톤은 사회의 목표인 정의는 도덕적이고 현명한 철학자-왕의 영도 아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라비가 생각하는 철학자-왕은 다른 아닌 신도들의 사령관(아미룰 무미닌)이자 이슬람 공동체의 정치-종교 지도자인 이맘이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이맘이란 시아파가 기다리는 그 알리의 후손이 아니라, 그저 완벽한 통치자를 의미한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한 그의 주석서 <덕의 도시>는 당시 압바스 칼리파들에게 보내는 고소장으로 읽힐 수 있다. 명색이 "신도들의 사령관"이라는 칼리프가 막상 자기 집안 꼴은 엉망이면서 희망을 주는 종교 및 정치 질서를 거론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질문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 / 프레더릭 스타 저
플라톤은 사회의 목표인 정의는 도덕적이고 현명한 철학자-왕의 영도 아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파라비가 생각하는 철학자-왕은 다른 아닌 신도들의 사령관(아미룰 무미닌)이자 이슬람 공동체의 정치-종교 지도자인 이맘이었다. 여기서 그가 말한 이맘이란 시아파가 기다리는 그 알리의 후손이 아니라, 그저 완벽한 통치자를 의미한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한 그의 주석서 <덕의 도시>는 당시 압바스 칼리파들에게 보내는 고소장으로 읽힐 수 있다. 명색이 "신도들의 사령관"이라는 칼리프가 막상 자기 집안 꼴은 엉망이면서 희망을 주는 종교 및 정치 질서를 거론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질문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계몽의 시대 / 프레더릭 스타 저
이슬람 황금기 당시 유명 철학자들 상당수가 칼리파나 아니면 지역 군벌들의 후원을 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것과는 반대로, 알 파라비는 특정인의 후원을 받는 어용 철학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직접 생계를 유지하였다. 자신의 저작들이 유명세를 탄 이후에도 정원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해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알 파라비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예언자가 아니라 철학자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철학은 어떤 종교보다 높은 위상을 가지며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진리를 표명하지만 특정 집단과 연계된 예언자의 상상력이 생산한 종교적 상징은 지역마다 다르다. |
상술한 그의 이슬람관과 사상은 후대 아랍 사회주의 사상가이자 바트당 당원이었던 미셸 아플라크와 나름 유사했다. 미셸 아플라크는 안티오키아 정교회 신도였으나 예언자 무함마드는 아랍계 기독교인이나 아랍 무슬림 할 것 없이 민족주의를 각성시킨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전까지 체계화되지 못하고 난잡하던 아랍 세계의 그리스 철학 연구에 체계적인 길과 방향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흥미롭게도 토머스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비슷한 내용의 저술도 남겼다.[2]
3. 음악학
철학자로서의 명성이 주로 알려져 있지만 음악가로서도 명망이 높았다. 그가 저술한 <음악대전>은 음악이론에 관한 최고이 아랍어 저작으로 평가되며 서구 음악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여담으로 알 파라비가 음악대전을 사용하면서 사용한 음악 용어 상당수가 소그드어 어휘였다고 한다.4. 여담
자신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 철학자였던 유한나 빈 하일란(Yuhanna ibn Haylan)과 같은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가 활동했던 9~10세기 당시에는 종교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듯 하다. 중세에서 근세까지의 유럽과 중동에서 대부분의 학교가 종교기관의 부속시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시 아바스 왕조 중반기만 해도 중동 사회가 얼마나 개방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창세기전 3에 이 캐릭터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 알 파라비(창세기전 3)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이 쪽은 철학과는 거리가 먼 정치가.
[1] 원래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는 플로티노스지만, 당시 아랍 세계에서 플로티노스 철학 서적을 구하는 것보다 포르피리오스의 저술을 접하는 게 훨씬 쉬웠다. 왜냐하면 티레의 포르피리오스는 서기 3~4세기 당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기독교 비판자라서, 그를 비판하는 기록이 네스토리우스파에도 많이 전승되었기 때문[2] 책 이름은 "이상도시 Al Madina al Fadi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