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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5 05:45:18

몽골-호라즘 전쟁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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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칭기즈 칸의 침공4. 잘랄 웃 딘의 등장5. 오고타이 칸의 침공6. 결과 및 영향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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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 제국호라즘 왕조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의 계기가 된 전쟁이다.

2. 배경

칭기즈 칸이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무렵 중앙아시아 쪽에서는 셀주크 튀르크로부터 독립한 호라즘 왕조가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당시 호라즘 왕조의 술탄 알라 웃 딘 무함마드, 즉 무함마드 2세는 동방의 알렉산더, 지상의 알라라고 불릴 정도로 정복 활동을 펼치면서 호라즘 왕조의 영토를 넓히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칭기즈 칸은 서요를 멸망시킨 이후 호라즘과 교역 관계를 맺기 위해 호라즘 영토에 대규모 상단을 파견하였으나 호라즘 영토의 오트라르 성의 주인인 이날추크가 몽골 상단을 모조리 죽이고 재물을 가로채는 사건이 발생한다. (1218년)

이에 칭기즈 칸은 분개하였고 곧바로 무함마드 2세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이날추크를 처벌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무함마드 2세는 요청을 들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사신들 중 일부는 처형시키고 나머지 일행은 수염을 깎아 몽골로 돌려보낸다. 칭기즈 칸은 이것이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한 행위로 여기고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호라즘 원정을 단행한다.

3. 칭기즈 칸의 침공

1220년 칭기즈 칸은 대략 15만 이상의 군대를 직접 이끌고 호라즘 왕조로 진격하여 군대를 4개의 진영으로 나누는데 먼저 칭기즈 칸은 툴루이와 함께 본대를 이끌고 부하라를 공격하고 나머지 부대는 각각 오트라르(現 카자흐스탄 Отырар) 등의 호라즘의 주요 도시를 공격하여 무너뜨린 다음 호라즘의 수도인 사마르칸트에서 집결하는 작전을 세운다. 병력의 수는 호라즘이 40만 정도로 우위였지만, 당시는 호라즘이 영토 정복을 끝난지 얼마 안되었던 시기여서 각 지방에서 반란위험이 적지 않았고 결국 몇 군데에 병력을 분산시켰고, 이것이 호라즘의 참패에 큰 원인이 되었다.

당시 무하마드 2세 입장에서는 병력도 많았고, 자신의 영토에서 싸운다는 이점도 있었으며, 오트라르를 넘어 아무다리야 강 사이에는 키질쿰 사막이라는 거대한 자연 장벽이 있었기 때문에, 몽골군의 소집과 진격속도를 오판하고, 회전 대신 몽골군이 전열을 정비할 때까지 각 중요 거점방어를 강화하는 선택을 했다.

칭기즈칸은 몽골군을 4개 부대로 나눈 후 주요 부대를 아들들에게 맡겼다. 우군은 장남인 주치가 지휘하고, 좌군은 2남인 차가타이와 3남인 오고타이가, 중군은 칭기즈칸 자신과 4남인 툴루이가, 별동대는 제베가 이끌었다. 칭기즈칸은 두 방향으로 부대를 나누어 우군은 호라즘의 북부지역을 향하는 준가리아 지역의 알라타우(Ala-Tau) 산맥 사이의 골짜기를 넘었고, 다른 한 부대는 위구르를 지나 투르키스탄 북쪽 천산 산맥을 빠르게 돌파하여 본대에 합류했다.

일단 오고타이와 차가타이가 현 카자흐스탄 지역의 오트라르를 포위했다. 수 개월간의 포위 끝에 오트라르를 떨어트린 후, 많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예로 삼았으며 사건의 기폭제가 되었던 이날추크를 처형했다.

