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항공사진
최근에 복원된 성문
1. 개요
영어 Otrar / Utrar카자흐어 Отырар / Otyrar
고대 튀르크어 𐰚𐰭𐱃𐰺𐰢𐰣
카자흐스탄 남부의 유적. 튀르키스탄시 남쪽에 아리스 강이 흘러드는 시르다리야 강 동안에 있는, 20m 높이의 언덕 (토베)에 위치한다. 카자흐스탄 최고(最古)의 도시 중 하나로, 트란스옥시아나의 정주 문명과 스텝의 유목 문명 간의 경계에 입지한다.
고대부터 호라산과 몽골 및 중국을 잇는 실크로드 교역 도시로 번영허였고, 호라즘 제국기 이곳의 성주 이날축이 칭기즈칸의 사절을 죽이며 몽골-호라즘 전쟁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1220년 몽골 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던 도시는 이후 재건되었으나, 18세기 무렵 버려져 현재에 이른다.
2. 역사
시가지 유적
일대는 두 강의 합류 지점에 펼쳐진 평야와 배후의 카라타우 산지 덕에 고대 강거 유목민이 정착했다. 오트라르 오아시스의 여러 언덕들에는 각각 마을이 들어섰고, 아케메네스 제국 시절 일대는 '관개된 땅'이란 뜻인 파라브라 불렸다.[1] 기원전 2세기 무렵에 강거계 캉글리 (캉가르) 족의 도시 국가가 세워졌고, 투라르반드라 불렸다. 호라산, 소그디아나 및 호라즘과 탈라스, 타림 분지를 이어주는 중계 무역으로 도시는 점차 성장했다.
이슬람 정복 후, 압바스 왕조와 사만 왕조의 지배를 거치며 파라브는 안정기를 맞아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파라브는 자체 동전을 주조했고, 중세 이슬람 사가들이 시가지 규모가 '걸어서 하루 거리''라고 묘사할 정도로 번영했다. 당시 파라브 오아시스 일대에는 성벽이 둘러진 도시 10개와 50여개의 작은 마을이 있었다. 시르다리야 덕분에 파라브는 자체적인 농사 및 과실 수확량은 물론, 어획량 역시 풍부했다. 문화적으로도 번영하여 중세 이슬람권의 대학자 알 파라비가 이곳 출신으로 전해진다.
파라브란 지명은 카라한 칸국이 들어선 후, 점차 튀르크계 지명인 오트라르로 바뀌었다. 13세기 초엽, 오트라르는 당시 카라키타이의 번국이던 카라한 조의 왕공 타즈 앗 딘 빌게 칸이 통치했다.[2] 다만 1211년, 나이만 왕자 쿠출룩이 카라키타이의 제위를 찬탈하며 도래한 혼란기를 틈타 호라즘 왕조의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가 자립하여 영토 확장에 나섰다. 손쉽게 트란스옥시아나 전역을 석권한 그는 각지의 총독들을 측근들로 교체했고, 오트라르에는 저신의 숙부 이날축을 봉하였다. 한편, 축출된 타즈 앗딘은 니사로 보내졌다가 살해되었다.
2.1. 오트라르 공방전 (1219년)
성벽 유적
1218년, 칭기즈칸이 보낸 450인의 몽골 사절단 및 카라반이 통상을 요구하며 호라즘 제국의 국경 도시 오트라르에 당도했다. 칸의 측근인 노얀의 수하 등으로 구성된 그들은 칸의 친서와 함께 금, 은, 비단, 담비 가죽 등 진귀한 물품을 대동하였다. 성주 이날축은 그들을 몽골의 첩자라 규정하고 체포한 후, 술탄의 허가 하에 전부 처형하고 물품을 압수해 부하라에서 팔아버렸다.[3] 이러한 과격 행위의 원인에 대해서는 이날축이 재물을 탐냈거나 사절이 그를 칭호인 가이르 한이 아닌 본명으로 불러 분노했다는 설이 있다.