이 때 징기스칸의 맏아들인 주치는 현 우즈베키스탄 북부 지역에 위치한 호라즘 북부의 거점 도시들을 점령하면서 우르겐치 방향으로 진격하였고, 다른 진영의 부대는 현 타지키스탄후잔트 부근에 있었던 도시인 파나카트를 점령한다. 다만 이 때 주치와 다른 형제들간의 갈등이 있었는데, 주치는 가급적 수비수들과 협상을 하면서 도시의 최대한 많은 부분이 손상되지 않도록 항복을 유도했지만, 차가타이는 우르겐치가 주치가 향후 분봉받게 될 주치울루스[1]에 속한것을 의심하면서, 제대로 공략하지 않는다고 주치를 깠다. 이후 오고타이가 주치 대신 사령관에 임명되어 도시를 함락시켰는데, 이러한 형제들 사이의 갈등으로 주치와 다른 형제들 간 긴장관계가 조성되었지만, 징기스칸의 봉합으로 그럭저럭 넘어가게되었다.

한편 툴루이와 같이 본대를 이끄는 징키스 칸은 호라즘의 중심부를 공략하기 위해 아주 기막힌 수를 쓰는데, 바로 사막을 건너는 것이였다., 결국 무려 460km(!)나 되는 키질쿰 사막을 건너서 부하라 이북 지역까지 우회에 성공했고, 결국 부하라도 징키스칸이 점령하게 된다. 물론 그냥 무작정 사막을 돌파한 것은 아니고, 오아시스 위치 등 사막 지리에 능한 길잡이들을 포섭해 비교적 안전한 경로로 이동한 것이긴 하지만, 결코 일반인의 상상력으로는 이뤄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후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포위하고 외곽의 방어진지를 하나하나씩 점령해 나갔다. 이 때 징기스칸은 테르켄 하툰이나 무함마드 2세의 이름으로 가짜 법령 가짜뉴스??을 반복적으로 발표하여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고, 이미 분열된 호라즘군 지휘 구조를 더욱 엉키게 했다. 무함마드 2세는 공성전 중에 두 차례 구원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단 11일 만에 사마르칸트가 함락되었다. 무함마드 2세는 간신히 도주하는데 성공했지만., 징키스칸은 그를 추격하기 위해 제베수부타이에게 병사를 2만명 준다. 이들은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카스피해 인근 지역의 여러 도시를 갈아버리면서 진군했다.

무함마드 샤는 추격의 공포 속에서 매일매일을 살다가, 결국 카스피해의 외딴 섬에서 죽게 된다.

4. 잘랄 웃 딘의 등장

그리고 알라 웃 딘의 뒤를 이은 사람은 장남 잘랄 웃 딘이었는데 잘랄 웃 딘은 군대를 수습해 몽골 제국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 호라즘의 옛 수도인 우르겐치로 입성하여 재기를 꾀하나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할 뻔하여 우르겐치에서 탈출한다. 탈출 이후 잘랄 웃 딘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모아 나름대로 군대의 규모를 늘리기 시작한다. 이 소식을 들은 칭기즈 칸은 자신의 의제 시키 코토코에게 3만의 군대를 주어 잘랄 웃 딘을 치게 한다.

그러나 잘랄 웃 딘은 파르완에서 시키 코토코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 3만을 전멸시키면서 몽골 제국군에게 호라즘 원정에서 첫 패배를 안겨준다. 이를 기점으로 몽골 제국에게 점령당했던 일부 도시에서 몽골 제국군에 대한 저항이 벌어지게 된다. 이 저항으로 인해 몽골 제국군은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차가타이의 장남인 무투겐이 전사하고 칭기즈 칸의 사위까지 전사하는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칭기즈 칸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저항하는 여러 호라즘의 도시들을 정벌하고 곧바로 잘랄 웃 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칭기즈 칸이 잘랄 웃 딘을 침공하는 시각에 잘랄 웃 딘은 파르완 전투 이후 휘하 장수들의 반목으로 인해 군대를 재정비하는데 실패하여 일부 군대가 이탈하는 전력 약화를 겪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서자 호라즘 군대는 다시 밀리기 시작하면서 결국 인더스 강 방면까지 후퇴한 끝에 군대를 재정비하여 몽골 제국군과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잘랄 웃 딘은 분전하여 숫적으로 우세한 몽골 제국군을 오히려 밀어붙여 잠시나마 우세를 꾀하지만 칭기즈 칸이 별동대를 호라즘 군의 측면에 투입시키면서 전세는 역전되고 호라즘 군대는 전멸당하고 잘랄 웃 딘은 거센 추격을 피하면서 인도 방면으로 도주하는 데 겨우 성공한다.
잘랄 웃 딘이 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은 그를 추격하지 않고 남은 호라즘의 영토를 점령하는 데 신경을 썼고, 결국 잘랄 웃 딘은 인도로 달아나는 데 성공해, 델리의 델리 술탄 왕조의 술탄 일투트미쉬에게 의탁하고 있었다.

1224년 칭기즈 칸이 몽골 고원으로 귀환하자 이를 틈타 이스파한으로 귀환하여 이후 이란 북부에 있는 타브리즈를 근거지로 삼고 호라즘을 재건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이 서하 원정 중 병사하면서 차기 카간 계승 문제와 금나라와의 전쟁에 집중하면서 중앙아시아 쪽에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잘랄 웃 딘은 순조롭게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잘랄 웃 딘의 세력 확장에 경계를 하던 룸 셀주크 왕조와 아이유브 왕조와 대립하던 끝에 1230년 에르진잔 전투에서 룸 셀주크-아이유브 연합군과 맞서게 되나 대패하면서 세력이 약화된다.

5. 오고타이 칸의 침공

게다가 몽골 제국의 카간에 등극한 오고타이 칸이 보낸 초르마간 노얀의 몽골 군대까지 등장하면서 결국 잘랄 웃 딘은 몽골 군에 의해 캅카스 지방으로 도주하였고 이후 여러 산속을 전전하다가 1231년 그에게 가진 원한을 가진 쿠르드인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잘랄 웃 딘이 죽은 이후 몽골 군은 호라즘 왕조의 옛 땅의 지배권을 확립하면서 이렇게 호라즘 왕조는 1231년 완전히 멸망한다.

6. 결과 및 영향

몽골-호라즘 전쟁은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먼저 몽골 제국은 호라즘 왕조가 지배하던 중앙아시아 지역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고 동서 무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세계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또한 기존에 갑옷 착용 비율이 그렇게까지 높지 않았던 몽골 제국군이 갑옷으로 무장한 호라즘 왕조 군사들과의 싸움을 계기로 갑옷 착용 비율을 늘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 몽골 제국 갑옷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타입이 몽골-호라즘 전쟁을 기점으로 완성된 셈이다.

반면 호라즘 왕조가 멸망하면서 호라즘의 통치 아래 무역으로 번창하던 중앙아시아 지역은 몽골 제국의 파괴 행각으로 인해 쇠퇴하게 되면서 현대까지 그 후유증이 남아있다.

이 전쟁은 유럽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무함마드 2세를 추격하던 제베와 수부타이의 3만 별동대가 몽골 평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지아 왕국이 갈리고, 러시아군을 전멸시키고 온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10여 년 뒤 유럽 러시아 지역이 몽골 손에 떨어지게 되고 무려 200여년간의 통치를 받게 된다. 즉 한 술탄의 잘못된 행보가 러시아와 조지아 등 다른 나라를 고생시킨 것이다.

7. 여담



[1] 몽골의 관습에 따라 정복한 가장 먼 지역이 장남에게 분봉될 예정이었다.[2] 비명의 도시, 혹은 슬픔의 도시라는 뜻으로, 징기스칸이 아끼던 손자 무투겐이 이곳에서 전사했고, 이에 보복으로 징기스칸은 도시에 남은 모든것을 없애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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