학살의 도가니에서 낙타 몰이꾼이 도주하여 칭기즈칸에게 보고했고, 후자는 분노를 삼키며 무슬림 1인과 몽골 외교관 2인으로 구성된 사절을 술탄에게 보내 이날축의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술탄은 무슬림 사절을 처형하고, 몽골 관리들에게 수염을 밀어버리는 수모를 준 후 돌려보냈다. 몽골 문화에서 면책 특권이 있는 사절의 처형은 전쟁의 명분이 되기에 충분했고, 초원 유목민들의 주요 경제적 수입원인 중계 무역에 대한 거부는 생존권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4] 마침 카라키타이의 갑작스러운 멸망으로 인한 혼란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명분과 실리 모두에 있어 칭기즈칸이 중앙아시아를 석권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었다.
연이은 모욕에 분노한 칭기즈칸은 금나라 정벌을 잠시 멈추고 알타이 산에서 대군을 모아 호라즘으로 출정하였다. 침공을 예상한 이날축은 방어 시설을 보강하였고, 술탄 무함마드 역시 카라차 휘하의 증원 병력을 더해주었다. 1219년 가을, 5만여의 몽골군은 국경을 넘어 마주한 첫 주요 도시인 오트라르를 포위했다. 칭기즈칸은 두 아들 차가타이와 우구데이에게 지휘를 맡기고는 별동대와 함께 오트라르를 우회, 시르다리야 건너편에 주둔하며 구원에 나설 것이라 여겼던 술탄의 군대를 기다렸다. 만약 술탄의 구원병이 오트라르에 접근하면, 강 건너편에 있던 칭기즈칸의 별동대가 즉시 도하하여 포위군과 함께 그들을 섬멸한다는 전략이었다.
한편, 이날축 휘하 1만 전후의 수비대는 완강히 저항했다. 오트라르는 이후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바로 출격해 회전에서 섬멸되거나 항복하지 않은 채로 계속 버텼다. 술탄이 함정에 빠지길 기다리던 칭기즈칸은 그가 나타나지 않고, 포위가 소모전 양상을 보이자 전략을 수정했다. 점점 약화되던 오트라르를 두 아들들에게 완전히 맡긴 그는 키질쿰 사막을 건너 부하라 기습에 나섰다.[5] 그 직후, 무려 5개월간 이어지던 공성전은 카라차가 야밤에 자신의 직속 병력과 성문을 열고 항복하며 종결되었다. 성에 진입한 몽골군은 보이는 모든 것을 죽였고, 항복한 카라차와 그의 병력에 대해서도 배신자는 수하로 믿을 수 없다며 역시 학살하였다.
배신에 의해서야 결국 성이 함락된 후, 혼란 속에서 이날축은 살아남은 1천여 병사들과 내성 (시타델)에 피신하여 농성하였다. 그곳에서도 무려 한달을 버틴 끝에, 그는 2명의 친위대와 함께 옥상부로 몰렸다. 칭기즈칸이 생포를 명했기에 몽골군은 화살을 쏘거나 불을 지르지 않고 직접 올라갔다. 이날축은 친위대 둘과 함께 벽돌을 던지며 저항했고, 몽골군 여럿을 죽이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친위대가 참살된 후 사로잡혔다. 칸의 명령에 따라 이날축은 눈과 귀에 녹은 은이 부어지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재물을 탐낸 것에 대한 칭기즈칸의 처벌이었을 것이다.
몽골 유목민들이 견고한 요새인 오트라르를 함락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던 술탄 무함마드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고, 오트라르의 함락으로 몽골군에게 고스란히 노출된 트란스옥시아나 도시들이 연달아 함락되며 호라즘 제국은 중앙아시아를 석권한지 10년도 되지 않아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시르다리야 강이 진로를 바꾸며 호라즘 제국의 수도 구르간지는 버려졌지만, 오트라르는 재기할 수 있었다. 다만 관계 시설 등 몽골군에 의한 기간 시설의 대대적인 파괴는 후일 오트라르의 완전한 몰락의 단초가 되었다. 한편, 함락과 파괴 이후 킵차크 칸국 시기부터 오트라르의 폐허에는 금화와 보배가 묻혀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현대의 발굴로 증명되었다.
2.2. 재건과 티무르
티무르가 사망한 곳으로 추정되는 궁전 유적
대부분 버려진 일대의 도시들과 달리, 오트라르 자체는 곧 재건되어 13세기 중반에 이르면 재차 동서 교역로 상의 주요 무역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14세기의 인구는 약 7천으로 추산된다. 1405년 2월에는 명나라 원정에 나서기 위해 당도한 티무르가 감기에 걸려 오트라르의 궁전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